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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해야 할 일(사도행전 1:6-8)
2021년 3월 7일 / 백향목교회 / 사도행전 1:6-8 / 찬송가 135장
나는 요즈음 만나는 목사님들에게 또는 설교를 할 기회가 주어지면 꼭 하는 말씀이 있다.
사도행전 1장 6-8절에서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셨을 때에 사도들이 물었다. `주님, 주께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때가 지금입니까?' 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때가 언제인가는 아버지께서 정해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8)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지요. 120명가량의 사람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회개와 더불어 기도하며 준비하였을 때에 2장처럼 부흥의 불길이 이 땅에 임할 것이니 우리도 빨리 준비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2020년 5월 9일 새벽에 나에게 보여주신 꿈처럼 한국은 점점 사회주의화 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더욱 핍박이 강화될 것 같다. 나에게 하나님께서 꿈과 환상으로 보여주신 것은 여러 곳에서 전해오는 분들의 내용도 동일했다.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대한민국을 걱정하는 것을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났으면 우리나라는 천국이요 우리의 의무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간구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한국교회가 이 땅에 다시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기를 위하여 많은 기도를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복음을 온세상에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고 위로부터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권능을 힘입자고 외치고 있다. 하지만 별 반응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요엘서에서 약속하셔서 사도행전 2장 나타난 많은 은사들을 베풀어 주시려한다.’고 외쳐도 말이다. 물론 과거 몇 십년동안 한국 교회에서 많은 은사들이 나타났는데 성결을 기초로 한 은사들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독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할지라도 은사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가 절대로 필요하다. 고린도교회의 잘못된 은사관을 생각하기보다는 사도 바울과 같은 은사관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충성ㆍ봉사 다 하였으면 한다. 이제부터라도 은사충만을 구하기보다는 먼저 성결하기를 힘쓰자. 그리하면 모든 것을 주실 것이다.
1. 의인 한 사람(중보기도자)을 찾으시는 하나님
성경에서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린 선지자는 예레미야이다. 예레미야는 B. C. 626년 요시야 왕 13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선지자가 되었다(렘 1:2, 2:3) 그 무렵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떠나 범죄가 극에 달하였다. 예레미야 선지자 당시 지도자들의 모습이다.
렘 2:8 / ① 너희의 제사장들은 내게 물어 보는 일이 없었고 ② 백성을 가르치는 스승(레위사람)들도 내가 준 율법을 존중하지 않았다. ③ 백성의 지도자들도 언제나 내게 대항하여 범죄하였고, ④ 선지자들도 바알신의 이름을 내걸고 떠들어 댔다. 어느 누구도 내게 묻거나 내 율법을 존중하지 않았으며 모두가 한결같이 우상을 숭배하고 전혀 도와줄 수 없는 우상에게만 도움을 요청하였다.
▶ 예수님 시대에 있었던 바리새인들도 그러했다. 많은 분들이 지금도 과거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한다. 사실 우리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의 기도가 과연 기도하였는가? 누구의 기도가 상달되었나? 누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으셨나? 바리새인의 종교 행위(?)는 지금의 우리들이 흉내조차 내기가 쉽지 않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 기도하는 시간도 많았지만 중언부언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드리지 못하였다. 그뿐 아니라 늘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며 율법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자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모른다고 하셨고, 유다 백성들이 율법은 알고 있지만 율법(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이 없었다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대제사장 및 유대인들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신 예수님을 귀신들렸다고 중상모략을 하며 핍박하더니 끝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다.
▶ 예레미야 선지자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2장과 3장에서 유다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면서 4장에서는 그 죄악으로 인해서 그들을 심판하겠다고 선포하셨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범죄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채찍을 내리칠 수밖에 없으셨다.
이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제안을 하셨다.
렘 5:1 / 너희는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빨리) 의인을 찾아보아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모든 광장(廣場)을 둘러보면서 진실한 사람을 찾아보아라. 너희가 거기서 법대로 사는 사람이 있어서, 누구나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공의 -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을 단 한사람이라도 찾는다면 내가 그 성읍 전체의 죄를 용서하겠다.
‘공의’는 무엇을 말하는가? 남보다 더 의롭고, 남보다 더 정직한 것이 공의일까? 사람들은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누가 더 옳고 그르냐에 따라 자기 나름대로의 세운 기준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공의’란 헬라어에 보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일치’를 의미한다.
이 말씀의 배경 / 주전 7세기로 이미 120여 년 전에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라는 채찍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했는데,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한 것은 군사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다가 끝내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한 결과였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계속해서 그것을 강조하면서 유다 백성들에게 그 북 이스라엘을 거울삼아 ‘망하지 않으려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고 외쳤지만 어리석게 남 유다는 깨닫지 못하였다. 한 두 사람이 정신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 전체가 정신차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 여전히 죄악과 타락의 길을 걸었다. 어느 누구 하나 바른 신앙과 바른 믿음으로 살려고 하지 않았다. 백성들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겨야 할 제사장이나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 나라가 엉망진창이 되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망할 지경에 이르자 오히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급하게 찾으셨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한 사람’ 즉 예루살렘 성안에서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한 사람’을 찾으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안에서 진실하고 정직한 ‘한 사람’을 찾으면 예루살렘 성을 멸망하지 않고 용서하겠다고 하셨다.
그렇다고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저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이다. 예수님이 비유하신 것처럼 말이다(눅 18:9-14).
예루살렘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는 때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제안대로 한 사람의 의인이라도 찾아보려고 생명까지 걸고 회개를 외쳤다. 멸망으로 치닫는 나라를 살려 보려고 몸부림쳤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의인 10명이 없어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보다 남쪽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의인 10명도 아닌 1명이 없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한다는 것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소돔과 고모라의 의인 10명보다 쉬운 하나님의 제안이었다.
의인 ‘한 사람’만 찾으면 지금까지 지은 죄로 인하여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저들을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예레미야는 목이 터지도록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외쳤지만 오히려 사람들은 심판에 관한 예언을 듣기 싫어했다. 자기네들 귀에 듣기 좋은 말씀만 원했다. 오히려 예레미야 선지자를 죽이려 했다. 이러한 모습에 예레미야는 더욱 슬퍼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심판을 가로막아 기도하는 의인 한 사람을 찾으셨다. 지도층의 죄악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들은 거짓 예언만을 외쳤다.
겔 22:28-29 / ❶ 그런데도 이 나라의 예언자들은 그들의 죄악을 회칠하여 덮어 놓으려고 듣기 좋은 말만하고 있다. 그들은 거짓으로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며 그럴듯하게 꾸며대며 거짓 예언을 사람들에게 전해 준다. 내가 그들에게 부탁한 일이 없는데도 내 이름을 걸고 설교한다고 떠들어댄다. 순전히 기만적인 망상들을 퍼뜨린다. 29) ❷ 이 나라의 지도자와 학자들은 탄압과 강탈을 일삼고 있다. 백성의 스승이라고 하면서 그들은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이들을 착취하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다. 갈데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고 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처럼 재앙이 멈추기 위해 중보기도를 하는 의인 한 사람을 찾으셨다.
겔 22:30 / 나는 혹시라도 민족을 위하여 무너진 성벽의 틈 사이로 뛰어들며, 내가 이 나라를 멸망시키지 않도록 내 앞에 막아서서 멸망의 위기에 놓인 네 백성을 구출하려고 몸부림치는 이라도 있을까 두루 찾아보았다. 그러나 나는 한사람도 만나지 못하였다.
▶ 그렇다면 예루살렘을 위하여 하나님께 울부짖는 예레미야나 에스겔의 기도는 헛수고였을까? 결과는 바벨론에 의하여 나라가 망하였으니 예레미야나 에스겔선지자의 부르짖음이 헛된 것일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나 에스겔 선지자를 비롯하여 남아있는 하나님의 종들의 눈물어린 기도를 들어주셨다.
렘 31:16-18 / … 이제 너는 탄식을 그치고 울음도 그쳐라. 네가 자식들을 헛되게 키운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이 이제 원수의 나라에서 고국산천으로 돌아 올 것이다. 17) 네게는 희망과 미래가 있다. 네 자식들이 이제 고향 땅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내가 온 세상의 주인으로서 네게 주는 약속이다.’ 18)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에브라임 백성이 슬프게 탄식하며 애원하는 소리를 내가 잘 들었다.’
▶ 사랑하는 에브라임(남유다)이 바벨론에 의해 무서운 징계를 받은 것을 마음 아파하시며 저들과 새로운 언약을 일방적(一方的)으로 맺었다.
렘 31:31-34 /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내 백성아, 너희는 똑똑히 듣고 알아라.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 전체를 상대로 새 계약을 체결하겠다. 32) 물론 내가 그들의 조상들과도 계약을 체결한 일이 있었으나 이번에는 그것과 아주 다른 새 계약이다. 그들의 조상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 나는 그들을 데리고 나왔다. 내가 이렇게 그들을 해방시키던 날에 그들과 계약을 체결하였다. 나는 그 계약을 충실하게 지켜 주었으나 그들이 일방적으로 그 계약을 깨뜨려 버렸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미워하고 징계하였다. 33) 그러나 이제 내가 이스라엘 백성과 체결하려는 새 계약은 계약 자체가 완전히 옛 것과 다를 것이다. 이 계약은 내가 각 사람과 개인적으로 체결하겠다. 나는 이제 나의 새 계약을 돌판에 써서 그들에게 주지 않고 그들 각자의 마음과 양심에 새겨 놓겠다. 나는 이렇게 내 법을 그들의 가슴속에 새겨 놓고 그들의 부드러운 살과 핏속에 넣어 주어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도록 하겠다. 34) 그러면 아무도 다른 사람을 훈계할 필요가 없고 아무도 자기 형제에게 ‘주님을 알고 두려워하여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는 가장 친한 사람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내가 누구인가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나를 알 때가 오면 나도 모든 인간의 불순종과 반역을 용서하고 더 이상 인간의 악행과 허물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온 세상의 주인으로서 하는 말이다.”
● 에스겔 선지자도 에스겔 11:19-20에서 이 말씀을 언급하였고, 예수님께서도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마지막 성찬식을 하면서 새언약을 언급하셨다.
마 26:28 /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 개개인과 하나님 사이에 새언약을 맺으려고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눅 11:9-13 / 구하라, 주실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어주실 것이다. 10)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 13) 너희가 비록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녀들이 원하는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2.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의인 한 사람이 되기 위해 죄를 멀리하자.
▶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면 어느 누구라도 위대한 역사를 일으킬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곳,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뽑으셔서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신다. 또 아모스 선지자는 양 치는 목동이요, 뽕나무를 배양하며 뽕따서 밥 먹고 사는 농부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극히 평범한 그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선한 역사를 이루어 가셨다.
약 5:17-18 / 엘리야는 우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비가 오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18) 다시 비가 오게 해주시기를 기도하자 비가 쏟아져서 초목이 다시 푸르게 되고 들의 곡식들이 자라서 열매를 맺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엘리야를 우리와 전혀 차원이 다른 슈퍼맨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엘리야는 우리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 아니 오히려 우리들보다 별 볼일 없는 길르앗에 우거하던 촌뜨기였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슈퍼맨 같은 능력의 사람을 쓰시지 아니하고 오히려 별 볼일 없는 평범한 ‘한 사람’을 쓰시기를 원하신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나 요셉과 같은 ‘한 사람’을 찾으시며, 그 ‘한 사람’을 통해 역사하신다.
