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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등불을 밝히라
이사야 12:2-6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대림절 셋째 주일이다. 세 번째 초는 목자들의 초이다. 대림절 4주간 동안 촛불을 밝힐 때마다 이사야와 복음서 본문을 읽는다.
‘이 촛불을 기쁨의 상징으로 밝힙니다. 주께서 임하신다는 기쁜 약속으로 구원의 소망 가운데서 기뻐하게 하옵소서. 곧 오소서 임마누엘!’
지난 열흘 동안 우리 국민 모두가 당사자로서 확인했듯이, 우리 사회는 또 다시 진통을 겪는 중이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10년마다 전쟁, 혁명, 쿠데타, 학살과 항쟁, 외환위기, 대통령 탄핵, 코로나 등을 혹독하게 치루었다. 이제 다시 넘어야할 산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희망으로 이끄시길 빈다.
저절로 되지 않는다. 우리는 다시 등불을 높이 들어야 한다. 등불은 어둠을 물리치고, 좌절을 극복하게 한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기지 못한다. 등불은 어둠 속에서 그 빛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기쁨의 안내자가 된다. 우리 역사에서 희망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대림절 셋째 주일의 전통적인 주제는 기쁨(gaugete)이다. 세 번째 초를 밝히며 이렇게 선언한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 35:10).
우리나라를 위한 기도가 필요한 때이다. 중보기도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다. 이 민족의 중병을 고쳐 주옵소서.
1)
오늘 본문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이다. 선지자의 예언은 간절한 목마름으로 가득하다.
이사야의 예언은 성탄 절기와 수난 절기에 두루 인용된다. 두루 사랑받는 말씀인 까닭은 하나님의 양 손처럼 아픔과 기쁨을 함께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 예언의 배경은 광야 같은 세상, 앞날을 예측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행한 것이기에 더욱 빛난다. 예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한 처녀가 아들을 낳으리라는 예언은 무려 700년이 지나서야 실현되었다.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비로소 이해되었다. 하나님은 그 언약을 잊지 않으신다. 희망은 기다림 속에서 열매를 맺는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 49:16).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결코 잊지않고, 버려두지 않으시고,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는다.
대림절에 이사야의 말씀을 자주 듣는 것은 메시야가 오신다는 예언 때문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의 소식을 널리 알리고 있다. 장차 정의와 평화의 새로운 세상이 시작될 것이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 11:10).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힘으로 구원을 완성할 수는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 예언자는 눈앞이 캄캄하고, 앞을 분별하기 힘든 상황에도 용기를 준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2).
우리 민족은 지독한 가난을 겪고, 정치적 갈등과 분쟁,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겪었다. 그럼에도 잠시 좌절하였지만, 우리 사회는 결국 긍정적인 결과로 이끌었다. 오랜 기다림도 있었다. 그럼에도 견뎌낼 수 있던 것은 기다림 때문이다. 잘 될 것이란 믿음, 진실이 승리한다는 믿음, 잘 살 수 있다는 믿음, 그런 사능성이 체질화된 민족이다.
나는 어제 여의도에서 배웠다. 그런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얼마나 중요한가? 그런 가능성을 믿지 않으면 쉽게 절망한다.
믿음도 그렇다. 가능성은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 마음을 활짝 여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영어로 불가능이란 단어는 ‘impossible’이다. 사실 내 힘으로만 불가능한 것이 참 많다. 또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불가능할 것이라고 포기한 것도 있다.
그런데 임파서블이란 암담한 현실에도 희망을 가진 ‘내’가 주어가 되면 가능해진다. ‘im-possible’에서 ‘i’와 ‘m’ 사이에 점을 찍고 한 칸 떼면 임파서블(impossible)은 아임 파서블(i’m possible)이 된다. 그 가능성을 기다리고, 그 약속의 실현을 목말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성경은 희망을 목말라하는 사람들의 책이다. 성경은 그 구원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목말라하는 사람들의 책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는다고, 성경의 중요한 사건은 우물가에서 이루어졌다.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의 집에서 사라의 억압을 피해 도망친 하갈은 광야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막상 떠나기는 했지만 광야는 피신처가 되지 못하였다. 그녀가 방황의 한 가운데에서 절망에 빠져 울부짖을 때 하나님이 그를 보셨다. 그리고 사건에 개입하시고, 그를 다시 돌려보내신다. 하갈은 하나님 경험을 이렇게 고백한다. ‘브엘라해로이’, 곧 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샘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요한복음에서 사마리아 수가 성에 살던 여인은 한낮에 남의 눈을 피해 우물가에 물을 길으러 나왔다. 그이는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삶을 부정하였다. 우물에서 물을 부탁하던 한 유대인 남자와 대화 속에서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고 자신에게 있는 근원적인 목마름을 발견하였다. 그분은 예수님이었다. 그리고 진정한 목마름은 야곱의 우물물이 아니라 예수님과 만남에서 해갈이 가능함을 깨닫고, 고백하고, 증거하였다.
인생의 갈증이 누군들 없겠는가? 믿음 없이 홀로 애쓰는 사람의 두레박은 길이가 너무 짧아 빈 두레박질만 요란하다. 생수를 길어 오르려면 우물 깊이 내려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샘에 풍덩 닿아야 한다. 하나님은 늘 거기 계신다. 임파서블을 ‘아임 파서블’로 바꾸어 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의지를 넘어 하나님의 은혜이다.
2)
이사야는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3) 라고 말한다.
구원의 우물은 이스라엘의 경험 속에서 나온 표현이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3대 명절인 초막절에 예루살렘 동쪽 성벽 앞에 있는 기혼 샘에서 물을 길어다가 성전으로 가지고 간다.
