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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100회. '천 년 전의 벤처기업 장보고의 성공비결' (2001.01.27.)
100회 : 천 년 전의 벤처기업 장보고의 성공비결
천 년 전의 벤처기업
장보고의 성공비결
방송일: 20010127 조회수 : 3352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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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셜 천년전의 벤처 해상왕 장보고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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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적산서원(8초) -3초보고
일본 교토에 남아있는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적산선원.
적산대명신(4초) 일본 천태종의 시조를 모신 곳이다.
활(4초) 그곳엔 활을 든 한 신라인이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영정(6초) 사람들은 그를 장보고라 부른다.
법화원 전경 pan (11초) 장보고의 영정은 중국 산둥반도 롱청시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이곳의 옛 이름은 적산법화원.
영정(3초) 9세기.
발-얼굴로(14초) 이 법화원을 중심으로 일어나 동아시아 일대를 호령했던 장보고를 중국인들은 이런 모습
으로 남겨두었다.
완도 항공(5초) 그리고, 완도 청해진에 까지.
영정 줌인(13초) 천년이 넘도록 장보고의 이름은 삼국에 살아있다.
해상왕 장보고.
그의 위력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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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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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IO 1.(오프닝)
#스튜디오에 장보고 영정 펼쳐지고
장보고. 그의 이름앞에는 반드시 따라 다니는 몇가지 수식어가 있습니다.
청해진 대사, 혹은 해상왕, 무역왕 이란 이름들입니다.
장보고는 9세기 중국 당나라와 일본, 신라를 상대로 국제무역을 주도하며 해상을 장악한 인물입니다.
그때문인지 장보고는 삼국의 정사에 모두 그 이름이 기록돼있습니다.
#삼국사기
우리 고대사를 다룬 삼국사기는 청해진의 설치에서 장보고의 죽음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신당서
당나라의 역사서 신당서에는 장보고의 이름과 함께 그의 중국에서의 활동이 나오구요.
#속일본후기
그리고 일본의 정사인 속일본후기.
9세기 민간인으론 유일하게 일본에까지 와서 정식 무역활동을 벌인 장보고의 자취가 기록돼 있습니다.
이런 기록들만을 놓고 보더라도 장보고는 분명 우리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범국제적인 인물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장보고는 어떻게 해서 이런 무역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일까요.
오늘 역사스페셜은 그 100회를 맞이해 해상왕 장보고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역사스페셜은 그동안 가상 스튜디오를 이용해 우리 역사상 감춰졌던 진실, 우리가 외면했던 역사들,
혹은 제대로 알지 못했던 숱한 이야기들을 전달해왔습니다.
역사는 과거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바로 현재까지도 유용한 교훈을 남겨주기 때문입니다.
100회를 맞아 특별히 9세기의 해상왕 장보고를 돌아보는 것도 그런 점에서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입니다.
828년, 장보고는 당시 신라에선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특별한 제안을 합니다.
바로 서남해안 작은 섬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많고 많은 섬중에서 왜 완도였을까.요
청해진을 설치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었을까.요
우선, 장보고가 설치한 청해진으로 먼저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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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완도 항공(15초) 청해진이 세워진 곳은 지금의 완도 일대.
서남해안에 위치한 완도는 지금도 물길이 복잡한 지역으로 알려져있다.
섬-바다 달리고-파도(12초) 주변에 크고 작은 섬들이 있고, 암초가 많아 물길을 모르면 항해가 어려울 지경
이다. 그러나 물길을 아는 사람에겐 천혜의 요새가 된다.
배 안에서 지도보며 현장오디오/
고금도 약산도 신지도가 자연방파제 구실을 해주고 있다. (10초)
완도 주변 길목 (9초) 더욱이 이곳은 중국으로 가는 배와 일본으로 향하는 배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다.
현장오디오/김정호 전라남도 문화재 위원
동쪽으로 가면 일본, 반대쪽 달도 물목지나 서해안으로, 북쪽으로 가면 강진일대 사통팔달한 중심적 위치 (23초)
바다-그래픽/지도(13초) 일본으로 가는 길목.
바로 이것이 장보고가 산둥반도와 경기만을 잇는 최단거리 항로대신 완도,즉 청해진을 택한 이유였다.
장도 항공 줌인(14초) 현재 장보고 유적이 가장 많이 발굴된 곳은 완도 앞 장도라는 작은 섬이다.
걸어가고(4초) 장도 주변 해안가에는 잘려진 나무 밑둥 200여개가
원목(4초) 줄지어 박혀있다.
자로 재보고(4초) 지름 10센티미터. 현재 남은 높이는 30센티미터 내외.
서서 대화하고(11초) 하지만 전문가들은 실제 높이가 1미터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원목과 장보고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
현장인터뷰/최근영 한국사학회 회장
이쪽 산성 땅의 유실을 막기 위한 방편의 일환.
이 시설물을 이용해서 당시 여기 부두에 접안되는 화물들을 운반하는데도 활용할 수 있는 구조물로 쓰지
않았겠느냐 (25초)
그래픽/부두 시설 복원(16초) 해안가의 원목을 복원해보면 바로 이런 모습이다.
그것은 수십척의 배가 드나들었을 청해진의 해안가, 부두시설이었다.
청해진 성 항공-성벽(9초) 장도에선 섬 전체를 둘러싼 토성도 발굴되었다. 둘레가 758미터.
성벽(4초) 89년부터 발굴중인 이 성은 걸어서 돌아보고(7초) 3개의 치와 토성 가운데 높은 고대,
즉 관측소까지 갖추고 있다. 바다의 상황을 관측하고
성벽(5초) 배의 움직임을 점검하는 초소와 같은 시설이다.
