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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13
11월14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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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죄인들이 대대적으로 주님께로 돌아서는 곳,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사명 완수를 위한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 더 나아가서 골고타 언덕을 향해 올라가시는 중에, 바리사이들과 제자들을 향해 ‘짧는 묵시록’을 선포하십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긴가민가 확실치 않았던 바리사이들, 언제나 예수님 정체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지니고 있었던 바리사이들이 묻습니다.
‘대체 하느님 나라는 언제 오는 것입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복음 17장 21절)
‘하느님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가장 큰 삶의 주제요 화두였습니다. 주변 강대국들로 인한 침략과 파괴, 훼손과 멸망으로 인해, 큰 고통과 깊은 슬픔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겨우 겨우 숨쉬고 견뎌왔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구체화되고 실현될 것인가?’ 하는 물음은 이스라엘 모든 계층 사람들의 간절한 물음이었으며, 동시에 예수님 입장에서도 가장 중요한 가르침의 주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장이 아니라, 5년 뒤, 아니면 10년 뒤, 그도 아니라면 30년 뒤... 과연 살아생전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을까?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뜻밖에도 이미 와있다고 하시니,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공생활 출발점은 이미 하느님 나라 출현의 시발점이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했기에, 그간 활개를 치던 악령들이 힘을 잃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 존재 자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바라고 지녔던 희망의 성취였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오래전 약속된 구원의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은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그분께서 당신 교회에 보내신 성령의 활동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미 목격했던 것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분으로 인해 구약 시대는 종료되었습니다. 그분을 통해 새로운 시대, 구원의 시대가 활짝 열렸습니다. 하지만 만물의 최종적인 회복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 교회는 긴장과 설렘 상태에서 살아갑니다. 성취와 기대 사이에서, 소유와 희망 사이에서, 기쁨과 두려움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희망 속에서 기뻐합니다.’
“희망 속에서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로마서 12장 12~15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아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경천동지할 뜻밖의 초자연적 현상을 통해 알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한 가운데 와 있으니, 이제 우리들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해야 하고 실현해야 합니다.
큰 죄인들이 대대적으로 주님께로 돌아서는 곳,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곳입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사심없는 나눔과 봉사가 이루어지는 곳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끝도 없는 고통과 십자가 속에서도 기뻐라고 감사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나라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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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느님 나라의 완전한 모델은 예수님을 잉태한 성모 마리아시다>
1941년 7월 아우슈비츠 수용소 제 14호 감방에서 한 사람의 탈출자가 생겼습니다. 이에 몹시 분노한 수용소장 프리치는 그 대가로 열 사람을 골라내어 굶겨 죽이는 아사형에 처한다고 하였습니다. 아사형은 큰 고통을 주는 사형법입니다. 굶는 고통보다 물을 마시지 못한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입을 벌려 이빨을 보여라”
이빨이 튼튼치 못하면 팔리지 않던 옛 노예 시장에서처럼, 분노한 프리치는 죄수를 고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열 번째 죄수가 가죠프니체크로 결정되자 그는 울면서 소리 질렀습니다.
“아아, 불쌍한 마누라와 가엾은 내 아들.”
이때 마르고 야윈 어떤 사람이 대신 나서서 프리치 소장을 불렀습니다.
“무슨 일인가? 이 폴란드 돼지야.”
“저 사람 대신 내가 죽겠소.”
“너는 튜울립처럼 말라 죽을 것이다.”
“저는 이미 늙었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도대체 너는 누구냐?”
“천주교의 신부입니다.”
그의 짧고 엄숙한 대답에 피도 눈물도 없는 소장은 그것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는 아홉 명이 굶어 죽어가는 동안 힘을 북돋아주었습니다. 형리들은 콜베 신부가 그들을 바라볼 때 눈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저리로 돌려! 그런 눈으로 보지마.”라고 외쳤습니다. 독주사를 맞고 죽은 콜베 신부가 화장장의 가마솥에서 소각되어질 때 모든 수감자들은 “오늘 콜베 신부님이 새롭게 탄생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콜베 신부 때문에 생명을 건진 ‘가죠프니체크’는 독일의 패망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됩니다. 그리고 훗날 자신을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걸으신 콜베 성인의 시복식에 참석하여 교황 바오로 6세도 알현합니다. 가죠프니체크는 눈물을 흘리며 교황님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고결하신 콜베 신부님께서 보잘것없는 나를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가시어 내가 그분 죽음으로 덤의 생애를 살게 되었는데, 신부님의 숭고한 죽음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하여 훗날 그분을 뵙기가 죄스럽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지배하시면 우리가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 가죠프니체크에게는 콜베 신부님이 그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은 ‘피 흘림’입니다. 피에 생명이 배어있기에 그 피를 받아들인 사람은 그 피를 준 사람에게 지배받게 됩니다. 그 지배받음이 가죠프니체크처럼 행복하다면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가죠프니체크는 콜베 신부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받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에페 1, 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또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 죄를 대신해 죽어야만 우리가 죄책감의 지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라고 하였습니다(로마 14,17 참조) 의로움은 하느님께서 나의 죄를 아드님의 십자가를 통해 다 씻어주셨음을 믿는 마음입니다. 