딤후 2:20 / 부잣집에는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만이 아니라 나무와 진흙으로 만든 그릇도 있어서 값비싼 그릇은 손님을 접대하는 데 쓰이고 값싼 그릇은 부엌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데 쓰입니다.
위의 20절은 21절을 설명하기 위하여 예를 든 것이매 21절을 주목해야 한다.
딤후 2:21 / 만일 그대가 죄를 멀리한다면 순금으로 만든 그릇, 곧 집안에서 가장 비싼 그릇이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장 고귀한 목적을 위해서 그대를 사용하실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금그릇, 은그릇, 질그릇, 나무그릇들은 엄연히 질적(質的)인 차이가 있지만 그런 것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네가 금그릇이냐? 은그릇이냐? 질그릇이냐? 나무그릇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네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다. 먼저 불의한 일에서 떠나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그런 사람은 누구든지 금 그릇처럼 귀하게 사용될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는 달리 자기를 깨끗하게 한 사람이 제일 귀한 그릇이라는 것이다. 많은 분들이 잘못 알고 있다. 사람들은 무턱대고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했지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모르고 있다. 능력이 많고 적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세상적인 기준을 그대로 하나님의 일에도 적용하려고 하는 우(愚)를 범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외형적인 준수한 외모만을 보았다. 사실 사울 왕은 이스라엘 사람 중에 외모로 볼 때 가장 뛰어난 남성이었다. 이스라엘에 그보다 잘생긴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키가 커서 다른 사람들이 그 옆에 서면 어깨 아래 정도밖에 안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것과 사람이 보는 것은 달랐다. 얼마 가지 못해 아니 2년도 못 되어 사울 왕의 거침없는 행동은 하나님의 눈 밖에 벗어나기 시작했고 결국 버림받은 왕으로 삶을 마쳤다.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데 가장 큰 공헌을 했던 사무엘 선지자마저 심지어는 하나님께서도 사울 왕에게 실망하고 돌아섰다.
슬픔에 젖어 있는 사무엘 선지자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 기도를 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다가 실수를 한 사무엘 선지자(삼상 16장) / “너는 사울 때문에 언제까지 슬퍼할 작정이냐? 나는 이미 그를 버렸다. 그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다. 너는 이제 올리브기름을 뿔에 가득 채워 가지고 베들레헴으로 가서 이새라는 사람을 만나라. 나는 그의 아들 가운데서 새 왕이 될 사람을 하나 골라 놓았다.”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여 즉시 길을 나섰다. 사무엘은 이새와 그의 아들들도 제사에 초대하고 그들 역시 몸을 씻은 뒤 새 옷으로 갈아입고 오게 하였다. 이새가 자기의 아들들을 거느리고 성소로 들어서는데, 맨 먼저 장자 엘리압이 사무엘의 눈에 띄었다. 그래서 사무엘은 속으로 ‘그가 틀림없이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아들이겠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너는 그의 용모가 특출하고 키가 큰 것만을 가지고 판단하지 말아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다. 사람은 눈에 뜨이는 외모를 보지만 나는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본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대목에서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이새의 아들들을 면접하였더라면 이러한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새는 엘리압의 뒤를 이어 아비나답 그리고 삼마를 불러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으나 사무엘은 “이 아들도 여호와께서 뽑으신 사람이 아니오.”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이새가 자기 아들 일곱을 모두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으나 사무엘은 매번 “이 아들은 여호와께서 뽑으신 아들이 아니오.” 하였다. 그러더니 사무엘이 이새에게 물었다. “그대의 아들은 일곱뿐이오?” 이새가 대답하였다. “막내아들이 아직 남았는데 그 아이는 지금 들에서 양 떼를 지키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명하여 사람을 보내어 막내아들을 데려왔다. 그는 눈에 총기가 있고 혈색 좋은 청년이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그가 바로 내가 택한 사람이니 그에게 기름을 부어라!” 이에 사무엘은 가져온 뿔에서 올리브기름을 다윗에게 붓고, 그의 형들이 보는 앞에서 왕으로 삼았다. 그 순간 여호와의 성령께서 다윗을 사로잡고, 그 이후로는 그에게서 떠나지 않고 함께 계셨다.
사도행전 13장에서 이렇게 보충설명을 하였다.
행 13:21-22 / 이때 백성들이 왕을 세워 주실 것을 요구하자 하나님께서는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그들의 왕으로 세우셔서 40년 동안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22) 그리고 그를 물러나게 하신 뒤에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그가 내 뜻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하고 칭찬하셨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무엇보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 즉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자기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마음과 정성, 힘을 다하여 순종할 때에 귀한 그릇이 된다.
신 8:2-3 /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난 40년 동안 저 광야에서 여러분을 인도해 주신 그 여정을 모두 돌아보십시오. 그 목적은 여러분의 고집을 꺾어 겸손하게 낮추어 놓는 한편, 여러분이 과연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것인지 아닌지 여러분의 마음을 시험하여 알아보시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3) 주께서 여러분의 고집을 꺾으실 때에 여러분을 굶주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여러분도 몰랐고 여러분의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주께서 여러분에게 먹여 주셨습니다. 그 목적은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주께서 여러분에게 가르치시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뜻하신 그 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요셉이나 다윗은 무슨 능력이나 자격을 제대로 갖춘 사람이 아니었다. 요셉이나 다윗뿐일까?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은 사람들을 보시라. 아니 가깝게는 우리 자신과 옆에 있는 분들을 보시라.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우리가 무슨 능력이 많아서가 아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시 147:5)께서 겨자씨만한 능력이 필요하실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오직 성결된 사람이다.
성결한 삶은 한꺼번에 또는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하게, 지속적으로 “성결하게(to be sanctified)” 된다. 성결한 삶을 위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깊은 교제(交際)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지켜 나가며,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생활의 염려에 앞서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자 / 예수님은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일을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하면서 그분을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그분은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불어 주실 것이다.”(마 6:33)라고 인생의 우선순위를 말씀해주셨다. 한국어 성경에는 없지만, 영어성경에는 33절 서두에 ‘그러나(But)’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것은 33절 앞에 나오는 내용과 달리하기 위해서 사용한 단어이다.
33절 앞부분인 25절 이하를 보면 먹고, 마시고, 입는 의식주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의식주 문제를 이야기하며 두 가지 예화를 소개하고 있다. ❶ ‘공중에 나는 새’를 예를 들어 말씀하셨다. 공중에 나는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새들을 살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❷ ‘들의 핀 백합화(원문에는 잡풀)’를 예를 들어 말씀하셨다. 들에 핀 잡풀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돌보시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너희들을 하나님께서 돌보시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성도의 필요를 알고 계시며 책임져 주신다. 이방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고 방황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인생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 드려야 한다. 물질, 시간, 재능과 은사도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문제에 깊숙이 관여해주신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때 하나님께서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를 책임져 주실 것이다.
▶ 그렇다. 이제라도 하나님께 기도하자.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결케 되기를 위해 기도하자.
눅 11:13 / 너희가 비록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녀들이 원하는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요 14:12-17 /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행하는 일을 그도 행할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큰 일도 이룰 수 있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이나 구하라. 내가 그것을 이루어 줄 것이다. … 14) 그렇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15)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말을 지키라. 16) 그러면 내가 아버지께 구할 것이며, 아버지께서는 다른 돕는 자를 너희에게 보내 너희와 영원히 같이 계시게 할 것이다. 17) 그분은 진리로 인도하시는 영이다. 세상은 그분을 맞아들일 수 없다. 세상이 그분을 찾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지금은 그분이 너희와 함께 계시고 훗날에는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 금과 은을 귀히 보고 나무와 흙을 천히 보는 것은 세상적인 기준이다. 목사나 장로는 귀하게 보고 집사나 일반교인은 낮게 보는 것은 성경과는 거리가 멀다. 귀한 그릇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직분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쓰임 받느냐?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하느냐?”이다.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할 때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하인들처럼 말없이 순종한다면 귀한 일군(축복의 통로, 기적의 통로)이 될 수 있다. 우리 자신들을 하나님이 마음껏 쓰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 귀한 일군의 태도이며, 최선을 다하여 일하고도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 입니다.”(눅 17:10)라는 고백을 할 때에 하나님 교회의 기둥과 같은 일군이 될 것이다.
3. 이런 마음으로 일하는 자를 찾아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
마태복음 5:38-42의 말씀은 지키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
❶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 네 한쪽 뺨을 때리는 사람이 있거든 다른 쪽 뺨도 돌려대라(39절). ❷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거든 겉옷까지 벗어주라(40절). ❸ 비록 가고 싶지 않더라도 누가 너더러 오리를 같이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 주어라(41절). ❹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어 달라는 사람에게 등을 돌리지 말라(42절).
그러나 예수님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반드시 지키라고 하셨다.
마 5:44-48 /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45)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답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분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비추어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않은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46) 만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무슨 미덕(상을 받겠느냐?)이 되겠느냐? 세리들도 그 정도는 하지 않느냐? 47) 만일 너희가 너희 이웃들과만 가까이 지낸다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무엇이겠느냐? 이방인들도 그렇게는 하고 있다. 48) 그러니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
▶ 마태복음 5:38-42의 말씀 전에 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21-24을 말씀하셨는지 이 문제부터 해결할 것이 있으면 해결하고 마태복음 5:38-42의 말씀으로 넘어가야 한다.
마 5:21-24 / 모세의 율법에는 `만일 네가 사람을 죽이면 너도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조문이 있다. 22) 그러나 나는 이 조문에 덧붙여 말한다. 까닭없이 형제에게 화내는 자는 심판받을 것이며, 어리석다고 욕하는 자는 법정에 끌려갈 것이며, 형제를 저주하는 자는 지옥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만일 네가 성전 제단 앞에 서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려고 할 때 네게 원한을 품은 형제가 생각나거든 24) 그 제물을 제단 앞에 그대로 두고 가서 그에게 사과하고 화해하라. 그리고 와서 제물을 하나님께 드려라.
22-24절의 3절의 말씀에 ‘형제’라는 단어가 3번이나 나온다. 왜 ‘형제’라는 말을 이렇게까지 쓰셨는지?
요일 4:20 /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지메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특히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문에 주어진 말씀과 재차 보충 설명까지 하셨다.
마 6:12 /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였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마 6:14-15 /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앞에 나오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은 세상의 것에 대한 용서인 반면에 하나님께서 용서를 해주시는 것은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죄인을 죄악에서 구원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용서의 질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말이다.
나는 이러한 기도를 드렸다 / 주님! 오늘 저는 겁도 없이 이 찬송을 부르며 '죄송합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일만달란트를 탕감해 주셨건만 나는 이웃이 나에게 빚진 일백데나리온의 빚을 갚지 않는다고 감옥에 가두는 경우가 한 번도 아닌 일흔 번씩 일곱번을 그렇게 했으니(마 18:23-35) ... 이렇게 하면서 주일 교회에 나와서 예배랍시고 엎드리기는커녕 '나는 의롭다'고 하고 있었으니... 주님! 오늘은 세리가 드린 기도가 나의 기도가 되게 하옵소서.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생각도 못하고 슬픔에 잠겨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나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 / 성결을 추구하는 사람은 ❶ 나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일까요?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일까? ❷ 내가 섬김을 받으려는 사람일까? 남을 섬기려는 사람일까? ❸ 내가 복을 받으려는 사람일까? 남에게 복을 빌어주는 사람일까? ❹ 남의 허물을 아직도 마음에 품고 있어 미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일까? 중심에서 남을 용서하는 사람일까? ❺ 내가 사랑을 받으려는 사람일까요? 남에게 사랑을 베풀어주는 사람일까?