현장오디오/ 윤근일 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
여기에서 보면 북쪽이라든가 남쪽이라든가 서쪽이라든가 동쪽이라든가 여기서 다
소위 관측하는 위치가 되는 것이다. 성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서 관측하는 것이다. (14초)
발굴된 성 내부(4초)
주줏돌 자리(11초) 성안으로 들어서면 곳곳에 건물을 세웠던 주춧돌 자리를 확인할 수 있다.
성을 지키던 군사시설이었을까.
기와 파편들(9초) 그러나 토성에서 발굴된 수많은 기와 파편들은 이 건물들이 일반적인 군사시설은 아니었
음을 짐작케
파편손으로 들어보고(3초) 한다.
발굴된 기와들(7초) 발굴된 기와의 문양들이 당시 경주의 귀족들이 사용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성 내부(3초) 따라서 대단히 중요한 건물이었음이 분명하다.
우물(5초) 지난해 발굴팀은 우물도 찾아냈다.
사람들 쳐다보고(4초) 물이 귀한 섬에서 이만한 크기의 우물이라면
우물 줌인(10초) 2,300명은 거뜬히 생활할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토성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래픽/보대(8초)
정문-안으로(13초) 현재까지의 발굴결과를 토대로 장도의 토성을 복원해보았다.
성벽에는 주변상황을 관측할 치와 고대가
치(5초) 마련돼 있었고,군사시설이 들어섰다.
사당으로(11초) 성 내부에는 제사를 지내는 사당도 세워졌다.
항해에 나선 배들의 무사귀환을 비는 제사가 이곳에서 거행됐을 것이다.
기둥-건물 서고(15초) -기둥 서는 것 보다가 또한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나 볼수 있던 화려하고 거대한 건물도
들어섰다. 삼국으로 퍼져나갈 청해진의 국제무역 업무가 바로 이곳에서 이뤄졌을 것이다.
줌아웃 장도(8초) 장도의 토성은 천혜의 입지조건을 바탕으로 굳건하게 건설된 해상왕 장보고의 전초기지였다.
항공-장도(7초) 장보고의 유적은 비단 장도에만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마을(4초) 장도와 인접한 완도 장좌리, 대야리 일대.
장터자리(10초) 이곳에는 장터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읍터도 아니고, 완도 중심부도 아닌 해안가에 웬 장터일까.
지도 줌인-장터(12초) 그러나 지도에 실릴 정도로 장터는 오래된 지명이다.
향토 사학자들은 이곳이 바로 장보고 당시 상인들이 몰려들었던 곳으로 보고 있다.
찾아보고(3초)
수풀사이로(5초) 이곳을 장보고의 유적지로 보는 또다른 이유는
돌쩌구 보고(5초) 장터 곳곳에서 발견되는 기와와 건물 흔적들 때문이다.
돌쩌구(6초) 장터에 세워진 건물.그렇다면 그것은 상인들이 머물던 객관임이 분명하다.
현장오디오/김희문 완도문화원장
문설주였다면 굉장히 큰 것이었을 듯 (16초)
차 달리고(5초) 장좌리 옆의 죽청리에서도 장보고 유적을 찾아볼수 있다.
해-미역공장(8초) -3초보고
이곳은 오래전부터 감옥이 있던 자리, 즉 옥터였다.
설명하고(7초) 완도 사람들은 이것을 장보고의 군사시설이라 부르고 있다.
현장오디오/김희문 완도문화원장
옥터가 지금 같으면 형무소. 해적 잡아다가 가둬두는 곳이라고 구전(13초)
장도 앞 한들(5초) 또한 죽청리 해안가엔 넓은 들판, 한들이라
논-토성(10초) 불리는 곳이 있다.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연병장으로 쓰기에 충분한 곳이다.
토성 돌아보고(7초) 이곳엔 토성의 일부가 확인됐다. 그렇다면 죽청리에도 성이 있었던 것일까.
회의(4초) 현재 확인된 유적만으론 청해진의 규모와 정확한 시설을
사람들(7초) 파악하기 힘든 상태다. 따라서 학계 전문가들과 함께 당시 상황을 추정해보기로 했다.
복원도(11초) 전문가들은 장도와 장좌리 죽청리 일대 모두를 청해진으로 보고 복원도를 완성했다.
그래픽/객관(8초)
마을(3초) 장좌리 장터 일대에는 상인들을 위한 객관이 마련됐고,
영빈관(4초) 귀한 손님을 위한 영빈관 또한 자리잡았다.
부두(5초) 당나라와 일본, 신라의 배들이 드나들던 청해진.
본영-큰 건물 서고(20초) -5초보고
이곳엔 국제 무역을 위한 상담과 물품 구입이 이뤄지는 거대한 무역센타가 세워졌다.
청해진 줌아웃(8초) -잠시 보다가 이 무역센터나 군영은 여러 부속건물이 포함된 웅장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장도-주변 완도까지(20초) 다양하고 편리한 시설에다 안전한 보호 장치까지.
9세기 사람들과 무역선이 모여들던 이곳은 당대 최고의 국제무역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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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IO 2.
#청해진 복원 그래픽 스튜디오에 펼쳐지고
각국의 무역사절이 묵을 수 있는 영빈관에서, 많은 일반 상인들을 위한 객관까지.
수많은 배들이 안전하게 접안할 수 있는 시설은 물론이고, 이들의 안전항해를 보장하는 군사시설등 작은 섬
완도에 이토록 대규모 국제적인 시설을 갖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장보고는 처음부터 당나라와 신라, 그리고 일본을 연결하는 동아시아 전역의 국제무역을 염두에 두었던
것입니다.
#<청해진 대사> 글씨 뜨고
이때 장보고에게 주어진 직위는 <청해진 대사>였습니다.
