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 21일 답사기가 있다.
허기가 질수록 정신은 맑아진다더니 천왕문에서 쪼그리고 앉아 바라보는 진입공간은, 사람의 정신을 한곳으로 집중시키게 하는, 어쩌면 아득히 멀어질 듯 가까워지는 그런 묘한 동선이다.실상사,완주 송광사 등 백제지역의 평지가람의 공간배치와 흡사하지만,있는듯 없는 듯한 얕은 축대위로 저만치 무위사의 보배인 극락전이 자리잡고 있다.
내가 사진작가라면 아마 천왕문에서 그 자연스런 동선을 잡아내는데 몇일을 소요할 것 같다. 아직도 통일되지 않은 동서남북 사천왕상을 헤아리다,보살을 만나러 가던 공양간 옆 자판기에 게시된 문구에 나도 몰래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無爲란 인연에 의하여 생성되지 아니하는 영원불변의 초시간적인, 절대적인 진실이며,대승에서는 진여,유식에서는 공과 동일시하며,열반,법성,실상은 無爲의 다른 이름이다"
동행한 놈들의 배를 만족시키지 않고서는, 답사는 고사하고 욕을 배부르도록 먹을게 분명하여 사람 좋아보이는 보살님게 부탁드렸더니 몇명이냐고 하신다.찬스다!! 이기회를 놓쳐서는 도루묵이니 "3명입니다.극락전 참배하고 오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리고는 총총걸음으로 가다가 돌아서서 공양주 보살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더니 지금까지 보아온여인중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뒷모습으로 보였다.
무위사 극락전은 간결하면서도 질박한 자태이며,무위사 이전의 葛屋寺,茅屋寺의 사찰 이름에서도 수수한, 수줍은 듯한 시골 아낙네의 체취가 가득하다. 수덕사 대웅전과 거조암 영산전처럼 고려,조선초의 주심포 맞배의 건물로, 건물의 가구나 부재의 용도나 기능을 차치하고라도 측면에서 바라보는 맛은, 전체가 완연히 노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얇은 잠옷 사이로 보이는 여자의 나신 같다면 경망스러운가?
아무튼 극락전에서 바라보아도 무위사의 가람배치는 넓은 공간에 비해 적은 당우들로,텅빈 허전한 느낌이 들어야할텐데, 오히려 가득찬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끼닭이 분명 극락보전 때문일첸테 설명을 할 수 없어 안타깝다..
답사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극락전의 아미타 삼존불과,후불탱화에서 고려의 특징과 대비되는 협시불의 위치, 거신광에서 보이는 조선 16세기 이후의 특징을 익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불교 미술에 문외한인 내게도 분명 조선후기 후불탱과는 다른 감흥을 느끼며 후불단의 백의관음을 보고 있는 와중에 법당이 떠나갈듯 요란한 목소리가 들린다.
"사진 찍지마라는 글씨 안 보여요!!!"
상감과, 유현은 찍소리 못하고 승가대학 연대장 생도 출신 같은 스님에게 혼줄이 나길래 흐물흐물 웃음지으며 법당 앞으로 나왔더니 "법당에서는 모자를 벗는 것이 예의 아닌가요?"라며 나에게 마지막 피니쉬 브로를 가한다.
완전히 주눅이 들어있는 우리에게 키큰 처사님이 "공양들 하세요"라신다. 에혀!! 이렇게 꾸지람 들으면 밥도 넘어가지 않을텐데 세놈의 화상은 개걸스럽게 해치운다. 체면불구하고 한 그릇 더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건 짐승과 다름없기에...
무위사의 가람배치가 허전한 느낌이 들지 않은 이유중의 하나가 분명 우측에 치우쳐 있는 탑과 탑비의 영향일 것이다. 탑이 주불전과 일직선상에서 벗어나 놓이는 경우는 풍수의 비보, 본래 주불전의 화재, 다른 곳에서 이건 때문이다. 하지만 무위사 탑은 까닭이 밝혀지지 않았다. 석탑은 선각국사 부도비와 시대적 편년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한다는데, 부도비와 탑의 위치가 묘하다.
