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노트 74 – 수행은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 수행 노트는 1996년도부터 미얀마 마하시 명상원에서 수행을 지도하시는 스승과 한국인 수행자들의 수행면담을 해를 거듭하면서 기록한 내용입니다. < 참고 >는 수행자의 바른 이해를 돕기 위해서 보충한 내용입니다. 수행은 개인의 근기에 따라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총론에서 벗어나면 안 되므로 반드시 스승의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또 명상원에 따라 다른 수행방법도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4. 질문 : 수행이 잘 될 때도 있고 잘 안 될 때도 있습니다. 수행이 한결같지 않아서 싫증이 나기도 하고 때로는 재미를 느끼기도 합니다.
사야도 답변 : 수행은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이라는 세 가지가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바른 수행을 계속할 수 있다.
< 참고 >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고 했을 때 결코 수행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을 하려면 일정한 조건이 성숙되어야 합니다. 조건의 성숙이란 수행자의 근기와 기능이 충족되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의 조건은 다섯 가지입니다. 믿음과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과 지혜입니다. 이것을 오력(五力)이라고 하는데 다섯 가지 마음의 힘이라는 뜻입니다. 다섯 가지 기능인 오근(五根)이 조화를 이루어 적절하게 작용을 하면 오력(五力)이 생겨 수행을 이끌어갑니다. 사실 내가 수행을 이끄는 것이 아니고 오력이 이끕니다.
믿음이란 바른 이해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뜻과 신심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대상에 대한 신뢰입니다. 믿음은 앞에서 수행을 이끄는 기본적인 요소로 매우 중요한 정신적 기능을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수행을 하려는 의도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시적으로 의도가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믿음이 굳건하지 않으면 수행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선업의 공덕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믿음이 있을 때 수행을 하고자 하는 의도가 일어나며 직접 수행을 하는 노력을 합니다. 수행에 대한 신뢰가 바탕에 깔리지 않으면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만약 수행을 시작했다고 해도 믿음이 없으면 노력을 하지 않거나 게을리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노력을 하게 하는 동력입니다. 노력은 육체적 노력도 있지만 정신적 노력도 있습니다. 노력은 쉬지 않고 계속하게 하는 힘의 동력입니다. 노력은 수행을 직접 이끄는 에너지로 자동차의 연료와 같은 기능을 합니다.
이러한 노력을 할 때 대상을 깨어서 지켜보는 알아차림이란 행위가 일어납니다. 알아차림은 수행에서 가장 핵심적인 행위입니다. 알아차림은 깨어서 대상을 지켜보는 선한 행위이기 때문에 알아차림이 있다는 것을 수행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알아차림은 한결같고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알아차리는 것을 기억해서 잊지 않아야 합니다. 알아차림이란 빨리어 사띠(sati)의 뜻은 첫째가 기억이고 다음이 알아차림입니다. 누구나 깨어서 대상을 지켜보기 어렵기 때문에 알아차리는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는 뜻에서 기억이라고 합니다.
불교는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깨달음을 얻는 종교인데 바로 이것의 핵심이 알아차림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이 있으면 감각기관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 역할을 하므로 번뇌라는 도둑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팔만 사천 법문을 하나로 줄이면 알아차림이라고 할 정도로 수행의 기본적인 행위입니다.
믿음과 노력의 힘이 작용하여 알아차리는 힘이 생기면 다음에 집중이 됩니다. 집중은 대상에 알아차림이 계속해서 머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집중이 될 때 다른 생각이 차단되어 온전하게 대상에 몰입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집중은 고요함으로 나타납니다. 마음이 들뜨지 않고 고요해지면 전에 경험하지 못한 여러 가지 육체적 정신적 현상이 일어나서 수행이 단계적으로 발전합니다.
이처럼 마음이 대상에 머무는 고요함이 바로 집중입니다. 이러한 집중을 다른 말로는 삼매라고도 합니다. 집중은 사마타 수행의 근접집중과 근본집중이 있고 위빠사나 수행의 찰나집중이 있습니다. 집중이라는 빨리어는 사마디(samādhi)인데 원래 사마타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마디는 사마타 수행의 집중을 말합니다.
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에서 말하는 집중은 찰나집중입니다. 사마타 수행의 집중은 대상과 하나가 되는 집중인데 위빠사나 집중은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찰나집중입니다. 바로 이 찰나집중에서 오근의 마지막 요소인 지혜가 생깁니다. 근접집중과 근본집중은 고요함으로 끝나고 말지만 찰나집중은 위빠사나의 집중으로 지혜가 생깁니다. 이때의 지혜를 무상, 고, 무아를 아는 통찰지혜라고 합니다.
사마타 수행에도 지혜가 있는데 선정의 고요함에 머무는 지혜입니다. 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의 통찰지혜는 대상의 성품을 꿰뚫어서 아는 지혜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깨달음이란 바로 이 통찰지혜를 말합니다. 이렇게 존재의 특성인 통찰지혜가 날 때만이 집착이 끊어져 괴로움이 소멸하고 윤회가 끝나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경전에서 자주 인용되는 알아차림과 집중이란 말은 빨리어로 사띠(sati) 사마디(samādhi)라고 합니다. 이것이 사마타라고 하는 선정수행입니다. 한문으로 선(禪)이라고 할 때는 선정(禪定)을 말하는 사마타 수행입니다. 경전에서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이라고 할 때는 위빠사나 수행을 말합니다.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을 빨리어로 사띠(sati) 삼빠잔냐(sampajañña)라고 합니다. 알아차림이라는 행위에 분명한 앎이라는 지혜가 포함되면 찰나집중을 통해 위빠사나 수행의 통찰지혜가 성숙됩니다.
부처님께서 극심한 고통을 겪을 때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십니다. 이때의 수행을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으로 감내하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부처님께서 괴로운 느낌을 위빠사나 수행으로 인내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수행자나 알아차림 하나로는 부족하므로 반드시 지혜를 동반해야 힘든 고통을 견딜 수 있습니다.
분명한 앎이라는 삼빠잔냐(sampajañña)는 네 가지가 있는데 이익에 관한 지혜, 때와 장소에 대한 지혜, 필요한 대상의 선택에 대한 지혜, 미혹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지혜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팔정도와 계정혜라고 하는 것은 알아차림과 집중과 지혜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의 오력(五力)이 성숙되어야 위빠사나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다섯 가지 기능 중에서 믿음과 지혜를 앞과 뒤에서 힘을 보태주는 작용을 합니다. 그리고 정작 수행을 할 때 직접 필요한 것은 노력, 알아차림, 집중이라는 세 가지 기능입니다. 이 세 가지가 각각의 영역에서 바르게 기능을 할 때 비로소 바른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하나가 많아지거나 어느 하나가 부족해지면 수행의 균형이 무너집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 가지의 균형을 황금분율이라고 말합니다. 사야도께서 강조하신 것도 바로 이 세 가지의 균형을 이루도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수행이 잘 안된다고 하면 이 세 가지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입니다. 수행이 잘 된다면 이 세 가지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 균형이 잡힌 것입니다. 노력이 많아지면 들뜨고 산만해집니다. 집중이 많아지면 졸음에 빠집니다. 이때 이 세 가지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알아차림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하지만 알아차림은 아무리 많이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 깨어있기가 이처럼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는 것을 기억해야 하므로 알아차림이라는 빨리어 사띠(sati)의 첫 번째 뜻이 기억인 것입니다. 이때의 기억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알아차리는 것을 기억한다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