신라 흥덕왕은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에 임명함으로 완도에서의 그의 활동을 인정해주었습니다.
신라로부터 독립적인 특별한 지위를 확보한 장보고.
청해진을 설치한 뒤 그의 무역활동은 본격적으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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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항공(7초) -3초보고
차달리고(5초) 동아시아 삼국을 상대로 무역을 했던 장보고는 과연 어떤 물건들을 취급했을까.
정창원(9초) 일본 나라시에 있는 정창원.
이곳은 고대 일본 천황의 애장품 3천여점이 보관돼있는 곳이다.
관계자와 대화(5초) 특별히 이곳에는 장보고가 활동하기 100여년전,
서류-매신라물해(15초) 8세기의 신라와의 교역상황을 알수 있는 문서도 있다.
당시 일본 관품 5위 이상의 귀족들은 물품들을 구입하기 위해 이런 신청서류들을 신라에 보냈던 것이다.
인터뷰/오가타 정창원 보존정리실장
일본 귀족들이 신라제품을 일상생활에서 사용한 이유는 그만한 품질의 물건을 당시 일본이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17초)
옷감 견본책 펼쳐보이고(14초) 이 책은 8세기, 신라가 자체 생산 가능한 옷감의 샘플을 모아 보낸 견본책이다.
당시 신라의 비단은 일본 귀족들의 인기상품이었음을 알수 있다.
유리(3초)
보석함(4초) 이뿐만이 아니다.신라는 당나라 제품들, 즉 구슬(4초) 각종 보석과 그릇, 자기들을 들여와 일본에
파는 중계
그릇(3초) 무역을 벌이기도 했다.
붓-계심(8초) 그러나 9세기에 들어서면 이런 사정은 달라진다.
인터뷰/하까다 교수
8세기 후반 신라와 일본간에는 국가간의 공적관계가 매우 약해져서 해안을 중심으로 신라 상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등장한 것이 9세기 중반 장보고의 청해진이다.
청해진은 해상질서를 바로잡아 동아시사 삼각무역을 재구축하는 역할을 했다. (38초)
바다-시내보이고(8초) 국교가 단절된 상태에서 장보고의 무역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발굴현장 걸어가고(3초)
현장-토기 파편들(7초) 9세기 외국 사신들을 접대하던 영빈관 코오로칸이 있었던 곳이다.
관계자 손으로 가리키고(9초) 지금도 발굴현장에는 곳곳에서 자기 파편들이 발견되고 있다.
현재까지 총 80만점이 나왔다.
기와(4초)
내부-도자기 보고(5초) 일본 학계에선 이 자기들을 장보고가 가져왔다고 보고 있다.
신라자기-도자기(4초)
전시장(4초) 그 시대,
삼채문양-당나라(6초) 신라자기는 물론, 당대 최고의 교역품이었던 당나라 자기를 일본까지 가져올 사람은
도자기(3초) 장보고뿐이라는 것이다.
인터뷰/이케자키 후쿠오카시 코오로칸 발굴과장
장보고 등이 최초로 홍려관에 와서 장사를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곳은 중국이나 신라 도자기가 많이 유입됐지만 장보고 등이 당나라에 신라방을 만들어서 그 부근에서
중계무역을 하다가 제일 먼저 이곳에 중국 도자기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34초)
기록/속일본후기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기록이 일본의 정사인 장보고 무역허용 속일본후기에 남아있다.
국가간의 무역이 금지돼있는 상태인데도 일본정부는 유독 장보고만은 허락해주었던 것이다.
기록/속일본후기 일본 당국의 장보고에 대한 신뢰는 무척 대단해서
상품대금을 미리주고 교역 장보고는 일본을 상대로 신용거래까지 했다.
인터뷰/김성훈 교수 중앙대 산업경제학과
상거래가 이익된다는 확신있었던 듯. 당나라 페르시아 신라 일본 정부에 이익된다는 생각에 그러한 특전이
부여된 것 아니냐 (21초)
전시유물 돌아보고(3초) 일본으로선 당대 최고 물품을 가져다주는 장보고를
이슬람 도자기 (5초)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도자기(4초) 그렇다면 코오로칸에서 발굴된 이슬람 자기 역시
파편(3초) 장보고가 가져온 것이었을까.
지도/9세기 동아시아 교역상황(14초) 9세기는 바야흐로 동양과 서양의 교역이 본격화되던 시기다.
실크로드를 따라 온 이슬람 상인들은 장안까지.
바다를 건너온 상인들은 중국 남부 양주에 도착해 있었다.
항공(5초)
차 달리고(4초) 장강 하류에 위치한 양저우 즉 .양주는
자전거(7초) 양주 천하제일이란 뜻의 <양일>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로 풍요로움과 문화적 다양성을 누리던
곳이다.
이슬람 사원(3초)
아랍어 간판(3초) 9세기 이전부터 이슬람상인들이 몰려들던 이곳엔
무덤 설명하고(6초) 지금도 오래된 이슬람인들의 무덤이 남아있다.
무덤(3초)
도자기 파편(13초) 그러나 이슬람 상인들은 양주가 최종 기착지였다.
이들은 여기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그때 이들이 가져온 서역물품을 그림 도자기로 (5초) 신라와 일본에 까지 전달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인터뷰/윤명철 교수 동국대 사학과
서역을 통해 당나라에까지 온 많은 물품. 신라나 일본에 팔고, 신라나 일본의 물품 당나라,
서역에 팔고...여기서 생기는 막대한 무역이익. 이것이 재당신라인 본국신라인을 조직화해낸
장보고 선단이 없었다면 불가능 (29초)
기록/삼국사기 (17초) 장보고가 이슬람 물품을 취급했음은 삼국사기를 통해서도 외래품 사용 금지 알수 있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뒤인 834년.
