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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위의 감각
― 진은영의 시세계
송승환
소녀의 시쓰기
진은영은 첫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문학과지성사, 2003)에서 시적 주체로서 소녀의 언어를 드러낸 바 있다. 진은영 시의 시적 주체로서 소녀는 감상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냉혹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진은영의 소녀는,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1:14) 부분
라고 말할 줄 알며 현실 세계를 직시하고 있다. 소녀는 “밖에선/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집에만 가져가면/꽃들이/화분이//다 죽”는 「가족(1:19)」에 대한 인식을 또한 보여준다.
“신부(新婦)의 침대도 없이 축혼가도 없이 결혼의 행복도 아이를 기르는 재미도 모른 채 이렇게 친구들에게 버림받고는 이 불행한 여인은 살아서 죽은 자들의 무덤으로 내려가고 있다”고 말하는 진은영의 소녀는, 폭력적인 세계에서 고독하게 살면서 천천히 죽어야 하는 자신의 삶을 바라본다. “안개 속에서 총성이 울리고/안개 속에서 누군가 살해(「燃霧 도시(1:56)」”되고 “붉은 눈송이들이 녹아 흐르며/피범벅된 송아지 같은,/제대로 일어서지 못하는 물렁물렁한 세계(「정육점 여주인(1:26)」)”를 바라본다. 안온한 가족도 결혼의 행복도 빼앗고 안개처럼 스미는 세계의 폭력 속에서 소녀는 “누구의 입맛에도 맞지 않았고/서성거”리는 「청춘 1(1:38)」을 회억한다. 그러나 참혹한 청춘을 살아낸 소녀는 폭력적인 세계와 화해하지 않는다. 여전히 현실 세계의 폭력을 간과하지 않는다.
낡은 선반 위에서는
여수 출입국 보호소 화재로
사과와 별을 싼 종이냄새가 났었다
이주노동자 10명 사망. 17명 부상
사과와 별을 싼 종이냄새가 났었다
보호 외국인의 도주를 우려해
숨겨놓은 얇고 구겨진 파란 종이를 풀며
쇠창살 문 개방 지연, 감금된 채
숨겨놓은 얇고 구겨진 파란 종이를 풀며
노동자들 연기에 질식 사망
―「Quo Vadis?」(2:88~89) 부분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Quo Vadis?”는 사도 베드로가 십자가로 끌려가는 그리스도에게 한 말이다. 「Quo Vadis?」는 지난 2007년에 발생한 여수 출입국 보호소 화재로 이주노동자가 사망한 사건을 보도한 신문기사를 굵은 글씨로 표기하고 어디론가 사라진 행복한 유년 시절과 추억의 사물들을 병기함으로써 존중받아야 할 인권과 가치 있는 삶의 순간들을 모두 소멸시키는 현실 세계를 비판한다. 또한 “갇힌 사람들의 피로 젖은 빵을 뜯으며/저녁은 몹시 어두워지는데, 이제 어디로?(「Quo Vadis?」)라는 진술은, 인권을 짓밟는 현실 세계의 폭력에 대해 무관심하면서 삶의 방향성을 상실한 채 밥을 먹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의 삶을 성찰하게 한다.
폭력적인 세계와 화해하지 않은 소녀가 바위동굴 같은 현실 세계에 갇혀서 할 수 있는 일은 시를 쓰는 것이었다. “멜랑멜랑한 꼬리를 가진 우울한 염소가 한 마리(「대학 시절(1:63)」)” 가슴에 살고 있던 대학 시절 내내 소녀는 시를 썼다. 소녀가 시를 쓰게 된 계기는 분명하지 않다. “시를 쓰고 나서 혁명에 실패하고/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는지/혁명에 실패하고 나서 한 남자를 사랑한 후/시를 쓰게 되었는지(「푸른색 Reminiscence(1:60)」)” 그 순서가 분명하지 않지만 소녀의 시는 혁명의 실패와 사랑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성인이 되어 현실 세계에 편입되는 통과제의로서 겪는 사랑 뿐만 아니라 보다 나은 세계를 꿈꾸던 혁명의 실패를 체험한 내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소녀의 시는, 세계의 질서에 편입되기와 ‘어른-되기’를 거부한 소녀의 우울(Melancholy)이 스며있다.