의로움은 죄가 사해진 것을 믿는 마음이기 때문에 의로운 사람은 절대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죄가 없으면 심판하는 마음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나의 지배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우리 죄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 앞에 그분의 가죽옷을 입고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입고 그분의 의로움 덕분으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기쁨과 평화가 솟구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마음 안에 사시는 그분의 뜻대로 살면서도 저 가죠프니체크의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결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잘것없는 나를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가시어 내가 그분 죽음으로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는데, 예수님의 숭고한 죽음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하여 훗날 그분을 뵙기가 죄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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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7,20-25 :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그들도 군중들도 예수님의 인격과 그분의 행위를 통하여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왔음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질문은 ‘당신이 말하는 그 나라가 오기 전에 십자가와 죽음이 당신을 덮칠 것이요.’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큰 사랑과 인내로 그들의 비방을 비방으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1베드 2,23)신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아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21절) 이 말씀의 의미는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다시 일어나 다가오겠느냐고 그때를 묻지 마라. 오히려 너희가 그 나라에 합당한 자로 인정되도록 애써라. 그,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너의 의지에 달렸고, 너는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어서 의로움을 인정받고 온갖 덕행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이는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합당한 이로 여겨질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사탄이 쫓겨나고 더 이상 죄가 다스리지 못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가운데 있을 수 있는 것은 진리에 대한 지식이나 무지, 즉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의 나라나 사탄의 왕국이 되도록 준비시키는 의로움에 대한 사랑이나, 죄에 대한 사랑이 있을 뿐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의 기쁨입니다.”(로마 14,17)라고 한다.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고 의로움이요 평화이며 기쁨이라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나라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반대로 영의 생명을 죽이는 불의와 전쟁, 침울함 속에 있는 사람은 이미 악마의 나라의 시민이다. 이 하느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는 이미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것이다. 이 삶 속에 무엇을 끌어안고 사느냐가 문제이다. 그 나라는 은총과 진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세상 종말에 그분은 하늘로부터 희미하게 또는 은밀하게 내려오시지 않고, 아무도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1티모 6,16)으로서 하느님 같은 영광에 싸여 내려오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번개가 빛을 내는 것처럼 오시겠다고 하신다. 아버지의 위엄을 입으시고 천사들을 거느리신 채 만물의 하느님이요 주님으로 오실 것이다. 그분은 이제 먼저 수난과 죽음을 당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 나라는 먼저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온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먼저 구원의 수난을 겪으시고, 당신 육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무너뜨리시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이 세상의 지배자를 파멸시키시고, 아버지께로 올라가셨다가 때가 되면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시편 96,13)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하여 우리 자신부터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도록 노력하고 그러한 변화를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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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부산교구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신학사무처장)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어떤 장소에 내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당신 자신을 뜻합니다. 당신께서 그들과 더불어 있는 것을 두고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그들 가운데 와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란 어떤 장소를 뜻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상태를 뜻하는데, 예수님이야말로 오늘 제1독서가 이야기하는 하느님의 지혜, 곧 말씀이 육을 취하신 분이시기에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진 하느님의 나라라고 부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태어나시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을 두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표현하고,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머무시는 것을 두고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고 표현하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을 두고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종말이라고 표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날을 사람의 아들의 날이라고 표현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면서 사람의 아들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곧, 사람의 아들의 날이 오기 전에 수난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의 아들의 날은 세상 종말의 날이기 이전에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날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미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온전히 이루어진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종말의 시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언제 도래할지 모르는 그날을 늘 깨어 기다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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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21)
예수님의 답변을 보면, 바리사이들은 두 가지 질문을 한 것 같습니다.
1) 종말은 언제 오는가?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뜻으로는 종말이 언제 오느냐는 질문입니다.)
2) 종말은 어떤 모습으로 오는가?
(이 질문은, 종말이 오기 전에 어떤 표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라는 말씀은,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고,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가 종말이 시작된 때입니다.)