신라 흥덕왕은 호화로운 외래품의 사용을 금하는 교서를 내린다.
공작미, 비취모...(12초) 이 외래품이란 것은 그 산지와 종류가 무척 다양하다.
멀리 인도네시아산 공작의 털이나 캄보디아산 비취새의 털로 만든 목도리.
슬슬 자단 침향....(12초) 러시아 아랄해 동쪽이 산지인 보석 슬슬에다 향기나는 나무 침향과 자단도 금지품목에
들어갔다.
물품들(5초)
보석(4초) 당시는 국가의 엄격한 관리에 의해 무역이 행해지던
약상자(8초) 조공무역의 시대. 그런데 이렇듯 금지령을 내릴 정도로
약재-악기(4초) 외래품이 쏟아져 들어온 것은 장보고때문이었다.
그는 국가의 제약을 받지 않는 최초의 자유무역인이었던 것이다.
인터뷰/김문경
무역을 하는 장소가 많이 넓혀지고 장소가 넓혀졌다는 것은 무역의 양이 늘어나고 교류가 아주 활발해졌다는
애기다. 그러므로 이러한 조공무역의 패턴을 무너뜨리고 일반무역을
활성화시키는데 큰 공헌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26초)
초주의 운하변(25초) 장보고는 당나라나 일본은 물론 신라에서조차 국가 조직과 별도로 움직이던 독립무역
선단이었다.
이 장보고의 등장으로 동아시아 삼국의 무역은 이전과 전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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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IO 3.
물건값을 미리 주고서라도 장보고의 물건을 사고자 했던 일본 사람들.
또한 신라의 귀족들은 장보고 선단이 가져다주는 이국의 화려한 물품들을 앞다투어 구입하고자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물건이 꼭 필요하고, 또 좋으면 돈이 얼마가 되든지 구입하게 되는데요.
9세기 그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소비자들의 요구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
장보고를 뛰어난 무역왕이라 부르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이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최근들어 단순히 무역인으로서가 아닌 장보고의 새로운 면모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습니다.
#완도에서 발굴한 월주요 해무리굽 자기 파편
이것은 완도에서 발굴된 9세기 중국 월주요의 자기 파편입니다.
자기 아랫부분 굽 모양이 이렇게 둥글다고 해서 일명 해무리굽이라고 불리는 당대 최고의 자기입니다.
#파편- 세 가지 모양으로 변하고
당시 부르는 게 값이었던 이 월주요 자기는 장보고 무역선단의 중요한 교역품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장보고는 이 자기를 당나라에서 구입해 신라와 일본에 파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생산하는 데까지
개입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좀더 높은 이윤을 위해 직접 생산에 관여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이 과연 사실인지, 삼국의 무역현장에서 확인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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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배 달리고(7초) -3초보고
중국 닝보우 즉 영파시 서북쪽에 위치한 상림호.
배 내리고-가마터로(5초) 이곳은 당나라때 유명한 자기 생산지중 하나였다.
파편 주워보고(4초) 지금도 그때 자기를 찾아보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현장오디오/임사민 닝보시 문물고고학 연구소 교수
그건 당대 자기가 아니다. 바로 여기있다. 이것이다.
이것이 가장 대표적인 해무리굽 자기다.
한국에서 만든 것 해무리굽이 이것보다 작다. 이것이 당나라 자기다.
자기파편 2개 보고(9초) 상림호 일대에서 생산된 월주자기는 아랫쪽에 둥근 원형의 굽이 있는 청자로 9세기
최고의 교역품이었다.
가마터(5초) 상림호 주변 60여기에 달하는 대형 가마터가 당시
갑발(3초) 월주요의 생산량을 짐작케 한다.
전시된 자기(4초)
자기 자세히 pan(11초) 신라와 일본은 물론, 이슬람상인들까지 탐내던 물품이었지만 당나라외에는 만들 수
없었던 자기.
주발(6초)-술병(3초) 자기는 당나라의 독점생산 품목이었던 것이다.
삼국 자기 비교(20초) 이 월주요 자기는 동아시아 삼국의 무역현장에서 모두 발굴 되고 있다.
일본의 대외무역창구 코오로칸에서도 월주요 자기가 나왔다.
장도에서 발굴된 자기 역시 월주요 청자 파편이었다. 장보고가 가져온 것이다.
인터뷰/임사민
장보고가 중국에서 완도로 도자기를 가져다 교역을 했음을 의미한다. 장보고가 가져간 자기를 연구한 결과
이 제품들이 중국 상림호의 자기란 것을 알게됐다.
이 제품들은 중국 명주에서 운반된 것이다. (21초)
당성(4초)
나성지(3초) 그런데 최근 중국 양저우 즉 양주시 일대에서 주목할만한
사진-신라자기 발굴(17초) 발굴이 진행됐다.
당나라 나성을 발굴하던 중 신라자기가 함께 출토된 것이다.
그 기형은 해무리굽으로 월주요를 닮아있지만 안료와 유약에서 차이를 보이는 신라자기였다.
인터뷰/주강 교수 양주 대학교 고고학과 (25초)
중국 양저우 지방에서 신라 청자가 발견됐다. 출토된 지점도 한 곳이 아니라 여러곳이다.
한국에서도 이 일에 관심을 갖고 발굴을 시작해 양주외 다른 곳에서도 신라청자를 발굴해냈다.
완도-항공-강진 pan (13초) 당나라 성터에서 발굴된 신라청자.
최근 이 자기는 장보고 선단의 관리아래 청해진 주변에서 생산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차 달리고(3초)
산속(3초)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완도 옆 강진의
가마터 뒤지고(8초) 수많은 자기터들이다.
