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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활자의 고향 청주 ▷지역 :충북 ▷일정 :1일 ▷위치 : 충북 청주 ▷주요 포인트 : 청주고인쇄박물관, 상당산성, 국립청주박물관, 백제유물전시관, 청주랜드 ▷코스 : 중부고속도로 서청주IC → 청주고인쇄박물관 → 상당산성 → 국립청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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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련과 고통, 번뇌와 절망이 숨겨져 있다. 그런가 하면 시련 속에서 탐스러운 열매를 맺은 아름다운 이야기들도 들어 있다. 고결한 도시의 이미지답게, 청주는 우리 역사와 문화를 빛낸 문화재들의 이야기를 가득 담고 있다. 그 찬란한 문화와 역사의 현장, 청주에서 만나 보자. |
1. 청주고인쇄박물관 - <직지>의 산파, 묘덕이야기 |
청주시의 양병산 동남쪽 기슭, 이곳에는 흥덕사지가 있다. 중부고속도로 서청주나들목에서 흥덕대교로 가는 길목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시내 한복판에 있는 셈이다. 흥덕사는 창건연대도 확실치 않고, 사찰기록도 남아 있지 않은 데다 현재 남아 있는 건축물은 복원된 금당과 석탑 하나뿐이다. 이 때문에 볼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는 이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흥덕사지에는 아주 특별한 것이 있다. 이곳이 바로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인 <직지>가 탄생한 곳이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이를 증언이라도 하듯, 흥덕사지 옆에 자리 잡은 것이 바로 청주고인쇄박물관이다. 청주고인쇄박물관에는 우리나라의 금속활자본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와 함께, 우리나라 인쇄술의 발전사를 꼼꼼하게 알려주는 각종 유물과 자료들이 가득 차 있다. 특히 인쇄의 원리와 금속활자본 제작과정을 낱낱이 기록해, 우리 선조들이 이룩한 문화적 혁명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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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의 원래 이름은 <백운화상초록 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 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원제에서 보듯 백운화상이 원 저자이다. 중국의 석옥선사로부터 <불조직지심체요절> 1권을 받고 돌아온 백운화상은 56세에 이르러 불도를 체득하고, 75세 때(1372년, 고려 공민왕 21년) 성불산 성불사에서 145가(家)의 법어를 가려 상·하 두 권의 <직지>를 편집하여 만들었다. 백운화상은 <직지>를 저술하고 나서 2년 후에 여주 취암사에서 입적했다. |
<직지>를 저술할 당시에 제자로 있던 석찬과 달담 등은 백운화상의 <직지>를 금속활자로 인쇄하게 된다.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본을 펴낸 것이 1377년의 일. 이때가 바로 현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직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백운화상이 입적한 여주 취암사에도 <직지>가 남아 있으나, 이것은 금속활자본이 아닌 목판본으로, 금속활자본이 탄생한 1년 후에 간행된 것이다. 그나마 흥덕사에서 간행된 금속활자본은 상·하권 중 하권 1책만이 현재까지 전해진다. 하지만 이 역시 고난의 역사를 거친 끝에 우리 땅을 떠나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형편이다. |
<직지>의 앞에 항상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문헌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금속활자본을 찍은 것은 1234년이다. 고려 인종 때 왕명을 받아 편찬하고 고종 때 금속활자본으로 찍어낸 <고금상정예문>이 바로 그것이다. 서양의 인쇄술이 1450년경 구텐베르크에 의해 발명된 것이라 할 때, 우리 문헌의 기록으로 보자면 <고금상정예문>이 200년이나 앞선 것이다. 하지만 <고금상정예문>을 금속활자본으로 찍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원본이 남아 있지 않으니 증명할 길이 없다. 그래서 <직지>의 앞에는 항상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 것이다. |
