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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그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그들은 정신이 오그라들었습니다!
언젠가 사고의 여파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뵌 적이 있습니다. 생각보다 의외로 큰 어려움을 겪고 계시더군요.
같이 식사를 하는데, 아무 불편 없이 젓가락질을 하는 저, 그래서 깻잎이든, 김이든, 콩자반이든 무엇이든 척척 집어먹는 저에 비해서 그분의 식사는 얼마나 힘겨웠는지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내적, 심리적 위축이 큰 것이더군요. 저는 상대방의 그런 상황도 모르고 반가워서 악수를 청했는데, 한참을 머뭇거리시며 굉장히 난처한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니 사람 만날 때마다 얼마나 망설여지고 또 난감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도 손이 오그라들어있습니다. 오그라든 손으로 인해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었던 갖은 고초가 손에 잡힐 듯이 선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 회당 안에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보다 더 문제가 심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 다시 말해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오그라들었던지 모릅니다.
밥 먹고 고작 하는 일이 예수님 뒤를 캐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사건건 챙겨가며 간섭하며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손을 뻗어라."고 외치신 대상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보다 마음이 오그라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향해서 “손을 뻗어라.”라고 외치십니다.
왜 그리도 내면이 꼬이고 꼬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뭐 그렇게 불만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다지도 이웃들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모르겠습니다.
때로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려고 기를 쓰는 모습이 율법학자나 바리사이 저리가라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던지신 예수님의 외침이 바로 "손을 펴라."인 것입니다.
“그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그들은 정신이 오그라들었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치유 받았지만, 그들의 오그라든 마음은 치유 받지 못했습니다.”(아타나시우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르코 3,1-6
아집의 우상에서 벗어나는 길: 행복의 변덕쟁이가 돼라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는지, 않는지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분을 고발하여 죽이는 것이 그들 목적입니다.
그러다 보니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은지, 죽이는 것이 옳은지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
안식일 법이 사랑의 실천을 위해 있음에도 그들의 잘못된 의도가 율법의 참 목적을 잃게 했습니다.
머리는 마음의 종입니다. 마음이 원하는 것을 머리는 성취하도록 도와줍니다.
마음이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하면 머리는 어떻게 물을 마실 것인지를 생각합니다.
물을 살 것인지, 수도에서 받아서 마실 것인지 등. 율법은 머리 차원입니다.
마음이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을 바란다면 아무리 좋은 율법도 무용지물입니다.
그래도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해야 하는 사실은 누구나 압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집에 사로잡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들 생각만이 옳지 다른 옵션은 없습니다. 아집은 우상입니다.
자아의 생각이 마치 신의 생각처럼 옳다고 믿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옵션도 있음을 알려주러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집의 우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제가 어렸을 때 동네 친구들과 놀다가 누군가의 잘못으로 넘어지게 되었고 머리를 땅에
부딪쳤습니다.
아파 죽겠는데 친구라는 녀석들은 웃고만 있었습니다.
너무 분하고 아파서 마구 울었습니다.
그랬더니 모두 놀라서 저를 집 마루에 누이고
빙 둘러서서 괜찮으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잘 됐다 싶어 더 크게 계속 울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니 머리가 더 이상 아프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는 것을 거기서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 일어섰다가는 엄살 부렸다고 창피를 당할 것 같았습니다.
함께 놀던 제 친형을 비롯한 친구들은 저를 달래는 것도 지쳤는지 울고 있는 저를 혼자 두고 다들 다시 놀러 나가버렸습니다.
아프지 않은데 억지로 우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습니다.
저는 울음을 그치고 앉아서 생각했습니다.
밖으로 나가 놀자니 창피하고 그렇다고 집에만 있자니 외로웠습니다.
아프지도 않은데 우는 아집은 왜 생겼을까요? 아프지 않으면 울음을 거쳐야 함을 압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보복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결국엔 세상과 단절되어 외로워지는 길뿐입니다. 아집에 사로잡힌 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집에 사로잡히면 행복을 잃음을 알아야 합니다. 행복을 위해 더는 그런 선택을 하지 말아야 아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이단에 빠졌지만 헤어 나오지 못하는 한 분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한 친구가 이단 종교에 빠져서 많은 재산을 날렸습니다.