2) 종말을 미리 알려 주는 표징은 없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종말을 미리 알려 주는 표징 같은 것은 없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회개는 ‘지금’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종말의 날’이 아니라, ‘종말이 완성되는 날’로 질문을 바꾼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종말이 완성되는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 13,32) 따라서 종말이 완성되는 날을 미리 계산하거나 예측하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짓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알아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가짜 예언자들, 또는 사기꾼들입니다. 종말이 완성되는 날, 즉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이 되면 전우주적인 어떤 표징이 있긴 할 것입니다.(루카 21,25-27) 그러나 그 표징은 ‘미리’ 주어지는 표징이 아니라, 그 날이 되었을 때 예수님의 재림과 ‘동시에’ 나타나는 표징입니다. 그래서 그 표징을 보고서야 그때서야 회개하려고 하면 너무 늦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날이 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저절로 알게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설명입니다.(루카 17,24)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루카 17,22-25)
신앙인은 종말의 완성과 예수님의 재림을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그 날은 심판을 받는 날이기도 하지만, 신앙생활이 완성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종말’이라는 말을 들으면 재난, 불행, 고통 등을 생각하지만, 그 날은 그런 날이 아니라 구원받는 날이고, 기쁜 잔칫날입니다. 단, 구원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예수님 말씀에서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이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겪을 고난을 암시하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신앙인들은) 고난과 시련을 겪게 되면, 예수님의 재림이 하루라도 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될 것입니다. 재림의 날은 모든 고난과 시련에서 벗어나는 날, 안식과 평화와 생명을 누리기 시작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재림을 갈망한다.”라는 말은, “빨리 죽고 싶다.” 라는 소극적인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는 적극적인 뜻입니다. “보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그 날이 언제인지 말할 수 없다.”로 해석됩니다. <재림 전에 죽은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재림을 보게 될 것입니다.(1테살 4,15-18)>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라는 말씀은, 가짜 메시아, 가짜 재림 예수가 많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자기 입으로 자기가 재림 예수라고 말하는 자들은 백 퍼센트 가짜입니다.)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번개가 치면 누구나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도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저절로 알게 되고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면, 그 날 구원 선고를 받을지 멸망 선고를 받을지는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자기 자신이 잘 알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재림은 큰 영광을 떨치는 일이지만(루카 21,27) 그 전에 먼저 십자가 수난을 당할 것이라고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는 말씀인데, 거꾸로 생각하면, 십자가 수난을 당하더라도 영광스럽게 재림하실 것이라고 예고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신앙인으로서 겪는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재림의 날에 이루어지는 심판은, 신학이나 성서학이나 교리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를 보는 시험이 아니라, 얼마나 신앙인답게 잘 살았느냐를 보는 심판입니다. 따라서 그 심판에 대비하는 일은, 이론 공부가 아니라 ‘삶의 실천’이어야 합니다. 이 말에 대해서 “먼저 잘 알아야 실천도 잘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 것 같은데, 물론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아는 일도 필요하지만, 아는 것으로만 그치고 실천하지 않으면 알고 있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실 몰라서 실천을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아주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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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 예수님
11월은 사목 활동을 하는 사제들에게 적잖이 중요한 날입니다. 사목회를 비롯해 각 단체들의 대표가 교체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교체된다는 것은 누군가의 임기가 끝나는 반면 누군가의 임기는 시작됨을 의미합니다. 이 시기가 되면 보통 사제들은 봉사해 주실 분을 찾아 나서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으며 내년을 위한 계획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단체장을 부탁드리기에 죄송한 마음도 크고 부담스러운 짐을 짊어지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기도 합니다.
얼마 전, 어머니와 통화를 하며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머니께서, 봉사하게 될 분들이 얼마나 행복할지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자세히 들어보니 저희 어머니 역시 제가 어린 시절 자모회를 맡았었는데, 그때는 그저 신부님이 갑자기 시키셔서 아무것도 모르고 자모회장을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멋도 모르고 일을 맡았던 그 때가 가장 힘들기도 했지만 가장 즐거웠던 때였는데, 그 인연으로 다른 어머니들과 협동할 수 있었고, 많은 것을 나누게 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함께 기도하며 많은 은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아마도 그 시절, 저의 어머니에게 어려움이 없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내 자녀들을 돌보기도 힘든데, 성당에 오래 머무르며 다른 아이들의 밥을 하는 것이 결코 물리적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한 여러 성격의 젊은 어머니들이 함께 일해야 했으므로 적잖은 갈등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와서 그 시기가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일종의 은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아이들을 위하여 봉사한다는 것. 비록 인간적으로는 매우 힘겨운 일일 지라도, 그 직분과 책임만으로도 참으로 소중하고 마음 따뜻해지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후에 하느님 나라에서 느끼게 될 기쁨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는 그 순간, 그분의 가르침을 우리가 따르는 그 순간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는 다른 곳이 아닌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이들의 마음 속에 존재함을 알게 됩니다.
반면 우리는 일상생활 안에서 뿐만 아니라 신앙 안에서 조차 어렵지 않은 길을 걸어가기를 선호합니다. 중요한 직분을 수행함으로써 인간적인 갈등에 부딪히느니 차라리 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나의 영성에 도움이 될 것 같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받을 기회를 되도록 피하고 싶기도 합니다. 또한 나의 희생보다는 다른 이의 희생을 요구하고 싶고, 손해보고 싶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복음의 말미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실제로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께 조차 공짜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고난과 배척이 있었으며 이를 예수님께서 직접 체험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이것은 결국 부활의 신비, 즉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열어주는 최고의 사랑과 영광으로 드러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일상생활 안에서 사랑을 베품으로써 받게 되는 손해는 결코 우리의 것을 강탈하는 손해가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적이고 물리적인 손해처럼 보이지만 결코 우리의 영혼을 손상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영혼을 단련하고 완성시키며 더욱 지혜로운 신앙 생활을 하도록 하는 발판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일에서 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지혜에 우리가 의존하고 주님의 사랑과 희생을 가장 우선적인 가르침으로 둔다면 무엇이 우리를 가로막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독서는 우리의 신앙에 있어 바로 이 지혜의 덕목이 필수적인 것임을 다음과 같이 드러냅니다.