그렇치 않은가? 고려 건국전에 형미스님이 궁예에게 죽임을 당해서 부도,부도비를 건립했더라면 고려 건국 후에는 형미스님이 일등 개국 공신인데, 대우는 못 할 망정 바로곁에 3층탑을 세울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도 중심축에서 한참 벗어난 자리에...
어슬렁거리며 올라가 산신각과 미륵이 모셔진 전각을 보노라면 웃음이 절로 넘친다. 무위사 넓은 공간을 비워두고 한구석에 옹색하게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좌향이 극락전 측면을 등지고 앉아 딴청을 부리며 제멋대로 놀고(?) 있지 않은가? "극락전 형님은 형님 맘대루 하셔!!! " "난 동네의 할머니 보살과 놀라요!!!"
탱화보존각이 공사로 인해 아미타래영도 등의 벽화는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그 또한 맺지 못할 인연이라고 여기고 떠날려해도 발길이 쉽게 옮겨지지 않는 것은, 무위사는 머무르기 좋은 가람이 아니라, 떠나기 싫은 절집이기 때문일까?
2005.03.21
무위사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관음사라 칭했다는 기록이 『무위사사적(無爲寺事蹟)』에 전하나, 이는 원효스님의 생몰연대(617-686)와 맞지 않아 신빙성이 부족하다. 이후의 연혁은, 삼국통일 후 875년(헌강왕 1)에 도선국사가 갈옥사(葛屋寺)로 창건한 것이 첫번째 중창이라 전한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905년(효공왕 9) 이후에 선종인 가지산문 계통의 선각국사 형미(864~917)가 고려 태조 왕건의 요청으로 무위갑사無爲岬寺에 머무르면서 절을 중수하고 널리 교화를 펴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선각국사 관련기록은 경내에 서 있는 「고려국 고무위갑사 선각대사편광영탑비명 병서」에 기록된 내용으로, 무위사는 선각국사가 주석했던 10세기 초 이전에 무위갑사라는 이름으로 이미 창건되어 있었고, 형미스님이 중창하면서 가지산문 소속의 선종사찰로 그 위치를 확고히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위사사적』에 의하면 고려시대인 946년(정종 1)에 형미스님이 제 3창을 하면서 모옥사(茅屋寺)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나, 946년은 이미 형미스님이 입적한 30년 뒤 최언위가 지은 「선각대사편광영탑비」가 세워진 해이므로 믿기 어렵다. 이는 아마도 형미스님이 모옥(茅屋)이던 무위갑사를 왕건의 후원으로 크게 중창하면서 교화를 펼쳤던 사실을 후세사람들이 잘못 이해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무위사는 활기를 띠게 되는데, 1407년(태종 7) 12월 조정에서 각처의 명찰을 여러 고을의 자복사資福寺로 삼게 하였을 때 무위사는 천태종 17사 중의 하나로 소속되었다. 따라서 무위사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선종사찰에서 천태종으로 성격이 변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사격 변동은 고려후기 천태종 백련결사白蓮結社의 활발한 활동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만덕산 중심의 백련결사 역시 천태종의 법화신앙에 입각한 결사운동으로 무위사의 사찰성격 변동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결국 무위사는 천태종 백련결사가 활발했던 고려후기에 천태종 소속 사찰이 되었다가 조선 초 사찰 통폐합의 2차 정리기인 1407년에 천태종 소속의 자복사로 남게 된 듯하다. 이 무렵의 연혁을 보면, 1430년(세종 12)에 극락보전이 건립되었는데 지금 극락보전 안에 모셔진 목조아미타삼존불도 이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1476년(성종 7)에는 극락보전 후불벽이 만들어지고 후불벽화가 조성되었음이 「무위사극락전묵서명」을 통해 확인된다. 