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 고혜숙
안녕, 박종민! 얼마 만에 불러 보는 이름인지. 길에서 마주치면 서로 알아볼 수 있을까? 수줍게 미소 짓던 얼굴을 그려 본다.
아직 철도청에서 근무하고 있겠지? 난 정년을 4년 6개월 앞두고 퇴직했다. 자괴감을 견딜 수 없어서. 2학기가 되면 교실에 들어가는 발걸음이 너무나 무거웠어. 많은 아이들에게 영어는 더 이상 중요한 과목이 아니었거든. 하찮은 존재가 되어 가는 나 자신이 안쓰러울 수밖에. 돌파구는 정말 없을까? 또다시 3학년 수업을 맡아야 할 텐데, 무기력하게 만드는 2학기를 배겨낼 자신이 없더라. 그래서 결심했지. 떠나야겠다고. 내려놓아야 할 때를 알아차렸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1982년 3월 2일. 현경의 날씨는 을씨년스러웠고, 풍경은 또 얼마나 황량했던지. 온통 벌건 황토밭이고, 변변한 숲 하나 보이지 않았어. 그때는 내가 뭘 몰랐던 거야. 얼었던 흙은 풀리는 중이었고, 머지않아 푸른 농작물로 가득 차게 되리라는 것을. 교문을 들어서니 꽃밭 귀퉁이에 수선화가 피어 있는 거야. 어찌나 반가웠던지. 사진으로만 몇 번 봤는데. 〈일곱 송이 수선화〉를 즐겨 부르던 나에게는 환영의 꽃다발이었어. 지금도 수선화를 보면 내 마음에 불이 환하게 켜지곤 해. 한껏 부풀어 올랐던 새내기 교사 시절. 가끔 아팠지만 대체로 즐거웠던, 내 인생의 봄날이었으니까.
만나게 될 아이들 명단을 받아서 한 명씩 읽어 보는데 조금 떨리더라.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더 컸던 것 같아. '드디어 내가 페스탈로치의 정신을 실천하게 되었구나.' 하하. 순진하게도 초등학생 때 교과서에서 읽은 그분의 일화에 꽂혔던 거야. 아이들이 다칠까 봐 운동장에 떨어져 있는 유리 조각을 주었다는 이야기에 얼마나 감동했던지. 어쩌면 그때 내가 본 세상은 학교가 전부였던 탓이기도 했을 거야. 게다가 달리 특별한 재능도 없었거든. 기왕이면 국어나 국사를 가르치고 싶었어. 내가 재밌어하던 과목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글 쓰는 재주도 없고, 역사를 해석하는 내 역량 또한 의심스러웠어. 젤 만만하게 보이는 것이 영어더라. 문법이나 가르치면 될 것 같았거든. 그때는 몰랐던 거야. 영어 교사가 짊어져야 할 짐이 얼마나 무거운 가를.
처음엔 가르치는 일이 신났어. 너희에게 영어 공부는 처음이다시피 했고, 나는 사명감에 불타올랐으니까. 일단 영어는 잘하고 봐야 되는 과목이었잖아. 문제는 영어가 학교 평가의 기준이라는 점이었어. 전라남도 영어 단어 쓰기와 듣기 평가가 예고되면 온통 학교가 영어로 들썩였지. 다른 학교와 비교하는 중요한 잣대였으니까. 정규 수업 앞뒤로 이 교실 저 교실 돌아다녀도 피곤한 줄 몰랐어. 다른 학교와의 경쟁에서 뒤지고 싶지 않았어. 내 능력을 증명해 보이고 일이기도 했으니 하루하루가 보람찼다. 그런데 말이야, 어느 날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알아버렸어. 영어 선생 된 것이 얼마나 후회스럽던지. 어쨌거나 내 할 도리는 다 했다. 너희만 바라보았어. 마음 한구석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애써 모른 척 누르면서.
