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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표적(눅2:1-14) 곽선희 목사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오늘은 첫 번째 크리스마스 ---- 2천 년 전의 그 성탄일을 생각해봅시다. 마음눈을 높이 들어 베들레헴 높은 곳에서 그리스도의 나심을 알리던 그 별을 바라봅시다. 우리의 귀를 크게 열어 목자들이 들었던 천사의 소식을 들어봅시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베들레헴 사건을 다시한번 생각해봅시다. 젊은 부부가 호적하러 올라왔습니다. 부인은 만삭입니다. 이 여관 저 여관, 이 집 저 집 다니며 유할 곳을 찾습니다마는 거절을 당하고 마침내 한 마구간에 듭니다. 부인은 거기서 아기를 낳아 말구유에 뉘었습니다.
들에 있던 목자들이 천사의 음성을 듣고 첫 번째로 찾아와 아기 주님께 경배드립니다. 여기에 깊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2천 년 전 한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 속에, 그 사건 하나하나에 말씀이 있고 계시가 있고 뜻이 있습니다. 말없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말씀의 뜻을 깨닫고 읽을 줄 알며 또 응답할 줄 아는 성탄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흔히 우리는 급격한 변화를 기대할 때가 많습니다. 기적적이요 마술적이요 천지개벽같은 일이라도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세계 여행을 자주 하시는 분들은 대체로 유럽의 유적들을 즐겨 찾습니다. 로마로 파리로 영국으로, 혹은 성지(聖地)로 찾아다니는데, 생각 깊은 사람이면 반드시 한번은 꼭 들르는 곳이 있습니다. 로마의 남쪽, 나폴리 항 근처에 있는 '폼페이'라는 도시입니다.
이 도시에는 집 같은 것은 한 채도 없습니다. 옛날에 도시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흔적만 있을 뿐이지요. 이 잔흔(殘痕) 위에서 옛 모습을 상상해보면, 얼마나 아름다운 도시가 여기에 있었던가, 얼마나 계획적으로 구획이 정리된 도시였던가 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운동경기장, 연회장, 호텔, 그리고 술집들, 거기에 공중목욕탕까지 완벽하게 갖춘 환락의 도시였습니다. 신전(神殿)이 있었던 자리도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에 이미 상수도 시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로 본다면 까마득한 삼국시대라고 해야 고작 1,500년 전인데, 2천여 년 전의 그사람들이 상수도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폼페이가 얼마나 화려한 문명의 도시였던가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죄악의 도시를 하루아침에 심판하셨습니다.
화산이 폭발하면서 거대한 용암 분출물이 이 도시 전체를 순식간에 덮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서로 부둥켜안고 있다가 죽은 사람이며 웅크리고 앉아 죽은 개의 모습 따위가 고스란히 미이라가 된 채 남아 있습니다. 목욕탕에서, 침실에서 그때의 몰골 그대로 돌이 된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악을 심판하실 때에는 때로 이처럼 무섭게 역사 하십니다. 노아 때 홍수로 온 생물을 다 쓸어버리셨습니다. 소돔․ 고모라에 유황불을 내려 죽음의 바다 사해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질 때에는 이렇게 급격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일들이 일순간에 나타난다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 역사를 통하여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생명의 역사(役事)는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죽는 것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살리는 것은 아주 어렵게, 긴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저 베들레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조용하게, 아무도 모르게 마구간에서 주님이 태어나시는 말구유 사건에서부터 일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말씀이요, 이것은 계시입니다. 인간의 수중(手中), 인간의 문화, 인간의 도덕적 상황 ---- 바로 거기에서부터 구원의 역사는 조용히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성탄입니다.
저는 성탄절을 맞이할 때마다 선교사(宣敎史)에서 읽은 실화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너무나 재미있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봅니다. 인도에서 선교하던 한 미국인 선교사가 뜻한 바가 있어 그곳의 스님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어느날 선교사가 한 스님과 함께 길을 갑니다. 선교사가 어쩌다 개미굴을 밟았습니다. 스님이 깜짝 놀란 눈으로 선교사를 쳐다봅니다. "어쩌자고 이 많은 생명을 살상하였소? 당신은 천벌을 면치 못할 것이오. 죽은 개미 가운데는 우리 할아버지가 계시는지도 모르오." 윤회설(輪廻說)을 믿는 스님인지라 오만상을 찌푸리며 혀를 찹니다.
선교사는 적이 무안해졌습니다. "발바닥에 눈이 없어서 그만 실수를 했습니다. 어찌해야 좋겠소? 개미한테 사죄를 할 방도는 없겠소?" 그러자 스님이 대답합니다. "한 가지 길은 있소. 당신이 죽어서 개미가 되는 것이오." 순간 선교사는 '옳거니!'하고 정색을 했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이 되어 사람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까?" 선교사는 때를 만난 듯이 그렇게 전도를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사람의 수준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당신 스스로를 죄인의 수준으로 낮추셔서 우리와 대화하시고, 우리와 인격적 관계, 교육적 관계, 생명적 관계를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존재와 인격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한계를 공유하셨습니다. 육신을 입으시고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셨습니다. 피주관자(被主管者)의 나약함을 몸소 체험하셨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 이하에 보면, '그는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시험을 체휼(體恤)하신 자'라고 말씀합니다. 유한자(有限者)로, 모든 고통을 다 겪으신 자로 나타납니다.