강진가마는 9세기에 자기의 전단계인 도기 생산지로 알려진 곳이다.
현장오디오 살리고 (8초)
다른 곳 뒤지고(3초) 그런데 이 가마터 곳곳에서
파편 보고(5초) 중국 월주요 해무리굽 자기를 닮은 자기 파편들이
파편 자세히(8초) 발견된다. 해무리굽 자기가 이곳에서 생산됐다는 증거들이다.
해남 호수가 달리고(4초) 완도 주변의 자기 생산지로는 해남도 손꼽히고 있다.
산속 뒤지고(3초)
땅속 파편 들고(8초) 무려 60여개가 넘는 대형 가마터에서 쉽사리 발견되는 이 파편들 또한 해무리굽이다.
변갑주(6초) 그렇다면 해남과 강진의 자기 파편과 월주요는 얼마나 닮아있는 것일까.
자기 파편 2개 들고(6초) 겉모습만으로는 거의 구분이 불가능하다.
포개 구운것(4초) 굽는 방식까지 같아서 포개구운 흔적이 남아있는 것도 있다.
2개 보는 피디와 변씨(5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수 있었을까.
인터뷰/변갑주 목포대학 도자기 연구 박사과정
중국에서 만드는 방법이 직접 유입됐다는 증거.
기형이나 굽는 방법 기술자 직접 오거나 배워오기 전에는 여기에서 일어났다고 가정하는 것이 불가능 (26초)
해남자기 pan 월주요 파편(10초) 그렇다면 왜 해남과 강진의 가마가 생산지로 선택됐던 것일까.
월주요의 해무리굽 자기는
월주요 파편 자세히(15초) 9세기 중반부터 생산량이 줄어 10세기가 되면 완전히 사라진다.
따라서 해남과 강진의 자기 역시 9세기에 생산된 것으로 볼수 있다. 그때는 바로 장보고의 활동시기였다.
인터뷰/정양모
장보고 무역왕. 이 시기 청자의 수요 많이 늘어.
절강성에서 수입해 일본과 신라로, 거기에 그치지 않고 직접 만들면 수지 타산이 맞는다
판단했을 것. 장도 지나 해남 월주요 장인 데려다가 직접 만들어서 퍼진 거죠 (44초)
그래픽/지도 해남과 강진은 완도 청해진에서 뱃길로 바로 연결되는
장도-해남-강진(15초) 지역이다. 장보고는 이 배후도시에서 당대 최고의 교역품
자기의 직접생산을 시도했던 것이다.
인터뷰/정양모
월주청자 영향받아 신라말 고려초 취향따라 바꿔어서 차차 발전해서 비색 청자까지 만들고 기형도 고려적인
것으로 변해, 문양도 변해...상감청자로 (24초)
고려청자들 (30초) 강진 일대의 가마는 우리 고려청자의 초기 생산지로 알려진 곳이다.
이 청자기술을 바탕으로 화려한 고려청자가 탄생한다.
단순히 무역을 하는데 그치지 않고 부가가치가 높은 교역품은 직접 생산해보겠다는 장보고의 시도가 결국
고려청자를 탄생시킨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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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IO 4.
#청해진 복원도 펼쳐지고-부두시설 앞에서
해상왕 장보고의 두 번째 성공비결은 바로 이것입니다.
월주요를 당나라에서 가져다 신라와 일본에 파는 것보다 청해진에서 만들면 더욱 싸게 공급할 수 있다고
판단한 장보고는 도공과 원료를 수입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신라자기는 당나라와 일본에 역수출됩니다.
경제인으로서, 장보고의 그 철저한 마인드는 위대한 문화유산인 고려청자를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좀더 구체적으로 장보고의 무역을 가능케 했던 그 힘의 비밀들을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량의 자기를 생산하고 운반하려면 우선 대단위 인력이 필요하고 운반 시스템 또한 정교하고 대규모여야
합니다.
신라와 일본에서 주문은 쏟아지는데, 당나라 어느 지역에서 물품이 생산되고 있는지 정보 수집도 빨라야 할
것입니다.
무역 거점은 청해진.
당시는 휴대폰도 팩스도 비행기도 없는 9세기.
장보고 선단의 무역활동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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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교토 전경(5초)
차달리고(4초) 장보고 선단의 무역활동을 짐작케 하는 책이
박물관 전경(3초) 일본 교토 국립박물관에 보관돼있다.
엔닌일기 풀고 (5초) 일본 천태종의 시조 엔닌대사가 당나라를
책 펼치고(3초) 여행하며 쓴 일기, <입당구법순례행기>가 바로 그 책이다.
엔닌일기 pan(11초) 엔닌이 당나라 여행을 하던 시기는 바로 장보고가 활동하던 시기.
따라서 이 책은 장보고 당대의 기록이다.
책 내용-장보고 줌인(16초) 순례도중 목격한 장보고 선단의 활동에 관련된 내용이 20%이상을 차지한다.
엔닌의 구법순례 여행을 가능케 해준 사람이 바로 장보고였던 것이다.
엔닌 영정(11초) 엔닌이 당나라로 가는 배에 오른 것은 838년. 청해진이 설치된 지 10년이 지난 때였다.
험한 바닷길(11초) 출발하면서부터 엔닌은 장보고의 도움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장관급에 해당하는 일본 태수의 추천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항구 pan(10초) 그러나 그의 여행은 시작부터 순탄치 못했다.
당나라의 여행허가를 받지 못해 도착하자마자 귀국선을 구해야했다.
배들(18초) 그때 엔닌 일행에게 일본으로 가는 9척의 배와 60명의 훈련된 선원을 구해준 것은 추저우 즉
초주의 신라인 집단. 바로 장보고 선단이었다.