“지혜는 혼자이면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자신 안에 머무르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사는 사람만 사랑하신다”.
이 지혜는 해보다 아름답고 어떠한 별자리보다 빼어나며, 빛과 견주어 보아도 그보다 더 밝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악은 이 지혜를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며, 우리의 신앙 생활 안에서의 지혜를 주님께 청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수능 시험을 마친 학생들에게 이러한 주님의 지혜가 함께 하시길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시험의 결과는 결코 하느님을 향한 지혜가 아닌 그저 인간의 것임에 불과함을, 그들이 갖춰야할 지혜는 힘든 시기 함께 하신 하느님의 손길을 이해하는 것임을 마음으로 깨닫게 되길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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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백광현 마르첼로 신부님]
<하늘나라가 있는 곳>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느 한 아이가 혈액과 관련된 병에 걸렸는데 의사 선생님은 형을 위해서 동생의 피가 필요하다고 했답니다. 엄마가 동생에게 형을 위해 피를 나눠 줄 수 있느냐고 묻자 동생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깊은 실의에 잠겼습니다.
한참 뒤에 동생은 엄마에게 내가 형에게 피를 주면 형의 병이 낫느냐고 물었고 엄마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조금 뒤에 심각한 표정을 한 동생은 그렇게 하겠다고 큰 결심이라도 한 듯이 대답했습니다.
병원에 가서 형과 나란히 누워 수혈을 하던 동생이 불안해하면서 의사 선생님을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와서 어디 아프냐고 묻자 아이는 큰 눈망울을 깜빡이며 “선생님, 저는 언제 죽는 거죠?”라는 질문을 했답니다.
아이는 피를 내주면 자기가 죽고 형이 산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알고도 형을 위해 피를 내주려고 했던 그 아름다운 마음에 하늘나라가 있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습니다. 하늘나라는 사랑 때문에 모두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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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정월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필자가 서울대교구 사목국장으로 있을 때 일이다. 사목국 일 년 평가를 하던 중 여덟 명의 사제들이 내 잘못을 이야기했을 때 국장으로서의 지도력 부분이 큰 도전으로 다가왔다.
건설적인 비판이었지만 심지가 약한 나는 그런 비판이 ‘이제는 국장 자리를 내어놓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로 들렸다.
잠을 못 이루다가 성체 앞에 나아갔다. 그때 주님의 말씀이 마음 깊은 곳으로 스며들어 왔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시편 139,1-2)
나를 아시는 주님께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으면서 평화가 찾아왔고, 사제들의 비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사제들의 의견과 비판을 귀담아듣다 보니 하느님이 사제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나를 이끌어 주심을 깨닫게 되었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있다. 나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들뿐 아니라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느님은 나를 부르신다.
내가 하느님과 가까이 있을 때에는 부드럽게 다가오시지만 내가 그분한테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는 강렬한 음성으로 다가오셔서 회개를 촉구하시므로 아픔과 고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늘 우리 곁에 계신 하느님 사랑의 계획을 믿는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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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 일기(연중 32-목)
<어디에나 계시는 분….>
우리 고운님들 한 분 한 분은 평소에 물처럼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물은 늘 아래로 흐릅니다. 웅덩이를 만나면 잠시 쉬기도 하지만, 다른 물과 만나 웅덩이를 벗어납니다. 바위가 있으면 바위를 휘돌아 나갑니다. 하지만 함께 모인 물흐름이 세차면 바위를 굴리기도 합니다. 고운님들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함께라면 할 수 있습니다. 고운님들은 영적 말씀으로 하느님 나라를 꿈꾸면서, 그 꿈을 삶의 자리에서 이루고자 하는 고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고운님들에게 닥친 현실이, 삶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빛이시고, 선하신 주님을 의지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십시오. 반드시 어두웠던 그 문이 열리게 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함께하실 것입니다. 특히 성실하신 주님께서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간호하는 이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와 함께 하시어 치유와 회복의 문을 열어주시는 은총이 있으시기를 기도하면서 영적일기를 준비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언제 오느냐?”라는 질문을 받으시고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신학생 시절, 본당에서 신자분들과 함께했던 사제생활, 그리고 지금은 본당을 떠나 몸과 마음을 쉬면서 주님을 만나고 있는 안식년을 보내면서 깨달은 진리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 분이 아니고,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셨습니다.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계셨고, 지금도 계시는 곳이 “받는 곳이 아니라 주는 곳이고, 섬김을 받는 곳이 아니라 섬기는 곳이고, 그리고 높아지는 곳이 낮아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 5장 46-4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도 하지 않느냐? 그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이 말씀을 되새기다가 “그렇다면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인가? 그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먼저 인사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이라는 동요가 있습니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예요. 산도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파아란 하늘 보고 자라니까요.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겨울엔 겨울엔 하얄 거예요. 산도들도 지붕도 하얀 눈으로 하얗게 하얗게 덮인 속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 파란 마음 하얀 마음 안에 계시는 분!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천국)는 너희 가운데부터 시작한다.”