우울한 소녀는 혁명의 실패 이후에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묻는다. “학살자의 나라에서도/시가 씌어지는 아름답고도 이상한 이유를(「러브 어페어(2:91)」)” 묻는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쓴다지만
우리에게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다
그것이 비극이다
세상을 허리 위 분홍 훌라후프처럼 돌리면서
밥 먹고
술 마시고
내내 기다리다
결국
서로 쏘았다
―「70년대産(2:76)」 전문
「70년대産」은 진은영의 시적 주체인 소녀의 특이성을 보여준다. 진은영의 ‘소녀’는 2천년대 한국시의 시공간에서 쉽게 들을 수 없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자신을 포함한 1970년대산 동년배 시인들이 목숨을 걸고 쓰는 시는 누구를 위해 쓰는가. 폭력적인 현실 세계와 무관하게 독자도 없이 목숨을 걸고 아름답게 쓰는 시는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이 질문들은 명확한 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한 근원적 물음과 시인의 존재론적 성찰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소녀는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물음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소녀의 ‘우울’은 폭력적인 세계로부터 상처받은 삶에서 길어올린 성찰의 언어이며 시쓰기의 원천이다. 소녀는 폭력적인 세계 속에서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한 근원적 물음과 시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성찰한다.
오래 걸으면
장화 속의 공기가
붉은 솜처럼 젖어들었다
공터 폐타이어에 앉아
검은 무릎 위로 불꽃을 날리는 작은 아이들
지붕의 암탉들
양철처마 끝으로 따듯하고 하얀 달걀이 굴러 떨어진다
그는 천천히 지나간다
막사의 해진 빨랫줄 아래
배배 꼬인 채
물방울 흘리는
여자들의 푸른 스타킹으로 이어진 국경을 따라
검은 숲은
몽상하는 자들의 어두운 녹색 방패를 번쩍이며
도시에서 날아오는 대답을 막아내고
너도밤나무의 잘린 팔 같은 침목 위를
짓누르며 달려가는 기차바퀴
부서지며 날아오르던 잎새들이
고요하게 떨어진다
모노레일을 가로지르다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의 주변을 맴돌면서
― 저 기다란 두 개의 은빛 젓가락은
무얼 집으려는 거지?
회색의 풀들이
수챗구멍 위의 머릿카락처럼 붙어 있는 시냇가
들릴 듯 말 듯 흘러가는
징검다리. 십이월 초. 흠뻑 젖은 양말로
이 별에서 저 별로
한 소녀에서 다른 소녀에게로
영원한 녹색에서 영원한 회색으로
건너뛰면서
대답해 보아
나는 누구의 연인인가?
얼어붙은 자신의 발들에게
마지막으로 그는 물었다
―「방랑자(2:24~26)」 전문
두 번째 시집 『우리는 매일 매일』에 실린 가장 아름다운 시 가운데 하나인 「방랑자」는 지금까지 말한 소녀의 성찰과 물음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다. ‘방랑자’는 다름 아닌 시인 자신이며 성찰하는 소녀이다. 국경을 따라 천천히 길을 걷는 방랑자가 쭉 뻗어있는 모노레일을 바라본다. 기차는 철로의 방향을 따라 나아가도록 되어있는 사물이다. 주어진 모노레일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기차처럼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것인가. 모노레일의 끝에 위치한 목적지에 당도하는 기차처럼 삶의 목적은 분명한 것인가. 삶의 목적지에서 집어올릴 수 있는 것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이 모든 물음들은 자명한 것처럼 보이는 삶의 기저를 뒤흔드는 “저 기다란 두 개의 은빛 젓가락은/무얼 집으려는 거지?”라는 발화 속에 깃들어있다. 그러므로 소녀의 언어는 폭력적인 세계의 질서에 대한 저항을 품고 있으면서도 시를 쓰는 시인으로서 성찰하는 자기 존재에 대한 물음을 껴안고 있다. 시를 쓰는 진은영의 소녀는 시의 세계에서만 살지도 않고 폭력적인 세계 안에서만 살지도 않는다. 시를 쓰는 나는 세계와 함께 있다. “나는 누구의 연인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을 통해 나는 세계와 함께 있다. 근대의 상처입은 주체로서 시를 쓰는 나는, 그 누구의 연인도 아닌 고독한 존재로서 폭력적인 세계와 함께 있다. 폭력적인 세계와 함께 존재하는 소녀의 시쓰기는 근원적 고독을 느끼는 실존의 형식인 것이다.
