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날 도깨비 골탕 먹이기
노병철
도깨비가 나를 찾아왔다. 아버지께선 어린 나에게 말씀하셨다. 동짓날 도깨비가 찾아오면 분명 네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면 잠시 머뭇거리는 연기를 하다가 “돈”이라고 말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도깨비가 너를 골리려고 제일 싫어하는 게 돈인 줄 알고 돈만 던지고 갈 것이라고 꼭 그렇게 대답하라고 다짐 또 다짐하셨다. 하지만 도깨비가 내가 너무 어린 나이에 찾아왔고 얼떨결에 솔직히 제일 싫은 “공부”라고 한 바람에 죽어라 공부를 계속해야 했고 팔자에도 없이 최고학부까지 학교에 다녀야만 했다. 그때 똑똑한 놈들은 “돈”이라고 이야기해 학교도 안 다니고 농사만 짓고도 돈을 산더미같이 벌어 만날 때마다 자랑질이다.
그때부터 동짓날 도깨비와의 싸움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싫어하는 공부를 죽어라 하게 만들었으니 네놈 또한 싫어하는 것을 찾아내어 마땅히 복수를 하고 말리라. 그래서 동짓날 도깨비 잘 때려잡는다는 유명한 법사를 찾아갔다.
“법사님 도깨비를 골탕 먹일 방법을 찾고자 합니다.”
“그냥 부적이나 한 장 가져가거라.”
“그 정도로는 한이 풀리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게 제일 싸게 먹히는 것이다.”
“설마 뱀 사(巳)자 거꾸로 쓴 부적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째 알았노?”
뭔가 좀 약한 면이 있어 고찰(古刹) 큰 스님을 찾아갔다. 얼굴을 힐끗 한번 보더니 안면에 기름기가 돌고 멧돼지처럼 살이 쪄 있으니 돈이 좀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동지(冬至) 기도를 올리라는 말씀을 하신다. 즉 돈을 좀 써야 한다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데 먹고 죽을 돈도 없는데 난감했다.
“‘원화소복(遠禍召福)’ 이란 말을 아시나?”
“가방끈이 짧아 한자 섞이면 머리가 하얗게 변합니다.”
“무식한 놈, 재앙을 물리쳐서 복을 구한다는 말이다.”
“아. 예.”
“동지맞이 기도의 목적은 묵은 것은 잘 보내고 새것을 맞이함에 있어 잡귀와 재앙을 멀리하고 복을 구하는 것이다.”
“아, 그렇습니까.”
맞장구는 쳤다만, 그다음 나올 이야기가 돈 이야기일 것 같아 대충 마무리 하고 여길 빠져나가야겠다는 궁리만 하고 있었다. 뜨거운 차를 허겁지겁 마시는데 큰 스님이 한 말씀 더 하신다. 도깨비 골탕 먹일 생각일랑 말고 공부를 더 하란다. 안 그래도 지겨운 공부하는 소리를 여기 와서까지 듣게 된다.
“기왕 맺은 도깨비와의 인연을 마무리 잘하시게나.”
“스님, 그런 말씀 마시고 동지맞이 기도 비용 말씀이나 하시죠.”
열 받아 주제넘은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선을 넘어선 말이었다. 큰 스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동지 맞이 기도에 뭔 돈이 필요 없다면서 집에서 마음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단다. 동짓날 절에 와서 팥죽이나 같이 먹잔다.
“귀신이란 불교 용어로 표현하면 마(魔)라고 한다네.”
“그래서 사람들이 ‘마가 낀다.’라고 하는 말을 듣긴 들었습니다.”
“내 마음 가운데에서 울컥하고 올라오는 내면의 마를 들어내면 된다네.”
“너무 그렇게 어렵게 말씀하시면 제가 못 알아듣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마음을 잘 다스리면 된다는 이야기지.”
“..........................”
도무지 수준이 맞지 않는다. 선문답 던지듯이 그렇게 이야기하면 무식한 내가 어떻게 알아듣는단 말인가. 그냥 도깨비 물리칠 비방이나 알려주시면 될 것을 너무 어렵게 돌려 말씀하신다.
“복을 받고 싶으면 구복(求福)이 아니라 작복(作福). 즉, 복을 구할 것이 아니라 복받을 인연을 지어가면 됩니다. 귀신을 물리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물러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기도하고 공부에 전념하면 심심해서 떨어질 겁니다.”
누가 내게 귀신 붙었다고 했나. 인생 피곤하게 만든 동짓날 출몰하는 도깨비 골탕 먹일 방법을 찾는 것이지. 내 수준엔 법사가 딱 맞는 것 같아서 다시 찾아갔다.
“동짓날 귀신이 많이 돌아다니는 이유가 뭡니까?‘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이기에 밤을 좋아하는 귀신들이 가장 많이 활동할 수 있는 날이지.”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그럼, 이 귀신들을 골탕 먹일 방법은요?”
