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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학손(姜鶴孫)
[생원시]성종(成宗)11년(1480)경자(庚子)식년시(式年試)[생원]3등(三等)34위(64/100)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AC15D559C190U9999X0
자 문보(聞甫)
본관 진주(晉州)
거주지 경(京)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승훈랑 사지(承訓郞司紙)
[가족사항]
[부]
성명 : 강희맹(姜希孟)[文]
공신 : 추충정난익재[대]순성명량좌리공신(推忠定難翊載[戴]純誠明亮佐理功臣)
품계 : 숭정대부(崇政大夫)
관직 : 행의정부우찬성(行議政府右贊成)
겸직 : 겸 지경연춘추관사(兼知經筵春秋館事)
봉호 : 진산군(晉山君)
[출전]《성화16년경자3월초3일사마방목(成化十六年庚子三月初三日司馬榜目)》(『細村先生實紀』(국립중앙도서관)[한古朝57-가618])
2005-11-30《성화16년경자3월초3일사마방목(成化十六年庚子三月初三日司馬榜目)》(『細村先生實紀』(국립중앙도서관))을 저본으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성종 68권, 7년(1476 병신/명성화(成化) 12년) 6월 1일 임신 2번째기사
의정부, 육조의 당상관 및 증경정승 등이 강희맹의 강순덕 후사계승 여부를 논하다
명하여 의정부(議政府), 육조(六曹)의 당상관(堂上官) 및 증경정승(曾經政丞) 등을 불러 강희맹(姜希孟)이 강순덕(姜順德)의 후사(後嗣)를 계승하는 것이 마땅한지 아니한지를 의논하게 하니,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 상당 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 좌의정(左議政) 조석문(曹錫文), 무송부원군(茂松府院君) 윤자운(尹子雲),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김국광(金國光), 우찬성 윤필상(尹弼商), 이조판서(吏曹判書) 홍응(洪應), 병조참지(兵曹參知) 정괄(鄭佸)이 의논하기를,
“입후(立後)하는 것은 동종(同宗)의 지자(支子)로 삼는 것을 허락하고, 장자(長子)는 본종(本宗)의 제사를 받들게 합니다.
강석덕(姜碩德)은 단지 아들이 두 사람 있었는데, 장자(長子)가 강희안(姜希顔)이고, 다음이 강희맹(姜希孟)입니다. 그러니 강희맹으로 강순덕(姜順德)의 후사(後嗣)를 삼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지금 강희안(姜希顔)이 후사가 없이 죽었으니, 강희맹은 마땅히 본종의 제사를 받들어야 합니다.
가령 강희맹의 차자(次子)로 강희안의 후사를 삼아서 본종의 제사를 받들게 한다면, 이는 입후(立後)를 중하게 여기고, 본종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니,
마땅히 입후를 파하고 본종으로 돌아가게 하여야 합니다.”하였고,
우참찬(右參贊) 어유소(魚有沼), 공조판서(工曹判書) 김교(金嶠), 형조판서(刑曹判書) 정문형(鄭文炯), 이조참판(吏曹參判) 이파(李坡), 형조참판(刑曹參判) 정숭조(鄭崇祖), 호조참판(戶曹參判) 이서장(李恕長)은 의논하기를,
“단지 두 형제(兄弟)만 있는 자는 그 아우가 후사가 되는데, 그 형이 죽으면 아우는 본종(本宗)으로 되돌아와서 제사를 받드는 것은 고금의 변경시킬 수 없는 정해진 이치입니다.
그러나 강희맹(姜希孟)이 입후한 것은 두 집의 부모(父母)들이 모두 살아있을 때이고, 또 《대전(大典)》6300)이 있기 전이므로,
지금 바꾸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간의 정리(情理)로 보아 둘 다 어그러지니, 그전대로 두는 것이 옳겠습니다.”하였고,
병조참판(兵曹參判) 유권(柳眷), 예조참의(禮曹參議) 안관후(安寬厚), 공조참의(工曹參議) 이육(李陸)은 의논하기를,
“《대전(大典)》에 정실(正室)과 첩(妾)에서 자식이 없는 자는 관청(官廳)에 고하여 동종(同宗)의 지자(支子)를 세워 후사를 삼으며, 만약 적장자(嫡長子)가 없으면 중자(衆子)가, 중자가 없으면 첩자(妾子)가 제사를 받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주(註)에는, 두 집의 아비가 함께 입후(立後)를 명하되, 아비가 죽었으면 어미가 관청에 고하여야 하며, 적장자는 단지 첩자(妾子)만 있어서 아우의 아들로 후사를 삼기를 원한다면 들어주고, 스스로 첩자와 함께 따로 한 지파(支派)를 삼기를 원한다면 또한 들어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강희맹(姜希孟)은 이미 두 집 부모의 명으로 강순덕(姜順德)의 후사가 되었으니, 부자(父子) 사이의 인륜(人倫)이 이미 정해진 것인데, 이제 강희안(姜希顔)이 후사가 없다하여 본종에 돌아가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어찌 아침에는 아버지라 했다가 저녁에 아버지라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강희안은 이미 강희맹의 둘째 아들 강학손(姜鶴孫)으로 후사를 삼았으니,
강학손이 자연 대종(大宗)이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더욱이 강순덕이 살아있을 때 강희맹으로 아들을 삼았고, 또 공신(功臣)의 아비로서 추증(追贈)까지 하였는데, 이제 아비가 되지 아니한다고 한다면 정리(情理)에 또한 온당(穩當)하지 못합니다.
《대전》에 의거하여 강희맹의 둘째 아들로 하여금 본종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강희맹은 그대로 강순덕의 후사를 삼는 것이 옳겠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영의정(領議政)등의 의논이 지당(至當)하다. 그러나 두 집안의 아비가 살아 있을 때 정한 것이고, 또 강희맹의 차자(次子)가 이미 강희안의 본종을 계승하였으니, 또한 제사를 지낼 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옛날에 후사를 삼고 아들을 삼는 법(法)이 있었는데, 이제 갑자기 고쳐서 아침에는 아비가 되었다가 저녁에는 아비가 되지 않게 한다면 인정(人情)에 어떻겠는가?”하였다.
정창손등이 합사(合辭)하여 아뢰기를,
“상교(上敎)가 윤당(允當)합니다.
그러나 모두 정리(情理)에 있어서 마땅할 뿐이고, 본종을 중하게 여기는데 있어서는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옳지 아니합니다. 지금의 의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한 번 정해진 법을 위하는 것입니다. 만약 정리로 논한다면 이러한 것을 끌어대는 자들이 많아져 본종을 가볍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하니,
전교하기를,
“강희맹은 강순덕의 후사가 된 지 이미 오래 되었고, 더욱이 강학손이 이미 강희안을 계승하여 대종(大宗)이 되었으니, 그대로 두는 것이 어떠한가?”하였는데, 정창손등이 아뢰기를,
“지금은 대종을 중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하니,
임금이 이에 정창손등의 의논을 따랐다.
註6300]《대전(大典)》: 《경국대전(經國大典)》.
○命召議政府、六曹堂上及曾經政丞等, 議姜希孟繼順德後當否。 領議政鄭昌孫、上黨府院君韓明澮、左議政曺錫文、茂松府院君尹子雲、光山府院君金國光、右贊成尹弼商、吏曹判書洪應、兵曹參知鄭佸議: “立後許同宗支子爲之者, 以長子奉本宗祀也。 碩德只有二子, 長希顔, 次希孟。 希孟之爲順德後宜也, 今希顔無後而死, 希孟當奉本宗之祀。 假令希孟次子爲希顔之後奉祀本宗, 則是立後爲重, 本宗爲輕, 宜罷立後還祀本宗。” 右參贊魚有沼、工曹判書金嶠、刑曹判書鄭文炯、吏曹參判李坡、刑曹參判鄭崇祖、戶曹參判李恕長議: “只有兩兄弟者, 其弟爲人後, 其兄死, 其弟還祀本宗, 古今不易之定理也。 然希孟之立後, 在兩家父母俱存之時, 且在《大典》之前, 今而易之, 於生亡情理兩乖, 仍舊爲便。” 兵曹參判柳睠、禮曹參議安寬厚、工曹參議李陸議: “《大典》 ‘嫡妾俱無子者, 告官立同宗支子爲後, 若嫡長子無後則衆子, 衆子無後則妾子祀。’ 註, 兩家父同命立之, 父沒則母告官。 嫡長子只有妾子, 願以弟之子爲後者聽, 欲自與妾子別爲一支, 則亦聽。 希孟旣以兩家父命爲順德之後, 父子之倫已定, 今以希顔無後, 還本宗不可。 豈有朝而父之, 暮而不父者乎? 希顔旣以希孟第二子鶴孫爲後, 則鶴孫自爲大宗無疑。 況順德生時以希孟爲子, 又以功臣之父追贈, 今而不以爲父, 則於情理亦未穩。 依《大典》, 以希孟第二子奉本宗, 希孟仍爲順德後便。” 傳曰: “領議政等議至當。 然兩家父生時所定, 且希孟次子已繼希顔本宗, 亦非無祀。 古有爲之後爲之子之法, 而今遽改之, 使朝而爲父, 暮而不父, 於人情何?” 昌孫等合辭啓曰: “上敎允當。 然皆在情理之中耳, 其重本宗, 則不可如是。 今之議要爲一定之法。 若論情理, 則援此者多而本宗輕矣。” 傳曰: “希孟爲順德後已久, 況鶴孫已繼希顔而爲大宗, 仍久何如?” 昌孫等啓曰: “今當以大宗爲重。” 上乃從昌孫等議。
성종 68권, 7년(1476 병신/명성화(成化) 12년) 6월 2일 계유 6번째기사
강희맹으로 강석덕에게 승사하게 하고 항식으로 삼게 할 것을 예조에 전지하다
예조(禮曹)에 전지하기를,
“무릇 입후(立後)하는 자는 동종(同宗)의 지자(支子)로 삼도록 하는 것은 장자(長子)로 하여금 본종(本宗)의 제사를 받들게하려 하기 때문이다.
강석덕(姜碩德)은 단지 아들이 강희안(姜希顔), 강희맹(姜希孟) 두 사람만 있고, 그 아우 강순덕(姜順德)은 후사(後嗣)가 없었기 때문에 강희맹으로 후사를 삼았으니, 예(禮)에 있어서는 마땅하다.
그러나 강희안은 아들이 없이 죽었으니, 강희맹으로서는 그를 낳아준 어버이를 버리고 숙부(叔父)를 승사(承祀)할 수가 없다.
강희맹으로 하여금 강석덕을 승사하게 하되, 이후부터는 모두 이것에 의거하여 영구히 항식(恒式)을 삼도록 하라.”하였다.
○傳旨禮曹曰: “凡立後者許同宗支子爲之者, 以長子承祀本宗故也。 姜碩德只有二子希顔、希孟, 而其弟順德無嗣, 故以希孟爲之後, 於禮當矣。 希顔無子而死, 希孟固不可捨其所生而承祀叔父。其令希孟奉祀碩德,今後皆依此永以爲式。
성종 94권, 9년(1478 무술/명성화(成化) 14년) 7월 14일 계유 5번째기사
이조판서 강희맹이 이원좌의 투서에 대하여 해명하는 글을 올리다
이조판서(吏曹判書) 강희맹(姜希孟)이 상서(上書)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신이 전일에 사직(辭職)하는 글을 올렸는데, 전교하기를, ‘지금 너의 청을 들어준다면 나도 또한 그 사람의 술책속에 말려든 것이 되니, 사퇴하지말라. 내가 마땅히 끝까지 추궁하여 찾아 잡아서 통쾌하게 징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명을 받고 견디며 참고서 직사(職事)에 나가고 있는 것은, 간인(姦人)이 잡힌 뒤에는 신이 그 사람과 함께 법사(法司)에 나가서 낱낱이 변명하여 질정(質正)하기를 바라는 것인데, 지금 그 형편을 보니 기다리기를 기필(期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만세(萬世)후에 누가 신의 옳고 그름을 알겠습니까? 신이 감히 비방받은 말을 가지고 조목조목 따져 스스로 밝히겠습니다.
근래의 대신들이 한번 탄핵을 입게되면 서로 다투어 변명(辨明)을 하는데, 신은 이런 풍조가 옳지못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나, 신이 대간(臺諫)에게 탄핵을 입은 것도 아니며, 사람들과 더불어 쟁변(爭辨)하려는 것도 아니고, 이제 악명(惡名)을 입어서 끝내 스스로 밝히기가 어렵게 되었기 때문에 감히 이와 같이 모독(冒瀆)하는 것입니다.
전조(銓曹)는 중요한 기관이므로, 조금이라도 비방을 입게되면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될 것인데, 하물며 신의 성품이 본래 어리석어 이같이 비방을 만나게되니, 마음[方寸]이 어지러워 일에 임해서도 착오(錯誤)의 실수가 없지 아니할 것이기에 신의 직책을 사면하여 여생을 보전하게 하여 주시도록 청합니다.”하였는데,
그 상소에 이르기를,
“신이 일찍이 문중자(文中子)8706)가 말한 것을 보건대 ‘비방을 그치게하는 데에는 변명하지않는 것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비방은 남들이 믿지않는데서 일어나는 것이니, 구설(口舌)로 다투고자 하는 것은 도리어 나쁘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직불의(直不疑)8707)가 주옹(主翁)8708)의 금(金)을 훔쳤다는 혐의에 변명하지않았는데,
마침내 크게 판명되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직불의가〉그 금(金)을 보상해 주었을 때에는 사람들이 필시 금을 훔친 것으로 지목하여 의심하지 아니하였으나, 태연하게 처신하면서 나쁜 평판을 감수하기를 사양하지않았던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 어찌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의심받는 것에 대하여 분개하지 않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변명하지 아니한 까닭은 반드시 생각하기를, ‘사람들의 말이 비록 한때에 현혹(眩惑)되었더라도 옳고 그름은 영원히 어둡지아니하여 진실로 자연히 밝혀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참으로 다행이고, 비록 그것이 밝혀지지 않더라도 이는 나의 불행이니 또한 누구를 허물하랴? 믿을 수 있는 것은 천리(千里)의 바름[正]과 인심(人心)의 공변됨[公]과 신명(神明)의 곧음[直]뿐이다.’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 뒤 동사(同舍)에서 금(金)을 되찾게 되었을 때 주옹(主翁)이 자기의 불민(不敏)함을 깊이 사과하기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이 그의 큰 도량에 감복하여 대인군자(大人君子)로서의 이름이 만세토록 없어지지 아니할 것을 의심치 아니하였으니, 이른바 ‘비방을 막는데에는 변명하지않는 것만한 것이 없다.’고 함은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오늘날 만난 비방은 다 조정의 정치를 탁란(濁亂)하는 일이니, 직불의(直不疑)가 금을 훔쳤다고 한 일에 비하면 그 해(害)가 더욱 심하므로, 의리상 변명하지아니할 수 없습니다.
다만 비방하는 글을 받은 이래로 성상(聖上)의 노여움이 진동하셔서, 기어이 투서한 자를 찾아내려고 중외(中外)에 구구(購求)8709)하여 남김없이 수색[搜剔]하시고, 또 부드러운 교지를 내리시어 소신(小臣)을 위로해주시고,
그대로 관직에 있게하셔서, 성감(聖鑑)이 밝게 비치시어 미세한데까지 밝혀지지않는데가 없으니, 어찌 신이 스스로 변명하기를 기다리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비방하는 말을 지어낸 사람은 흉교(兇狡)하고도 남음이 있는데, 어찌 익명(匿名)의 글로써는 저를 죄주고 저를 배척하지 못할 줄을 몰랐겠습니까?
그러기에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은 그 뜻이 세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 첫째는, 죄과(罪過)를 주워모아 가지고 나직(羅織)하여 비방을 만들어서 몰래 궐내(闕內)에 던지면 성상께서 반드시 거두어 보시고 일이 대신(大臣)에게 관계되어 유중불하(留中不下)8710)할 것이므로, 비록 드러나게 해를 받는 일은 없다고 하더라도 역시 어느 정도 중앙의 신하들이 성조(聖朝)에서 완전할 수가 없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상께서 신에게 원수되는 집이 있는가?
또 흉한 재해(災害)가 있는가?
가도(家道)가 또한 부정(不正)한가 의심하셔서 원자(元子)8711)를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명하시게 함으로써 분개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유쾌하게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신의 악명(惡名)을 사방에 유포(流布)해서 사람들의 청문(聽聞)을 더럽히게 하고, 청사(靑史)에 오점(汚點)을 남기게하여 만세(萬世)에 오명(汚名)을 미치게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다행하게도 성상(聖上)의 일월(日月)같이 밝으심에 힘입어서 간계(奸計)가 실행되지 못하게하시니, 이는 다만 소신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나라 만세의 큰 행복입니다.
그러나 간사한 사람의 계략이 그 중의 두 가지는 실행하지 못하더라도 그 중의 한가지는 실행될 것입니다. 무엇이냐하면 비방(誹謗)의 말이 유포(流布)되어 외방(外方)에까지 널리 퍼지게될 것이니, 어찌 능히 집집마다 일러주며 가구(家口)마다 깨우쳐 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길거리의 평론과 항간의 물의가 반드시 죄를 신(臣) 자신에게 돌리게될 것이니, 이것이 바로 간계(奸計)가 실행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아아, 신은 이미 성대(聖代)의 완전한 인물(人物)이 못되므로 한(恨)을 품고 종신(終身)할 뿐입니다. 다만 죄과(罪過)를 거짓으로 꾸며서 대신들을 몰래 모함하고, 비방하는 글을 주살[繳]로 궐내에까지 던져서 신료(臣僚)들로 하여금 두려워서 발을 움츠리고 숨을 죽이게하며, 간녕(奸佞)한 자가 술책을 가지고 간사한 것을 행하게되니, 결코 국가의 복(福)이 아닙니다.
국가에서 구포(購捕)하기를 심히 급하게하니, 마땅히 간사하고 교활한 자들이 잡혀 나와서 드러나게 천벌[天誅]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 비방한 자가 미말(微末) 하류(下流)가 아니라면 생긴 모습을 똑똑히 아는 사람이 더러 있다하더라도 누가 즐겨 대단히 교활한 사람과 원수를 맺어서 멸문(滅門)의 화(禍)를 스스로 취하려 하겠습니까?
사람이 미치광이가 아닌 바에야 결코 이것을 말하지아니할 것입니다.
신이 견디며 참고서 관직에 나아가는 것은, 하늘이 대간(大姦)을 싫어하여 정적(情跡)을 나타나게 드러내기를 기다린 뒤에, 신이 비방자들과 더불어 함께 법정[廷尉]에 나아가서 하나하나 변론하고 질정할 것을 바라서입니다마는, 불행하게도 비방자들이 오래 천벌[天誅]을 피하여 끝내 반드시 그렇게 될지를 알 수없게 된다면, 만세(萬世)의 뒤에 누가 능히 신을 위하여 변명할 것입니까? 그래서 신이 감히 비방의 말을 가지고 하나하나 스스로 밝히려하는 것이니, 신에게 만일 죄가 있다면 말이 비록 비방자에게서 나왔다하더라도 또한 마땅히 용서하지 못할 것이요, 만일 죄가 없다면 명교(明敎)를 내리시어, 사방으로 하여금 참소를 물리치는 성상의 현명함과 비방을 만난 소신의 억울함을 석연하게 알도록 하신다면, 거의 간웅(奸雄)으로 하여금 투서의 무익(無益)함과 성명(聖明)을 속일 수 없음을 알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신이 감히 자애(自愛)하여서가 아니라 반복하여 생각해보니, 허물이 있는 사람은 청반(淸班)을 모독(冒瀆)하고 앉았을 수 없고, 훼방(毁謗)을 입은 뒤에는 그대로 중대한 권한을 잡고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빌건대 신의 중임(重任)을 해직시켜서 한지(閑地)에 두어주시고 특별히 곡진하게 수행(遂行)하시는 인덕(仁德)을 이루어주신다면 다행해마지 않겠습니다.
비방자(誹謗者)는 원자(元子)가 신의 집에 기탁(寄托)하고 있는 것을 잘못이라고 하고, 또 신의 자식들이 갑자기 많이 죽은 것을 가리켜 재앙이라고 말하며, 또 주가(主家)에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이 낭비를 하면서 귀한 손님들의 접대와 부조(扶助)라고 핑계대어 말한다고 하고, 포백(布帛)과 재물(財物)이 네 첩(妾)과 자녀들의 집에 구름같이 쌓여있다고 하고, 신(臣)이 총애를 받음이 이러하니 반드시 그 소임에 오래 있을 것이므로 벼슬이 만족하지 못한 자와 개월(個月)이 차지않은 자들이 또한 모두 미리 뇌물을 바치게될 것이라고 하니, 신은 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원자(元子)께서 지난해 11월 27일에 갑자기 신의 집으로 옮겨오셨는데, 그때 승정원(承政院)에서 의논하여 10여 대신의 집을 들어 아뢰었으나, 성상께서는 신의 집 자식이 사망한 일과 재앙이 있고 없음을 묻지아니하시고 또한 급속하게 오도록 하셨습니다.
성상께서 이미 묻지아니하셨는데, 신이 먼저 그것을 아뢴다면, 이는 꺼려서 거절하는 혐의가 있게되겠으니, 죄가 또한 가볍지아니하겠고, 더구나 자녀를 둔 사람으로서 누가 영락(零落)8712)의 가환(家患)이 없겠습니까?
그것을 흉(凶)으로 삼아 먼저 스스로 계달(啓達)한다는 것은 신의 생각이 미치지못한 것입니다.
원자께서 처음 신의 집에 오셨을 때 몸이 좀 편찮으셔서 신이 늙은 아내와 더불어 밤낮으로 안아 모시면서 몸둘바를 모르고, 다만 황천상제(皇天上帝)와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영령(英靈)이 묵묵히 도우실 것을 바라고 있었을 따름이었습니다. 금년 정월 이후로 기분(氣分)이 스스로 안정되시어 날로 충실하고 튼튼해지므로, 신은 날마다 국본(國本)8713)을 보호하기에 능히 끝까지 잘하지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또한 유독 무슨 마음으로 이로 인해 이익을 삼으려고 하겠습니까?
신의 집은 본래 가난하여 〈원자의〉시종(侍從) 여러 사람들에게 줄 만한 재물[財帛]도 없습니다. 가령 있다하더라도 성상의 교지(敎旨)가 엄중하여 한 가지 실끝만한 미미한 것이라도 또한 반드시 계달(啓達)할 것인데 어떻게 낭비를 하겠으며, 사람들이 뇌물줄 것을 모아서 성상의 교지를 어기겠습니까? 신의 못생긴 첩(妾) 두 사람은 다 신의 집안에서 일하고 있을 뿐 도성아래에 따로 집을 가진 자가 없는데, 뇌물이 어디에서 오며, 받은 자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더구나 원자께서는 공진(供進)받은 물품이 본래 있어서 그것을 쓰고도 남음이 있고, 시종(侍從)하는 여러 사람도 아래로 천소자(賤少者)에 이르기까지 또한 다 반찬이고 밥이고의 물품이 있어서 또한 쓰고도 남음이 있는데, 신이 또한 무슨 마음으로 사람들로부터 널리 청해서 그로 인하여 이익을 삼겠습니까? 이것은 자기의 간사한 마음으로써 남의 마음을 헤아린 것입니다.
비방자(誹謗者)가 말하기를, ‘유효장(柳孝章)의 아들 유인호(柳仁濠)는 성품이 본래 용렬(庸劣)하여 맡은 일을 감당할 수가 없는데, 몇 달이 되지도않은 사이에 발탁하여 언관(言官)8714)으로 앉혔다.’고 하고, 또 ‘김봉(金崶)을 마음에 벼슬을 시키고자하여 제마음대로 법을 세워서, 생원(生員)이나 진사(進士)는 보거(保擧)없이 서용(敍用)하는 것이 아닌데도, 김봉을 제수하여 참봉(參奉)으로 삼았다가 상피(相避)8715)때문에 직무를 바꿀 때 제마음대로 능참봉(陵參奉)을 시켰다.’고도 하며, 정성근(鄭誠謹)은 종제(終制)8716)한 뒤에 도목정사(都目政事)8717) 때마다 후보자[望]에 들게하여 전적(典籍) 벼슬을 제수하였는데, 이 모두가 신의 첩의 연고로 인한 것이라고 하니, 신은 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유인호(柳仁濠)는 신과는 같은 마을에 살아서 젊어서부터 그의 사람됨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문과에 셋째로 합격되어 감찰(監察)에 제수된 지가 이미 오래인데, 정언(正言)의 자리에 궐원(闕員)이 있으면 준례로 마땅히 주의(注擬)를 하되, 갑과(甲科)8718)나 을과(乙科)에 이름이 든 사람은 내력(來歷)을 불문(不問)하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사람을 쓰는 구법(舊法)입니다.
신이 어찌 사사로이 거용한 것이겠습니까?
또 김봉(金崶)이 참봉(參奉)을 제수받은 것은 정유년8719) 7월 24일로 박숙진(朴叔蓁)의 보거(保擧)로써 후보자[望]에 들어 생원, 진사를 제수받은 것이니, 보거(保擧), 천용(薦用)의 법대로 제수되었고,
그해 8월 14일에 판하(判下)8720)된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김봉(金崶)을 위해서 법을 세운 것이겠습니까?
대저 선비들이 벼슬에 들어올 때 초임(初任)으로 외직(外職)이 되고는 외직을 경유해서 내직으로 들어오므로, 내직으로서 외직을 볼 때에는 비교해서 한 등급쯤 낮추어 봅니다.
신이 만일 김봉을 돕고 싶었다면 상피(相避)로 관직이 바꾸게 되었을 때에 반드시 서울안의 좋은 관직을 가려서 줄 것이지, 어찌 능참봉을 주었겠습니까? 정성근(鄭誠謹)은 일찍이 사평(司評)으로 있을 때 번극(繁劇)한 일을 평정하여 다스리는 것으로 소문났는데, 부상(父喪)을 당해서는 장사지내는 것을 예법에 맞게하고 3년동안 한 번도 서울에 들어오지 아니하여 사림(士林)들이 다 그의 효(孝)를 칭찬하였습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나라를 위하여 사람을 가려쓸 때 마땅히 그의 덕행(德行)과 마음가짐[心術]이 취할 만한 사람을 먼저 써야할 것이니, 어찌 달리 구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문신(文臣)가운데 거상(居喪)을 마친 사람과 파직(罷職)이나 산직(散職)되어 제수해야할 사람들을 치부(置簿)하게 하여서, 도목정사(都目政事)때마다 주의(注擬)하도록 하는데, 서용(敍用)이 거의 다 되도록 정성근이 오랫동안 알맞은 자리를 얻지못하였으므로, 신은 오히려 늦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인신(人臣)의 직책으로 전조(銓曹)의 주의(注擬)를 맡는 일만큼 중한 것이 없기에, 비록 가까운 친족(親族)이나 인아(姻婭)8721)라 하더라도 진실로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무사(膴仕)8722)에 올리지못하는데, 더구나 미미한 첩(妾) 때문에 나라의 정치를 어지럽게 하겠습니까?
또 신의 첩은 사직(司直) 김귀년(金龜年)에게 시집간 유효장(柳孝章)의 계집종[婢]의 소생[所産]으로서, 법에 따라 속신(贖身)하여 양인(良人)이 된 지가 오래입니다. 유효장이 신에게 증여(贈與)해준 것도 없거니와 신 또한 유효장에게 덕(德)을 본 사실이 없는데, 어찌 감히 이로써 한 가문(家門)을 천발(薦拔)8723)하겠습니까? 신은 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비방자(誹謗者)가 말하기를, ‘내자시제조(內資寺提調) 이예(李芮)가 영안감사(永安監司)가 되자, 즉각 사촌아우 심한(沈瀚)을 독망(獨望)8724)으로 하여 제조(提調) 벼슬을 빼앗아주었다.
〈제조가〉비록 실권이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구사(丘史)8725)를 많이 거느리게 되므로, 넉넉히 그로써 생업을 영위할 수 있어 이익이 막대하기 때문에 비록 삼망(三望)의 경우일지라도 사사로움을 행함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그것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겨서 독망(獨望)을 하였으니, 그 방자한 마음이 이와 같다.’고 하니, 신은 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신이 이조(吏曹)에서 참의(參議)로부터 판서(判書)에 이르기까지 십수년을 근무해왔기에 제조(提調)를 주의(注擬)하는 격식을 자세히 알거니와 전부터 원래 삼망(三望)에 상피(相避)의 법이 없어, 이조(吏曹)의 당상관(堂上官)도 또한 스스로 주의(注擬)하여 오늘날까지도 폐지하지않고 있습니다.
심한(沈瀚)이 내자시판사(內資寺判事)가 되었을 때 본시(本寺)8726) 사람들이 다. 그의 청렴함과 근신(謹愼)함에 심복하여 내자시안의 여러 가지 일에 잘 정리하고 행한 일이 많습니다. 신의 집이 내자시곁에 있어 내자시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칭찬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하니 그가 쓸 만한 사람임을 알겠는데, 왜곡하여 혐의를 끌어 대는 것은 신의 생각에 당치도 아니합니다.
심한(沈瀚)은 또한 문벌과 지위가 재상인데, 어찌 구사(丘史) 몇 사람을 가져야만 생계가 해결될 수 있다고 하겠습니까?
비방자(誹謗者)가 말하기를, ‘곽순종(郭順宗)은 콩과 보리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무인(武人)인데, 이에 큰 고을의 수령(守令)을 제수하였으니, 임금[天]을 속이는 것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고 하니, 신은 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곽순종(郭順宗)은 신에게 있어서 조금의 교분이나 지면(知面)이 없습니다.
다만 신이 병조(兵曹)에 있을 때 그가 사예(射藝)에 능하기 때문에 성명을 대략 기억하고 있었고, 또 그의 사람됨을 들었을 뿐입니다.
곽순종이 일찍이 습독관(習讀官)으로서 개월(箇月)이 차고 병(病)으로 인하여 갈려가고 말았는데, 《통고(通考)》8727)에 있는 습독의 벼슬을 서용(敍用)하는 일에 대하여 상언(上言)할 때 신이 급히 구해 서용함은 적당치못하다고 대답해 아뢰었습니다.
성상께서 물으시기를, ‘곽순종이 무재(武才)가 뛰어나 쓸만한 사람임을 나도 알고있으니, 그를 쓰는 것이 어떻겠는가?’하시기에, 〈신이 말하기를〉 ‘신이 대답한 것은 법을 집행하는 관리로서 예사로 의당 그렇게 한 것이고, 성상께서 만일 허용하신다면 무슨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여 그대로 우선 서용함으로써 판하(判下)하셨습니다.
안악군수(安岳郡守)를 주의(注擬)할 때에 있어서 서반(西班)에 상고하여 이에 행직(行職)8728)의 3품으로 망(望)을 갖추어 낙점(落點)을 받은 것이니,
신이 거기에 사정(私情)을 둔 것이었습니까? 이제 그 관직에 있어서 최(最)8729)로써 맨 앞머리[端]로 소문나 있으니, 잘못 서용한 것이 아닙니다.
비방자(誹謗者)가 말하기를, ‘김화(金鏵)는 지난 경진년8730) 무과(武科)에 오른 사람으로서, 특별히 간교(姦狡)하고 무지(無知)한 자인데, 홍산현감(鴻山縣監)에서 사의(司議)로 뛰어올려 제수하였고, 그 밖의 십상(十上)8731)인 자를 평천(平遷)8732)하거나 좌천(左遷)하거나 서반(西班)으로 보내거나 하면서, 김화(金鏵)를 높은 품질(品秩)로 뛰어올려 제수하고자하여 교묘한 말로 꾸며서 계청하였다.
또한 하숙산(河叔山)은 장원(壯元)을 한 쓸모있는 인재로서, 김화와는 훈유(薰蕕)8733)와 같을 뿐만이 아니다. 그런데 하숙산(河叔山)은 서용하도록 판하(判下)되었는데도 해가 지나도록 서용하지 아니하고, 김화(金鏵)는 반년 사이에 시직(時職)과 산직(散職)을 물론하고 두 번이나 올려서 4품 대관(大官)으로 삼았으니, 김화와 하숙산은 다 같이 진산(晉山) 사람으로서, 김화는 진산의 거부(巨富)이고 하숙산은 민간(民間)의 가난한 서생(書生)이기 때문이다.’라고 하니, 신은 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김화가 홍산 현감에서 갈린 일은 신의 등내(等內)8734)에 있지않았고, 김화가 홍산현감으로서 상의원판관(尙衣院判官)이 되어오고 신이 그 뒤에 판서(判書)가 되었을 때 권자선(權子善)이 회령판관(會寧判官)으로서 장례원사의(掌隸院司議)가 되었는데,
본원(本院)8735)에서 청송(廳訟)에 관한 사무를 아뢰면서 한관(閒官)과 바꾸어 보내도록 계청하여서 그때 김화와 권자선이 서로 바꾸어가게된 것이고 사정(私情)을 써서 뛰어올려 제수된 것이 아닙니다.
또 신이 전에 군기시제조(軍器寺提調)가 되었을 때 김화가 본시(本寺)8736)의 관원으로 있었는데, 일을 집행함에 삼가고 성실하였으며, 또 노장(老匠)이 있어 신에게 말하기를, ‘아무리 명사(名士)라고 불리는 사람이라도 이 벼슬자리에 들어오면 반드시 공장(工匠)들을 번거롭게 하는데, 오직 김화(金鏵)는 쇠붙이 한 조각이라도 번거롭게 하지를 않는다.’고 하기에, 신이 듣고서 마음에 든든하게 여겼습니다.
이로부터 〈외방(外方)에〉나가서 홍산현감(鴻山縣監)이 되었는데, 부역(賦役)이 아주 균평하고 강어(强禦)를 두려워하지아니하니, 토호(土豪)와 거실(居室)이 그의 청렴하고 근엄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김화는 한낱 미미한 선비로서 뛰어나게도 위세(威勢)의 압력에 굴하지아니하니, 중심(中心)에 주장하는 바가 있지않고서야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국가를 위하여 인재(人才)를 구하는데에는 마땅히 지행(志行)이 높은 사람을 쓸 따름입니다. 황해도사(黃海都事)로 물망에 올랐던 것은 그의 강개(慷慨)함을 취했을 따름이고 다른 것은 없었는데, 정사(呈辭)8737)로써 파직되었습니다. 그러나 빈자리가 있을 때에 쓰는 것이 좋겠다고 명하셨기에, 얼마 안되어서 함안군수(咸安郡守)에 주의(注擬)한 것은, 홍산(鴻山)을 다스리던 사람으로써 함안(咸安)을 다스리게하려는 것일 뿐이고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숙산(河叔山)은 비록 외직(外職) 서용의 윤허가 있었지만 그는 신과 더불어 동향(同鄕)인데, 그가 술을 과음하여서 병을 얻어 관직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들었었고, 얼마 안되어서 죽었습니다.
이 사람을 버리고 저 사람을 쓴 것은 실로 국가를 위해서 인재(人才)를 구한 것이고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신이 듣기에 김화(金鏵)는 상주(尙州)의 일개 가난한 선비라고 하는데, 진산(晉山)의 거부(巨富)라고 말한 것은 반드시 신을 욕보이고자 한 것으로서 간사(奸詐)하기 또한 그지없습니다.