테제 성가 중에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도다.”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 고운님들은 이미 천국에서 살고 계십니다. 지금 고운님들이 부족한 두레박 신부의 영적 일기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말씀과 함께할 수 있으니 행복하십니다. 반드시 꼭 행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도다.”
진짜로, 정말로! 아멘, 알렐루야! 주님의 자비하심을 고운님들에 펼쳐주시고 특히, 몸과 마음이 아픈 들과 간호하는 이들,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함께 펼쳐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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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15)
♧♧ 시편 60편 10절….
“모압은 내 대야. 에돔 위에 내 신발을 던지고 필리스티아 위로 승리의 환성을 올리노라.”
* 모압은 내 대야...
모압 족속은 사해 동쪽의 고원 지대에 정착하여 나라를 이루고 살던 자들입니다. 이들은 롯의 자손으로서(창세기 19장 36-37절. 참조)선민 이스라엘의 회중에서 들 수 없는 족속이었습니다.(신명기 23장 3-6절. 참조) 하느님이 이들을 ‘당신의 대야로 삼겠다.’라는 말은 이들을 자신의 종으로 삼겠다는 극단적인 모욕과 조롱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민수기 24장 17절. 참조) 다윗이 한 때나마 모압을 정복하여 조공을 받았으니(사무엘 하권 8장 2절. 참조), 하느님의 말씀은 이로써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훗날 이사야 예언자는 이들이 파멸하게 될 것을 예언하였으며(이사야서 15장 1절. 참조),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들이 진멸되어 포로가 될 것을 예언했는데(예레미야서 27장 3, 8절. 참조), 실제로 모압은 아시리아와 바빌론의 지배에 시달렸었습니다.
* 에돔 위에 내 신발을 던지고...
에돔 땅은 에사우의 후손들이 사는 곳으로(창세기 32장 3-4절. 참조) 산악 지대였습니다.(예레미야서 49장 16-17절. 참조) 그리고 에사우 후손들은 매우 전쟁을 좋아하는데(창세기 28장 40절. 참조), 과거에 이집트에서 탈출한 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하기 위해 에돔 영토를 통과하려 하자 가로막고 통과를 거절했었습니다.(민수기 20장 18-20절. 참조) 이러한 에돔에 대해 하느님이 당신의 신발을 던지겠다는 것은 에돔을 주인의 신이나 닦는 노예 민족으로 삼으시겠다는 말입니다. 이는 고대 근동 지역의 사람들이 상대방에 대한 지배의 표시로 신발을 던지던 행위에 근거한 상징적 표현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말씀은 다윗이 에돔을 정복함으로 실제로 성취되었습니다.(사무엘 하권 8장 13절. 역대기 상권 18장 13절. 시편 60편 8절. 참조)
* 필리스티아 위로 승리의 환성을 올리노라...
필리스티아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이후에 줄곧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로 지내온 족속입니다. 이들은 유다 지파의 영토와 인접한 지중해 해안가에 주요 다섯 도시를 세우고(사무엘 상권 5장. 참조)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위협했었습니다,(사무엘 상권 4장. 참조) 그런데 하느님이 ‘필리스티아 위로 승리의 환성을 올리겠다.’라는 말은 하느님이 저들로 하여금 전쟁에서 패배하게 함으로 저들이 비명을 지르며 탄식하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말씀은 다윗이 필리스티아의 세력을 결정적으로 꺾어 버림으로 성취되었습니다(사무엘 하권 5장 17-25절, 21장 15-22절. 참조)
♧♧ 시편 60편 11절….
"누가 나를 견고한 성읍으로 데려가리오? 누가 나를 에돔까지 이끌어주리오?"
‘견고한 성읍...’이란 성벽이 튼튼하게 구축되어 쉽게 함락당하지 않는 성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이것은 에돔의 한 성을 말하는데, 아마도 ‘셀라’ 즉, 수도 페트라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바위’라는 뜻의 ‘셀라’는 에돔의 요새 성읍으로서 후에 유다의 아마츠야 임금에게 점령을 당하였습니다.(열왕기 하권 14장 7절. 참조) 한편 이 구정의 ‘누가 나를 에돔까지 이끌어주리오?’라는 표현은 에돔을 쳐부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으로 인한 탄식이라기보다는 다윗의 군대로 하여금 에돔의 견고한 성읍을 격파하게 하실 분은 오직 야훼 하느님뿐이라는 다윗의 확신을 역설적으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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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 번에 한 가지만 하지 않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를 하면서 동시에 여러 가지를 같이 합니다. 이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순간이 운전할 때입니다. 전방을 주시하면서 운전해야지, 계기판도 봐야지, 거울 3개(백미러, 사이드미러)를 봐야 합니다.
