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포 가는 길」 자세하게 읽기 / 이훈
1. 길과 집(고향)
「삼포 가는 길」(1973)은 제목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길 위에 서 있는 세 사람의 얘기를 들려 주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영달과 백화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시작 부분에서부터 독자는, 새벽의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어디로 갈지를 생각하는 주인공을 만난다.
*************
영달은 어디로 갈 것인가 궁리해 보면서 잠깐 서 있었다. 새벽의 겨울 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밝아 오는 아침 햇볕 아래 헐벗은 들판이 드러났고, 곳곳에 얼어붙은 시냇물이나 웅덩이가 반사되어 빛을 냈다. 바람 소리가 먼데서부터 몰아쳐서 그가 섰는 창공을 베면서 지나갔다.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수십여 그루씩 들판가에서 바람에 흔들렸다.(황석영, 「삼포 가는 길」, <<객지>>, 창작과비평사, 1974, 258쪽./ 황석영, <<삼포 가는 길>>(황석영 중단편 전집 2권), 창작과비평사, 2000, 200쪽.)
****************
영달은 정처없는 뜨내기다. 이러한 처지는 ‘창공을 베면서’ 부는 매서운 겨울바람, ‘헐벗은 들판’이나 ‘얼어붙은 시냇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등에서 충분히 알아볼 수 있다. 한마디로 겨울이라는 시간은 영달이 걸어갈 곳이 쉬운 길이 아니라는 점을 예고하고 있다. 그런데 영달뿐만 아니라 다른 두 인물도 모두 있던 데서 떠나 고향이나 일할 곳을 찾아간다는 점에서 ‘뜨내기 신세’인 것은 마찬가지다.
*************
백화가 걸음을 빨리하며 내쏘았다.
“제따위들이 뭐라구 잡아가구 말구야. 뜨내기 주제에.”
“그래 우리두 너 같은 뜨내기 신세다. 찬샘에 잡아다 주고 여비라두 뜯어 써야겠어.”
영달이가 여자의 뒤를 바싹 쫓아가며 농담이 아님을 재차 강조했다.(269/ 214-5)
**************
그런데 이들은 끝까지 집에서 편안하게 살지 못한다. 늘 길 위에 있다. 이 점은 마지막에서 잘 드러난다. 정씨가 찾아가는 고향은 마음에 그리던 곳이 아니었다. 이른바 산업화의 바람이 그곳에서도 어김없이 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고향을 잃어버렸다.
*************
작정하고 벼르다가 찾아가는 고향이었으나, 정씨에게는 풍문마저 낯설었다.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영달이가 말했다.
“잘 됐군. 우리 거기서 공사판 일이나 잡읍시다.”
그때에 기차가 도착했다. 정씨는 발걸음이 내키질 않았다. 그는 마음의 정처를 잃어버렸던 때문이었다. 어느 결에 정씨는 영달이와 똑같은 입장이 되어 버렸다.
기차는 눈발이 날리는 어두운 들판을 향해서 달려갔다.(276-7/ 225)
**************
고향을 찾아가는 백화도 비슷한 처지다. 열여덟에 가출하여 3년이 흐르는 동안 “쓰리게 당한 일이 많”은(270/ 217) 그녀는 ‘밤마다 내일 아침엔 고향으로 출발하리라 작정하’지만 대체로 ‘마음뿐’이고, 정작 고향으로 가 보자고 나서도 근처에만 맴돌다 온다.
**************
“밤마다 내일 아침엔 고향으로 출발하리라 작정하죠. 그런데 마음뿐이지, 몇 년이 흘러요. 막상 작정하고 나서 집을 향해 가보는 적두 있어요. 나두 꼭 두 번 고향 근처까지 가 봤던 적이 있어요.”(269-70/ 216)
*****************
이번의 귀향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설사 고향에 성공적으로 발을 들여놓았다고 해도 정착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영달의 확신에 찬 발언과 경험이 많은 정씨의 수긍이 이런 짐작의 타당성을 높여 준다.
****************
영달이가 혼잣말로
“쳇, 며칠이나 견디나.......”
“뭐라구?”
“아뇨, 백화란 여자 말요. 저런 애들...... 한 사날두 시골 생활 못 배겨나요.”
“사람 나름이지만 하긴 그럴 거요. 요즘 세상에 일이 년 안으루 인정이 휙 변해 가는 판인데......”(275-6/ 224)
********************
그런데 왜 이들은 고향을 찾아가는 걸까? 물론 그곳을 떠나온 후의 삶이 성공적이지 못하고 신산스럽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고향에서 잘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씨는 고향 삼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
“사람이 많이 사나요, 삼포라는 데는?”