나중에 그분이 모든 것을 잃고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 친구에게 아직도 거기서 말하는 것을 정말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가 대답했다고 합니다.
“처음엔 믿었고, 지금은 안 믿어. 근데 이젠 쪽팔려서 못 나가.”
자신이 가는 길이 나락을 향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 체면이나 자존심 때문에 방향을 바꾸지 않는 사람들이 사실은 적지 않게 있습니다.
아집의 우상에서 벗어나려면 행복을 향한 끊임없는 선택의 연습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려면 조금은 변덕스러워지는 것을 허락해야 합니다.
나의 판단이 항상 옳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조지 포먼은 길거리에서 가장 싸움을 잘하는 깡패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늦은 나이에 권투를 시작했고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교만에 무하마드 알리에게 패하고 맙니다.
그는 알리와 다시 싸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그를 망가지게 했습니다.
또 다른 패배 직후 죽음직전까지 가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는 새로운 체험이었습니다.
졌는데도 행복할 수 있음을 안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이겨야만 행복하다고 여겼습니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180도 바뀌었습니다.
목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고 10년 넘게 쉬었지만, 아이들을 위해 권투를 다시 시작합니다.
이제는 이기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행복에 집착합니다.
그러니 자신도 알리처럼 약게 경기를 운영할 줄 알게 됩니다.
결국 45세의 나이에 다시 세계 챔피언이 됩니다.
행복의 변덕쟁이가 됩시다.
한 곳만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이 아집입니다.
자아는 변덕쟁이가 되지 말고 한 우물만 파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두 개의 선택 중 하나를 선택하고 어떤 선택이 더 큰 행복으로 이끄는지 정보를 수집해야 합니다.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해야 덜 적게 실패합니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1-6: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고치시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다시 회당으로 가신다. 그런데 회당 한쪽에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고(1절), 사람들은 예수께서 고쳐주시면 고발하려고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2절).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부르시어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3절) 하신다. 그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거기 있던 사람들은 정신이 오그라들었다. 그들은 그분을 바라보지도 않았고, 기적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주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악을 행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4절). 생명을 위해서라면 예외적으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우물에 빠졌을 경우 밖으로 끌어내어도 괜찮았고(마태 12,11), 소나 나귀도 그러하였다. 이처럼 율법은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허용했고, 유대인은 안식일에도 음식을 장만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을 던지신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4절)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선의를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도와줄 가능성이 있을 때 사람을 비참한 상태에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확실히 나쁜 것이고,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돕는 것은 확실히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탄식하시면서 노기에 가득 차 그들을 둘러보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시면서 성하게 해주셨다.(5절). 그리하여 여러 차례 예수님의 처사를 비난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모의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다(6절).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것은 인간의 죽은 행동의 상징이다. 바리사이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손을 잡고 예수님을 처치할 모의를 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창조하는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그라든 손끼리 서로 잡았음을 볼 수 있다. 오그라든 손끼리 잡았으니 창조의 손을 없애는 결과를, 죽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떠한 손을 잡고 살아가는 신앙인인가? 내 손도 오그라들었는데 내가 잡은 다른 손은 나의 손을 펴줄 수 있고 창조하는 생명을 주는 손인가? 아니면 창조하는 손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낡은 이데올로기의 권좌에 있는 손인가? 우리도 많은 경우에 우리 자신의 아집에 사로잡혀 오그라든 손이 된 줄도 모르고 그 손으로 잘못하는 경우가 많다. 창조하고 생명을 주는 주님의 손을 잡아야 한다.
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마르 3, 5)
살아있는 모든 순간은 오그라들고 웅크린 마음을 펴듯
힘차게 다시 주님께 손을 뻗는 용기의 순간들입니다.
어떠한 삶이 용기있는 삶인지를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첫번째, 일어나 가운데로 나오는 것입니다.
둘째, 두려움 가운데서도 주님 말씀에 따라 우리가 주님께 손을 뻗는 것입니다.
