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대왕 능비문에 대한 이야기
문무대왕文武大王(김법민金法敏. 29代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태자太子)비문碑文의 발견은 조선朝鮮 영조英祖 때 경부부윤慶州府尹이던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가 동왕 36년(1760)에 「방문무왕릉訪文武王陵 무편석가험無片石可驗」하였다가,
그 후 36년이 지난 정조 20년(1796)에 문무왕른비文武王陵碑(신라新羅 제 30대 문무왕文武王의 능비陵碑)은 「토인경전土人耕田 홀득고비忽得古碑 밭을 갈다가 옛 비석을 우연히 발견하였다」한 것이 된다.
이 碑의 비편碑片이 2개로 되어 있었는데, 행방이 묘연하다가, 그 碑片의 탁본拓本이 청淸의 유희해劉喜海에게 들어가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판독判讀되어 실리게 되었다.
그 후 1961년 경주시慶州市 동부동 주택에서 碑片 하나가 다시 발견되었는데 1796년에 발견되었던 碑片 중 비신碑身 하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拓本은 4장인 관계로 4개의 碑片으로 파악하고 있다. 碑의 건립建立 년대年代는 신문왕神文王 1년(681)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학소경國學少卿 태학사太學士 김급손金及飱이 지은 능비문陵碑文으로 전체를 가로 50行, 세로 46字로 복원復原하였다. 비문碑文은 한당류漢唐流를 모방하였고 서체書體는 구양순歐陽詢(557 - 641 唐)체体의 해서楷書이며, 문장은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이다. 이 비의 건립년대建立年代는 681년(신문왕 1년)으로 추정하고, 금서룡今西龍은 비문 중의 ‘국학소경國學少卿’이라는 직명職名과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국학설치國學設置 기사를 관련시켜 682년 6월 이후로 보았다. 이 비문의 남아 있는 글자의 총 수는 750자이다.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의 책을 구입하여 보니 여기에도 몇 자의 오자가 있어 이를 수정 보완하여 보관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의 역사와 상고의 역사가 살아 쉼 쉬는 기록이 염연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습방관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는 위로 조상을 업 수이 여기는 경향이 있고 아래로는 뒷일을 염려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는 양상이다.
첫댓글 원효결서에 상세한 설명 및 이야기가 잼 나게 풀어놓았죠.상.하 두권으로 나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