비방자(誹謗者)가 말하기를, ‘최한정(崔漢禎)이 지난해 12월 20일에 친상(親喪)을 당하여 21일, 22일에 들어와 아뢰지못하자,
신(臣)이 「최한정(崔漢禎)으로 하여금 녹(祿)을 받도록 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하였는데, 만일 동관(同官)의 순박(淳朴)함을 위하여 군상(君上)의 작록(爵祿)을 가지고 자기의 사사로운 은혜로 삼아서 관계된 사람을 진퇴(進退)시키는 것은 진실로 옳지 못한 일이다.
그런데 사실인즉, 사촌인 조지주(趙之周)가 목사(牧使)로 실지 벼슬하고 있는데, 12월 28일이 사만(仕滿)이므로, 조지주의 사만을 기다리라고 최한정(崔漢禎)을 체직(遞職)하지아니하고 있었던 것이다.
육조(六曹)를 차례차례로 의망(擬望)해낼 때에 형조(刑曹)의 빈자리에 조지주(趙之周)를 넣으면서 찬사(讚辭)를 왜곡(歪曲)되게 써가지고 계달하였는데, 조지주는 동반(東班)의 3,4품에 벼슬을 지내본 데가 없다.’고 하니, 신은 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12월 21일 정청(政廳)에서 최한정이 상(喪)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서 진위(眞僞)를 탐문(探問)하게 하였는데, 최한정이 상을 당한 것은 정월 초7일이므로 수록(受祿)할 때와의 사이가 모두 17일이 됩니다.
본조(本曹)는 송사를 다스리는 관사가 아니고, 당상관은 꼭 완전하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한정이 응당 받을 녹이기에 최한정을 머물러 두었다가 그에게 준 것으로, 다만 동료로서의 의리를 위해서였지 감히 마음대로 한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조지주의 사만(士滿)이 마침 28일인 것을 비방자(誹謗者)가 끌어댄 것입니다. 일의 대체로 본다면 알 수있는 것입니다.
이조참의(吏曹參議) 자리가 비게되자 마땅히 육조참의가운데 적당한 사람을 주의(注擬)하여야 하겠기에 임사홍(任士洪)이 예조(禮曹)에서 이조(吏曹)로 옮겨 제수된 것은 곧 필연적으로 문신가운데 적당한 사람을 쓴 것이며, 이맹현(李孟賢)이 형조(刑曹)로서 예조로 옮겨 제수된 것은 곧 문, 무 당상관을 통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조지주(趙之周), 이원효(李元孝), 정침(鄭忱)등을 아울러 추천해서 낙점(落點)을 받았는데, 신이 아무리 무상(無狀)8738)할지라도 어떻게 임사홍이 이조로 옮기게되고, 이맹현이 예조참의로 옮기게되고서 형조 참의 자리가 비어있게될 줄을 미리 알고서 최한정(崔漢禎)을 머물러 두고 체직(遞職)하지않고서 조지주(趙之周)의 사만(士滿)될 날을 기다렸겠습니까?
비록 점을 잘 치기로 곽박(郭璞)8739)과 같다해도 능히 미리 알고서 조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이름 아래에다가 찬사를 왜곡되게 써가지고 주의(注擬)하는 것은 격례(格例)에 없는 일입니다.
신이 아무리 무상(無狀)하다하더라도 또한 어찌 감히 격식에 어긋나는 일을 만들어서 성감(聖鑑)을 속이겠습니까?
조지주가 비록 신(臣)의 인척(姻戚)이지마는 일찍이 더불어 일을 함께 하면서 그 사람됨을 알게된 적이 없었다가, 신이 지난해의 추등강무(秋等講武)때 지응사(支應使)가 되고 조지주가 도차사원(都差使員)이 되어 며칠 함께 일을 하였는데, 일을 처리하는 재능이 많이 있고 관리로서의 재능이 우수하였습니다. 또 신이 먼저 조지주를 천거한 것이 아니고, 입망(入望)할 때 좌중(座中)에서 추천하는 사람이 있기에 신은 그가 관리로서의 재능이 있음을 알고 즐겨 입망(入望)을 허락하였으니, 형적(形迹)은 비록 혐의가될 것같으나 실상은 신의 허물이 아닙니다.
또 당상관(堂上官)은 내력을 상고하지 아니하고 목사(牧使)로서 참의(參議)에 들어간 사람이 많은데, 어찌 유독 조지주에게만 혐의를 두겠습니까?
전자에 대간(臺諫)이 그를 탄핵해서 신이 역시 혐의를 받았습니다만, 비방자(誹謗者)가 또다시 물의(物議)에 의심나는 일을 끌어다가 신이 사정(私情)을 썼다고 배척을 하니, 신은 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비방자(誹謗者)가 말하기를, ‘신종흡(申從洽)은 연소(年少)하여 경력이 없는 자인데, 신이 혼가(婚家)는 피혐(避嫌)하지 않는다고 하여 처음 한성서윤(漢城庶尹)이라는 경조(京兆)8740)의 일을 결단하는 관직을 주었으니, 서윤(庶尹)은 낭청(郞廳)의 장(長)인데 젖비린내 나는 연소한 아이에게 함부로 주었다고 하니, 신은 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인가(姻家)는 비록 상피(相避)를 않는 것이지만, 그러나 어찌 스스로 꺼리지아니하고 덮어놓고 관직을 주었겠습니까?
지난해 8월에 신씨가(申氏家)에 종제(終制)8741)가 되자 아들과 손자가 모두 이제 서용(敍用)되었는데, 그때 도목정사(都目政事)에 신정(申瀞)이 참판(參判)이 되고, 신준(申浚)이 승지(承旨)가 되었으며, 마침 서윤(庶尹)의 자리가 비어 있었으므로 신종흡(申從洽)이 전(前)첨정(僉正)으로서 삼망(三望)을 갖추어 수점(受點)8742)하였습니다.
신이 어찌 그 사이에 사정(私情)을 썼겠습니까?
신종흡은 비록 나이는 젊다하더라도 일찍부터 가훈(家訓)을 이어받았고, 재학(才學)이 넉넉하며 벼슬이 4품인데, 성상께서 서용하도록 명하시면서 무슨 벼슬에 앉혀야좋겠는가를 아시었던 것입니다. 신은 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비방자가 말하기를, ‘각도의 감사(監司)와 수령관(首領官)은 문무(文武)를 교차(交差)하는 법이 아직도 그대로 있지만, 이제 영안감사(永安監司)는 무인(武人)으로서 외람되게 감사가 되었는데, 그 도사(都事)가 무식하고 광망(狂忘)해서 일을 맡기에 부적당한 자이므로 진실로 합당치못한데다가, 더구나 이제 감사와 도사가 모두 문신(文臣)이 아니면 법으로 마땅히 체직(遞職)하여야할 것이다. 그런데 신의 사촌 아우의 아들이기 때문에 체직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니, 신은 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신이 듣건대 감사와 도사에 문,무관을 교차하는 법은 양후(楊厚)가 충청도에 관찰사(觀察使)로 있을 때부터 비롯된 것이지, 정법(定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대전(大典)》이나 《속록(續錄)》에 모두 실려있지아니하니, 《대전》에 이미 없는데, 어느 법을 근거로 해서 개차(改差)하기로 계청(啓請)하겠습니까?
노공석(盧公奭)은 멀리 부모를 떠나 절역(絶域)에서 밤낮으로 분주하므로, 서울[京洛]로 돌아오고 싶어함이 진실로 그 본정(本情)일 것입니다.
만일 노공석에게 사정(私情)을 두었다면 마땅히 이 때문에 계청하여 경직(京職)으로 보낼 것인데, 과연 사촌의 아들이라고 해서 법을 어겨서 체직하지않은 것이겠습니까? 신이 마음아파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비방자(誹謗者)가 말하기를, ‘박숙달(朴叔達), 이세광(李世匡)등의 무리가 비록 당상관(堂上官)을 이동[動搖]시킬 수가 없지마는, 자기네들끼리 거리낌없이 주망(注望)하여 정랑(正郞), 좌랑(佐郞)에서 며칠안에 직질(職秩)을 뛰어올려받았다. 비록 대성(臺省)은 육조(六曹)의 개만(箇滿)을 논하지않으나, 어찌 유독 이조낭관(吏曹郞官)만을 가리키겠는가?
그리고 다른 조(曹)의 낭청(郞廳)에서는 이와 같이 뛰어 올려 옮긴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것은 또한 박숙달등을 아껴서가 아니고, 〈강희맹이〉항상 방약무인(旁若無人)하여 좌우(左右)에서 한마디 말도 못나오게해서 갖은 교사(巧詐)와 불법(不法)을 자행하는데, 박숙달등의 구변이 좋음을 꺼려 주야로 생각하다가, 그 최선의 방법으로 그를 언관(言官)에 두어 포장(褒奬)하는 듯이 한 것이다.
사간원(司諫院)에는 유인호(柳仁濠)가 정언(正言)이 되고, 종제(從弟) 노사신(盧思愼)의 처남(妻娚) 경준(慶俊)이 사간(司諫)이 되어 있으니, 사헌부(司憲府)에서 박숙달, 이세광등으로 하여금 성원(聲援)하게 한다면, 좌중(座中)에서 누가 나쁜 의견을 내어 그의 간사함을 지적하겠는가?
또 설혹 말을 낸다해도 저 사람들이 즉시 달려와서 고할 것이고, 만일 스스로 깨닫고 먼저 아뢴다면 지난날 이삼로(李三老), 김서형(金瑞衡), 조효례(趙孝禮), 조지곤(趙智崐), 신필(申弼) 등의 일이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대성(臺省)은 육조낭관(六曹郞官)과 예문관(藝文館) 및 개월이 차지않은 사람을 통용(通用)합니다.
전자에 대성(臺省)을 주의(注擬)하던 날 성상께서 묻기를, ‘주의한 사람을 다 내가 모르겠으니 무슨 까닭인가?’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의 인재(人材)로서 재행(才行)있고 강개(慷慨)한 자가 여러 사람 있어서 육조낭관(六曹郞官)과 예문관(藝文館)으로 들어갔는데, 예문관은 계달(啓達)한 뒤에 쓰고, 육조 낭관은 정년(停年)의 기한이 있기때문에 널리 구해서 주의할 수가 없습니다.’하였습니다.
이에 성상께서 전지(傳旨)를 내려 이르시기를, ‘대성(臺省)에 전주(銓注)할 때에는 육조낭관과 예문관에 구애하지말고 강개(慷慨)하여 일을 말할 만한 사람을 쓰도록 하라.’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서 지평(持平)에는 김흔(金訢), 강거효(姜居孝), 이세광(李世匡)을 주의하여 이세광이 수점(受點)하였고, 장령(掌令)에는 박숙달(朴叔達), 최응현(崔應賢), 안호(安湖)를 주의하여 박숙달이 수점하였습니다.
본조(本曹) 낭청(郞廳)이 비록 연달아 나가서 대성(臺省)이 되었지만, 신이 독망(獨望)한 것이 아니고 간간이 육조낭청과 타관(他官)을 주의(注擬)하여 성상의 낙점(落點)을 받은 것이 이러한데,
신이 어찌 그 사이에 마음을 썼겠습니까?
비방자가 말하기를, ‘낭관(郞官)을 대성(臺省)에 주의(注擬)한 것은 성원(聲援)이 되게하려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성상께서 신이 마음대로 한다고 의심하기를 바란 것입니다.
이들 몇 사람들은 다 나이 젊고 기개가 예리하여 바야흐로 명분과 절개로써 스스로의 긍지를 가진 자들인데, 노신(老臣)에게서 무슨 덕을 보겠다고 몸을 구부리고 왔다갔다하면서 대간(臺諫)의 의논을 누설하겠습니까?
또 경준(慶俊)은 신과 평소의 교제도 없는데, 어찌 사촌매부의 사촌형이 된다고 두둔해 줄 것이 있겠습니까?
정치를 집행하는 사람이 만일 친족의 친척을 피혐(避嫌)하여 추천이나 서용을 못한다면, 어느 곳에서 고근약식(孤根弱植)8743)으로 일가붙이가 없는 사람을 얻어서 대간(臺諫)을 삼겠습니까?
이것은 또한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인물(人物)을 전주(銓注)하는 것은 원래 노신(老臣)과 같이 망매(茫昧)한 사람으로써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나, 반드시 사람마다 그 재기(才器)를 알아 가지고 쓰는 것은 아닙니다.
혹은 사람들이 추천[吹噓]으로 인해서 쓰기도 하고, 혹은 평소부터의 들은 바로써 쓰기도 하며, 또 혹은 회합이나 만나보았을 때의 소행(素行)으로 인연하여 쓰게도 되는 것입니다. 꼭 현부(賢不)를 알아서 쓸 사람을 구하기로만 한다면 한 차례의 정사안에 두세 사람에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른바 대성(臺省), 육조낭청, 결송(決訟)하는 관리이고, 그밖에 자질구레한 거용(擧用)에는 착오(差誤)가 없을 수 없으니, 정사를 끝마친 뒤에 제서(除書)를 살펴조사해 보아서 만일 착오(錯誤)가 있으면 곧 계청하여 개정(改正)할 것인데, 어찌 대간에서 누설된 뒤에야 하겠습니까?
이삼로(李三老)가 아직 해유(解由)를 내지못하였고, 김서형(金瑞衡)이 범을 잡다가 사람을 다쳤으며, 조효례(趙孝禮)가 상중(喪中)에 과거에 나아갔고, 조지곤(趙智崐)이 어버이를 병이라고 칭탁하여 정사(呈辭)하였으며, 신필(神弼)이 아직도 경직(京職)으로 올라가지못한 것등, 이런 것은 신등의 작은 지혜로는 미처 상세히 살펴보지 못했다가 혹 먼저 계청해서 고치기도 하고, 혹은 대간(臺諫)의 탄핵으로 인해서 고치기도 하였는데, 신을 두고 사욕(私慾)을 이기지 못해서 망령되게 모독(冒瀆)하여 입망(入望)시켰다고 배척을 하니, 신은 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비방자(誹謗者)가 말하기를, ‘지난번 도목정(都目政)과 전동정(轉動政)8744) 에 수령(守令)의 빈자리가 30여자리에 이르는데, 모두 조효례(趙孝禮)등 횡출(橫出)한 자들을 시키고, 별제(別提)들은 봉록은 없이 애써 근무하니 조정의 관원들이 애처롭게 여긴다.
그래도 유효장(柳孝章)의 형 유효중(柳孝中)은 와서별제(瓦署別提)로서 겨우 개월(箇月)이 차자 갑자기 창평현령(昌平縣令)을 제수하였으니, 가증하고 가증하다.’고 합니다.
지난번 도목정과 전동정은 애매하거나 밝히기 어려운 일이 아니고 명백히 제수(除授)한 자가 있으며, 횡출(橫出)한 자가 몇 사람이고 받을 만한 자가 몇 사람인지는 반부(班簿)를 상고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조효례(趙孝禮)는 세조조(世祖朝)부터의 오래된 무사(武士)로서, 지금은 운검차비(雲劍差備)8745)로 시위(侍衛)하고 있는데, 태안군수(泰安郡守)로 제수할 것을 의논할 때 병조(兵曹)와 더불어 함께 의논하여 병조에서도 좋다고 해서 황경인(黃敬仁), 양인백(楊仁伯)과 함께 주의(注擬)하여 수점(受點)하였습니다. 그 뒤에 그의 실수를 듣고 고쳐서 바로 잡았습니다마는, 그의 실수한 일이 오래 되고 미미하여 드러나지않은 일이어서 신등이 소급해 알지못했던 것입니다.
유효중(柳孝中)은 창평(昌平)이 다시 현(縣)으로 승격될 때 그 수령(守令)으로 의논하였는데, 별좌(別坐)들의 개만(箇滿)된 치부(置簿)를 상고해보니, 그 수는 비록 많으나 모두 시가(試可)8746)하였고, 품질(品秩)이 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간혹 이분연(李賁然),백수희(白受禧)등 시가(試可)하지않은 사람이 있으나, 다 이미 부사(府使) 벼슬을 지낸 사람들이라서 5품으로 굽혀 제수할 수가 없고, 오직 유효중만은 전현령(縣令)으로서 별좌(別坐)의 개만(箇滿)이 되었으며, 달리 주의할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성생(李誠生), 정자숙(鄭自淑), 유효중(柳孝中)을 주의하여 유효중이 말망(末望)으로 수점(受點)하였는데, 신이 어찌 사정(私情)을 쓴 것이겠습니까?
비방자(誹謗者)는 신을 가리켜 말하기를, ‘겉으로는 강직(剛直)한 것같으나 교언영색(巧言令色)하며 간교(奸狡)하기 형용할 데가 없으니, 젊어서부터 그러하다. 자기에게 아부하는 사람은 벼슬을 올려주고, 아부하지않는 사람은 비록 현능(賢能)한 사람이라도 멀리 배척하여 백가지 계책을 여기에 맞추는데, 언제나 벼슬을 제수할 때에 신정(申瀞)이하의 사람들은 반식(伴食)8747) 할 뿐으로, 감히 용사(用捨)의 시비(是非)에 말을 내지못하니, 그 누가 논박하겠는가? 본가(本家)의 사람이나 말[馬]은 네 첩(妾)의 처소 및 강귀손(姜龜孫)과 강학손(姜鶴孫)의 집과 그 동복(同腹)들의 집에 출입을 안하고, 거기에는 거마(車馬)가 꽉 차있으며, 뇌물[苞苴]이 구름같이 모여있는데, 신이 날마다 여기저기 각처를 돌아다니면서 불량배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말에 따라서 제 뜻대로 하니, 권세를 잡아 마음대로 한 일을 이루다 기록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또 ‘신이 외척(外戚)과 족당(族黨)의 반거(盤據)8748)로 인하여 견문(見聞)이 넓으나, 총애를 믿고 욕심을 마음대로 하여 권세가 맹호(猛虎)와 같은데다가 대성(臺省)이 또한 심복(心腹)이어서 입을 다물고 있으니, 임금인들 어떻게 알겠는가?
연로(年老)한 양성지(梁誠之)같은 이는 비록 확실한 일이 아니라하더라도 극언(極言)으로 배척(排斥)하는데, 신(臣)으로 말하면 임금의 세력을 얻고 간웅(姦雄)들을 가까이하니, 비록 명백하게 말할 만한 일이 많아도 부도(不道)한 일을 한마디도 발언하여 주달(奏達)하지않고 있다.
아아! 양성지가 가증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비방자가 신을 장계(狀啓)함이 못하는 바가 없습니다. 무릇 사람이나 동물의 애증(愛憎)과 취사(取捨)는 각각 끼리끼리하는 것이어서 소[牛]를 가지고 말[馬]을 사랑하게할 수가 없고 말을 가지고 사람을 사랑하게할 수가 없으니, 진실로 저희끼리가 아니면 만에 하나 사랑하고자해도 어려운 것입니다.
더구나 여자는 아름답고 밉고 할 것없이 궁궐에 들어가면 질투를 받고, 선비는 어질고 어리석고 할 것 없이 조정에 들어가면 시기(猜忌)를 받습니다.
신은 이미 믿음을 얻을 만한 덕이 없고 또 비방을 받는 처지에 있어서 오래도록 풀지못하고 오늘에 이르게된 것이 마땅합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나는 말[馬]이라고 부르면 내가 말로써 응하고, 나를 소[牛]라고 부르면 내가 소로써 응하더라도, 내가 실상 소나 말이 아니면 나를 부르는 사람이 망령된 것이니, 나에게 무슨 손해가 되랴?’하였습니다.
헛된 말을 날조(捏造)하여 소신(小臣)을 비방하는 것과 같은 것은 실로 바람이나 그림자를 잡는 것처럼 헛된 것이니, 일소(一笑)에 붙일 뿐입니다.
다만 사람들 가운데 승직[陞陟]에 붙고 못붙은 자는 어떤 사람들이며, 중상(中傷)하고 배척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감(聖鑑)으로 환하게 알고 계신데 신이 어찌 변명하겠습니까? 〈이제〉그 말에, ‘벼슬을 제수할 때 신정(申瀞)이하는 반식(伴食)할 뿐이고 감히 발언을 하지못한다.’고 했는데, 신정 이하가 지금 그 자리에 있으니 만일 반식하는지의 상황을 묻는다면 신정(申瀞)이 어찌 신을 위해서 은휘(隱諱)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신정등을 위한 것이 아니니, 관청행정의 잘못은 한 관청의 관리들이 함께 그 책망을 받는 것인데, 신 한 사람만을 따로 해치고자 하여 말을 반드시 이와 같이 한 것일 것입니다.
또 그 말에 ‘본가의 사람과 말이 네 첩의 처소 및 자식들의 집에 들어가지 않고 각처를 돌아다니면서 불량배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말에 따라서 제 뜻대로 하니, 권세를 잡아 마음대로 한다.’고 하는데, 원자(元子)가 지난해 11월 27일에 비로소 신의 집에 온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두 아홉달이 되도록 〈신이〉밖에 나가서 잔 것은 모두 나흘입니다.
한 번은 화약고(火藥庫)의 실화(失火)를 구제하기 위하여 나갔다가 여러가지 흉하고 더러운 것을 보고서 감히 곧바로 오지를 못하고 종[奴]의 집에서 기숙(寄宿)한 것이 이틀이었고, 한 번은 춘기(春期), 하기(夏期)의 시제(時祭)때문에 나갔다가 자식의 집에서 잔 것이 이틀이었으며, 이 밖에는 한번도 밖에 나가서 잔 일이 없고, 온종일 다른 곳에서 있었던 일이 없습니다.
신이 몸을 쪼갤 수가 없는데, 누가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불러 들여 뇌물을 받겠습니까?
또 원자(元子)에게 시종(侍從)하는 나인(內人)들이 집에 있어서 저의 동정(動靜)을 다 알고 있는데, 신이 어찌 자진해서 변명할 것이 있겠습니까?
또 신이 외척(外戚)과 족당(族黨)의 반거(盤據)로 인하여 대성(臺省)이 심복이어서 입을 다물고 있으니, 임금인들 어떻게 알겠느냐고 하는데, 오늘날 언로(言路)가 통개(洞開)되어 사람마다 직언(直言)하기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신이 간사한 일을 한 것이 진실로 비방자의 말과 같은데도 대간(臺諫)들이 혹시 신을 두려워해서 말을 안한다면 홍문관(弘文館)의 여러 유생(儒生)들이 반드시 말할 것이고, 홍문관의 유생들이 혹시 신을 두려워하여 말을 안한다면 종실(宗室)의 직신(直臣)이 반드시 말할 것이며, 종실의 직신이 말을 안한다면 동렬(同列)에 있는 대부(大夫)들이 반드시 말할 것인데, 하필 속으로는 모극(矛戟)8749)을 품고서 겉으로 온화한 얼굴을 드러내어 익명서[飛書]를 궐내에 던져서 승영(蠅營)8750)과 같은 욕심을 채우고 귀역(鬼蜮)8751)과 같은 음모를 행하는 것입니까?
인신(人臣)으로 만일 간흉(奸凶)한 자가 있으면, 비록 권력의 중요함이 후설(喉舌)8752)과 같고 직위의 숭고함이 묘당(廟堂)8753)과 같더라도, 오히려 합사(闔司)8754)하고 항장(抗章)8755)하여 직언(直言)으로 이를 배척함도 사양치않을 것인데, 어찌 익명(匿名)의 투서를 사용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곧 간인(奸人)들이 그의 무리를 모아가지고 공모로 한번의 비방을 작성하여서 밖으로는 신을 모함하기 위함이고, 안으로는 실상 상감(聖鑑)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 살피소서.”하였다.
註8706]문중자(文中子):수(隋)나라 왕통(王通).註8707]직불의(直不疑):한(漢)나라 경제(景帝) 때 사람 註8708]주옹(主翁):금 임자를 가리킴 註8709]구구(購求):현상을 걸어 찾음.註8710]유중불하(留中不下):상소의 내용이 마음에 맞지않을 때 비답(批答)을 내리지않기 위하여 임금이 소장(疏章)을 궁중에 머물러 두고 관계기관에 회부하지 않던 일.註8711]원자(元子):후의 연산군(燕山君)으로, 성종 8년(1477)에 병이 나서 강희맹(姜希孟)의 집에 우거(寓居)하고 있었음 註8712]영락(零落):자식잃음을 뜻한 말임 註8713]국본(國本):원자(元子) 註8714]언관(言官):간관(諫官).註8715]상피(相避):친족(親族) 또는 기타 긴밀한 관계가 있는 자는 같은 곳에서 벼슬하는 일이나 청송(廳訟), 시관(試官)같은 것을 서로 피함 註8716]종제(終制):삼년상을 마침 註8717]도목정사(都目政事):고려, 조선조 때 관원의 치적(治績)을 종합 심사하여 그 결과에 따라 영전, 좌천 또는 파면을 시키는 일. 해마다 음력 6월과 12월에 실시했으며, 앞의 것을 권무정(權務政), 뒤의 것을 대정(大政)이라 함.註8718]갑과(甲科): 과거성적에 따라 나누는 세 등급의 하나.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갑, 을, 병 3과로 구분하여 갑과 3인, 을과 7인, 병과 23인, 도합 33인을 합격 정원으로 하였음.註8719]정유년:1477 성종8년 註8720]판하(判下): 임금이 재가함 註8721]인아(姻婭): 사위 집 편의 사돈 및 동서 집 편의 사돈의 두루 일컬음. 사위의 아버지 곧 사돈을 인(姻)이라 하고, 여자 형제의 남편끼리 곧 동서들끼리 아(婭)라 함 註8722]무사(膴仕): 후한 녹봉을 타는 벼슬.註8723]천발(薦拔): 인재를 발탁하여 천거함 註8724]독망(獨望): 관직에 임명하기에 앞서 문관(文官)은 이조(吏曹)에서, 무관(武官)은 병조(兵曹)에서 삼망(三望), 곧 세 사람의 후보자를 임금에게 천거하는 것이 상례이나, 삼망을 갖추어 얻지못하면 단 한 사람의 후보자를 천거하던 것임. 단망(單望).註8725]구사(丘史): 조선조 때 임금의 종친(宗親) 및 공신(功臣)에게 특별히 딸려 준 지방의 관노비(官奴婢). 품위(品位)에 따라 수가 정해져 있었음 註8726]본시(本寺): 내자시 註8727]《통고(通考)》: 《문헌통고(文獻通考)》의 약칭 註8728]행직(行職): 품계(品階)가 높은 사람이 그 품계보다 낮은 직급(職級)에 보임된 경우의 일컬음 註8729]최(最): 관찰사가 각 고을 수령(守令)의 실적을 조사하여 중앙에 보고할 때 상(上)을 말함. 하(下)는 전(殿)이라 하여, 이를 통틀어 전최(殿最)라고 함 註8730]경진년: 1460 세조 6년.註8731]십상(十上): 십고십상(十考十上).註8732]평천(平遷): 같은 직위로 옮김 註8733]훈유(薰蕕): 성현(聖賢)과 소인(小人).註8734]등내(等內): 재임 기간 註8735]본원(本院): 장례원 註8736]본시(本寺): 군기시 註8737]정사(呈辭): 사직(辭職), 청가(請暇)등의 원서(願書)를 관(官)에 제출(提出)하는 일.註 8738]무상(無狀): 공적이 없음 註8739]곽박(郭璞) 중국 동진(東晉)의 복서가(卜筮家).註8740]경조(京兆): 한성부(漢城府)의 별칭 註8741]종제(終制): 삼년상이 끝남 註8742]수점(受點): 임금의 낙점(落點)을 받음 註8743]고근 약식(孤根弱植): 친척이나 가까이 돌보아 줄 사람이 없음.註8744]전동정(轉動政): 음력 6월과 12월의 정해진 시기에 하는 도목정사(都目政事)가 아니고, 때없이 관리(官吏)의 임명출척(任命黜陟)을 행하는 것 註8745]운검차비(雲劍差備): 운검(雲劍:임금을 호위할 때 별운검(別雲劍)이 차는 칼)의 준비 임무를 맡은 사람 註8746]시가(試可): 적합한지 시험함 註8747]반식(伴食) : 실권(實權)이나 실력이 없이 어떠한 직(職)에 앉아서 자리만 지키고 있는 일. 또는 그런 자리에 있는 벼슬아치를 놀려서 이르는 말.註8748]반거(盤據) : 넓은 토지를 차지하고 의거함 註8749]모극(矛戟): 흉기(凶器).註8750]승영(蠅營): 파리가 분주히 날아다니듯 사소한 이익을 얻고자 일함 註8751]귀역(鬼蜮): 귀신과 물여우. 즉 음흉한 사람 註8752]후설(喉舌): 승지(承旨).註8753]묘당(廟堂): 의정부(議政府).註8754]합사(闔司): 임금에게 간(諫)할 때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서 합(合)하여 일을 보던 것을 말함.註8755]항장(抗章): 소장으로 항거함
○吏曹判書姜希孟上書, 仍啓曰: “臣前日上書辭職, 傳曰: ‘今聽爾請, 則予亦入於其人之術中也, 其勿辭焉。 予當窮極搜捕痛懲。’ 臣聞命隱忍就職, 尙冀姦人斯得然後, 臣與其人同就法司, 逐一辨質, 今觀其勢, 待之難必。 然則萬世之下, 誰知臣之是非也? 臣敢以所謗之言, 逐條自明。 近來大臣一有被劾, 則互相爭辨, 臣非不知此風之非是也, 然臣非被劾於臺諫也, 非與人爭辨也, 今被惡名, 終難自明, 故敢瀆如是耳。 銓曹重器, 雖小被謗毁, 不宜居之。 況臣性本不敏, 遭謗至此, 方寸亂矣, 臨事不無錯誤之失, 請辭臣職, 以保餘齡。” 其疏曰:
臣當觀文中子之言曰: “止謗莫如無辨。” 何也? 謗起於人所不信, 而欲以口舌爭之, 抑末矣。 昔直不疑不辨主翁偸金之疑, 終能大辨。 其且當其償金之時, 人必以偸金目之, 不疑處之括然, 甘受惡名而不辭, 其心豈不以疑己所無爲憤哉? 然所以不辨者, 必曰: “人言雖眩於一時, 是非不昧於萬世, 苟自明也, 則誠爲幸矣, 雖其不明, 是予不幸, 又誰咎耶? 所可恃者, 天理之正、人心之公、神明之直而已。” 及其同舍還金之日, 主翁深謝其不敏, 時人咸服其偉量, 不疑大人君子之名, 萬世而不泯, 所謂 ‘止謗莫如無辨’ 者此也。 臣今所遭之謗, 皆濁亂朝政之事, 比諸不疑偸金之事, 其害有甚焉, 義不可不辨也。 但得謗書以來, 天威震動, 必欲得飛書者, 購求中外, 搜剔靡遺, 且賜溫敎慰諭小臣, 使之處官如舊, 聖鑑洞照, 無微不燭, 奚待臣自辨哉? 臣竊料造謗者兇狡有餘, 豈不知不以匿名之書罪我斥我哉? 所以爲此者, 其意有三。 一則捃摭罪過, 羅織成謗, 潛投大內, 則上必收而覽之, 以事干大臣留中不下, 則雖不顯有所害, 亦足中臣, 不得完全於聖朝也。 二則欲上疑臣有仇家, 且有凶害, 家道又不正, 命移元子於他所, 欲快憤嫉之心耳。 三則欲使臣惡名流布四方, 穢人聽聞, 點汚靑史, 流臭萬世而已。 幸賴聖上日月之明, 使奸計不行, 非特微臣之幸也, 抑亦我東方萬世之大幸也。 然奸人之計, 不行其二, 而猶行其一也。 何也? 謗言流布, 旁達于外, 安能家諭而戶曉哉? 然則街論巷議, 必有歸罪於臣身者矣, 此則奸計之得行也。 噫! 臣則已非聖代之完物, 抱恨終身而已。 但誣飾罪過, 陰陷大臣, 誹謗之書至於繳投大內, 使臣僚重足而屛息, 奸侫挾術以聘詐, 決非國家之福也。 國家購捕甚急, 宜其奸猾就執, 顯伏天誅。 然或謗者非微末下流, 則容有跡知形影者, 孰肯搆怨巨猾自取滅門之禍哉? 人非病風, 決不語此矣。 臣之隱忍就職者, 尙冀天厭大姦布露情跡, 然後臣與謗者同就廷尉, 逐一辨質。 不幸謗者久逭天誅, 終不可知其必得, 然則萬世之後誰能爲臣辨者? 臣敢以謗言逐一自明, 臣若有罪, 言雖出於謗者, 亦當不饒, 如其無罪, 乞下明敎, 使四方釋然知聖上遠讒之明、微臣遭乞之誣, 則庶使奸雄知飛書之無益ㆍ聖明之難欺矣。 臣非敢自愛, 反復思之, 瑕釁之人不宜冒處淸班, 毁謗之餘未可尙操重權。 乞解臣重任, 置諸閑地, 特遂曲遂之仁, 不勝幸甚。 謗者以元子寄托臣家爲非, 且臣子息多暴亡, 指言爲凶咎, 又言主家糜費不能言語形容, 藉云大賓支應扶助, 布帛財物雲委於四妾及子女之家。 以爲臣得寵如此, 必久其任, 仕未足、箇未滿者, 亦皆預致納賂, 臣實痛心。 元子於年前十一月二十七日忽移臣家, 其時承政院議啓大臣十餘家, 而上不問臣家子息死亡凶咎有無, 來且急速。 上旣不問, 臣先以啓, 則是有厭却之嫌, 罪亦非輕, 況有子女者, 誰無零落之患? 以此爲凶, 先自啓達, 非臣意料之所及也。 元子初到臣家, 微有不平, 臣與老妻晝夜抱持, 罔知攸措, 但冀皇天上帝、宗社之靈默佑而已。 今年正月以後, 氣分自定, 日至充壯, 臣日以保護國本, 不能克終爲懼, 亦獨何心乃因以爲利哉? 臣家素貧, 無有財帛可以贈呈侍從諸人者。 假使有之, 上敎嚴重, 一線之微, 亦必啓達, 何由糜費, 聚人賂遺, 以違聖敎哉? 臣之醜妾二人皆, 服使臣家中, 都下無別立戶者, 賄來何所? 受者何人? 況元子自有供進之物, 用之有餘, 侍從諸人下逮賤少者, 亦皆有饌飯之需, 又有餘剩, 臣亦何心從人廣請因以爲利哉? 此則以其邪心度人之心也。 謗者言: “柳孝章之子仁濠, 性本庸劣, 不堪任事, 不數月間擢置言官”, “金崶, 心欲除職, 自立法生員進士雖不保擧敍用, 授崶爲參奉, 以相避遞時, 自占爲陵參奉”。 鄭誠謹終制後, 每政望入除典籍, 皆因臣妾之故。 臣實痛心。 仁濠與臣同里閈, 自少知其爲人。 中文科第三人, 拜監察已久, 而正言有闕, 則例當注擬。 甲乙科名不問來歷, 吾東方用人之舊法也。 臣豈用私哉? 金崶之拜參奉, 在丁酉七月二十四日, 以朴叔蓁保望入得拜生員進士, 除保擧薦用之法, 是年八月十四日判下, 果爲崶立法乎? 大抵士子入官, 始筮爲外職, 由外而入, 以內觀外, 比降一等。 臣若右崶, 當相避遞職之時, 必擇京中美官而授之, 豈除陵參奉乎? 鄭誠謹嘗爲司評, 以剪治繁劇聞。 及遭父喪, 喪事合禮, 三年未嘗入京, 士林皆稱其孝。 秉政者爲國擇人, 當先其德行心術之所可取, 豈可以他求哉? 臣令置簿文臣之終喪者ㆍ罷散應除者, 每政注擬, 得敍幾盡, 而誠謹久未得調, 臣猶以爲晩也。 人臣之職, 莫重於掌銓注, 雖其切族姻婭, 苟非其人, 不宜躋諸膴仕, 況爲箕箒微妾以亂邦政哉? 且臣妾, 司直金龜年嫁孝章婢所産也, 據法贖身爲良久矣。 孝章於臣無贈與之分, 臣亦於孝章無感德之實, 安敢以此薦拔一門哉? 臣實痛心。
