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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8. 묵상글 (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 오도자는 아닌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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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8.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오도자는 아닌지.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어제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셨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하늘나라의 문을 여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불행하다고 하시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버리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문을 잠가 자기들도 다른 이들도 못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겁니까?
베드로는 어떻게 하길래 하늘나라의 문을 열고
그들은 어떻게 하길래 하늘나라 문을 잠가버리는 겁니까?
그런데 어제도 봤듯이 하늘나라 문을 여닫는 것은 근본적으로 주님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하늘나라 문을 잠가버린다는 말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이렇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을 길이라고도 하시고
목자라고도 하시고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라고도 하시지요.
그런데 길이요 목자요 문이라고 하심이 다 하늘나라와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은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시고 하늘나라로 이끄시는 목자시며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문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성인들은 양들을 주님이라는 간선도로로 이끄는 지선이고,
그래서 양들을 하늘나라로 이끌고 하늘나라의 문을 통과하게 하는 데 비해
그들은 주님을 목자가 아니라 베엘제불이라고 함으로써 주님을 따라가지도
못하게 하고 주님을 하늘나라의 문이 아니라 지옥문이 되게 하는 거겠지요.
또 다른 관점 곧 사랑과 율법의 관점에서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늘나라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나라이고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가는 나라인데
율법 중에서 첫째가고 둘째가는 계명인 사랑보다 다른 계명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침으로써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하늘나라의 길을 오도하는 것입니다.
오도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잘못된 길이라는 말이 아닙니까?
길을 가본 사람은 잘 알 것입니다.
갈림길에서 이쪽으로 가야 하는데 다른 길로 인도하면 오도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길,
사랑의 길이 아닌
율법의 길,
미움의 길을 가게 하면 그것이 오도 중에서도 최고의 오도이며,
자신도 불행해지고 다른 사람도 불행해지게 만드는 길이겠지요.
아무튼, 오늘 우리는,
아니 저는, 내가 오도자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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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8.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마태 23,17)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후기에 이르러, 일곱 가지의 “불행선언”(마태 23,13-36)을 들려줍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세 번째까지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마태 23,17-18)
우리는 살아가면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우선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깜박 놓쳐버리곤 합니다. 물론 더러는 방법상에서 최선이 아닌 차선을 택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또는 한 발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 발을 뒤로 물러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체 무엇이 체(몸)이고, 무엇이 용(활용)인지는 알아야 합니다. 자칫 그렇지 못하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위선자요 눈 먼 인도자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구하라.”(마태 6,33)
그것은 누가 옳으냐? 누가 잘하느냐? 하고, 서로를 따지고 계산하고 심판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나,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는가? 받아들이고 있는가? 라는 인격적인 관계에로의 회귀입니다. 그것은 일이나 능력 중심에서 벗어나, 사람 중심이나 사랑 중심으로의 회귀입니다. 그것은 본질로의 삶, 곧 “실상 필요한 한 가지”를 향하여 달려가는 삶입니다. 그것은 대체,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묻게 합니다. 곧 금인가?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인가? 예물인가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인가?” 하느님이 계신 곳인가? 아니면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인가? 일을 잘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일을 사랑으로 하는 것인가? 나의 뜻을 완수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것인가? 나 자신인가? 아니면 나의 주인이신 하느님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먼저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원하는 바를 행하십시오.
충고하더라도 사랑으로 충고하고, 침묵하더라도 사랑으로 침묵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삶이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시고, 진정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아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하고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처럼, “십자가에 처형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기로 작정하였습니다.”(1코린 2,2)라고 할 수 있는 본질을 위한 투신의 삶을 위해서는 주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먼저, 앞세워야 할 일을 선택할 수 있는 맑고 명료한 분별과 그를 따를 수 있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온전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진리가 제 자신을 이끌게 하되, 마치 저 자신을 진리인 양 앞세우지 말게 하소서!
참으로 우리의 삶이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시고,
진정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사랑을 아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마태 23,17)
주님!
저는 참으로 어리석고, 눈 먼 자입니다.
함께 계시는 당신을 망각하고 무시하고 있으니, 진정 눈 먼 자입니다.
저의 무지를 받아들이기보다 저의 주장을 앞세우니, 진정 어리석은 자 입니다.
하오니, 주님!
진리가 제 자신을 이끌게 하되, 마치 저 자신을 진리인 양 앞세우지 말게 하소서!
참으로 나의 삶이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시고,
진정 나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사랑을 아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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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8.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눈먼 인도자
한때‘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띠를 두르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확성기를 틀어놓고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을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을 갑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열성을 가지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올바로 믿어서 꼭 구원을 얻기를 희망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있고 나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은 사람들에게서 배운 계명일 뿐이니 나는 이 백성에게 놀라운 일을, 놀랍고 기이한 일을 계속 보이리라”(이사29,13-14). 우리가 이런 책망을 듣지 않기를 바랍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마태23,16)라고 하시는 예수님 말씀은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달으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좋겠습니다. 덜 중요한 것을 더 중요한 것보다 더 중시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내신 주님 안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해야 하고, 그저‘예’할 것은‘예’하고, ‘아니오’할 것은‘아니오’라고 (마태5,33-37)해야 합니다.