철저하게 날 때부터 고난을 경험하는 자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구원의 사역이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경험하셨습니다. 함께 누리셨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식민 백성으로 태어나십니다. 경제적으로도 극심한 고난이 있어서 강도같은 것이 들끓는 사회였습니다. 종교는 썩을대로 썩었습니다. 당시의 성전이라는 것은 헤롯이 정치적 목적으로 지은 것입니다. 신령한 눈으로 본다면 한낱 건물일 뿐, 아무것도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가난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한낱 목수의 아들이셨습니다. 어머니를 모셔야 하고 동생들을 돌보며 집안살림을 책임져야 하는 한 인간으로서 고생을 치르셨습니다. 그뿐입니까? 마구간에서 태어나십니다. 태어나시자 마자 해치려는 사람을 피하여 애굽으로 피난길을 나서기도 합니다.
고난과 함께 태어나 철저하게 고난을 체험하시고, 그리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인간 그 누구도 그분을 이해하지 못했고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쫓겨나셨습니다. 구유는 마소의 먹이를 담는 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세계보다도 오히려 더 낮추셔서 짐승의 세계, 바로 그 처지에서 우리 인간을 만나주셨습니다.
가장 비천한 곳, 맨 밑바닥으로 낮추사 거기에서 시작하십니다.
일본의 크리스찬인 우찌무라 간소(內村鑑三)는 말했습니다. "성탄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기념일이다." 신학자 몰트만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아픔의 표현이다."
성탄(聖誕) ---- 그 첫 번째 크리스마스의 말구유 사건은 이처럼 귀한 뜻으로, 이다지도 새롭게 다가옵니다. 하나님께서 일대(一代)의 인생을 경험하시면서 새로운 인간상,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아야 하는가를 계시해 주십니다. 이것이야말로 말씀이요, 말씀으로 보아야 할 신앙 사건입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라고 우리는 쉽게도 말합니다.
이것은 성탄의 메시지입니다. 천사가 전해준 소식입니다.
"하늘에는 영광" 이라고 말할 때에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촛불입니까, 아니면 무지개입니까? 영광이 무엇입니까? 쉬운 말로 바꾸어 생각해보십시다. 칭찬입니다. 하나님께 칭찬이 돌아가야 하는데 어떤 경우에 돌아갑니까? 내가 성공했을 때입니까, 내가 실패했을 때입니까? 행복할 때입니까, 고난을 당할 때입니까?
극심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잘 참고 끝내 신앙으로 승리하는 그 때에 하나님께 칭찬이 돌아갑니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예수님 이름으로 참을 때에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돌 맞아 죽으면서도 천사의 얼굴로 원수를 용서하는 스데반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과 모든 역경 중에도 신앙을 지키는 그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 칭찬이 돌아갑니다. 하나님께 영광 ---- 있는 자가 없는 자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고 종이 되시고 죄인이 되사 마구간에 태어나십니다. 창조주가 사람 대접조차 받기는커녕 말구유에 뉘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먼저 하나님께 영광이 있습니다. 땅에 평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너무 성급하게 요구합니다. 시쳇말로 '화끈하게' 뭔가 이루어졌으면 해서 폭력도 써보고 혁명도 일으킵니다. 파업을 하고 전쟁도 벌여봅니다. 서로가 죽이느니 살리느니 합니다. 그러나 말구유 사건은 그런 것을 부정합니다.
조용하게 시작합니다. 베들레헴에서부터 그 말구유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나시고 자라시고 사역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적어도 30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목자들이 예수를 만났다고 합니다. 메시야를 경배했다고 하지마는 실인즉 아기 예수입니다. 그들이 무슨 유익을 얻겠습니까? 적어도 30년은 기다리고 나서야 예수님의 모습을 제대로 한번 보게 되지 않습니까? 교훈 한마디라도 그 때에 가서야 들을 수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생명의 역사는 이처럼 조용히 시작됩니다.