“부적.”
“부적 말구요.”
“귀신이 싫어하는 것은 밝은 곳을 싫어하고 붉은 것을 싫어해.”
“그래서 팥죽 먹나요?”
“옛날엔 팥죽을 온 집 안 구석구석 다 뿌렸어. 요즘 개업식 때 팥을 가게나 공장에 뿌리는 행위도 마찬가지야. 사람이 병이 드는 것도 귀신의 소행이라 믿었기에 먹어서 속에 있는 귀신도 쫓아냈지.”
“아들을 낳으면 빨간 고추를 새끼줄에 끼어 대문에 매달아 놓던 이유가 되겠네요.‘
“그렇지.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아는 군,”
“부적을 빨간색 경명주사로 쓰는 이유도 같은 이유겠네요.”
“어지간하면 한 장 쓰지. 싸게 해줄게.”
“그럼, 여자애를 낳으면 검정 숯을 매달았는데 그 이유는 뭔가요?”
“여자는 음이야 음은 검은색이고 귀신에게 같은 편이 나왔으니 헛짓하지 말라는 이야기야.”
“그 참,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인데. 오늘 동짓날인데 왜 손님이 이렇게 없어요? 너무 추워서 그런가?”
“동짓날 날씨가 온화하고 좋으면 다음 해에 병이 많아 사람이 죽고, 눈이 많이 오고 날씨가 추우면 풍년이 든다고 하지. 손님이 없어도 동짓날은 무조건 추워야 해.”
“너무 있는 척하시는 거 같으신데.”
“그렇게 불쌍하게 생각되면 부적 한 장 쓰자.”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가 길어진다. 마무리하고 자리를 떠야 할 시점이다. 더 죽치고 앉아 있다간 정들겠다. 대충 대화를 마무리하고자 정리 수순에 들어갔는데 느닷없이 묻는다.
“영가 장애가 뭔 줄 알아? 사람이 해결 못 하는 것을 그렇게 부르지. 이 영가 장애를 해결하기 위해 절에선 구병시식(救病施食)을 행하지. 구병시식 때는 팥을 많이 사용하고 불상 점안 법회 가보면 거기서도 팥을 많이 사용해.“
“그래서요?”
“그 팥을 주워서 가져오는 짓은 절대 하지 마.”
“왜요? 영험이 들어있지 않나요?”
“그 팥은 모든 악령과 제액을 씻어 담은 것이라 그것을 집에 가져오면 그 악령을 집으로 데리고 오는 꼴이야.”
“주워가는 아줌마들 많이 봤는데.”
“삼계탕을 안에 대추를 넣는 이유는 모든 역한 것들은 대추가 흡수하기 위함인데 이걸 먹는 사람은 없잖아.”
“난 먹었는데....젠장.”
다시 주저앉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부적이나 한 장 쓰고 가지 뭐. 적선하는 셈 치고. 도깨비 골탕 먹이는 비방 하나 얻으려고 왔다고 이상한 이야기만 주워듣는다. 결론은 귀신은 팥을 더럽게 싫어하니깐 팥으로 귀신을 물리치면 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하긴 팥을 귀신이 얼마나 싫어하기에 제사상엔 팥시루떡을 올리지 않는 것을 보면 알 만도 하다. 조상신도 못 올까 봐서.
올해 동짓날 도깨비가 다시 찾아왔다. 그동안 내 행실을 보아하니 한 번 더 골탕을 먹여 볼 속셈이 눈에 보인다. 빨리 질문하고 가면 될 일인데 주변을 두리번 살핀다. 질문하다가 팥 싸대기라도 맞을까 싶어 극히 조심하는 투다. 어디 가서 한 대 처 맞은 경험이 있는지 아주 조심스럽다. 그리곤 조용히 묻는다. 네놈이 가장 싫어하는 게 뭐냐고. 나는 머리를 갸우뚱하다가 아주 질린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 한번 아파봤으면 좋겠다.”라고. 도깨비는 피식 웃으며 이번엔 네놈과 싸우기 싫으니, 소원대로 아프도록 해주겠단다. 이런 미친 귀신 봤나? 놀라서 턱 빠질 뻔 했다.
첫댓글 ㅎㅎㅎ귀신과의 대화가 재밌네요ㆍ
그런데 삼계탕속의 대추는 나도 막었는데 ㆍ이런~
역시 우리 국장님 최고입니다.
마지막 한 줄< “어디 한번 아파봤으면 좋겠다.”라고. 도깨비는 피식 웃으며 이번엔 네놈과 싸우기 싫으니, 소원대로 아프도록 해주겠단다. 이런 미친 귀신 봤나? 놀라서 턱 빠질 뻔 했다.> 아무리 기억력 없는 저라도 이 구절만은 오래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저러나 아프지는 마세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