이것뿐이 아니지요. 핸들도 잘 잡고 있어야 하고, 여기에 동승자라도 있으면 그와 대화를 해야 합니다. 음악도 듣고 또 내비게이션에도 주목하고 있어야 합니다. 운전 하나를 하는데도 이렇게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때 내 뇌 깊숙이 숨어 있는 것이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갑자기 다른 차가 제 차 앞으로 끼어들어 사고가 날 뻔했다면 어떨까요? 평상시에 화를 내지 않는 사람도 화가 갑자기 튀어나옵니다. 누구에게나 숨겨져 있는 무엇이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것이 나쁜 것이라면 나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좋은 것이라면 적극적으로 세상에 나와서 큰 힘이 되는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중에서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은 꼭꼭 숨겨져 있으면 안 됩니다.
내 마음 안을 환하게 비춰서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보아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라는 말뜻이 이해됩니다. 아마 이런 뜻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다시 일어나 다가오겠느냐고 그때를 묻지 마라. 오히려 너희가 그 나라에 합당한 자로 인정되도록 애써라. 그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너의 의지에 달렸고, 너는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어서 의로움을 인정받고 온갖 덕행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이는 누구든지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이로 여겨질 것이다.”
주님 사랑이 가득한 내 마음이라면, 그래서 의로움과 평화, 기쁨이 가득하다면 분명히 하느님 나라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의 생명을 죽이는 불의와 분쟁, 침울함 속에 있는 사람은 어디에 사는 것이 될까요? 안타깝게도 악마의 나라 시민일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내 마음을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어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 미움과 불의가 가득한 악마의 나라를 만들어 악마와 힘들게 사는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늘 강조하셨던 사랑만이 하느님 나라를 우리 가운데에 있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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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내가 행복하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감사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사실 많은 이가 행복해야 감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사고가 필요합니다. 감사함은 슬픔과 상심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내가 감사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감사할 일이 있어야 감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없을까요? 주위를 조금만 둘러봐도 감사할 일은 가득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행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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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문사 옆에는 신협이 있습니다. 가깝기도 하고, 가톨릭 신협이기에 거래하고 있습니다. 신협 이사님들과 식사를 할 때였습니다. 한 분이 제게 질문하였습니다. ‘한국에서는 어디에서 사목했습니까? 세상 사람의 기준으로 미국 가톨릭 평화신문으로 온 건 영전입니까? 좌천입니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질문입니다. 사제들은 순명을 서약했기에 주교님께서 말씀하시면 따라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좌천일 수도 있고, 영전일 수도 있겠지만 신앙의 기준으로 보면 새로운 도전이며, 새로운 기회입니다.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기회이고, 신문 제작이라는 조금은 설레는 일을 만나게 됩니다.
며칠 전입니다. 은행 지점장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거래하는 사람의 자산, 사업의 규모, 재무상태는 묻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지금 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일이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하는지, 그 일을 하면서 무슨 보람을 느끼는지 물었다고 합니다. 은행 지점장은 당연히 돈에 관해 말할 줄 알았는데 가치와 보람, 의미와 행복을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세상 속에서 살면서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던 지점장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은행의 임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좋은 사람이 있다는 건 희망이 있다는 겁니다.
신문을 만들면서 세상의 기준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걱정도 있었습니다. 수입을 생각해야 하고, 홍보 가야 하고, 광고주를 만나야 하고, 저의 능력으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신앙의 기준으로 생각하니 편해졌습니다. 아름다운 글, 따뜻한 글로 닫힌 사람의 마음을 열면 됩니다. 교회의 소식, 공동체의 소식을 전하면서 하나의 신앙을 나누면 됩니다. 영성, 신학, 성서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잠들었던 신앙을 깨우면 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문제를 바라보면 지식이 필요하고, 기술이 필요하고, 능력이 필요합니다. 신앙의 기준으로 문제를 바라보면 지혜가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하고,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제1 독서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혼자이면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자신 안에 머무르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사는 사람만 사랑하신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 걱정과 근심이 생길 때, 원망과 분노가 생길 때면 이렇게 질문한다고 합니다.
내가 언제 노래를 불렀던가?
내가 언제 춤을 추었던가?
내가 언제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던가?
내가 언제 나와 이야기를 했던가?
노래하고 춤추지 않으면, 자신만의 시간을 갖지 않으면, 자신과 대화하지 않으면 영혼은 병들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지금 만나는 사람을 사랑하고, 지금 하는 일을 사랑하고, 지금 주어진 시간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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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혜를 사랑합시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제1독서 지혜서의 말씀이 참 풍부합니다. 의인화한 지혜에 대한 설명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참으로 인간 무지의 병에 대한 처방은, 답은 이런 지혜뿐임을 깨닫습니다. 지혜를 사랑합시다. 지혜를 항구히, 열렬히 사랑하여 공부하고 실천할 때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저절로 무지의 병도 치유됩니다.