이렇듯 말씀을 믿는 용기이며 말씀을 믿고 실행하는 용기입니다.
이와 같이 두려움을 깨뜨린 이들만이 맛보는 새로운 치유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수 많은 용기의 순간들이 바로 온전한 자유의 순간들입니다.
용기를 내어 주님께 손을 뻗는 특별한 새날입니다.
손을 뻗어야 주님과 함께 손을 마주 잡을 수 있습니다.
손을 뻗어야 우리자신을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 맡겨야 다시 온전해질 수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뻗어가는 감동 뻗어가는 감사입니다.
마음을 뻗어야 쏟아지는 주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그라든 삶이 다시 펴지는 기쁨 뒤에는 언제나 주님이 계십니다.
오그라든 우리들의 마음과 안식일의 마음을 사람을 살리는
합당한 마음으로 바꾸어 놓으시는 은총의 주님이십니다.
은총을 받고 용기를 내어 다시 뜨겁게 온전해지는 주님과 우리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건강한 관계처럼 다시 성하여지는 건강한 실행입니다.
손을 뻗어 사람을 살리시는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마음이 안식일의 참된 마음임을 믿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사람을 살리는 은총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5)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저의 취침 시간은 보통 저녁 9시입니다. 남들은 “아니, 어떻게 이 시간에 잘 수 있어요?”라고 말하지만, 일찍부터 이런 습관이 들어서 9시 이후에는 눈이 저절로 감깁니다. 하긴 어렸을 때에는 텔레비전 9시 뉴스 전에 이런 멘트가 흘러나왔던 것이 기억납니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납니다.”
등화관제도 있었고, 야간 통행금지 시간도 있었습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비하면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이 정말 많습니다. 밤낮으로 일하고 또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해가 지면 뇌가 쉴 수 있었지만, 현대는 끊임없이 뇌를 피곤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분명히 많은 부분에서 편해졌고 풍요로워졌어도 지금은 항상 피곤하고 힘이 듭니다.
이렇게 다양성과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안에서 주님 안에 머무는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그래야 세상 안에서 염려와 힘듦을 주님 안에서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힘을 믿고 그 안에 머무는 이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필리 4,6)
‘아무것도’라는 말에 머물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문장을 현재형으로 썼습니다. 지금 걱정에 갇혀 사는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걱정과 불안 속에 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특히 엄격한 율법의 틀 안에서 힘들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가볍게 해주십니다. 사람들은 안식일에 관한 규정에 묶여서 해야 할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안식일이 사람을 옭아매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고 인간을 살리기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이야기하십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안식일 규정을 스스로 어기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바리사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에 감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만 찾고 있으며, 실제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까지 합니다. 헤로데 당원은 유다인들의 반대편에 서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해방보다는 로마에 구속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보면 바리사이들과 반대편에 서 있었지만,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마음에 같은 편이 되고 맙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특히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이고 그분과 함께해야 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다시 성하여진 것처럼, 우리의 오그라든 마음도 주님을 통해 쫙 펴져서 주님께 찬미의 감사를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자신의 작은 자아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 삶이 전체와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 속에서 삶을 꾸려 가는 것이다(헬렌 니어링).
6)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마르3,2)
'배척 행위!'
오늘 복음(마르3,1-6)은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어제 복음에 이어서 안식일 논쟁이 이어집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습니다.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는지 지켜봅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마르3,3)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3,4)
그러나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고 있었던 바리사이들은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노하시면서,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십니다. 그리고 "손을 뻗어라."고 하시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배척합니다.
'배척 행위!'
예수님을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으로,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바라보지 않는 배척 행위는 지금 여기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향주삼덕(向主三德)인 신덕(믿음)과 망덕(희망)과 애덕(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 안에 들어가고, 마침내는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모두가 함께.
그런데도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을 배척했던 바리사이들의 그 배척 행위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와 다르다고, 나와 생각과 뜻이 다르고, 가진 것이 다르고, 생긴 것이 다르고, 지역이 다르다고 너를 배척하는 행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첫댓글 그때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마르 3,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