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새등(봉황새라고도 한다)
진주시 상봉동 봉원초등학교 일원 대룡골 동편 ‘황새등’을 알고 있는 진주시민은 과연 몇이나 있으며 또 황새등이 잘려나갔다는 것을 아는 시민이 얼마나 될까?
황새등은 대룡골 동편 봉원초등학교가 있는 자리를 가리키며 이 지형의 생김새가 황새가 고동의 눈을 부리로 찍으려고 하는 형상에서 유래 되었다. 지금은 봉원초등학교가 있지만 본래 이 터가 황새 터로 많은 황새가 날아와서 살던 명승지였으며 이 황새 터 맞은편 들에는 논과 도랑이 있었는데. 봉곡촌 넓은 땅에는 물이 마르지 않고 농사가 잘되어 대부분 부유한 생활을 했다.(허리 잘린 황새등 지맥을 살리자. 2022.05.04. 경남일보 장철호)
이 곳에 고동이 많이 나서 황새는 고동을 먹이로 삼았다. 그 자리가 마치 고둥의 눈처럼 가장자리는 낮고 가운데가 둥그렇게 높았고 그 자리가 명당자리라서 높은 정치가가 나올 것이라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 일제 강점기에 집을 짓지 못하게 하고 그 자리에 교도소를 지어 그 기운을 막았다고 한다. 그 뒤로부터 황새가 문산으로 자리를 옮겨 문산 사람들은 지금도 문산의 당산을 황새 터라고 부르고 있다. (상봉동지 P.73)
태조 이성계가 진주에 인물이 많이 남을 인식하고 무학대사(합천 삼가 출신)를 시켜 그 연유를 알아보게 하면서 유명해졌다. 고려시대 중앙에서 일하는 중진들의 반수가 영남 사람이었고 그중 반수가 진주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한 태조 이성계는 후일 반란을 일으키거나 저들에 의해 사직이 움직일 것을 생각하고 진주를 잘 아는 무학대사를 보내 진주에 인물이 나는 이유를 알고자 했다. 무학대사는 태조의 지시에 따라 진주에 내려와 비봉산과 황새등을 둘러 본 후 그 주위의 형세가 매우 좋으며 그 중 황새등의 생김이 감탄할 정도였으니 이로 인해 진주에서 인물이 많이 난다고 판단하고 보고했다.
이에 이성계는 진주 인물들을 경계하기 위해 그 맥
(상봉동 전 651-2번지)을 자르라 하매 이에 무학대사는 이산의 기운을 끊으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하다 비봉산의 맥이 흐르는 곳 중 황새가 먹이를 곧 먹을 것 같은 형상의 황새등을 명당 중 천하 명당임으로 보고 그 맥을 끊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여러 곳을 살피다 황새의 허리 부분에 해당하는 곳 가운데 지맥(地脈)이 강하게 흐르는 곳을 찾아 이를 끊기로 했다.(허리 잘린 황새등 지맥을 살리자. 2022.05.04. 경남일보 장철호)
무학대사는 사람을 시켜 밑넓이 5m, 높이 7m, 웃넓이 20m로 황새등을 토막냈다. 지금도 그 아픈 상처가 남아있어 그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로는 진주에서 그전보다는 인물이 많이 나지 않았다고 하며 잉로써 이성계가 안도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경남일보 https://www.gnnews.co.kr)
*과연 지맥을 끊었다고 인물이 나오지 않을 수 있는가?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맘가짐을 가진다는 것이 더 큰 장애물이라고 본다.
산세가 좋아 인물이 많이 나오는 것은 그런 인물들을 보고 자라는 아이들이나 그런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더욱 분발하여 자신을 만들어 가겠지만 지맥을 끊었다고 한다면 그 소식을 들은 사람은 늘 패배의식으로 자라기 때문에 큰 인물이 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 되고 안되는 것은 자연의 변화가 아니라
사람이 되는 것은 되려는 마음으로 이름이니
하늘을 가진 사람은 하늘의 사람이 되고
땅을 가진 사람은 땅의 사람이 되거늘
땅을 가지고 살면서 하늘이 되려고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