“한 열 집 살까? 정말 아름다운 섬이오. 비옥한 땅은 남아 돌아 가구, 고기두 얼마든지 잡을 수 있구 말이지.”
영달이가 얼음 위로 미끄럼을 지치면서 말했다.
“야아 그럼, 거기 가서 아주 말뚝을 박구 살아 버렸으면 좋겠네.”(263/ 206-7)
**********************
누구보다도 정씨 자신이 고향이 풍요한 곳이라는 것이 사실과 크게 어긋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실제의 세계를 상상의 세계로 바꿔 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집을 떠난 다음의 삶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이들이 상상하는 집은 무엇보다도 따뜻한 인정이 흐르는 곳이다.
********************
세 사람은 감천 가는 도중에 있는 마지막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 어귀의 얼어붙은 개천 위로 물오리들이 종종걸음을 치거나 주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마을의 골목길은 조용했고, 굴뚝에서 매캐한 청솔 연기 냄새가 돌담을 휩싸고 있었는데 나직한 창호지의 들창 안에서는 사람들의 따뜻한 말소리들이 불투명하게 들려 왔다.(271/ 217)
***************
불이 생기니까 세 사람 모두가 먼 곳에서 지금 막 집에 도착한 느낌이 들었고, 잠이 왔다. 영달이가 긴 나무를 무릎으로 꺾어 불 위에 얹고, 눈물을 흘려 가며 입김을 불어 대는 모양을 백화는 이윽히 바라보고 있었다.
“댁에...... 괜찮은 사내야. 나는 아주 치사한 건달인 줄 알았어.”(271-2/ 218-9)
***************
바로 위의 것은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가운데 하나라고 할 만하다. 인간의 이상이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집에서는 이처럼 사람들의 ‘따뜻한 말소리’가 들리고 걱정 없이 피곤한 몸을 뉘일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사람들은 거기에서 서로 이해하고 믿을 수 있게 된다. 고향과 연관하여 공동체적인 윤리를 표상하는 “하늘”(276/ 225)이나 “인정”(276/ 224)이 거론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여기서 노인이 하나같이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
눈이 찰지어서 걷기에는 그리 불편하지 않았고 눈보라도 포근한 듯이 느껴졌다. 그들의 모자나 머리카락과 눈썹에 내려앉은 눈 때문에 두 사람은 갑자기 노인으로 변해 버렸다.(266-7/ 212)
****************
이렇게 정씨와 영달이 ‘노인으로 변할’ 뿐만 아니라 노인들은 결정적인 대목에서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첫째 노인은 갈림길에서 길을 안내해 줌으로써 두 남자와 백화를 만나게 하고, 둘째 노인은 삼포가 옛날과 사뭇 달라졌다는 점을 알려 주면서 “사람이 많아지면 하늘을 잊는 법”(276/ 225)이라고 경고하고 있기도 하다. 요컨대, 노인은 고향과 같은 뜻으로 사라져 가는 긍정적인 가치를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산업화는 아늑한 고향을 여지없이 변화시켜 버린다. 무엇보다도 집이 표상하는 따뜻한 분위기와 안정적인 질서를 무너뜨렸다. 집을 찾아가는 도중에 잠깐 머물면서 포근하다고 느꼈던 폐가는 그런 점에서 고향을 그리워하지만 이미 그 의미를 상실해 버린 역설적인 상황을 보여 주는 상징이다.
*****************
길가에 퇴락한 초가 한 간이 보였다. 지붕의 한 쪽은 허물어져 입을 벌렸고 토담도 반쯤 무너졌다. 누군가가 살다가 먼 곳으로 떠나간 폐가임이 분명했다.(271/ 218)
*****************
이렇게 하여 한적한 시골에는 공사판이 들어서게 되고, 사람들은 ‘하늘’을 잊게 된다.
**************
“고향이 어딘데.......”
“삼포라구 아십니까?”
“어 알지, 우리 아들놈이 거기서 도자를 끄는데......”
“삼포에서요? 거 어디 공사 벌릴 데나 됩니까. 고작해야 고기잡이나 하구 감자나 매는데요.”
“어허! 몇 년 만에 가는 거요?”
“십 년.”
노인은 그렇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두 말우 거긴 지금 육지야. 바다에 방둑을 쌓아 놓구, 추럭이 수십 대씩 돌을 실어 나른다구.”
“뭣땜에요?”
“낸들 아나, 뭐 관광호텔을 여러 채 짓는담서 복잡하기가 말할 수 없데.”
“동네는 그대루 있을까요?”
“그대루가 뭐요. 맨 천지에 공사판 사람들에다 장까지 들어섰는걸.”