이때 우물로 가는 사람들은 행진을 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그 우물은 바로 기쁨의 샘터였다. 구원의 우물은 출애굽 광야에서 샘이 터졌던 기적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감사를 경험하였다.
종교개혁자 장 칼뱅은 여기에서 구원의 우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샘, 우물, 시내 등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쓰인다. 예수님은 초막절 전통을 통해 당신이 누구신지를 계시하신다.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구원의 우물은 새로운 출애굽을 꿈꾸는 사람에게 가장 긴급한 요청이다. 사람들의 목마름을 영원히 해갈할 분은 하나님뿐이다.
“곧 오소서 임마누엘 오 구하소서 이스라엘 그 포로생활 고달파 메시야 기다립니다 기뻐하라 이스라엘 곧 오시리오 임마누엘”(찬송가 104장 1절).
사람들은 자유와 해방을 목말라하였다. 영적 자유와 인간됨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우물에서 청청한 해방의 물을 길었다. 나치 독일의 죽음의 수용소로부터 희망을 찾았던 유대인들과 1960년대 미국 흑인해방운동을 주도한 흑인들은 구원의 우물가에서 노래를 불렀다.
사람은 누구나 아픔과 상처가 있다. 유명한 희극 배우 찰리 채플린은 이런 말을 하였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다.”
사실 남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거창하게 역사를 따질 일도 아니다. 누군들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만만할 사람이 있는가? 건강은 육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절망은 마음이 병든 것이다.
독일의 신학자 몰트만은 건강은 단지 육체의 튼실함이 아니라, ‘살아가는 힘’이고 ‘고난마저 견뎌낼 힘’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사람은 누구나 가끔은 근심 많은 철학자도 되었다가, 가끔은 문제의식 없이 살아가는 돼지도 된다.
믿음과 희망이 없다면, 그런 즐거움을 나눌 친구가 없다면 쉽게 우울증에 빠질 수 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존재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짜증스럽고, 분노하기도 한다. 리투아니아어로 ‘왜 화내니?’는 ‘왜 거품이 되어가니?’란 의미라고 한다.
이렇듯 자주 정도 이상으로 화가 나거나, 불안하거나, 짜증이 나면 스스로에게 경보를 울려라. 내가 지금 위로가 필요하구나, 노래가 필요하구나, 평안한 마음이 필요하구나. 그리고 자신의 구원의 우물을 찾아라. 구원의 우물로 가서 기쁨으로 물을 길으라. 그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약속이다.
3)
본문에 사용된 단어들을 살펴보자. 얼마나 희망적인가?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4-5).
선지자는 반복하여 말한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라, 여호와를 찬송하라.’
이렇듯 하나님은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자와 관계를 맺으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 하나님은 기쁨의 찬송을 부르는 자의 주인이시다. 그러니 힘든 때일수록 희망을 노래할 일이다. 비록 ‘새우잠을 자더라도 고래 꿈을 꿔’야 한다.
이사야의 예언은 태평성대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시대 배경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전쟁의 공포가 있었다. 암흑기였다.
그럼에도 선지자는 과거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사건을 회고한다. 불가능한 일로 여겼던 출애굽 사건처럼 하나님의 내 삶과 역사 가운데 개입하실 것이다. 예언자는 하나님이 이루신 옛일을 회고하며 다시 행하실 역사를 기대한다. 혜안의 눈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한다.
그러니 삶의 조건과 환경에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간직하라.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특별한 기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기쁨의 원천임을 믿는다.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라고 말한다.
기쁨의 근거는 주님의 가까우심이다. 이러한 소망은 모든 사람에게 위로를 주고, 관용을 베푸는 힘을 제공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러한 기쁨과 평화는 보호벽처럼 그리스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감싸줄 것이다. 그러니 희망을 회복하라.
뉴스를 듣자니 요즘 연말 회식이 줄어들어 자영업자들이 힘들다고 한다. 비상정국 탓일 것이다. 이제 상황이 달라졌으니 우리 사회가 건강한 웃음을 회복했으면 좋겠다. 연말에 일부러 약속도 잡고, 외식도 하시라. 이 맘때면 서로 듣기 좋은 말로 덕담을 하는 건배사를 한다. 실은 건배사는 희망을 담고있다.
나이가 점점 들어가는 사람들은 이런 건배사를 한다. 해당화!- 해, 해를 거듭할수록 당, 당당하고 화, 화려하게 삽시다.
뭔가 일이 잘 안 풀리고, 관계가 꼬여있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건배사이다. 통통통!- 의사소통, 운수대통, 만사형통.
요즘 광장에서 외치는 출정식과 같은 건배사도 있다. 나가자!-나, 나라를 위하여. 가, 가정을 위하여. 자, 자신을 위하여!
내가 마음에 드는 건배사는 이것이다. 재건축! 날마다 자기 자신을 향해 이런 구호를 외치면서 사는 것은 어떨까? 재건축! 재, 재미있고. 건, 건강하게. 축, 축복하며 살자.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은 마중물과 같은 말씀이다. 마중물은 겨우 반 바가지 정도의 물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마중물은 깊은 우물 속 물을 길어 오른다. 누군가의 메마른 가슴을 적셔주기 위해 먼저 마중물이 되려는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보잘 것 없는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지극히 낮은 구유로 찾아오신 하나님의 마중물이시다. 길어도 길어도 샘이 마르지 않는 구원의 우물 전체가 되신 분이다.
이 기다림의 절기에, 나는 누구를 마중하며 살고 있는가? 대림절은 희망으로, 기쁨으로 마중을 나가는 시간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올 마중물로 살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그런 믿음으로 소망과 기쁨의 삶을 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은혜가 대림절을 지내는 여러분과 함께 하시어 우리 시대에서 기쁨의 등불을 높이 밝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