인터뷰/최재서 교수 한국 해양대학 9척의 선박을 동원했다는 능력은 대단한 것.
지금도 부산에서 대양항해가 가능한 배 9척을 당장 구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33초)
항구-정박된 배 pan(12초) 우수한 성능의 배와 잘 훈련된 선원을 언제든 동원할 수 있었던 장보고 선단.
그렇다면 무역에 있어 기본요소는 갖춘 셈이다.
국수(4초)
사람들(7초) 그 장보고 선단의 도움으로 귀국선편은 마련했으나 엔닌은 그대로 순례여행을 접을 수는 없었다.
기록/장보고가 난을 일으켰다 (29초) 망설이던 그에게 하나의 정보가 입수된다.
첫 번째 정보는 장보고가 난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18일 후 두 번째 정보가 전해진다. 장보고의 난이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 정보가 입수된 지 4일.
이번엔 당나라가 신라로 보내는 공식 사절단이 이미 떠났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작은 배(7초) 그 소식을 전해준 것은 작은 배를 타고 온 소촌포의 한 신라인.
길게 떠가는 배(13초) 당나라를 여행하는 외국인인 엔닌이 신라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이토록 빠르고
정확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배 pan 피디와 사람들(7초) 지금도 중국의 항구도시 양주에는 배를 타고 다니며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현장오디오/ 피디와 어민들 (33초) 그들의 정보 전달 수단은 자연 휴대폰. 핸드폰 꺼내고...
인터뷰/첸윈 해파리 상인
정보를 얻기 위해 전화를 걸어 상황 파악을 한다. 가고자 했던 곳의 상황이 안좋으면 즉각 다른 쪽으로 목표를
옮긴다. 상황이 좋으면 양주로 그렇지 않으면 젠장으로 이런 식이다.
지나는 배를 통해 서로서로 정보를 주고 받기도 한다.
부두가 전경(7초) 통신기기가 없던 9세기.
운하는 물산이 운송되는 물류창고이자 정보가 모여들고,
배 내부(5초) 전달되는 유일한 장소였다.
강가 (5초) 이를 파악한 장보고 선단은 운하 주변에 정보를 수집하고
떠가는 배(4초) 분석해 이를 활용하는 정보기지를 구축해냈던 것이다.
인터뷰/김문경
당시 신라사람들 조직화되어있었다. 운하 다니던 상인, 운송되어지는 상품 파는 상인모두 조직화.
따라서 값과 물건 생산 정보 정확히 알고 있어..정보 교환이뤄져..
이 정보교환 바탕으로 교역 적극적으로 이뤄져 (51초)
산(6초)
산길 이미지(16초) 장보고 선단의 위력을 확인한 엔닌의 구법여행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그 여행은 당나라의 수도 장안과 천태산에까지 이르며 9년간 계속된다.
시장(14초) 일본을 떠나온 지 4년이 지난 842년.
엔닌은 수도 장안에서 초주 장보고 선단을 통해 일본에서 송금된 돈을 받는다. 금융업무까지도 이뤄졌던 것이다.
인터뷰/최재서
그것이 엔닌이 장안에 있으면서 계속 구법여행을 하고 있을 때다. 장안에 있는 일본...
하카다까지 상당한 거리이고, 거기서 황해를 건너 초주에 가서 초주에서 다시 장안까지 가는 이런 정보
네트워크를 통해서 송금이 이뤄졌다는 것은 어느 정도 상당한 수준의 신뢰성이 없으면 거의 불가능한 것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본다. (35초)
떠가는 배 줌아웃(19초) 847년 모든 일정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엔닌은 끝까지 장보고 선단의 도움을 받는다.
-자막 보고
배(10초) 엔닌일기에는 그가 귀국선을 마련한 과정이 자세히 기록돼있다.
그래픽/지도 등주에 도착한 엔닌은 명주에 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명주의 배(7초) 급히 명주로 향했으나 곧 그 배는 취소됐다.
노산의 배(8초) 그러자 이번엔 명주보다 가까운 노산에 배가 있다는 정보가 전달된다.
길게 떠가는 배(25초) 등주에서 명주까지는 자동차로 달려도 일주일 거리.
그러나 장보고 선단은 9세기에 이미 현대와도 같은 빠른 정보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장보고 선단은 선박과 인력은 물론 정보와 금융까지도 장악한 일종의 종합상사와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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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IO 5.
#서재에서
등주와 명주 사이는 3천리길.
걸어서 가자면 사오개월은 족히 걸리는 거리인데요. 어떻게 불과 며칠 사이에 정확하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었는 지 놀랍기만 합니다.
장보고 선단의 위력은 지금의 우리는 짐작도 할수 없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 엄청난 활동을 가능케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서가에서 엔닌일기 뽑아들고
엔닌일기에는 정보를 가져온 신라인은 작은 배를 타고왔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산둥반도에서 해안을 따라 초주 양주 영파지역까지 넓게 퍼져살던 신라인들이 작은 배를 타고 다니며
장보고의 정보망이 되어주었던 것입니다.
#분위기 바꿔주고
당시 당나라에 건너와 있던 신라인들은 그 규모면에서 상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기록/삼국사기...170명 기근을 피해 당나라로
기록에 의하면 당시 8세기 말에서 9세기에 이르는 동안 극심한 가뭄과 기근,
그리고 신라 사회의 골품제도를 견디지 못한 숱한 신라인들이 당나라행 배에 올랐다고 합니다.
장보고가 활약하던 시기, 이 재당신라인들은 중국내에서 탄탄한 지위와 힘을 확보해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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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차 달리고(3초)
지도 보고-차 내부(6초) 중국 역사책인 가경적성지에는 황해 연안 도시 황암에
거리 걷고(4초) 신라인 집단거주지가 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곳은 백수항이라 불렸다고 한다.