이 묵서명을 보면 극락보전 건립에 관직을 부여받은 승려들이 참여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는 곧 극락보전이 조선 초기에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고급 기술자의 손으로 만들어진 건물로서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된 것임을 짐작케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7 「강진현 불우조」에는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했던 무위사를 이제금 중수하고, 이로 인해 수륙사로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위사가 수륙사로 지정된 것과, 극락전을 건립하고 아미타삼존도ㆍ아미타여래도 등의 벽화를 조성한 것은 조성시기 및 신앙배경 등의 측면에서 상호 밀접한 관련성을 엿볼 수 있다. 왜냐하면 수륙사로 지정된 무위사는 수륙재를 빈번하게 행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수륙재는 육지와 물 위를 떠도는 영혼을 부처님의 법력으로 천도하는 의식으로서, 수륙사로 지정된 무위사에 극락전과 아미타불 벽화 등 서방 극락정토와 관련된 불사가 이루어진 것은 이와 같은 신앙구조 속에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후 법당과 요사가 점차 퇴락하여 몇 개의 전각만 남게 되었으며, 1678년(숙종 4)에 극락보전 앞마당에 있는 괘불지주를 마련하였다. 1739년(영조 15)에 해초 스님의 공덕으로 미타전ㆍ천불전ㆍ시왕전을 보수하고, 당시 주지 극잠 스님이 중심이 되어 앞에서 언급한 『무위사사적』을 작성하였다.
무위사 주차장에서 좌측 개울 건너편에 위치한 부도. 정방형의 지대석 위에 팔각 앙련의 하대석을 놓고, 그 위에 타원형의 탑신을 올렸다. 옥개석은 처마를 들어올린 듯한 모습의 팔작지붕으로 표현하였다.
무위사 전각도 그간 많은 변화다 있었다. 천왕문, 보제루 범종각이 자리하고 있다. 극락보전이 단아하고 정갈한 모습을 드러내며 서 있다. 옆으로 미륵전과 산신각, 앞으로 선각대사편광탑비와 삼층석탑이 있다. 계곡 건너에 천불전이 있다.
다문천왕. 지국천왕
증장찬왕. 광목천왕
예전에는 볼 수 없었는데 근자서 조성한 것 같다.
국보 제13호 극락보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맞배지붕의 겹처마 전각이다.. 무위사에 남아 있는 건물은 대부분 1555년(명종 10) 4창할 때 건립된 것인데, 1983년 대량 상부를 해체 수리하면서 발견된 묵서명을 통해 이 극락전만큼은 1430년(세종 12) 효령대군 등에 의해 건립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형상을 취하고 있는데,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으며,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조각이 매우 세련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의 앞면은 격자모양ㆍ빗살모양을 섞어 만든 4분합 문을 달았고, 옆면에는 앞쪽에 출입살문, 뒷면에는 칸마다 모두 판자문과 창을 달았다.
아미타 삼존불...문화재청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보물 제13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왼다리를 내려 반가자세를 취한 채 보병을 들고 있는 관음보살상, 석장을 짚고 오른다리를 내려 반가자세를 취하고 있는 지장보살상을 배치하였다. 아미타불좌상은 연화대좌와 불신이 하나이며, 통견의 법의에 하품중생인 수인이다.
관음보살은 본존불과 거의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보이며, 머리에는 화려한 금속제 보관을 쓰고, 양어깨 위로 굽실거리는 보발이 흘러내리고 있다. 선정인과도 같은 손가짐을 취하고 있는 두 손에 보병을 받쳐 들고 있다. 지장보살은, 오른손으로는 6개의 금속제 고리가 매달려 있는 석장을 짚고 있다.