시인이라는 이름
태초에 신이 아담을 창조한 후 아담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이름을 명명한다. 아담은 사물의 이름에 의거해서 사물의 분류와 체계를 구축한다. 세계는 아담의 언어로 명명한 사물들의 이름으로 구축된 것이다. 인류 최초의 언어로 사물의 이름을 명명하고 호명함으로써 1인(人) 언어 체계를 창조하고 인류에게 계승시켰다는 점에서 아담은 시인이다.
시인의 언어로서 아담의 언어는, 바벨탑의 붕괴 이후 다민족 언어로 분열되고 사물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결핍의 언어가 되었다. 사물과 언어 사이의 간극을 메우지 못하는 결핍의 언어는 아담의 언어로 회귀하지 못하고 관습적인 일상어로 굳어졌다. 결핍의 언어는 아담의 언어를 정보전달의 목적성과 도구성을 지닌 기능적 언어로 전락시킴으로써 지상의 영토 위에 군림하고 현실 세계의 지배 언어가 되었다. 그러나 진은영의 소녀는 현실 세계를 지배하는 결핍의 언어를 수용하지 않는다. 소녀는 현실 세계를 지배하는 결핍의 언어를 거부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시인입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 마세요
―「Summer Snow(2:49)」 부분
소녀는 자신을 다른 이름이 아닌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호명하길 요구한다. 소녀는 현실 세계의 지배 언어를 거부하고 사물과의 간극을 메우지 못하는 일상어의 관습적 의미를 전복함으로써 자기 자신만의 언어 체계를 창조하고 사물의 이름을 새롭게 명명하는 시인이 되려 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이름으로 소녀는 아담의 질문에 답한다.
나는 헤롯이며 요한의 잘린 머리
내가 죽인 모든 장자들의 아버지인
은유는 없다
그것은 푸른 얼음
따스한 구멍 속에서 녹아버렸다
아담, 이름이 뭐냐고?
그것은 우리가 오래전 떠나온 지하실
―「Summer Snow(2:50)」 부분
은유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대상과 개념을 전제한다. 은유는 서로 다른 두 대상과 개념을 하나의 내적 동일성의 원리로 파악하고 하나의 대상이나 개념을 다른 대상이나 개념으로 전이시켜 의미의 전이를 발생시킨다. 궁극적으로 은유는 하나의 대상과 개념을 또 다른 유(類)와 종(種)의 대상과 개념의 언어로 옮기거나 유추하여 사물의 이름을 명명하고 호명함으로써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을 통해 상징을 지향하고 수직적 의미 체계를 구축한다. 상징의 극단에는 수직적 의미 체계를 구축한 신화와 종교가 있다. 수직적 의미 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은유는 그 의미 체계의 바깥 세계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현실 세계의 지배적 언어이다. 은유는 다양하고 상이한 언어들이 지닌 의미를 지우고 배제하면서 유사성의 원리에 의해 모든 의미를 하나로 수렴해버리는 권력을 누려왔다. 은유는 언어의 장자(長子)이며 가부장제 언어의 원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소녀는 이제 “은유”는 없다고 단언한다. 이름이 무엇이냐는 아담의 물음에 소녀는 “헤롯이며 요한의 잘린 머리”라고 답한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자르라고 명령한 이는 다름 아닌 헤롯이다. 헤롯과 요한의 잘린 머리는 유사성을 지니지 않은 두 대상이다. 소녀는 유사성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 두 대상을 동시에 자신의 이름으로 삼고 대답함으로써 은유의 수직적 의미 체계를 거부하고 은유의 원리를 위반한다. “나는 썩은 과일 도둑, 오래도록 오지 않은 잠, 밀가루 포대 속에 집어넣은 젖은 손, 외다리 남자의 부러진 목발(「나는(2:45)」)”이라고 말하는 시적 주체로서 소녀는 자신을 상이한 존재로 호명한다. 소녀는 하나의 이름으로 호명됨으로써 은유의 원리에 포섭되어 단일한 정체성의 의미로 규정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시인의 이름으로 자신을 매번 다른 이름으로 명명하고 호명한다. “모든 장자들의 아버지인//은유”는 “따스한 구멍 속에서 녹아버렸”고 아담이 최초로 명명한 이름은 “우리가 오래전 떠나온 지하실”에 있고 그 지하실에서 “불타버린 이름들”이기 때문이다.