힌트 : 영어로 ‘죄’는 SIN이지요. 이 단어를 보면 S와 N사이에 I(내)가 있다. 다 맞힌다면 10점이다. 그러나 이 뜻을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은 100점짜리이다.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나는 10점보다는 100점을 맞고 싶다. 그런데 나 역시 20~30점 정도 밖에 안 되니 오늘도 두 손 모아 ‘약속하신 성령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뿐이다.
▶ 특히 마태복음 18:19-35에 나오는 용서에 대한 말씀은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단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죄악된 일에 대한 해답이 될 것이다.
마 18:19-20 / 내가 또 진정으로 말한다. 만일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 위에서 마음을 합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마 18:21-22 / [용서의 교훈] 그때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물었다. ‘주님, 형제가 제게 죄를 지었을 경우에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22)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아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라.’
마 18:23-35 / [무자비한 사람의 비유] 하늘나라는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정해진 날에 셈을 맞춰 보는 것에 비할 수 있다. 24) 셈을 하는 중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 나왔다. 25) 그가 빚을 갚을 돈이 없음을 알자 왕은 그의 아내와 자녀들과 그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는 왕 앞에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제발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곧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빌었다. 27)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놓아 보내며 빚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사람을 만나자 멱살을 잡고 당장에 내놓으라고 다그쳤다. 29) 그 사람이 엎드려 조금만 시간 여유를 달라고 빌었으나 30)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그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다른 종들이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고해 바쳤다. 32) 그러자 왕은 용서해 주었던 그를 불러서 말하였다. `이 악독하고 뻔뻔한 놈아! 네가 애걸하기에 불쌍히 여겨 내가 그 엄청난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33) 그러니 내가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남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34) 왕은 몹시 노하여 그를 형리에게 보내고 마지막 한 푼까지다 갚게 하였다. 35) 그러므로 만일 너희가 진심으로 네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1달란트 = 6,000데나리온 / 1만 달란트 = 6,000만 데나리온 / 1데나리온 = 하루 품삯(최저 10만원) / 1만 달란트 = 60,000,000일×10만원 = 164,384년 동안 한 푼도 안 쓰고 저축한 액수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다면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빚은 탕감해 주는 것은 기본적인 의무이다. 그것도 형제에게 말이다. 이것조차 못한다면 그는 사람도 아니요 미물만도 못한 극악(極惡)한 인간이다. 누가 뭐라 할지라도 일만 달란트를 빚질 정도의 사람이라면 1백 데나리온은 적은 돈으로 충분히 탕감해 줄 수 있었다. 아니 더 한 것이라도 탕감해 주었어야 한다.
‘내가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남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은 결코 무리하거나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닌 주머닛돈처럼 동냥도 할 수 있는 액수일 것이다.
4. 근래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신 실례
1. 20세기 초에 임한 웨일즈의 부흥운동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첫 십년간 하나님께서는 광범위하고 강력한 부흥을 이 땅에 보내셨다. 이 부흥의 불은 유럽과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북남미, 한국 등 전 세계적으로 활활 타올랐는데, 처음 2년간 이들 나라에서만 5백만 명 이상이 예수님을 믿었고, 그 발화점으로 하나님께서는 ‘웨일즈’(Wales)를 택하셨다.
하나님께서 부흥을 일으키실 때 사용하시는 사람의 유형이나 방식, 또는 임하는 현상이 매우 다양하다. 조직적이며 지적 능력을 갖춘 사람을 쓰는가 하면, 때로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무식한 사람을 사용하신다. 어떤 때는 조그만 기도회로부터 시작되기도 하고, 대중 집회를 통해서 역사하기도 한다. 혹은 갑작스럽게 임할 수도 있고, 점진적으로 올 수도 있다. 그러므로 부흥의 요인에 있어서 어떤 공식화된 틀을 규정해 놓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하나님의 주권과 다양성의 생생한 실례가 ‘이반 로버츠’(Evan Roberts,1878-1951)를 중심하여 일어난 [웨일즈 부흥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1. 주여, 저를 굴복시켜 주옵소서!
1904년 웨일즈에서 부흥이 일어나 약 5개월간에 10만 명 이상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 부흥의 불길에 뇌관 역할을 담당했던 26세의 이반 로버츠는 가난하지만 경건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칼빈주의적 감리교회에서 성장했다. 이반이 12살 되던 해에 다른 소년들처럼 탄광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며, 13세가 되던 1891년부터 자신을 성령님으로 충만케 하시며 웨일즈에 부흥을 보내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했다. 갱도 안에서 일할 때도 그는 계속 기도와 찬양, 성구 암송으로 시간을 보냈고,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오면 여러 시간 동안 성경을 읽었다. 사실 그는 식사시간보다도 기도하기를 더 좋아했고 자주 한밤중에 일어나 부흥을 보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하곤 했다. 그는 웅변가의 어떤 기술도 없었고, 박학도 아니었다.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책은 성경이었으며,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말씀에 대한 정열로 불타고 있었다. 로버츠가 25세가 되었을 때, 그가 방에서 큰 소리로 설교를 하고, 기도를 한다고 집주인이 그를 내쫓았다. 지하 탄광 안에서 휴식시간에 동료들이 담배를 피운다든지 웃으며 지내는 동안, 그는 조용히 앉아서 성경을 읽었다.
1904년 봄 어느 날 밤 로버츠는 새벽 1시에 잠에서 깨어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온 몸으로 체험하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외와 기쁨으로 충만한 것을 느꼈다. 1904년 10월 28일 목요일에 어느 기도회에 참석한 이반은 아침 7시경에 “주여, 저를 굴복시켜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성령님께서 이반에게 “네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즉시 이반은 화답하며 “주여, 그렇습니다. 저를 굴복시키소서!”라고 외쳤다. 아침 9시 예배시간에 무릎을 꿇고 계속 부르짖을 때 성령님께서 그에게 임하셨다. 그는 이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어떤 살아있는 힘이 내 가슴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자꾸만 더해 갔는데, 거의 터질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눈물과 땀이 하염없이 흘러내렸고 가슴이 끓고 있었는데 피가 솟구쳐 나오는 듯 했다. 내가 굴복된 후 평강의 물결이 물밀 듯 밀려 왔으며, 심판 날에 멸망당할 영혼들에 대한 연민에 휩싸여 눈물을 흘렸다.” 이 순간 이반은 13년간이나 기도하던 성령님의 충만을 받았고, 그와 동시에 부흥을 위한 기도 역시 응답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기도하는 사람을 통하여 웨일즈에 부흥이 임하게 하셨던 것이다.
1904년 어느 날 로버츠가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웨일즈에 부흥을 보내실 것이며, 10만 명의 불신자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올 것을 계시하여 주셨다. 그런 후 성령님은 로버츠에게 앞으로 올 부흥은 프레리 초원에 불이 번지는 것처럼 영국에 퍼진 후,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전역에 퍼져갈 것을 보여주셨다. 이 비전에 불타서, 로버츠는 설교할 기회를 찾았지만, 전혀 없었다. 그는 그의 목사에게 설교를 시켜 달라고 간청했으나, 처음에는 당황한 목사가 이처럼 너무 열광적인 탄광 노동자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여러 번 더 간청한 후에, 목사는 마지못해 허락하였다. "좋아, 이반, 다음 주 수요일 저녁예배에서 설교를 할 수 있네, 만일 누군가가 남아서 듣는다면 말이야."라고 말했다. 17명이 의아해하며 뒤에 남았다. 젊은 전도자는 담대하게 하나님께 들은 말씀을 선포하였다. 그의 메시지는 단순했다.
① 당신은 생각나는 모든 죄를 하나님께 고백해야만 한다. ② 당신은 생활 속에서 좋지 않은 습관은 모두 제거해야만 한다. ③ 당신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즉각 순종해야 한다. ④ 당신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대중에게 나아가야만 한다.
비록 로버츠의 설교는 미숙했지만, 목사와 17명의 교인들은 마음이 하나님을 만남으로 불타기 시작했다. 다음날 밤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젊은 설교자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으며, 부흥의 불길은 순식간에 다른 교회에 퍼져갔다. 그 후 30일 안에, 3만 7천명이 강단 앞에 나와서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했다. 그리고 5개월 안에, 10만 명이 웨일즈 전역에서 울면서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모여들었고 결국 로버츠의 비전은 성취되었다.
양의 뿔이라고 불리는 신문은 다음과 같이 개제했다. “이반 로버츠는 무명의 청년이지만,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는 순종하였다. 그는 자신이 지금의 사역에 인도된 것은, 성령님의 직접적인 인도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 번의 의심이나 망설임도 없이 그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그가 어디를 가든지, 마음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붙었다.”또 감리교 기록지는 이렇게 보고하였다. “웨일즈는 지금, 과거의 어떤 부흥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부흥의 격렬한 아픔과 환희의 한가운데 있다. 이것은 이른바 ‘도덕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웨일즈의 신문들은 새롭게 태어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의 명단을 싣기 시작했다. 대학은 문을 닫고, 학생들은 하나님을 찬미하고 노래하면서 기도 모임으로 향했다. 어린이들은 집안에서, 타작마당에서 그들 자신의 모임을 가지면서 그들의 영웅인-교회 목사들을 열심히 흉내 냈다. 남자들의 ‘기도 부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보고에 의하면, 그들의 기도는 뜨거웠고 정열적이었다고 한다. 어떤 마을에서는 ‘침대에서 나오자(Get-out-of-the-bed)’라는 기도 부대가 자랑스럽게 생겼다. 이들은 밤늦게까지 - 때로는 밤새 철야기도로 -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다른 남자들을 침대에서 일으켜 세워서, 그들의 죄를 깨우쳐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한밤중에 일어나 침대에서 기어 나와 집회장소를 찾으며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주 예수께 부르짖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어떤 기사에 의하면, 법정에서 재판관과 배심원이 심리를 중단하고 피고를 위해 기도하자 피고인이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한다.
부흥은 탄광 안에서도 똑같이, 갑자기 시작되었다. 광부들의 불경건한 말투가 완전히 바뀌어져서, 짐을 운반하던 동물들이 광부들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 그들을 순종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는 보고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이 부흥을 기뻐한 것은 아니었다. 교회의 성직자들은 경이롭고 엄중한 태도로 종교생활을 하였으므로, 어떤 성직자들은 이반 로버츠를 비전통적인 방법의 젊은 선지자라고 별명을 붙였다. 그들은 왜 로버츠가 기도할 때 미소 지으며, 설교할 때 왜 소리를 내서 웃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설교를 들으러 온 사람들은 그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빛이 있고, 그의 마음에는 주님의 기쁨이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대로, 로버츠는 영국에 급격한 부흥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영국에서 약 200만 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그런 후에 성령님은 서유럽과 북유럽으로 부흥을 확산시켰다. 성령님이 노르웨이에 ‘임하셨을’ 때 너무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왔기 때문에 회중에게 성찬을 베풀 성직자들이 부족하여, 평신도들에게 안수를 주고 성찬을 베풀게 하였다. 그런 후에 부흥의 불길은 한국과 아프리카, 인도, 중국 등 전세계로 확산되었다.
2. 성령님의 주권과 인간의 순종
부흥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강한 손이요, 능하신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영광을 인간과 공유하기 원하지 않으신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을 우상화한다면 부흥은 곧 시들어 버리고 오히려 성령을 소멸하여 그 역사에 거침돌이 될 수 있다.