얼마전 타계한 차동엽 신부의 마지막 글과도 같은 '2019.11-12월호 사목정보' 잡지의 머릿글 “사람들은 내 얼굴에서 예수님을 본다”라는 제하의 서두 내용이 재미있었습니다. 죽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신부님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수의사는 개만 보고도 생면부지 개 주인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는 얘기가 있다. 개가 어딘지 모르게 주눅 들어 있으면, 그 주인이 난폭하리란 것쯤은 우리도 짐작할 수 있다. 반면 개가 구김살 없고 애교가 넘치면 그 주인이 애정을 많이 쏟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개의 행동거지에는 곧 개 주인의 성격이 반영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와 예수님의 경우도 그대로 들어 맞는 이야기같습니다. 얼마나 예수님을 잘 따르며 사랑받고 있는지 믿는 이들의 얼굴을 보면 잘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날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내 얼굴인지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지혜이자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지혜는 사랑입니다. 지혜와 사랑은 한 실재의 양면입니다. 참으로 항구히 열렬히 예수님을 사랑할 때 지혜로운 사람이, 사랑많은 자비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지혜서의 말씀이 모두 탐나지만 일부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지혜 안에 있는 정신은 명석하고 거룩하며, 유일하고 다양하고 섬세하며, 민첩하고 명료하고 청절하며, 분명하고 손상될 수 없으며, 선을 사랑하고 예리하며, 자유롭고 자비롭고 인자하며, 항구하고 확고하고 평온하며, 전능하고 모든 것을 살핀다. 또 명석하고 깨끗하며 아주 섬세한 정신들을 모두 통찰한다.
지혜는 하느님 권능의 숨결이고,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이어서, 어떠한 오점도 그 안으로 기어들지 못한다.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없는 거울이며,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이다.
지혜는 혼자이면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자신 안에 머무르면서도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밤은 빛을 밀어내지만, 악은 지혜를 이겨 내지 못한다. 지혜는 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퍼져가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한다.”
정말 탐나는 지혜의 본성들입니다. 말씀이신 성자 예수님이, 성령이 연상됩니다. 무지의 악에 대한 처방도 이런 지혜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지혜의 강생이 바로 파스카의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하여 예수님을 하느님의 지혜라 일컫기도 합니다. 이런 지혜에 대한 사랑은 그대로 예수님 사랑과 일치합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두가지 충고 말씀을 주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사람의 아들의 날’에 대해서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 저기에 있다.‘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을 닮은 지혜로운 사람들은 밖으로 하느님 나라를 찾아 나서지 않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삽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는 바로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권고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하더라도 너희는 결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결코 경거망동, 부화뇌동하지 말고 제 삶의 자리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람이 진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최종적 성취요, 아무도 알 수 없기에 이 모두는 하느님께 맡기고 우리가 할 일은 늘 깨어 우리 삶의 자리에 충실하는 것뿐이겠습니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올지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어느 현자의 말도 생각납니다.
새삼 부정적 비관론자가 되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긍정적 낙관론자가 되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생각하는 대로, 보는 대로, 믿는 대로 됩니다. 부정적 비관론적으로 인생을, 세상을 보면 매사 그렇게 보이고, 긍정적 낙관론적으로 인생을, 세상을 보면 매사 그렇게 보입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은 말씀의 사람들이자 희망의 사람들이고 긍정적 낙관론자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지혜로운 '말씀의 사람',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희망의 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 말씀은 영원하시고, 하늘에 든든히 세워졌나이다. 당신 말씀 밝히시면 그 빛으로, 미련한 이들은 깨치나이다.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빛나게 하시고,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쳐 주소서.”(시편119,89.130.13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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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으면>
좋은 곳, 아름다운 곳에 머물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특별히 신앙인은 더없이 좋은 곳, 하느님의 나라에 머물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17,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묵시록에는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모시는 곳에 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또 사는 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곧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내 마음 속에 오시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느님의 통치, 그리스도의 주권이 내 마음에 미치면 하느님의 나라요, 안 미치면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는 육적인 눈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잘 볼 수 있습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내게는 이제 천당 영복이 시작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영복을 얻고자 한다면 하느님만을 열심히 공경하시오” 하고 말씀하시며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는 “ ‘내 눈으로 천당과 지옥을 보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천당과 지옥이 있음을 믿으리요?’ 하는 이는 마치 소경이 제 눈 어두운 것을 생각하지 않고, 눈으로 하늘을 보지 못하니 해와 달이 있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고 말씀하시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였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먼 훗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13,34)는 새 계명 안에 성장되고 마지막 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 번 일상 안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기쁨 속에 있고, 거기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슬픔 속에 있습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사랑하십시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눈물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세 번씩이나 넘어지시며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우리를 위한 사랑의 발걸음이었다면 우리도 어떤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사랑의 끈을 결코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곳이 하느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왔고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믿는 이들이여,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합시다.”(성 베르나르도)
그러나 “안락의자에 앉기만을 원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성 필립보 네리)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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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루카 17,20)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해 질문합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언제"입니다. 대개는 삶이 팍팍하고 어려워질수록, 앞이 안 보이고 미래가 절망스러울수록 종말에 관심을 더 갖기 마련입니다만, 바리사이들이 실상 그런 처지는 아니지요. 그래도 하느님의 나라는 계층을 막론하고 유다인들의 공통 관심사였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이방인과 강대국의 영향권 아래서 민족적 정체성을 어렵게 지켜나가면서, 메시아의 오심으로 새롭게 일어날 자유와 해방의 시대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주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는 세상이지요. 그런데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으로서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지금 여기"가 곧 하느님의 나라임을 바리사이들은 놓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답변 안에는 애써 메시아의 도래와 현존을 외면하는 바리사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움이 묻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는 그분의 재림으로 완성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완성을 향해 가는 중이고 우리는 그 사이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루카 17,25)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는 조건이 붙습니다. 고난과 배척, 즉 수난과 죽음의 강을 먼저 건너야 합니다. 예수님이 겪으신 겟세마니 고뇌는 이를 온전히 받아들인 순명의 기도였지요. 죽음을 거쳐 피어난 생명만이 건너감, 파스카를 완성할 수 있으니까요.
