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스승 정성껏 모시고
제자에게 곡진한 사랑
“묵화 완성이 성불…”
“먼지 똥통 뒹굴지언정
사람 집 돌아가지 않으리”
불화삼매(佛畵三昧) 거닐면서도
그마저 초월한 ‘금강산 장로’
석정스님은 1928년 강원도 고성군 외금강면(당시 신북면) 창대리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당시 금강산 도인이라 일컫는 석두(石頭)스님이고 어머니는 당대의 신여성인 이춘봉(李春鳳)여사다.
석정스님은 세 살 때 어머니에게 천자문을 배우고 금강산 인근 절에서 불화를 보고 그리기 시작했다. 다섯 살 때는 불상을 보고 흙과 나무로 불상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열세살 때 송광사에서 득도했다. 은사는 석두스님, 계사는 대우(大愚)스님이시다. 열네 살 때 불모 김일섭스님을 스승으로 불화를 익혔다.
한편, 스님의 일대기가 무현스님을 비롯한 후학들에 의해 곧 출간된다고 한다. 당신의 생생하고 자세한 일생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어 기대가 크다. 석정스님은 제10회 행원문화상 예술상(2001년), 대한민국 문화 훈장 보관(2007년)을 받았다. 주요 편저로는 <선주산고>, <선게만역>, 한국의 불화 초본, 내가 좋아하는 선게(禪偈), <선주여묵> 등이 있다.
석정(石鼎)스님(1928~2012)은 일생을 불모(佛母)로서 한국 전통불화를 계승 발전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여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18호 불화장(佛畵匠)으로 지정 받은 분이다.
스님은 부모님에 대한 효심도 지극했으며 불화의 스승을 기리는 일에도 제자로서 성심을 다했다. 부모와 스승에 대한 정성 못지않게 당신 제자에게 베푼 사랑도 곡진(曲盡)했다. 불모의 일에 열성을 다하면서도 출가본연의 구도정진에도 게을리하지 않고 기도와 참선수행으로 스스로를 다져나갔다. 종단의 주요직인 중앙종회의원과 주지를 맡아서도 이(理)와 사(事)를 원융하게 하여 사심(私心)없이 맡은 바를 다하였다.
스님은 또한 선서(禪書)와 선화(禪畵)의 정의를 명백하게 밝혔다. 스님은 생전 당신의 열반 후 법구를 동국대 경주병원에 기증토록 해 여느 스님과 다른 모습을 보이셨다.
석정스님이 당신 그림에 석정, 돌 석자(石), 솥정(鼎)자를 쓰고 석삼(三) 즐거울 락(樂), 아들 자(子) 삼락자라 호를 쓰는데 대해 어느 때 당신 상좌인 수안스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수안스님은 절에 살면서 정진하는 낙(즐거움)을 일러주는 것이 아니겠느냐 했다. 솥은 발이 세 개다. 솥은 음식이나 물을 끓이는 도구다. 계정혜(戒定慧) 삼학이 있듯 열화 같은 구도열에 발 하나라도 없으면 제 구실을 못하는 솥처럼 굳건한 신심으로 중노릇 잘하라는 뜻이 아니겠느냐고 나름대로 짐작한 필자에게 수안스님의 말은 엉뚱하다할 정도로 간단명료했다.
“스님은 중이 된 걸 즐거워하셨고 머리 깎는 것을 즐거워 하셨으며 국수 잡수시는 걸 그렇게 좋아하셨다.”
절각겸무저(絶脚兼無底) 풍상열역다(風霜閱歷多)/ 장쇄효풍냉(長灑曉風冷) 상간야월화(常看夜月華)/ 가취만호반(可炊萬戶飯) 능전천강다(能煎千江茶)/ 진퇴분혈리(塵堆糞穴裡) 서불반인가(誓不返人家)
발도 꺾이고 밑도 빠져 온갖 풍상 다 겪었으나/ 늘 새벽바람에 싸늘하고 항상 저녁 달빛에 반짝인다/ 일만 집의 밥 지을만하고 천강의 물도 끓일 수 있네/ 먼지나 똥구멍에 뒹굴더라도 사람 집에는 맹세코 돌아가지 않으리
자화상(自畵像)이라는 화제(畵題)에 쓰여있는 글이다. 무진(戊辰) 국추(菊秋) 삼락자(三樂子)라 했으니 서기 1988년 가을이다. 당신이 회갑을 맞은 해다. 한 노승이 안경을 쓰고 오른 손에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그림 제목과 시, 노승의 모습에서 석정스님의 본지풍광(本地風光)을 엿볼 수 있다.