사도가 되기 전에 바울이 예수를 만납니다. 굉장한 경험이었습니다 마는 바울이 그 즉시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당장에 전도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까? 그는 아라비아로 가서 3년 동안 기도를 하여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여야만 했습니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복음을 전하는데, 그 전하는 과정에서도 얼마나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까? 아덴 전도에서 실수하고 고린도교회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귀한 진리를 고백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는 말년에 로마 감옥에 갇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얼마나 오묘하신가! 내가 당한 이 고난, 내가 겪는 이 고생이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알기 바라노라.' 구원이 순간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성화(聖化) 되는 것은 일생을 통해서입니다. 한 생명이 성장하듯 긴 세월을 두고 수많은 사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탄의 표적이 말구유라는 것을 다시한번 명심합시다. 목자들이 베들레헴에서 한 아기를 경배합니다. 그 아기의 손바닥에 메시야라고 하는 표징이 있습니까? 얼굴에 광채가 납니까? 면류관을 쓰고 태어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이심을 알아보았을까요? 베들레헴으로 가라 예수가 나셨느니라. 유대나라 왕이 나셨도다, 표징은 오직 하나 말구유에 누우셨다 ---- 하기야 그렇습니다. 세상에 말구유에 낳은 아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뿐이지요. 말구유가 예수님의 표징이었음을 잊지 맙시다.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최악의 타락입니다. 도덕적인 타락입니다. 몰인정 몰상식의 사건이요 인간 파괴입니다. 만삭된 여인을 마구간으로 몰아내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게 하다니, 막가는 세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것부터 참으십니다. 배척을 받으시되 배척하시지 않고, 욕을 당하시되 욕하시지 않고, 다 참으시면서 조용히 역사 안에 들어오십니다. 베들레헴 그 마구간에 하나의 씨앗처럼 조용히 오셨습니다. 이제 자라고 자라서 불과 300년 안에 온 세계가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최대의 겸손이요, 최대의 희생입니다.
제가 아는 분 가운데 이름을 대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갑부가 한 분 있습니다. 제가 인천에 있을 때에 오래도록 가까이서 살았기 때문에 그분의 지난날에 대해서도 꽤 알고 있습니다. 이분의 부인이 한때 술집에서 일하던 사람입니다. 그런 탓인지 지금도 말투가 좀 거친 편이지요. 화가 나면 마구 욕을 해댑니다. 한번은 제가 있는 자리인데도 남편을 두고 낯뜨거운 욕설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놈의 사업, 몽땅 망해 없어져라! 썩어 문드러져라!" 속이 아무리 상했기로니 저주가 지나치구나 싶은데, 저보고 하소연을 합니다. 가난하고 어려울 때에는 죽 한 그릇 쑤어서도 오손도손 서로 권하던 남편이 돈푼깨나 생기니까 싹 변하더랍니다.
한 달에 얼굴 한 번 보기가 어렵게 되었고 툭하면 탈을 잡는다고 합니다. "이런 꼴이니 욕을 하지 않게 생겼어요?"
여러분, 어느 때에 참사랑이 있습니까? 어느 때가 가장 진실합니까? 말구유로 내려가야 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깨고 저 미물의 자리에까지 내려가는 겸손이 있어야, 저 마구간까지 내려간 다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를 참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가 태어나십니다.
크리스마스의 사건은 구원의 사건입니다. 구유가 그 표적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바로 이 순간에도, 진실한 구유가 마련될 때에야 거기서 예수님은 탄생하십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구유같이 마음을 비워놓고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 계시적 의미를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1950년의 일입니다마는 중국에서 교회의 문이 닫힐 그 때, 우리는 그곳에 교인이 하나도 남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당시 중국에는 3백만 기독교인이 있었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팔천 만 명이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오묘하십니다.
독일은 또 어떻습니까? 동서 독일의 개방을 보고 모두들 굉장한 기적이라고 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벌써 20여 년 전부터 서독의 교회들은 예산의 40퍼센트를 동독의 교회를 보조하는 데 썼습니다. 서독 정부가 이 일을 금하기 때문에 목사님들이 비밀리에 왕래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을 통해서 은밀히 수행해야 합니다. 보석금을 주고 감옥에 갇힌 목사님들을 석방시키기도 했습니다. 이 일로 해서 연간 7백 명 이상의 목사가 순교했습니다. 아주 조용하게, 구유에서 시작된 이 일이 마침내 동서독의 담을 헐어버리고 화해의 역사를 이루어놓은 것입니다.
어릴적에 저는 시골에서 자랐는데, 크리스마스 때에는 연극을 하곤 했습니다. 잠깐 하는 연극을 위하여 한 달 남짓 연습을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하는 연극이라 주제가 늘 똑같습니다. 천사, 마리아, 말구유…… 이런 정도입니다. 여자 어린이들은 마리아 되기가 소원이고, 또 어떤 아이들은 천사가 되어 날개 한번 달아보고 싶어합니다.
몇 년 전 「가이드포스트」지(誌)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윌리라는 소년이 크리스마스 연극 연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능이 조금 떨어져 4학년에 다녀야 할 나이에 2학년에 다니는 아이입니다. 키도 크고 마땅한 배역이 없어 여관집 주인 역을 맡았습니다. 문 앞에 턱 버티고 섰다가 마리아와 요셉이 오면 "방 없어요" 하고 들어가 버리는 역입니다.
한 달이나 연습한 끝에 성탄절이 되어 공연을 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왔습니다. "주인님, 방 하나만 주세요. 아이를 낳아야 하는데 아무 데서도 안 받아줍니다. 부탁합니다." 윌리는 퉁명스럽게 "빈 방 없어요. 딴 데나 가 봐요!" 하고 맡은 역을 잘 소화해 냈습니다.