謗者言: “內資提調李芮爲永安監司, 卽刻獨望四寸弟沈瀚, 奪給提調。 雖非實職, 多率丘史, 足以營生, 利莫大焉, 雖其三望, 其行私不貲, 猶爲不足而獨望, 其恣意乃爾”, 臣實痛心。 臣於吏曹, 自參議至判書, 歷仕十數年, 詳知提調注擬之格, 前此固無三望相避之法, 吏曹堂上尙亦自注, 至今不廢。 澣爲內資判事時, 本寺之人皆服其淸謹, 寺中諸事多所修擧。 臣家在寺傍, 其寺之人至今稱道不置, 知其可用, 而曲爲引嫌, 非臣意料之所及也。 澣亦門地宰相也, 豈待丘史數名, 然後有所營辦哉? 謗者言: “郭順宗不辨菽麥之武人也, 乃除大邑守令, 欺天莫甚”, 臣實痛心。 順宗於臣無葭莩之屬、半面之知。 但臣在兵曹時, 以射藝之能, 略記姓名, 且聞其爲人而已。 順宗曾以習讀官箇滿, 因病而遞, 《通考》習讀仕敍用事上言, 臣以急求敍未便回啓。 上問: “順宗武才卓爾可用人也, 吾亦知之, 用之何如?” 臣對以 ‘執法之吏, 例當如是, 上若許用, 則何所不可?’ 乃以爲先敍用判下。 當注安岳郡守時, 考於西班已行三品, 備望受點, 臣其用私哉? 今在其官, 以最聞端, 非失用也。 謗者言: “金鏵乃庚辰武擧, 特姦狡無知者, 以鴻山縣監超授司議, 其他十上者, 或平遷或左遷或送西, 欲鏵超授高秩, 則搆巧辭以啓。 抑河叔山壯元有用之才也, 與鏵不啻若薰蕕。 叔山敍用判下, 經年不用, 鏵則半歲之間, 時散勿論, 再陞爲四品大官, 鏵與叔山皆晉人也, 鏵則晋山巨富, 叔山則草芧寒生故也”, 臣實痛心。 金鏵之遞鴻山, 不在臣等內, 鏵以鴻山縣監授尙衣院判官而來, 臣後爲判書, 權子善以會寧判官授掌隷院司議, 本院啓聽訟事務, 請與閒官換差, 時鏵與子善相換耳, 非其用私超授也。 且臣昔爲軍器提調時, 鏵爲本寺官員, 執事謹恪, 且有老匠語臣云: “雖號名流, 到此官則必煩工匠, 獨鏵寸鐵不煩”, 臣聞而固心之矣。 由是而出爲鴻山縣監, 賦役甚均, 不畏强禦, 土豪巨室畏其淸謹, 不敢爲梗。 鏵以一介微士, 挺然不屈於威勢之所劫, 非中有所主者能然乎? 爲國家求人, 當用志行之高耳。 擬於黃海都事, 取其慷慨耳, 非有他也, 以呈辭見罷。 命有闕當敍, 未幾擬於咸安郡守者, 欲以理鴻山者理咸安也, 非有他也。 叔山雖有外敍之命, 與臣同鄕, 聞其縱酒成疾, 不堪莅官, 未幾身歿。 舍此用彼, 實爲國求人, 非有他也。 臣聞鏵尙州之一貧士也, 云晋山巨富, 必欲浼臣, 奸亦至矣。 謗者言: “崔漢禎去年十二月二十日遭喪, 二十一日、二十二日不得入啓”, 臣聲言: “令漢禎受祿。” 似若爲同官淳朴, 以君上之爵祿爲己之私恩, 因人進退, 固不可也。 實則四寸趙之周牧使實仕, 十二月二十八日仕滿, 待之周仕滿不遞漢禎, 以六曹次次望出, 刑曹之闕, 入之周名下, 曲書褒辭以啓, 之周無東班三四品歷仕處, 臣實痛心。 十二月二十一日於政廳聞漢禎遭喪, 使人探問眞僞, 漢禎遭喪距正月初七日, 受祿凡十七日。 本曹非莅訟之官, 堂上不必求完。 以漢禎應受之祿而留漢禎受之, 但爲同僚之義耳, 非敢專擅也。 況之周仕滿適在二十八日, 以起謗者之言也。 以事體觀之, 則可知矣。 吏曹參議有闕, 當注六曹參議之可當者, 任士洪以禮曹移受吏曹, 則必用文臣之可當者, 而李孟賢以刑曹移受禮曹, 則通用文武堂上。 而以趙之周、李元孝、鄭忱竝望而乃受點, 臣雖無狀, 安能預知士洪之遷吏曹, 孟賢之遷禮議, 刑議之有闕, 留漢禎不遞, 以待之周仕滿之日乎? 雖善卜如郭璞, 未能預知而有所措也。 且於名下曲書褒辭注擬, 格例所無之事。 臣雖無狀, 亦安敢造爲違格之事, 以欺聖鑑哉? 之周雖臣姻族, 未嘗與同事知其爲人, 臣於去年秋等講武爲支應使, 之周爲都差使員, 日與同事, 多有辨集之能而優於吏榦。 又非臣首薦之周, 入望時座中有薦者, 臣知其有吏榦而肯許入望, 迹雖似嫌, 實非臣罪。 且堂上官不考來歷, 以牧使入參議者多矣, 何獨於之周有疑哉? 前者臺論彈之, 臣亦引嫌, 謗者復引物論所疑斥臣用私, 臣實痛心。 謗者言: “申從洽年少不更事者, 而臣以婚家不以爲嫌, 初授漢城庶尹京兆決事之官, 庶尹郞廳之長, 以乳臭年少子濫授”, 臣實痛心。 姻家雖無相避, 然豈不自嫌徒然除職哉? 去年八月申氏家終制, 子若孫竝今敍用, 其政瀞爲參判, 浚爲承旨, 適有庶尹之闕, 從洽以前僉正, 備三望受點, 臣何容私於其間哉? 從洽雖年少, 早承家訓, 才學有餘, 官且四品, 上命敍用, 知擬於何官而可乎。 臣實痛心。
〔○〕謗者云: “各道監司首領官, 文武交差之法尙矣, 今永安監司以武人, 濫蒙爲監司, 則其都事乃無知狂妄, 不當任事者, 固已不合。 況今監司、都事皆非文臣, 則法當遞差。 然而臣四寸弟之子故不遞”, 臣實痛心。 臣聞監司、都事文武交差之法, 始於楊厚觀察忠淸之時, 非有定法。 且於《大典》及《續錄》俱不載, 《大典》旣無, 則據何法以啓改差哉? 盧公奭遠離父母, 日夜奔走絶域, 思還京洛, 固其本情也。 若私公奭, 當因此啓差京職, 果以(以)四寸之子撓法不遞哉? 臣所痛心者此也。 謗者言: “朴叔達、李世匡等之族, 雖堂上官未得動搖, 至於自己則無嫌注望正、佐郞, 不日超授高顯之秩。 雖曰臺省勿論六曹箇滿, 何獨指吏郞乎? 他曹郞廳如此超遷者幾何? 又非愛叔達等也, 常時旁若無人, 左右不出一言, 而多行巧詐不法, 忌叔達等之利口, 晝思夜度, 其善別使居言官, 似若褒奬。 諫院則仁濠爲正言, 從弟盧思愼妻娚慶俊爲司諫, 憲府則叔達、世匡等使之聲授, 座中誰能發惡議以摘其奸乎? 且或出言, 彼人等卽奔告之, 若自覺而先啓, 昔日李三老、金瑞衡、趙孝禮、趙智崐、申弼等事是也。” 臺省通用六曹郞官、藝文館與箇未滿者。 前者注擬臺省之日, 上問: “所擬者皆予不知, 何故也?” 臣對: “我國人材有數, 人之有才行慷慨者, 多歸於六曹郞官與藝文館, 藝文館則啓達而後用之, 六曹郞官則停年有期, 故不得廣求注擬耳。” 於是上下旨云: “於臺省銓注時, 勿拘六曹郞官藝文館, 擇慷慨可以言事者用之。” 由是於持平擬以金訢、姜居孝、李世匡, 而世匡受點, 於掌令擬以朴叔達、崔應賢、安瑚, 而叔達受點。 本曹郞廳雖連出爲臺省, 臣非獨望, 間注六曹郞廳及他官, 而蒙上落點如是, 臣何用意於其間哉? 謗者以爲: “擬郞官於臺省, 欲爲聲援者”, 冀上之疑臣擅便也。 此數人者皆年少氣銳, 方以名節自矜者, 何德於老臣, 而傴僂往來以洩臺議哉? 且慶俊於臣非有平昔之雅, 豈爲四寸妹夫之四寸兄, 有所扶右哉? 秉政者若嫌族之族不得薦用, 則何處得孤根弱植之無族屬者以爲臺諫哉? 此亦至難之事也。 且銓注人物, 固非如老臣茫昧者所能當也, 非必人人識其才器而用之。 或因人吹噓, 或平昔所聞, 或因會遇之素耳。 必求知賢否而用之者, 一政之內, 不過二三人也。 曰臺省也, 曰六曹郞廳也, 曰決訟之吏也, 其他冗擧, 則不能無差誤, 下政之後審覈除書, 如有錯誤, 旋啓改正, 豈因臺諫之漏洩而後爲哉? 李三老之未出解由, 金瑞衡之捉虎傷人, 趙孝禮之喪中赴擧, 趙智崐之病親呈辭, 申弼之未行京職, 此則臣等之小智, 未及詳察也, 或先啓改, 或因臺彈而改之, 斥臣以不勝私欲, 妄冒入望, 臣實痛心。 謗者云: “去都目政及轉動政, 守令空闕數至三十餘, 而皆以趙孝禮等橫出者爲之, 別提等無祿苦務, 朝士可惜。 然孝章之兄(弟)〔孝〕中, 以瓦署別提, 纔滿箇月, 遽授昌平縣令, 可憎可憎。” 去都目政及轉動政非曖昧難明之事, 明有除授者, 橫出者幾人, 應受者幾人, 考於班簿則可知矣。 但趙孝禮世祖朝久遠武士也, 今以雲劎差備侍衛, 泰安郡守議除時, 與兵曹同議, 兵曹亦以爲可, 與黃敬仁、楊仁伯注擬受點。 後聞其失而改正, 其所犯久遠微密之事, 臣等所未及知也。 孝中則昌平復立之時, 議其守令, 而考別坐箇滿置簿, 則其數雖多, 皆試可秩卑人也。 間有李賁然、白受禧等, 非試可之人, 而皆已行府使者, 不可屈授五品, 獨孝中以前縣令, 別坐箇滿, 而無他可擬者。 擬以李誠生、鄭自淑、孝中, 孝中以末望受點, 臣何用私哉? 謗者指臣言: “外若剛直, 巧言令色, 奸狡無狀, 自少而然。 附己者陞陟, 不附者, 雖賢能遠排, 百計中之, 凡除授之際, 申瀞以下伴食而已, 未敢發言用捨是非, 伊誰論駁? 本家人馬不得出入四妾所及龜孫、鶴孫之第同腹等家, 車馬塡咽, 苞苴雲集, 臣日日彼此循環各處, 聚不逞之徒, 由意諾諾, 專權自恣事件, 不能盡記。” 臣以外戚族黨盤據, 聞見乃廣, 恃竉肆慾, 勢似猛虎目 臺省亦腹心, 含口結舌, 天何以知之? 如年老梁誠之, 雖無的實之事, 極言排斥, 如臣之得君勢熱姦雄, 則雖多顯顯可言不道之事, 未得發一言以奏。 嗚呼! 梁誠之可憎, 姜希孟謗者之狀臣, 無所不至。
凡人物之愛憎取捨, 各以類焉, 牛不可使愛馬, 馬不可使愛人, 苟非其類, 欲其萬一之愛難矣。 況女無美惡, 入宮見妬, 士無賢不肖, 入朝見嫉。 臣旣無取信之德, 又居招謗之地, 久而未釋, 以及今日宜矣 古人云: “呼我以馬, 我應之以馬, 呼我以牛, 我應之以牛, 我實非牛馬, 則呼我者妄也, 於吾何損焉?” 若其捏合虛辭誹謗小臣者, 實如捕風繫影, 附之一笑而已。 但未知人之附不附陞陟者何人, 中傷排斥者幾何歟? 在聖鑑洞照, 臣何辨焉? 其曰: “除授之時, 申瀞以下伴食而已, 未敢發言。” 申瀞以下顯在其位, 若問伴食之狀, 則瀞豈右臣有所隱諱哉? 此非右瀞等也, 官政之失, 一官之吏共受其責, 如欲獨害臣身, 言必若此也。 其曰: “本家人馬不入四妾所及子息之第, 循環各處, 聚諸不逞之徒, 由意諾諾, 專權自恣”, 元子於去年十一月二十七日始到臣家, 至今凡九箇月, 出宿于外者凡四日。 一則因救火藥庫失火, 見諸凶穢, 未敢直來, 寄宿奴家凡二日, 一則因春夏兩等時祭, 出宿子家凡二日, 此外未嘗出宿於外, 終日在他所者。 臣不能分身矣, 誰行于外招人納賂哉? 元子侍從內人在家, 悉我動止, 臣何自明? 其曰: “臣以外戚族黨, 盤據臺省, 腹心含口結舌, 天何以知之?” 當今言路洞開, 人人直言不諱。 臣所爲奸苟如謗者之言, 而臺諫儻畏臣不言, 則弘文諸儒必言之矣, 弘文諸儒儻畏臣不言, 則宗室直臣必言之矣, 宗室直臣不言, 則同列大夫必言之矣, 何必潛懷矛戟, 外逞和顔, 飛書投內, 稔蠅營之欲、行鬼蜮之謀乎? 人臣如有奸回, 雖權重如喉舌、位崇如廟堂, 尙闔司抗章, 直言斥之而不饒, 何用匿名書哉? 此則奸人聚其黨, 共成一謗, 外爲陷臣, 內實試聖鑑也。 伏惟聖察焉。
성종 126권, 12년(1481 신축/명성화(成化) 17년) 2월 16일(경신) 1번째기사
이조판서 한치례등이 이천 교수 김의형을 개정하도록 청하다
이조판서(吏曹判書) 한치례(韓致禮), 참판(參判) 김계창(金季昌)이 와서 아뢰기를,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 김의형(金義亨)이 앞서 이천교수(利川敎授)로서 정사(呈辭)11066)하였습니다.
대개 외관(外官)으로서 정사하는 자는 임기에 준하여 서용하지 않으며, 도로 외관으로 제수한다는 것이 《대전(大典)》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감찰(監察) 강학손(姜鶴孫)은 본조(本曹) 정랑(正郞) 남제(南悌)와 4촌(寸) 형제이니, 법으로 당연히 상피(相避)하여야 하는데,
신등이 주의(注擬)를 착오(錯誤)하였습니다.
청컨대 아울러 개정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註11066]정사(呈辭):벼슬아치가 사직(辭職), 청가(請暇)등의 원서(願書)를 관(官)에 제출(提出)하던 일.
○庚申/吏曹判書 韓致禮 、參判 金季昌 來啓曰: “承文院校理 金義亨 , 前者, 以 利川 敎授呈辭。 凡外官呈辭者, 準期不敍, 還授外官, 載在 《大典》 。 且監察 姜鶴孫 , 與本曹正郞 南悌 , 四寸兄弟, 法當相避, 而臣等誤錯注擬。 請幷改正。” 從之
성종 142권, 13년(1482 임인/명성화(成化) 18년) 6월 5일 임인 2번째기사
사헌부에서 강응형을 힐난하고, 지시에 굴복치 않는 강학손의 치죄를 청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내섬시주부(內贍寺主簿) 강학손(姜鶴孫)이 감찰(監察) 강응형(姜應亨)과 서로 힐난하므로 본부(本府)에서 함문(緘問)하였으나, 강학손이 항거(抗拒)하면서 굴복하지 아니하니, 청컨대 형신(刑訊)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어찌 이것으로써 조사(朝士)를 장신(杖訊)하겠느냐?
사정도 애매(曖昧)하니, 내버려두도록 하라.”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강학손은 강희맹(姜希孟)의 아들인데, 그 아비의 세력을 믿고 벼슬길에 올라 교만하고 방종함이 형용할 수 없었는데,
뒤에 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이 되어 뇌물을 받고 법에 저촉되었으므로, 폐기(廢棄)되어 쓰이지 아니하였다.”하였다.
○司憲府啓: “內贍寺主簿姜鶴孫, 與監察姜應亨相詰, 本府緘問, 而鶴孫抗拒不服, 請刑訊。” 上曰: “安可以此, 而杖訊朝士乎? 情亦曖昧, 其棄之。”
【史臣曰: “鶴孫姜希孟之子也, 席其父勢登仕途, 驕縱無狀, 後爲掌隷院(同)〔司〕評, 受賕抵法, 廢棄不用。”】
성종 151권, 14년(1483 계묘/명성화(成化) 19년) 2월 18일 신사 4번째기사
의정부좌찬성 강희맹의 졸기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강희맹(姜希孟)이 졸(卒)하였다.
철조(輟朝), 철시(輟市)하고 부의(賻儀)를 내리고 조제(弔祭)하고 예장(禮葬)하기를 전례와 같이 하였다.
강희맹의 자(字)는 경순(景醇)이며 진주(晉州) 사람이고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강석덕(姜碩德)의 아들이다.
성품이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독서를 좋아하여 한번 보면 곧 기억하곤 하였다. 나이 18세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으며, 정통(正統)13228) 정묘년13229) 가을에 문과(文科)의 제 1등으로 뽑히어 종부주부(宗簿主簿)에 임명되었다. 경태(景泰)13230) 경오년13231)에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전임, 돈녕판관(敦寧判官)을 거쳐, 계유년13232)에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옮겼다가 을해년13233)에 직집현전(直集賢殿)에 제수되었다가 이내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옮겼으며, 병자년13234)에 동첨지돈녕부사(同僉知敦寧府事)로 승진하였다.
천순(天順)13235) 정축년13236)에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로 전임하였다가 무인년13237)에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로 옮겼다.
얼마 후에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올랐다가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에 올랐다.
예조참판(禮曹參判), 세자빈객(世子賓客)을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발탁되었다. 세조(世祖)가 발영등준과(拔英登俊科)13238)를 설치하여 문신을 시취(試取)하였는데, 강희맹이 발영시 제3등, 등준시 제2등에 합격하였다.
세조가 일찍이 여러 신하들을 품제(品題)하여 이르기를,
“내게 제일의 신하 셋이 있는데, 한계희(韓繼禧)는 미묘(微妙)함이 제일이고 노사신(盧思愼)은 활달(豁達)함이 제일이고 강희맹은 강명(剛明)함이 제일이다.”하였다.
세조가 병환에 걸리자, 강희맹이 입시(入侍)하여 밤낮을 떠나지 않았는데, 임금의 병이 낫고는 총애하여 여러번 물품을 내리었는데, 내탕서대(內帑犀帶)를 내리었다.
이어 숭정대부(崇正大夫)를 가자(加資)하고 얼마 안되어 형조판서(刑曹判書)를 특별히 제수하였다. 성화(成化) 무자년13239)에 남이(南怡)가 죽음을 당하고 예종(睿宗)이 논공(論功)하며 유자광(柳子光)등에게 익대공신(翊戴功臣)의 호를 내렸는데, 강희맹은 처음에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글을 올려 스스로 그 공을 열거하므로 3등에 올리고 진산군(晉山君)에 봉하였다.
지금 임금이 즉위하고는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의 호를 내리었다. 얼마 안되어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제수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임금의 신임이 매우 중하였으므로 그를 꺼리는 자가 있어 익명서(匿名書)를 지어 대내(大內)에 투입하여 오만가지로 〈그를〉훼방하였으나,
임금이 어서(御書)로 돈독히 유시(諭示)하기를,
“나는 경을 의심하지 않고 경은 나의 말을 의심하지 않는다.”하니,
강희맹이 받들어 읽고 감읍(感泣)하였다.
훼방을 받고부터 재삼 상서(上書)하여 사직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아니하였고, 신임이 더욱 더하여 누차 판돈녕(判敦寧)을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 사람됨이 공손 근엄하고 신중 치밀하여 벼슬을 맡고 직책에 임함에 행동이 사의(事宜)에 합치하였다.
경사(經史)를 널리 열람하고 전고(典故)를 많이 알았다.
예제(禮制)를 참정(參定)할 때에 문장이 정밀하고 깊이가 있으며 속되지 않았는데, 종이를 잡기가 무섭게 곧 〈문장이〉이루어졌다.
이에 이르러 병사(病死)하니, 향년(享年)이 62세이었다.
아들은 강귀손(姜龜孫), 강학손(姜鶴孫)인데, 강귀손은 기해년13240) 과거에 합격했다. 임금이 강희맹의 문장을 소중히 여겨 그 시문을 차례로 엮어서 책을 만들기를 명하니, 《사숙재집(私淑齋集)》약간 권이 세상에 전한다.
시호를 문량(文良)이라 하였으니,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함이 문(文)이고, 온순하고 늘 즐거워함이 양(良)이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강희맹(姜希孟)은 책을 많이 보고 기억을 잘하며 문장이 우아하고 정밀하여 한때의 동년배[儕輩]들이 그보다 앞서는 자가 없었다. 다만 평생 임금의 뜻에 영합하여 은총을 희구(希求)하였다. 세조(世祖)가 금강산(金剛山)에 거둥하였을 때, 이상한 새가 있어 하늘가를 빙빙 돌며 춤추었다. 세조가 부처의 힘이 신묘하게 응한 것이라 하였는데, 강희맹이 서울에서 그 말을 듣고 드디어 《청학송(靑鶴頌)》을 지어 바치었다. 세조가 일찍이 술이 거나하여 좌우에게 희롱하여 말하기를, ‘나는 중토(中土)를 횡행(橫行)하고 싶다.’하였는데, 강희맹은 이를 사실로 여기고 이에 한 권의 책을 지어 바쳤다. 이름하여 《국세편(國勢篇)》이라 하였는데, 아첨하는 말이 많이 있었다. 세조가 보고 이르기를, ‘이것은 사람들에게 들려주어서는 안되겠다.’하고, 곧 돌려보냈다. 또 그 공(功)을 스스로 열거하여 공신(功臣)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이조판서가 되어서는 비방을 받음이 또한 많았다.
비록 사조(詞藻)13241)의 아름다움이 있기는 하나, 무엇을 취하랴?”하였다
註13228]정통(正統):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註13229]정묘년:1447 세종29년 註13230]경태(景泰):명나라 대종(代宗)의 연호 註13231]경오년:1450 세종32년 註13232]계유년:1453 단종원년 註13233]을해년: 1455 단종3년.註13234]병자년: 1456 세조2년.註13235]천순(天順):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註13236]정축년:1457 세조3년.註13237]무인년:1458 세조4년.註13238]발영등준과(拔英登俊科):세조12년(1466) 5월에 베푼 발영시(拔英試)와 동년(同年) 7월에 베푼 등준시(登俊試)를 말하는데, 이때 발영시에서는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김수온(金守溫)등 40인을 뽑고 등준시에서는 김수온 등 12인을 뽑았으며, 그 뒤 9월의 무과등준시(武科登俊試)에서는 최적(崔適)등 51인을 뽑았음. 대개 재상(宰相)이 시험해 나아간 것은 발영시로부터 비롯되었고, 종친(宗親)이 시험해 나아간 것은 등준시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함註13239]성화(成化) 무자년:1468년 세조14년 註13240]기해년:1479 성종10년.註13241]사조(詞藻): 문장
○議政府左贊成姜希孟卒。 輟朝市, 賜賻弔, 祭禮葬如例。 希孟, 字景醇, 晋州人。 知敦寧府事碩德之子。 性聰慧, 喜讀書, 一覽輒記。 年十八中生員試。 正統丁卯秋, 擢文科第一名, 拜宗簿主簿。 景泰庚午, 轉禮曹佐郞, 歷敦寧判官。 癸酉, 遷禮曹正郞。 乙亥, 拜直集賢殿, 俄遷兵曹正郞。 丙子, 陞同僉知敦寧府事。 天順丁丑, 轉判典農寺事。 戊寅, 遷判通禮門事, 頃之陞禮曹參議, 歷吏曹參議, 陞中樞院副使, 歷吏禮曹參判, 世子賓客, 擢禮曹判書。 世祖設拔英、登俊科, 以試文臣, 希孟中拔英第三、登俊第二。 世祖嘗品題諸臣曰: “予有臣三第一。 韓繼禧微妙第一, 盧思愼豁達第一, 姜希孟剛明第一也。 世祖不豫, 希孟入侍, 晝夜不離。 及上疾瘳, 寵錫便蕃, 賜內帑犀帶, 仍加崇政。 未幾, 特拜刑曹判書。 成化戊子, 南怡誅、睿廟論功, 賜柳子光等翊戴功臣號。 希孟初不與, 上書自列其功, 命錄三等, 封晋山君。 上卽位, 賜純誠明亮佐理功臣號。 未幾, 拜兵曹判書, 歷判中樞府事、吏曹判書。 倚任甚重, 有忌之者, 作匿名書, 投大內, 毁謗萬端。 上御書敦諭, 至有予不疑卿, 卿不疑我之言, 希孟奉閱感泣。 自遭毁謗, 再三上書辭職, 上不允。 委任益加, 累歷判敦寧, 陞左贊成。 爲人, 恭謹愼密, 當官莅職, 動合事宜。 博覽經史, 多識典故。 參定禮制, 爲文章, 精深雅古, 操紙立就。 至是以疾卒, 年六十, 有二子, 龜孫、鶴孫。 龜孫登己亥科。 上雅重希孟文章, 命撰次詩文, 有《私淑齋集》若干卷行于世。 諡文良, 勤學好問: ‘文;’ 溫良好樂: ‘良’。
【史臣曰: “希孟, 博覽强記, 爲文章, 典雅精絶, 一時儕輩, 無能出其右。 但平生迎合主旨, 以希恩寵。 世祖駕幸金剛山, 有異鳥, 盤舞空際。 世祖以爲: ‘佛力妙應,’ 希孟箏聞之, 遂撰《靑鶴頌》以進。 世祖嘗酒酣, 戲語左右曰: ‘吾欲橫行中土, 希孟以爲實然, 乃撰一書以進, 名曰《國勢篇》, 多有諛辭。 世祖見之曰: ‘此不可使聞於人也,’ 卽還之。 又自列其功, 得參功臣。 爲吏曹判書, 得謗亦多。 雖有詞藻之美, 何取?”】
성종 212권, 19년(1488 무신/명홍치(弘治)1년) 윤1월 25일(경인) 2번째기사
이조, 병조에 전지하여 선농에 제사할 때와 친경 때 수고한 신하들에게 1자급을 더하게 하다
이조(吏曹), 병조(兵曹)에 전지(傳旨)하기를,
“선농(先農)에 친히 제사할 때에 전사관(典祀官) 박미(朴楣), 협률랑(協律郞) 김경손(金慶孫), 찬자(贊者) 이원정(李元靖), 그리고 친경(親耕) 때 좌통례(左通禮) 윤탄(尹坦), 우통례(右通禮) 허계(許誡), 사복시정(司僕寺正) 강귀손(姜龜孫), 봉상시부정(奉常寺副正) 이증문(李曾門), 적전령(籍田令) 백훈(白勛), 봉청상관(奉靑箱官) 김화(金澕), 기읍령(畿邑令) 노호신(盧好愼), 이윤(李掄), 이종연(李宗衍), 협시(夾侍) 김조(金祚), 이섬(李暹), 정의(正衣) 김수정(金粹正), 이당(李瑭), 전악령(典樂令) 황효성(黃孝誠), 기민(耆民) 민기(閔沂)등은 대가(代加)하고, 친사(親祀) 때 단하집례(壇下執禮) 정회(鄭淮), 대축(大祝) 이창신(李昌臣), 박처륜(朴處綸), 축사(祝史) 김전(金琠), 이복선(李復善), 재랑(齋郞) 최관(崔灌), 구숙손(丘夙孫), 집준(執尊) 정이교(鄭以僑), 이세광(李世匡), 봉조관(奉俎官) 김진(金震), 정내필(鄭來弼), 남조(南祚), 홍걸(洪傑), 이혜(李譓), 허효순(許孝舜), 장생령(掌牲令) 신경장(申景章), 헌관 관세위(獻官盥洗位) 이운거(李云秬), 찬자(贊者) 김영우(金靈雨), 알자(謁者) 허침(許琛), 윤탕로(尹湯老), 세작관(洗爵官) 유인동(柳麟童), 제감(祭監) 심빈(沈濱), 안당(安瑭), 수조관(受俎官) 민흥림(閔興霖), 찬인(贊引) 강학손(姜鷄孫), 임유침(林有琛), 아악령(雅樂令) 송교(宋郊), 친경(親耕) 때 적전령(籍田令) 안팽명(安彭命), 집례(執禮) 권경우(權景祐), 알자(謁者) 황사효(黃事孝), 권경희(權景禧), 간관(諫官) 김심(金諶), 협률랑(協律郞) 윤채(尹埰), 예조정랑(禮曹正郞 ) 유인호(柳仁濠), 김응기(金應箕), 좌랑(佐郞) 민함(閔諴), 성희증(成希曾), 유경(劉璟), 전악령(典樂令) 이근생(李根生), 박곤(朴?), 기민(耆民) 고의(高義), 김수(金守), 최계림(崔繼霖), 이춘(李春), 김유(金有), 이노(李壚), 노충(魯忠), 유미(柳美), 이산(李山), 박득부(朴得富), 차식(車軾), 최영덕(崔永德), 박춘경(朴春京), 이춘부(李春富), 나유생(羅有生), 송모지리(宋毛知里), 장우지(張右知), 조성만(趙成萬), 오생(吳生)은 각각 1자급(資級)을 가(加)하라”하였다. 인해 전교하기를,
“주서(注書) 등은 가자(加資)의 열(列)에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니, 주서에게 가자하는 일은 전지(傳旨)에 아울러 기록하여 아뢰라.”하니,
도승지(都承旨) 송영(宋瑛)이 아뢰기를,
“주서(注書) 권빈(權璸)은 중국 사신을 지대(支待)하는 모든 일을 오로지 맡았고 고(故) 가주서(假注書) 이윤(李胤)은 원중(院中)의 일을 다스렸으니,
아울러 기록하기를 청합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아울러 가자(加資)하라.”하였다.
○傳旨吏ㆍ兵曹曰:親祀先農時, 典祀官朴楣、協律郞金慶孫、贊者李元靖, 親耕時左通禮尹坦、右通禮許誡、司僕寺正姜龜孫、奉常副正李曾門、籍田令白勛、奉靑箱官金澕、畿邑令盧好愼ㆍ李掄ㆍ李宗衍、夾侍金祚ㆍ李暹、正衣金粹正ㆍ李瑭、典樂令黃孝誠、耆民閔沂等代加。 親祀時, 壇下執禮鄭淮、大祝李昌臣ㆍ朴處綸、祝史金琠ㆍ李復善、齋郞崔灌ㆍ丘夙孫、執尊鄭以僑ㆍ李世匡、捧俎官金震ㆍ鄭來弼ㆍ南祚ㆍ洪傑ㆍ李譓ㆍ許孝舜、掌牲令申景章、獻官盥洗位李云秬、贊者金靈雨、謁者許琛ㆍ尹湯老、洗爵官柳麟童、祭監沈濱ㆍ安瑭、受俎官閔興霖、贊引姜鶴孫ㆍ林有琛、雅樂令宋郊, 親耕時, 籍田令安彭命執禮權景祐、謁者黃事孝ㆍ權景禧、諫官金諶、協律郞尹埰、禮曹正郞柳仁濠ㆍ金應箕、佐郞閔諴ㆍ成希曾ㆍ劉璟、典樂令李根生ㆍ朴、耆民高義ㆍ金守ㆍ崔繼霖ㆍ李春ㆍ金有ㆍ李壚ㆍ魯忠ㆍ柳美ㆍ李山ㆍ朴得富ㆍ車軾ㆍ崔永德ㆍ朴春京ㆍ李春富ㆍ羅有生ㆍ宋毛知里ㆍ張右知ㆍ趙成萬ㆍ吳生, 各加一資。
仍傳曰: “注書等不與加資之列, 注書加資事, 幷錄傳旨以啓。”都承旨宋瑛啓曰: “注書權璸專掌天使支待諸事,故假注書李胤治院中事,請幷錄。”傳曰:“竝加資。”
성종 230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7월 1일 정사 10번째기사
선두안을 지우고 함부로 노비를 기록한 전사평 강학손을 신문하게 하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전사평(司評) 강학손(姜鶴孫)은 선두안(宣頭案)21167)을 지우고 신수인(申守仁), 남궁찬(南宮璨)의 노비(奴婢)를 함부로 기록하였는데 정상을 숨기고 승복하지 않으니, 형신(刑訊)21168) 하소서.”하니,
임금이 우승지(右承旨) 홍흥(洪興)에게 말하기를,
“지운데가 참으로 있는데도 과연 정상이 있는지를 모르는가?”하니,
홍흥이 대답하기를,
“글자를 긁어 없애고 이름자를 고쳤으니, 정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라.”하였다.
註21167]선두안(宣頭案):내수사(內需司)에 속하는 노비(奴婢)를 20년마다 자세히 조사하여 새로 만들어 임금에게 바치던 원적부(原籍簿).註21168]형신(刑訊):형장(刑杖)을 하며 신문함
○義禁府啓: “前司評姜鶴孫塗擦宣頭案, 冒錄申守仁、南宮璨奴婢, 匿情不服, 請刑訊。” 上謂右承旨洪興曰: “塗擦處實有之, 未知果有情耶?” 興對曰: “刮去字畫, 改竄名字, 非有情而何?” 上曰: “依所啓施行。”
성종 230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7월 4일 경신 2번째기사
강학손이 스스로 노비문서를 지웠다는 말을 의심하다
승정원(承政院)에 전교(傳敎)하기를,
“강학손(姜鶴孫)이 사대부(士大夫)로서 문서(文書)를 지웠다는 것은 진실로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니, 간사한 무리에게 속임을 당한 것을 살피지 못한 것이 아닌가? 스스로 지운 것과는 차이가 있는데 강학손이 형장(刑杖)을 받는 것은 애매하지 않은가?”하였다.
○傳于承政院曰: “姜鶴孫以士夫, 塗擦文書, 固無其理。 無乃爲奸徒所詐而或不之察歟? 與親自塗擦有間, 鶴孫受杖, 無乃曖昧耶?”