현장오디오/피디와 중국인들 (8초)
백수항을 아십니까
표지-백수항(8초) 황예 즉 황암 시내 한복판 마을은 지금도 백수항이란 지명을 그대로 쓰고 있다.
골목(13초) 이 골목이 바로 신라방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인들은 왜 이곳에 집단적으로 모여살게 된 것일까.
인터뷰/양구쳉 절강성 공예미술학회 상임이사
여기서 똑바로 가면 항구에 도달합니다. 임항과 교항도 가깝죠. 항구가 가까워 아주 편리하다.
저쪽으로 가면 내륙과 연결되고 또 바다로도 나갈 수 있었다. (24초)
강변(9초) 백수항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황해로 나가는 항구가 있다.
신라인들이 들어온 곳, 신라서라 불리기도 한다.
마을-통원방-산(11초) 이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에 신라인의 또다른 마을,
통원방이 있었고, 작은 산 너머로는 중국 내륙으로 가는 강이 흐른다.
인터뷰/고씽띵 린하이 현립박물관 자료정리실장 (23초)
이 강이 임강이다. 지금은 간조기 이지만 물이 들면 포구가 넓다.
신라인이나 일본인들의 배는 모두 이곳으로 들어왔다. 또 여기서 출항했다.
신라산 올라가고(8초) 또한 통원방 뒷편, 마을 끝부분의 작은 산은 지금도 신라산으로 통한다.
줄지어 오르고(5초) 신라인들의 무덤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손으로 무덤 가리키고 그러나 지금 어느 것이 옛 신라인의 무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무덤들 (10초) 천년이 흐르는 동안 무덤의 주인이 수없이 바뀌어졌기 때문이다.
돌무덤(12초) 그러나 신라인들은 바다가 보이는 이 산에 무덤을 만들었다.
고국을 등진 이들. 죽어서라도 멀리 신라를 바라보고 싶었던 것일까.
그래픽/지도
중국내 신라방 위치(16초) 황암지역뿐 아니라 중국의 신라방은 대부분 황해 연안에 자리잡고 있다.
더욱이 그곳은 중국 내륙으로 연결된 강이 흐르는 교통의 요충지들이다.
강변(3초)
짐 나르는 사람들(5초) 물산이 모여들고,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는 교통의 요지에
배 가득한 짐 pan(11초) 모여살면서 신라인들이 배를 이용한 각종 업무에 종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것은 곧 당나라 국내 무역업이었다.
인터뷰/김문경
경제성이 뛰어난 곳, 운하에 몰릴 수밖에. 그중에서도 초주 연수현이 요충지(18초)
운하변 배-짐 가득 싣고(15초) 당나라 최대의 물산 집합지였던 추저우, 즉 초주. 지금도 초주 운하엔 중국
전역으로 물건을 실어나르는 숱한 배들이 움직이고 있다.
피디와 김교수 pan 표지판(9초) -3초 보고
초주의 신라방 역시 당나라 최대 규모였던 것으로 알려저 있다.
표지판-한국성(5초) 현재 초주시 당국은 그 옛 신라방 복원을 준비중이다.
안으로(12초) 이 신라방은 당나라가 임명한 지방관리, 즉 총관에 의해 운영되던 곳이었지만 완전한 자치권을
부여받은 조직이었다.
내부(10초) 엔닌이 신라방에서 당나라 여행허가증을 얻어내거나,
배와 선원을 구할수 있었던 것이 그 증거들이다.
기록/세금면제(16초) 외국인 조직인 신라방이 이런 자치권을 가질수 있었던 것은 당나라의 개방정책 때문이다.
당나라는 10년간 세금을 면제해주면서까지 이들을 지원했다.
차 달리고-운하변(7초) 엔닌은 그의 일기에 숙성촌에서 만난 신라인을 특별히 기록해두었다.
숙성촌 간판들(9초) 초주 부근에는 천이백년전의 기록속에 나오는 숙성촌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염밭 pan(13초) 엔닌일기가 전해는 대로 그 숙성촌에는 거대한 염전이 펼쳐져있었다.
엔닌은 이곳에서 소금을 운반하던 신라인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소금더미로(4초)
소금 만져보고(7초) 신라인들은 지역특산물의 생산과 운반에도 깊이 관여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현장오디오/조쓰리 예원강 염전조합 생산과장 (27초)
이 소금은 저기서 생산한다. 차로 여기에 운반한다. 이 소금은 한국으로 수출된다. 한국 김장때 사용될 소금
이다.
강변 pan 배 줄지어 가고(15초) 추저우 운하엔 지금도 천년전 엔닌일기에서처럼 수십척의 소금배가 꼬리를
물고 지나간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때 소금배는 장보고 선단이었다는 것.
소금배 줌아웃(20초) -5초보고
당나라 전역에 흩어져 있던 재당신라인을 하나로 통합해낸 장보고.
바로 그것이 장보고의 국제무역을 가능케 한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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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IO 6.
해상왕 장보고 뒤에는 뛰어난 재당신라인 그룹이 있었습니다.
특산물의 생산과 물류를 장악하고, 기동성을 바탕으로 정보를 주고 받을 수 있었던
재당신라인 조직이 없었다면 장보고는 아마도 그렇게 성공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거대한 조직, 추측컨대 수만명에 달할 것이라는
재당신라인들을 그토록 일사분란하게 조직해냈던 장보고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삼국사기 기록 뜨고
삼국사기는 그를 해도인이라 표현해놓았습니다. 그것은 신분이 미천한 섬 사람이란 뜻입니다.