연극을 지도했던 선생님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안으로 퇴장해야 할 윌리가 처량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요셉과 마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각본에도 없는 대사를 갑자기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요셉님, 마리아님, 가지 마세요. 사실은 우리 안방이 비어 있어요. 그 방을 쓰시란 말이에요!" 순간, 관객들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지만 그처럼 뜻 깊은 성탄 연극은 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안방을 그리스도께 내어드립시다. 내 가장 소중한 마음의 방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말구유에 오심은 무능해서가 아니고 천해서가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온유하심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능력입니다. 생명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구원은 이처럼 값비싸게 시작됩니다. 이토록 어렵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성탄에 주님을 마음 가득히 영접하시고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 그 능력을 올바로 체험하는 성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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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누가복음 2장 22~23절)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기독교의 믿음을 가르쳐서 몇 가지의 말로 특징지어 부르기도 합니다. 사실상 신앙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신론자나, 공산주의자도 신앙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없다고 하나 역사의 흐름과 그 변화의 원리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유물론적 역사관은 하나의 큰 신앙인 것입니다. 역사는 반드시 변증법적으로 변하고 발전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봉건주의 사회는 반드시 자본주의 사회로, 자본주의 사회는 반드시 사회주의 사회로 변한다고 믿고 있으며 다시 사회주의 사회는 공산주의 사회로 변하고야 만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발전 과정을 알고서 이를 위해서 투쟁하는 자를 영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그들은 그들대로의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돈이 있는 자는 돈을, 권력이 있는 자는 권력을, 힘이 있는 자는 힘을, 젊음이 있는 자는 젊음을 믿고 있으며 지혜가 있는 자는 지혜를, 지식이 있는 자는 지식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믿음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신앙은 그러한 신앙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신앙을 특징 지울 수 있는 몇 가지 용어를 살펴보면 첫째로 공동체적인 신앙입니다. 개인적인 신앙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소원이나 미련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고백하여 온 교회적인 신앙 고백을 나도 같이 고백하는 공동체적인 신앙이며 그 내용이 성서적인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이를 응답적인 신앙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바른 응답을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 신앙 자체를 하나님께로서의 선물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야말로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동체적이요 동일한 고백적 신앙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순교적 신앙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 뜻은 기독교의 신앙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부터 기독교적 신앙은 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적 신앙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증인은 곧 순교자입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의 부활을 믿기에 웃으면서 죽어 가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신앙은 현재 살아 있다고 해도 역시 순교적으로 사는 것에 그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결코 죽음에 매이지 않고, 결코 사망에 굴하지 않습니다. 이래서 순교적인 신앙이라고 합니다. 셋째로 기독교의 신앙은 기다림의 신앙입니다.
이는 종말적인 신앙에 기초한 것입니다. 영원히 소망적이요 무한히 미래적이며 절대화된 신앙입니다. 성공과 실패가 문제 아니며 삶과 죽음도 문제가 안됩니다. 다만 영원한 생명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로써 기다림의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이 기다림은 결코 단순한 기대나 감상만이 아닙니다. 따라서 주관적 감정이나 소원이나 욕망을 뜻하지 않고 막연한 이상이나 무지개의 꿈도 아니며 컴퓨터의 예언도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의 기다림의 신앙은 세 가지에 근거한 것입니다. 먼저는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Reality). 특히 성서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성서적 진리는 언제나 역사적이며 사건적이고 사실적입니다. 인간의 심리나 특히 종교심, 혹은 종교적 본능에 근거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깨끗한 사실에 근거한 기다림인 것입니다.
둘째로는 약속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주관적인 욕망이나 본능적 필요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객관적 사실인 약속, 즉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이요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구원의 약속에 근거하고 기다리는 것이 기독교적인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모세에게, 또한 다윗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그것을 기다리는 신앙인 것입니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셋째는 약속의 성취(Fulfilmemt)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 약속은 무지개처럼 항상 앞에 있고 무한히 미래적인 것만은 결코 아닙니다. 이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는 것입니다. 현실적이며 현재적으로 나타납니다.
구체적으로 역사 안에 그리고 우리의 생활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확실한 구체적 체험에 근거하여 다시 보다 높고 보다 먼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성취됨이 없는 약속, 실현성 없는 기대, 사실이 없는 기다림은 헛된 것으로 결코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벌써 이루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를 체험하면서 다시 주시는 미래의 약속을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 곧 참 믿음인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바로 이것을 증거 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약속과 성취의 확실함과 정확함을 구구 절절히 증명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예언들, 그 모든 약속들이 그처럼 정확하게 성취된 것을 보면서 또한 우리의 현실 생활 안에서 또는 우리의 역사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매일의 구체적인 생활 안에서 그 말씀들이 분명하게 성취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이를 근거로 하여서 다시 멀리 보여 주시는 약속도 확실하게 믿고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중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두 용어를 찾게 됩니다. 그 하나는 25절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는 말과 다른 하나는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아오니"라고 하는 말입니다. 다시 줄이어 "기다림"과 "보았다"는 두 글입니다. 기다림은 미래적인 뜻이요 보았다는 것은 현재적인 뜻입니다. 전자는 소망적이요, 후자는 현실적인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가령 기다림에 봄이 없다면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약속에 성취가 없다면 얼마나 헛된 일입니까?