스님은 전국 각지의 절에 셀 수 없이 많은 작품을 남겼다. 불화는 불교에 관한 그림, 예배의 대상으로 그린 그림을 일컫는다. 흔히들 탱화라 하여 산신이나 신중, 관세음보살, 달마도 등으로 알고 있는 그림이다. 석정스님은 그림만 아니라 불상도 조성했다. 탱화불사와 소조(塑造) 불사에 대한 스님의 열정은 평생토록 식지를 않았다. 스님의 불화불사는 기도정진과 참선수행을 겸비하는데서 이루어졌다.
1946년 19세 때 스님은 남한으로 내려와 남원 백우암에서 조주 무(無)자 화두를 들고 동안거를, 47년에는 해인사에서 가행정진을 했다. 이후 불화 불사를 맡아 가는 곳마다 불사와 참선수행을 함께 했다. 1959년 석정스님은 부산에서 운여 김광업 선생을 만난다. 운여 선생은 평양의전 출신으로 6·25 전쟁 때 남한으로 내려와 부산에서 대명안과의원을 열고 있었다. 석정스님은 “전각에도 빼어나고 서화가이며 서화감식 안목이 뛰어난 운여 선생을 만나 묵화의 안목과 필력이 더욱 향상됐다”고 말한바 있다. 스님은 당신 제자인 수안스님과 무용(無用)스님을 운여 선생에게 보내 전각과 서화를 익히도록 했다.
1964년 스님은 통도사로 거처를 옮겼다. 후배를 양성할 목적이었다. 통도사 노전에는 당신의 첫 상좌인 인법(印法)스님을 비롯해 무주(無住)·수안(殊眼)스님과 불화 제자 수만(修滿)스님이 함께 살았고 사명암에서 무문(無門)·무현(無玄)스님 등이 살았다. 스님은 이 때 통도사 사천왕문을 제자들과 함께 보수했다. 사천왕문의 천왕상은 6·25 때 통도사를 육군병원으로 사용하면서 군인들이 함부로 해서 보수해야 했다. 1966년 스님은 밀양 표충사 주지를 맡게 됐다. 그해 늦가을부터 스님은 평소 보아둔 터에 토굴을 짓기 시작했다.
건축재목은 외부에서 구입했고 비용은 수안스님과 함께 일 년 동안 불사해서 모은 돈과 혜각(慧覺)·광덕스님의 경제적 협조로 충당했다. 그 토굴이 한계암이다. 이듬해 3월 스님은 표충사 주지직을 내놓았다. 한계암 입주를 앞두고 스님은 불화와 초본(草本, 밑그림) 채색 일체와 필묵 등 도구와 화첩을 화제(畵第)·복래(福來)스님에게 넘겨주었다. 당신이 직접 그린 초본은 모두 태워버리고 토굴에 입주해 안거 정진했다. 스님과 함께 한 상좌 수안스님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쌀이 떨어져 굶어죽게 돼도 좋다. 공부하다 죽자는 비장한 마음으로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석정스님은 한계암 토굴에서 한 경계를 얻고 게송을 읊었다.