<고금상정예문>이 발견되지 않아, 서양의 인쇄술보다 200년 앞선 것임을 증명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직지>의 간행년도가 1377년이니 서양의 그것보다 70년 이상 앞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청주고인쇄박물관에 들어가 보면 금속활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 수 있다. |
금속활자 인쇄방법을 가만히 보면, 보통의 의지로는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한 글자, 한 글자씩 글자를 만들어서 양각으로 만든 밀랍을 주형틀에 넣고 거푸집을 만든다. 양각된 밀랍을 녹여내면 거푸집이 만들어지고, 이 거푸집에 쇳물을 부으면 밀랍으로 만들어냈던 글자 모양대로 양각된 활자가 나온다. 책 내용에 맞게 각 글자를 배열해 판을 짠 다음(조판), 먹을 칠하고 종이에 찍어내는 것이다. 금속활자라는 것은 지식을 알리는 도서의 대량인쇄가 가능한 기술이다. 지식이 얼마나 널리 보급되었는지를 알아보는 척도인 셈이다. 지식의 대중화는 결국 문화발전으로, 문화발전은 인류사의 발전을 가져오는 것이므로, 앞 다투어 인쇄술의 발명시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
금속활자는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번 인쇄할 수 있지만, 제작과정에는 활자 하나를 만드는 데에도 일일이 손이 가는 복잡한 작업이다. 그런 작업에는 특별한 의지와 인내심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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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를 인쇄한 사람들 역시 특별한 의지와 인내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백운화상의 수행비서격인 석찬과 제자 달담은 스승의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펴기 위해 그 과정을 수행했다. 그것도 3년여의 세월을 고스란히 바친 일이었다. 게다가 목판본과는 달리, 금속활자본을 만드는 일에는 엄청난 자금이 필요했다. 밀랍과 종이가 필요했고, 활자본을 만드는 청동에까지 많은 돈이 드는 일이었다. 이렇게 엄청난 금속활자의 제작에 어마어마한 자금을 시주한 것은 ‘묘덕’이라는 비구니였다. 어떻게 해서 비구니에게 그렇게 많은 재산이 있었으며, 그녀는 왜 금속활자 인쇄에 그토록 많은 재산을 쏟아 부었을까? 학계에는 묘덕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고려 말기의 의관이던 정안군 허종과 관련이 있는 인물로 추정할 뿐 명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결국 석찬과 달담이 제자로서 <직지>의 인쇄에 주력했고, 묘덕이 그 비용을 부담함으로써 <직지>의 산파역할을 했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금속활자와 묘덕 사이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
비구니 묘덕, <직지> 탄생의 산파 역할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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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가 한여름의 열기를 식히고 난 뒤, 청주 흥덕사의 젖은 풀잎 사이로 석찬이 걷고 있었다. 석찬은 실의에 젖어 하늘을 보았다. 백운화상이 입적하고도 몇 개월이 흘렀다. 생전에 불심을 다해 엮은 <백운화상초록 불조직지심체요절>만이 백운화상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입적한 스승의 뜻을 널리 알려야 하는 것이 그의 맡은 바 소임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뜻을 널리 알리려면 스승의 기록유산을 판본으로 찍어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어마어마한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
수많은 스님들이 원나라에서 수도하고 돌아왔고, 백운화상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고려 말기의 불교계 상황은 그리 녹록치만은 않은 것이었다. 원나라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공민왕과 신돈이 개혁정치를 펼쳤으나, 이것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고 신돈이 처형된 이후에는 여러 문신들이 불교계의 폐해를 지적하고 나섰다.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학자들도 사찰의 신축을 반대했고, 그 여파는 불교계를 위축시켰다. 그러니 흥덕사 주지스님 역시 온전한 시주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