이반은 이런 사실에 대해 매우 민감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회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성령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분이 집회를 주관해야 합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가 언제 어디로 설교를 하기 위해 갈 것인가를 사전에 미리 알리지 않았고 오직 성령님을 따라 움직였다. 그는 사람들이 집회에 오는 것이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만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일 사람들이 그를 보고 그의 말을 듣고 싶어 온 것을 직감할 때는 집회 도중에 떠나기조차 했다. 그는 심지어, 사람들의 관심이 자기에게서 떠나 그리스도에게만 집중되기를 고뇌하는 심령으로 기도했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님께서 자기로부터 부흥의 영을 거두어 가실지도 모른다고 염려했다. 그런 이유로 인해 어떤 때는 의도적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서 설교를 하는 것을 삼갈 때도 있었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저는 아무 것도 여러분들에게 드릴 것이 없어요. 여러분을 복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이러한 부흥의 가치관을 갖고 있던 이반이 인도하는 집회에는, 언제나 성령님의 권능이 마치 연못의 수면 위에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듯 회중 전체에 임하곤 했다. 온 회중은 기도와 찬양에 있어 모두가 인위적이 아닌 성령님의 주장하심에 따라 순종하였던 것이다.
3. 찬송과 함께 기쁨이 가득 찬 부흥
웨일즈의 부흥에는 설교가 거의 없었다. 집회의 3/4이 찬양시간으로 이루어졌으며 걷잡을 수 없는 기쁨이 뒤따랐다. 흔히 부흥에는 언제나 죄의 통회와 눈물이 있기 때문에 경직되고 침울한 것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를 통해 하늘의 기쁨을 마음에 간직한 사람은 언어와 태도로 기쁨을 나타내야 하는데, 늘 우울하며 슬픈 기색을 보이는 것은 정상적인 현상이 아니다.
이 기쁨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메아리요, 성령님을 통한(롬 14:17) 성령의 열매(갈 5:22)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부흥은 기쁨을 수반한다(빌 4:4; 살전 5:16).
이반은 항상 미소를 머금은 채 기도했고 웃으며 설교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 놀라운 삶입니다. 나는 너무나도 행복해서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느낍니다.” 이반은 강단에 서서 환희로 빛을 발하는 표정을 지은 채 찬송을 인도했다. 그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는데 심지어는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다. 그는 완전한 자유로움, 전혀 엄숙한 표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의 모습은 매우 감명 깊은 것이었다. 그는 마치 행복감에 도취되어서 끓어오르는 것도 같았고 기뻐 날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설교하지 않았다. 그저 기도와 찬송 사이사이 간증과 몇 마디의 말뿐이었다. 그것도 한 번에 몇 문장을 넘기지 않았다. 이렇듯 찬양과 기쁨이라는 특성이 웨일즈의 부흥운동을 지배하고 있었다.
4. 성령님의 임재와 부흥의 여파
성령님의 부흥이 임하자 웨일즈 전역에는 하나님의 임재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았다. 교회나 기도회 때 뿐 아니라 거리나 기차 안에서, 가정이나 심지어 선술집에서도 사람들이 성령님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장소 여하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실재와 가까이 계심의 의식이 뒤따랐다.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의식, 영원이 가까이 그리고 실제적으로 다가와 있는 듯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의 구름이 여러 달 동안 웨일즈 전 지역에 낮게 드리워 있었기 때문에, 오락이나 술잔치 자리는 비었고, 많은 사람들이 술집에 들어가 주문한 술에 손을 대지 못한 채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하나님의 임재 의식이 얼마나 강했던지 술잔을 입에 가져갔던 팔이 마비될 정도였다. 풋볼 팀들이 해체되었고, 그 팀에 소속되어있던 선수들은 시합보다 주님의 은혜에 대해 간증하는 것을 더 중요시했다.
그리고 서점에 있는 성경책이 품절 되었다. 그리고 탄광은 모독적인 언사를 쓰는 장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소로 변했으며, 가정마다 기쁨과 찬양으로 가득 찼으며, 욕설과 저주의 말을 일삼던 죄인들이 변화되고, 그들은 성령님의 기름부음 받아 공적인 모임에서 성경을 인용하며 간증하였다.
이반 로버츠는 2년간의 짧은 부흥사역을 담당하고 은퇴하여 1907년부터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중보기도에만 전념했다. 참으로 웨일즈의 부흥은 하나님이 그 주도권을 쥐고 하나님만 영광 받은 부흥운동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2.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꼭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가 로버트 하디 선교사(Robert Hardie)에 대한 이야기이다.
로버트 하디는 우리들에게 친숙한 사람이다. 토론토 대학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캐나다연합교회의 전신인 캐나다감리교에서 조선으로 파송을 받았다. 하디는 1900년 경 함경도 원산에서 선교와 의료 활동을 했는데, 의료 활동도 신통치 않았고 선교 활동도 신통치 않았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성령이 내게 오셨을 때 성령의 첫 번째 요구는 교인들 앞에서 내 과거의 실패와 원인을 자백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경험이었다.” 처음에는 사람을 감동시킬 만한 능력이 자신에게 없는 줄로 알았다. 그러다가 나중에 영적인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조선 사람들을 미개하고 무지한 백성들로만 생각했을 뿐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양 선교사의 눈에 비친 구한말 조선 사람들은 그저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로 보였을 것이다. 성령님을 체험하기 전 하디 선교사는 환자들이 기피하는 권위적이고 엄격하고 쌀쌀맞은 의사였다. 하디는 1903년 8월 30일 원산감리교회 주일 예배 시간에 자신이 그동안 교만했던 것과 조선 사람들을 멸시했던 것을 회개했다. 서양 선교사가 조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교만함을 고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소식이 원산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도 하디를 따라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하디에 의해 시작된 회개가 널리 퍼져서 1907년 있었던 평양대부흥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1. 하디선교사는 의사였던 하디선교사는 대단히 성실하고 의지가 강한 사람으로 조선 사람들에게 정말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쳤지만, 이름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을 얻기를 갈망하였다.
2. 그러나 조선 교인들에게서 ‘분명하고, 지속적인 회개의 구체적인 열매’를 보지 못하여 깊이 좌절하고 있었다.
3. 그러던 중 1903년 원산에서 열린 선교사 수련회에서 말씀을 전할 준비를 하다가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였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하디에게 조선 사람들에게서 진정 회개의 열매를 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셨다.
4. 조선 교인들에게서 진정한 회심의 열매를 얻고자 하는 동기도 옳고, 열심히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좋으나,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던 것이 문제임을 깨달았다.
5. 성령님을 체험한 하디 선교사는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자신의 학력과 의사라는 직업, 영국시민이라는 교만이 있었음을 회개하였다.
6. 성령님께서는 하디에게 그것을 고백하게 하셨다. “성령님이 내게 오셨을 때 성령님의 첫 번째 요구는 내 교인들 앞에서 내 과거의 실패와 그 원인을 자백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경험이었다.”
7. 하디는 이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했다. 선교사 수양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동안 내내 울면서 동료 선교사들 앞에서 선교의 결실이 없었던 원인이 자신의 ‘교만과 강퍅함, 믿음이 부족‘한 연고라고 공개적으로 통회했다. 하디의 고백은 동료 선교사들의 회개로 이어졌다.
8. 그리고 하디는 조선 교인들 앞에서도 낱낱이 고백하고 눈물로 참회하고 회개하였다. 조선 교인들은 하디 선교사의 고백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고, 그들에게서도 회개가 터졌다. 이것이 하디 대 부흥의 시작이었다.
9. 하디 선교사를 통해 선교사들과 조선 교인들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디 선교사의 회개 후 하디 선교사의 성품이 완전히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10. 같은 토론토 대학을 졸업한 제임스 게일(James S. Gale)은 은혜를 받기 전 하디와 은혜를 받은 후 하디가 180도로 달라졌다고 했다. “은혜를 받은 후 하디는 마치 40일을 금식한 후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 얼굴에 광채가 나던 모세의 얼굴과 같았고, 베드로가 처음 갈릴리에서 부름을 받았을 때와 베드로서를 쓸 때만큼이나 차이가 있었다.”
11. 성령님을 체험하고 공개 회개를 하기 전, 하디 선교사는 솔직히 환자들이 기피하는 엄격하고 쌀쌀맞아 교만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의사였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후 하디의 성품과 인격이 완전히 변했다고 한다. ‘차라리 아픈 것이 더 났다’며 병이 들어도 하디에게 치료를 받기를 주저했던 환자들은 하디가 은혜를 받은 후 손만 만져도 병이 나았다고 증언하였을 정도이다.
12. 성령님의 은혜를 체험한 후 하디의 성품과 인격과 삶은 이전과 확실히 달랐다. 하디는 조선 교인들에게 진정한 회개의 모델을 제시한 것이다. 과거에도 그는 회개에 대해서 설교했다. 하지만 그 실례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그는 회개의 설교와 더불어 자신의 회개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죄를 깨닫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회개가 실제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13. 이렇게 원산 부흥은 일어난 것이다. 1906년 8월에 평양에서 선교사들의 성경공부와 기도모임이 있었을 때, 강사로 초청된 하디는 자신이 경험했던 은혜를 간증했다. 은혜를 받기 전 얼마나 자신이 교만했는지, 그런 자신에게 어떻게 성령님께서 찾아오셔서 자신을 변화시켜주셨는지를 진솔하게 전했다.
14. 이날 하디는 이렇게 외쳤다. “사람이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무엇을 잘해보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심과 믿음의 부족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아무리 높은 이상도 영적인 힘이 없다면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러한 영적인 힘은 계속적인 기도로만 얻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 슬프도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역하는 목회자가 얼마나 되는가!”
15. 선교사들은 이때부터 1907년 초에 모일 겨울사경회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 기도의 열매가 1907년 평양대부흥이었다.
3.1921년 가을 경성성서학원(서울신학대학교 전신)에서 촉발된 부흥운동
부흥의 도화선은 당시 성서학원 교수였던 이명직 목사의 회개와 성결 체험이었다. 그는 3.1운동 이후 심각한 정신적 공황과 영적 탈진에 시달리다가 육체적 탈선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는 이를 계기로 금식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세례, 곧 하나님의 초월적 임재를 체험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강의실에 들어가 학생들에게 자신의 체험을 간증하면서, 성령님의 감동을 따라 원하는 사람은 함께 새벽기도를 하자고 요청했다.