성종 230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7월 17일 계유 7번째기사
의금부에서 강학손의 옥사에 노사신도 함께 추문하기를 청하므로 노사신이 피혐할 것을 청하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강학손(姜鶴孫)이 공초(供招)하기를, ‘경준(慶俊)이 판결사(判決事)이었을 때에 나에게 말하기를, 「김흥수(金興守)가 진고(陳告)한 일은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21244)의 집에서 너에게 옮기도록 청한 것이다.」하였고, 그 뒤에 선성부원군의 집에서 종[婢] 물비(勿非)를 시켜 다시 우리 집에 와서 청하였습니다.’하였으니, 김흥수의 공사(公事)를 빨리 결단하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의정(右議政) 노사신도 죄가 없을 수 없으니,
아울러 그에게까지 물으소서.”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우의정은 추문(推問)하지 말라.”하였다.
노사신이 와서 아뢰기를,
“신(臣)은 경준에게 이 일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신이 처에게 물으니, 처가 말하기를 ‘오촌질(五寸姪) 강학손과 얼손(孼孫) 심담(沈潭)이 함께 우리 집에 왔는데 심담이 청하기를, 「나에게 장례원(掌隷院)의 송사가 있는데, 강학손에게 부탁하여 빨리 분변하게하기 바란다」하기에, 내가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심담의 청에 따라 물비를 시켜 강학손에게 심담이 말한 것과 같이 부탁하였을 뿐이고, 다른 청은 하지 않았다.’합니다. 그러나 의금부에서 신도 아울러 추문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신이 나라의 일에 참여하여 의논하기가 미안하니, 피혐(避嫌)하겠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내가 이미 안다. 피혐하지 말라.”하였다.
註21244]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 노사신(盧思愼)의 작호(爵號).
○義禁府啓: “姜鶴孫供云: ‘慶俊爲判決事時, 謂我曰: 「興守陳告事, 宣城府院君家請移于汝。」 其後宣城府院君家令婢勿非再到吾家, 請之云: 「興守公事, 願速斷。」’ 若然則右議政盧思愼不得無罪。 請幷逮問。” 傳曰: “右議政勿推。” 思愼來啓曰: “臣未嘗(興)〔與〕慶俊言此事。 臣問之於妻, 妻云: ‘五寸姪姜鶴孫及孽孫沈潭俱至吾家, 潭請曰: 「吾有掌隷院訟事, 願囑鶴孫, 使速分辨。」’ 予不知爲某事也, 但從潭請, 使勿非囑鶴孫如潭所言而已, 無他干請。 然義禁府請竝推臣, 臣與議國事未安。 請避。” 傳曰: “予已知之, 其勿避。”
성종 230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7월 22일 무인 1번째기사
우의정 노사신이 강학손의 장물사건에 연루돼 사임을 청하나 허락하지않다
우의정(右議政) 노사신(盧思愼)이 와서 아뢰기를,
“김흥수(金興守)가 진고(陳告)한 일을 강학손(姜鶴孫)에게 옮겼는데, 신은 경준(慶俊)과 말한 적이 없고, 다만 아내가 심담(沈潭)의 말에 따라 강학손에게 부탁하였으나, 한 집의 책임은 가장이 맡아야 하므로, 신이 삼공(三公)의 자리에 있는 것이 마음에 참으로 미안하니, 사직하겠습니다.”하니,
전교(傳敎)하기를,
“강학손이 말이 궁하여 핑계한 말이다. 정승이 어찌 청탁하려 하였겠는가? 피혐(避嫌)하지 말라.”하였다.
○戊寅/右議政盧思愼來啓曰: “移興守陳告事于姜鶴孫, 臣未嘗與慶俊言之。 但妻以沈潭之言, 囑于鶴孫, 一家之責, 當任家長。 臣居三公之位, 心實未安, 請辭職。” 傳曰: “鶴孫辭窮而托言也, 政丞其肯請囑乎? 其勿避。”
성종 230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7월 24일 경진 1번째기사
장령 표연말이 강학손의 사건에 연루된 노사신을 추문할 것을 청하다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표연말(表沿沫)이 아뢰기를,
“의금부(義禁府)에서 강학손(姜鶴孫)이 법을 굽혀서 장물(贓物)을 받은 것을 살펴서 밝혔으니, 범한 것이 중하거니와, 말이 우의정(右議政) 노사신(盧思愼)에게 관련되었는데, 특별히 명하여 추문(推問)하지 말게 하셨습니다.
노사신은 대신(大臣)으로서 일이 큰 죄에 관련되었으므로 가리지않을 수 없으니, 금부(禁府)에서 아뢴 대로 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정승이 어찌 그러한 일을 하겠는가?”하였다.
표연말이 아뢰기를,
“강학손은 송사를 판결하는 관리로서 법을 굽혀 그릇 판결하고 장오(贓汚)가 어지러우므로 조정(朝廷)에서 모두가 부끄럽게 여기니, 그 말이 미친 바는 추핵(推覈)하여 가려밝혀야 워낙 마땅한데, 더구나 삼공(三公)인 대신(大臣)이겠습니까? 이제 가리지 않는다면 뭇사람의 의심을 없애지 못할 뿐더러 노사신의 마음도 어찌 스스로 편안하겠습니까? 이것은 대신을 존중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증거에 따라 추문(推問)하여 가려서 바로잡으소서.”하니,
전교하기를,
“근거가 없는 일로 대상(大相)을 옥(獄)에 내리는 것이 옳겠는가?”하였다.
○庚辰/司憲府掌令表沿沫啓曰: “義禁府按驗姜鶴孫枉法受贓, 所犯至重, 辭連右議政盧思愼, 特命勿推。 思愼以大臣, 事干大罪, 不可不辨, 請依禁府所啓。” 傳曰: “政丞豈爲如是事歟?” 沿沫啓曰: “鶴孫以決訟官吏, 枉法誤決, 贓汚狼籍, 朝廷莫不恥之。 其辭所逮, 固當推覈辨明, 況三公大臣乎? 今若不辨, 非特衆疑未祛, 思愼之心, 亦豈自安? 此非所以重大臣之道也。 請憑推辨正。” 傳曰: “以無據之事, 下大相於獄, 可乎?”
성종 230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7월 26일 임오 2번째기사
대사헌 박건 등이 뇌물을 받은 강학손과 이를 막지않은 노사신을 추국할 것을 청하다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박건(朴楗)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아뢰기를,
“생각하건대, 사대부(士大夫)가 지키는 것으로는 염치보다 큰 것이 없는데 강학손(姜鶴孫)은 송사를 받아 다스리는 관리로서 무뢰한 자와 체결하여 뇌물을 받고 법을 굽혀 꺼림없이 탐오(貪汚)하고 쓴 듯이 염치가 없으므로, 하사(下士)까지도 누구나 다 이를 갈고 욕합니다.
더구나 노사신(盧思愼)은 모두가 우러러보는 지위에 있으므로 자제가 간사한 것을 보면 병이 자기 몸에 있는 것처럼 의로운 방도로 가르쳐서 간사한데에 들지않게 하여야 할 것인데, 가르치지 못하였을 뿐더러 따라서 부추겼습니다. 이것은 인도한 것이니 저 정승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추구(推究)하도록 허가하여 조정의 의심을 푸소서.”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정승이 어찌 자제에게 간사를 시키고 또 이끄는 일이 있겠는가?”하였다.
○司憲府大司憲朴楗等上箚子曰:
竊惟士夫之操, 莫大於廉恥。 姜鶴孫以聽訟官吏, 要結無賴, 受賕骫法, 貪饕無忌, 廉恥掃如, 雖在下士, 莫不切齒唾罵。 況盧思愼居具瞻之地, 視子弟之邪曲, 宜如疾病之在身, 敎以義方, 不納於邪。 非惟不能敎之, 又從而嗾之, 是導之也, 將焉用彼相哉? 伏望許令推究, 以釋朝著之疑。
傳曰: “政丞安有縱子弟之邪又導之耶?”
성종 230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7월 27일(계미) 1번째기사
대사헌 박건 등이 노사신을 추핵할 것을 청하다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박건(朴楗)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아뢰기를,
“노사신(盧思愼)의 일은 전해들은 말이 아니고 강학손(姜鶴孫)의 공초(供招)에 이미 나타났으니, 그것이 빈말을 지어낸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노사신에게 참으로 이런 일이 없으면, 강학손도 사람이니, 다른 재상(宰相)에 대하여서라도 감히 거짓으로 끌어대지 못할 것인데, 더구나 한 가문의 어른을 가리켜서 죄망(罪網)에 빠지게 하겠습니까?
신들은 아마도 버려두고 묻지 않으면 무릇 세력이 있고 요로에 있는 자가 반드시 ‘내가 죄를 범하여 옥(獄)에 가더라도 감히 따질 사람이 없다.’할 것이니, 그러면 나라의 일이 날로 글러질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미친 바의 까닭은 모두 물어서 조정의 울분을 시원하게 하소서.”하니,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의정부(議政府)에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癸未/司憲府大司憲 朴楗 等上箚子曰:
盧思愼 之事, 非傳聞之說, 已見於 鶴孫 之供, 其非鑿空造語明矣。 思愼 實無是事, 鶴孫 亦人耳, 雖在他相, 尙不敢誣引, 況斥家門之長, 使陷於罪網乎? 臣等恐置此不問, 則凡有勢要者, 必曰: “我雖犯罪逮獄, 人莫敢誰何。” 則國事將日非矣。 伏望幷問所逮之由, 以快朝廷之憤。
命議于領敦寧以上及議政府。
성종 230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7월 28일 갑신 1번째기사
우의정 노사신이 강학손의 일에 연루됨을 피혐하고 사임할 것을 청하다
우의정(右議政) 노사신(盧思愼)이 상서(上書)하기를,
“신(臣)은 데면데면한 자질로 태보(台輔)21265)에 비위(備位)21266)하였으므로 스스로 감당하지 못함을 알고 진정하여 해직을 청하고자 한 지 오랩니다.
이제 강학손(姜鶴孫)이 형세가 몰리고 말이 궁하여, 신의 집에 말이 미치고 뇌물을 주고 청탁한 것을 듣지않은 듯이 하는 것으로 스스로 모면하는 여지를 삼으려 하였으므로, 헌부(憲府)에서 신을 국문(鞫問)하기를 청한 것은 워낙 마땅한데, 성상께서 특별히 국문받는 것을 허가하지 않으셨으니, 신은 성은(聖恩)이 지극히 중함을 압니다.
그러나 신이 저들에게 미친 말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어찌 물으시기를 기다려서야 말하겠습니까? 신이 아는 것은 처음에 아뢴 말뿐입니다.
신이 어리석기는 하나, 이미 삼공(三公)이라 하는 처지인데, 어찌 감히 한 짓을 숨겨 임금을 속이겠습니까?
자제를 간사하게 이끌었다고 신을 허물하는 말은 신이 참으로 가슴아픕니다.
무릇 사람이란 자신은 바르지 않더라도 자제를 가르치는데에 있어서는 반드시 의로운 방도로 하여 불의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인정으로서 같은 것인데, 신이 변변치 못하더러도 어찌 간사하게 이끌기까지 하였겠습니까? 다만 강학손이 궁하여서 신에게 말이 미친 것을 헌부가 듣고서 신을 비방하는데, 이것은 신이 평소에 남에게 믿음을 받을 만한 것이 없었던 탓입니다 참으로 스스로 얻은 바니, 어찌 감히 남을 탓하겠습니까?
돌이켜 생각하건대 정부(政府)는 모두가 우러러보는 곳이며 삼공(三公)은 조정(朝廷)이 바라보는 것이니, 비방하는 의논을 무릅쓰고 총리(寵利)를 차지하여 있을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빨리 신의 벼슬을 해면하여 물정(物情)을 시원하게 하고 신이 평소에 바라던 것을 성취하게 하소서.”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註21265]태보(台輔):정승 註21266]비위(備位):자리를 채움. 벼슬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겸사
○甲申/右議政盧思愼上書曰:
臣以空疎, 備位台輔, 自知不稱, 欲攄情乞解者久矣。 今姜鶴孫勢迫辭窮, 欲及之臣家, 而以若不聽其賄請者, 爲自免之地。 憲府請鞫臣, 固當也, 而聖上特不許就問。 臣知聖恩之至重, 然臣若小有說及於彼, 則寧可待問而後言耶? 臣之所知, 止於初啓之辭而已。 臣雖庸愚, 旣曰三公, 安敢諱所爲而欺君上哉? 若咎臣以 “導子弟以邪” 之語, 則臣實痛心。 凡人身雖不正, 至於敎子弟, 必以義方, 庶望其不陷於不義。 人情所同, 臣雖無狀, 豈至導之以邪曲也? 但鶴孫窮而及於臣, 憲府聞而謗於臣, 此乃臣無平素可取信於人, 有以致之也。 實所自取, 何敢尤人? 顧惟政府具瞻之地, 三公朝著所望, 不可冒謗議而居寵利。 伏望亟解臣職, 以快物情, 以遂臣素願。不許。
성종 230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7월 29일 을유 2번째기사
노사신이 강학손과 대질하기를 청하다
우의정(右議政) 노사신(盧思愼)이 와서 아뢰기를,
“강학손(姜鶴孫)이 신이 판결사(判決事) 경준(慶俊)에게 청탁하였다말하여 김흥수(金興守)의 일을 신에게 옮겼으니, 강학손과 대질하기를 청합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이것은 다만 강학손이 조리가 서지않고 말이 궁하여 죄를 피할 데가 없어서 그런 것일 뿐이다. 경준이 아직 살아있더라도 가리기 어려운데,
더구나 경준이 이미 죽었으니, 어찌 번거롭게 옥(獄)에 가겠는가?”하였다.
○右議政盧思愼來啓曰: “姜鶴孫言, 臣請囑于判決事慶俊移興守事於吾, 請與鶴孫面質。” 傳曰: “此特鶴孫理屈辭窮, 無所逃罪而然也。 雖慶俊尙在, 辨之猶難, 況俊已死, 何煩就獄?”
성종 231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8월 6일 신묘 1번째기사
강학손의 일로 국정에 참여하지않는 우의정 노사신에게 어서를 내려 직무에 힘쓸 것을 명하다
어서(御書)를 우의정(右議政) 노사신(盧思愼)에게 내리기를,
“요사이 강학손(姜鶴孫)의 일로 인하여 국정(國政)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정승(政丞)의 뜻이 옳다. 그러나 태계(台階)21292)의 자리가 중(重)한데,
작은 혐의(嫌疑)로 인하여 국정을 의논하지 않음이 가하겠는가?
내 뜻을 체득(體得)하고 직무(職務)에 힘써 일을 잘하라.”하였다.
註21292]태계(台階): 삼공(三公)의 위(位)라는 뜻.
○辛卯/御書賜右議政盧思愼曰: “近以姜鶴孫之事, 不參謀謨, 政丞之意則是矣, 然台階位重, 以小嫌, 不議國政可乎? 其體予意, 勉職克臬。”
성종 231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8월 6일(신묘) 2번째기사
노사신이 어서에 감격하다
우의정(右議政) 노사신(盧思愼)이 와서 아뢰기를,
“신이 비록 청촉(請囑)한 일은 없으나, 신이 강학손(姜鶴孫)에게 가문(家門)의 장(長)이 되므로, 강학손이 이를 신에게 돌렸으니, 이것이 신의 죄입니다. 성상께서 신의 정상(情狀)이 없음을 아시고, 위로(慰勞)하기를 힘쓰심이 여기에 이르셨으니, 충심으로 감격하여 마지못하겠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강학손이 공술(供述)21293)한 바가 정승(政丞)에게 관계됨이 없는데,
정승이 무슨 혐의가 있는가?”하였다.
註21293]공술(供述): 신문(訊問)에 응하여서 진술함.
○右議政 盧思愼 來啓曰: “臣雖無請囑之事, 然臣於 鶴孫 家門之長也, 而 鶴孫 歸之於臣身, 是臣之罪也。 聖上知臣之無情, 慰勉至此, 中情感激, 不能自止。” 傳曰: “ 鶴孫 所供, 不干於政丞, 政丞何嫌之有?”
성종 231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8월 8일 계사 3번째기사
장령 표연말이 노사신을 강학손과 대질 심문할 것을 청하다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표연말(表沿沫)이 와서 아뢰기를,
“노사신(盧思愼)은 마땅히 강학손(姜鶴孫)과 더불어 대질(對質)해 심문해야 합니다. 지금 강학손의 옥사(獄事)가 거의 끝났는데도 아직 그와 같은 명령을 듣지 못하였으니,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강학손이 정승(政丞)을 무함(誣陷)하여 끌어들인 것이다.”하였다.
표연말이 아뢰기를,
“강학손도 사람입니다. 일에 간여(干與)하지 않았다면, 어찌 감히 대신(大臣)을 경솔히 끌어들였겠습니까? 하물며 가문(家門)의 장(長)이겠습니까?
공술(供述)한 말이 노사신과 관련되었으니,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빙거(憑據)하여 추문(推問)해 변정(辨正)해서,
여러 사람의 의심을 제거하소서.”하니,
임금이 글로 써서 이르기를,
“정승은 김흥수(金興守)의 진고(陳告)에는 전혀 관여되지 않았다.
비록 옥사(獄事)가 이루어진다 하여도 이로움이 없는데, 어찌하여 청하는가? 강학손이 비록 족친(族親)이나, 그 마음의 사정(邪正) 또한 알기 어려운데, 갑자기 그대가 옥송(獄訟)을 청하니, 어찌 부끄럽지 않으냐?
이는 진실로 정승이 한 바가 아니므로, 내가 의심치 않는 바이다.”하였다.
○司憲府掌令表沿沫來啓曰: “盧思愼當與姜鶴孫憑問, 今鶴孫之獄幾畢, 而猶未聞命, 未審所以。” 傳曰: “鶴孫誣引政丞矣。” 沿沫啓曰: “鶴孫亦人耳。 事若不干, 豈敢輕引大臣? 況家門之長乎? 辭連思愼, 必有其由。 請憑推辨正, 以袪衆疑。” 御書曰:
政丞於興守陳告, 固無與焉。雖或事成,亦無利矣,其何以請鶴孫? 雖是族親, 其心之邪正,亦所難知,而遽爾請訟,寧無愧耶? 此誠非政丞之所爲,而予之所不疑也。
성종 231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8월 9일(갑오) 2번째기사
정언 조구가 노사신을 추문할 것을 청하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조구(趙球)가 와서 이르기를,
“노사신은 강학손의 옥사에 공사(供辭)가 관련되었으므로, 의금부(義禁府)에서 논계(論啓)하여 추문(推問)하기를 청한 것이 옳사온데, 오히려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노사신은 지위가 삼공(三公)의 자리에 있다고 하여, 지금 시비(是非)를 분변(分辨)하지 않으면, 여러 사람이 우러러보는 자리에 있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빙거(憑據)하여 핵실(覈實)해서 여러 사람의 의심을 풀게 하소서.”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司諫院正言 趙球 來啓曰: “ 盧思愼 辭連 姜鶴孫 之獄, 義禁府論啓請推, 是矣, 而猶不允許。 思愼 位居三公, 今不辨是非, 則難以居具瞻之地。 請憑覈以解群疑。” 不聽。
성종 231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8월 15일 경자 2번째기사
우의정 노사신이 자신을 옥에 가두고 강학손과 대질시켜 줄 것을 청하다
우의정(右議政) 노사신(盧思愼)이 와서 아뢰기를,
“대간(臺諫)21303)이 신을 강학손(姜鶴孫)의 옥사(獄事)에 말이 관련되었다 하여 추문(推問)할 것을 청하여 마지아니하는데, 성감(聖鑑)21304)이 통조(洞照)하시고 비록 추문(推問)하기를 허락하지않으시나,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 만약 신을 옥(獄)에 가두고 강학손(姜鶴孫)과 대면하여 서로 따져서 그 허실(虛實)을 가린다면, 대간(臺諫)의 의심도 풀리고, 신의 마음 또한 편안할 것으로 여겨집니다.”하니,
전교하기를,
“대간(臺諫)이 비록 말하더라도 진실로 들어줄 수 없다.
내가 비록 어리석으나, 죄없는 삼공(三公)을 옥에 가두겠는가?”하였다.
註21303]대간(臺諫):사헌부와 사간원의 벼슬을 통칭하는 말 註21304]성감(聖鑑):임금의 감식(鑑識).
○右議政盧思愼來啓曰: “臺諫以臣辭連鶴孫之獄, 請推不已, 聖鑑洞照, 雖不許推。 臣意以謂今若下臣於獄, 與鶴孫對面相質, 辨其虛實, 則臺諫之疑釋, 而臣心亦安。” 傳曰: “臺諫雖言, 固不可聽。 予雖庸暗, 下無罪三公於獄乎?”
성종 231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8월 16일 신축 1번째기사
사간 김전 등이 노사신을 강학손과 대질시켜 핵실할 것을 청하다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김전(金琠)등과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안윤손(安潤孫)등이 상소하기를,
“가만히 듣자오니, 인주(人主)가 능히 신하가 법을 지키기를 용납한 뒤에야 인주의 힘이 높아지고, 인신(人臣)이 능히 인주가 법을 흔들도록 용납하지 않은 뒤에야 인주의 법이 미덥다고 합니다.
옛날에 등통(鄧通)21307)은 귀신(貴臣)인데, 한 번 전상(殿上)에서 희롱(戲弄)하니, 승상(丞相)이 격문(檄文)으로 부를 수 있었고, 번왕(藩王)은 사랑하는 아들인데, 한 번 사마문(司馬門)21308)에서 말을 내리지 아니하니,
공거령(公車令)21309)이 탄핵하여 아뢸 수 있었습니다.
지금 노사신(盧思愼)은 말이 강학손(姜鶴孫)의 장오(贓汚)21310)에 관련되었으니, 〈등통이〉다만 전상에서 한 번 희롱한데 그치지 아니하고,〈번왕이〉사마문에서 한 번 말을 내리지않은데 그치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는 총명(聰明)하시고 강의(剛毅)하심이 백왕(百王)의 으뜸이시어, 죄가 중한 자를 귀근(貴近)하다고 하여 가볍게 하시고 죄가 가벼운 자를 소원(疏遠)하다고 하여 중하게하지 않으시는데, 오직 노사신에게만 그렇지 않으십니다. 신등이 비록 용렬(庸劣)하나, 자리가 언관(言官)에 있으므로,
차마 전하로 하여금 법을 흔들어서 미덥지 않게 할 수 없습니다.
바야흐로 지금 선비의 풍습[士習]이 아름답지 못하여, 탐오(貪汚)한 풍속이 그치지않아서,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하고 청알(請謁)이 오고감이 심하여, 분쟁(忿爭)이 그것이 아니고는 이기지 못하고, 유체(幽滯)21311)가 그것이 아니고는 뽑히지못합니다.
시정(市井)의 무리나 호협(豪俠)한 사람들이 혹은 친척을 통하고, 혹은 복례(僕隷)21312)에게 청촉(請囑)하여, 적으면 꾸러미[苞苴]로, 많으면 광주리[筐篚]로 통명(通名)의 재물을 삼아, 그 위세(威勢)를 빌고 그 관절(關節)21313)을 고용(雇用)해서, 시비(是非)가 전도(顚倒)되게 하고 공도(公道)가 행하여지지 않으니, 이는 바로 성치(聖治)의 큰 허물[大累]입니다.
이것을 말하여 한심(寒心)하다이를 수 있으니, 이 탐독(貪黷)에 좌죄(坐罪)되어, 망신패가(亡身敗家)하기에 이른 자가 하나가 아닙니다.
장적(贓籍)21314)을 상고해보면 역력히 셀 수 있습니다.
송희헌(宋希獻)이 장물죄(贓物罪)를 범한 것이 관영(貫盈)21315)하여 이미 죽음을 당했으니, 이는 마땅히 뒷사람의 감계(鑑戒)가 되었어야할 것인데,
신정(申瀞)이 인신(印信)을 위조(僞造)하여 또 죽음을 당하였으니, 복철(覆轍)21316)이 서로 이었습니다.
강학손이 조금도 두려워할 줄 모르고 탐욕을 부린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뇌물[賄賂]을 숭상하기 때문입니다.
신등은 가만히 생각건대 무릇 뇌물[賄賂]의 옥사(獄事)에 관계된 자는, 비록 의심스런 점이 있더라도 진실로 마땅히 빙거(憑據)하여 추문(推問)하되, 반복하여 캐물어서, 하나라도 관련된 것이 있으면, 비록 작은 것이라 하여도 용서하지 말고, 비록 귀한 자라도 법을 어기지않은 연후에야, 국가의 법이 미더워지는 것입니다.
하물며 삼공(三公)은 전하께서 함께 천위(天位)를 같이 하시어, 천직(天職)을 다스리시는 바이니, 백관(百官)의 표준(表準)이 되는 자입니다.
푯대가 바르면 그림자가 곧은 것이 이치의 당연한 것입니다.
지금 〈노사신이〉삼공의 지위에 있으면서 백관을 거느려 다스리는데, 한 점의 더러움과 털끌만큼의 허물이 있다면, 전하께서 누구와 더불어 염치(廉恥)를 갈고 명교(名敎)를 닦아서, 세도(世道)를 만회(挽回)하시겠습니까?
신등이 의심을 품고 믿지못하여, 누가 성총(聖聰)을 더럽혀 마지않는 것은, 노사신의 청촉(請囑)한 일이 오고 가는 뜬말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바로 강학손의 공사(供辭)에서 나온 것이며, 강학손의 공사 또한 형문(刑問)하는 매[楚楚] 밑의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염문(廉問)21317)하던 여지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국인(國人)들이 모두 노사신의 청촉을 의심하고 있는데, 전하께서 어찌하여 혼자만 믿으시고 묻지 않으십니까?
신등은 그윽이 두렵건대 법이 행하여지지 않는 것이 귀근(貴近)으로부터 시작될까 염려됩니다. 국법이 한 번 흔들리면 인심(人心)이 해이(懈弛)하여지고, 대신(大臣)으로서 기탄(忌憚)함이 없는 자는 반드시 인주(人主)가 의심하지않는 것을 다행히 여기고 불의(不義)한 짓을 많이 행하며 이르기를, ‘내가 비록 이와 같지만, 인주가 반드시 나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여, 간청(干請)과 뇌물이 이르지않는 곳이 없을 것이니, 그 조짐이 어찌 매우 두려워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빨리 빙거(憑據)하여 추문(推問)해서 사실을 조사해 내도록 명하시어,
여러 사람의 의심을 쾌(快)하게 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정승(政丞)이 여러 차례 〈강학손과〉대면하여 변명(辨明)할 것을 청하였으나 내가 의심치않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았다.
그대들의 말은 내가 믿지 아니한다.”하였다.
註21307]등통(鄧通):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총애하던 신하. 문제 2년에 전상(殿上)에서 승상(丞相)인 신도가(申屠嘉)를 보고 무례하게 굴었으므로, 신도가가 승상부(丞相府)에 물러가서 격문(檄文)을 보내어 불러서 매우 꾸짖은 일이 있음 註21308]사마문(司馬門): 왕궁의 외문(外門).註21309]공거령(公車令): 한(漢)나라 때 위위(衛尉)에 속한 벼슬. 궁궐문을 지키고 출입하는 자를 단속하였음 註21310]장오(贓汚): 불법으로 뇌물을 받거나, 직권을 남용하여 재물을 탐하는 것 註21311]유체(幽滯): 벼슬에 등용되지못하고 민간에 틀어박혀있는 사람 註21312]복례(僕隷): 노복(奴僕).註21313]관절(關節): 세력이 있는 당로자(當路者)에게 붙는 사람을 이름 註21314]장적(贓籍): 장리(贓吏)의 명부.註21315]관영(貫盈): 이르지 않은 곳이 없음 註21316]복철(覆轍): 실패한 자취
○辛丑/司諫院司諫金琠等、司憲府掌令安潤孫等上疏曰:
竊聞人主, 能容臣子之守法, 而後人主之勢尊; 人臣能不容人主之撓法, 而後人主之法信。 昔鄧通, 貴臣也, 而一戲殿上, 則丞相得以檄召; 藩王, 愛子也, 而一不下司馬門, 則公車令得以劾奏。 今思愼辭連鶴孫贓汚, 非特一戲殿上而已, 一不下司馬門而已。 殿下聰明剛毅, 高出百王之上, 罪之重者, 不以貴近而輕之, 罪之輕者, 不以疏遠而重之, 獨於思愼則不然。 臣等雖庸劣, 備位言官, 不忍使殿下撓法而不信也。 方今士習不美, 貪風不戢, 賄賂公行, 請謁旁午。 忿爭非此不勝, 幽滯非此不拔。 市井之徒、豪俠之子, 或因親戚, 或干僕隷, 小則苞苴, 大則筐篚, 以爲通名之資。 假其威勢, 倩其關節, 使是非顚倒, 公道不行, 此正聖治之大累也, 言之可謂寒心。 坐此貪黷, 以至亡身敗家者非一, 考之贓籍, 歷歷可數。 宋希獻以犯贓貫盈, 旣蒙顯戮, 是宜後人所鑑, 而申瀞僞造印信, 又伏其辜。 覆轍相尋, 鶴孫恬不知畏, 肆貪至此, 何哉? 賄賂爲之祟也。 臣等竊謂凡干賄賂之獄者, 雖在疑似, 固當憑推, 反覆窮詰, 一有連逮, 雖細不宥, 雖貴不撓, 而後國家之法信矣。 況三公, 殿下所與共天位治天職, 而百官之所表準者也。 表正則影直, 理之然也。 今居三公而摠治百官, 有一點之汚、一毫之累, 則殿下誰與礪廉恥、修名敎、挽回世道哉? 臣等所以蓄疑不信, 累瀆不已者。 思愼請囑之事, 非出於往來行言之間, 乃出於鶴孫供辭; 而鶴孫之供, 亦非怕於箠楚之下, 乃發於廉問之餘。 故國人皆以思愼之請囑爲疑, 殿下何獨信而不問乎? 臣等竊恐法之不行, 自貴近始也。 國法一撓, 則人心懈弛, 大臣之無忌憚者, 必幸人主之不疑, 而多行不義, 曰: “我雖如是, 人主必不我疑也。” 干請賄賂, 無所不至, 其漸豈不重可畏也哉? 伏望亟命憑推閱實, 以快衆疑。
傳曰: “政丞屢請對辨, 而予不疑, 故不許。 爾等之言, 吾不信也。”
성종 231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8월 18일(계묘) 3번째기사
집의 박안부등이 노사신을 추문할 것을 청하다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박안부(朴安阜)등과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윤긍(尹兢)등이 상소하기를,
“가만히 생각건대 천하(天下)의 지공무사(至公無私)한 것은 시초점과 거북점[蓍龜]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홍범(洪範)》21320)의《계의(稽疑)》에 이르기를, ‘너에게 큰 의심이 있으면, 경사(卿士)에게 물어보고, 서인(庶人)에게 물어보고, 거북점과 시초점에 물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옛사람이 시초점과 거북점을 중하게 여기면서도, 반드시 경사(卿士)와 서인(庶人)이 모두 따르기를 기다린 뒤에야 이를 ‘대동(大同)21321)’이라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노사신(盧思愼)을 믿으시기를 시초점과 거북점과 같이 하시나, 노사신의 지공무사(至公無私)함이 과연 시초점과 거북점 같을 수 있겠습니까? 가령 노사신의 무사(無私)함이 시초점과 거북점과 같음이 있다하여도, 국인(國人)들이 모두 노사신의 청촉(請囑)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시초점과 거북점과 같지못함이 분명합니다.
경사(卿士)와 서인(庶人)이 따라야 ‘대동(大同)’이라고 한 것에 어떻겠습니까? 국인들이 모두 의심하는데 전하께서만 홀로 믿으시고 의심하지 않으시며, 강학손(姜鶴孫)의 옥사(獄事)가 거의 끝났는데도 빙거(憑據)하여 추문(推問)하기를 허락하지 않으시니, 신등의 의혹(疑惑)이 더욱 심(甚)합니다.
조보(趙普)는 송(宋)나라의 의임대신(倚任大臣)21322)이므로 태조(太祖)가 일컬어 말하기를, ‘그대는 나의 사직신(社稷臣)21323)이다.’하고, 맡기고 믿는 것이 조보보다 더한 이가 없었는데 〈뇌물로〉과자금(瓜子金)21324)을 받는 것을 면(免)치못했으니, 대신(大臣)을 극진히 믿을 수 없음이 이와 같습니다. 신등이 비록 무상(無狀)하나, 논하는 바가 한결같이 국인(國人)의 공의(公議)에서 나온 것인데, 전하께서 홀로 노사신을 믿으시고 대간(臺諫)의 말을 믿지 아니하시니, 신등은 두렵건대 사람을 취(取)하심에 선(善)하게 하시고 간(諫)함을 좇으심에 어긋남이 없는 아름다움이 전일에 비하여 덜함이 있을까 염려됩니다.”하니,
어서(御書)를 내리기를,
“내가 정승(政丞)을 의심하지않는 것이 그르냐? 그대들이 정승을 의심하는 것이 옳으냐? 조보가 금(金)을 받은 것은 이와 같지 아니하다.
정승의 마음이 어찌 조보와 같겠는가? 강학손의 거짓이 분명한데, 그대들이 이것을 사실로 여기는 것은 또한 무슨 뜻이냐?
그대들이 강학손을 정직하고 청개(淸介)한 선비라 한다면 그만이나, 만약에 그를 욕심이 많고 간사스러운 사람이라고 지목한다면, 어찌하여 강학손의 간사한 꾀를 믿고 무고(無辜)한 삼공(三公)을 의심하는가?
국인(國人)의 공의(公議)라고 말한 것은, 나는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공의가 어찌 이와 같은가?”하였다.
註21320]《홍범(洪範)》: 《서경(書經)》의 편명(篇名).註21321]대동(大同): 의견이 크게 같다는 뜻.註21322]의임대신(倚任大臣): 의지하고 신임하는 대신註21323]사직신(社稷臣):나라의 안위를 맡은 중신.註21324]과자금(瓜子金): 외씨처럼 된 금.
○司憲府執義朴安阜等、司諫院獻納尹兢等上疏曰:
竊謂天下之至公無私者, 莫如蓍龜。 然《洪範稽疑》曰: “汝則有大疑, 謀及卿士, 謀及庶人, 謀及卜筮。” 古人以蓍龜爲重, 而必待卿士、庶人, 皆從而後謂之大同也。 殿下以盧思愼信如蓍龜, 思愼之至公無私, 果能如蓍龜乎? 假如思愼之無私有同蓍龜, 國人皆疑思愼請囑, 則其不若蓍龜明矣。 其於卿士、庶人從以爲大同, 何如也? 國人皆以爲疑, 而殿下獨信不疑。 鶴孫之獄垂畢, 而不許憑推, 臣等之惑滋甚。 趙普, 宋之倚任大臣也, 太祖稱之曰: “乃吾社稷臣也。” 其任之信之無逾於普, 而猶未免受瓜子金。 大臣之不可盡信, 類如此。 臣等雖無狀, 所論一出於國人之公議, 殿下獨信思愼, 而不信臺諫之言。 臣等恐取人爲善、從諫弗咈之美, 有虧於前日矣。
下御書曰:
予之不疑政丞, 非耶? 爾等之疑政丞, 是耶? 趙普之受金, 不類乎此。 政丞之心, 豈若趙普乎? 鶴孫之誣明矣, 而爾等所以實之, 又何意歟?爾等以鶴孫爲正直淸介之士則已矣, 如以貪婪詭詐目之, 則何信鶴孫之曲計, 而疑無辜之三公乎? 國人公議云者, 吾未知其是也。 公議豈若是乎?”