“그럼 나룻배두 없어졌겠네요.”
“바다 위로 신작로가 났는데, 나룻배는 뭐에 쓰오. 허허 사람이 많아지니 변고지, 사람이 많아지면 하늘을 잊는 법이거든.”(276/ 224-5)
****************
그러므로 고향이 찾는 이들이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 정처 없이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2. 영달과 백화―동류의식
이 소설은 앞에서 보았듯이 고향을 찾고, 아울러 길에서 우연히 만난 젊은 남녀가 만나 동류의식을 느끼고 헤어지는 얘기이다. 여기서는 이 두 인물을 자세하게 살펴보자.
정씨와 영달은 서울식당 주인으로부터 백화를 붙잡아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백화는 그곳에서 작부로 일하다 도망쳐서 고향으로 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길에서 마주친다. 백화가 소변을 보다가 남자들에게 들킨 것이다. 이때 백화가 보인 반응은 다음과 같다.
**************
여자는 소변 보다가 남자들 눈에 띄인 일보다는 영달이의 거친 말솜씨에 몹시 토라져 있었다. 백화가 걸음을 빨리하며 내쏘았다.
“제따위들이 뭐라구 잡아가구 말구야. 뜨내기 주제에.”
“그래 우리두 너 같은 뜨내기 신세다. 찬샘에 잡아다 주고 여비라두 뜯어 써야겠어.”
영달이가 여자의 뒤를 바싹 쫓아가며 농담이 아님을 재차 강조했다. 여자가 휙 돌아서더니, 믿을 수 없을 만큼 재빠르게 영달이의 앞가슴을 밀어냈다. 영달이는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눈 위에 궁둥방아를 찧고 나가 떨어졌다. 백화가 한 팔은 보퉁이를 끼고, 다른 쪽은 허리에 척 얹고 서서 영달이를 내려다보았다.(268-9/ 214-5)
*************
이렇게 처음에는 ‘앞가슴을 밀어낼’ 정도로 백화와 영달의 마음은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다. 심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이들이 그 거리를 좁히는 과정을 따라가 보자.
***********
“우리두 의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치사하다면, 그런 짓 안해.”
세 사람은 나란히 눈 쌓인 길을 걸었다. 백화가 말했다.
(중략)
백화는 아까와 같은 적의는 나타내지 않았다. 백화는 귀 옆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자꾸 쓰다듬어 올리면서 피곤한 표정으로 영달이를 찬찬히 바라보았다.(269/ 215-6)
*************
여기서 ‘의리’는 앞에서 들은 바 있는 ‘인정’이나 ‘하늘’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산업화되기 이전의 공동체적인 삶의 윤리를 상징하는 말이다. 이렇게 이들은 자연스럽게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푸근한 ‘의리’를 매개로 거리감을 줄여 간다. 차차 마음을 여는 것이다. 백화가 말하는 속옷은 실상 숨김없이 털어놓는 그녀 자신의 속마음이기도 하다.
***********
“아저씨네는 뭘 갖구 다녀요? 망치나 톱이겠지 머. 요 속에는 헌 속치마 몇 벌, 빤스, 화장품, 그런 게 들었지요. 속치마 꼴을 보면 내 신세하구 똑같아요. 하두 빨아서 빛이 바래구 재봉실이 나들나들하게 닳아 끊어졌어요.”(270/ 216)
**************
또 남자들의 망치와 톱이나 백화의 헌 속옷은 이들이 모두 영락한 뜨내기라는 점을 보여 주는 소도구다. 이렇게 거침없이 자신의 실상을 드러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따뜻한 마음의 교류가 싹트는 것은 당연하다.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둘은 폐가에서 집에 돌아온 듯한 편안한 분위기에서, 거치게 살아왔으면서도 아직껏 깨끗한 영혼, 다시 말하면 “순정”(272/ 219)을 간직하고 있는 상대방의 실체를 확인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난 다음이라, 처음에는 밀쳐 냈던 둘이 최대한 몸을 가까이하여 업어 주는 관계로 진전되는 것이 독자들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
어디에나 눈이 덮여 있어서 길을 잘 분간할 수가 없었다. 뒤에 처졌던 백화가 눈덮인 길의 고랑에 빠져 버렸다. 발이라도 삐었는지 백화는 꼼짝 못하고 주저앉아 신음을 했다. 영달이가 달려들어 싫다고 뿌리치는 백화를 업었다. 백화는 영달이의 등에 업히면서 말했다.
“무겁죠?”