조유산색리(朝遊山色裏) 모와수성중(暮臥水聲中)/ 창전조어난(窓前鳥語亂) 경기일륜홍(驚起日輪紅)
낮에는 산 경치 속에서 노닐다가 밤에는 물소리 들으며 잠드네/ 창밖에 새소리 요란해서 일어나 보니 해가 벌써 중천에 떴네
이 때가 1967년, 스님의 나이 40세 때였다. 스님은 한계암에 있으면서 ‘참선하면서 공부와 병행할 수 있는 그림이 무엇일까?’를 궁리하다가 묵화(墨畵) 밖에 없다고 생각해 원상(圓相)을 그리게 됐다. 이후 달마, 한산습득, 심우도 등을 그렸다. 스님은 “그동안 인연 따라 수많은 작품을 나누어 주었지만 스스로 생각할 때마다 나의 작품은 미완성이다. 나의 먹그림(묵화) 완성은 견성성불하는 날이라 생각해본다. 나의 먹그림이나 글씨에 스승으로 삼고 싶은 분들을 들라면 우리나라의 서산·경허·한용운·백학명스님, 추사 김정희·운여 선생 등이며 중국 남송대의 선승화가 양해(梁楷)·팔대산인(八大山人)·소동파·회소(懷素) 등을 꼽을 수 있고 일본의 백은(白隱)·선애(仙崖)선사·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를 거울로 삼고 싶다”고 했다.
한계암에서 용맹정진을 함께 한 수안스님은 스승의 회갑을 기념해 석정스님 시화집 ‘선주여묵(善住餘墨)’을 1권 펴냈고 상좌 무현(無玄)스님은 스승이 벌이는 ‘한국의 불화’ 책 불사 기금을 내놓았다. 석정스님은 이를 바탕으로 범하(梵河)스님(전 통도사성보박물관장)에게 책 발간 준비 책임을 맡겨 불사를 시작했다. 범하스님은 이 인연으로 석정스님의 참회상좌가 됐다. ‘한국의 불화’는 1989~2007년에 걸쳐 40권에 3156점을 수록, 발간했다. 범하스님은 스님의 칠순을 기념해 서화집을 만들자는 뜻을 내어 1996년 석정 시 문집과 석정 서화집을 각 1권 씩 2권으로 출간해 ‘한국의 불화’ 발간 모금에 큰 도움이 됐다.
석정스님은 2012년 12월20일 오후11시52분 1976년부터 머물던 부산 동래구 장전동 선주산방(善住山房)에서 입적했다.
도움말과 자료제공: 수안스님, 무용거사
![]() | ||
짙은 사랑으로 세상을 품은 스승
스님은 선화 선서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일러주었다. 첫째 선장선화(禪匠禪畵)이니 선사나 선을 위주로 하는 이의 여기서화(餘技書畵)를 말한다. 번개같이 번득이는 지혜의 관찰력으로 사물을 직관하고 선수양으로 다듬어진 맑은 먹과 날카로운 붓으로 그리거나 쓴 것이다. 이는 그대로 자화상이요 말없는 설법이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망상을 쉬게 하고 도에 들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둘째 서화인선묵(書畵人禪墨)이다. 글씨나 그림을 선생에게 배우거나 고서화를 보고 법을 익혀 작가가 된 뒤에 부지런히 갈고 닦아 익힌 법을 초월하고 기량을 벼려 온갖 망상이 사라지고 무위무작의 경지에 들어간 이를 말한다. 셋째 일반선묵이다. 정치가 학자 검도 기도(碁道) 다도 등 한 가지를 전공한 이들의 여기서화(餘技書畵)를 말한다.
석정스님은 당신의 친 아버지이자 은법사인 석두(石頭)스님을 기려 평생도반 서경수 교수(전 동국대 인도철학과)에게 부탁해 석두화상 비문을 짓게 했다. 이 비문은 한글로 썼으며 통영 미래사에 세워져 있다. 스님은 또한 석두스님의 비문을 쓰고 달마 측면상을 그려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소장케 했다.
석정스님과 제자간의 깊고 짙은 사랑은 널리 알려져 있다. 환속한 상좌 무용스님이 2000년 9월 부산 동래에서 아트갤러리를 열었다. 개관을 즈음해 석정스님은 초대의 말을 이렇게 썼다. “무용군은 사랑하는 나의 상좌요 아끼는 나의 제자입니다. 타고난 예술적 바탕이 차차 드러날 무렵 나의 불화 그리는 것이 간접적으로 도움이 됐고 서예 전각의 대가인 운여 김광업 선생을 만나면서 서예 전각에서 그림에 까지 크게 발전하더니 그것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개척했습니다.”
[불교신문3181호/2016년3월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