성종 231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8월 22일(정미) 1번째기사
장령 안윤손등이 노사신을 추문하여 사람들의 의심을 제거할 것을 청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장령(掌令) 안윤손(安潤孫)이 아뢰기를,
“심담(沈潭)이 뇌물(賂物)을 보내고, 강학손(姜鶴孫)이 이를 받았으나, 준 자와 받은 자가 모두 노사신(盧思愼)의 문족(門族)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노사신을 의심합니다. 또 지금 사습(士習)이 아름답지 못하여, 뇌물[賄賂]이 풍속을 이루었으므로, 모든 뇌물에 관계된 옥사(獄事)는 마땅히 밝게가려서 엄히 징계(懲戒)하여, 폐속(敝俗)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물며 노사신은 지위가 삼공(三公)에 있어, 전하께서 더불어 천위(天位)를 함께 하시며 천직(天職)을 다스리시니, 백관(百官)의 표준(表準)이 되는 자입니다. 만약에 털끌만큼의 작은 허물이 있으면, 진실로 〈삼공의 자리에〉함부로 있기가 어렵사오니, 청컨대 아울러 추문(推問)하여 뭇사람의 의심을 제거하소서.”하니,
임금이 좌우(左右)에게 물었다. 영사(領事) 윤호(尹壕)가 대답하기를,
“신은 전말(顚末)을 알지 못하나, 다만 듣자니 강학손이 바친 것이라고 합니다. 전후(前後)가 같지아니하니, 노사신에게는 관련되지않은 것같습니다”하고, 지사(知事) 신승선(愼承善)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강학손을 국문하였는데, 노사신에게는 전혀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 죄를 면하려고 하여 거짓으로 대상(大相)을 끌어들인 것이 정상(情狀)이 명백하며, 또 간구(干求)하여 청(請)한 일은 노사신이 반드시 하지않았을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옥사(獄辭)를 보니, 과연 정승(定丞)에게 관련되지 않았다.”하였다.
안윤손이 다시 아뢰기를,
“대신(大臣)을 추국(推鞫)하는 일을 성상께서 대신에게 하문하시는데, 사사로이 서로 비호(庇護)하여 덮어주고 바른 말을 하지못하니, 신은 두렵건대 이러한 풍속이 고쳐지지않으면, 대신이 기탄(忌憚)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노사신은 조정의 수반(首班)인데, 이와 같은 허물이 있으면서 구차하게 암랑(巖廊)21336)에 있다면, 삼공(三公)의 자리에 적합한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아울러 국문하소서.”하고,
헌납(獻納) 윤긍(尹兢)도 또한 논계(論啓)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정승이 한 바가 아니니, 삼공을 옥[牢獄]에 가둘 수 없다.”하였다.
註21336]암랑(巖廊):궁전옆에 있는 월랑. 의정부(議政府)를 이름
○丁未/御經筵。 講訖, 掌令安潤孫啓曰: “沈潭致賂而鶴孫受之, 賂者受者皆思愼門族, 故人皆疑思愼。 且今士習不美, 賄賂成風, 凡干賄賂之獄, 當明辨痛懲, 以矯敝俗。 況思愼位三公, 殿下所與共天位治天職, 爲百官表準者也。 苟有一毫微瑕, 固難冒處。 請幷推, 以袪群疑。” 上問左右,領事尹壕對曰: “臣未知顚末, 但聞鶴孫所供, 前後不同, 似不干思愼。” 知事愼承善曰: “臣嘗鞫鶴孫, 於思愼全不逮及。 欲免其罪, 誣引大相, 情狀明白。 且干請之事, 思愼必不爲之。” 上曰: “觀獄辭, 果不干於政丞矣。” 潤孫更啓曰: “大臣推鞫事, 上垂問大臣, 而私相庇覆, 不能正言。 臣恐此風不革, 則大臣無所忌憚也。 況思愼首班朝著, 有如此之愆而苟居巖廊, 則三公之位, 可謂有其人乎? 請幷鞫之。” 獻納尹兢亦論啓。 上曰: “此非政丞所爲, 不可下三公於牢獄也。”
성종 231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8월 23일(무신) 1번째기사
지평 민이 등이 노사신을 추문할 것과 정적이 현저한 자를 상주어 포폄의 법을 세울 것을 청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지평(持平) 민이(閔頤)가 아뢰기를,
“심담과 강학손은 모두 노사신의 통가족친(通家族親)입니다. 강학손의 말이 노사신에게 관련되었으니, 반드시 그 정상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거짓으로 대상(大相)을 끌어들여서 자기의 죄를 면하려고 꾀하였다면, 조정에 있는 〈다른〉공경(公卿)도 또한 많은데, 어찌 반드시 가문(家門)의 존장(尊長)을 가리켰겠습니까? 청컨대 빙거(憑據)하여 추문(推問)하소서.”하고,
정언(正言) 조구(趙球)가 아뢰기를,
“강학손의 말이 노사신에게 관련된 것은, 형문(刑問)하는 매에 두려워서가 아니고, 바로 평문(平問)21337)하던데에서 나왔으므로, 조정에서 모두 의심합니다. 하물며 노사신은 지위가 높은 삼공(三公)이며, 백료(百僚)의 장(長)이 되는데, 진실로 작은 허물이 있어도 조정의 고위[朝右]에 함부로 있을 수 없사오니, 청컨대 이를 밝게 가리소서.”하니,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영사(領事) 이극배(李克培)가 대답하기를,
“강학손이 노사신을 무함(誣陷)하여 자기의 죄를 엄폐(掩蔽)하려고한 데 지나지 않았으나, 그것이 끝내 자기의 죄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이 거짓이었음을 자백한 것입니다.
신의 뜻에는 노사신에게 관련되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하고,
특진관(特進官) 손순효(孫舜孝)는 아뢰기를,
“신이 말을 꾸며서 요장(僚長)을 비호(庇護)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사신은 사람됨이 조용하고 깊으며, 일찍이 관대(寬大)하기에 힘썼으니, 이와 같은 간교(奸巧)한 일은 반드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의 뜻에는 대간(臺諫)의 논박(論駁)이 실정(實情)에 지나치다고 생각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강학손이 간탐(奸貪)하고 궤사(詭詐)하여, 대상(大相)을 거짓으로 끌어대어 그 죄를 엄폐하려고 한 형적(形迹)이 이미 드러났고,
정승(政丞)에게는 혐의가 없으므로, 들어주지 아니한다.”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윤은로(尹殷老)가 아뢰기를,
“수령(守令)의 포폄(褒貶)21338)을, 감사(監司)가 거의 다 상(上)으로 고사(考査)하여, 중(中), 하(下)로 고사한 자는 겨우 두세 사람뿐이고, 상에 해당되는 자가 무려 수백 사람이니, 〈그들이〉어찌 다 그 직책(職責)에 꼭 알맞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가 명실(名實)에 어두워서, 예(例)에 따라 상(上)으로 고사하였으니, 청컨대 이제부터 정적(政迹)이 가장 현저한 자를 상으로 고사하고, 그 나머지 만약 그 직책에 겨우 알맞은 자일 것 같으면 차상(次上)으로 고사하여,
〈포폄의〉승강(陞降)을 삼으소서.”하니,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극배가 대답하기를,
“고적(考績)21339)이 열번 상[十上]인 자가 자궁(資窮)21340)이면〈당상(堂上)으로〉올려 제수(除授)하고, 그 나머지는 품계(品階)를 더해주며,
연이어 중(中)인 자는 전함(前銜)의 직(職)을 제수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법이 있으니 다시 고칠 수 없습니다.”하고,
손순효는 아뢰기를,
“세종조(世宗朝) 때에 조준(趙峻)과 이보흠(李甫欽)이 군(郡)을 다스림에 성적(聲績)21341)이 있어, 사간(司諫)과 장령(掌令)을 초수(超授)21342)하여, 한 도(道)의 이목(耳目)을 놀라게 하였으니,
지금 만약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청컨대 탁용(擢用)하여 표창하소서.”하고,
지사(知事) 어세겸(魚世謙)은 아뢰기를,
“한(漢)나라 《사기(史記)》에서 상고하니, 제일(第一)의 치적(治績)은 혹 2백 년이나 혹 3백년에 한 번 보이고, 또 고적(考績)이 중의 중[中中]이거나, 고적이 중의 하[中下]이었지, 고적이 상의 상[上上]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은 거의 모두가 상에 있고, 중, 하인 자는 겨우 두세 사람뿐이니, 그 전최(殿最)21343)가 올바르지 못함이 이와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정적(政績)의 무이(茂異)21344)함이 영천(穎川)이나 중모(中牟)와 같은 자는, 고적을 상으로 하고 그 나머지는 상의 중에서 하의 하에 이르도록 등차(等差)로 품제(品題)21345)하여, 전조(銓曹)21346)로 하여금 승강(陞降)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국가에 이미 정한 법규(法規)가 있으니, 마구 고칠 수 없다.
군(郡)을 다스림에 탁이(卓異)한 자는, 재상(宰相)이 마땅히 함께 천거(薦擧)하여 쓰라.”하였다.
註21337]평문(平問): 형구를 쓰지아니하고 죄인을 심문하는 일.註21338]포폄(褒貶): 관리의 근무 성적을 고사(考査)하여, 우수한 자는 승진시키고, 불량한 자는 강등 또는 면직 시키는 일.註21339]고적(考績): 관리의 성적을 고사(考査)하여 평정(評定)하는 일.註21340]자궁(資窮): 자급(資級)이 더 이상 오를 수 없이 다하였다는 뜻으로, 당하관(堂下官) 정3품을 이름.註21341]성적(聲績): 명성과 공적.註21342]초수(超授): 벼슬의 등급을 뛰어올려 제수함註21343]전최(殿最): 조선조 때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상(上), 하(下)로 평정하던 법. 상이면 최(最), 하이면 전(殿)이라한 데에서 나온 말로, 경관(京官)은 각 관사의 당상관(堂上官), 제조(提調)가, 외관(外官)은 관찰사(觀察使)가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 두 차례에 걸쳐 등제(等第)를 매겨 임금에게 계문(啓聞)하였으며,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은 등제가 없었음.註21344]무이(茂異): 재능이 뛰어나서 다른 사람과 비교가 안될 만함 註21345]품제(品題): 인물의 가치나 우열(優劣)을 평정하는 일 註 21346]전조(銓曹): 이조와 병조.
○戊申/御經筵。 講訖, 持平閔頣啓曰: “沈潭、鶴孫皆盧思愼通家族親, 鶴孫辭連思愼, 必有其情。 若欲誣引大相, 規免己罪, 則立朝公卿亦多, 豈必斥指家門尊長乎? 請憑推。” 正言趙球曰: “鶴孫辭連思愼, 非怕於箠楚, 乃於平問發之, 故朝廷皆疑。 況思愼位極三公, 爲百僚長, 苟有微疵, 不可冒居朝右。 請明辨之。” 上顧問左右, 領事李克培對曰: “鶴孫不過誣陷思愼欲掩己罪。 然知其終不免, 故自服其誣。 臣意於思愼不干。” 特進官孫舜孝曰: “臣非飾辭以庇僚長, 思愼爲人恬靜沖淡, 務尙寬大, 如此奸巧之事, 必不爲之。 臣意臺諫之論駁過情矣。” 上曰: “鶴孫奸貪詭詐, 誣引大相, 欲掩其罪。 形迹已著, 於政丞無嫌疑, 故不聽。” 特進官尹殷老啓曰: “守令褒貶, 監司率皆考上, 考中下者僅二三輩, 居上者無慮數百人, 豈能盡稱其職乎? 監司眩於名實, 隨例考上。 請自今政迹最著者考上, 其餘若僅稱其職者考次上, 以爲陞降。” 上顧問左右, 克培對曰: “考十上者, 資窮陞授, 其餘加階。 連中者, 授前銜職, 已有定法, 不可更改。” 舜孝曰: “世宗朝趙峻、李甫欽治郡有聲績, 超授司諫掌令, 聳動一道耳目。 今如有其人, 請擢用以旌之。” 知事魚世謙曰: “考諸漢史, 第一之治, 或二百年、或三百年一見, 而又云考中中、考中下, 未見考上上也。 今者類皆居上, 而中下者纔二三人, 其殿最不稱如此。 自今政績茂異若穎川、中牟者, 考上; 其餘上之中以至下之下, 等差品題, 使銓曺陞降何如?” 上曰: “國家已有定規, 不可紛更。 治郡卓異者, 宰相當共薦用。”
성종 231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8월 27일(임자) 1번째기사
장령 이녹숭등이 노사신을 추문할 것과 해인사에서 정부를 징발한 것을 추문할 것, 한건의 직책을 고칠 것등을 청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장령(掌令) 이녹숭(李祿崇)이 아뢰기를,
“신이 강학손(姜鶴孫)을 신문(訊問)한 문안(文案)을 보았더니, 노사신(盧思愼) 에게는 관계되지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외간인(外間人)이 모두 노사신에게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노사신은 지위가 삼공(三公)의 자리에 있는데, 만약에 변정(辨正)하지않는다면, 노사신 또한 어찌 마음이 편하겠습니까?”하니, 임금이 좌우에게 물었다. 영사(領事) 윤호(尹壕)가 대답하기를,
“신은 다만 듣자니, 노사신의 아내가 계집종[婢]을 보내어 말을 전했을 뿐이므로 노사신은 아는 바 없다고 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도 또한 정승(政丞)이 강학손의 옥사(獄事)에 관계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데, 외간인은 그 사실도 모르고 망령된 마음으로 헤아릴 뿐이다.
남의 의심을 풀기위하여 삼공을 옥에 가둠이 가하겠는가?”하였다.
정언(正言) 조구(趙球)가 아뢰기를,
“강학손이 처음에 공술(供述)하기를, ‘노사신이 계집종[婢] 물비(勿非)를 보내어, 신의 집에 두 번이나 청하였다.’고 하고, 그 뒤에 공술하기를, ‘신이 노사신을 만나보고 중문(中門)을 나오는데, 계집종 물비가 노사신의 처의 말이라고 하며 와서 고하기를, 「김흥수(金興守)의 일은 마땅히 속히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하였습니다.
그 전후(前後)에 공술한 바가 다름이 있으니, 이것이 의심할 만합니다. 청컨대 노사신에게 물으시어 여러 사람의 의심을 쾌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강학손은 자신이 대죄(大罪)를 범하고, 거짓으로 정승(政丞)을 끌어들여 자기의 죄를 나누려고 하였으니, 그 일은 심히 명백하다.
또 강학손은 남에게 뇌물을 받았으니, 그 심술(心術)을 알 만하다. 어찌 그 말을 믿고 죄없는 대신을 가벼이 국문하겠는가?
강학손은 거짓으로 대상(大相)을 끌어들였으니,
마땅히 그 죄도 아울러 받아야만 한다. 외간인(外間人)의 의심은 분변(分辨)을 기다리지 않아도 자연히 풀릴 것이다.”하였다.
조구가 아뢰기를,
“해인사(海印寺)를 중창(重創)할 때 군현(郡縣)의 정부(丁夫)를 많이 징발(徵發)하여, 사헌부(司憲府)에서 지금 추핵(推覈)하는데, 신이 듣자니, 정부들이 기와를 나르다가 기와가 만약에 부서지면 면포(綿布)를 징수(徵收)하여 작폐(作弊)가 많다고 하니, 청컨대 조관(朝官)을 보내어 추국(推鞫)하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부서진 기와에 대하여 면포를 징수하였다면, 폐단도 또한 적지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관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는가?”하였다.
이녹숭이 아뢰기를,
“승도(僧徒)들이 불우(佛宇)를 많이 창건(創建)하며 이것을 인연하여 폐단을 일으키는데, 지금 학조(學祖)의 작폐(作弊)가 이와 같으니,
먼저 학조를 추문(推問)하여 엄히 징계하는 것이 옳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현의 정부를 징발한 것이 어찌 학조가 마음대로 한 것이었겠는가?
반드시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의 소위(所爲)일 것이다. 헌부(憲府)에서 근원(根源)을 조사하여 찾아낸 연후에 마땅히 죄를 줄 것이다.”하였다.
조구가 아뢰기를,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은 모두 문신(文臣)을 쓰도록《대전(大典)》에 기재(記載)되어 있습니다.
한건(韓健)이 도승지(都承旨)가 되었으면, 직책이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겸하여야 하는데, 문신이 아니면서 이 직책에 있는 것은 심히 옳지아니하며, 한건 또한 어찌 편안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이를 고치소서.”하니, 임금이 좌우에게 물었다.
윤호가 대답하기를,
“문신이 아니면서 도승지(都承旨)가 된 자는 이 앞에서도 많이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을 쓰는 것은 마땅히 재주에 따라서 써야한다. 만약에 문신이 아니라고 하여 혐의한다면, 사람을 쓰는 길이 넓지못하다. 또한 예전의 예(例)도 있었으니, 나의 뜻에는 무방(無妨)하게 생각한다.”하였다.
이녹숭이 아뢰기를,
“신등은 한건이 도승지의 임무를 감당하지 못한다하여서가 아니라, 문신이 아닌데도 이 직(職)을 제수하는 것은 《대전(大典)》의 법(法)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한건으로 하여 《대전》의 상법(常法)을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하다고 생각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종조(祖宗朝) 때에도 이미 성례(成例)가 있었다.
또 어찌 직함(職銜)으로 혐의(嫌疑)를 삼겠는가?”하였다.
검열(檢閱) 이주(李胄)가 아뢰기를,
“신등은 직책이 일을 기록[記事]하는데 있사온데, 무릇 신료(臣僚)들이 일을 아뢸 때에 땅바닥에 엎드리어 머리를 들지못하므로, 다만 그 음성(音聲)만 듣고 용모(容貌)를 보지못하니, 어찌 능히 그 사람을 분변(分辨)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으로 인하여 〈일을 기록한데〉의심스러운 점이 없지않을 수 없습니다. 사신(史臣)은 직필(直筆)을 귀(貴)하게 여기는 것이온데,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서도 감히 기록하니, 신은 미안(未安)한 바입니다.
또 옛일[古事]을 가지고 상고하면, ‘발연(發然)히 얼굴빛이 변하였다.’함이 있고, ‘용모(容貌)가 태연자약하다.’함이 있고, ‘성색(聲色)이 모두 노기(怒氣)를 띠었다.’함이 있고, ‘부끄러운 빛이 있었다.’함이 있고,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다른 사람에게 말하였다.’함이 있으니, 옛날의 사신(史臣)은 용색(容色)과 언모(言貌)를 모두 기록하여 후세(後世)에 전하였으니, 땅에 엎드리어 일을 기록하는 것은 옳지 못한 듯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서서 일을 기록하려 하는가?”하였다.
이주가 아뢰기를,
“신은 서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엎드려서 일을 기록하면 마음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고, 또 옛날에는 좌사(左史)가 말을 기록하고, 우사(右史)가 일을 기록하였으니, 옛날의 사관(史官)은 반드시 좌우(左右)로 나눈 것이 분명합니다. 신이 또 듣자오니, 중국[中朝]의 사관(史官)은 지필(紙筆)을 잡고 황제(皇帝)의 좌우(左右)에 선다고 합니다.
중국의 제도도 이미 이와 같으니, 땅바닥에 엎드리어 일을 기록하는 것은, 신은 옳지 못하다고 여깁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관이 잘못 기록하는 것을 어찌 직필(直筆)이라 하겠는가?
이 말은 과연 옳다.”하고,
이어서 좌우(左右)에게 묻기를,
“어떠한가?”하였다.
윤호가 대답하기를,
“비록 엎드려서 일을 기록한다하여도 무슨 일인들 기록하지 못하겠습니까?”
하고, 특진관(特進官) 이극균(李克均)은 아뢰기를,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좌우로 나누어 입시(入侍)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검토관(檢討官) 김전(金詮)은 아뢰기를,
“사신(史臣)이 땅에 엎드리는 것은, 신은 불가하게 생각합니다. 고사(古史)에 ‘이필자(珥筆者)21356)’라고 한 것을 어느 사람이 ‘사관(史官)’이라고 하였으니, 옛날의 사관은 엎드리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신의 뜻으로는, 사관 두 사람이 지필(紙筆)을 가지고 좌우에 꿇어앉으면 조의(朝儀)에도 문란(紊亂)하지 않을 듯합니다.”하고,
동지사(同知事) 이경동(李瓊仝)은 아뢰기를,
“사관으로 하여금 지필(紙筆)을 가지고 입시(入侍)하여 일을 기록하게 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부터 사관은 앉아서 일을 기록하라.”하였다.
註21356]이필자(珥筆者):붓을 꽂은 사람. 옛날의 사관(史官)은 붓을 관(冠) 옆에 꽂고 있다가 필요할 때에 이를 사용하여 기록하였다 함.
○壬子/御經筵。 講訖, 掌令李祿崇啓曰: “臣觀姜鶴孫訊鞫文案, 於盧思愼似不干涉。 然外間人, 皆有疑於思愼, 思愼居位三公, 若不辨正, 則思愼亦豈安心?” 上問左右, 領事尹壕對曰: “臣但聞思愼之妻遣婢通言耳, 非思愼所知也。” 上曰: “卿等亦知政丞不干於鶴孫之獄, 外間人未知其實, 妄意量度耳。 欲釋人疑而下三公於獄, 可乎?” 正言趙球曰: “鶴孫初供曰: ‘思愼遣婢勿非, 再請於臣家。’ 其後供曰: ‘臣往見思愼, 退出中門, 婢勿非以思愼妻之言來告曰: 「興守之事, 當速爲之。」 其前後所供有異, 此可疑也。 請問思愼, 以快衆疑。” 上曰: “(鴉孫)〔鶴孫〕身犯大罪, 誣引政丞, 欲分己罪, 其事甚明。 且鶴孫受人賄賂, 其心術可知。 豈可信其言, 而輕鞫無辜大臣乎? 鶴孫誣引大相, 亦當竝受其罪。 外人之疑, 不待辨而自釋矣。” 球曰: “海印寺重創時, 多發郡縣丁夫, 憲府今方推覈。 臣聞丁夫輸瓦, 瓦若殘缺徵綿布, 作弊多端。 請遣朝官推鞫。” 上曰: “破瓦徵布, 弊亦不少。 然遣朝官爲何如也?” 祿崇曰: “僧徒多創佛宇, 因緣作弊。 今學祖作弊如此, 先推學祖, 痛懲爲便。” 上曰: “發郡縣丁夫, 豈學祖所擅爲? 必監司、守令所爲。 憲府窮推其源, 然後當抵罪。” 球曰: “弘文館、藝文館竝用文臣, 載在《大典》。 韓健爲都承旨, 職兼藝文直提學, 非文臣而居是職, 甚不可。 健亦豈安然冒處乎? 請改之。” 上問左右, 壕對曰: “非文臣而爲都承旨者, 前此多有之。” 上曰: “用人當隨其材而用之。 若以非文臣爲嫌, 則用人之路不廣矣。 且有古例, 予意以爲無妨。” 祿崇曰: “臣等非以健爲不堪都承旨之任, 非文臣而拜是職, 是毁《大典》之法也。 以一健而毁《大典》常法, 恐未可也。” 上曰: 祖宗朝已有成例, 又豈以職銜爲嫌乎?” 檢閱李冑啓曰: “臣等職在記事, 凡臣僚啓事之時, 伏地不擧頭, 但聞其音, 不覩其貌,豈能辨其人哉? 以此不能無疑。 史貴直筆, 疑而敢記, 臣所未安。 且以古事考之, 有曰 ‘勃然變色’, 有曰 ‘容貌自若’, 有曰 ‘聲色俱厲’, 有曰 ‘有慙色’, 有曰 ‘王顧左右而言他。’ 古之史臣竝記其容色言貌, 以傳于後。 伏而記事, 恐未可也。” 上曰: “然則欲立而記事乎?” 冑曰: “臣非欲立也。 伏而記事, 有疑於心。 且古者左史記言, 右史記事, 古之史官必分左右明矣。 臣又聞中朝史官秉紙筆, 立帝之左右。 中朝之制旣如是, 則伏而記事, 臣竊以爲不可。” 上曰: “史官誤錄, 豈曰直筆? 此言果是。” 仍問左右曰: “何如?” 壕對曰: “雖伏而記事, 何事不可記?” 特進官李克均曰: “令史官分左右入侍何如?” 檢討官金詮曰: “史臣伏地, 臣意以謂不可。 古史曰: ‘珥筆者誰? 曰史官也。’ 古之史官非伏也明矣。 臣意謂史官二員, 將紙筆跪于左右, 則於朝儀亦不紊也。” 同知事李瓊仝曰: “令史官將紙筆, 入待記事爲便。” 上曰: “自今史官坐而記事。”
성종 232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9월 13일(무진) 1번째기사
기계부정 효전의 처가 물려받은 노비와 전지를 사헌부 관리들이 양자인 이명숭의 처에게 환수해 준 까닭을 추국하게 하다
사간원(司諫院)에 전지하기를,
“김경조(金敬祖)와 강학손(姜鶴孫)이 전에 장례원(掌隷院)에 재임(在任)하였을 때, 기계부정(杞溪副正) 효전(孝全)의 처(妻) 이씨(李氏)가 시양숙모(侍養叔母)인 이원효(李元孝)의 처(妻) 이씨(李氏)의 노비(奴婢)와 전지(田地)를 전해받고[傳受] 본원(本院)에 사증(辭證)을 갖춘 관서문권(官署文券)21405)을 신고하였는데, 이원효의 계후자(繼後子)21406)인 이명숭(李命崇)의 처(妻) 홍씨(洪氏)가 이원효의 처(妻) 이씨가 죽은 뒤에 〈기계부정〉효전의 처를 시양(侍養)21407)이 아니라 하고 전의 문권(文券)을 가리켜 위조(僞造)한 것이라하며 본원(本院)에 신소(伸訴)21408)하자, 김경조등이 허실(虛實)도 조사하지아니하고 추후(追後)로 성안(成案)21409)을 돌려주고 그 노비(奴婢)는 가안(假案)21410)을 만들어 홍씨에게 넘겨준 사연(辭緣)과 본원(本院)의 후임(後任) 관리(官吏)들이 〈기계부정〉효전의 처가 상언(上言)한 것으로 인하여 홍씨의 가안(假案)을 환수(還收)하고,
그 뒤에 사헌부(司憲府)의 말로 인하여 그 가안을 갑자기 홍씨에게 다시 돌려준 사연과, 사헌부의 관리들이 홍씨의 고장(告狀)에 의거하여 시비(是非)를 구명(究明)하지아니하고 장례원으로 하여금 가안을 홍씨에게 돌려주게한 사연을 아울러 추국(推鞫)하여 아뢰라”하였다.
註21405]관서문권(官署文券): 관청에서 서압(署押)하여 발급하여준 문권 註21406]계후자(繼後子): 계통을 잇게하기 위하여 둔 양자.註21407]시양(侍養) : 양사자(養嗣子)할 목적이 아니면서, 동성(同姓), 이성(異姓)을 가리지않고 아이를 거두어 기르던 일.註21408]신소(伸訴): 억울함을 호소함 註21409]성안(成案): 완성된 문권.註21410]가안(假案): 정식이 아닌 임시의 문권
○戊辰/傳旨司諫院曰: “金敬祖、姜鶴孫前任掌隷院時, 杞溪副正孝全妻李氏傳受侍養叔母李元孝妻李氏奴婢田地, 告本院, 具辭證官署文券。 而元孝繼後子李命崇妻洪氏, 乃於元孝妻身死後, 以孝全妻爲非侍養, 指前文券爲僞造, 訴于本院。 敬祖等不覈虛實, 追還成案, 以其奴婢成假案, 移給洪氏辭緣, 及本院後等官吏因孝全妻上言, 還收洪氏假案, 後因司憲府之言, 以其假案遽還洪氏辭緣, 及司憲府官吏據洪氏之狀, 不究是非,勒令掌隷院以假案,還洪氏辭緣,竝推鞫以啓。”
성종 232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9월15일(경오) 1번째기사
우의정 노사신이 자신을 파직시켜 줄 것을 상소하다
우의정(右議政) 노사신(盧思愼) 이 상소하기를,
“신이 노둔(駑鈍)한 재질(材質)로 지위가 정부(政府)에 이르러, 총애(寵愛)와 관록(官祿)을 욕되게 차지하여 하나도 건명(建明)21412)한 것이 없으므로, 제 자신을 반성하고 부끄러운 줄을 알아 매양 벼슬에서 물러나려고 하였으나, 천위(天威)에 눌리어 감히 속마음을 드러내지못하고 힘써 재직(在職)하며 구차하게 세월을 끌어 왔습니다.
근자에 대간(臺諫)이 강학손(姜鶴孫)의 일로 인하여 신을 논박(論駁)하기를 마지아니하는데, 비록 성상께서 놓아두시고 묻지아니하시나, 신이 무슨 면목(面目)으로 다시 대료(大僚)21413)에 오래 있겠습니까?
강학손의 추안(推案)이 갖추어 있어서 모두 살펴볼 수가 있는데, 대간이 잇달아 글을 올리고 상소를 거듭하여 힘써 신을 다스리게 하고자 하는 것은, 오로지 노신(老臣)이 무상(無狀)하여 남에게 신임을 받지못하기 때문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조정(朝廷)의 경중(輕重)은 대신(大臣)에게 달려있어, 대신의 신망(信望)이 두터우면 조정이 높아지고 대신의 신망이 가벼우면 조정이 미덥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신망이 가벼워도 오히려 불가한데, 하물며 자신이 탄핵(彈劾)을 받고도 외람되게 우러러보는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한 몸이 관계되는 바가 큰데, 대간의 탄핵을 받고도 스스로 물러나 피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영화를 탐하고 총애를 욕되게 하며 안연(安然)히 자리에 있다면, 성상의 허물이 쌓일 뿐만 아니라, 실로 또한 초심(初心)21414) 을 스스로 저버리는 것입니다.
천일(天日)이 조림(照臨)하시어 신의 무죄(無罪)함을 보장하시고 성은(聖恩)이 이에 이르렀사오니, 감격스러운 눈물을 어찌 다하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파직(罷職)을 구하려고 하는 것은, 몸을 위해서도 아니고 이름을 위해서도 아니며, 조정(朝廷)의 사체(事體)를 중(重)하게 하고 신자(臣子)의 진퇴(進退)를 분명히 하고자 함입니다.
게다가 죽을 날이 가까운 늙은 나이로 인하여 풍비(風痺)21415)가 온 몸에 매여있어, 공직(供職)하기가 어렵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굽어 성간(誠懇)21416)을 살피시고 태사(台司)21417)를 해임(解任)하도록 명하시오면 지극히 바라는 마음 견디지못하겠습니다”하였다.
註21412]건명(建明):정사를 밝게 일으킴.註21413]대료(大僚):의정(議政)을 이르는 말.註21414]초심(初心):처음에 가진 마음.註21415]풍비(風痺):몸과 사지가 마비되고 감각과 동작에 탈이 생기는 병.註21416]성간(誠懇):정성스럽고 간절함 註21417]태사(台司):의정부
○庚午/右議政盧思愼上疏曰:
臣以駑材, 致位政府, 叨竊寵祿, 一無建明, 省己知慙, 每欲引退。 然迫天威, 不敢輒露情款。 黽勉在職, 苟延歲月。 近者臺諫以姜鶴孫事, 論臣不已, 雖聖上縱釋不問, 臣何面目復長大僚耶? 鶴孫推案俱在, 皆可覆視, 而臺諫連章累疏, 務欲致臣於理, 專由老臣無狀, 不能見信於人也。 古人云: “朝廷輕重在大臣, 大臣望重則朝廷尊, 大臣望輕則朝廷不重。” 望輕尙且不可, 況身遭彈駁而冒居具瞻之地乎? 臣之一身, 所關者大。 旣被臺劾, 不自退避, 猶且貪榮叨寵, 安然在位, 則不惟上辜委遇, 實亦自負初心。 天日照臨, 保臣無罪, 聖恩及此, 感涕何極? 然欲求罷者, 非爲身也, 非爲名也, 所以重朝廷事體也, 明臣子進退也。 加以桑楡暮年, 風痺纏身, 供職爲難。 伏望俯察誠懇, 命解台司, 不勝至願。
성종 232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9월 15일 경오 2번째기사
의금부에서 아뢴 강학손등에 대한 율을 논의하여 그대로 따르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강학손(姜鶴孫)이 김흥수(金興守)등의 청촉(請囑)을 받아 면포(綿布) 2백50필과 백사(白絲) 한근(斤), 채단(彩段) 한필을 받고 추후(追後)로 선두안(宣頭案)21418)을 고친 죄는 율(律)이 교형(絞刑)에 해당하고, 종[奴] 김흥수와 가구지(加仇之)가 강학손에게 부탁하여 다른 사람의 노비(奴婢)를 함부로 선두안에 기록하게한 죄는 율(律)이 결장(決杖) 1백대에 해당하고, 권추(權揫)와 심담(沈潭)이 김흥수등과 더불어 함께 공모(共謀)한 죄는 율(律)이 결장(決杖) 60대와 도(徒) 1년에 해당하나,
모두 일이 사전(赦前)에 있었으므로 논(論)하지 말고, 강학손이 거짓으로 노사신(盧思愼)을 끌어들인 죄는 율이 결장 80대와, 도 2년에 처하고 고신(告身)21419)을 모두 추탈(追奪)하는데에 해당하고, 종 일남(一南)이 주인(主人)을 배반하려고 꾀하여 남궁찬(南宮璨)을 가리켜 전후(前後)로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 죄는 율이 교대시(絞待時)214 20)에 해당합니다.”하니,
명하여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의정부(議政府)에 의논하게 하였다. 윤필상(尹弼商)이 의논하기를, “아뢴 바에 의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다만 강학손은 뇌물을 받고 법을 어긴 것이 이같이 극심한 데에 이르렀는데, 선비의 행실도 전혀없이 목숨을 보전할 수있는 것도 다행입니다.
만약에 사전(赦前)으로 논하고 또 장안(贓案)21421)에도 기록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경계(警戒)할 줄 알겠습니까?”하고,
홍응(洪應)은 의논하기를, “아뢴 바에 의하여 시행하되, 다만 일남(一南)이 가장(家長)을 꾸짖고 욕한 율(律)에 적용시킨 것은 중(重)한 듯합니다.”하고, 이극배(李克培)는 의논하기를, “아뢴 바에 의하여 시행하소서.”하고,
윤호(尹壕)는 의논하기를, “아뢴 바에 의하여 시행하되, 다만 강학손은 장안(贓案)에 기록하여 뒷사람을 징계(懲戒)함이 어떻겠습니까?”하고,
손순효(孫舜孝)는 의논하기를, “율(律)은 그러하나, 강학손이 불법한 일을 자행하여 사풍(士風)을 더렵혔으므로 마땅히 죽여야하는데도 죽이지 못하니, 먼 변방(邊方)에 내쳐서 영원히 서용(敍用)하지말며, 권추와 심담, 김흥수, 가구지등 법을 문란하게한 백성들은 징계하지 않을수 없으니, 모두 전가족(全家族)을 변방으로 옮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율에 의하여 시행함이 어떻겠습니까?”하고,
정문형(鄭文炯)은 의논하기를, “아뢴 바에 의하여 시행하되, 강학손이 범한 바는 매우 중하므로, 일이 사전(赦前)에 있었다고 하여 온전히 놓아두고 다스리지 않는 것은 옳지못하니, 〈노사신을〉거짓으로 끌어들인 죄는 율에 의하여 과단(科斷)하고 변방에 내쳐서 영원히 서용(敍用)하지말아 나머지를 경계(警戒)함이 어떻겠습니까?”하였다.