걱정스러운 얼굴로 흥덕사 강당 앞에 서 있던 석찬에게 다가와 합장한 사람은 묘덕이었다. 어려서 계첩을 받았고, 불도를 닦아 재가승이 된 묘덕은 사찰을 오가며 백운화상과 자주 면대했고, 덕분에 석찬이나 달담과도 안면이 있는 터였다. |
“취암사에서 화상께서 입적하신 후에는 통 뵙지를 못하겠더니, 여기서 뵙는군요.” |
그동안 백운화상의 기록유산을 널리 알릴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여러 사찰을 돌아보았다는 석찬의 말에, 묘덕은 침묵했다. 왕실이나 대단한 자산가가 아니라면 시주할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라는 것을 묘덕 역시 알고 있었다. 석찬이 하루 이틀 더 머물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묘덕은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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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덕이 석찬을 찾아온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석찬을 보자마자 묘덕이 한 이야기는 <직지>를 금속활자로 찍어내자는 것이었다. 목판본보다는 금속활자본으로 만들어 더 많은 이들에게 백운화상이 엮은 책을 배포하자는 얘기였다. 목판으로 제작하면 세월을 견디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후세에까지 널리 백운화상의 뜻을 전하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놀란 쪽은 역시 석찬이었다. 상당한 재산가로 알려진 것이며, 많은 학자나 권세 있는 집안과도 교류하고 지내는 세력가의 미망인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 많은 재산을 시주하겠다는 것이 내심 놀라웠던 것이다. |
“가부(남편)께선 벌써 세상을 등진지 30여년이 다 돼 갑니다. 한 번도 저를 따뜻한 눈길로 보아주신 적이 없었고, 그것이 가슴에 사무친 저는 매양 불심으로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니 후사가 없는 것은 당연했고, 홀로 남은 제가 재산을 가지고 있은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일평생 제 마음을 다스리고, 속세의 인연에 연연하지 않게 해 준 불교에 귀의하는 것이 제 소원이었으니, 이제 때가 된 것 같습니다.” |
이렇게 해서 묘덕은 전 재산을 <직지>를 인쇄하는 데에 시주하고 비구니가 되었다. 평생을 불심으로 다스려 온 묘덕의 선택이었고, 불교에 정진할 수 있도록 도와준 백운화상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그리고 1377년, 마침내 3년여의 기나긴 진통 끝에 금속활자본 <직지>가 탄생하게 되었다. |
속세에서 큰 사랑을 이루지 못한 묘덕, 그의 사랑은 백운화상의 <직지>를 금속활자로 펴냄으로써 중생을 향한 자비가 되었고, 그 사랑 덕분에 <직지>는 오늘날 찬란한 우리 인쇄문화를 자랑하는 증거로 남게 된 것이다. |
○ 위 치 : 청주시 흥덕구 직지로 113 ○ 관람시간 : 오전 9시~오후 6시(오후 5시까지 입장) ○ 휴 관 일 : 매주 월요일, 1월1일, 설날, 추석 ○ 관람요금 : 개인(어른 800원/청소년 및 군경 600원/어린이 400원) 단체(어른 600원/군경 400원/초중고생 단체입장:무료) 6세 이하, 65세 이상 무료 ○ 문의전화 : 043-269-0556 ○ 홈페이지 : www.jikjiworl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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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당산성(上黨山城)- 원균 이야기, 이인좌의 난 이야기 |
청주시에는 ‘상당구’라는 행정구역이 있다. 그 이름의 어원이기도 한 ‘상당(上黨)’은 백제 때 ‘상당현’이라는 지명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에 고구려와 백제의 치열한 각축장이었던 이곳 상당현에 자리잡은 것이 상당산성이다. 당시에는 토성(土城)이었지만, 조선 숙종 42년(1716년)에 대대적으로 개축되어 석축이 되었다. |
원래 있던 토성 자리에 무사석을 쌓아 외성을 올린 다음 안쪽에는 흙과 자갈로 채워 넣었으니, 이것이 흔히 말하는‘내탁공법’의 성이다. 산성의 안에는 산자락 아래로 흐르는 계곡이며, 마을이 있었던 평지가 모두 포함돼 있다. 이렇게 산세와 계곡까지를 감싸 안고 축성된 것이 일명 ‘포곡식산성’이다. |