그러자 많은 학생들이 새벽기도에 참여했으며, 그 자리에 성령님께서 크게 역사하셨다. 그와 동시에 성경학원 전체에는 신음하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로 진동하고, 교실은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되었다. 처음에는 갑반(甲班) 남학생들만 모였지만, ‘성령의 불’(聖火)은 순식간에 을반(乙班) 여학생들에게까지 번져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그곳에도 성령님의 놀라운 임재가 있었으며, 그것은 “마치 모세의 장막과 솔로몬의 성전에 충만하게 임했던 하나님의 영광”과 같았다. 이렇게 되자 온전한 은혜를 얻기 위해 수업을 전폐하고 금식하며 기도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으며, 의견을 따라 기도회가 15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때에 성령님께서 친히 임하셔서 모든 사람의 행위와 마음속에 있는 죄악을 찌르셨고, “자복하고 회개한 죄악은 북악산보다 많았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경성성서학원 부흥운동의 특징은 성령의 역사와 통회 자복하는 회개였다. 성령의 역사로 내면의 죄악이 드러나게 되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놓고 회개했던 것이다. 그래서 성서학원은 죄악을 회개하는 몸부림으로 가득하였다. 이런 회개는 단지 말로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훔친 물건은 돌려주고, 미워했던 사람에게는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는 회개의 열매로 가득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죄에서 해방된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
한편, 이 부흥운동의 불길은 먼저 40일 특별 새벽기도회로 모이던 아현교회를 태웠다. 아현교회는 1922년 1월, 40일 새벽기도회를 열고 모여 출애굽기를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셋째 날부터 부흥이 일어났다. 각각 성령님의 찔림을 받아 여러 가지 말로 못할 죄를 통회 자복했으며, 어떤 사람은 죄악의 고통을 견뎌내지 못하고 기절할 정도로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이 부흥운동의 불은 그 직후에 열렸던 전국교역자 수양회도 휩쓸었다. 이때 전국에서 올라왔던 교역자들이 충만한 은혜를 받고 각자의 곳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각자의 교회로 돌아가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면서 부흥의 불은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그래서 이명직은 한국교회가 이때부터 비로소 전국적으로 새벽기도회를 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성결교회 신자들이 새벽기도회에서 은혜를 받는 것을 보고, 다른 교파들도 새벽기도회를 갖게 되어 전국적으로 전 교파적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
4. 휘튼대학 1995년의 부흥
강력한 회개, 성령님의 비상한 임재, 부흥에 대한 목마름, 공개적인 죄의 고백에 이르기까지 그가 전하는 휘튼부흥은 100년 전 우리가 경험한 평양 대부흥과 너무도 유사했다.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그가 들려주는 증언을 들으면서 얼마나 강력하고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휘튼에 임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1995년 3월 19~23일까지 열린 저녁집회에 임한 성령의 역사는 5월 7일까지 6주 동안 휘튼대학 캠퍼스를 휩쓸었다. 그 불을 가지고 온 사람은 텍사스주 브라운우드의 하워드 페인 대학교에서 온 브랜디 맥과이어와 제임스 한이었다. 이 두 학생의 간증은 수백 명의 휘튼 대학생들을 깊은 감동으로 몰아넣었다.
한 여학생이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자 마치 뇌관이 폭발하듯 죄의 고백과 회개를 동반한 무서운 영적 폭풍우가 휘튼대학에 몰아쳤다. 그곳에는 일부러 감정을 자극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없었다. 그런데도 수십 명의 학생들이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간증 순서를 기다리며 서있었다. 이튿날 아침 6시가 되어도 집회가 끝날 줄 몰랐다.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가 휘튼에 임한 것이다. 이같은 성령의 역사는 집회 기간 내내 이어졌다. 그 현장에 참여했던 한 학생의 고백대로 그들은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 줄도 알지 못했으며 이전에 전혀 경험하지 못한 신비한 영적 체험을 했다. 죄에 대한 철저한 고백과 회개, 그리스도 안에서의 용서, 하나님과의 화목, 삶의 변화가 휘튼대학 공동체에 임했다. 휘튼대학 공동체는 의심할 바 없이 영적 각성의 한 시대 가운데 서있었다. 성령님께서 휘튼대학에 임하면서 공동체에는 뚜렷한 변화가 찾아들었다. 이웃에 대한 사랑, 불신 영혼을 향한 간절한 중보기도, 인종간의 화해가 캠퍼스를 지배했다. 또한 캠퍼스에 지속적인 기도 모임, 말씀 읽기와 연구에 대한 사모함, 해외 선교에 대한 관심, 기도 열기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학생들은 캠퍼스 밖과 벤치, 잔디, 복도와 수업 전후 빈 강의실에서 삼삼오오 모여 기도회를 가졌다. 무엇보다 놀라운 일은 부흥을 경험한 휘튼대학생 가운데 200∼300명이 강단으로 나와 자신의 생애를 해외 선교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부흥을 경험한 휘튼대학생들이 미국내 대학 캠퍼스로 흩어지면서 부흥은 요원의 불길처럼 미 전역으로 놀랍게 확산되었다. 1995년 3월 19일에서 23일까지 티오른 휘튼대학 부흥의 불길은 얼마 후 애즈베리와 무디, 예일을 비롯한 수많은 대학으로 옮겨 붙었다.
부흥은 이들 미국 대학만의 전유물이나 특권일 수 없다. 부흥은 결코 지나간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지금 지구 한쪽에서 임재하고 있고 현재 이 땅의 교회가 경험하고 있으며 또 경험할 수 있는 축복이다.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지만 아무 곳에나 임하지 않고 사모하는 곳에 임했다.
5. 과테말라 갈보리교회 마리아노 목사 “우상 섬기던 도시가 30여년새 복음화 98% 성시(聖市)로”3)
2012년 02월 16일 국민일보에 실린 글에 추가하였다. / 과테말라는 인구 1천2백만에 면적이 우리나라보다 약간 큰 중미의 작은 나라이다. 세계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중미의 변방국 과테말라가 세계적인 관심의 국가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❶ 중남미 국가로는 보기 드물게 과테말라의 기독교 인구가 50%를 넘어선지 이미 오래됐다는 사실이다. ❷ 기독교인의 비율이 0%였던 한 도시가 변하여 전체 시민의 92%가 복음화 되는 믿기 어려운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기적의 도시는 과테말라 시내에서 4시간 정도 떨어진 알모롱가(Almolonga)라는 산악도시다. 예수 믿고 변화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놀라운 ‘사례’가 있다. 바로 과테말라 산악지대에 위치한 작은 도시 ‘알모롱가’가 바로 그 증인이다. 인구 2만 여명의 이 도시는 30여 년 전만 해도 기독교 인구가 0%에 가까웠다. ‘마시몽’(스페인 사람들이 이 도시를 정복했을 때 이것까지 없애려 하였으나 주민들의 거센 항의로 가톨릭교회의 성인으로 탈바꿈시켜 주었다)이라는 우상을 섬기며 늘 폭력이 난무했다. 성인 남자들은 대부분 알코올 중독으로 크고 작은 싸움이 잦아 4개의 교도소로도 수용이 부족할 정도였다. 그러나 알모롱가는 지금 98%가 예수를 믿고 깨끗하고 은혜로운 도시로 변했다. 36곳의 술집 중 33곳이 사라졌고 늘 만원이던 교도소는 모두 폐쇄돼 주민행사나 결혼식 피로연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알코올 중독자도 거의 사라졌고 모든 가정이 회복됐다. 이 같은 변화의 중심에는 이 도시를 위해 목숨을 걸고 기도하며 사역 중인 리스카흐체 마리아노(알모롱가 갈보리교회) 목사가 있었다. ‘나를 섬기게 하기 위해 내가 너를 선택했다. 가난과 폭력을 좌우하는 악에 대해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게 된 그는 1970년대 중반 영적 전쟁을 선언했다. 일주일에 3-4일씩 금식하며 우상이 떠나가길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고 그들의 삶에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그 때 죽음이 임박하여 침상에 누워있어 죽으면 사용할 관을 준비해 놓은 한 여자에게 가라고 말씀하셨다. 생전 그런 기도를 해보지 못했던 목사는 두려웠지만 하나님이 선포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너는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외쳤을 때에 다 죽어가던 여자가 살아났다. 이것을 보고 있던 동네 사람들도 놀랐지만 기도한 마리아노 목사 자신도 놀랐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다. 이 기적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전해지자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성령의 역사는 교회만이 아니라 도시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이 변하기 시작하면서 도시를 위한 중보기도를 하기 시작하였다. 2만 명이 조상숭배를 하는 도시에 24개의 교회가 세워지고 19,000명의 교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따로 프로그램을 만든 것도 아니고, 전도하러 다닌 것도 아닌데 마리아노 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는 2천명 교인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영적 전쟁은 매우 격렬했다. 어떤 이는 교인들에게 먹을 것을 팔지 않았다. 교회로 몰려가 예배를 중단시키려 마술을 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많은 협박과 생명의 위협에도 이 지역에 복음을 증거했다. 어느 날 폭력배들이 마리아노 목사를 끌고 가서 손을 묶은 뒤 안면을 후려쳤고, 입에 총구를 넣고 방아쇠를 당겼다. 마리아노 목사는 자신을 보호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따그닥, 따그닥, 딸그닥” 결코 총은 발사되지 않았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간섭에 놀란 폭력배들은 겁을 먹고 그 길로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목숨을 건 영적전투를 통해 도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귀신들이 사람에게서 귀신이 떠나가고, 병든 자가 낫는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며 예수 믿는 일들이 일어났다. 범죄는 뚜렷한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돌 세례를 퍼붓던 깡패들이 모두 변화되어 지역 목사들이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복음의 위력은 이 지역 사람들의 근면과 끈기로 이어졌다. 주민들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할 만큼 낙후한 알모롱가는 척박한 자연환경과 사계절 구분이 없어 비가 잘 오지 않는 기후특성으로 농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해 농업생산성은 그야말로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물 부족 현상에 대대로 허덕이던 이곳에 기적같이 지하에서 샘물이 터져 나오고 솟아나는 풍부한 샘물을 이용, 식물을 재배하면서 살기 좋은 땅으로 변하고 있으며, 특히 주 생산물인 당근 성인 팔뚝만한 크기의 당근로 타국의 정상 크기의 당근보다 5배나 크며 더욱 달고 맛있는 당근이 나온다. 과거에는 한 달 수확물이 고작 트럭 6대 분량에 그칠 정도로 보잘 것 없었으나 하나님의 영광스런 ‘터치’를 경험한 이후 상상할 수 없는 땅의 축복을 받아 하루에만 벤츠 트럭 50대 분량의 수확물을 거두어들이는 기적의 땅으로 변모했다. 매년 다양한 농작물인 샐러리, 파, 꽃양배추, 양배추, 감자, 당근, 무 같은 농작물들이 현지 농부들의 세심한 돌봄 속에 쑥쑥 자라는데, 인근의 다른 마을에서 자라는 것들보다 2∼3배 크고 맛도 더 좋아 부러움을 사고 있다. 미국의 농업 연구가들이 수확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게 하는 과학적 원리를 시험하기 위해 알모롱가에 방문한 후에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하나님은 과학적 방법으로 출하하는 것보다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는 지혜를 알모롱가 농부들에게 주셨습니다.” 씨를 뿌리고 예전에 60일이 되어야 소출을 할 수 있는 것이 40일로 축소되기도 하고, 어떤 것은 25일로 축소되어 3모작을 할 수도 있었다.
5. 한국교회 제4의 부흥은 가능한가?
한국교회에는 최근 1907년에 일어났던 부흥의 불길이 한 번 더 일어나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고 새로운 부흥을 위해 움틀 거리는 움직임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한국교회 제3의 부흥은 2007년을 기해 다시 점화될 것인가? 부흥은 사람의 힘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조직과 조직의 결정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학술연구나 토론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분석이나 비판이나 평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지나간 부흥운동을 흉내를 냄으로 될 일도 아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면 부흥은 언제나 가능하다(슥 4:6). 때로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도 성령님의 주권적 임재가 나타나 새로운 부흥을 일으키기도 하신다.