어서(御書)로 이르기를,
“그대로 윤허(允許)한다. 강학손은 장안(贓案)에 올려 시행해서 외방(外方)에 부처(付處)하고 일남은 사형(死刑)을 감(減)하라.
강학손은 벌열(閥閱)21422)의 아들로서 의리(義理)를 조금 알면서도 감히 속리(俗吏)들과 더불어 이 일을 도모하여 이(利)를 좋아하고 의(義)를 잊었으니, 종신(終身)토록 폐고(廢錮)21423)하여 사람들이 더럽게 여기지않는 이가 없게 하라.”하였다.
註21418]선두안(宣頭案):내수사(內需司)에 속하는 노비(奴婢)를 20년마다 자세히 조사하여 새로 만들어 임금에게 바치던 원적부(原籍簿).註21419]고신(告身):직첩(職牒) 註21420]교대시(絞待時):사형수를 춘분(春分)에서 추분(秋分)까지 생물이 자라는 기간에는 사형시키지 않고 가을까지 기다리던 일. 춘분과 추분 사이에는 만물이 생장하는 시기이므로, 이때 사형을 시키면 자연의 화기(和氣)를 손상시킨다고 믿었음. 교(絞)는 교수형(絞首刑).註21421]장안(贓案):장리(贓吏)의 이름을 기록한 명부 註21422]벌열(閥閱):벌족(閥族).註21423]폐고(廢錮):종신토록 관리가 될 수 없게 함
○義禁府啓: “姜鶴孫聽興守等請囑, 受綿布二百五十匹、白絲一斤、彩段一匹, 追改宣頭案罪, 律該絞: 奴興守、加仇之囑托姜鶴孫, 以他人奴婢冒錄宣頭案罪, 律該決杖一百: 權揫、沈潭與興守等同謀罪, 律該決杖六十、徒一年, 竝事在赦前, 勿論。 鶴孫誣引盧思愼罪, 律該決杖八十、徒二年、告身盡行追奪。 奴一南謀欲背主, 指南宮璨爲前後不知人罪, 律該絞待時。” 命議于領敦寧以上及議政府。 尹弼商議: “依所啓施行何如? 但鶴孫受贓枉法, 至於此極, 士行掃地。 得保首領幸矣, 若論以赦前, 又不錄案, 人誰知警?” 洪應議: “依所啓施行。 但一南比罵家長之律, 似重。” 李克培議: “依所啓施行。” 尹壕議: “依所啓施行。 但鶴孫錄贓案, 以(徵)〔懲〕後來何如?” 孫舜孝議: “律則然矣。 但鶴孫恣行不法, 汚穢士風, 當死不死, 宜逬之遠裔, 永不敍用。 權揫、沈潭、興守、加仇之亂法之民, 不可不懲。 幷全家徙邊, 餘皆依律何如?” 鄭文烱議: “依所啓施行。 鶴孫所犯太重, 以爲事在赦前全釋不治, 未便。 誣引之罪, 依律科斷, 逬諸邊方, 永不敍用, 以警其餘何如?” 御書: “依允。 鶴孫臧案施行, 外方付處, 一南減死。” 鶴孫閥閱之子, 稍識義理, 而敢與俗吏, 謀爲此事, 嗜利忘義, 廢錮終身, 人無不鄙之。
성종 234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11월 14일(무진) 2번째기사
사간 김종, 지평 이승녕등이 김세적을 죄줄 것과 한어에 능한 이창신을 승문원에 출사하도록 할 것등을 청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사간(司諫) 김종(金悰), 지평(持平) 이승녕(李承寧)이 김세적(金世勣)을 죄주기를 계청(啓請)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이승녕이 또 아뢰기를,
“우리나라는 지성(至誠)으로 사대(事大)하느라 승문원(承文院)으로 하여금 나이 젊은 문신(文臣)을 가리어 질정관(質正官)을 삼아 한어(漢語)를 배우게 하였으니, 방법이 지극하다하겠습니다. 그러나 질정관이 된 사람들이 《노걸대(老乞大)》,《박통사(朴通事)》,《직해소학(直解小學)》등의 글을 습독(習讀)하지않으니 무엇을 가지고 질정(質正)해 가겠습니까? 청컨대 미리 그런 글들을 정밀하고 익숙하게 습독한 다음에야 북경(北京)에 가도록 하소서. 세종조(世宗朝) 에는 이변(李邊), 김황(金滉), 손사성(孫士誠), 송처관(宋處寬)같은 사람들이 혹자는 이문(吏文)을 다루기도 하고 혹자는 한어(漢語)를 다루기도 하여 사대(事大)에 관한 일을 전임(專任)했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그런 일을 전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전(大典)》내용에 승문원(承文院)의 참교(參校)와 교감(校勘)이 교훈(敎訓)해가는 방법이 있습니다마는, 지금은 이 직을 맡은 사람들이 더러는 적임자가 아니기도 하니 더욱 부당합니다.
신이 듣건대, 임사홍(任士洪)이 《사성통고(四聲通攷)》를 매우 익숙하게 습독했고 더욱 한어에도 능하다는데, 이에 앞서 이미 사역원(司譯院)에 출사(出仕)하게 했었으니 겸하여 승문원의 일도 보게 하기를 청합니다.
이창신(李昌臣)도 한어에 정밀합니다.
비록 지금 죄를 입고 외방(外方)에 있기는 합니다마는, 그러나 이전에도 승문원관원은 비록 파직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중한 사죄(私罪)를 범한 사람이 아니면 모두 그대로 출사하도록 했었습니다.
지금 이창신이 범한 죄도 역시 중한 사죄는 아니니
또한 승문원에 출사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정괄(鄭佸)이 대답하기를,
“임사홍은 한어에 능하므로 그 일을 맡길 만합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과연 아뢴 말과 같은데, 임사홍의 한어는 내가 어떤지를 알지 못한다.
장유성(張有誠)은 비록 말에는 능하지만 글자로 된 말을 해득하지못하고, 이창신 은 글자도 해득하고 또한 한어에도 능하므로 중국사신들이 또한 아름답게 여기며 감탄했었다. 이창신은 아내의 죄때문에 파면된 것이고 자신이 저지른 것은 아닌데 어찌 끝까지 폐하고 서용(敍用)하지 않겠는가?”하였다.
정괄이 아뢰기를,
“지금 도둑들이 퍼져 횡행(橫行)하며 사람들의 재물을 빼앗아가니, 깊이 염려스럽습니다. 지난날에 재인(才人), 백정(白丁)들을 구별하지 말도록 했었습니다마는, 신이 듣건대, 재인과 백정들이 도성(都城)안에 흩어져살며 소도살(屠殺)을 직업으로 하는데, 무릇 도둑맞은 사람들이 쫓아가 찾아보면 반드시 이 사람들이 집에서 찾게 된다하니, 이들을 단속하여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외방(外方)에서는 인보(隣保)21646)에게 맡기어 임의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고, 또한 육아일(六衙日)21647)에는 거기에 있는지 없는지를 점고(點考)하기 때문에 백정들이 또한 모두 스스로 가만있게 된다고 합니다.
이번에 비록 구별하지 말도록 하기는 했지만, 점검(點檢)해서 녹안(錄案)21648)하여 사는 동리(洞里)를 파악하기를 청합니다.”하니,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특진관(特進官) 김승경(金升卿)이 대답하기를,
“옛적에는 재인, 백정이 도성안에 살지 못했었는데 지금은 여염(閭閻)에 흩어져 살고있어 편맹(編氓)21649)과 차이가 없게 되고 날마다 소도살을 일삼아 매우 적당하지 못하니, 반드시 추쇄(推刷)하여 인보에게 맡겨야 합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전번에 구별하여 도성밖으로 나가게할 수는 없다고 했었기 때문에 구별하지말도록 했던 것이다. 마땅히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추쇄하여 점검하게 해야한다. 그런데 해사(該司)에서 거행하기를 어떻게 할는지 알지못하겠다.”하였다. 정괄이 또 아뢰기를,
“전일에 전교(傳敎)하시기를, ‘외조부모(外祖父母)의 유서(遺書)는 사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는,《대전(大典)》에는 외조부모의 백문(白文)21650)도 오히려 또한 사용하게되어 있는데 유독 유서를 사용하지않는 것은 매우 공편하지 못합니다. 대저 사람중에는 아들은 없고 딸만 있는 사람이 있는데 또한 모두 외조부모의 유서를 사용하지말아야할 것입니까?
또한 외조부모와 조부모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조부모의 유서는 쓸 수 있고 외조부모의 유서는 쓸 수 없음은 더욱 적당하지 못합니다.”하니,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심회(沈澮)와 김승경(金升卿)이 아뢰기를,
“외조부모와 조부모는 본시 다름이 없는 법인데, 조부모의 유서는 이미 쓸 수 있고 외조부모의 유서만 쓰지못함은 매우 적당하지못합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전》에 실려있는 말은 단지 조부모의 유서만 언급한 것이고 외조부모의 유서는 언급하지않은 것이니, 그렇다면 외조부모의 유서는 결코 쓸 수 없는 것이다. 전일에 이미 재상(宰相)들과 의논한 것이라 그 의논이 있을 것이므로 볼 수 있을 것이다.”하였다.
정괄이 또 아뢰기를,
“근일에 전교하기를, ‘임술년 이전에 다른 사람이 준 백문은 사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는, 신은 여기기를 《대전》내용에 이미 ‘임술년 8월 아무 날 이후와 신사년(辛巳年) 7월 아무 날 이전의 백문은 수리(受理)하지 말라.’고 되어 있는데, 이번에 또 임술년 이전의 백문은 사용하지말라고 하게 된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모두 이를 가지고 말을 하여 고소하고 송사하게될 것이어서, 이렇게 된다면 송사가 번다해져 장차 끝날날이 없게될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비록 백문이라하더라도 만일 확실한 것이라면 어찌 사용하지않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이미 처결된 것은 이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내가 여기기를 백문을 모두 사용하게 된다면 허위(虛僞)가 마구 생겨 송사(訟事)가 날로 더하게될 것이기에 우선 사용하지말도록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처결된 것은 다시 고치지말아야 하는 것을 마땅히 분간하여 시행해야 한다.”하였다. 정괄이 또 아뢰기를,
“근일에 전교하시기를, ‘선두안(宣頭案)21651)에 든 노비(奴婢)에 있어서는 고소하여 다툼을 허락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는, 신은 생각하기를, 이에 앞서 서두안에 넣은 노비들 중에 정안(正案)에 든 자는 고칠 수 없지만 속안(續案)에 든 자는 개정해야 된다고 여깁니다. 대저 선원전(璿源殿)21652)의 노비들은 하는 일이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으므로 이 때문에 공사(公私)의 천인(賤人)들이 모두 들어가 소속하여 고된 사역(使役)을 피하려고 합니다.
지금 선두안에 든 노비는 모두 고소하여 다툼을 허락하지 말도록 한다면,
한 번 그 선두안에 들어가버린 자는 마침내 개정하기 어렵게될 것이어서 애매한 점이 없지않으리라 여깁니다.”하니,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김승경이 아뢰기를,
“만일 선두안에 들어있는 노비라는 것만으로 개정하지못하게 된다면 간사한 무리들이 또한 몰래 안(案)에 기록해놓는 자가 있게 될 것입니다.
요사이의 강학손(姜鶴孫)의 일과 같은 것은 또한 염려됩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선두안의 정안에 들어있는 노비들을 부산하게 개정하기 때문에 고소하여 다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고, 녹안에 들어있는 노비에 대해서는 진실로 마땅히 개정해야 한다.”하였다.
註21646]인보(隣保):조선조 때의 자치조직(自治組職)의 하나. 이것은 백성의 생활과 인구(人口)의 실태를 파악하고, 수화(水火)를 구제(救濟)하고 유이(流移)와 도둑을 방지하여 서로 보호하고 지키게 함으로써 풍속(風俗)을 이루게 한다는 목적으로 조직된 것으로, 10호(戶) 혹은 3, 4호(戶)로써 한 인보(隣保)를 삼고, 그 중에서 항산(恒産)이 있고 믿을 만한 사람을 택하여 정장(正長)으로 삼아, 인보(隣保)내의 인구를 기록하여 주장(主掌)하게 하였음. 註21647]육아일(六衙日):매달 여섯번씩 백관(百官)이 모여 조회(朝會)하여 임금에게 정무(政務)를 아뢰던 일. 고려 때에는 1, 5, 11, 15, 21, 25일이었으나, 조선조 때에는 1, 6, 11, 16, 26일로 하였음 註21648]녹안(錄案):명단을 만듦 註21649]편맹(編氓):호적에 든 백성.註21650]백문(白文):관인(官印)이 찍히지않은 문서.註21651]선두안(宣頭案):내수사(內需司)에 속하는 노비를 20년마다 자세히 조사하여 새로 만들어 임금에게 바치던 원적부(原籍簿).註21652]선원전(璿源殿):조선조 역대 임금의 초상을 봉안한 곳.
○御經筵。 講訖, 司諫金悰、持平李承寧啓請金世勣之罪, 不聽。 承寧又啓曰: “我國至誠事大, 令承文院擇年少文臣爲質正官學漢語, 其法可謂至矣, 然爲質正官者, 不讀《老乞大》、《朴通事》、《直解小學》等書, 將何以質正乎? 請令預讀其書, 精熟然後赴京。 在世宗朝, 如李邊、金滉、孫士誠、宋處寬, 或以吏文、或以漢語, 專任事大之事, 今則無一人可任其事。 《大典》內, 承文院參校校勘有敎訓之法, 今之任其職者, 或非其任, 尤爲不當。 臣聞任士洪讀《四聲通攷》甚熟, 尤能於漢語, 前此已令仕司譯院。 請令兼治承文院之任。 李昌臣精於漢訓, 今雖被罪在外, 然前此承文院官員雖罷職, 非犯私罪重者, 皆令仍仕。 今昌臣所犯, 亦非私罪之重者, 亦令仕承文院何如?” 上顧問左右, 鄭佸對曰: “任士洪能漢語, 可任其事也。” 上曰: “果如所啓矣。 士洪漢語, 予未知其何如也。 張有誠雖能言, 而不解文字之語, 昌臣解文字, 又能漢語, 中朝使臣, 亦爲嘉嘆。 昌臣因妻罪見罷, 非己之累, 何以終廢而不用乎?” 佸啓曰: 見今盜賊興行, 奪人財物, 深可慮也。 前日才白丁等勿令區別。 臣聞才白丁散居都下, 以屠牛爲事, 凡人之遭賊者追尋, 則必得於其人之家, 此不可不糾治。 外方則付之隣保, 使不得恣意出入, 又於六衙日考點有無, 故白丁等亦皆自戢。 今者雖不使之區別, 請令點檢錄案, 使知其居里。” 上顧問左右, 特進官金升卿對曰: “古者才白丁不得居都下, 卽今散處閭閻, 無異編氓, 日以殺牛爲事, 甚未便。 必須推刷以付隣保。” 上曰: “前者以爲不可區別而出城外, 故勿令區別耳。 當令漢城府推刷點檢之, 第未知該司能擧行如何耳。” 佸又啓曰: “前日傳敎勿用外祖父母遺書。 《大典》, 外祖父母白文尙且用之, 而獨不用遺書, 深爲未便。 大抵人有無子而有女者, 亦皆勿用外祖父母遺書乎? 且外祖父母與祖父母何異乎? 祖父母遺書則可用, 而外祖父母遺書則不可用, 尤爲未便。” 上顧問左右, 沈澮、金升卿啓曰: “外祖父母與祖父母本無異焉。 祖父母遺書旣可用, 外祖父母遺書勿用, 甚未便。” 上曰: “《大典》所載者, 只及祖父母遺書, 而外祖父母遺書則不及焉。 然則外祖遺書, 決不可用也。 前日已與宰相議之, 其議存焉, 可觀之。” 佸又啓曰: “近日傳敎曰: ‘壬戌年以前他人贈給白文, 勿用。’ 臣以爲《大典》內旣云: ‘壬戌年八月某日以後, 辛巳七月某日以前白文, 勿受理。’ 而今又勿用壬戌年以前白文, 則人必皆以此爲辭而告訟。 然則詞訟繁多, 將無日可息矣。” 上曰: “雖白文, 若的實, 則何不用之有? 況已決者不在於此矣。 予以爲白文皆可用, 則奸僞橫生, 而詞訟日增矣, 姑令勿用耳。 然則已決者勿復更改事, 當分揀施行可也。“ 佸又啓曰: “近者傳敎曰: ‘宣頭案付奴婢勿許告爭。’ 臣以爲前此宣頭案付奴婢中, 正案付者則不可改, 而(贖)〔續〕案付者則可改之。 大抵璿源奴婢, 其役不甚苦, 由是公私賤人, 皆欲投托, 以避其役。 今令宣頭案付奴婢, 皆勿許告爭, 則一付其案者, 終難改易, 不無曖昧矣。” 上顧問左右, 升卿啓曰: “若徒以宣頭案付奴婢不得改之, 則奸詐之徒潛錄于案者亦有之, 如近日姜鶴孫之事, 亦可慮也。” 上曰: “宣頭正案付奴婢紛紜更改, 故不許告爭。 至於(贖)〔續〕案付奴婢, 則固當改之矣。”
성종 239권, 21년(1490 경술/명홍치(弘治) 3년) 4월 16일 무술 5번째기사
이녹숭, 강학손, 김경조, 안윤손, 권빈, 표연말, 박건 등의 입안청탁 사건에 대해 논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이녹숭(李祿崇)이 기계정(杞溪正)의 처(妻) 이씨(李氏)가 그 시양(侍養)2208 6) 삼촌숙(三寸叔) 이원효(李元孝)의 처(妻) 이씨(李氏)에게서 노비문기(奴婢文記)를 전해받았다고 하여 관청을 속이고서 사출(斜出)22087)받고, 사평(司評) 강학손(姜鶴孫)에게 상주(喪主) 홍씨(洪氏)를 봉사(奉祀)하겠다고 청하여 판결을 받고 입안(立案)22088)을 받은 죄와 위의 입안(立案)을 장례원(掌隷院)에서 이미 거두었는데도 장령(掌令) 안윤손(安潤孫)과 지평(持平) 권빈(權璸)에게 단자(單子)를 써서보내어 입안을 도로 받도록 청탁한 죄는 장(杖) 80대입니다.
강학손(姜鶴孫)이 사평(司評)으로 있을 때 이녹숭(李祿崇)의 청을 들어주어 법을 어기고서 거짓으로 입안(立案)을 만들어준 죄는 장(杖) 1백대입니다.
김경조(金敬祖)가 판결사(判決事)로 있을 때 이명숭(李命崇)의 처 홍씨(洪氏)에게 법을 어기고서 거짓으로 입안을 만들어준 죄는 장(杖) 80대입니다.
강학손과 김경조등은 유지(宥旨) 전의 일입니다.
안윤손(安潤孫)과 권빈(權璸)등이 이녹숭의 청탁을 들어주어 장례원(掌隷院)의 입안(立案)을 돌려준 죄는, 장(杖) 1백대를 때리고 고신(告身)을 추탈(追奪)해야합니다.
장령(掌令) 표연말(表沿沫)이 위의 입안을 돌려주는 일로 의논하였을 때 동의한 죄와 대사헌(大司憲) 박건(朴楗)이 위의 입안을 돌려줄 때 장관(長官)으로서 바로잡지않은 죄는, 모두 체임시켜 감등(減等)하고 태(笞) 50대를 속전(贖錢)으로 받아야 합니다.”하니,
영돈녕(領敦寧) 이상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홍응(洪應)이 의논하기를,
“이 일에서 이녹숭(李祿崇)은 면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소송한 자가 단자(單子)를 올려서 청리(聽理)하는 자로 하여금 시말(始末)을 갖추 알게하는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이번에 단자로 청탁한 것도 고례(古例)에 의하여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안윤손(安潤孫), 권빈(權璸)등은 다만 단자를 가지고서 논하였고 달리 청탁한 연고가 없으므로 진실로 용서할 만합니다.
박건(朴楗), 표연말(表沿沫)도 용서할 만합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성상께서 재가(裁可)하도록 하소서.”하고,
윤호(尹壕)는 의논하기를,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뢴 바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소서.”하였다.
어서(御書)로 이르기를,
“박건(朴楗), 표연말(表沿沫)등의 죄는 내가 마땅히 참작하도록 하겠다.
다만 안윤손(安潤孫)과 권빈(權璸)은 대관(臺官)22089)으로서 법에 어긋나는 청을 들어주고 법을 굽혀 사사로움을 행하였으니, 옳겠는가?
승정원(承政院)에서는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하니,
도승지(都承旨) 한건(韓健)등이 아뢰기를,
“사헌부에서 아뢴 바에 의거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였다.
전교하기를,
“나는 그가 그릇됨을 알면서 오결(誤決)하였는지의 여부를 물은 것인데,
어째서 계본에 의거하여 시행하라고 의논하는가?”하니,
한건등이 아뢰기를,
“신등도 그릇됨을 알면서 오결(誤決)하였다고 여겼는데 사헌부에서 오결로 조율(照律)하지않았기 때문에 신등이 미처 상세히 살펴보지않고 망령되게 아뢰었습니다.”하였다.
전교하기를,
“사헌부에 묻도록 하라.”하니,
지평(持平) 이중현(李仲賢)이 아뢰기를,
“무릇 청송(聽訟)하는 관리가 두 사람의 시비(是非)를 분변(分辨)할 때 한 사람의 그릇됨을 분명히 알면서도 고의로 결절(決折)하게되면, 이것이 바로 그릇됨을 알면서도 오결(誤決)한 것입니다.
안윤손등이 이녹숭의 청을 들어주어 입안(立案)을 돌려준 일은 발설(發說)하였으니, 진실로 그릇됨을 알면서도 오결한 것이 아닙니다.”하였다.
전교하기를,
“안윤손등이 사사로운 청을 그대로 들어주어 이미 거둔 입안(立案)을 돌려 주도록 하였고, 그 입안을 돌려받게되면 기계정(杞溪正)의 노비(奴婢)를 빼앗을 수 있으니, 이것은 오결(誤決)이 아닌가?”하니
이중현이 다시 아뢰기를,
“입안(立案)을 돌려준 일을 발설(發說)하였으니,
공사(公事)를 결절(決折)한 예(例)가 아닙니다.”하였다.
어서(御書)로 박건(朴楗), 표연말(表沿沫)은 논하지말게 하고, 안윤손(安潤孫), 권빈(權璸)등은 장(杖)을 속(贖)바치게 하였으며, 나머지는 아뢴 바에 의거하게 하였다.
註22086]시양(侍養):양사자(養嗣子)할 목적이 아니면서, 동성(同姓), 이성(異姓)을 가리지않고 남의 자식을 맡아 기름 註22087]사출(斜出): 관청에서 증명서 따위를 발급하여 주는 것 註22088]입안(立案):청원에 대하여 관청에서 인가하는 문서 註22089]대관(臺官):사헌부(司憲府)의 대사헌(大司憲) 이하 지평(持平)까지의 벼슬
○司憲府啓: “李祿崇, 以杞溪正妻李氏, 其侍養三寸叔李元孝妻李氏處, 傳得奴婢文記, 爲瞞官斜出, 請于司評姜鶴孫, 奉祀喪主洪氏處, 決給立案受出罪, 右立案, 掌隷院已收取, 而掌令安潤孫、持平權璸處, 單子書送, 請囑立案還受罪, 杖八十。 姜鶴孫爲司評時,聽李祿崇之請, 違法假立案成給罪, 杖一百。 金敬祖爲判決事時, 李命崇妻洪氏處, 違法假立案成給罪, 杖八十。 鶴孫、敬祖等, 宥旨前事。 安潤孫、權璸等, 聽李祿崇請囑, 掌隷院立案還給罪, 決杖一百, 告身追奪。 掌令表沿沫, 右立案還給事議論時同議罪, 大司憲朴揵, 右立案還給時以長官不糾正罪, 竝遞減, 笞五十收贖。” 命議于領敦寧以上。 洪應議: “此事李祿崇, 恐不免也。 訟者呈單子, 使聽理者, 備悉始末, 其來已久。 今之單子請囑, 無乃亦因古例爲之歟? 然則安潤孫、權璸等, 但以單子爲論, 而他無請托之故, 則固可恕也。 朴楗、表沿沫, 亦可恕也。 伏惟上裁。” 尹壕議: “依憲府所啓施行。” 御書曰: “朴楗、表沿沫等罪, 予當斟酌。 但安潤孫、權璸, 以臺官聽違法之請, 曲法行私可乎? 政院其議啓。” 都承旨韓健等啓曰: “依憲府所啓施行何如?” 傳曰: “予問其知非誤決與否, 何以議云依啓本施行乎?” 健等啓曰: “臣等亦以謂知非誤決, 而憲府不以誤決照律, 故臣等未及詳察而妄啓耳。” 傳曰: “其問于憲府。” 持平李仲賢啓曰: “凡聽訟官吏, 分辨兩人是非, 明知一人之非, 而故爲決折, 則是乃知非誤決也。 潤孫等, 聽祿崇之請, 立案還給事, 發說而已, 固非知非誤決也。” 傳曰: “潤孫等, 聽從私請, 令還給已收立案, 其立案旣受, 則杞溪正奴婢可奪, 是非誤決乎?” 仲賢更啓曰: “立案還給事發說, 非決折公事之例。” 御書朴楗、表沿沫勿論, 安潤孫、權璸等杖贖, 餘依所啓。
성종 269권, 23년(1492 임자/명홍치(弘治) 5년) 9월 26일 갑오 4번째기사
강학손을 방면시키다
전라도(全羅道) 무장(茂長)에 부처(付處)한 강학손(姜鶴孫)의 아내 신씨(申氏)가 반사(頒赦)한 뒤에 도류(徒流), 부처(付處)된 사람이 모두 은유(恩宥)를 입었는데 강학손은 방면되지 못하였다하여 상언(上言)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니, 전교하기를,
“강학손은 처음에 비록 장오(贓汚)로써 신문을 당하였으나 일이 사전(赦前)에 있었으니, 예(例)에 따라 마땅히 은유를 입어야 할 것이다.
방면하라”하였다.
○全羅道茂長付處姜鶴孫妻申氏, 以頒赦後徒、流、付處人皆蒙恩宥, 而鶴孫未得見放, 上言訴冤。 傳曰:“鶴孫初雖以贓汚見訊,事在赦前,例宜蒙宥,其放之。”
연산 4권, 1년(1495 을묘/명홍치(弘治) 8년) 4월 3일(병진) 3번째기사
사헌부에서 이종호등 성종의 상중에 혼인한 자들을 장죄를 가하기를 청하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이종호(李宗灝), 김영수(金永銖), 진세걸(陳世傑), 민경익(閔景翼), 홍유태(洪有泰), 송여해(宋汝諧), 권영담(權永聃), 이억수(李億壽), 홍걸(洪傑), 신말평(申末平), 박세언(朴世彦), 강학손(姜鶴孫), 현준(玄俊), 강이온(姜利溫), 이희조(李希祖), 박겸무(朴兼武), 황자중(黃自中), 조종(趙悰), 이준덕(李俊德), 성희옹(成希雍), 조서(趙湑), 진복담(陳福聃)이 성묘(成廟)의 승하하시던 날에 자녀를 혼인한 죄는,《대명률(大明律)》에 상중(喪中)에 시집가고 장가간 죄의 조문[居喪嫁聚條]에 견주면 주혼자(主婚者)는 장(杖) 80입니다.
영수등이 이치를 알만한 조관(朝官)으로서 대절(大節)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국상 첫날에 애통을 잊고 혼인을 하였으니, 그 심정을 추구하여 본다면 즉위(卽位)한 뒤에는 의레히 특사(特赦)가 있을 것임을 믿고 고의로 범한 것이 명백합니다. 법률 조문에 ‘은전(恩典)이 있을 것을 알고 고의로 범죄한 자는 여느 범죄보다 일등을 더하고, 비록 특사가 있더라도 용서하지 않는다.’하였으니, 청컨대 율문에 의하여 일등을 더하여 장 90을 때리고 길이 서용(敍用)하지 말고, 그 자식은 패상안(敗常案)285)에 기록하게 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다만 장 90대를 치고 고신(告身)286)을 빼앗으라. 그 가장(家長)을 이미 죄주었는데 어찌 반드시 그 자식까지를 논하랴.”하였다.
註285]패상안(敗常案):강상(綱常)을 무너뜨린 자의 죄안(罪案).註286]고신(告身): 직첩.
○司憲府啓: “李宗灝、金永銖、陳世傑、閔景翼、洪有泰、宋汝諧、權永聃、李億壽、洪傑、申末平、朴世彦、姜鶴孫、玄俊、姜利溫、李希祖、朴兼武、黃自中、趙悰、李俊德、成希雍、趙湑、陳福聃, 成廟升遐之日, 醮子女罪。 比《大明律》 ‘居喪嫁娶條,’ 主婚者杖八十。 永銖等以識理朝士, 不顧大節, 國喪初日, 忘哀婚嫁。 推原其情, 專恃卽位之後, 例有大赦, 故犯明白。 律文內 ‘几聞知有恩數, 而故犯罪者, 加常犯一等. 雖會赦, 竝不原宥。’ 請依律文, 加一等杖九十, 奪告身四等, 永不敍用。 其子錄敗常案。” 傳曰: “只杖九十、奪告身。 且旣罪家長, 何必竝論其子乎?”
연산 20권, 2년(1496 병진/명홍치(弘治) 9년) 12월 14일(정해) 1번째기사
대사헌 구치곤등이 태종의 신위판을 매안하는 것등에 대해 의논드리다
경연에 납시었다. 대사헌 구치곤(丘致崑)이 아뢰기를,
“태종의 신위판(神位版)을 매안하는 날이 〈성종대왕의〉대상(大祥) 전에 있는 것이 신의 의견으로는 불가하다고 봅니다. 지금 성종 부묘(祔廟)1250)하는 날이 명년 2월에 있는데, 그보다 앞서 선왕의 신위판을 옮기는 것이 사체(事體)에 어떠합니까?”하니, 왕이 좌우의 사람들을 돌아보고 물었다.
특진관 성준(成俊)이 아뢰기를,
“신등도 불가하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어제 본부(本府)에서 함께 의논하여 아뢰었습니다. 그리고 예조에 물은즉 말하기를, ‘입춘 후에는 산소 용맥[墓龍]에 금기(禁忌)가 되기때문에 부득이 이렇게 택일하였다.’했습니다.
신등의 생각으로는, 만일 금기로 혐의를 삼는다면 우선 산소를 열었다[開坎] 덮어두고 봄향사가 지난 후에 다시 택일해서 매안하는 것이 마땅할까합니다.
대범히 조천(祧遷)1251)하는 일도 원래 차마 못하는 것인데 기일에 앞서 신위를 매안하는 일은 더구나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하고,
특진관 안침(安琛)은 아뢰기를,
“신이 예조에 물은즉, 길일이 없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금기가 된다고는 하지만 원래 〈묘소를〉수축(修築)하는 것과는 같지 않으니, 봄 향사 후에 매안하는 것이 가할까합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
“고쳐 택일하라.”하였다.
구치곤이 아뢰기를,
“김효강(金孝江)의 일은, 대간과 시종이 여러번 청원하였는데도 윤허(允許)하지않고, 태장 40을 속바치게만 했습니다.
율에 이르기를, ‘사(私)를 끼고 공(公)을 속여 망령되이 이의(異議)를 내고 함부로 고치며 변란(變亂)하여 법을 만드는 자는 베인다.’고 하였는데, 김효강의 죄는 바로 이 율의 조문에 해당합니다.
당초 흥수(興守)와 계손(繼孫)이 진술하여 고한 것이 내수사(內需司)를 위해서가 아니요 상(賞)을 얻으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일 결정하여 끊어버리고 〈그 노비를〉봉안역(奉安驛)에 도로 속하게 한다면, 흥수등이 받은 상물(賞物)도 공(公)에 속하여야 하기 때문에, 흥수등이 곁에서 청탁하고, 김효강은 사사로이 그 청탁을 들어서, 제 마음대로 아뢰어 법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 전교에 이르기를, ‘전례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등이 〈김효강이〉아뢴 사연을 보았는데, 이르기를, ‘선두정안(宣頭正案)에 실린 노비(奴婢)는 경개(更改)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노비의 신공(身貢)을 거두거나, 전곡(錢穀)을 출납하는 예가 아닙니다. 전일 흥수등이 진술하여 고하기를, 감로사(甘露寺)의 종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 아무개라고 하였는데, 강학손(姜鶴孫)이 그 시비를 전혀 분간하지않고 모두 강제로 내수사에 속하게 하였으며, 지금 김효강은 이것을 직접 아뢰고 허가를 받아 이르기를, ‘일반 공천(公賤)은 소속된 곳에서 이동하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곧 따로 새로운 법을 만든 것입니다.
만일 이 법을 없애지 않으면, 각 관청의 노비는 모두 내수사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강서현(江西縣)의 노비 50여구(口)도 흥수가 진고(陳告)하였기 때문에 이미 선두안에 기록되었습니다. 각관의 노비는 이것이 모두 국가 노비인데, 부리려고 한다면 하필 내수사에 소속시킨 다음에야만 할 수 있겠습니까?”하니, 왕이 이르기를,
“성종조 때 쓰여지던 법이니 지금 고칠 수 없다.”하였다.
구치곤이 아뢰기를,
“흥수와 계손은 외지부(外知部)의 괴수인 자입니다. 상을 얻으려고 진고했고, 김효강에게 청탁하였으며, 효강은 직접 아뢰어 법을 세웠는데, 이 법대로 한다면 무신년1252)에 진고한 각 관청의 노비는 모두 분별없이 내수사에 속하여야 할 것입니다.
봉안역은 이것이 경상도와 강원도 두 도의 지름길로서 왜인(倭人)과 사신이 지나다니는 곳인데,〈거기 있던〉노비 50여구를 빼앗아 내수사에 속하게 한다면 역졸[驛子] 5, 6인이 반드시 그 부역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하고,
참찬관(參贊官) 김수동(金壽童)은 아뢰기를,
“김효강의 일은 전하께서 그것이 그름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까?
대간과 시종(侍從)이 역시 진청(陳請)하기를 여러번 하였지만 지금까지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무릇 각 관청의 소소한 공사를 제조(提調)가 분운(紛紜)하게 계달(啓達)할 수 없음은 이미 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이러한 새 법을 만들고 예전 법전을 훼상하는 큰일을 어찌 환관이 마음대로 하겠습니까? 속히 통렬하게 징계하고 그들이 만든 새 법을 혁파(革罷)하여 인심을 쾌하게 하소서.”하고, 구치곤이 다시 아뢰기를,
“김효강의 죄는 바로, ‘함부로 고치고 변란(變亂)하여 법을 만든’ 율 조문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신등이 율서를 알지못하기 때문에 당초 잘못 장형 1백, 도형(徒刑) 3년조에 의거하였던 것인데 지금 여기서 또 감한다면 실형(失刑)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전 율 조문대로 죄주기를 청합니다.
신등이 한 환관을 제어하지 못하여 공사를 폐지하고 오래도록 궁궐뜰에 서있으면서 청한 바가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니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
“오래도록 대궐뜰에 서있으니 어찌 폐단이 없을 것인가?
여름에 덥거나 비가 오면 백성들은 오히려 원망하고 탓하며 겨울에 크게 추워도 백성들은 역시 원망하고 탓하는데 내가 어찌 백성의 폐해를 생각하지 못하겠으며, 공론이 이러하니 죄를 더하지 않겠는가?
