[新너더리통신 33/170727]‘임금님의 일기’ 들어보셨지요?
나이 아홉 살의 왕세손(정조 이산)이 스스로 일기(日記)를 쓰기 시작했다. 진작 논어(論語) 등 4서 공부는 시작됐을 터(보통 네 살때부터 가르치기 시작한다). ‘오늘은 누구에게 배웠고, 옆에 누가 있었다’ ‘할아버지(영조)가 무엇을 시켰다’ 등등등등, 맨처음 일기는 1760년(영조 36년) 1월 1일 정미일. 물론 전부 한자로 기록됐으니, 이렇게 시작된다. ‘庚辰 正月 初一日 丁未 講學于謹獨閤’ ‘근독합에서 배웠다’가 전부이지만, 이게 어디인가? 그렇게 쭉 일기를 써오다 ‘문제의 1762년 윤5월 13일’이 닥쳤다. 무슨 날인가? 세자가 뒤주에 갇힌 날이다. 21일 탈진하여 죽었다. 세손의 아버지는 폐세자가 되어 수은묘에 묻혔다. 아들을 죽인 아버지 영조(조선 임금 중 최장수․52년 최장 재위)는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세손은 25세에 임금이 되어 맨처음 한 말이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했다던가(경희궁 숭정문에서 등극했다). 현재의 연건동 서울대병원자리에 아버지 사당 ‘경모궁(景慕宮)’을 짓고 한 달에 두 번씩 찾아 그리워 했다던가. 시호를 ‘장헌(莊獻)’으로 올려 장헌세자가 됐다. 풍수를 배워 아버지 묘를 ‘현륭원’으로 승격시키고 명당 수원으로 천장했다. 그토록 원하던 왕으로의 승격은 200년 가까이 더 기다려야 했다. 정조의 손자인 효명세자(구르미 그린 달빛에 나온 박보검이 효명세자이다. 22살에 요절했다. 부인이 신정왕후 조씨)의 양자로 입적한 고종이 4대 양(養)고조부인 장헌세자를 ‘장조(莊祖)’로 추숭하여 비로소 왕이 되고 ‘융릉(隆陵)’이 되었다. ‘모태효자(母胎孝子)’ 정조는 죽어서도 아버지 아래에 묻혔다. 하여 ‘융건릉’, 부자(父子)는 무슨 얘기를 나눌까?
지금도 생각난다. 드라마 ‘이산’에서 11살 세손이 할바마마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아바마마를 살려달라’고 애걸하던 장면. 영조는 냉정했다. “세손이 상관할 일 아니다. 들어가 있으라” 이산은 어린 나이에 엄청난 상처를 받았다.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여 호학군주(好學君主)가 되기까지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다. 오죽했으면 두 달 동안 일기 한 장을 못썼으랴. 그러나 놀랍게도 두 달 후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마음속으로 단단히 결심했을 것이다. ‘어떻게든 할바마마 눈에 들어 이 나라 임금이 되어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리라’. 슬픔을 삭이고 천연덕스럽게 행동해야 했다. 삐긋하면 폐세손 되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 칼날 위를 걷는 심정이었으리라. 절치부심(切齒腐心) 와신상담(臥薪嘗膽) 14년. 그야말로 목숨을 보전해야 하는 세월이었다. 칼을 휘둘고 말을 달리고 활을 쏘았다. 최초로 문무(文武)를 겸비한 왕은 살기 위한 고독한 선택이었다.
오죽했으면 이 시기를 배경으로 드라마 15편, 소설 5편, 뮤지컬 1편이 만들어졌을까? ‘영원한 제국’(이인화 작)은 영화로도 제작됐다. 수많은 음모와 사건사고들, 동궁전 지붕에서 자객이 뛰어내리기도 했다. 한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조선임금 중 유일하게 문집(文集)이 있는 것도 그였다. 놀라워라! 홍재전서(弘齋全書) 100책이, 주서백선(朱書百選)이 그의 산물(産物)이었다. 세종대왕과 버금가는 애민군주(愛民君主), 호학군주였다. 할아버지 눈에 들기 위하여 승정원일기 속의 아버지 관련 기록들을 모두 지워달라고 했다. 영화 ‘사도’에서 보았으리라. 세검정 너른바위에서 세초(洗草)하던 장면. 그래서 승정원일기에는 ‘그때의 일(임오화변)’이 한 줄도 없다. 임금이 되어서도 일기를 계속 썼다. 세손때 일기의 제목은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였다. 몇 년 후 국사(國事)에 파묻혀 일기를 쓸 수 없게 되자, 규장각 검서관들에게 대신 쓰게 했다.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홍이수 등 국사책에서 이름을 들어봤으리. 모두 서얼출신이다. 재주야 쟁쟁했지만, 출신신분에 막혀 아무것도 못하던 이들을 정조는 과감하게 규장각 각신으로 등용하고, 자기의 일기도 대필케 했다. 초등학교때 담임선생이 일기장을 검사하듯이 5일마다 제출하게 하고 한 달에 2책씩 묶었다던가.