나는 한국교회 제3의 부흥보다는 제4의 부흥을 고대하고 있다. 첫째는 1907년 평양의 부흥운동이다. 둘째는 6.25 전쟁 직후 피난시절 남한과 북한에 내려온 기독교인들이 모두 부산에 모여 민족과 교회와 개인의 죄를 회개하며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어린이부터 고령의 교계 지도자들까지 통곡하며 하늘을 향하여 끝없이 부르짖어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하던 시기이다. 셋째 기간은 1970-80년대 한국교회가 일 년에 12.5%까지 성장하며 힘 있게 일어나던 시기이다. 대형집회, 기도운동, 부흥회, 소그룹 성경공부, 제자훈련 등 교회성장과 함께 선교사역의 성장도 일어나 세계교회가 주목하던 기간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또 한 번의 부흥을 간구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1,200만 명이라 자랑해 왔으나 인구조사에 나타난 기독교인 수는 850만 정도로 알려지며 지난 10년 동안 천주교와 불교의 성장에 비해 1.5%나 감소되었다는 충격을 받고 아직도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통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1천200만이란 수자를 계속 사용하는 지도자들을 보고 있다. 한국교회는 새로운 부흥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교회의 영적 현실을 직시해야 미래를 볼 수 있다. 단지 숫자적 충격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어떻게 해야 한 번 더 살아날 것인지를 지켜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할 때가 되었다. 영적인 부흥에는 몇 가지 공통된 요소로 보인다.
1. 부흥 전에 언제나 영적인 갈급함이 있다.
성경의 첫 번째 부흥은 사무엘 시대 임했다. 사무엘과 백성들 가슴에 극심한 영적 갈증이 있었다. 이 갈증은 회개와 부흥으로 이어졌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전쟁에서 패배하고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이 전사했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마저 빼앗겼다. 엘리 제사장은 두 아들과 법궤의 소식을 듣고 뒤로 넘어져 즉사했다. 법궤를 가졌던 블레셋은 수많은 재앙을 당해 사람들이 죽자 법궤를 둘려주기는 했으나 하나님의 법궤가 있을 곳에 있지 않고 20년간이나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며 안타까움과 슬픔이 복 받혀 올랐다.
사무엘이 앞장서며 그들은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온 족속이 통곡하며 여호와를 사모하니라”(삼상 7:2). 죄를 회개하며 여호와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부흥은 사랑의 회복이다. 사무치는 슬픔을 견디지 못하는 사무엘의 가슴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는 고통이 있었다. 그는 백성과 함께 통곡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부흥에 점화 하셨다.
미스바에서 가슴을 찢는 금식이 선포되고 우상을 버리고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라... 여호와만 섬기라”며 강력한 회개를 촉구했고 사무엘의 애절한 도전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다(삼상 7:3-4).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사무엘은 백성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했다. 이스라엘은 새로워졌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도 기적으로 승리했고 빼앗긴 성읍들을 찾았다(삼상 7:1-27).
아모리 사람들과 조약을 맺어 평화도 찾아왔다. 부흥이 오면 모든 것이 잘 된다. 전국 방방곡곡을 순회하며 백성을 돌보는 사무엘과 같은 지도자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영적 부흥에는 백성의 죄를 슬퍼하고 쉼 없이 기도하는 지도자가 있었고 회개하는 백성들이 있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구약의 첫 번째 부흥은 사모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히스기아가 25세에 왕이 되자 부왕 때 섬기던 우상을 제거하고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에게 마저 분향하는 것을 보고 놋뱀을 파괴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려 노력하였다(왕하 18:6-7). 그 결과로 그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고, 앗시리아 왕도 섬기지 않고 적과의 전쟁에 승리가 있었다. 이사야, 호세아, 미가 선지자들이 그 시대에 백성들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백성들은 여호와께 돌아와 다시 그를 부르기 시작했다. 히스기아와 선지자들이 백성들과 함께 열정으로 하나님은 찾으며 부흥이 일어났다.
에스라의 가슴에도 영적인 갈망이 일어났다. 우상을 숭배하고 죄와 타협하며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낭독하고 가르쳤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 속에서 깨닫고 회개하고 삶을 정돈하고 하나남께로 돌아오는 부흥을 경험했다(느헤미아 8:1-18). 부흥에는 언제나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2. 부흥에는 하나님을 찾으며 드리는 간절한 기도가 있었다.
역사 속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의 대부분은 부흥을 갈망하는 기도 가운데서 나타났다. 1903년 웨일즈 부흥의 불길도 이반 로버츠라는 26세의 청년과 두 친구의 철야기도 중에 점화되었다. 이들을 매일 밤 모여 웨일즈의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성령님의 압도하는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 기도회는 즉시로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6개월 동안 끊이지 않고 기도가 계속 되었다.
웨일즈의 영적 부흥을 위해 애타게 기도하는 중 성령님의 강한 능력이 그 기도회를 압도하며 부흥의 불길이 치솟았다. 그는 ❶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❷ 모두 함께 하나님께 기도할 것 ❸ 모두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간곡히 간구하자 그의 간결한 메시지는 가슴마다 부흥의 불길을 점화했다. 하나님을 찾는 그의 목소리는 가슴마다 메아리쳐 부흥으로 연결되었다.
1903년에 있었던 원산기도회에서 타나난 부흥의 불길에는 남감리교 여자 선교사 메리 화이트와 카나다 장로교의 주이즈 맥컬리 두 선교사와 같은 기도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오래전부터 부흥을 위해 선교사들을 중심하여 이미 꾸준히 기도하고 있었다. 이 기도회에 부흥의 불씨가 된 하디 선교사도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
영국의 죠지 횟필드 부흥운동도 그의 정기적인 기도생활이 바탕에 있었다. 다니엘처럼 하루에 세 차례씩 기도하며 규칙적 기도하고 있었다. 규칙적인 기도생활을 그는 ‘은혜의 방법’(the method of grace)이라 부르기도 했다. 때로는 그가 하루에 9시간까지 기도함으로 사역을 뒷받침했다. 부흥은 기도로 인한 성령의 역사이다. 부흥에는 반드시 기도가 있다.
3. 부흥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강력한 말씀이 있었다.
시편 130편 기자도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부르짖나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말씀을 바라는도다”(시 130:5). 파숫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이다(시 130:6). 그들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배가 고팠고 하나님을 향해 목이 탔다. 그 분의 목소리를 간절히 듣고 싶어 했다. 하나님을 향한 사모함이 있고 성령의 역사를 간구하는 기도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의 심령을 갈랐다.
18-19세기 미국과 영국의 영적 대각성을 통한 부흥운동에는 조나단 에드워드, 죠지 휫 필드, 웨슬레 형제, 스펄젼, 디엘 무디와 같은 설교자들의 영혼을 파고드는 강력한 설교들이 있었다. 특히 무디는 분명하고 강력한 설교로 구원의 복음을 전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와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났다. ❶ 죄로 타락(Ruin by sin), ❷ 예수의 구속 부흥운동 (Redemption by Christ), ❸ 성령님으로 중생(Regeneration by the Holy Spirit) 을 강조하며 구원에 대한 3R 설교를 명료하게 선포했다. 웨일즈에서도 5주 만에 2만 명이 구원을 받았다. 구원받는 수가 날마다 더해 갔다.
한국의 부흥운동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결정적이었다. 한국교회의 초창기에는 1주 내지 한 달간 계속하는 사경회가 있었다. 오전에는 성경공부로 말씀 충만했고 정오에는 기도가 충만했고 오후에는 전도가 충만했고 밤에는 전도한 사람들을 데려와 집회를 하며 은혜가 충만했다. 말씀과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성도들 가슴에 가득했다. 여기에 부흥이 일어났다.
4. 부흥에는 철저한 회개를 통한 성결운동이 일어났다.
모든 부흥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철저한 회개운동이 있었다는 것이다. 회개가 없는 부흥은 없었다. 영적 부흥이 필요한 이유가 있었다. 국가적, 사회적, 교회적, 개인적 죄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를 갈라놓았던 것이다(사 59:2). 사랑이 식어지자 사랑의 갈증이 일어난 것이다. 죄에는 언제나 우상이 있고 음란이 있고 증오와 거짓과 위선이 있었다. 하나님과 이웃 사이에 멀어져 있었다. 거룩한 영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 죄를 폭로했다. 사람들은 견딜 수 없어 죄를 토하기 시작했고 죄를 토하자 성령님을 그들의 가슴에 자유롭게 역사했다.
미스바에서도 우상을 제거하고 완전히 하나님께 돌아왔다. 히스기아도 산당을 없애고 주장을 깨뜨리고 놋뱀을 부셨다. 에스라도 우상과 타협의 죄를 회개했다. 무디의 타락에 대한 설교는 성결운동을 일으켰다. 웨일즈에도 죄의 고백, 묵은 빚 청산, 오락실 폐쇄, 텅빈 술집과 극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1904년 원산 기도회에서 감리교 하디 선교사의 회개가 불을 당겼다. 사경회 도중 하디는 회중 앞에 서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당황한 얼굴로 울면서 자기의 다섯 가지 죄를 고백했고 용서를 구했다. ❶ 마음의 강팍함 ❷ 학벌에 대한 교만 ❸ 인종차별과 백인 우월주의 ❹ 성령충만하지 못한 죄 ❺ 믿음의 부족과 반복된 실패를 토해냈다. 그는 죄가 무엇인지 절실하게 깨닫고 회개하였다. 통회하고 자복하는 마음에 성령님이 임했다. 그의 회개를 들은 조선인들도 역시 회개했다. “사실 우리도 당신이 교만한 것을 느끼고 얼마나 미워했는지 모른다”고 고백했다. 회개하는 심령을 불쌍히 보셨고 하나님의 성령님은 부흥의 불길을 보내셨다.
1907년 1월 12일 월요일 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교회의 지도자였던 길선주 장로가 1,500명이나 모든 집회에서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입니다. 나는 죽은 친구의 재산을 정리를 도와주는 가운데 미화 100불을 사취했습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실 수 없습니다. 그 돈 전액을 미망인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
조선교회 지도자의 고백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는 눈물로 회개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이길함 선교사는 “다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라고 말했고, 그 자리는 회개의 도가니가 되었다. 기도소리는 하늘 보좌를 흔들었고 한 순간에 온 회중이 함께 울며 자기 죄를 고백했다. 미움, 시기, 질투, 도둑, 사취, 음행, 간음, 심지어 살인까지 다 쏟아져 나왔다. 그 기도회는 600명이 뒤에 남아 밤새도록 기도했다. 성령의 역사로 회개운동이 일어났고 그 회개운동은 한국교회의 부흥으로 이어졌다.
5. 부흥운동에는 늘 찬양의 은혜가 따랐다.
부흥운동이 일어난 집회에는 언제나 찬양의 은혜가 있었다. 회중이 모여 열심히 찬양을 불렀다. 예수의 보혈을 찬미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고 성령의 역사를 구하는 찬송들이 반복적으로 불리며 성도들의 가슴을 녹였다. 웨일즈 부흥운동에도 끝없이 목청을 높여 온몸으로 부르는 찬송의 은혜가 있었고, 무디와 웨슬레와 휫 필드가 주도한 각성운동에도 찬송은 언제나 풍성했다. 찬송의 역사는 종교개혁자 루터에서부터 출발했다. 웨슬레의 찬송들은 오늘도 깊은 감동을 일으키고 있다.
한국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늘도 곳곳에서 젊은이들과 청소년들을 중심한 찬송운동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자연스러운 찬양운동이 이 땅에 불을 지피고 있다. 열광적인 찬양운동 속에 말씀의 부족 –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강렬한 마음이 심히 부족하여 아쉬움이 많다.
6. 부흥운동에는 지치지 않고 계속되는 집회가 있었다.