현재 상당산성에는 동문(진동문), 서문(미호문), 남문(공남문)의 3개문과 동쪽, 남쪽에 있는 2개의 암문, 3개의 치성 그리고 3개의 수구가 있다. 장수가 군사들을 지휘하는 장대(將臺)로는 동장대(보화정)와 서장대(제승당)가 있다. 또 산성의 남문 북동쪽에 있는 저수지의 물길을 열어주었던 수문이 홍수로 사라진 이후 1943년경에 확장해 만든 수문이 놓여 있다. |
돌을 잘 다듬어 차곡차곡 쌓아 올린 상당산성은 견고해 보인다. 남문인 공남문을 앞에 두고 왼쪽을 살피면 저 멀리 치성이 툭 튀어나와 있다. 치성은 성벽을 오르는 적에 대비한 것이다. 성벽을 오르는 적이 있으면 성벽보다 적진 쪽으로 더 전진해 있는 치성 쪽에서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산성 돌아보기는 공남문(남문)에서 시작된다. 남문(공남문)에서 시작해 남암문을 거쳐 서문으로, 서문에서 동암문으로, 그리고 동암문에서 동문을 거쳐 동장대, 여기서 다시 남문까지 이어지는 길이 상당산성의 길이다. |
무지개형 남문을 통과하면 옹벽이 앞길을 막는다. 적에게 성문이 뚫리는 것을 우려해 쌓는 옹성이 성문 안쪽에 있는 셈이다. 적이 성문을 뚫고 들어온다 하더라도 적군은 옹벽에 가로막혀 옹벽이 유도하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으니, 이미 성문을 넘은 적이라 할지라도 막다른 골목에 이르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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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 있는 계단을 오르면 공남문 위에서 남쪽을 바라보게 된다. 초록으로 물든 잔디광장이 시야를 시원하게 한다. 남문에서 서문까지 가기 위해서는 남암문에 이르는 오르막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산세가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산성의 길도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산성이 산록의 굴곡에 따라 만들어졌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 ‘오르내림’에는 임진왜란을 전후해 수군통제사에서 백의종군까지 오르내림을 했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떠오른다. 그도 그럴 것이, 상당산성은 그와 무관하지 않은 곳이다. |
어찌 보면 별 상관없어 보이는 일이지만, 서로 상관관계가 있는 듯한 것이 이순신과 상당산성이다. 조선 수군의 명장으로 지금까지 추앙을 받는 충무공 이순신의 이야기는 상당산성과 닿을 듯 말 듯 한 연관성을 갖고 있는 셈이다. |
조선의 임금(선조)이 왜군에 밀려 황망하게 피난길에 올라야 했던 1592년의 임진왜란. 왜군이 동래에 상륙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한양이 왜의 손에 넘어갔고, 선조는 평양성까지 파천했다. 한 마디로 피난길에 오른 것이다. 이때 한산도대첩과 당포해전으로 공을 세운 원균과 이순신은 명나라와 일본이 강화회담을 벌이는 동안 조정의 상벌논의에 오르내렸다. |
원균과 이순신이 서로 공을 놓고 대립한다는 얘기가 조정에까지 흘러들었고, 선조는 경상우수사 원균을 충청 절도사로 제수한다. 복잡한 당쟁의 이야기는 차체하고라도, 당시 조정에서는 원균의 편에 선 이들이 많았고, 이 때문에 강직한 성격의 이순신은 설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은 수정항목에 `이순신은 성품이 곧고 굳세어 조정에서 순신을 미워해 명실이 도치되었다`고 쓰고 있다. 왜란 때 공이 큰 두 사람이지만, 상관과 부하로 있으면서 서로 으르렁대니 떼어놓겠다는 심산이었다. 바로 이때 원균이 충청 절도사로 있으면서 한 일 중 하나가 상당산성을 개축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후에 원균은 백성들을 과하게 부역시킨다고 해서 대신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
그런 역사를 거쳐 상당산성은 숙종의 명으로 다시 개축되었다. 그때가 1716년, 숙종 42년의 일이다. 산성 개축에 필요한 물자가 부족하다는 보고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숙종은 개축을 멈추지 않도록 했고, 부족한 물력은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 명목상으로만 벼슬을 주었던 ‘공명첩’을 발행해 해결하도록 했다. |
그리고 상당산성이 다시 실록에 이름을 나타낸 것은 영조 때이다. 경종의 이복동생인 영조는 경종 사후에 끊임없이 경종 독살설에 시달렸고, 이 때문에 ‘아들이 아닌 동생이 왕위에 오른 것은 역모’라고 단정한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다. |