시 ― 암중모색
더듬거리기 위해 눈감기
―「Modification(2:39)」 부분
소녀의 시쓰기는 폭력적인 세계와 함께 존재하는 실존의 형식일 뿐만 아니라 은유의 의미 체계를 거부하고 자기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하기 위한 “암중모색”이다. 사물과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는 결핍의 언어로 현실 세계를 지배하는 언어를 거부하는 소녀의 언어-정치적 실천이다. 보다 나은 세계를 “더듬거리기 위해 눈감기”이다. “물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물속에서(2:52)」)”이다. 소녀는 시인의 이름으로 “서툰 시 한 줄을 축으로 세계가 낯선 자전을 시작(「앤솔러지(2:44)」)”하기를 꿈꾼다.
측위(側衛)의 감각
소녀의 언어-정치적 실천은 지상의 영토를 지배하고 보편성을 획득한 것처럼 보이는 현실 세계의 일상 언어에 균열을 내는 시를 쓰는 것이다. 사물과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는 결핍의 언어와 은유의 수직적 의미 체계가 견고하게 굳힌 관습적 감각을 해체하고 소녀 자신만의 감각으로 사물을 새롭게 명명하는 것이다. 폭력적인 현실 세계의 일상 언어와 공통 감각에 저항하는 소수 언어의 고유 감각을 창조하는 것이다. 고유 감각을 창조하려는 소녀의 시쓰기는 보편성과 합리적 이성에 근거하지 않는다. 보편성과 합리성의 미명 아래 자행된 수많은 폭력들을 소녀는 목격해왔다. 현실 세계를 지배하는 국가주의와 심지어 혁명 운동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가부장제까지. 소녀는 보편성과 합리성이 “갈라지는 틈에서 태어나는 감각들(「나에게(2:58)」)”로 시를 쓰고자 한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 건/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긴 손가락의 詩(1:85)」)”하다.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긴 손가락의 詩(1:85)」 부분
몸에서 가장 멀리 뻗을 수 있는 손가락이 건드리는 것은 구체적인 개별 사물들이다. 구체적인 개별 사물들의 촉감이 불러일으키는 손가락 끝의 언어는 보편성을 획득한 것처럼 보이는 일상 언어에 균열을 낸다. 손가락 끝의 감각은 일상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불명료함의 심장에서 솟구치는/무언가와 같(「주어(主語)(2:96)」)”다. 사물의 낡은 이름과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신체의 언어이다. 손가락의 감각이 빚어낸 신체의 언어로서 그 ‘불명료한 무엇’은 일상 언어보다 근원적인 사물의 언어이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가 가장 여리고 잘 부러지지만 예민한 감각으로 스쳐가는 바람과 사물들을 포착하는 것처럼 손가락의 감각은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포착한다. 소녀가 가장 길게 뻗은 손가락은 일상 언어의 관습적 의미와 지시적 의미 대신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긴 손가락의 詩(1:85)」)”
더하면 0이 되는 마법진(魔法陳)
텅 빈 사각형으로 부는 바람 속에서 세는 감각의 숫자들
―「Modification(2:39)」 부분
변경과 변형을 뜻하는 “Modification”처럼 “더하면 0이 되는 마법진(魔法陳)”을 펼치고 “새로운 기호의 쥐들이 달려오도록(「미친 사랑의 노래(2:66)」)” 일상 언어에 깃든 낡은 이름과 무감각의 독성(毒性)을 해독하려는 진은영 시의 감각을 나는, 측위(側衛)의 감각이라 명명한다. 측위는 경계 임무를 띠고 다른 부대로 파견된 소규모 부대 중에서 행군할 때 주력 부대의 옆쪽을 호위하며 나아가는 부대나 병사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전위(前衛)와 다르다.
아방가르드(avant-garde)로 번역되는 전위는 군대 용어로서 전쟁의 최선두에 서서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부대를 가리킨다. 이와 같은 전위의 개념은 예술에서 전통적인 예술의 모든 가치와 개념과 형식을 전복하고 첨단의 미적 가치와 형식을 창조하려는 예술적 운동을 실천하는 용어로 변용되었다. “시인은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이 되고자 해야 하며 미지의 것에 도달하고 절대적으로 새로운 언어를 발명해 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랭보의 전언 속에 예술적 전위와 정치적 전위가 통합된 전위의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시에서 전위는 식민지 시대와 유신 시절을 관통하면서 전위의 정치성은 거세되고 전위의 예술성만 살아남아 언어 실험의 극단을 추구하는 경향성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변모하였다.
