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20달러 새 주인공 해리엇 터브먼이 몸담은
노예 탈출 비밀 조직 ‘지하철도’를 모티브로 완성한 역작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는 실존했던 흑인 노예 탈출 비밀 조직 ‘지하철도’를 실제 ‘지하철도’로 상상해 쓴 소설로, 노예 소녀의 탈출기를 그리고 있다. 작가가 ‘지하철도’에 대해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2000년 봄이다. 어렸을 때 그에 대해 듣고 땅속에 있는 진짜 철도일 것이라고 상상해왔다가 나중에 실제 철도가 아니라 비유였음을 알고 약간 화까지 났다는 그는 ‘실제 철도였으면 어땠을까?’라는 물음으로부터 이 소설을 구상했다.
‘지하철도’는 노예제도가 폐지되기 이전인 1800년대, 남부의 노예들이 북부의 자유 주나 캐나다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왔던 점조직으로, 노예제 폐지에 뜻을 같이하는 수많은 백인과 흑인들이 비밀리에 도망 노예들에게 먹을 것과 은신처를 마련해주고, 북부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역장’, ‘기관사’, ‘차장’으로 칭했고, 도망 노예들을 ‘승객’, 그들을 숨겨주는 이들의 집을 ‘역’으로 부르는 등 실제 철도 용어를 은어로 쓰면서 10만 명이 넘는 노예들을 자유로 이끌었다. 미국 20달러의 새 주인공 해리엇 터브먼이 바로 이 지하철도의 ‘차장’이었으며, 그녀 역시 지하철도를 통해 남부를 탈출했다는 점에서 소설 속 주인공을 떠올리게 한다.
엄청난 흡입력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
코라는 불면을 달래보려고 기다시피 텃밭까지 나와서, 단풍나무 더미에 앉아 공기를 들이마시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늪에 있는 것들이 살아 숨 쉬는 어둠 속에서 사냥을 하면서 새된 소리를 내고 물을 튀겼다. 밤에 그리로 걸어간다는 것은 자유의 땅 북부로 간다는 것. 그렇게 하려면 제정신은 놓아버려야 한다. 그러나 엄마는 그렇게 했다. -52쪽
이 소설에서 주인공 코라는 할머니가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잡혀 온 이래로, 농장에서 태어나고 농장을 둘러싼 늪 밖으로는 나가본 적 없는 소녀다. 그녀가 열 살이던 해, 엄마는 그녀를 버리고 ‘농장에서 유일하게 탈출한 노예’가 된다. 혈혈단신 악착같이 살아가던 그녀 앞에 북부에서 팔려온 시저라는 청년이 나타나고, 그는 그녀에게 같이 도망갈 것을 청한다. 코라는 ‘백인에게 더 빨리 죽임을 당할 뿐’인 이 일에 가담하지 않으려 하지만, 주인이 도망갔다 잡혀 온 동료를 백인 구경꾼들 앞에서 산 채로 불에 태운 일을 계기로 마음을 바꾼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 남쪽에도 지하철도가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그녀는 엄마가 그랬듯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 곳을 향해 늪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역에 당도한 그녀, 세상 밖으로 나간 그녀 앞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상상으로 다시 태어난 지하철도,
인간 존엄을 망각한 뒤틀린 세상을 가로지르다
나무에 시체들이 썩어가는 장식물처럼 매달려 있었다. 일부는 알몸이었고, 옷을 조금 걸친 것도 있었는데, 목이 부러질 때 장에 든 것이 다 쏟아져 나오면서 바지가 시커메져 있었다. 코라에게 가장 가까운 쪽 시체 두 구의 역겨운 상처들이 역장의 등불 속에서 선명히 드러났다. 하나는 성기가 잘렸는데, 그의 남성이 있던 곳에 추한 구멍이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여자였다. 여자의 배는 불룩했다. 코라는 임신한 몸을 그렇게 가까이서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의 튀어나온 눈은 코라를 꾸짖는 듯했지만, 태어난 날부터 그들을 매질해온 이 세상에 비하면 휴식을 방해하는 한 소녀의 시선이 대수겠는가?
“사람들은 이제 이 길을 ‘자유의 길’이라고 하지.” 그가 다시 마차에 방수포를 덮으며 말했다. “이 시체들이 시내까지 가는 길 내내 걸려 있어.”
기차는 도대체 어떻게 생긴 지옥에 코라를 내려놓은 것인가? -173쪽
주인공 코라는 새로운 역에 당도할 때마다 참혹한 새로운 참상을 맞닥뜨린다.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했던 19세기 미국 남부 노예들의 비참한 삶과, 인종 우월주의에 근거한 인간의 광기, 그런 긴박함 속에서도 자기 양심에 따르고자 했던 ‘지하철도’ 요원들의 분투가 코라의 탈출 여정을 통해 그려진다. 작가가 노예 출신들의 실화를 수집한 1930년대 ‘연방작가프로젝트’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밝혔듯, 현실감이 살아 있는 이야기들이다. 작가 특유의 짧고 수식을 거의 배제한 문장, 크고 작은 반전들을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 장과 장 사이에 끊임없이 배치하는 장치들은 이러한 현실감을 더욱 높이고 긴장감을 선사한다.
“이 나라가 어떤 덴지 알고 싶다면, 기차를 타봐야 한다. 기차가 내달릴 때 바깥을 보면, 미국의 진짜 얼굴을 알게 될 거야.” -84쪽
무엇보다 이 책이 평단과 독자 모두를 사로잡은 이유는, 비유적 ‘지하철도’를 실제 ‘지하철도’로 매우 영민하게 탈바꿈시켰다는 점이다. 『걸리버여행기』를 연상케하는 코라의 여정은 노예제도의 보이지 않는 이면을 점층적으로 드러내며, 그 비극와 부조리를 넓은 시야에서 바라보게 한다. 작가는 노예제도 안에서 흑인들뿐만 아니라 백인들 역시 어떻게 피폐해져가고 있었는지, 흑인 내부에서는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 결국 이 제도가 인간 모두를 얼마나 괴롭혀왔는지를 강하게 환기시킨다. 더 나아가 이제 한 인간으로서 우리 모두는 우리 손에 쥐인 자유를 어떻게 누려야 하는지도.
최근 영미문학에서 긴 호흡의 작품들을 줄곧 선보여온 점을 감안하면, 단 350페이지 내외의 분량에 이 모든 메시지를 매우 함축적으로 담아냈다는 것이 경이로움을 안겨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