다만 김효강은 공신이니 형장 80만으로 속바치게 하겠다.”하였다.
구치곤이 아뢰기를,
“율 조문대로 죄를 주어서 경계함을 알게 하여야 합니다. 지금 만일 감형하고 속바치게 한다면 그가 앞으로 어찌 경계할 것을 알겠습니까?”하고,
김수동과 안침은 아뢰기를,
“비록 참형(斬刑)에 처하지는 못하더라도 전 율 조문대로는 처벌하여 경계하게 하여야 합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
“짐작해서 처리하게 하겠다.”하였다.
註1250]부묘(祔廟):3년상후 신주를 사당에 모시는 것.註1251]조천(祧遷):종묘의 위패를 영령전(永寧殿)으로 모시는 일.註1252]무신년:1488성종19년.
○丁亥/御經筵。 大司憲丘致崐曰: “太宗神位版奉瘞之日, 在大祥之前, 臣意以爲不可。 今成宗祔廟之日, 在明年二月, 而預遷先王神位版, 於事體何如?” 王顧問左右, 特進官成俊曰: “臣等亦以謂不可。 故昨日本芬議啓之。 問諸禮曹則曰: ‘立春後則墓龍禁忌, 故不得已如此擇日。’ 臣等以謂, 若以禁忌爲嫌, 則姑先開坎蓋覆, 以待春享後, 更擇日奉瘞爲當。 大凡祧遷之擧, 固所不忍, 而先期奉瘞, 尤爲不忍。” 特進官安琛曰: “臣問於禮曹則云無吉日故耳。 臣意, 雖云禁忌, 固非修築之比。 春享後奉瘞爲可。” 王曰: “改擇日。” 致崐曰: “金孝江事, 臺諫、侍從累請不允, 而只笞四十贖。 律云: ‘挾私欺公, 妄生異議, 擅爲更改, 變亂成法者斬。’ 孝江之罪正合此律。 其初興守、繼孫之陳告, 非爲內需司也, 乃要其賞也。 今若決折, 還屬奉安驛, 則興守等所受賞物, 亦必屬公。 故興守等從傍請囑, 而孝江曲聽其請, 擅啓立法, 而昨日敎云: ‘有前例也。’ 臣等觀其所啓之辭, 乃曰: ‘宣頭正案付奴婢, 毋得更改。’ 此非奴婢收貢、錢穀出納之例也。 前日興守等陳告云: ‘甘露寺奴某子某某, 而姜鶴孫專不分揀是非, 皆勒屬內需司。 今孝江直啓判付, 乃云: ‘一般公賤, 仍屬不動。’ 此乃別立新法也。 若不罷此法, 則各司奴婢, 皆屬內需司矣。 且江西縣奴婢五十餘口, 亦因興守陳告, 已錄宣頭案。 各官奴婢皆是國家奴婢, 如欲用之, 則何必屬內需司然後可也?” 王曰: “成宗行用之法, 今不可改。” 致崐曰: “興守、繼孫, 外知部之魁首者也。 要賞陳告, 而請托於孝江, 孝江直啓立法若從此法, 則戊申年陳告各司奴婢, 皆無所分辨, 而屬內需司矣。 奉安驛乃慶尙、江原兩道直路, 倭人與使命經行之處, 而奴婢五十餘口奪屬內需司, 則驛子五、六人, 必不能堪其役矣。” 參贊官金壽童曰: “孝江之事, 殿下非不知其爲非也, 臺諫、侍從亦陳請累矣, 至今不允。 凡各司小小公事, 提調毋得紛紜啓達, 已有其法。 況如此立新法, 毁舊典之大事, 豈宦寺所得專哉? 請速痛懲, 革罷所立之新法, 以快人心。” 致崐曰: “孝江之罪, 正合 ‘擅便更改, 變亂成法。’ 之律, 而臣等未知律書, 故當初誤照以杖一百、徒三年之律, 今又減之, 失刑莫大焉, 請全科罪之。 臣等不能制一宦寺, 而廢棄公事, 長立闕庭, 期於得請, 其弊不貲。” 王曰: “長立闕庭, 豈無其弊? 夏暑雨, 小民猶曰: ‘怨咨。’ 冬祈寒, 小民亦猶曰: ‘怨咨。’ 予豈不料民弊乎? 公論如此, 敢不加罪? 但孝江功臣, 只贖杖八十。” 致崐曰: “依照律罪之, 使之知戒。 今若減而贖之, 則彼將何以知戒乎?” 壽童、琛曰: “雖不可處斬, 固宜全科治罪以戒之也。” 王曰: “當斟酌以處之。”
연산 21권, 3년(1497 정사/명홍치(弘治) 10년) 2월 13일 을유 4번째기사
강학손의 서용문제로 승지 송일 등이 아뢰다
전교하기를,
“사하는 글에는 탐장에 대한 언급이 없었으니,
강학손(姜鶴孫)을 서용(敍用)하여야 하겠다.”하니,
승지 송일(宋軼)과 표연말(表沿沫)이 아뢰기를,
“한참 국문중에 있어 판결이 내리지않은 자는 탐장에 관계됐더라도 용서할 수 있지만, 이미 죄안에 기록된 것은, 조종조로부터 용서를 받은 일이 없습니다. 한 번 그 길을 열어놓으면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악용할 것이니,
가볍게 허락할 수 없습니다.”하였는데, 답하지 않았다.
강학손은 강귀손의 아우이다.
○傳曰: “赦文不及贓汚, 姜鶴孫可敍用。” 承旨宋軼、表沿沫啓: “方鞫未決正者, 則雖干贓汚, 容可原, 其已錄案, 自祖宗朝未有蒙宥者。 一開其端, 人皆援例, 不可輕許。” 不報。 鶴孫, 龜孫弟也。
연산 35권, 5년(1499 기미/명홍치(弘治) 12년) 12월 14일(무술) 9번째기사
장례원이 내수사가 불법으로 노비를 차지한 송사에 대해 아뢰다
장례원(掌隷院)이 내수사(內需司)가 불법으로 노비를 차지한 송사에 대해 분변하여 아뢰니, 전교하기를,
“내수사에서 불법으로 차지한 노비는 성종께서 일찍이 기한을 정하고 그 주인에게 진소하게 하였는데 지금 장례원이 그 기한 후에 소송한 것을 분변함은 무엇이냐?”하니,
승정원이 아뢰기를,
“지금 분변한 것은 모두가 기한 전에 정소(呈訴)한 것입니다.”하였다.
처음에 사평(司評) 강학손(姜鶴孫)이 내수사의 종 흥수(興守)와 모의하고, 주인을 배반한 종에게 뇌물을 받고서 내수사 문서에서 빠진 것이라 칭탁하고, 선두안(宣頭案)2553)에 기록하였는데, 그 주인이 떼로 일어나서 원통함을 호소하므로 성종께서 명하여 그 함부로 기록한 것을 삭제하고 또 기한을 정하여 신소(伸訴)하는 법을 만들었는데 그 기한 후에 정소한 것은 내수사에서 으레 들어 처리해주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하교가 있었다.
註2553]선두안(宣頭案):내수사(內需司)에 속하는 노비를 20년마다 자세히 조사하여 새로 만들어 임금에게 바치던 원적부(原籍簿).
○掌隷院辨內需司冒占奴婢之訟以啓, 傳曰: “內需司冒占奴婢者, 成宗嘗令立限, 許其主陳訴, 而今掌隷院辨其限後所訴何耶?” 承政院曰: “今所辨皆限前呈訴者也。” 初, 司評姜鶴孫與內需司奴興守, 謀受背主奴所賂, 托爲內需漏籍者, 而錄於宣頭案, 其主群起訟冤。 成宗命削其冒錄者, 且立限日伸訴之法, 而其限後呈訴, 則內需司例不聽辨, 故有是敎。
연산 42권, 8년(1502 임술/명홍치(弘治) 15년) 1월 15일 무자 2번째기사
이조판서 강귀손이 익명서를 가지고 와서 아뢰다
이조판서 강귀손(姜龜損)이 익명서(匿名書)를 가지고 와서 아뢰기를,
“신을 헐뜯는 사람이 이 글을 태평관(太平館) 어귀[屛門]와 종루(鐘樓)에 붙여두었습니다.
신의 아비 희맹(希孟)이 이조판서가 되었을 때에 주상(主上)께서 세자(世子)를 신의 아비의 집에 옮겨 거처하게 하였는데, 어느 사람이 생원(生員) 이원좌(李元佐)가 썼다고 일컫고는 신의 아비의 흠을 거짓 기록하여 이를 대궐 뜰에 버렸습니다.
성종(成宗)께서 이를 찾았지만 결국 찾지못하였습니다.
신의 아비는 선인(善人)인데도 오랫동안 권력을 잡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남의 비방을 받았는데, 하물며 신이 용렬한 자질로서 어찌 외람되이 중임에 있겠습니까?
제배되었다는 말을 들은 날 직무가 적합하지 않음을 심히 두려워하여 두세 번 사피하였지만, 윤허하지 않으시므로 황공하여 감히 굳이 사직하지를 못하였는데, 근래에 와서 사람을 임용할 적마다 비난과 책망이 문득 따르게 되니, 몸둘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익명서(匿名書)에 ‘노비(奴婢)와 전지(田地)의 수량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말하였는데, 노비와 전지를 어찌 남의 이목(耳目)을 가리고서 몰래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권력을 잡고 있은 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마음이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오니, 신의 관직을 해임시켜 한가한 자리에 있게 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관직을 구하다가 얻지못한 사람이 무고로서 훼방한 말일 것이다. 만약 이 일로 인하여 체직시킨다면, 이 무리들이 또 반드시 무고로서 훼방하여 자기가 임용된 후에야 그만두게 될 것이므로 체직시킬 수가 없다”하였다. 귀손(龜孫)이 다시 아뢰기를,
“비록 비방하는 의논이 없더라도 오히려 스스로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온데, 지금 비방하는 글을 보고도 뻔뻔스럽게 관직에 있게 된다면 아랫 동료들이 장차 신을 어떻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신이 전일에 매양 굳이 사직하려고 하였으나, 너그러운 유시(諭示)를 받아 감히 다시 아뢰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이 두 번이나 되었는데 지금에 비방을 당한 것이 이러하므로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감히 와서 아뢰오니,
신의 관직을 갈아주시기를 원합니다.”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익명서(匿名書)의 대략에,
“강귀손(姜龜孫)은 다른 사람을 한 관직에 옮겨주면, 반드시 그 사람에게서 노비, 전지, 포백(布帛), 금은(金銀), 마필(馬匹)등류를 받은 것이 이루 다 셀 수가 없다.
충청도에는 계생(戒生)이 있고, 전라도에는 강악손(姜惡孫)이 있고, 경중(京中)에는 첩의 집 5, 6호와 수양(收養)집 4, 5가와 안정(安貞), 안눌(安訥)등이 있어 몰래 뇌물을 받았으므로 온 나라 사람이 시끄럽게 말하여 귀로 차마 들을 수가 없다.
우선 이 말을 기록하여 사간원(司諫院)에 고하려고 한다.”하였으니,
계생(戒生)은 귀손(龜孫)의 집 종이고, 악손(惡孫)은 그 아우 학손(鶴孫)을 지칭한 것이고, 안정(安貞)과 안눌(安訥)은 귀손의 족친(族親)이었다.
○吏曹判書姜龜孫持匿名書啓: “毁臣者貼此書於太平館屛門及鍾樓。 臣父希孟爲吏曹判書時, 主上以世子, 移御于臣父家。 人有稱: ‘生員李元佐書。’ 誣錄臣父之累, 遺之闕庭, 成宗尋究不得。 臣父善人, 久執權柄, 猶被人謗。 況臣庸資, 叨居重任。 聞拜之日, 深恐不稱, 再三辭避不許, 惶恐未敢强辭。 近來用人, 譏責輒隨, 罔知所措。 今此匿名書云: ‘奴婢田地不知其數。’ 奴婢田地豈可掩人耳目, 而潛受乎? 然操柄已久, 心不自安, 乞解臣職, 置諸閑地。” 傳曰: “此必求官未得者誣毁之辭也。 若因此遞之, 則此輩又必誣毁, 待其用己者而後已, 故不可遞也。” 龜孫更啓: “雖無謗議, 猶不自安。 今見謗書, 猶靦然居職, 在下同僚, 將謂臣何如? 臣於前日, 每欲强辭, 及蒙寬諭, 未敢更啓, 如是者再矣。 今被謗若是, 終夜不寐, 敢此來啓, 乞遞臣職。” 不聽。 其匿名書略曰:
姜龜孫遷人一官, 必受人奴婢、田地、布帛、金銀、馬匹之類, 不可勝數。 忠淸道有戒生, 全羅道有姜惡孫, 京中有妾家五六, 收養家四五。 安貞、安訥等潛受賄物, 一國喧說, 耳不忍聞。 姑記此言, 將告諫院。戒生龜孫家奴, 惡孫指其弟鶴孫, 貞、訥龜孫族親也。
연산 49권, 9년(1503 계해/명홍치(弘治) 16년) 3월 1일 무진 5번째기사
강영수가 아버지 강학손의 원한을 호소하다
강학손(姜鶴孫)의 아들 강영수(姜永壽)가 상소하여 아버지의 원한을 호소하니, 정승들에게 의논하도록 하였다.
○姜鶴孫子永壽上疏, 訟父之冤, 命議于政丞
연산 49권, 9년(1503 계해/명홍치(弘治) 16년) 3월 3일 경오 2번째기사
성준, 이극균, 유순이 강영수의 상소에 대해 의논하다
성준(成俊)이 의논드리기를,
“지금 강영수(姜永壽)의 상언(上言)을 보건대 애매한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아비 강학손(姜鶴孫)의 범죄의 경중을 신이 그 실지를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그때 추관(推官)이 이미 분간하여 계문(啓聞)하고 죄안에 기록한 것이니 지금 경솔하게 논할 수 없습니다.”하고,
이극균(李克均)은 의논드리기를,
“강영수가 그 아비를 호소한 일에 있어서, 끌어댄 신자건(愼自建), 이계통(李季通)의 범행은 학손과 간격이 있으며, 김계종(金繼宗), 심미(沈湄), 이종호(李宗灝)의 죄는 원래 장오(贓汚)3965)가 아닙니다.
학손의 장오는 증거가 모두 밝혀져 죄안에 기록된 지 오래니,
다시 고치기어려울 것 같습니다”하고, 유순(柳洵)은 의논드리기를,
“이에 앞서 장오죄를 범한 자가 사(赦)가 있었다고 논하여 면한 자가 있었기 때문에 학손의 아들이 이렇게 희망하는 것이나 죄안에 기록된 지 벌써 오래니, 뒤따라 고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하였다.
註3965]장오(贓汚): 관리가 나쁜 방법으로 재물을 탐내는 것
○成俊議: “今觀姜永壽上言, 似若曖昧。 但其父鶴孫罪犯輕重, 臣未詳其實, 然其時推官, 已曾分揀, 啓聞錄案, 今不可輕議。” 李克均議: “姜永壽訟父之事, 所引愼自建、李季通所犯, 與鶴孫有間, 金繼宗、沈湄、李宗灝之罪, 元非贓汚。 鶴孫贓證俱質, 錄案已久, 似難更改。” 柳洵議: “前此犯贓汚者, 有論以經赦得免者, 故鶴孫諸子, 如此希(聖)〔望〕耳。 錄案已久, 追改爲難。”
연산 49권, 9년(1503 계해/명홍치(弘治) 16년) 3월 4일 신미 5번째기사
강학손에 대한 의논을 다시 하도록 하다
강학손의 일에 대한 의논을 내려보내며 이르기를,
“장리(贓吏)로서 죄안에 기록된 자를 사(赦)를 지난 다음에 죄안에서 삭제하고 서용(敍用)한 것이 전례가 있는가? 널리 상고하여 아뢰라. 또 당(唐)나라 문종(文宗) 때에, 연사가 크게 가물므로 이민중(李敏中)이 ‘정주(鄭注)를 베어 송신석(宋申錫)의 〈원한을〉씻어주면 하늘이 반드시 비를 주실 것이라.’하였으나, 그때 그 말을 쓰지않았기 때문에 비가 오지않았다. 비록 이 일과 서로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 원통하고 억울함은 마찬가지니 한 번 깨끗이 씻어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런 뜻으로 다시 정승들에게 의논하도록 하라”하였다.
○下姜鶴孫事議曰: “贓吏錄案者, 經赦則削案敍用, 其有前例乎? 廣考以啓。 且唐文宗時,仍歲大旱,李敏中曰:‘斬注而雪申錫,則天必雨。’當時不用其言, 故不雨。雖不與此事相類,然其?枉則一也。一行蕩條何如? 其以此意,更議于政丞。”
연산 49권, 9년(1503 계해/명홍치(弘治) 16년) 3월 4일 신미 7번째기사
성준, 이극균, 유순이 강학손을 죄안에서 삭제할 수 없음을 아뢰다
성준, 이극윤, 유순이 의논드리기를,
“장오죄를 범하여 죄안에 기록된 자로서 사(赦)를 입은 예는 없으니, 강학손이 죄안에 기록된 것을 뒤따라 삭제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하였다
○成俊、李克均、柳洵議: “犯贓錄案者蒙宥例無。 姜鶴孫錄案, 似難追削。”
연산 50권, 9년(1503 계해/명홍치(弘治) 16년) 6월 21일 병진 9번째기사
윤필상, 박숭질등이 강학손의 일을 논하다
강영수(姜永壽)의 상소를 내리어 의논하게 하니, 윤필상, 박숭질, 이집(李諿), 안처량, 한형윤, 이과가 의논드리기를,
“강영수의 아비 강학손(姜鶴孫)의 죄는 벌써 전에 심문하여 죄안(罪案)에 기록하였으니 지금 뒤따라 고치기 어렵습니다.”하고,
이극균, 유순은 의논드리기를,
“전에 의논한 대로 함이 어떠리까?”하고,
이세좌, 박건, 허침, 김수동, 이집, 송일, 안처량, 양희지, 이세영, 김봉, 안호(安瑚), 홍자아, 이과는 의논드리기를,
“엄한 형벌 아래 혹 억지로 옥사를 성립시키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왕 때에 벌써 죄를 결정하였으니, 사세가 지금 와서 고치기는 어렵습니다.”하였는데, 머물러 두고 내리지 않았다.
○下姜永壽疏議之。 尹弼商、朴崇質、李諿、安處良、韓亨允、李顆議: “姜永壽父鶴孫之罪, 已曾推斷、錄案, 今難追改。” 李克均、柳洵議: “依前議何如?” 李世佐、朴楗、許琛、金壽童、李諿、宋軼、安處良、楊稀枝、李世英、金崶、安瑚、洪自阿、李顆議: “箠楚之下, 或有鍜鍊成獄之事, 然先王朝已曾定罪, 勢難追改。” 留中不下。
연산 58권, 11년(1505 을축/명홍치(弘治) 18년) 7월 4일 정해 1번째기사
전사평 강학손이 장안을 삭제하고자 하니, 삼공으로 의논하게 하다
전사평(司評) 강학손(姜鶴孫)이 그 아들 영수(永壽)를 시켜서 상소하여 장안(贓案)을 삭제하고자하였는데, 왕이 승정원에 그 소(疏)를 내리면서 이르길,
“내 어려서 그의 아비 강희맹(姜希孟)의 집에서 자랐으므로 그 공이 작지않아 옛 허물을 씻으려하는데, 삼공(三公)을 불러서 의계(議啓)하게 하라”하매, 영의정 유순이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윤당하십니다.”하였다.
학손은 우의정 강귀손(姜龜孫)의 아우인데, 장오(贓汚)5066)로 좌죄(坐罪)되어 금고(禁錮)되기 수십년이더니, 휘순공주(徽順公主)에게 후히 뇌물을 씀으로 하여, 이 명이 있었다
註5066]장오(贓汚):노략질이나 뇌물받는 따위의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취하여 직무를 더럽히는 것. 장오죄를 범한 벼슬아치는 본죄로 처벌되는데, 그 물건의 반환, 변상, 속공(屬公)과 아울러 장오인록안(贓汚人錄案)에 올라 금고(禁錮:관직 취임의 정지)가 됨
○丁亥/前司評姜鶴孫, 使其子永壽上疏, 欲削贓案, 王下疏于承政院曰: “予少時長於其父希孟之家, 其功不細, 欲洗滌舊垢, 其召三公議啓。” 領議政柳洵啓: “上敎允當。”鶴孫,右議政姜龜孫之弟,坐贓禁錮數十年,厚賂徽順公主,故有是命。
중종 3권, 2년(1507 정묘/명정덕(正德) 2년) 5월 8일 경술 3번째기사
대간이 강옥견등의 일을 아뢰다
대간이 강옥견등의 일을 아뢰고, 또 아뢰기를,
“강학손(姜鶴孫)은 성종조(成宗朝)에 사평(司評)으로서 장오죄(贓汚罪)를 범하여 녹안(錄案)634)되었는데, 폐조에 이르러 한 장의 전지(傳旨)로써 그 녹안을 삭제해버렸습니다. 성종조에서는 비록 사소한 일이라도 반드시 깊이 고려한 뒤에 의논했는데, 더구나 뇌물받은 중죄(重罪)를 고려하지않고 삭제해서야 되겠습니까? 도로 녹안하도록 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강옥견등의 일은 대사령 이전의 일이므로 추론(追論)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기때문에 윤허하지 않으며, 강학손(姜鶴孫)의 일은 아뢴대로 하라.”하였다.
註634]녹안(錄案): 장리(贓吏)의 명부에 기록됨
○臺諫啓姜玉堅等事, 又啓曰: “姜鶴孫於成宗朝以司評, 犯贓錄案, 至廢朝, 以一傳旨, 削其錄案。 成宗朝雖小小之事, 必商略而後論之, 況贓汚重罪, 其不商略而削去乎? 請還錄案。” 傳曰: “姜玉堅等事, 宥旨前事, 不直追論, 故不允。 姜鶴孫事依啓。
중종 13권, 6년(1511 신미/명정덕(正德) 6년) 5월 25일 갑술 3번째기사
대간이 문계창, 강태수의 개정을 아뢰다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고, 또 아뢰기를,
“문계창은, 월차(越次)가 될 뿐아니라 사람됨이 잡되고 경솔하여 바르지 못하니, 삼공이 천거하였더라도 이조에서 천망(薦望)함은 잘못입니다.
청컨대 속히 개정하고 이조를 추문(推問)하소서.
공조좌랑 강태수(姜台壽)는 강귀손(姜龜孫)의 후사가 되어 과거에 나오게 되었지만, 그 생부(生父)는 장리(贓吏) 강학손(姜鶴孫)입니다.
육조의 낭관이 될 수 없으니, 개정하소서”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 때 이조의 낭관들이 함께 의논하여 홍문록(弘文錄)을 초(抄)하는데, 여러 낭관이 모두 강태수를 경연관(經筵官)에 합당하다하였다. 강태수는 그 숙부 강귀손의 후사가 되었으므로 과거에 나아감을 허하였으나, 그의 부 강학손은 사평(司評)으로 있을 때 관노비의 녹안(錄案)을 지우고 자기 노비를 삼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장안(贓案)에 기록되고 영광(靈光)으로 부처(付處)되는 등, 불의의 일을 많이 행하여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였다.
강태수는 또 명사들과 교제를 잘하여 날마다 연회를 벌여 술 마시기를 일삼았다. 그러므로 이조의 낭관이 홍문록(弘文錄)에 적으려 하였는데, 정랑 최명창(崔命昌)은 성질이 강직하여 전후를 돌아보지 않으므로, 홀로 말하기를 ‘장리(贓吏)의 친자(親子)는 육조, 한성부(漢城府)등 관직에도 법으로 금하거늘, 하물며 경연관(經筵官)이겠는가? 이렇게 한다면 법을 세운 뜻이 어디에 있는가?’하니, 여러 낭관이 모두 아무 말도 못하였다.
○臺諫啓前事。 又啓: “文繼昌非但越次, 其爲人雜易不正。 三公雖薦, 吏曹擬之過矣。 請速改正, 推吏曹。 工曹佐郞姜台壽, 雖以龜孫繼後, 得赴科擧, 其生父則乃贓吏鶴孫也。 不可爲六曹郞官, 請改正。”
【史臣曰: “時吏曹郞官, 僉議抄弘文錄, 諸郞皆以姜台壽, 爲可合經筵官。 台壽以其叔父龜孫繼後, 故許赴科擧, 其父鶴孫司評時, 洗濯官奴婢, 錄案爲自已奴婢。 事覺, 錄贓案, 付處靈光, 多行不義, 人皆疾之。 台壽又多能交結名士, 日以宴飮爲事, 故吏郞欲抄弘文錄, 正郞崔命昌, 性剛直, 不顧前後, 獨曰: ‘贓吏親子, 雖六曹、漢城琵職, 法不當爲, 況於經筵官乎? 如此則安有立法之意乎?’ 諸郞默然。”】
중종 14권, 6년(1511 신미/명 정덕(正德) 6년) 6월 21일(기해) 2번째기사
헌부가 소격서 혁파 등의 일로 상소하니 불허하다
헌부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등이 보건대 소격서의 설치는 그 유래가 오랩니다.
한(漢)에는 홍경(鴻慶), 숭복관(崇福觀)이 있었고, 송(宋)에는 옥청(玉淸), 소응궁(昭應宮)이 있었는데, 사실은 노군(老君)3692)을 받들고 천진(天眞)에게 복을 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무제(漢武帝)는 문성(文成)3693)과 오리(五利)3694)의 술법에 혹(惑)하고 사조(祀竈)3695)와 연단(鍊丹)3696)의 일을 극진히 받들지 않음이 없었으나 마침내 소갈병[病渴]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송진종(宋眞宗)은 노군(老君)을 섬기는데 빠져, 왕흠약(王欽若)의 무리가 천서(天書)3697) 를 부르짖음으로써 그의 술법을 굳혔는데도, 전쟁은 끝내 쉬지않고 백성은 끝내 편치 않았으며, 향년 또한 길지 못했으니, 진종은 상제(上帝)를 속인 암매한 임금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도교는 나이를 빌고 수명을 연장하는 데 보탬이 없음이 분명하거늘, 국가가 관청[署]3698)을 설치하고 관원을 두어, 수명도 여기에 빌고 전재에도 여기에 빌며 추위, 더위, 수해, 가뭄에도 여기에 비느라고 수만 냥을 허비합니다.
전하께서는 사문(斯文)의 도를 열어 밝히고 힘써 이단(異端)을 물리치셨는데, 유독 도교만 아직도 폐하지 않으시니 이는 바로 성치(聖治)의 한 흠입니다. 전하께서 억지로 핑계하시기를 ‘국전(國典)3699)에 실렸으니 갑자기 혁파할 수 없다하시나,
신들은 전하께서 사(邪)와 정(正)의 구분이 오리려 분명치 못하신 듯합니다.
이극돈은 《성묘실록(成廟實錄)》을 편찬할 때, 김일손이 숨은 허물 쓴 것을 보고 이를 깊이 품었다가 몰래 유자광을 부추겨 무오지화[戊午之禍]를 이루었으므로 당시의 명사들이 일망타진되어, 지금까지도 이를 말하는 자는 통분하여 팔을 걷어붙이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폐주(廢主)가 무고한 이를 살해한 것이 이극돈으로 말미암았으며, 역사를 상고하여 추죄(追罪)함도 또한 이극돈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그의 직을 돌려줌은, 비단 상벌(賞罰)에 법도가 없을 뿐 아니라, 신등이 두려워하는 바는 이로부터 역사에 직필(直筆)이 없어져서 사람들이 권징(勸懲)되지 못할까 하는 점입니다.
지난번에, 전하께서 대간에 명하여 조정 선비들 중에 용렬하고 봉직(奉職)하지 못하는 자를 추리도록 하셨는데, 실의(失意)와 원한에 맺힌 자들이 교묘히 비어(飛語)를 작하여 서로 퍼뜨림으로써, 중외(中外)를 놀라게 하고 물론(物論)을 흉흉하게 하였습니다. 어찌 풍속이 이렇게까지 더럽혀졌습니까?
대간이란 직은 공론이 있는 곳이니, 그 사이에 어찌 미움을 두겠습니까?
경연(慶緣)은 본디 간사한 소인으로, 인연(因緣)해서 진출을 구하여 조판(朝版)3700)에 끼게 되었으니, 공의(公議)에서 배척을 받음이 불행이 아니라 마땅한 것입니다.
허지는 경악의 신하[經幄之臣]로서 간사한 말에 부회(附會)하여 성상의 마음에 의심을 갖도록 하였으며, 신용개는 춘관의 장[春官之長]3701)으로서 사(私)를 끼고 공(公)을 칭탁하여, 소인을 비호하고 음으로 공론을 막았습니다. 신용개는 지위가 성재(省宰)에 올라 사문(斯文)을 주관하였거늘, 무뢰한 무리의 경박하고 믿지못할 말을 듣고 서로 성원하여 곧장 상께 아룀으로써, 간사한 말과 미혹한 설이 술수를 부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원(政院)으로 불러 물으시던 날에는 ‘기억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 조정을 우롱함이 어린애의 장난 같습니다.
상을 업신여김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신등은 이로부터 시비가 밝지 못하고 공도(公道)가 행해지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이맥(李陌)은 척리의 친[戚里之親]으로 궁위(宮衛)3702)에 가탁하고 대관에게 간청하니, 이위(李偉)가 말을 대중(臺中)에 전하여 가두어 죄주어야 할 자를 즉시 석방 하였습니다. 그때 특히 너그러운 법을 쓰시고 율(律)로써 죄주지 않으셨으니, 상의 은혜 또한 컸던 것입니다.
죄를 입은 지 오래지 않은데, 이맥을 판결사(判決事)에 제수하시고 이위를 군자정(軍資正)에 올리셨으니, 추론하여 죄주지는 않을망정 서용하여 올려 제수한다는 말입니까?
하물며 이맥은 국량이 작은 사람으로 전결(專決)하는 책임에는 더구나 합당치 못한데, 어찌 하루인들 그 직에 두겠습니까?
장리(贓吏)에 관한 법은《대전(大典)》에 실려 있으니, 한번 흔들린다면 사유(四維)가 펴지못하고 기강이 떨치지 못하여 나라가 따라서 망합니다.
강태수는 장리 강학손(姜鶴孫)의 자식으로 숙부 강구손(姜龜孫)에게 입후하였으니, 조정이 특히 그에게 과거를 보도록 허락한 것도 역시 법을 깨뜨린 것이거늘, 이제 또 공조 좌랑을 제수하였습니다.
이는 장리의 자식을 도리어 장리의 사위와 같이 여긴 것이니, 법을 씀이 어찌 전도된 것이 아닙니까? 또 장리의 손(孫)도 육조에 서용치 못하는데, 더구나 장리의 친자식에게 제수함이 가겠습니까?
이 법으로써 백성들을 막아도 장오(贓汚)의 기풍이 없어지지 않을 것인데, 전하께서는 감히 법을 헐고서도 조금도 애석하지 않으십니까?
문계창은 용렬하고 행검(行檢)이 없는 사람으로, 향리(鄕里)에서 업신여기고 벗들이 비웃으며, 작은 지방을 맡아서도 오히려 칭송이 없었거늘, 하물며 초자(超資)하여 부사(府使)에까지 이르렀는데 이겠습니까?
사류들은 놀라서 웃지않는 이가 없습니다. 대신들은 비록 문계창이 궁마(弓馬)와 한묵(翰墨)의 재주가 있다고 하나, 문계창은 젊어서부터 예검(禮檢)을 닦지 않고 몸을 권세있는 집안에 기탁하여 염치를 잃었고 절조(節操)가 없습니다.
이러한데도 그를 어질고 능하다하여 불차탁용(不次擢用)3703)하시니, 유향(劉向)이 말한 ‘솔개를 일러 새매라 하면 새매는 반드시 노할 것이며, 고양이를 범이라 하면 범이 반드시 놀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조정에 문계창보다 어진이가 있다면, 솔개처럼 노하고 범처럼 놀랄지 어찌 알겠습니까. 전하께서 문계창을 현능하다고 여기시어 초자하여 제수하심은 다만 대신에게 잘못 천거한 책망을 끼칠 뿐아니라 실로 사람을 알아보시는 전하의 밝으심을 어그러뜨리는 것입니다.”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註3692]노군(老君):노자.註3693]문성(文成):제인(齊人) 소옹(少翁)이 방술(方術)로 받은 장군 명칭.註3694]오리(五利):한대의 방사인 난대(欒大)의 장군 칭호.註3695]사조(祀竈):조왕신에 지내는 제사 註3696]연단(鍊丹):도가에서 불로장생의 약을 만드는 일.註3697]천서(天書): 노자(老子)가 설했다는 도교의 경전.註3698]관청[署]:소격서를 가리킨다.註3699]국전(國典): 국법.註3700]조판(朝版):벼슬아치의 명부. 곧 사판(仕版).註3701]춘관의 장[春官之長]:예조판서.註3702]궁위(宮衛):궁중.註3703]불차탁용(不次擢用):차례를 따르지않고 발탁, 등용하다
○憲府上疏, 其略曰:臣等竊觀昭格(暑)〔署〕之設, 其來久矣。 在漢而爲鴻慶、崇福之觀, 在宋而爲玉淸、昭應之宮, 其實不過尊奉老君, 祈福天眞耳。 然而漢武帝惑於文成、五利之術, 祀竈鍊丹之事, 無不曲奉, 竟未免病渴。 宋眞宗惑事老君, 王欽若之徒, 唱爲《天書》, 以固其術, 而兵終不息, 民終不寧, 享年亦終不長, 則眞宗不過爲矯誣上帝之昏主矣。 然則道敎之無益於祈年永命明矣。 國家置署設員, 祈瞑焉, 兵戎禱焉, 寒暑水旱禱焉, (麋)〔糜〕費累巨萬。 殿下闡明斯道, 力排異端, 而獨此道敎, 尙不廢焉, 是正聖治之一疵也。 殿下强諉之曰: ‘載於國典, 不可遽革。’ 臣等恐殿下邪正之分, 尙未明也。 李克墩撰《成廟實錄》, 見金馹孫, 書隱慝, 深銜之, 陰囑柳子光, 以成戊午之禍, 當時名士, 一網打盡, 至今說者, 莫不痛心疾首而扼腕也。 廢主之殺害無辜, 由克墩啓之, 考史追罪, 亦由克墩啓之也。 今者遽還其職, 非但賞罰無章, 臣等竊恐自此, 史無直筆, 而人亦不勸懲也。 頃者殿下命臺諫, 汰去朝士之庸頑不奉職者, 群小之失意怨恨者, 巧作飛語, 傳相喧播, 以驚中外之聽, 物論洶洶, 是何風俗之汚, 一至於此乎? 臺諫之職, 公論所在, 豈有憎惡於其間哉? 慶緣本一憸邪小人, 因緣干進, 得列朝版, 而見斥於公議, 非不幸也, 亦宜也。 許遲以經幄之臣, 附會邪說, 使聖心持疑, 用漑以春官之長, 挾私托公, 阿庇小人, 陰沮公論。 用漑位躋省宰, 權衡斯文, 而乃聽無賴之徒浮薄不信之語, 互爲聲援, 徑達于上, 欲使奸言惑說, 得售其術。 當召問政院之日, 乃曰: ‘不能記憶。’ 其愚弄朝廷, 有同兒戲, 是何慢上之至此耶? 臣等竊恐自此, 是非不明, 而公道不行。 李陌乃以戚里之親, 假托宮闈, 干請臺官, 而李偉傳說於臺中, 卽放獄囚之當罪者。 其時特用寬典, 不以律罪之, 上恩亦大矣。 被罪未久, 尋除李陌爲判決事, 李偉爲軍資正。 雖不得追論而罪之, 其可反敍而用之乎? 陞而授之乎? 況李陌, 茵筲之器, 尤不合於專決之任, 豈宜一日在於其職乎? 贓吏之法, 載在《大典》, 若一撓之, 則四維不張, 綱紀不振, 而國隨而亡。 姜台壽, 以贓吏鶴孫之子, 繼叔父龜孫之後, 朝廷特許赴擧, 是亦毁法矣。 今又除工曹佐郞, 是贓吏之子, 反同贓吏之女壻, 其爲用法, 豈不顚倒乎? 且贓吏之孫, 亦不敍六曹, 則顧以親子, 而授之可乎? 以此防民贓汚之風, 尙不能戢, 殿下敢毁, 而莫之惜乎? 文繼昌, 以庸鄙無行之人, 鄕里侮之, 朋友嗤之。 宰縣百里, 尙有不稱, 況超至府使耶? 士類驚愕, 莫不解頤。 大臣雖曰: ‘繼昌有弓馬翰墨之才。’ 然繼昌, 自少不遵禮撿, 寄身於權勢之門, 失廉恥而寡操節。 如是而謂賢且能, 擢不次而超用, 劉向所謂以鴟爲隼, 則隼必怒,以猫爲虎,則虎必駭,朝廷之上,若有賢於繼昌者,則安知不爲隼怒而虎駭乎? 殿下以繼昌爲善能而超授之,豈徒貽大臣謬薦之責乎? 實虧 殿下知人之哲矣。
不納.