임금의 일기이니 만큼 모든 글의 주어는 임금 자신이었다. 후대 왕들도 선대왕이 해온 것이어서 그대로 답습했을 것이다. 151년간의 기록은 2,328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글자수 4800만자. 국왕의 동정과 국정의 기록, 더 나아가 승정원일기 속에 없는 장계, 상소, 상언과 격쟁, 사신견문록 등도 수록돼 있다. 어찌 이런 일이? 세계 어느 나라에 임금의 이런 기록들이 존재할까? 유네스코는 당연히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당연히 국보 153호.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그 다음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기인 ‘안네의 일기’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는 신하들이 쓰는 것이므로 당연히 ‘上曰-’(임금이 말씀하시길-)이었지만, 이 일기는 ‘予曰-’(여왈)이었다. ‘내가 말하길(予는 ‘나 여’자이다)’이었다. 필사본. 한지(韓紙)에 붓으로 쓴 것이고, 당연히 유일본이다. 이름하여 ‘일성록(日省錄)’이다. 일성(日省)은 하루를 반성한다는 뜻. 맨먼저 생각나는 것은 논어에 나오는 증자의 ‘일일삼성오신(一日三省吾身)’. ‘일성록 서(序)’에서도 밝혔듯이 ‘날마다 세 가지로 내 몸을 살핀다’와 ‘날마다 몰랐던 것을 알아가며 달마다 능한 것을 잊지 않는다’고 한 자하(子夏)의 말에서 취한 것이다. 책 이름을 지은 취지가 분명하다. 역시 정조(正祖)이고 정조답다.
이 일기는 놀랍게도 나라가 망하는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 그날까지 기록되어 있다. 물론 모두 신하들이 대필(代筆)한 것이지만. 마지막 날의 일기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너무 궁금했다. 27대 임금인 순종이 비장하게 말씀하셨다. “짐이 부덕으로 크게 어려운 국가의 일을 계승하여 임금이 된 이래로 오늘에 이르도록 유신정령에 관하여 속히 도모하고, 준비하여 용력이 미친 적이 없었으되, 이래로 국력이 약해진 것이 고질병이 되었고 피폐한 것이 모든 곳에 이르러서 시일 간에 만회할 조치를 바랄 수 없으니 한밤중에 걱정해 보지만 마무리 잘할 계책이 망연하다.” 당시는 국한문혼용체.
순종의 유시(諭示)를 마저 들어보자. “이에 임하여 지리멸렬함이 더욱 심하면 종국에는 수습을 할 수 없기에 스스로 망할진대 아무 탈 없이 대임을 남에게 맡겨 완전할 방법과 혁신할 공효를 아뢰게 함만 못한 고로 짐이 이에 두려워 안으로 살피고 확연히 스스로 결단하여 이에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신하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를 하여 (…) 각기 그 업(業)을 편안히 하여 일본제국 문명신정을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누리라.” 대일본황제 폐하에게 양여를 했으니, ‘문명신정을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누리라’고 한다. 이런 젠장!
그 일성록을 한국고전번역원이 1998년부터 번역을 시작했다. 2015년에야 정조대 일기를 모두 완역했다. 번역률 38%, 현재는 그의 아들 순조대 기록을 번역하고 있다. 흥미진진한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궁금하시면 번역원 홈페이지(www.itkc.or.kr)의 ‘한국고전종합DB’를 보시라. 현재까지 번역된 일성록의 원문, 원문이미지, 번역문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번역원은 완역․완간(모두 182권)을 기념하여 학술대회를 열었다. ‘정조와 일성록’, 더 나아가 ‘후대 임금들과 일성록’이 오늘날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청와대에서 속속 발견되는 이명박․박근혜 관련 문건들은 무엇인가?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바보이다. 바보 노무현은 ‘좋은 바보’였지만, ‘이명박근혜’는 참으로 ‘나쁜 바보’였던 것같다. 모두 우리가 만든 대통령이었지만(민주주의의 맹점이 아닐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오직 가슴이 답답할 따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