본문에 나타난 시므온은 그 약속을 기다렸고 그 약속이 성취됨을 봄으로서 참으로 행복한 순간을 가졌습니다. 기다리던 바가 성취되어서 그것을 현재에서 누릴 수 있을 때 바로 행복의 극치가 이루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편 그 보았다는 현재적 사건 속에 다시 미래적 약속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면 이 얼마나 절망적인 일이겠습니까? 약속의 성취는 다시 새로운 미래적 약속을 포함하고 있으며 비추어 주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기다림이 이루어져서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기뻐합니다.
동시에 이 아기 예수 안에 감추인 이스라엘의 구원과 이방의 빛을 바라볼 수 있었으며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영원히 소망적이요 미래적인 귀한 진리의 사실이 그를 기쁘게 한 것입니다. 문맥대로는 그는 너무나 감격하여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극치의 행복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기독교적 기다림의 신앙의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약속의 성취를 믿고 다시 그 성취에 근거한 보다 높고 영원한 약속을 바라보며 새롭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정신적인 세계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물질적이요 미래적인 것만 아니라 현실적인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시므온이란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과 그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은 수 없이 많았다고 생각됩니다.
속박에서 자유를 꿈꾸지 않는 자가 어디 있으며, 굶주리면서 먹을 것을 막연하게나마 기다리지 않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즉 시련 속에서 기적이 나타나기를 기다리지 않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기다린다고 그에게 다 "보는"축복이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직 시므온에게 이 같은 영광이 주어진 이유는 간단한 말로 기록되었으나, 여기에 깊은 뜻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요셉이 의인이라고 증거된 것같이 본문의 시므온도 역시 경건하고 의인이었다고 증거 되었습니다. 고넬료는 그 경건이 하나님의 기억하신 바 되었다고 사도행전 10장에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종교생활을 종합한 한마디 용어가 있다면 그것은 곧 경건이요, 그의 사회생활과 종교생활을 연결하는 중요한 관계가 곧 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곧 경건한 의인 것입니다. 즉 시므온은 경건과 의를 가지고 위로를 기다린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실 수 있는 참 경건과 의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는데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기다림의 신앙을 성령이 도와주신 것입니다. 그의 기다림에 머물지 않도록 그리고 성취됨을 알도록 현재성을 믿도록 도와주신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시며 그리스도의 영이 되셔서 그리스도와 생명적 관련을 맺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기다림의 방향을 지시하여 주십니다. 무엇을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시고 바른 길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며 좀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알도록 인도하시며 현실적, 구체적, 생활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여 주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채워 주십니다. 낙심되지 아니하며 지치지 않도록 우리를 격려하여 주십니다.
그리스도를 만날 때까지 쓰러지지 않도록 도우시며 꼭 만나도록 힘을 더 하시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인도로 그리스도를 듣게 되고 만나게 되고 그때까지 견디게 되었습니다. 약속이 성취되어 자기 안에서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좀더 깊이 생각하여 보십시다. 기독교의 기다림의 믿음은 그 내용에 있어서 세가지였다고 봅니다. 먼저는 초림입니다. 구약성경이 예언하였고 온 이스라엘이 기다렸듯이 메시야 되신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 오시는 그 임함을 기다렸습니다. 이는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중심 교리입니다. 오시리라 예언하셨고 예언대로 오신 것입니다. 이점에서 기다림이 있는가 하면 그 성취가 있었습니다.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둘째는 재림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면서 "본대로 오리라고"하셨는데 그 재림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믿음이 초대교회의 신앙의 중심을 이룬 것이 사실입니다. 즉 종말적인 그리스도, 심판주로써 역사의 끝에 권능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초조하고 긴박하게 기다렸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역사의 종말과 종말적 구원을 기다리는 신앙이 오늘도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도 환난과 재난과 전쟁의 소식을 들을 때 이때가 아닌가고 그 재림의 그리스도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오늘의 현실을 이기는 힘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약속과 성령을 기다리는 신앙입니다(눅 24:49, 행 1:4). 성령의 임함과 그의 인도를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지시가 없이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으며 말씀의 허락 없이는 아무 일도 시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상고하며 모여서 주의 지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모이는 교회, 기다리는 교회가 먼저 있고서 성령의 임함과 지시를 받은 후 비로소 흩어지는 교회로 선교하는 교회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그리고 계속적으로 성령과 말씀의 지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어진 현실을 통하여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길을 분명히 안 후에는 그것을 위하여 순교적인 희생을 지불해 나아가는 것이 기독교인입니다.