인자하게만 보이던 교장선생님. 왠지 표정이 불편해 보이는 날이면 사모님이랑 싸웠나 보다고 교무실에서 농담이 오갔단다. 하필 그런 날이었나? 월말 고사 계획서를 다시 해오라는 거야. 몇 달째 똑같은 기안문을 날짜만 바꿨는데. '웬 트집?' 돌아서 나오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따라왔어. 옷차림이 잘못되었나? 붉은색 옷을 봐도 빨갱이 운운하셨거든. 은근히 속이 상하더라. 이렇게 말하든 저렇게 말하든 뭐 다를 게 있다고. 따져 묻지 못하고 나온 내가 바보 같았어. 그냥 운이 좀 나쁜 날이라고 생각했으면 좋았을 걸. 그런데 자꾸만 감정이 북받쳐 올라서 끝내 울음보가 터져버렸어. 엉엉 울다 보니 서럽기까지 했다. 뭐가 그리 억울하다고. 더 한 일도 시키는 대로 다 했으면서 말이다.
사실 교사였던 시절을 이렇게 돌아보고 싶지는 않았어. 나는 친절한 교사였던가? 학생들에게 부당하게, 또는 과하게 꾸짖고 화냈던 일은 없었던가? 그 어떤 질문에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으니 말이다. 교육을 앞세웠지만 너희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려는 노력은 뒷전에 두었던 것 같아. 너도 영어 말하기 대회 기억하지? 1학년 대표로 너를 뽑았었잖아. 내 예상과 달리 너는 크게 기뻐하지는 않았어. 그래도 날마다 열심히 연습했지. 그렇게 좋아하던 야구도 못하고 말이야. 아마 한 달 넘게 걸렸을 거야. 드디어 전교생 앞에서 예행연습을 하기로 한 날 아침, "선생님, 저 대회에 못 나가겠어요." 갑자기 그때서야 깨달았어. 그동안 말도 못 하고 얼마나 끙끙 앓았을까. 남 앞에 서는 것이 싫은데 내가 시키니까 어쩔 수없이 따라 왔구나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이것저것 재지 않고 바로 대답했지. "그래? 꼭 안 나가도 돼." 바로 다음날 군대회가 있을 예정임에도. 부장 선생님께 말씀드렸어. 종민이는 대회를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그런데 선생님이 설득했는지 오후에 구령대에 올라가는 너를 보았어. 그날 운동장에 내리쬐는 햇볕은 무척이나 뜨거웠고, 나는 숨을 죽였지. "하이, 에브리원!" 목소리가 얼마나 낭랑하던지! 울컥했다. 고맙고, 미안하고.
백창우가 만든 <나이 서른에 우린> 생각나니? 틈만 나면 불렀던 노래 말이야. 가끔 읊조리면서 노랫말을 음미해 본다.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있을까...... 저 거친 들녘에 피어난 고운 나리꽃의 향기를 / 나이 서른에 우린 기억할 수 있을까?" 아련하게 떠오르는 얼굴들, 모두 모두 보고 싶구나.
첫댓글 선생님 박종민 학생이 보고 싶군요? 편지를 다 쓰시다니요.
4년 6개월을 남겨두고 퇴직한 선생님의 고뇌가 읽힙니다. 비록 정년을 다 채우지 못하였어도 교육 현장에서 재직하는 동안에는 참 스승이셨을것 같습니다.
선생님을 글로만 뵈었지만 영어랑 어울리지 않는데요. 하하!
오랫동안 교단에서 고생하셨네요.
영어 선생님이셨군요.
그런데도 글을 이렇게나 잘 쓰신다는 말씀인가요?
놀라워요.
따뜻한 글 잘 읽었습니다.
나는 친절한 교사였던가? 학생들에게 부당하게, 또는 과하게 꾸짖고 화냈던 일은 없었던가? 그 어떤 질문에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으니 말이다. 교육을 앞세웠지만 너희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려는 노력은 뒷전에 두었던 것 같아.
특히 여기에서 뜨끔했습니다. 꼭 제 맘 같아서요. 저는 없었던가? 가 아니라 과하게 꾸짖고 화냈던 일이 잦았습니다.
그당시 영어교육학과는 성적이 제일 좋은 학생이 갔었지요. 교직생활을 돌아보시는 편지글 속에서 선생님의 지난 날을 알 수 있어 좋네요. 글을 참 잘 쓰시는 것 같습니다.
종민 학생에게 큰 상처를 준 것도 아닌데 그 일을 오래 담아 두신 걸 보면 선생님은 세심하고 따뜻한 분인 거 같아요. 글에서도 잘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