제1독서는 '지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지혜를 가리키는 말씀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아름답고 유려한지 읽는 내내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지혜를 설명하기 위해 이토록 가치로운 단어들이 가득 나열되었다는 자체는, 사실 어떤 인간의 단어로도 지혜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반증이 됩니다. 아무리 최고의 의미를 부여해도 모자란다는 뜻이니까요.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없는 거울이며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이다."(지혜 7,26)
지혜를 설명하는 이 모든 아름답고 훌륭한 가치들이 지혜이신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함께하시는 세상이야말로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인 것입니다.
"지혜는 ...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지혜 7,27)
우리 안에 주님을 모시고 있다면 이미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또 그분 지혜의 한 조각이라도 품고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벗이고 말씀의 사람인 예언자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삶의 고뇌와 고통 중에 하느님과 누릴 영원한 일치의 희망을 놓지 않고 하느님 모상인 자신의 가치를 소중히 지켜낸다면,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이 언제가 되어도 우리는 단박에 그분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고, 그 환희와 영광은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벗이요 예언자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또 오늘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모든 수험생들을 축복합니다. 애쓴 보람이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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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절망의 순간에 신은 가장 가까이 있다
영혼은 자기가 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낄 때, 즉 절망의 순간에 신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 신성한 그분은 텅 빈 영혼을 채워 줄 수 있고, 무한한 그분은 근심에 찬 영혼에게 평화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에게 집착하는 오만한 영혼은 은총을 받을 수 없다. 현대인은 패배를 맛보았다. 진보나 과학에 대한 현대인의 오만한 기대는 희망대로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사람들은 자신을 낮추는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
여전히 자신 속에 갇혀 있고, 저 너머의 어떤 것을 전혀 보지 못한다. 현대인이 자아의 텅 빈 감방으로부터 자신을 구출해 달라고 신에게 미친 듯이 호소할 때가 그리 멀지는 않았다.
-풀턴 J. 신,「행복에 이르는 길」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 불안합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비록 파멸의 전쟁이 우리를 위협한다고 해도 우리 시대가 겉보기보다는 그다지 악화된 상태가 아니라는 이유가 거기 있다. 현대인은 아직 신에게 돌아가진 않았지만,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는 돌아갔다.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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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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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호들갑 금지>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 21)
이리저리 쏠리는 분주함
여기저기 뺏기는 마음이 중심을 잃게 합니다.
산만하면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고,
불안하면 할 수 있는 것도 못하는 수가 있으며
분노하면 내 안에 독이 퍼집니다.
호들갑 금지, 중심 잡고 삽시다.
어떤 상황에서든 중심 잡고 있으면
모든 게 제자리를 잡게 됩니다.
"엉뚱한데 에너지 쏟지 말고
지금의 자리에서 하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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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 21)
삶 가운데에
십자가가 있고
우리 마음이
있습니다.
삶의 기쁨과
삶의 슬픔이
우리 가운데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십자가로
담아내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와 같이
십자가로부터
시작되는 마음의
나라입니다.
십자가에서
뜨거운 사랑의
하느님을 만납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믿음이 필요 없는
때는 한순간도
없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십자가의 믿음을
통해 전달됩니다.
믿음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켜줍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십자가로
하나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만나게 되는 만남의
나라 십자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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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주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구하고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살아내는 기쁨입니다.
욕심과 허영에 들뜬 우리들 마음에 하느님의 나라는'너희 가운데에 있다.'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바꾸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행복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놓치는 것은 언제나 우리 자신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인내하는 우리들 마음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비워내는 우리들 마음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감사하는 우리들 마음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믿는 만큼 우리들 마음에 자라납니다.
일상의 평범함 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는 존재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는 받아들임의 나라입니다.
서로를 받아들일 때, 하느님 나라의 빛은 더더욱 밝게 빛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언제나 낮은 곳에 존재합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하느님 나라는 오늘도 우리의 선택을 기다립니다.
사랑과 겸손의 진심어린 기도가 바쳐지는 우리의 마음이길 기도드립니다. 중심을 잡고 살아간다면 시련도 고통도 우리의 봉헌으로 향기로워 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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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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