이인좌의 난은 영조의 정통성을 부인하며 경종을 정통으로 인정하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이인좌가 영조 4년인 1728년 청주성을 함락하고 충주의 이봉상 등을 참했는데, 상당산성에 있던 박종원은 이 소식을 듣고 투항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니 상당산성 역시 이인좌의 손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이인좌의 난으로 살해된 이봉상은 이순신의 후손으로, 한때 삼도수군통제사까지 지낸 인물이었다. |
어찌 되었든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과 관련해 상당산성은 여러 차례 거론되었다. 물론 효종 2년(1651년)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진영이 충남 해미에서 청주로 옮겨지면서 왜구의 침입이나 내란이 있을 때마다 한성의 중간 방어지역인 청주가 더 중요한 위치가 되었고, 이 때문에 이후의 실록에도 여러 차례 이름이 오르내린 것이다. |
그런 상당산성 안에는 구룡사, 장대사 등의 작은 사찰이 있었고, 중앙의 평지에는 관아인 운주헌을 비롯해 주민들의 삶의 터전인 논과 밭이 있었다. 지금은 사찰과 운주헌은 흔적만 남은 채 그 자리만을 기억하게 하고 있다. 전통한옥마을과 향토음식점 등이 들어서 있다. 성 위에서 내려다보면 평화롭기 그지없는 풍경이요, 그 안에 들어가면 또 사람들의 삶이 있는 풍경이다. |
내려다보는 풍경이 그렇고, 성을 따라 걷는 길은 또 다른 즐거움을 맛보게 한다. 성 안쪽의 산록에 있는 소나무가 길마다 벗을 해 주고, 뙤약볕에 지칠 때쯤이면 소나무 그늘 아래로 숨어 쉴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상당산성은 걷고 싶은 길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켜켜이 쌓인 역사의 바위 위에 서 있는 느낌도 더할 뿐 아니라, 여유로이 걷고 싶은 길을 만들어주는 산성. 그래서 상당산성은 한 번 가면 또 한 번 가고 싶어지는 곳이다. |
○ 위 치 :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 문의전화 : 043-220-6174 |
3. 국립청주박물관 - 아름다운 박물관 이야기 |
`소가 비스듬히 드러누워 있는 듯하다`고 해서 `와우산(蝸牛山)`이라는 별칭이 붙었다는 청주 우암산, 그 자락에 치마폭 드리우듯 단아하게 앉아 있는 국립청주박물관. |
산자락의 곡선을 따라 시선이 움직이면 그 아래 물이 흐르듯 새하얀 지붕들이 또 다른 곡선을 만든다. 그 하얀 곡선을 지붕으로 얹은 건물은 투박한 화강석을 다듬어 얹고, 그 위에 또 우툴두툴한 콘크리트 외벽을 세웠다. 외벽도 평범하지 않고, 여러 개의 띠를 둘렀다. 그 안에 4개의 전시실과 별관, 야외전시실, 어린이박물관까지 갖추었다. |
국립청주박물관은 이처럼 산자락의 곡선 아래 국립청주박물관의 지붕 곡선이, 그리고 그 아래로 검은 띠를 두른 외벽이 밝은 회색빛을 띈다. 우암산을 바라보는 시선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그 시선 아래에서 환한 느낌을 주는 박물관이 우암산의 숲과 조우한다. 환하게 밝은 박물관의 전체 구도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초록이다. 우암산의 숲과 박물관의 초록은 대화를 나누는 듯하다. 이것이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국립청주박물관의 풍경이다. |
이런 아름다운 풍경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박물관을 찾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화강석 위로 담쟁이가 기어오르고, 쉼터에는 반가운 의자가 손짓한다. 박물관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 우암산의 숲이 초록이라면, 박물관의 길은 물길과 같다. 물이 흐르듯 유연하고 자연스럽다. |
어느 예술가가 전원에 지어 놓은 집에 들여 놓을 만한 정원처럼, 아담하면서도 푸르름을 입은 쉼터가 있다. 담소를 나누듯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옹기에서는 한여름의 아지랑이도, 늦은 가을의 고추잠자리도 쉬어 간다. |
박물관 뒤편에 자리잡은 나무그늘은 여름이면 더 고마운 풍경이 된다. 쉴 새 없이 코를 들썩이며 풀을 먹는 토끼들까지 이 풍경 속에 여유로움을 더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국립청주박물관 길을 산책하듯 걷기를 좋아한다. 이런 풍경 속에 중원의 역사를 담은 박물관이 조용히 서 있다. |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상당산성의 이름에서 보듯, 청주 일대는 백제시대에 ‘상당현’으로 불렸다. 원래 삼한시대에 마한의 지역에 속해 있었는데, 신라가 마한을 복속하고 이 지역을 점령하자 백제의 다루왕이 이 지역을 빼앗아 국토를 넓혔다. 이렇듯 삼국시대에는 이 지역을 빼앗기 위한 삼국의 치열한 공방이 연속되었다. |
