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은 집에는 누가 사나? / 조미숙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한 나에게는 목포는 촌스러운 지방의 소도시 중의 하나였다. 어쩌다 보니 목포 토박이를 만나 둥지를 틀었다. 가끔 서울에 가면 언니들이 "아이고, 목포 촌년 왔냐?"라며 놀렸다. 목포에도 아파트가 있느냐는 누군가의 물음처럼, 마당이 바다인 줄 아는 사람들의 생각과 다를 바 없는 도시지만 서민들이 삶은 고단했다. 신혼 생활을 전세로 시작했기에 계약 기간이 끝나면 또다시 이사해야 했다. 대도시도 아닌데 그 많은 집들 중에 내 지갑에 맞는 것이 없었다.
세 번째로 이사한 집에서 일이 터졌다. 시세보다 낮게 나와 덥석 잡은 전셋집이 경매로 넘어갔다. 5백만 원이 근저당 설정이 되어 있었는데, 설마 그 돈 때문에 어떻게 되나 싶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 당장 길 위에 나앉게 생겨서 은행 빛 얻어 울며 겨자 먹기로 내 집을 장만했다. 날린 전세금과 은행 빛을 더했더니 분양가보다 높은 가격에 집을 산 꼴이 되었다. 그때부터 빚은 우리 식구가 되었다. 아니 은행이 주인이 되었다.
그렇게 그 집에 눌러 산 지 15년쯤 되었다. 세 아이가 자라면서 불어난 살림에 낡고 좁은 집 탈출을 꿈꿨지만 항상 돈이 발목을 잡았다. 재산을 불리는 데 재주가 없기도 하거니와 경제를 읽는 안목도 부족해서 돈을 모으지도 못했는데 세상이 변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줄도 모르고 아이들과 아웅다웅하며 하루살이에 바빴다. 목포에 이렇게나 많은 아파트가 생기고 비쌀 줄은 몰랐다. 인구도 적은데 도대체 무슨 집이 그렇게 필요한지 날만 새면 새 아파트가 세워졌다. 그러는 사이에 사람들은 아파트를 분양받아 웃돈을 받아 넘기거나, 시세가 오르면 팔아서 차익을 챙겼다.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것을 보면서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 나로서는 다들 돈이 많아 아파트 분양을 받는 줄 알았다. 아파트 가격이 원자료값과 화폐 가치 등 다방면의 영향에 따라 오르겠지만 부동산 공인중개사와 투기꾼들이 시세를 조장하는 것 같았다. 한때 유행했던 '떳다방'이 존재하는 듯했다. 최근에 새로 지은 아파트 한 동 전체를 광주에 사는 한 사람이 샀다는 소문이 돌았다.
꿈에 그리던 넓은 집으로 이사했다. 애초에 새 아파트나 신도시는 바라지는 않았다. 지은 지 17년 된 이 집도 은행돈으로 샀다. 달달이 내야 할 돈이 부담스러워 30년 상환 조건으로 대출받았다. 80세까지 벌어야 하는 말 그대로 집의 노예가 되었다. 아이들은 농담으로 빚을 인수하지 않으려고 상속을 포기하겠다고 했다. 그래도 이 집 처분하면 몇 천은 남는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씁쓸했다. 유산으로 남겨 줄 것도 없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당장 서울에 방을 구해야 하는 숙제가 생겼다.
둘째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학교 기숙사보다 싼 '남도 학숙'에 보냈다. 남도 학숙은 전남의 학생들에게 저렴하게 운영하는 기숙사이다. 거기 들어가기도 하늘에 별따기이지만 행운이 따랐는지 원하는 대로 됐다. 상도동에서 운암역까지 가려면 고등학생 시절보다 이른 시간에 등교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셋째도 서울로 가서, 학교는 멀지만 같은 기숙사에서 살게 했다. 둘째는 2년을 그렇게 보낸 뒤에 공부 시간이 부족하다고 결국 학교 근처에 방을 얻었다. 다행히 셋째는 군대에 가서 원룸으로 해결이 됐다. 매달 월세로 40만 원씩 내는 것이 아깝기만 했지만 전세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올해는 둘째도 휴학하고 목포에 내려와 있지만 내년에는 방을 얻어야 한다. 남매가 살 집을 구해야 하는데 큰일이다. 둘의 학교에서 가까운 강북이라고는 하지만 목포 우리집보다 서울 전세값이 더 비싼데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방이 두 개는 있어야 하는데 당연히 원룸보다 비쌀 것이다. 전세 대출을 받는 거와 월세를 내는 것을 견주어 보아 더 나은 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청년 행복주택 같은 것도 알아 보지만 쉽지 않다고 했다. 내년까지 최대한 모으려고 하는데 한정된 월급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요즘은 영혼까지 끌어모아 주식을 한다는데 조금만 사서 소액이라도 오르면 팔아서 모아 볼까, 나도 아파트 분양이라도 받아 볼까 별의별 생각이 들었지만 깜냥도 안 되고 때도 늦은 것 같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고 했던가? 건물주가 부럽다.
둘째는 서울 생활 3년 만에 현실의 벽이 두껍고 높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울에서 월급만으로는 집을 장만하는 일은 불가능한데 어떻게 결혼해서 애 낳고 사느냐고 결혼하지 않는다고 했다. 청년들의 앞날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집값에 먹구름이다. 집이 가족의 사랑을 느끼고, 소소한 행복을 누리고, 내일을 꿈꾸는 장소가 아니라 평생 지고 가야 할 무거운 짐이 되어 버렸다. 평소 아이들에게 대학까지 보내 주는 것으로 내 임무는 끝났다고 큰소리쳤으나 대학 등록금은 다행히 국가장학금으로 해결했으니 두 아이들이 앞으로 지낼 옹색한 단칸방이라도 마련해 줘야 한다. 그 많은 집에 누가 살기에 우리가 살 방 한칸 없을까? 짐이 하나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