중종 14권, 6년(1511 신미/명 정덕(正德) 6년) 7월 1일(기유) 1번째기사
간원 헌부가 전의 일을 아뢰니 불허하다
간원이 전의 일을 아뢰고, 헌부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 새로 보위에 오르시어 널리 언로를 열고 군신을 맞이하시더니,
근년 이래로는 점점 처음같지 않으시어 대간의 말을 하나도 쾌히 듣지 않으시며, 간언을 꺼리는 조짐을 비로소 이에 보이시니,
신등은 실망을 이길 수 없습니다.
소격서의 설치는 허탄하고 환망(幻妄)하여 인군의 믿을 바가 못되는 것입니다. 제(祭)를 지낼 때에 도류(道流)3734)들이 그들의 옷과 그들의 관을 쓰고 뜰에 구부리니 하늘을 속이는 것이 더없이 크자, 우부우부(愚婦愚夫)까지도 보려고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식자이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낭비 또한 심하여 나라 사람이 모두 혁파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전하께서 홀로 ‘조종조에서 혁파하지 않은 것을 오늘날에 혁파할 수 없노라’하시니, 신등은 적이 의혹스럽습니다. 좋은 법과 착한 정치라면 조종이 남겨준 것을 후세의 왕이 지킬 것이지만, 이는 곧 좌도로서 천연 답습하다가 오늘에까지 이른 것이니, 이는 전하께서 먼저 혁파할 일입니다.
전하께서 대간에게 명하시어 ‘서관(庶官) 중에 직에 맞지 않는 자를 태거(汰去)하라’하셨으므로, 대간은 경연(慶緣)등을 가려서 아뢰었던 것입니다.
대저 경연(慶緣)은 보잘것없는 무리로 아유 구용을 일삼는 자이니 태거 당함이 마땅하거늘, 연은 속에 분한 마음을 품고 갑자기 대간과 틈이 있었다는 말을 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의혹되게 하였으니, 그 계획이 교활합니다.
시종 허지와 대신 신용개 역시 그의 말을 믿고 그의 악에 가담하여, 드디어 경연에 시비를 현혹시켜 성총(聖聰)을 의혹케 하였으니, 대간을 모해하고 사첨(邪諂)3735)을 편들며 공론을 억제하고 감행한 죄 진실로 큽니다.
용개는 또 하문하실 때 바로 아뢰지않고 말하기를 ‘기억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조정을 업신여긴 것으로서 기망한 죄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경연은 진실로 사류에 넣지 않음이 옳거니와 허지, 용개 또한 그 죄로써 죄줌이 마땅합니다.
이맥은 내수사(內需司)의 종을 비호하기 위해 내언(內言)이라 칭탁하고, 이위에게 요구하여 대중(臺中)에 전함으로써 대풍(臺風)3736)을 무너뜨렸으니, 그 죄가 매우 큽니다. 그런데 이제 겨우 1년만에 맥(陌)은 판결사(判決事)를 삼고, 위(偉)는 군자정(軍資正)에 승서하였으니, 장차 무슨 징계가 되겠습니까? 맥과 위의 죄를 지금 추론할 수는 없지마는 그 직은 또한 갈지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맥은 국량(局量)이 가볍고 얕아서 독단(獨斷)하는 직임에 맞지 않는데 이겠습니까!
강태수는 장리 강학손(姜鶴孫)의 아들이니, 비록 숙부 귀손에게 입후(立後)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아비 학손을 아비라하지않을 수는 없습니다. ‘장리의 아들과 손자를 육조에 서임하지 말라.’는 것은 이미 《대전(大典)》에 실려 있는데, 태수에게 공조좌랑을 제수한 것은 곧 법을 허물어뜨린 것입니다.
이제 삼공의 의논에 말하기를, ‘정부, 정언, 정조(政曹), 홍문관, 춘추관, 대성(臺省) 이외의 다른 직엔 허통(許通)하라.’고 하였는데, 삼공이 어떠한 소견에서 이러한 의논을 드렸는지 신등은 알 수 없습니다.
나라에 정한 법이 있는데 능히 지키지 못하고 마음대로 변동한다면 그 해가 매우 크며, 육조의 직엔 장리의 손자도 서임할 수 없거든 하물며 그 아들인 경우이겠습니까? 태수의 직은 갈지않을 수 없습니다.
이보(李俌)는 금옥마장(金玉馬粧)3737)의 금법을 범했으므로 율에 의해 정죄(定罪)하고 고신(告身)을 모두 빼앗았는데, 겨우 두어 달을 지나서 환급을 명하시니, 주고 뺏는 경솔함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대저 사치한 습속은 금하지 않을 수 없으니, 사치한 마음이 한번 싹트면 그 거처(居處)나 복식이 반드시 사치를 극하여 서로서로 본뜨다가 끝내는 지나친 제도에 이르게 마련이어서 위아래의 구분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작첩을 빼앗았는데 어찌 갑자기 줄 수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채납(採納)하시어 망설이지 마시고 쾌히 결단하소서.”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註3734]도류(道流):도사의 무리.註3735]사첨(邪諂):간사하고 아첨하는 자.註3736]대풍(臺風): 대간의 기풍.註3737]금옥마장(金玉馬粧):금옥으로 꾸민 말 장식품.
○己酉朔/諫院啓前事。 憲府上疏, 其略曰:殿下新登寶位, 廣開言路, 迎訪群臣。 比年以來, 寢不如初。 臺諫之言, 一不快從, 忌諫之漸, 始見於此, 臣等不勝缺望。 昭格之設, 虛誕幻妄, 非人君所宜信也。 其當祭也, 道流服其服冠其冠, 傴僂於庭, 其爲欺天莫大。 雖愚婦愚夫, 亦不欲觀, 況識者乎? 不特此也。 糜費亦甚多, 國人皆曰可革, 而殿下獨曰: ‘祖宗所不革, 不可革之於今日。’ 臣等竊惑焉。 若良法善政, 則祖宗之所貽, 後王之所守也, 是乃左道, 而遷延苟襲, 式至于今, 此殿下所先革也。 殿下命臺諫, 汰去庶官之不稱職者, 臺諫抄慶緣等以啓。 夫緣, 斗筲瑣屑, 依阿苟容者, 其見汰宜矣。 緣陰懷憤怨之心, 遽發與臺諫有隙之言, 欲使人疑之, 其計狡且譎矣。 侍從如許遲, 大臣如申用漑者, 亦信其言, 黨其惡, 乃於經筵, 眩其是非, 以疑聖聰。 其謀害臺諫, 陰庇邪謟, 沮抑公論, 敢行胸臆之罪固大矣。 用漑又於下問之時, 不以直啓, 乃曰: ‘未得記憶。’ 是不有朝廷也。 其欺罔孰大? 慶緣, 固不可齒於士類, 許遲、用漑, 亦宜以其罪罪之也。 李陌欲庇內需司奴, 托以內言, 干於李偉, 傳於臺中, 以壞臺風, 其罪甚大。 今纔周歲, 陌爲判決事, 偉陞軍資正, 將何所懲艾乎? 陌、偉之罪, 今雖不可追論, 亦不可不遞其職也。 況陌, 局量輕淺, 尤不合於獨斷之任乎? 姜台壽 贓吏鶴孫之子也, 雖爲叔父龜孫之後, 亦不可不父其鶴孫也。 贓吏子及孫, 勿敍六曹, 載在《大典》, 而台壽授工曹佐郞, 是毁其法也。 今三公議曰: ‘政府、政院、政曹、弘文館、春秋館、臺省外, 其餘皆許通。’ 臣等不識三公, 有何所見, 而建此議乎。 國有定法, 不能遵守, 率意低昻, 則其害甚大。 六曹之職, 贓吏之孫, 亦不得敍, 況其子乎? 台壽之職, 不可不遞也。 李俌犯金玉馬粧之禁, 據律定罪, 盡奪告身。 纔經數月, 遽命還給, 是何予奪之輕, 一至於此耶? 夫奢侈之習, 不可不戢也。 侈心一萌, 則其居處服飾, 必極其奢麗, 轉相則效, 其終必至於過制, 無復有上下之辨也。 其已奪職牒, 豈可遽給也? 伏願特賜採納, 夬決無留。不納。
중종 14권, 6년(1511 신미/명정덕(正德) 6년) 11월 17일(계해) 5번째기사
헌부가 전의 일을 아뢰고 간원이 치자를 올리니 불허하다
헌부가 전의 일을 아뢰고, 간원이 치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유순정은 지위가 삼공에 있으면서 몸가짐을 염근(廉謹)히 하며 공검(恭儉)으로 아랫사람을 거느리지 않고, 전장(田莊)을 많이 갖고 재산을 불렸으며 해조(該曹)에 청탁하여 사욕을 이루었으니, 이 어찌 묘당(廟堂)의 위에 처하고 백료(百僚)의 사표된 자로서 차마 할 일입니까?
홍경주는 본디 물망도 경력도 없는데 요행히 훈적(勳籍)에 참여하여 급작스레 삼고(三孤)에 뛰어올랐으나, 그 직분에 맞지 않는다고 사론(士論)이 경시하고 있습니다. 황형은 음란하고 추하여 행실이 보잘것없고 사풍(士風)을 더럽혔으니 그 죄악은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어찌 반드시 널리 의논해야만 결단하겠습니까?
국가가 장리(贓吏)를 엄하게 다스리는 것은 염치(廉恥)를 기르고 탐오(貪汚)를 징계하기 위함인데, 강태수(姜台壽)는 강학손의 친자식이니 남에게 입후(入後)하였다하여 가볍게 법이 흔들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원컨대 급히 공론을 따르소서.”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憲府啓前事。 諫院上箚, 其略曰:
柳順汀位居三公, 不以廉謹自守, 恭儉率下。 而廣置田庄, 又殖貨利, 囑托該曹, 以濟己私, 此豈居廟堂之上, 爲百僚師表者所忍爲? 洪景舟素乏物望, 又無踐歷, 幸參勳籍, 驟陞三孤, 不稱其職, 士論輕之。 黃衡淫穢無行, 汚毁士風, 其罪惡, 決不可恕, 何必廣議以斷? 國家嚴贓吏之法, 所以養廉恥懲貪汚。 姜台壽, 鶴孫親子, 不可論以爲人後, 而輕撓其法。 伏願亟從公論。皆不允。
선조 111권, 32년(1599 기해/명만력(萬曆) 27년) 4월 15일 갑자 4번째기사
전형조좌랑 강항이 상소하다
전형조좌랑(刑曹佐郞) 강항(姜沆)이 상소하였다.
“전형조좌랑 신(臣) 강항은 목욕재계하고서 백번 절하고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면서 삼가 주상전하(主上殿下)께 상언(上言)합니다. 생각하건대, 신은 지난 정유년에 분호조참판(分戶曹參判) 이광정(李光庭)의 낭청으로 있으면서 양 총병(楊摠兵)의 군량을 호남으로 운반하는 일을 맡았었습니다. 군량을 거의 모았는데 적의 선봉이 이미 남원(南原)에 박두하자 이광정 역시 서울로 떠났고 신은 순찰사의 종사관인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여러 고을에 격문(檄文)을 띄워 의병(義兵)을 모집하였더니 나라를 생각하여 모인 자가 겨우 수백 명이었는데 그나마 자기 가족들을 생각하여 곧 해산하고 말았습니다. 신은 어쩔 수 없어 배에다 아비, 형, 아우, 처자를 싣고 서해를 따라 서쪽으로 올라갈 계획을 했었지만, 뱃사공이 서툴러 제대로 배를 운행하지 못하다보니 바닷가에서 맴돌다가 갑자기 적선(賊船)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신은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고 가족들과 더불어 바닷물 속으로 뛰어 들었는데, 배를 매두는 해안이므로 물이 얕아 모두 왜놈들에게 사로잡히게 되었고 오직 신의 아비만이 딴 배를 탔기 때문에 동시에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는 것을 모면하였습니다.
분호조에서 양곡을 모으기 위한 공명고신(空名告身) 수백통을 모두 물속에 빠뜨렸으니 제대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여 위로 조정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더욱 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적은 신을 사족(士族)으로 인정하고 신 및 형과 아우를 같이 선루(船樓)에 묶어놓았는데 밧줄이 닿았던 곳에 의복과 손이 모두 찢겨져 3년이 지났는데도 흔적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적은 급히 배를 돌려 무안현(務安縣)의 어느 해안으로 데리고 갔는데 거기에는 적의 선박들이 몇 리(里)에 걸쳐 가득차 있었고 우리나라의 남녀가 왜놈과 거의 반반이었으며 이 배 저 배에서 울부짖으며 통곡하는 소리가 바다와 산을 진동시켰습니다. 순천(順天) 좌수영(左水營)에 당도하자 적장 한 사람이 신과 신의 형 강준(姜濬), 강환(姜渙), 그리고 처부(妻父) 김봉(金琫)등과 여러 가속(家屬)들을 한 배에 실어 왜국으로 압송해 갔습니다.
왜국에 도착하였더니, 남해도(南海道), 이예도(伊豫道)와 대진성(大津城)에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사로잡혀간 자들이 무려 수천명이나 갇혀있었는데 그들이 결국 왜놈에게 시살(廝殺)되었습니다. 새로 붙잡혀 온 사람은 밤낮으로 울부짖고 일찍 온 사람은 간혹 왜적에게 귀화되어 돌아갈 생각을 아예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신이 이현충(李顯忠)이 뛰쳐나가 남쪽으로 달아난 일로 깨우쳐 보았으나 호응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듬해 4월 그믐에, 서울 죽사동(竹肆洞)에 살던 사람으로 임진년에 사로잡혀간 자가 왜적의 서울로부터 이예도로 도망해 왔는데 왜의 말을 잘 하기에 신이 서쪽으로 달아나자고 회유하였더니, 그는 드디어 함께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는 신이 왜어를 전혀 모르므로 통역[舌人]을 대동하지 아니하면 촌보(寸步)도 갈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내 5월 25일 그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통역이 되어 야음을 틈타 서쪽으로 도망쳤는데, 처자는 이예(伊豫)에 버려두고 두 형은 풍후(豊後)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으므로 신을 따르는 사람은 통역과 처부(妻父) 김봉(金琫)뿐이었습니다.
길을 떠난 3일 만에 바닷가에서 몰래 쉬고 있었는데, 대숲 사이로 보니 나이가 60여 세쯤 되어 보이는 한 왜승(倭僧)이 폭포에서 몸을 씻고 바윗돌 위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통역이 가만히 신들이 오게 된 뜻을 알리자 그 중은 슬퍼하며 두세 번 탄식하더니 배로써 신들을 풍후까지 건너주겠다고 하였으므로, 이에 통역이 주머니 속에서 은전(銀錢) 4개를 꺼내어 값을 치루었습니다. 신들은 너무도 기뻐 중을 따라 내려왔는데, 10보(步)도 채 못 와서 나루터를 지키던 부곡(部曲)의 도병(道兵)이 왜졸(倭卒)들을 거느리고 갑자기 들이닥쳤습니다. 이들은 신들이 도망가는 줄을 알아차리고 대진성(大津城)으로 강제 송환하였는데 이후부터는 방비와 단속이 한층 엄격하였습니다.
금산(金山) 출석사(出石寺)의 중 호인(好仁)이란 자가 있었는데, 자못 글자를 해독할 줄 알 뿐더러 신을 보고 애석하게 여겨 예우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신에게 자기 나라의 제판(題判)4257), 방여(方輿), 직관(職官)을 보여주었는데 언문(諺文)으로 빠짐없이 기록한 것이기에 신이 곧바로 등사하였습니다. 또 왜승 일운(日雲)의 집에 그 나라의 여도(輿圖)를 간직하고 있는데 매우 자세하게 갖추어져 있다고 하기에 통역을 시켜 교환해 오도록 하고 다시 목격(目擊)한 형세를 가지고 우리나라 조정의 계획이 옳고 그른 것을 참작시키고 중간에 어리석은 신의 천(千)에 하나 적중할지 모르는 생각을 곁들여 논의해 보았습니다.
아, 패군(敗軍)한 장수는 용맹을 말할 수 없는데 더구나 신은 포로가 되어 적의 소굴에서 구차한 목숨을 부지하는 처지로서 감히 붓을 놀려 분수를 모르고 일을 논한다는 것이 극히 참람한 일로 그 죄를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옛사람 중에 시간(尸諫)까지 하여 죽음에 임박해서도 임금을 잊지 아니한 사람이 있었으니, 참으로 국가에 이익되는 일이 있다면 또한 죄인이라 하여 마침내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은 만리 바다 밖에 있고 전하께서는 구중궁궐 위에 계시니, 혹 이 왜노(倭奴)의 실정을 통촉하지 못하시는 면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후 사신들의 왕래에 있어서는 다들 오가는데 바쁠뿐만 아니라 저들의 경계가 엄밀하여 모든 것을 자세히 알지 못할 것이고 사로잡혔다가 탈출하여 돌아간 사람은 대부분 하천배로서 숙맥과 다름없는 자들이므로 듣고 본 것이 혹 확실치못할 듯하기때문에 이에 감히 죄를 무릅쓰고 전달합니다.
왜승이 준 제판(題判) 가운데 왜의 언서(諺書)로 쓰여진 곳을 신이 곧바로 우리나라의 언서로 등주(謄注)하였습니다.
울산(尉山) 사람 김복(金福)이란 자가 말하기를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집종으로 계사년 가을에 사로잡혀 역시 이예주(伊豫州)로 와 있으면서 많은 돈으로 왜선(倭船)을 임대하여 서쪽으로 돌아가려고 한다.’하므로 신이 즉시 등록(謄錄)한 것을 그에게 부쳤는데 만에 하나 성상께서 보실 수 있게 된다면 일본이란 나라가 비록 동떨어진 바다 밖에 있다할지라도 이 왜인들의 속셈이 성상의 안전에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니, 온갖 방법으로 거짓을 꾸미는 왜놈들이 필시 만리 밖을 환히 내다보는 신(神)으로 생각할 것이고 방어하고 대응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적이 그해 8월 8일에 신을 대판성(大坂城)으로 옮겼는데 배로 거의 한달 가량 운행하여 비로소 대판에 도착하였습니다. 대판성은 왜의 서경(西京)인데 머문 지 수일만에 또 신을 복견성(伏見城)으로 옮겼는데 복견성은 왜의 새 서울이었습니다.
적의 괴수가 이미 죽자 왜놈들의 정상이 예전과는 아주 달라졌습니다.
신은 우리 조정의 조처와 개수(改守)가 혹 적에게 기회를 줄까 두려웠습니다. 이리하여 사로잡혀 온 자로서 왜의 서울에 있는 동래(東萊) 김우정(金禹鼎), 하동(河東) 정창세(鄭昌世), 강천추(姜天樞), 진주(晉州) 강사후(姜士後), 이산(尼山) 송정수(宋廷秀)등과 함께 아침저녁의 쌀을 모아 각기 은화(銀貨) 1전씩 사들이고 이어 통역으로서 왜어를 잘하여 다른 나라 사람임을 분간할 수없는 자를 뽑아 노자와 배삯을 제공하여 강역(疆域) 밖에 도달토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편지를 미처 발송하지 못했는데 왜인들은 이미 철수하였습니다. 신은 온갖 방법으로 돌아가려고 꾀했으나 수중에 한 푼의 돈이 없기에 부득이 왜인들에게 글씨품을 팔아 은전 50여개를 얻어 몰래 배 한 척을 사고 장사(壯士) 10여인과 은밀히 결탁하여 동래 김우정(金禹鼎)등과 같이 서쪽으로 돌아갈 것을 모의했습니다.
신의 형 강준(姜濬)은 뱃사공과 통역을 거느리고 금년 3월 12일에 먼저 배가 있는 곳에 갔고 신의 형 강환(姜渙) 및 처부 김봉(金琫)과 김우정등은 기동하지 않았는데 바닷가에 살던 왜인이 몰래 이곳을 지키는 왜놈집에다 고발하자 왜놈이 졸개들을 풀어 체포하였습니다.
20여일동안 감금되었다가 오래 지난 다음 풀려났습니다.
통역[舌人] 2명은 참사(斬死)당했습니다.
아, 계책이 궁하고 재간도 부족하여 천만가지 생각이 모두 허사가 되었으니 아마도 신이 임금을 위하는 정성이 천지를 감동시키기에는 부족하여 이러한 온갖 장애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진(秦)나라가 예(禮)를 버리고 공(功)을 숭상하자 노중련(魯仲連)은 동해(東海)로 가려 하였고,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인(仁)으로써 포악한 이를 쳤는데도 백이(伯夷)는 서산(西山)에서 주려 죽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이 왜적은 얼마나 추악한 놈들이며, 이 땅이 얼마나 동떨어진 곳이며, 우리나라 신민(臣民)들에게 어떠한 원수를 진 놈들입니까?
또한 신의 가계(家系)를 따진다면 국초(國初)에 순문사(巡問使)인 신(臣) 강회백(姜淮伯)으로부터 강석덕(姜碩德), 강희안(姜希顔), 강희맹(姜希孟)을 거쳐 강구손(姜龜孫), 강학손(姜鶴孫)에 이르기까지 할아버지, 아들, 손자, 형제 4세(世)가 공경(公卿) 장상(將相)이었고, 그 중에 일명(一命)도 받지 못한 사람은 단지 신의 조부와 신의 아비일 뿐입니다.
신의 종형(從兄)의 형제 40여인은 글을 한 줄도 모르지만 모두들 훈신(勳臣)의 후손이라 하여 화살을 지고 종군(從軍)하는 노역을 면제받았으니 이는 마치 울창한 숲과 무성한 풀이 백년 우로(雨露)에 젖은 것과 같았습니다.
신 또한 한남(漢南)의 포의(布衣)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직질(職秩)이 낮고 이력도 얕으나, 지난 갑오년 가을과 겨울에 외람하게도 은대(銀臺)4258)의 임시 낭관(郞官)으로 편전(便殿)에 입시한 적이 20회쯤 됩니다.
일월(日月)의 빛을 지척에서 대하자 온화한 말씀으로 저의 성명을 하문하셨습니다. 병신년 겨울에 또다시 상서랑(尙書郞)이 되어 이마에서 발뒤축까지 죄다 천지조화가 만물을 생장시키는 것과 같은 큰 혜택을 입었는데 티끌만큼도 보답하지 못하고 갑자기 머나먼 지역의 살모사와 물여우가 우글거리는 소굴에 빠졌으니, 하루를 구차히 사는 것이 만번 죽어도 그 죄를 용서받을 수없는 일입니다.
홍모(鴻毛)같은 목숨을 어찌 애석히 여길 겨를이 있겠으며 한 때의 고통을 견디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마는 돌이켜 생각하면, 일시에 명성을 감추고 저 깊숙한 계곡에서 아무도 모르게 목매어 죽는 사람처럼 하여 위로는 충절(忠節)을 굳건히 세워 국가에 보답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죽는 장소를 분명히 하여 영광스런 이름을 남기지 못한 채 회복하기를 도모한 자도 있었으니, 옛날 충신열사(烈士)로서 문천상(文天祥)과 주서(朱序)같은 사람도 모두 이 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전대(前代)의 사가(史家)들이 비난하지 않았을 뿐더러 절개를 온전히 했다고 인정해 준 것은 진실로 몸이야 사로잡혀 있지만 일찍이 사로잡히지 않은 어떤 것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은 고루하고 용렬하여 비록 옛사람에게 만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지만 충성을 다 바치려는 뜻만은 옛사람들에게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개미와 같은 하찮은 목숨이나마 한 가닥 숨이 붙어 있다면 견마(犬馬)의 정성은 만번 꺾여도 잘릴 수가 없습니다.
즉시 절의를 다 바치고 고국에 돌아가 왕부(王府)에서 형벌을 받아 몸뚱이가 두 동강이가 난다 해도 오히려 오랑캐에게 죽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더구나 추악한 놈들의 정상이 이미 신의 마음속에 들어 있으니, 만일 하늘이 편리한 기회를 주어 틈을 탈 수 있다면 마땅히 변변치 못한 이 몸이지만 삼군(三軍)이 나가는 길에 앞장서서 국가의 위령(威靈)에 힘입어 위로는 산릉(山陵)과 종사(宗社)의 치욕을 씻고 아래로는 진대(秦臺)와 연옥(燕獄)의 수치를 씻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이 잠 못 이루고 스스로 분발하면서 창자가 하루밤에 아홉 번씩이나 뒤틀리는 것입니다.
아, 멀리 다른 나라에 의탁하고 있는 것을 옛사람들도 비통하게 여겼다는 것은 말할 여지도 없는 것입니다.
이 생명이 살아있는 동안 한관(漢官)의 위의(威儀)를 다시 볼 수는 없더라도 살아서 대마도(對馬島)에 돌아가 부산(釜山)의 한 곳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아침에 갔다 저녁에 죽더라도 다시 일말의 여한이 없겠습니다.
이예주(伊豫州)에 있을 때 기록한 왜국의 실정과 적의 괴수가 죽은 뒤에 왜장(倭將)에게 올리려 했던 것을 아울러 기록하여 보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소신이 구차스럽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무상한 인물이라고 여기시어 아울러 신의 말까지 버리지 마시고, 겉으로 내보이기도 하고 속으로 감추기도 하며 우뢰가 치듯이 엄하게 하고 바람이 불듯이 혼란스럽게 하시며 때로는 이 글을 참작하시어 처리하신다면 적을 무찌르고 방어하는 데 어찌 조그마한 도움만 있겠습니까?”
註4257]제판(題判):백성이 올린 소장(訴狀)에 쓴 판결문 註4258]은대(銀臺):승정원의 별칭
○前刑曹佐郞臣姜沆, 齋沐百拜, 西向慟哭, 謹上言于主上殿下。 伏以, 臣在往年丁酉, 以分戶曹參判李光庭郞廳, 督運楊摠兵糧餉于湖南。 糧餉幾集, 而賊鋒已薄南原, 光庭亦向京師, 臣與巡察使從事官金尙寯, 傳檄列邑, 收召義兵, 思漢之聚者, 僅數百人, 而顧戀家屬, 旋卽解散。 臣不得已舟載父、妻子、兄弟, 遵西海, 以謀西上, 而篙士齟齬, 不能運船, 倘佯海曲, 猝遇賊船。 臣自度不得脫, 與家屬俱墜水中, 艤岸水淺, 盡爲奴倭所執, 惟臣父獨乘別船, 故得免同時俘殺。 分戶曹募粟空名告身數百通, 竝爲淪沒。 奉職無狀, 上辱朝廷, 益無所逃罪焉。 賊認臣爲士族也, 齊縛臣及兄弟於船樓徽纏, 所着手服盡裂, 越三年, 痕未磨滅。 賊遽回船, 至務安縣一海曲, 賊船彌滿數里許。 我國男女, 與倭幾相半, 船船號哭, 聲震海山。 至順天左水營, 賊將一人, 載臣及臣兄濬ㆍ渙、妻父金琫等及臣等家屬於一船, 押送于倭國。 到倭國, 南海道、伊豫道、大津城, 囚置我國被擄者, 無慮數千, 盡爲卒倭廝殺。 新來者, 晨夜啼哭, 曾來者, 或化爲倭, 歸計已絶。 臣以李顯忠挺身南走, 一事開誘, 莫有應者。 至翌年四月晦, 京師竹肆居人被擄於壬辰者, 自倭京逃至伊豫, 洞曉倭奴言語。 臣誘以西歸之意, 其人遂與定計。 以臣了不解倭語, 不帶舌人, 則寸步亦無以自致故也。 遂以五月二十五日, 自髡爲倭語, 乘夜西出, 妻子則紿棄於伊豫, 二兄則約會於豐後, 從臣者, 舌人及妻父金琫而已。 行三日, 潛憩于海上, 竹林中有一倭僧, 年可六十餘, 洗身瀑布, 假眠岩石。 舌人潛告臣等所以來之意, 僧哀嘆再三, 許以船濟臣于豐後, 此舌人橐中銀四錢償債。 臣等喜甚, 從僧下來, 十步之內, 忽逢値渡守者之部曲道兵者, 領卒倭遽至, 知臣之逋播也, 勒還于大津城。 自是之後, 防禁益嚴。 有金山出石寺僧好仁, 頗解文字, 見臣哀之, 禮貌有加。 因示臣以其國題判、方輿、職官, 諺錄無餘, 臣旋卽謄寫。 又聞倭僧日雲家, 有其國輿圖, 甚詳備, 因舌人換出, 復以目擊之形勢, 參我國廟算之得失, 而間以愚者之千慮, 竊議於其間。 嗚呼! 敗軍之將, 尙不得不以語勇。 況臣被擄, 偸生於賊窟中, 輒敢饒筆, 犯分論事, 極知僭越, 無所逃罪, 然竊伏惟念, 古之人有以尸諫, 臨死而不忘其君者。 苟有利於國家, 則亦不可以罪人而遂已也。 萬里鯨海之外, 九重獸闥之上, 或未洞燭此奴情狀。 前後使蓋之出入, 不但往還忽遽, 戒禁密嚴, 所得或未詳備, 被擄脫還之人, 又多氓隷之人, 菽粟不分者, 所聞見, 或未的實, 故玆敢冒陳。 倭僧題判中, 以倭諺書塡處, 臣卽以我國諺書謄注, 而蔚山人金福者自言: “都元帥權慄之家奴也, 癸巳秋被擄, 亦來伊豫州。 謀以重貨, 賃倭船西歸。” 故臣卽以所謄錄者, 付其人。 萬一得徹於睿鑑之下, 則扶桑一域, 雖在絶海之表, 而此奴肝膽, 照在八彩之前, 變詐百出之醜奴, 必以明見萬里爲神, 而防禦應接之際, 不無絲毫之裨補矣。 賊以其年八月初八日, 移臣置於(大坂城)〔大阪城〕, 船行幾滿月, 始至(大坂)〔大阪〕。 坂者, 倭之西京也。 居數日, 又移臣置于伏見。 伏見者, 倭之新京也。 賊魁旣死, 賊路情狀, 與前日每異。 臣竊恐我朝之注措、改守, 或(共)〔供〕機會。 因與被虜士人之在倭京者東萊金禹鼎、河東鄭昌世ㆍ姜天樞、晋州姜士後、尼山宋廷秀等, 謀取朝夕米, 各貿銀一錢, 因擇舌人之洞曉言語, 莫能辨異國人者, 資其路費船價, 使達于疆域之表, 書未發而群倭已撤還矣。 臣百計謀還, 手無一錢, 不得已傭倭書, 得白銀五十餘錢, 潛買倭船, 陰結壯士十餘人, 與東萊金禹鼎等, 共謀西歸。 臣兄濬, 率篙卒、舌人, 以今年三月十二日, 先往船所, 臣與兄渙、妻父金琫及禹鼎等, 未起身時, 水邊之人, 潛告守倭家, 倭奴發卒搜捕, 囚繫二十日, 久乃得解。 舌人二名斬死。 嗚呼! 計窮矣, 技竭矣, 千里萬計, 竝落虛空矣。 豈臣之區區向日之誠, 不足以感動天地, 有此萬端阻礙耶? 嗚呼! 嬴秦棄禮而上功, 仲連欲蹈東海; 武王以仁而伐暴, 伯夷猶餓西山。 況倭何等醜奴, 此地何等絶域, 於我國臣民, 何等讎虜也? 況臣之家世, 自國初以來, 巡問使臣淮伯以下, 越若碩德希顔、希孟, 以及龜孫、鶴孫, 祖、子、孫、兄弟四世, 公卿將相, 其不受一命者, 只臣祖、臣父耳。 臣之從兄昆弟四十餘人, 不識一行書者, 咸以勳臣苗裔, 得免負羽從軍之役, 茂林豐草, 雨露百年。 臣又以漢南布衣, 冒忝科第, 職秩雖下, 履歷雖淺, 而往年甲午秋冬, 猥以銀臺假郞, 入侍便殿者, 幾二十數。 日月之光, 近臨咫尺, 天語溫溫, 降問姓名。 丙申冬, 又忝尙書郞, 自頂至踵, 盡歸造化, 生成大澤, 未報塵垢, 而遽陷於絶域之外, 虺蜮之穴, 一日偸生, 萬死無赦。 鴻毛之命, 豈暇顧惜, 片時之痛, 非不堪耐, 而顧念一時滅名, 有同溝瀆之自經。 上之不能建忠立節, 報補國家, 下之不能明處死, 以留榮名而圖復者, 在昔忠臣烈士之如文天祥、朱序者, 俱不得免。 前史不以爲非, 而予其全節者, 良以身雖被擄, 而所未嘗被擄者猶在也。 臣之陋劣, 雖下古人萬分, 而願忠之志, 不讓古人。 一脈螻蟻之命, 一息尙存, 則犬馬之誠, 萬折不已。 卽當竭節圖還, 就顯戮於王府之下, 縱令身首異處, 猶勝死葬蠻夷。 況醜奴情狀, 已落臣堵中, 萬一天假其便, 釁有可乘, 則卽當以不費之身, 首三軍之路, 憑國家之威靈, 上雪山陵、宗社之辱, 下灑秦臺、燕獄之恥。 此臣之所以耿耿自奮, 腸一夜而九回也。 嗚呼! 遠托異國, 古人所悲, 在歇後語也。 此生餘年, 不敢望復覩漢官威儀, 而生還對馬島, 望釜山一抹, 而朝以至夕以死, 更無絲髮餘憾矣。 其在伊豫時, 所錄倭情及賊魁斃後擬上倭將, 竝錄如左。 伏願殿下, 勿以小臣之偸活無狀, 而竝錄臣言, 陽開陰闔, 雷厲風亂, 間以此書從事, 則於折衝禦侮之際, 豈曰小補之哉? 云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