고구려가 영토확장을 꾀해 이 지역을 점유하자, 629년에 홀연히 적진에 뛰어든 이가 있었으니, 그가 신라의 김유신이다. <삼국사기>에 보면, 고구려의 저항이 거세어 신라의 사상자가 늘어나자 김유신 장군이 아버지 앞에 나아가 `깃을 정돈해야만 갑옷이 바르게 되고, 벼릿줄을 당겨야만 그물이 펼쳐진다 했으니, 제가 깃과 벼릿줄이 되겠습니다.`라며 홀로 적진에 뛰어들어 고구려 장수의 목을 베어 왔다고 한다. 덕분에 사기를 되찾은 신라군이 고구려의 병사 5천의 피를 뿌리며 수복한 곳이 바로 낭비성(지금의 청주시와 청원군 일대)이라고 했다. 삼국이 통일된 후, 신라는 어렵게 찾은 낭비성을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시켰고, 고려 태조 23년에 이곳을 ‘청주’로 고쳤다. |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각 도에 관찰사를 두어, 지방행정의 최고 책임을 맡겼는데, 세종 때에는 청주에 관찰사를 두었다. 그 만큼 중원에서 청주의 역할이 커진 것이었다. 그런데 세조는 청주를 진(鎭)으로 격을 낮추었고, 임진왜란을 겪은 후 국방의 중요성을 깨달은 선조는 청주를 다시 목으로 승격시켜 2군 9현을 관할하게 했다. |
조선 말기에 와서 고종은 지방제도를 개정하면서 충청도의 핵심 도시로 공주를 꼽으면서 청주목을 폐지했다. 그러나 곧 이듬해에 충청도가 남북으로 분리되었으며, 충주에 관찰사를 두었다. 그러다가 1906년 관찰사를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하게 되었으니, 충청북도의 주도(主都)로 청주를 꼽게 된 것이다. |
청주국립박물관, 그 안에 담겨진 청주는 중원의 역사이다. 충북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은 곧 이 중원지역의 역사를 말하기 때문이다. 청원의 두루봉동굴, 단양의 금굴 등에서는 사람 뼈는 물론이고 동물의 화석 등 구석기시대를 말해 주는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여기저기 이동하며 생활했던 구석기인들에 비해, 움집을 만들기 시작한 신석기인들은 토기를 만들고, 농사를 지으면서 정착했다. 청원 쌍청리유적은 농경생활을 시작한 중원 지역의 신석기생활을 보여준다. |
사람이 정착하고, 모여 살면서 누군가는 두각을 나타내기 마련이다. 이런 선도자 또는 권력자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때가 청동기시대. 고인돌, 돌널무덤, 널무덤, 독무덤 등은 금강 유역과 남한강 유역에서 주로 발견되었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이곳 국립청주박물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이곳에는 선사시대의 문화를 보여주는 제1전시실, 삼국시대의 유물을 전시한 제2전시실, 통일신라시대의 생활용품과 불교 유물이 전시된 제3전시실, 조선시대와 우리 인쇄문화에 대한 변천과정을 알 수 있는 제4전시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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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볼 때, 중원이 삼국의 각축장이 되었던 만큼 고구려, 백제, 신라의 문화를 고루 흡수할 수 있었다. 그 문화적 특징을 볼 수 있는 곳이 제2전시실이다. 충북에서 발견된 고구려 불상과 귀걸이들은 물론이고, 백제시대의 철기 문화를 보여주는 진천 석장리 유물, 한강유역가지 진출한 6세기경의 청원 미천리와 단양 하리 유적 출토 유물들을 찾아볼 수 있다. |
국립청주박물관을 찾는 이들이 손꼽는 것 중 하나는 어린이박물관이다. 2004년에 새로 들어선 어린이박물관은 ‘청명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어렵고 복잡한 역사가 아니라, 쉽고 가까운 역사이야기를 기억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더욱 기억에 남는 곳이다. |