고려후기 불상조각 양식의 계승과 함께 조선 초기 불상양식의 정립이라는 과도기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있으며, 조성연대는 1934년 보수 당시 발견된 전라남도 장흥 보림사 삼층석탑(국보 제44호) 석탑지(石塔誌) 내용 중의 ‘성화십사년무술사월십칠일(成化十四年戊戌四月十七日)……무위사조주불(無爲寺造主佛)…" 기록과 관련지어 살펴볼 때 1478년경이 확실시되고 있다. 삼존불은 고려 후기를 계승하면서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으로 변화되는 과도기적인 작품으로서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 불상의 연원이 되는 시원적 작품으로서도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고 한다.
아미타삼존탱...문화재청
극락보전 후불벽 앞면에 봉안된 아미타삼존벽화, 후불벽화로 그리기 위해 별도로 세운 흙벽에 채색그림으로 그렸다. 가운데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과 지장보살이 시립한 아미타삼존이 화면을 꽉 채우고 있는 이 벽화는, 고려불화의 영향과 조선 초기의 새로운 수법을 동시에 엿볼 수 있는 걸작으로 화려하기 그지없다. 중앙의 본존불은 거대한 키 모양 광배 안에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왼쪽에는 높은 보관을 쓴 관음보살이 서있고, 오른쪽에는 왼손에 석장을 잡고 머리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이 서있는 구도이다. 구름을 배경으로 한 화면의 상단 좌우로는 6인의 나한상을 배치하였는데, 가슴 윗부분만 드러내고 채색을 부드럽게 하여, 중앙 삼존으로 향하는 시선이 분산되지 않도록 처리하였다. 다시 그 위에는 서광이 펼쳐진 가운데 좌우로 소형의 좌불이 각 2불씩 그려져 있다. 이러한 구도적 특징은 16관경변상도를 이어받은 조선 초기 관경변상도(1465년)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어, 16관경변상도의 ‘아미타극락회도’ 장면이 단독으로 그려진 듯한 구도이다.
삼산형의 머리 윤곽과 신체의 부피감, 괄호 모양의 이마 처리, 법의의 금선문양 표현, 두건 쓴 모습의 지장보살, 관음보살의 투명한 겉옷과 치마 끝단의 구불구불한 옷주름, 온화한 색채 등은 고려적인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요소이다. 반면, 큼직한 육계와 정상계주, 발 위로 길게 내려뜨린 왼손, 간결한 문양, 사각대좌와 키 모양 광배, 발목의 레이스 모양 옷자락 표현, 본존불과 대등한 크기의 기타 인물표현 등은 조선 초기 불화의 새로운 특징들을 잘 표현하고 있다. 벽화의 좌우 하단에는 화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중 오른쪽의 내용에 '○○십이년병신삼월초 길화성무량수여래관세음지장보살…화원 대선사해련(○○十二年丙申三月初吉畵成無量壽如來觀世音地藏菩薩…畵員 大禪師海連)…'이라 밝히고 있으나 연도부분이 퇴락하여 조성연도를 알 수 없었는데, 장흥 보림사 삼층석탑 북탑지(北塔誌) 내용 중 '성화십사년무술사월십칠일(成化十四年戊戌四月十七日)…중수조(重修造)…무위사조주불설대회안거(無爲寺造主佛設大會安居)'라는 기록이 있어, 성화 12년(成化十二年)인 1476년에 화원 대선사 해련이 조성한 작품임이 확인되었다. 아미타후불벽화는 지금까지 발견된 불교벽화 가운데 가장 앞선 것으로, 고려양식을 띈 조선초기 불화의 전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 보물 제1313호이며, 화면의 크기는 가로 210cm, 세로 270cm이다.