초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렸으나 사실상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에는 이를 알지도 못하고 영접하지도 못했으며 심지어는 배척하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요 1:10, 11). 기다렸건만 어찌하여 영접할 수 없었습니까? 그 원인은 요한복음 5장 42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고 하신 것 같이 그들의 의와 경건이 거짓이었고 의식과 형식 뿐이요, 진정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으며 정욕에 쌓여있는 동안 그리스도를 볼 수 없고 부함과 교만에 차 있는 동안 그리스도를 도저히 알아볼 수는 없습니다. 자기라고 하는 보좌가 무너지지 않는 동안에는 설사 그리스도를 알았다고 해도 따를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젊은 율법사와 같이). 자기를 완전히 부정함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알 수도 따를 수도 없으며 만일 자기를 부정함이 없이 그리스도를 알았다는 자가 있다면 그 그리스도는 자기 환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지 진정한 뜻에서 참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것은 기다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과부된 여인과 술주정뱅이 남편을 둔 여인이 앉아서 서로 자기 신세 타령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각기 자기가 더욱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과부된 분의 말이 "나는 기다려 볼 것이 없는 불행을 가졌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술주정뱅이라고 해도 행여나 나아지지 않을까 하고 기다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큰 행복입니다. 또한 그 기다림에 합당한 오늘의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기다림의 신앙은 곧 미래를 현재로 사는 생이며 오늘에서 내일을 사는 생활입니다. 그 기다림의 내용에 오늘의 나를 비추어 보며 사는 준비의 생은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기다리면서 "내 앞에 생명의 면류관"이 있다고 증거하였으며 "그 날에 너희는 나의 자랑이 되고 나는 너희 자랑이 되리라"고 긍지에 찬 앞날을 바라보며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날의 영광을 위하여 오늘의 수치를 감당하셨고 그날의 큰 자유를 위하여 오늘의 자유를 스스로 버렸으며 그 날의 자랑을 위하여 오늘의 괴로움을 기쁨으로 참아 이긴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승리한 것입니다.
재림의 주를 기다리며 그날의 의로운 심판을 믿고 오늘의 어떤 부조리와 모순 속에서도 비굴해지거나 낙심됨이 없이 굳게 서서 싸워야 하겠습니다. 그 날이 결코 부끄러움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성령과 말씀의 인도를 기다리며 현실에서도 부르시는 음성과 지시를 받아서 현재적 성취를 확실히 믿고 여기에서 썩어지는 밀 알이 되어지며 다시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추수를 확실하게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기다림의 믿음을 새롭게 하십시다. 현실 안에서 성취를 보면서 다시 새 약속을 믿고 기다리십시다. 앉아서가 아니라 서서 일하며 싸우면서 기다리십시다. 주께서 반드시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역사 안에서 위로해 주시며 그리고 종말적인 위로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이를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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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에서 구원 하신다 (마1:18-21)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태복음 1:18-21.
예수님이 나신지 2천 년이나 지났는데, 오늘 이 아침에도 세계 인구의 1/3이 여전히 그분의 탄생을 기뻐하며 그분을 구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경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북쪽 시골에서 태어나셨습니다. 30~33세까지 3년 동안 이스라엘에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분을 보통 ‘랍비’라고 불렀는데, 그 당시 많은 랍비들이 전국을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지금 제 나이의 절반도 안 되고 옷도 한 벌밖에 없던 가난한 젊은이로 이스라엘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제자로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전 세계 사람들의 호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분의 순교정신 때문일까요? 하지만 예수님만 순교하신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종교와 사상을 위해 순교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이 동정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일까요?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예수님 당시의 요세푸스라는 역사학자가 ‘유대인들의 고대사,’ ‘유대인들의 전쟁사,’ 자서전 ‘나의 인생’ 등 책 3권을 남겼는데 거길 보면 예수님의 시대상황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스스로 메시아라고 주장하고 나섰다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그 중에 제일 유명한 사람이 바코츠바인데, 자기가 메시아라고 떠들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그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까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 때문에 동정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인류 역사상 훌륭한 인물들이 - 종교지도자, 철학자, 현자들이 - 많았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과 사상가들은 진리를 찾아서 그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려 하는데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진리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석가모니는, 모든 생존이 다 고(苦)요 고는 욕심에서 오고 욕심을 여덟 가지 방법으로 다 제거하면 해탈하게 된다는 자기가 발견한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이 가르쳐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리를 가르쳐준다 하시지 않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다”(요11: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인생의 진리 한 가지를 가르쳐주시거나 마음의 평안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아무리 마음에 평화가 있어도, 인생을 마치면 지옥에서 마귀와 함께 영원히 고통을 당하거나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로 오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선교사로 가는 것,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른 분이 세상에 없습니다. “나를 믿는 것보다, 나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나를 아는 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일은 없다.” 즉 예수님이 진리요, 생명이요, 부활이요, 그분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합니다. 용서하는 방법, 용서받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네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 선언하시며 용서해주셨습니다. 하나님 밖에는 죄를 용서할 자가 없는데 자기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이런 죄를 범하지 말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 이분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오늘 우리가 탄생을 축하하는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입니다.