최초의 전위 개념이 지닌 의의를 상실한 2천년대 한국시에서 진은영 시의 감각을 측위의 감각으로 명명하는 것은 본래 전위가 지닌 언어의 정치성과 언어의 예술성을 통합하려는 진은영 시의 고유성과 시적 의의를 확보하기 위함이다. 그녀의 시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폭력적인 현실 세계를 외면하지 않으면서 현실 세계로 수렴되지 않기 위해 일정한 거리와 보폭을 유지하며 나아가는 언어의 긴장과 측위의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
죽은 여자 자라나는 머리카락 속에서 반짝이는 핀과 같고
눈먼 사람의 눈빛을 잡아끄는 그림 같고
앵두향기에 취해 안개 속을 떠들며 지나가는
모슬린 잠옷의 아이들 같고
우기의 사바나에 사는 소금기린 긴 목의 짠맛 같고
조금씩 녹아들며 붉은 천 넓게 적시다가
말라붙은 하얀 알갱이로
아가미의 모래 위에 뿌려진다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
매립지를 떠도는 녹색 안개
그 위로 솟아나는 해초냄새의 텅 빈 굴뚝같이
―「아름답다(2:9)」 전문
시집 『우리는 매일 매일』의 첫 작품인 「아름답다」는 제목이 환기하는 바와 같이 아름다운 시이다. 측위의 감각이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보여준다. 「아름답다」는 모두 3연으로 되어있지만 의미론적으로는 2개의 문장으로 되어있다.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이라는 가정법의 첫 문장은 “~같이”라는 4개의 직유를 거느리고 “~뿌려진다”라는 서술어로 완결된다. 즉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 A같고 B같고 C같고 D같고 “~뿌려진다”는 문장 구조로 완결된다. 직유의 4번 반복은 시의 리듬을 발생시키고 다음에 이어지는 동일한 가정법 문장에서도 아름다운 직유의 동일한 반복과 동일한 문장 구조를 기대하도록 한다. 그러나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이라는 가정법의 첫 시구는, “오늘//네가 아름답다면”처럼 2개의 연으로 변주되고 직유는 단 한 번 “해초냄새의 텅 빈 굴뚝같이”로만 구현됨으로써 미묘한 여운을 남기면서 심리적 기대를 좌절시키고 어긋난 정서를 제공한다. 더욱이 “~뿌려진다”와 같은 서술어가 생략됨으로써 의미의 결정(結晶)을 중지시키고 불확정성의 세계로 이끈다. 진은영 시의 측위의 감각은 바로 의미론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문장 성분의 생략을 통한 의미 결정의 중지와 불확정성의 세계로부터 태어난다.
측위의 감각을 탄생시키는 시어의 과감한 생략은 보편성과 합리성에 근거를 둔 의미 중심주의에 대한 거부이며 언어의 도구성과 목적성에 대한 저항이다. 반드시 필요한 문장 성분의 생략은 사물과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는 결핍의 언어와 현실 세계를 지배하는 일상 언어를 지우는 언어-정치적 시쓰기이다. 시어의 생략은 침묵의 공간을 생성하고 미묘하고 다채로운 의미를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은 가정법 문장이므로 ‘오늘은 네가 아름답지 않다’라는 의미도 내포한다. ‘오늘은 네가 아름답지 않다’는 문맥에서 「아름답다」라는 시는 더욱 침묵의 공간에 휩싸이고 말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느낌으로 충만하게 된다. 진은영 시의 측위의 감각은 의미 결정 중지와 불확정성의 세계로 이끄는 그 침묵의 공간에서 생성되고 있는 것이다.