극락전 후벽 백의관음도...문화재청
아미타후불벽화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백의관음도는 아미타후불벽화의 뒷면 그림으로, 백의관음보살이 떠가는 듯 일렁이는 파도 위에 연잎을 타고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화면 전체에 관음보살이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지고 서서 화면의 아래쪽에서 관음을 예배하는 선재동자를 내려다보고 있는 구도이다. 당당한 체구에 옷자락을 휘날리며 오른쪽으로 몸을 튼 3/4 측면관인 이 관음보살은, 넓적한 얼굴에 굵은 목, 넓은 어깨 등에서 전체적으로 강건한 남성적 체구를 보여주고 있다. 두 손을 앞에 모아 교차하여 오른손으로 버들가지를 들고 왼손으로는 정병을 들고 있으며, 아미타불을 표시한 보관 위에서부터 흰 천을 내려쓰고 있는데 그 양쪽 자락이 어깨를 덮고 내려와 흩날리고 있다. 간략화된 옷주름과 더불어 팔찌와 가슴장식 역시 간소화되어 있으나, 힘있고 빠른 필치로 바람에 흩날리는 옷자락과 넘실대는 파도를 표현함으로써 강렬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관음이 내려다보고 있는 인물은 수월관음도에서 등장하는 선재동자로 생각되지만, 일반적 동자의 모습이 아닌 승복을 입은 노비구의 모습으로 보인다.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한 자세와 표정은 관음을 예배하며 구원을 바라는 염원이 절실하고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흥미로운 점은 비구의 어깨 위에 머리를 뒤로 돌려 관음보살을 쳐다보고 있는 청조(靑鳥)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인데, 백의관음에 비하여 비교적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앞쪽 위에는 먹으로 '해안고절처(海岸孤絶處) 중유낙가봉(中有洛迦峰) 대성주불주(大聖住不住) 보문봉불봉(普門逢不逢) 명주비아욕(明珠非我欲) 청조시인수(靑鳥是人遂) 단원창파상(但願蒼波上) 친참만월용(親참滿月容)'이라는 5언 율시가 쓰여 있다.1476년 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미타후불벽화와 거의 같은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며, 아미타후불벽화와 더불어 조선 초기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현재 보물 제1314호이며, 화면 크기는 가로 280cm, 세로 320cm이다.
극락전 내벽 아미타래영도..문화재청
아미타래영도는 극락왕생자를 맞이하는 아미타불을 그렸는데 8대 보살과 8비구를 거느린 모습이다. 전체적인 구도가 매우 자연스러우며, 인물의 익살스럽고 자유로운 얼굴 표정, 움직이는 듯한 자세 등 회화성이 돋보인다.
극락전 내벽 오불도..문화재청
괘불석주. ‘강희십칠년무오일○자조성야(康熙十七年戊午日○字造成也)'라는 명문이 있어 1678년(숙종 4)에 조성된 괘불대임을 알 수 있다.
배례석. 윗면에는 커다란 단판8엽 연화문이 새겨져 있고, 중앙의 원좌에 8개의 씨방이 표현되어 있다. 주위에는 방형 1단의 괴임을 나타내었다. 조성시기는 고려시대로 전한다.
무위사 3층석탑. 지대석은 여러 매의 장대석으로 결구하고 그 위에 각형 2단의 괴임대와 하층기단 중식이 연결되어 있다. 각 면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는데, 조식이 정교하여 세련되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 1개씩으로 탑신에는 양면에 우주를 모각하고 2ㆍ3층에서는 높이를 줄여 체감을 보였다. 옥개석은 상면의 낙수면이 평박하고 처마의 곡선도 중앙에서 직선을 이루다가 우동의 합각에 이르러서는 가벼운 반전을 보였다. 이 탑은 3층 옥개석과 1층 옥개석 일부에서 약간의 훼손을 입었으나 그 외의 부재는 완전한 상태로서,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을 비교적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탑의 조성연대는 선각대사 편광탑비의 조성연대(946년)와 동시대이거나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고려 초기로 여겨진다. 현재 전남문화재자료 제7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높이는 396cm이다.