성령님의 바람이 시작하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힘을 느낀다. 사람들은 모이고 모인다. 기도하고 기도한다. 찬앙하고 찬양한다. 말씀을 계속 선포한다. 지칠 때가 되었는데도 지치지 않는다. 성령님의 힘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힘이 있다. 밤새 기도하고 직장에 나가도 피곤을 모르고 다시 저녁에 집회에 참석한다. 웨일즈에서는 집회가 6개월이나 계속 되었다. 평양에서는 밤을 새우며 기도를 했다. 새벽기도가 4시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2시부터 모이기 시작했다. 이상한 힘이 나타났다. 한국의 부흥운동에 영향을 받은 중국 목단강에서도 부흥이 일어나기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50일 동안 기도하는 동안 부흥의 불길이 나타났다. 토요일 밤이면 4,800명, 6천명, 7천명까지 계속 모였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힘이 늘 나타났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 1:8) 모두 힘을 느끼곤 했다. 성령님의 힘이다.
7. 부흥운동의 결과는 구령운동, 사회개혁, 연합운동이 다랐다.
무디, 휫 필드, 웨슬레, 조나단 에드워드, 스펄전, 길선주, 일버 채프만 등 부흥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았고 영혼의 부흥을 체험한 사람들은 열심히 전도를 했다. 한국교인이 20만 명밖에 되지 않던 1909년에서 1910년 사이에 100만 명 구령운동이 일어나 마가복음 70만권을 집집마다 배포했다. 어린 아이들마저 용돈을 아껴서 마가복음을 사들고 길거리에서 나누어 주며 어른들의 팔을 붙잡고 예수를 믿으라고 간청했다. 감리교회는 1906년 등록교인이 18,108명이었지만 일 년 후 1907년에는 219%가 성장한 39,613명이 되었다. 장로교는 1903년에 19,327명, 1907년에 56,943명, 1911년에는 140,470명으로 725%의 성장이 있었다. 교단마다 전도에 힘써 전도의 열매가 많이 있었다.
웨일즈에서 5주 만에 5만 명이 구원을 받았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다. 한국에도 교육열, 금연 금주운동, 우상숭배에서 해방, 여성의 지위향상, 결혼 및 세계관의 변화, 놀음, 일부다처제 폐지, 조상숭배, 문화, 종교,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근대화에 영향을 주었다.
교계에는 개 교회나 교단이 아니고 예수를 중심한 연합운동이 일어났다. 무디, 휫 필드, 에드워드 등 부흥운동에는 예외없이 복음주의적 연합운동이 있었다. 한국인과 선교사의 담이 무너졌고, 원수와 원수, 양반과 천민,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장로교와 감리교의 담이 무너지며 하나의 민족교회 형성마저 깊이 논의되었다. 성서번역위원회, 예수성교서회, 복음주의연합공의회, 숭실대학, 연희전문학교, YMCA, 주일학교연합회 등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것을 강하게 의식했다.
부흥은 영적인 갈증과 배고픔을 절실하게 느끼며 하나님을 사모하고 찾으며 영혼의 부흥을 갈구하며 간절히 기도하며 기다리는 소수의 주변적 사람들에게서 시작한다. 기도와 말씀과 찬양과 회개가 있는 곳에 성령님은 나타나 죄를 태우고 하나님과 인간을 하나로 묶어 주신다. 부흥의 불길이 점화된다. 회개는 작은 불꽃에 부어지는 기름과도 같다. 불길은 회개를 통하여 번져가 심령을 태우고 구원하며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킨다.
오늘 한국교회에는 건물도 있고 찬양, 예배, 성경공부, 제자훈련, 셀모임, 새벽기도나 심야기도도 있고 총동원 프로그람도 있으나 어딘지 모르게 모두가 허기진 사람들처럼 영적인 갈증과 배고픔을 느끼고 있다. 성령의 역사를 흉내 내는 집회는 있으나 은혜는 없고 프로그람은 있으나 생명이 빠져있고 열심은 있으나 성령님은 빠진 것 같은 느낌이다.
1907년을 돌아보고 한국교회에 다시 한 번 부흥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부흥은 그저 원해서 오지 않는다. 부흥은 총회의 결의나 행사로 오지 않는다. 부흥의 역사를 연구하고 토론함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누구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해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친밀하게 만나 새로워지기를 간절히 원하는 영혼들이 자신의 부흥을 위해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부르고 그분에게 다가가 성령님의 새로운 터치를 갈구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어디선가 나타날 때 찾고 만나려는 하나님과의 간절한 대화 가운데 오늘도 성령님이 임할 것이다. 한국교회 제4의 부흥은 가능한가? 언제나 부흥은 가능하다. 개인에게도, 가족에게도, 교회에서, 교계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또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언제라도 가능하다. 하나님은 자기를 열심히 찾는 자를 만나주신다(히 11:6). 그 만남이 부흥이다.
<김상복 목사 / 한복협 세미나 ‘한국교회 제3의 부흥은 올 것인가? 어떻게?’ 2006. 9. 11>
결 론 / 원수를 위해 사랑으로 기도하는 의인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어느 정도 맛을 보았고, 나름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음성인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빌 2:5)을 품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보이신 자세를 본받으라.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면서도 오히려 그 큰 능력과 영광을 버리고 종(인간)의 형상을 취하여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 아니, 훨씬 더 자기를 낮추어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우리 모두도 그 분의 뒤를 따르라.
요일 3:16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고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을 위해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들어도 ‘어디까지 알아듣느냐?’가 문제가 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알아듣는데, 하나님께서 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지 그 뜻을 모르면 순종하기가 쉽지 않다.
사무엘상 24-30장은 집요하게 사울왕이 자기를 추적하여 죽이려하지만 오히려 부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장인이자 왕인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편히 가도록 해 주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닌 두 번 씩이나 … . 이 대목은 지금도 성도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삼상 31장에서는 사울 왕이 길보아산에서의 전투에서 죽음으로 다윗과 사울왕의 이야기는 끝난다. 이후 모범적인 기도의 사람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쳤던 의인 다윗은 이스라엘 왕국의 제2대 왕으로서 40년 간(B. C 1077~1037) 통치하였다.
■ 모퉁이돌 선교회 이삭 목사님은 중국에서 선교하던 중 공안들에 붙잡혀 고문을 당했다. 매도 맞고 전기고문으로 머리가 상했고, 몸도 망가졌다. 10년 이상을 하혈을 했다. 마음으로 중국을 특히 고문하던 그놈들을 용서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용서가 안 되냐? 나는 너를 용서했는데.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늘가는 밝은 길을’ 찬송하면서도 용서가 안 되니. 가라! 너를 고문한 곳으로,” 고문한 그 악질 조선족을 만나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울면서 갔다. ‘안 가면 안 돼요?’하며 갔던 그날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여자 한 분이 나에게 다가와서 속삭였다. “목사님이시죠? 목사님 때문에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저기 서 있는 저 놈이 목사님을 고문했어요. 저 분 뭐하는지 아세요? 용서하셨어요?” 이삭 목사는 대답을 못했다. 갖가지 고문을 했던 저들을 용서하라는 것이다. ‘남편 뭐해요?’ ‘13년 동안 열심히 교회 다니더니 지금 목사님이 되셨어요.’
1999년 운화성결교회에서 개최하였던 서울지방회 여전도회연합회 1일 부흥회에서 이삭 목사님이 울면서 ‘그런 일들이 또 다시 일어난다면 다시 고문도 불사(不辭)하겠습니다’라는 말까지 하였다.
■ 코리 텐 붐 여사의 용서와 사랑 / ‘주는 나의 피난처’라는 책을 쓴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1882-1983) 여사에 대해 들어보셨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의 코리 텐 붐 여사 집에 유대인을 숨겨준 죄로 가족들이 모두 독일군에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 갇혔다. 부모님과 언니는 그 가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해서 수용소에서 죽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 그녀는 신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주의 종이 되었다. 그녀가 복음을 증거할 때 성령의 음성이 들려왔다. “독일은 전쟁을 일으킨 민족이기 때문에 지금 큰 상처를 입고 있다. 그들에게 가서 복음을 증거하라.” 그녀는 하나님께 “하나님께서 가라면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그렇지만 독일에만은 못 갑니다. 하나님. 그 곳 만은 빼 주십시오. 독일 사람이 우리 부모님도 죽이고 언니도 죽였습니다. 내가 강제수용소에서 당한 고통은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그 독일 사람에게 가서 내가 복음을 증거할 수는 없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랑하는 딸아! 내가 나를 저주하고 욕하고 등진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진 것을 기억하라. 네가 내 딸이면 독일 사람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 그 말씀을 듣고 그녀는 독일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주님께 나오는 것을 보고 보람을 느꼈다.
그런데 하루는 설교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서자 많은 사람들이 악수하기 위해 줄을 섰는데, 허름한 외투를 입은 한 남자가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코리 여사는 심장이 멎고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는 강제 수용소에서 자기에게 무시무시한 고통을 가한 악명 높은 강제 수용소 간수였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한겨울 이른 새벽에 여자 포로들을 나체로 밖에 서 있게 하고 먹을 것도 주지 않고 갖은 횡포를 다해 괴롭힌 장본인이다. 바로 그 사람 손에 여사의 사촌언니 벳시가 강간당하고 견디지 못하여 끝내 수용소에서 죽었다. 강단에서는 용서를 외쳤지만, 자기와 같이 벌거벗기운 채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죽은 언니의 얼굴이 크게 클로즈업 되면서 자기의 청춘을 짓밟은 장본인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 코리여사는 일기장(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 순간 내 심장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나는 한마디로『하나님, 저 인간만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코리여사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용서와 사랑을 외치고 있던 이 코리여사의 앞을 향해서 자기에게 결정적인 피해를 입혔던 쳐 죽이고 싶었던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하나님은 계속 이 코리여사의 마음속에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었다고 한다. “코리야 용서하거라”, “하나님, 저 인간만은 용서할 수 없어요.”, “용서하거라”, “못해요”. 이렇게 내적인 싸움을 하고 있는 동안에 그 원수 같은 사람은 벌써 코리여사의 눈앞에까지 왔다. 그런데 그 순간 코리여사의 마음속에 번개같이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성령님)의 음성이었다. 코리여사는 그때의 상황을 자기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나는 네가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겠느냐? 안하겠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다. 용서하라는 것은 나의 명령인데, 내 명령 앞에 순종하겠느냐? 안하겠느냐?”
도저히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할 수가 없어서 얼른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예수님 저는 하늘에서 진노의 벼락이 내려 이 사람을 때리기 전에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는 도저히 이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저를 좀 이해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십자가에서 나를 못 박고 죽이고 침 뱉으며 채찍으로 때리고 조롱하며 가시관을 씌워서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내가 용서했지 않느냐? 너도 용서해 주어라”,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시면 못합니다.”