영달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백화가 어린애처럼 가벼웠다. 등이 불편하지도 않았고 어쩐지 가뿐한 느낌이었다. 아마 쇠약해진 탓이리라 생각하니 영달이는 어쩐지 대전에서의 옥자가 생각나서 눈시울이 화끈했다. 백화가 말했다.
“어깨가 참 넓으네요. 한 세 사람쯤 업겠어.”
“댁이 근수가 모자라니 그렇다구.”(273-4/ 221-2)
****************
왜 영달은 백화를 가볍다고 생각했을까? 이 점을 생각해 보는 데는 박경리의 <<토지>>에 나오는 구절이 도움이 된다.
**************
“임자.”
“야.”
“가만히.”
이불자락을 걷고 여자를 안아 무릎 위에 올린다. 쪽에서 가느다란 은비녀가 방바닥에 떨어진다.
“내 몸이 찹제.”
“아니요.”
“우리 많이 살았다.”
“야.”
내려다보고 올려다본다. 눈만 살아 있다. 월선이의 사지는 마치 새털같이 가볍게 용이의 옷깃조차 잡을 힘이 없다.
“니 여한이 없제?”
“야 없입니다.”
“그라믄 됐다. 나도 여한이 없다.”(박경리, <<토지>> 2부 3권, 삼성출판사, 1976, 251-2쪽.)
************
물론 백화나 월선이나 둘 다 몸이 쇠약해져서 가볍다. 아울러 깨끗한 영혼이어서 그렇기도 하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백화는 처음으로 술집 작부로 일하면서 군인 죄수들을 “독하게 사랑”했다(272/ 219). 옥바라지를 했던 것이다. 그 죄수들은 감옥을 나오고 나서 백화와 하룻밤 잔 다음 전속지로 떠나갔다.
***********
백화는 그런 일 때문에 갈매기집에 있던 시절, 옷 한 가지도 못해 입었다. 백화는 지나간 삭막한 삼 년 중에서 그때만큼 즐겁고 마음이 평화로왔던 시절은 없었다. 그 여자는 새로운 병사를 먼 전속지로 떠나 보내는 아침마다 차부로 나가서 먼지 속에 버스가 가리울 때까지 서 있곤 했었다. 백화는 그 뒤부터 부대 근처를 전전하며 여러 고장을 흘러 다녔다.(273/ 220-1)
************
헐벗을 대로 헐벗어서 더러운 욕망을 초월하여 자유로운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토지>>의 월선이도 더 이상 한이 남아 있지 않으니 지금껏 그녀를 괴롭히던 마음의 속박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마음이 가난하니 ‘새털같이 가볍게’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다.
이제 백화와 영달이 헤어지는 마지막 장면을 볼 차례다.
***********
백화가 보퉁이를 들고 일어섰다.
“정말, 잊어버리지...... 않을게요.”
백화는 개찰구로 가다가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백화는 눈이 젖은 채 웃고 있었다.
“내 이름 백화가 아니예요. 본명은요...... 이점례예요.”(275/ 223-4)
***********
백화는 동행하던 남자들에게 마음을 열고서도 “본명은……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270/ 216)고 했다. 그런데 이제 헤어지게 되자 이름을 말해 주게까지 되었다. 이 이름이야말로 현실에서 잃어버린 고향(집)과 동의어다. 문학사적으로는 「봄봄」, 「동백꽃」(김유정)의 점순이나 <<관촌수필>>(이문구)의 옹점 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든다.
이들이 이렇게 가까워지게 된 것은 서로 비슷한 처지에 있다는 동류의식 때문이었다. 사실 백화와 영달은 동일한 인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서로 닮았다. 먼저, 둘은 다 돈을 떼먹고 도망치는 뜨내기다. 또 이들은 순정의 인물이다. 백화에게는 앞에서 말한 옥바라지한 죄수들이, 그리고 영달에게는 한때 대전에서 살림을 차렸던 옥자가 둘의 인간성을 증명해 준다. 비록 집 없이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는 하나 위엄을 잃지 않은 인간을 만나는 감동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3. 마치면서
「삼포 가는 길」은 산업화 초기의 떠돌이의 인생을 시공간적 배경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빼어나게 그렸다. 작중화자가 직접 나서지 않은 채, 이런 유의 소재를 다루면서 자칫 빠지기 쉬운 감상주의를 벗어나면서 ‘보여 주기’(showing)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독자의 능동적인 독서를 유도하고 있다. 그 결과로 등장인물의 마음의 교류가 필연성을 획득하여 독자에게 감동적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또 이 작품의 탁월성은 산업화라는 역사적인 상황을 반영하면서 아울러 ‘길’에 삶의 보편적인 측면-삶은 여로(旅路)다-을 담고 있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