예수님은 예배의 방법을 가르쳐 주신 분이 아니라 예배를 받으신 분입니다. 자기를 경배하라 하셨고 자기 앞에 모두 무릎을 꿇고 경배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기 때부터 사람들의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했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예수님께 엎드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여!” 고백하며 경배했을 때 예수님은 “왜 나에게 경배하느냐? 하나님께만 경배해야지” 라고 하시지 않고 그 경배를 당당하게 받으셨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사도 요한이 자기에게 나타난 천사를 보고 놀라 엎드려 경배하려 하였습니다. 그 때 천사가 경배받기를 거부하며 말했습니다. “나에게 경배하지 마시오. 내가 인간보다는 더 높고 위대한 천사이긴 하지만 난 하나님이 아니니 절대로 내게 경배하지 마시오. 일어나시오. 당신과 나는 같은 동역자요.” 한편 헤롯 대왕은 목소리가 얼마나 좋았던지 모두들 하나님의 목소리라고 했습니다. 헤롯이 연설을 하면 사람들이 “아, 저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가!” 할 정도였습니다. 이에 교만해진 헤롯이 “아! 내가 정말 하나님인가 봐!” 하고 하나님인 척하다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죄 있는 인간이 하나님처럼 경배를 받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리고 경배를 받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사람들이 자기 앞에 엎드려 경배할 때 서서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라고 고백하였을 때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성전과 안식일, 모세오경(토라)이 중요했는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보통 충격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거짓말을 했거나 실제로 하나님이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만약 거짓말이라면 거짓말하는 사람을 어떻게 20억의 인류가 따르겠습니까? 실제로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요, 성전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채찍을 들고 성전 안에서 돈 바꾸는 자들을 몰아내어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모세와 함께 계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1500년 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광야를 다닐 때에 예수님이 그와 같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느니라”(Before Abraham I am)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예수님은 자기가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분입니다. 그분이 바로 2천 년 전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기 전에 여섯 번이나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음을 당할 것이며 사흘 후에 부활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당시에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이 많았고 스스로 메시아라고 주장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십자가에서 다시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셨고, 제자들 500여명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습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6:35). 예수님은 어떤 진리를 가르치거나 하나님 만나는 방법을 안내하려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만나게 해주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누군지를 분명히 알고 믿고 이해하고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 한마디를 깨닫고 ‘아, 그 말씀 괜찮다!’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괜찮은 말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는 “죽는 자는 살 것이요, 살려 하는 자는 죽으리라”처럼 알쏭달쏭한 말들도 있어요. 이 말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 문제입니다. 그분이 대답이요, 그분이 생명이요, 그분이 영생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생활 속에서 죄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권위는 과거 어떤 종류의 권위와도 다르다고 제자들이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두려워한 적이 없었고, 죄를 범하고 죄의식 속에서 헤맨 적도 없었으며, 잘못을 저지르고 후회하면서 낙심한 적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여러분과 저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어떤 문제? 죄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문제들 중에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육체적, 심리적, 정서적, 환경적 문제들이 있지만 그 모든 문제들의 중심에는 죄가 있습니다. 죄를 가슴에 품은 인간이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문제보다 죄의 문제가 제일 큰 것입니다.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정치적, 사회적, 환경적 문제는 물론 건강의 문제까지 해결될 것입니다. 죄 속에 빠져 헤어나질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죄 속에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구원하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문제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학식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오래 전에 제가 미국 중부의 한 도시에 살 때의 일입니다. 이웃에 사는 의과대학 교수 한 분이 자기 아내를 자동차로 치어 죽이려고 했습니다. 제가 아는 분인데, 인물도 참 좋고 의학박사 학위에 갖출 것을 다 갖춘 교수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아내를 죽이려고 했으니 온 동네가 소란스러웠습니다. 다행히 그 아내가 죽지는 않았지만 저는 그 일로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 점잖은 분이 어떻게 자기 아내를 자동차로 밀어버리나? 어떻게 박사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나?’ 저는 그 때 30대 초반으로 막 목사가 되어 사람을 잘 몰랐어요. 인간의 죄는 교육, 학위, 사회적 지위와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지금은 제가 알지요. 그럴 수가 있지요. 인간의 가슴 속에 박힌 죄성은 인간을 파멸로 몰고 갑니다. 고통과 미움을 불러일으킵니다. 죽음을 초래합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습니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예수’라는 단어가 ‘구원자’(Savior)라는 뜻입니다. 인간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입니까? 인간의 가장 심각하고 보편적인 문제, 즉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의미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보면 지옥 가는 사람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혹시 여러분이 거기에 들었는지 보세요. 들었다면 정신 차리고 빨리 나가야 됩니다.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첫째로,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겁쟁이를 말합니다. 왜 겁쟁이입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벌벌 떨면서 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자들아,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굳건한 믿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지옥의 유황불에 안 들어갑니다. 믿음이 있어야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조금만 어떻게 되어도 겁이 나서 굿하는 사람들은 지옥에 갑니다.