아마도 장보고는 서남해안 섬에서 태어나 가난과 신분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당나라로 건너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장보고는 40세 가량 되면 수많은 재당 신라인들을 규합해 하나의 커다란 무역 선단을 만들어냅니다.
더욱이 장보고의 네트워크는 당나라에 그치지 않고 일본에까지 구축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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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6.
적산포 줌아웃(9초) -5초보고
장보고의 당나라 거점이었던 산둥반도의 츠산포.
연기 오르고(6초) 이곳에서 배를 띄우면 만 하루만에 한반도 서해안에 닿을
건물들(6초) 정도로 당나라와 신라간 최단거리에 위치한 곳이다.
탑(3초) 현재 이곳엔 장보고 기념탑도 세워져있다.
장보고 기념탑-비문(3초) 그러나 장보고는 지금보다 당대에 더 유명했다.
기록/번천문집(17초) 당나라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는 두목이 그의 번천문집에 장보고편을 따로 만들었을
정도다. 두목은 장보고의 일대기를 소상히 다루며 그를 칭송했다.
적산포 앞바다(22초) 그렇다면 도대체 장보고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어려서 당나라로 건너온 장보고는 30세가 될 무렵 당나라 군대인 무령군 소장의 직위에 오른다.
당나라의 관리로 임명될 정도로 무예가 뛰어났던 것이다.
인터뷰/김문경
번진들이 중앙정부와 대립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지방과 중앙과의 싸움이 계속되었는데 그럴 때 많은 군인이
필요했을 것이다. 장보고는 말을 타고 활을 쏜다든가 하는 이런 일에 대해서는 도저히 당나라 사람들이 따라
갈수 없는 그런 무예를 갖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당나라 그러한 사람이 아주 필요했을 것이다. (44초)
법화원 들어가고(5초)
법화원 줌인(10초) 군대를 나와 적산포에 법화원을 세우면서부터 장보고는
재당신라인들의 리더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김교수 돌아보고(5초) 엔닌일기는 법화원에서 신라인들이 모여
불상(7초) 신라어를 사용했다고 전한다. 이곳이 신라인들의 정신적인 구심점이었음을 알게하는 대목이다.
벽화 pan(12초) 장보고가 세운 법화원은 단순한 절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곳은 신라인들의 실질적인 구심점 으로 자리잡는다.
맷돌보고(10초) 500석의 쌀을 생산하는 전답을 소유한 독립기구로써 재당 신라인들의 행정업무를 대행해
주기도 했다.
볍화원 내부 pan (19초) 이곳은 신라로 가는 당나라 정부 사절단이 머무르는 마치 외교공관과도 같은 곳이었다.
바로 장보고의 당나라 거점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터뷰/김성훈
장보고라는 특출한 인물. 당으로부터 자치권 부여받은 인물아래 모임으로써....
포용력과 리더쉽이 재당신라인들을 통합시켰던 것 (35초)
바다(17초) 법화원을 중심으로 재당신라인을 조직하고, 당나라로부터
전폭적인 신뢰를 얻어낸 장보고는 마침내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국제 무역에 뛰어든다.
기록/해적소탕위해 청해진 설치(19초) 그때 그가 내세운 이유는 해적소탕.
신라인을 노예로 잡아가거나 어업을 방해하던 해적을 소탕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황해 연안을 따라
무역업에 종사하던 재당신라인의 사업을 확장시킬 계기이기도 했다.
일본 나라(8초) 그때 장보고의 또다른 지원세력은 일본의 신라인들이었다.
차 달리고(6초) -3초보고
당시 재일 신라인의 모습은
적산서원 입구(4초) 엔닌대사가 세운 절 연력사에서 확인할수 있다.
스님 비질(4초)
내부(4초) 엔닌일기에는 일본을 출발한 엔닌이 탔던 배는
엔닌영정(8초) 신라배였고, 신라인이 운항을 맡고 있었다. 통역 역시 신라인이었다.
배 그림(19초) -그림 5초 보고
신라인들이 당나라로 건너갔던 것처럼 일본으로 왔던 신라인들은 당시 일본의 중요한 무역인력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인터뷰/하마다 교수 (34초)
장보고를 우두머리로 해서 그때까지 소규모로 지엽적으로 이뤄지고 있던 당과 신라
신라와 일본의 무역이 보다 두터워지고 대규모화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장보고는 9세기 전반 혼란하던 동아시아 교역권을 재구축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수 있다.
클로징(35초) -장보고 영정 뜨면
9세기 동아시아 삼국에 흩어져있던 신라인들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조직화한 장보고.
이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자유로운 국제 무역을 실현시켰던 장보고의 무역전략은 분명 시대를 앞서간
도전이었고 성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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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IO 7. (클로징)
#세계 지도 펼쳐지고
장보고가 동아시아에 해상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중 하나는
재당 신라인, 재일 산리인들을 하나로 결집해내는 데 성공했다는 점입니다.
당시 동으로 동으로 움직이던 서역상인들,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으로 향했던 페르시아 상인들은 이곳 중국의
장안이 최종 기착지였습니다. 또한 배를 이용해 남방항로를 따라 동쪽으로 왔던 상인들의 경우는 양주가 최종
기착지였습니다. 더 이상은 진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서교역로의 마지막을 이어준 사람이 바로 장보고입니다.
장보고 선단에 의해 양주의 서역 물품들은 신라 경주와 일본에까지 전달될 수 있었고,
신라와 일본의 물품들은 서역으로 전해질수 있었습니다.
청해진은 바로 그 세계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분위기 바꿔주고
당나라와 일본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신라인들을 조직화시키고,
그들의 힘과 재능을 한 데 묶어 거대한 국제 세력으로 키워냈던 장보고.
시대를 읽어내는 안목과 그것을 실현시킨 그의 추진력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방법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