나는 그때 그 사람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지만, 용서해야만 한다는 주님의 명령이 내 마음속에 깨달아지는 순간 ‘하나님 명령이라면 할 수 없지요. 그러면 용서해야지요.’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과 느낌이 없이 다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내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손을 내밀어 그를 안는 순간 주께서 내 마음속에 그를 진심으로 용서할 수 마음을 부어주셨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 사람은 무거운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네덜란드 사람인 당신이 전쟁 때 우리 독일 사람이 저지른 죄를 용서하고 복음을 전해 주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저는 죄를 많이 지은 사람입니다. 죄를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 오늘 주님 앞에 나왔으니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그 순간 갑자기 하늘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게 임했다. 순식간에 미움과 원한이 눈 녹듯이 다 녹아버리고 말았다. 그를 용서하고 나자 그녀의 영혼이 얼마나 홀가분하고 즐거운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으며 거기에서 10년이나 젊어지는듯한 재생의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코리 텐 붐 여사는 그리스도의 큰 사랑으로 그 사람을 용서해 주었고, 그 사람의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서 기도해 주었다. 코리 텐 붐 여사는 그 때 자신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쓰라린 원한의 상처가 치료를 받고 그 이후로 온 세계에 다니면서 용서와 사랑을 힘 있게 전할 수가 있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면서 코리여사는 그 일기장의 마지막에 이런 인상 깊은 글을 썼다.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성령님에 의지한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여기에서 몇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❶ 성령님이 임재하시면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진리의 길로 가게 하신다. ❷ 오늘날에도 성령님의 임재하심의 역사는 어디에서나 일어날 있으며, ❸ 교회를 포함한 개인에게서 성령님의 임재하심은 나타날 수 있으며 ❹ 영육간의 부흥의 원동력이 되며 ❺ 성령님의 임재하심의 목적은 복음을 전파에 있으며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데 있다. ❻ 이로 인하여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게 하신다. ❼ 성령님의 역할 중 하나는 은사를 주는 역할이며 이 모든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타내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면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도록 하기 위해 크든 작든 성령님께서 주신다. 참고로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은사들은 일부일 뿐이다. 믿는 이들에게 등안시 되는 사랑의 은사는 필히 구해야 한다. ❽ 성령님의 은혜가 임하면 '죄의 발견'과 '죄의 고백'이다. 밝은 빛 앞에 모든 것이 드러나고 숨길 수 없듯이, 골수를 찔러쪼개는 예리한 검처럼 숨은 생각과 죄를 드러낸다. 주저하지 말고 죄악에서 벗어나도록 힘쓰자. ❾ 성령님이 임재하시면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열매를 맺는 일을 시작한다(갈 5:22-23). ❾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은사를 구하기 전에 어떤 말씀을 하시든지간에 듣고 순종하는 마음을 구하라.
다이돌핀(didorphin)이란?
엔돌핀(엔도르핀)이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엔돌핀은 사실 코티졸, 엔케팔린과 함께 3대 스트레스 호르몬이다. 엔돌핀은 사람이 스트레스 상황에 빠지면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뇌에서 분비되는 것으로 가장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인 모르핀의 200배에 해당하는 진통 효과를 발휘한다.
이러한 오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엔돌핀이라는 용어가 단지 하나의 호르몬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즉, 내재성 통증 조절 성분을 지닌 호르몬을 모두 총칭하는 용어가 바로 엔돌핀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뇌 속에는 여러 가지 뇌파가 나오는데 깨어 있는 낮 동안에는 우리 몸에 해로운 베타(β)파가 나온다. 이것은 100%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뇌파이다. 그래서 오감으로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듣고, 본다고 할지라도 남는 것은 점점 스트레스와 피곤뿐이다. 그런데 밤에 잠을 자는 동안에는 알파(α)파가 나온다. 그러면 엔돌핀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되는데 이것은 병을 고치는 호르몬으로 이 엔돌핀이라는 호르몬은 피로도 회복하고 병균도 물리치고 암세포도 이기게 한다. 그러므로 잠을 푹 자고나면 저절로 병이 낫기도 하고 기분도 좋아진다. 잠을 자는 것은 오감이 차단되는 것으로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듣지도 않고 생각도 안하면 편안하고 힐링이 된다. 그런데 깨어 있을 때에도 알파(α)파가 나올 때가 있는데 사랑할 때와 웃을 때와 감동 받을 때라고 한다. 사랑할 때 마음이 흐뭇하고 기분이 좋은 것은 뇌 속에서 알파(α)파가 나오면서 동시에 엔돌핀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고 선물을 받고 칭찬을 받으면 뇌 속에서 기분을 좋게 하는 엔도르핀이 나온다. 이 엔도르핀이 분비가 되면 기분이 좋아지고 건강해진다. 그런데 작은 일이라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엔도르핀이 더 잘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감사를 잘하는 사람이 건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늘 원망과 불평하며 무슨 일이 그렇게 못 마땅한지 늘 불만에 쌓여 인상을 찌푸리며 사는 사람에게는 엔도르핀이 잘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암을 유발시키는 나쁜 독이 몸에서 배출이 되기 때문에 건강을 잃어버리게 된다. 원망과 불평하며 부정적이며 짜증을 잘 부리는 사람은 감사하며 사는 사람보다 5-10년 더 일찍 죽는다고 한다. 병들고 빨리 죽으려면 매일 원망과 불평하며 살면 된다. 그러나 오래오래 건강하게 장수하며 성경에 나온대로 향수하려면 늘 감사하면서 살면 된다.
▶ 우리 몸의 80%이상은 물로 이루어져 있다. 그만큼 물은 만병치료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이다. 몸이 산성화가 되면서 점점 우리 몸은 늙고 병들어 간다. 때문에 알칼리성이 중화시켜주어야 하는데 그것을 알칼리성식품이라고 한다. 말기의 암 선고를 받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물치료법을 통해 암을 완전 극복한 사연은 이미 방송에서도 여러 차례 소개되었으며 많은 일반인분들이 치료 후기를 올려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건강한 치료법인 물치료법은 이미 선진국에서는 널리 퍼져있다고 한다.
그런데 물의 파동을 연구하는 에모토 마사루 박사가 쓴 '물은 답을 알고 있다'이다. 감사, 사랑 고마움을 말로 하거나 글로 표시한 다음 물을 영하 4℃에서 전자현미경으로 촬영한 형태에서는 물의 육각 결정체가 선명해진다. 또 같은 물을 가지고 분노, 짜증을 말하거나 글로 표시한 다음 위의 조건과 동일하게 촬영하면 물의 육각 결정체가 불안전하게 되는 사진을 봤다. 생활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주어진 여건에 감사와 사랑으로 살아간다면 우리 몸의 피가 육각수 형태의 좋은 피가 돼 전신을 돌며 더욱 건강해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 최근 의학이 발견한 호르몬 중에서 ‘다이돌핀’이라는 것이 있다. 물론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엔돌핀이 암을 치료하고 통증을 해소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이야기지만 이 다이돌핀의 효과는 엔돌핀의 4,000배라는 사실이 발표되었다. 그럼 다이돌핀(didorphin)은 언제 우리 몸에서 생성될까? 의외라고 해도 될까 모르겠지만 엄청 의외였다. 바로 가장 감동을 받았을 때 다이돌핀이 우리 몸에서 생성된다.
가장 강력하게 다이돌핀이 생성될 때에는 새로운 진리를 깨달았을 때이다. 이때 우리 몸에서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전혀 반응이 없던 호르몬 유전자가 활성화되어 안 나오던 엔돌핀, 도파민, 세라토닌이라는 아주 유익한 호르몬들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특히 굉장한 감동이 왔을 때 드디어 ‘다이돌핀’이 생성된다. 이 호르몬들은 우리 몸의 면역체계에 강력한 긍정적 작용을 일으켜 암을 공격한다. 감사를 느낄 때 혈류는 뇌로 많이 들어가고 심장파동과 뇌파는 아주 일정하며 안정됐다. 반대로 분노할 때는 혈류가 아주 적게 들어가고 심장파동과 뇌파가 불규칙하다.
■ 내가 체험한 것을 말씀드리려고 한다 / 작년 12월 19일 03:20시에 하나님께로부터 귀한 약속을 받았다. 설교를 준비하던 중 책상에 엎드려 잠시 잠을 잤다. 이때 혼이 가슴에서 코에까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아! 나의 육신의 삶이 이렇게 마감할 것이구나!' 며칠 전 어떻게 죽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것이었다. 그날 서산 목사님 큰딸의 결혼식이 안산에서 있어서 전철을 타고 가면서 감사의 눈물을 많이 흘렸다. 아브람에게 '아브람아, 너는 오래도록 살다가 평안히 세상을 떠나 땅에 묻힐 것이다.'(창 15:15)라는 말씀대로 약속해 주셨다.
이 땅에 속한 일들에 대해 염려하기보다는 나의 남은 생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려고 한다. 한국교회에 부흥의 불길이 타오게 하기 위하여 작은 불쏘시개가 되어 많은 성도들과 주의 종들이 큰 권능을 받아 복음의 일꾼들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과 생명을 다 하였으면 한다.
나의 남은 생애를 …
유종의 미(有終의 美)란 말이 있다. 이는 끝을 아름답게 장식하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시작이 아무리 화려하고 멋있었어도 끝이 좋지 못하면 그 전체가 다 실패한 것이요 반대로 시작이 보잘 것 없고 힘들었어도 끝이 좋으면 그 전체가 모두 좋은 것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루라는 시작과 끝을 주셨고 또 월(月)과 한 해(年)를 주시고 일생이라는 기회를 주셔서 시작과 끝을 살게 하셨다. 그래서 하루를 마감할 때도 혹 낮에 좋지 않은 일이 있어도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엡 4:26)고 하셨으며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마 6:34)고 하셨다. 하루 동안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었어도 그 날 일은 그 날에 마감하고 좋은 쪽으로 마무리를 해야 내일을 좋게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우리의 후손과 나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이들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꼭 그렇게 성공적인 유종의 미를 거둬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자. 내일은 오늘을 아름답게 장식한 사람에게, 내일은 오늘을 보람있게 준비한 사람에게 밝음으로 찾아올 것이다. 영원한 천국은 오늘이라는 시간에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행하며 순종하는 자에게 반드시 다가올 것이다.
■ 3개월이 어디입니까? / 시카코에서 태어난 워너 솔맨(Warner Sallman, 1892–1968)은 미국이 자랑하는 화가 중에 한 사람이다. 결혼하고 얼마 안 된 젊은 나이에 그는 중병에 걸렸다. 의사가 말해준다. "당신은 임파선 결핵을 앓고 있소. 앞으로 3개월밖에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의 부인은 유명한 가수로 임신중이었다. 아내에게도 미안하거니와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생각할 때에도 죄스러웠다. 사랑하는 아내가 그를 위로하였다. "3개월밖에 못산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3개월을 허락해주셨다고 생각하며 감사하십시다. 아무도 원망하지 맙시다. 3개월이 얼마입니까? 천금같은 그 기간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십시다. 그러면서 오로지 3개월이나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두 사람은 기뻐하며 감사하며 열심히 그림도 그렸다. 그런데 얼마 후에 그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그가 그린 그림에 유명한 것이 있는데 ‘머리되신 그리스도’(Head of Christ)라는 예수님의 초상화를 그렸다. 보통 사람은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때에 대개 자비하신 분으로, 고난당하시는 얼굴로 그리는데, 지도력이 있고 강인한 인간성을 지닌 모습으로 표현했다. 예수님의 모습이 담긴 그의 그림책은 1940년도에 500만부 이상이 인쇄되었고 오늘날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도 많은 가정에 걸려 있다. 그렇다. 3개월이 어디인가? 하루가 어디인가? 한 달란트가 어디인가? 모름지기 감사하며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야 한다. 그의 주치의인 존 헨리는 말하기를 “감사는 최고의 항암제이다. 감사는 최고의 해독제이다. 감사는 최고의 치료제이다.”라고 했다.
인생은 얼마나 살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가 중요하다. 그런데 솔맨은 3개월 밖에 못 살 것이다 체념하는 마음이 아니라 3개월이란 귀한 기간이 자신에게 주어졌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