둘째로, 믿지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영생을 믿지 않고, 예수를 믿지 않고, 죄 사함과 부활과 영생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불과 유황 못에 들어갈 것입니다.
셋째로, 흉악한(abominable)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혐오하시는 부류입니다. 이런 자들 중에 동성애를 행동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abomination’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깨뜨리고 여자와 여자가, 남자와 남자가 성행위를 하면서 부부라고 떠드는 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민주주의는 동성애를 괜찮다고 합니다. 서양에서는 남자와 남자끼리, 여자와 여자끼리 결혼해도 된다고 법으로 정하고 있어요. 한국에서는 이와 같이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법이 절대로 만들어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동성애의 경향이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성애의 경향을 행동으로 옮기는 자들이 흉악한 자들입니다.
넷째로, 살인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바로 살인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증오하고 배척하며 사는 사람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갈 것입니다.
다섯째로, 음행하는 자들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아내와 자식을 두고 간음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고도 주일에는 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지옥 갈 일을 계속 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다니요.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습니까? 우리를 죄에서 구하러 오셨지 죄 속에서 살라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여섯째로, 술객들입니다. 즉 귀신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무당들, 무당을 섬기는 사람들,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피조물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우상숭배자들이 지옥에 들어갑니다.
일곱째로,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입니다. 사기꾼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예수님께서는 이런 죄인들을 변화시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새 삶을 살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21절). 어떻게 구원하시나? 친히 우리의 죄를 그 몸으로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심으로써, 그 보혈로 아까 보았던 여러분의 모든 죄를 덮어주셨습니다. 다 용서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을 때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한 번에 용서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와 죄 사함을 주셨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아까 제가 나열했던 죄들 속에 사셨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그 가운데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왜 여기 부르셨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여러분의 죄를 사해주셔서 여러분이 죄로부터 완전히 회개하고 새사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가정에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식구들이 다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성을 깨끗하고 정결케 만들어주십니다. 여러분이 회개할 때마다 예수님의 피가 깨끗이 씻어줍니다. 찬송할 때마다 정결케 해줍니다. 예배드릴 때마다 새롭게 만들어줍니다.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점점 변화됩니다. 재미있다고 따라다니던 죄가 싫어지기 시작합니다. 죄를 멀리하게 되고 죄와 싸우게 됩니다. 우리의 가슴이 예수님 때문에 점차 깨끗해집니다.
예수님은 또한 여러분을 마음속의 죄의식으로부터 해방시켜주십니다. 죄의식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자기를 처벌하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는 순간 내 가슴에 고통과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창피하고 수치스럽습니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나?’ 자기를 정죄하고 죄의식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죄의식이 있다면, 오늘 아침 예수님께서 그것을 제거해주시기 원하십니다. 해방시켜주시기 원하십니다. 예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달라고 기도하면 예수님께서는 용서해주시고 죄의식을 없애주십니다.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일고 죄 사함을 받은 감사가 가슴에 넘치면서 우리는 죄를 점점 멀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도록 도와주십니다. 옛날에는 죄성을 가지고 혼자 살면서 온갖 죄를 다 범했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인정하고 믿는 그 순간부터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여러분과 언제나 같이 하셔서 죄를 범하지 않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죄는 힘이 있어요. 마귀가 우리보다 세지요. 세상이 우리 보다 셉니다. 내 죄성이 나보다 셉니다. 사도 바울도 “내가 선을 행하고 싶은데 왜 안 되나? 내가 악을 행하고 싶지 않은데 왜 악이 튀어나오나?” 고민하다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4)고 절규하였습니다. 인간은 죄를 알고 죄에서부터 건짐 받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죄의 세력을 파괴하십니다. 이제부터 우리 가슴속에 살아계신 예수님이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도록 기도할 때마다 도와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결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육신의 사망뿐 아니라 영원한 사망입니다. 둘째 사망, 즉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어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많은 현자들과 철학자, 사상가들이 우리에게 인생의 진리 한두 가지를 가르쳐 줄 수는 있지만, 예수님만이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 사함 받고, 죄의식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의 죄성이 점점 정결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도록 도와주시며 영원한 자유를 주십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 의미입니다.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아직도 죄가 여러분을 거느리고 있다면, 이 시간 예수님께로 오십시오. 피해 다니지 마세요. 핑계대지 마세요. 못 본 척한다고, 없는 척한다고, 거짓말 한다고 죄가 없어집니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죄에서 돌이켜 예수님께 나아오십시오. 죄 사함으로 나아오십시오. 죄 사함을 받으십시오. 죄의 결과로부터 해방을 받으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아멘.
출처/김상복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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