흰 셔츠 윗주머니에
버찌를 가득 넣고
우리는 매일 넘어졌지
높이 던진 푸른 토마토
오후 다섯 시의 공중에서 붉게 익어
흘러내린다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했다
틀린 것을 말하기 위해
열쇠 잃은 흑단상자 속 어둠을 흔든다
우리의 사계절
시큼하게 잘린 네 조각 오렌지
터지는 향기의 파이프 길게 빨며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는 매일매일(2:34)」 전문
두 번째 시집의 표제작인 「우리는 매일매일」에서도 시의 결구인 서술어는 생략되어 있다. “우리는 매일매일”이라고 끝맺음으로써 1연의 “우리는 매일 넘어졌지”와 상응되어 반복 리듬을 생성한다. 서술어가 생략됨으로써 시의 의미는 완결된 것이 아니라 의미의 결정이 중지되고 불확정적인 것이 된다. “우리는 매일매일”로 끝난 지점에서 시작하는 여백의 침묵 속에서 미묘한 느낌과 다양한 의미가 생성되고 있다. ‘우리는 매일 넘어진다’와 ‘푸른 토마토가 붉게 익어 흘러내리는 오후 다섯 시’, ‘열쇠 잃은 흑단상자 속 어둠’과 ‘시큼한 우리의 사계절’이 환기하는 의미를 서술어로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일상 언어의 관습적 의미를 중지시키고 미묘한 느낌과 이미지를 독자가 직접 체험하게 한다.
이와 같이 측위의 감각은 단 하나의 의미로 결정되는 것을 거부하고 의미 중심주의로 모두 수렴해버리는 일상 언어의 권력에 저항한다. 측위의 감각은 진은영의 시적 주체인 소녀가 생성한 침묵의 공간에서 태어나 말하지 않은 언어와 사물의 충만한 느낌을 백지의 여백으로 체험시킨다. 그러므로 소녀에게 일상 언어로 발화되어 의미가 분명하게 결정된 모든 것은 거짓이다.
나는 한 번도 진실을 말한 적이 없다
그리고 흰 공책 가득 그것들이 씌어지는 밤이 왔다
―「소멸(2:33)」 부분
소녀에게 진실은 씌어지지 않은 흰 공책의 여백에 존재하며 말하지 않은 침묵 속에 있다. 그 진실은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과 낡은 언어를 전복하는 측위의 감각이 길어올린 침묵의 언어 속에 있다.
마지막 시를 달라
이 사물은 미학적으로 낡았지만 마음을 이동시킨다
―「나에게(2:59)」 부분
측위의 감각은 침묵의 언어를 통해 사물의 낡은 이름과 무감각한 언어로 씌어진 세상의 “마지막 시”를 지운다. 미학적으로 낡은 사물은 측위의 감각을 통해 “마음을 이동”시키는 사물이 된다. 마음이 이동하는 방향은 현실 세계와 유리된 전위의 앞이 아니라 현실 세계와 함께 보폭을 맞추며 나아가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측위의 옆이다. 측위의 감각은 일상 언어를 침묵시키고 일상 언어로 말할 수 없는 미묘한 느낌의 언어를 흰 종이의 여백에 내보인다. 흰 종이의 여백과 침묵의 공간에서 태어난 측위의 감각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새로운 언어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새로운 별자리의 언어는 옆으로 뻗어나가면서 우리의 일상적 감각을 무너뜨리고 측면의 최전방으로 확장시킨다.
2천년대 젊은 시인들의 시가 앞으로만 나아가는 시의 전위가 되려할 때 진은영의 시는 빈틈을 드러낸 한국시의 옆을 가만히 혼자서 지키면서 측면의 최전방에서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노래를 시작한다. 진은영의 소녀가 부르는 그 노래는 새로운 언어가 탄생되는 “포자(胞子)의 시간”을 품고 있다. 시집 『우리는 매일 매일』의 마지막 작품을 소녀는 낭독한다. 그리고 기이하고 기묘하고 야릇한 것이 시작된다.
너는 추위를 주었다
나의 언 손가락은 네 연둣빛 목폴라 속에
버들강아지처럼
너는 어둠을 주었다
나의 눈은 처음 불 켜진 지하실의 눈부심 속에
입술이 나에게로 열렸다
향나무 불타는 난로의 숨결에 이어진
연통의 어리둥절한 뜨거움
너는 돈을 주었다
처음 산 물건의 기억, 작은 지우개 달린 연필
너는 내게 칼을 주었다
처음으로 애호박과 흰 손목을 썰어본 감촉
내게 눅눅한 이불을 주었다
자줏빛 고사리 냄새의 침묵이 떠도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죽은 별
포자(胞子)의 시간
그리고 야릇한 것이 시작되었다
―「어떤 노래의 시작(2:98~99)」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