어린이박물관에선 그림판에 얼굴을 쏘옥 집어넣으면 그 자리에서 아이들은 공사장 측량기술자가 되기도 하고, 설계사가 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음악을 정리한 ‘박연 이야기’를 커다란 동화책으로 읽기도 하고,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있는 <직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펴도 본다. 움직이는 사군자를 직접 만들어 보기도 하고, 모래바닥에 엎드려 삽을 들고 공룡화석을 발굴하는 체험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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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과 게임기가 아이들을 안으로, 안으로 갇히게 만들었다면, 국립청주박물관의 야외 뜰은 아이들을 하늘 아래 활짝 웃는 꽃으로 만든다. 굴렁쇠를 굴리고, 투호 던지기를 하면서 팽이 돌리기에 열을 올리는 아이들을 보면 아이들의 세상은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물꼬를 튼 공간으로 나아갈 준비가 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초록과 바람이 열린 공간, 이야기가 풍성하게 열린 공간에서 쉽고 재미있는 역사와 ‘우리의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
○ 위 치 :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로 393 ○ 관람시간 : 평일(오전 9시~오후 6시), 주말․공휴일(오전 9시~오후 7시) ○ 휴 관 일 : 매주 월요일, 1월1일 ○ 입 장 료 : 개인(어른 19세 - 64세 1000원/7세 - 18세 500원) 단체(어른 19세 - 64세 700원/ 7세 - 18세 300원) 6세 이하, 65세 이상, 국가유공자, 장애인, 독립유공자 - 무료 ○ 문의전화 : 043-252-0710 ○ 홈페이지 : cheongju.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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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 도심을 흐르는 무심천, 그 낮은 구릉에 백제의 문화를 말해주는 청주 신봉동 백제고분군. 무덤은 죽은 자의 기록을, 무덤에서 나온 토기와 장신구는 역사의 일면을 남겨 주었다. 백제 문화권에서 발견된 최대의 무덤 밀집지역인 이곳에 청주백제유물전시관이 자리 잡아 고분에서 발견된 백제의 문화를 말해 주고 있다. |
청주백제유물전시관에는 백제고고학의 새로운 지평선을 연 것으로 평가되는 청주 신봉동 백제고분군 출토 유물뿐 아니라 청주 일원의 여러 고분에서 발견된 유물을 전시해 청주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게 한다. 정북동토성의 축조과정과 백제시대 고분의 축조과정, 집터 재현물 등 찬연한 백제의 문화, 백제인의 삶의 모습을 담아냈다. |
○ 위 치 : 충북 청주시 흥덕구 신봉동 139-6 ○ 관람시간 : 오전 9시~오후 6시 ○ 휴 관 일 :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화요일 휴무), 1월1일,설날,추석 ○ 입 장 료 : 무료 ○ 문의전화 : 043-263-0107 ○ 홈페이지 : www.cjbaekj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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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어린이회관과 청주동물원이 만나 청주랜드로 이름을 고쳤다. 우암어린이회관은 아이들과 함께 가서 체험하고 관람할 수 있는 공간으로, 공룡전시실을 비롯해 천문우주전시실, 체험학습관이 마련돼 있고 천문대까지 갖추어져 있다. 체험학습관에서는 여러 가지 과학체험 도구들로 조립해 만든 작품들이 눈길을 끌고, 천문대에서는 오후 7시부터 별자리를 관측할 수 있어 더욱 흥미롭다. 탐구과학관에는 세계의 희귀한 나비와 곤충 등을 모은 표본들이 즐비하고, 곤충의 생활사를 엿볼 수 있는 생태관까지 마련돼 있다. |
전시관과 전시관 사이의 넓은 공간에는 회전목마, 하늘자전거, 비행기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기구가 있고, 호수에는 물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설이 마련돼 있어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탱크, 장갑차, 비행기 등 야외 전시물도 인기를 모으는 전시물이다. |
게다가 동물원에는 한국산 호랑이를 비롯해서 세계 각국의 조수와 동물들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최근 태어난 네 마리의 한국 호랑이들도 인기를 모으고 있다. |
○ 위 치 :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70 ○ 관람시간 : 오전 9시~오후 6시 ○ 휴 관 일 : 매주 월요일, 추석 설날 당일 ○ 입 장 료 : 개인 (성인 1000원 / 중학생 이상 800원 / ) 단체 (성인 800원 / 중학생 이상 600원) * 초등생 및 노인은 무료 / 단체는 20명 이상 ○ 문의전화 : 043-299-2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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