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을 위해 우리는 식물과 동물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를 이용하기로 했다. 즉, 식물 조직의 대부분이 대체 가능하고 융통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필요하면 뿌리가 줄기가 되고, 그 반대 현상도 일어난다. 하나의 배아를 조각 내도 같은 식물을 여럿 얻을 수 있기도 하다. 그것들은 유전자 청사진이 완전히 동일하다. 새로운 증식 테크닉이 나오면서 우리는 ‘나무가 유년기에 경험한 극도의 영양 부족을 기억하는가?’ 등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게 됐다. 유전자가 동일한 두 묘목 중 하나는 몇 년에 걸쳐 영양분을 주지 않고, 또 다른 하나는 풍부하게 영영공급을 하는 것이다. 정확한 답을 알려면 이런 방법밖에 없다. 인간을 대상으로 이런 실험을 하는 것은 역겹고, 비윤리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식물은 이런 실험을 하기에 좋은 대상이다.]
(<랩걸>에서)
위 글의 다음 문장을 보자.
“실험을 위해 우리는 식물과 동물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를 이용하기로 했다. 즉, 식물 조직의 대부분이 대체 가능하고 융통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나무 공부를 하면서 가장 경이로운 대목이었다. 모듈(module) 혹은 가분성(divisibility)이다. 그래서 나도 가끔 활용한다. 사람들 팔 자르면 안 나오죠? 식물은 그렇지 않아요? 내가 말하고도 섬뜩하지만, 이 말은 집중도를 끌어올린다.
다음 문장을 보자.
“인간을 대상으로 이런 실험을 하는 것은 역겹고, 비윤리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식물은 이런 실험을 하기에 좋은 대상이다.”
어제 인용으로 쓴 <벚꽃의 비밀>이 또 떠오른다. 이 책의 저자는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에 일본 군인들이 참전했다고 말한다. 그들 가운데 만주에서 생체실험을 한 당사자들도 있다고 한다. 맥아더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지만, 여러 조건상 실제로 이행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사람을 상대로 한 비윤리적 실험이 실재한 것을 떠올려보니 아무리 식물이 모듈식 구성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식물은 이런 실험을 하기에 좋은 대상이다’라는 말은 상당히 모순적으로 들린다. 이 또한 인간중심 아닐까? 왜 인위적으로 누구는 밥을 주고 누구는 밥을 주지 않는 걸 당연시 여기는 걸까? 오로지 몰랐던 것을 알아내기 위해서인데, 이것으로 모든 게 덮어질까? 몰랐던 것을 아는 과정을 거치고 나면 그 대상은 언젠가 인간을 위해 변조되고 변모되면서 지구의 온도는 뜨거워진다. 이게 지금까지 우리가 일군 문명의 실체다.
자, 이렇게 이야기하면 나는 멋져 보이는가? 그렇지 않다. 나도 모순 가득한 인간일 뿐이다. 이런 인식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나도 식물이 궁금해 가지를 꺾어 유리병에 넣어 관찰해보았고, 거기서 꽃이 피자마자 바로 칼로 잘라 속을 들여다보며 그림을 그리며 자족했다. 식물을 오감으로 느낀다고 나무 곁을 지날 때마다 잎을 뜯고 열매를 맛보고 손으로 주물럭거린다. 이게 나의 실체다.
저자의 실험 과정에 관한 글을 보자.
“나는 칼로 눌러 씨앗 껍질을 느슨하게 만들고 집게의 한쪽 날을 배아 밑으로 집어넣는다. 너무 작아 눈에 보이지 않는 배아가 묻어 있는 집게 끝을 페트리 접시에 든 배양용 젤라틴에 한번 댄다. 어제 하루 종일 만들어서 페트리 접시들에 부어놓은 젤라틴 배양액이다. 나는 뚜껑을 덮고 보라색 테이프로 밀봉한다. 화요일을 표시하는 색이다. 페트리 접시의 뚜껑에 내가 배아를 떨어뜨린 부분에 동그라미를 쳐서 표시한다. 성장과 감염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배아를 찾는 노력을 덜기 위해서다. 동그라미 밑에는 연도, 매개체 식별 부호, 부모 나무, 그리고 씨앗 그룹을 표시하는 긴 코드를 검은 펜으로 적는다. 내 이름의 이니셜은 적지 않는다. 오래전에 서로의 필체를 외웠기 때문이다.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고, 이미 고인이 된 노르웨이 삼림원들의 필체를 내가 모두 알아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실험실 동료들은 코드를 쓸 때 숫자 7에 가로줄을 치지 않는 미국적인 내 습관을 놀린다. 나는 방금 쓴 코드가 정확한지 작게 소리 내어 읽어서 두 번 확인한다. 전체 과정을 하는 데 2~3분 걸린다. 그것을 정확히 100번 반복한다.”
느낌만 있지 실재를 보지 못했으니 뭐라 말하기 어렵다. 다만 정교해 보이고 집요한 노력이 동반되어야 하고 섬세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생각이 더 들어간다. 실험하는 과정에 쓰인 소품들은 다 어디서 왔을까? 공산품이다. 추적해가는 상상은 그리 어렵지 않다.
며칠 전 숲해설 끝나고 난 뒤 어떤 분이 물었다.
“가장 따르거나 존경하는 분이 있나요?”
“부처님요.”
순간적으로 왜 그랬을까? 이날 해설도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하고 질문하고 답을 하는 반복이었다. 그러다 보니 참가자들도 내게 많은 질문을 했다. 그 연장선으로 질문이 있었을 것이고, 내가 그렇게 답을 한 것은 부처는 가장 열심히 사유한 분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삶의 근본을 묻고 또 묻고 사색하고 또 사색하고 답하고 또 답하면서 근본을 알았을 것이다.
여기서 부처를 말한 이유는 이렇다. 부처는 실험을 하지 않고도 우주의 핵심을 꿰뚫었다. 지금 과학자들이 밝혀가는 지식을 이미 직관을 통한 사유 언어로 풀어놓았다. 이는 어떻게 해서 가능했을까?
이 대목에서 나는 이런 질문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그 사유를 나는 해낼 수 있을까? 어림도 없다. 그냥 해보면서 흘러만 가보자. 오늘도 파이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