선각대사(先覺大師) 형미(逈微, 864~917)의 탑비. 비명은 ‘고려국 고무위갑사선각대사 편광영탑비명병서(高麗國故無爲岬寺先覺大師遍光靈塔碑銘幷序)’이며, 당시 태상인 최언위(868~944)가 글을 짓고, 유훈률이 썼다. 비문 끝에 ‘개운삼년세차병오오월경인삭이십구일무오입(開運三年歲次丙午五月庚寅朔二十九日戊午立)’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946년(고려 정종 1)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해는 대사의 입적 후 28년이 되는 해이다. 비문에 따르면 선각대사는 무주(武州) 출신으로 법휘는 형미이고 속성은 최씨이다. 신라 헌강왕 8년(882)인 18세에 구례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그 후 가지산 보림사 구산선문의 태두인 보조선사에게 찾아가 선법을 배웠다. 27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운거도응의 심인(心印)을 받고 효공왕 9년 (905)에 귀국하여 강진 무위갑사에 머무르니 이때가 대사의 나이 41세 때의 일이라 한다.선각국사 형미(先覺國師 逈微, 864~917)는 신라말 고려초 가지산문 계통의 선승으로 성은 최씨(崔氏)이며 무주(현재의 광주) 출신이다. 15세에 출가하여 가지산 보림사에서 보조선사 체징(805-880)의 제자가 되었으며, 얼마 지난 뒤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891년(진성왕 5) 당나라에 건너가 조동종의 운거 도응의 법을 전해받고 905년(효공왕 5)에 귀국하였다. 이후 전남 나주지방을 정복한 태조 왕건과 인연을 맺게 되어 철원에 올라갔다가 궁예의 미움을 받게 되어 피살된 것으로 여겨진다.
귀부와 비신, 이수를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는 양각으로 뚜렷이 조각한 용두로서 여의주를 머금은 입은 투조되어 있다. 두 귀의 모습은 용의 귀와 같이 깃털이 날리는 듯 조각하여 사납게 표현하였고, 귀부의 등에는 6각의 갑문을 정연하게 양각하였다. 비좌 전후 2면에는 운문)을 조각하고 양측에 안상을 각각 조각하였다.
비신 위의 이수에는 3단의 받침을 복판연화문으로 장식하였는데, 이수는 상하 2석으로 겹쳐 쌓았으며 중앙에 방형의 전액을 마련하고 있으나 마멸되어 판독할 수 없다. 이수 주위는 모두 반결 운룡문과 반결 쌍용문으로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며, 사실성을 띠고 있는 우수한 조각기법을 보이고 있다.
현재 보물 제50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체 높이는 406cm, 비신 높이는 250cm, 이수 높이는 56cm이다
예전에는 극락보전을 등지고 있었었는데 이제는 극랍보전 옆에 위치한다.
미륵불. 육계와 머리형태가 마치 여성의 올림머리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어 일반적인 불상의 형식에서 많이 벗어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불신 주변에 화염문 광배를 선각한 점이나 목의 삼도와 수인 등에서 여래임을 알 수 있다. 부숭부숭한 눈두덩에 입술이 두껍고 인중이 짧으며 왼쪽 어깨는 움츠린 듯 좁게 표현되어 있다. 원래 이 석불은 강진군 성전면 수양리 수암마을에 방치된 채 있었는데 마을 독지가들에 의해 무위사로 옮겨온 것이라 한다.
무위사에 가려면...윤원영
둘 또는 셋이서 아무것도 챙기지 말고
적적한 산길 가듯 단순한 마음으로
어느 날 그냥 만나서
그냥그냥 가 보시게
비운 것들의 아름다움에 이마가 서늘할 쯤
흙벽에 수를 놓던 지그한 어느 화공
묵묵히 시간을 걷어
연등을 밝혀 준다네
그만한 공양이면 극락을 보았으리
돌아와 몇 이레 고즈넉이 다가오는
말로는 이를 수 없는
빈 고요 그 가운데
둘 또는 혼자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버리지 못한 잡동사니 그대로 아곳에 두고
마음 안 소리도 다 지우고
고요만 바라보시게
2012.11.03
***전통사찰관광종합정보.문화재청.강진군청 홈페이지를 참고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