주님께 대한 열정을 긍정적으로 보면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나쁘기로 말하면 좋은 것보다 훨씬 더 나쁘기도 합니다. 열심이 지나쳐서 고약한 광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하느님을 등에 업고 자기를 내세우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짐만 지우게 됩니다. 그릇된 신심에 빠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걱정입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빗대“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마태23,4). ‘그들의 말은 귀담아 듣고 다 실행하고 지키되 행실은 따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내세워야 하지만 죄와 벌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지옥의 공포로 몰아가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위선자로 지목되어 야단을 맞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람에게 희망을 주어야지 절망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기본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것은 좋으나 진심 어린 삶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우리 역시 그 화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5,20).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기에 앞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눈떠야 하겠습니다. 온갖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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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8.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독서는 테살로니카 전서의 시작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테살로니카 서간은 신약의 27권 중에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이라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선교여행을 하였고,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공동체에 문제가 생기면 직접 갈 수 없는 상황에서는 먼저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최초의 편지가 테살로니카 전서입니다. 저는 지난번 그리스와 터키를 순례하면서 테살로니카를 방문하였습니다. 바닷가에 위치한 큰 도시였습니다. 2000년 전 테살로니카 공동체는 3가지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첫 번째는 이방인들의 박해입니다. 테살로니카 교우들이 혈연관계, 사회적 관계를 끊어 버리고 자기들만의 배타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살아가자 주위 이방인들은 미풍양속을 해치는 행위로 보아 박해하였습니다. 이에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를 모내어 박해 중에 동요하지 말고 신앙 안에서 굳건히 살 수 있도록 격려하였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신문사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구독자의 수는 줄고, 인쇄비용은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번은 ‘전자신문’을 발행할 수 있도록 준비하려 합니다.
두 번째는 ‘재림 지연’ 문제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주님께서 심판관으로서 재림 할 것임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재림을 보기도 전에 주변의 동료 교우들이 죽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떠오른 질문은 ‘죽어버린 형제들은 어떻게 되는가?’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죽어 버린 형제들이 언제가 주님이 다시 오신다 해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보고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또 살아 있는 자기들도 ‘주님의 재림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면, 지금의 이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쯤일까?’라는 질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죽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재림 시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합니다. 재림 시기는 결정되지 않았기에 깨어 기다려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이 언제 올지 모르니 너희는 깨어 기다려라.” 많은 이단들이 주님의 재림을 특정하였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특정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세 번째는 ‘방탕한 생활’ 문제입니다. 종말이 꼭 올 것이라고 믿었던 종말론 열광론자들은 현실의 책임과 윤리를 중요치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임박한 재림 안에서 테살로니카 교우들 중 일부는 일상적 삶에 성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상 종말이 곧 올 것이기에 일하지 않고 수고하지 않으면서 남의 도움에 의존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우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손으로 일해 충당하며, 조용히 살고, 자기 자신의 일에나 신경 쓰도록 권고 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뜻은 음탕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사는 것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군대 있을 때입니다. 제대 말년에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을 마침표로 만들면 안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예전에 어른들은 ‘유종의 미’를 거두라고 하였습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지 말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도 교구의 인사이동이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신문을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교만을 나무라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2000년이 지난 오늘의 사목자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사제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사제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오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하였던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이 땅의 사제들과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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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8.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주님께서는 무엇이 더 중요한지에 대해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이곳에는 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수녀님에 관한 이야기들이 떠오릅니다.
데레사 수녀님의 삶의 이야기 중 한 부분입니다.
하루는 이슬람 종교를 기반으로 하는 마을에서 수녀님께 부탁을 해왔습니다. 그 부탁은 이러했습니다.
우리 마을에도 가난하고 불쌍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수녀님께서 오셔서 우리 마을의 가련한 사람들을 돌보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수녀님께서 바로 승낙하시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시는 수녀님께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녀님께서는 그 마을 촌장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체가 없는 곳에는 갈 수 없습니다. 저의 봉사는 하늘나라를 위한 것이고 저의 봉사의 힘은 성체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와 함께 들어갈 수 있도록, 그리고 미사를 봉헌 할 수 있도록 해준다면 저는 기꺼이 당신들의 마을로 가겠습니다.
다시 한번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중요합니까? 무엇이 신앙생활의 첫 번째입니까? 주님과의 일치가 첫째입니까? 아니면 봉사입니까?
잠시 묵상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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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도 그랬지만
요즘도 라디오에서는 경품을 청취자들에게 선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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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들에게 가장 많이 선물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겨울에는 겨울이라서
따뜻하라고
여름은 여름이라서
시원하라고
생일이면 생일이라서
축하한다고
작은 선물이지만 큰 기쁨과 행복을 주는 말이 되어버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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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8.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고통 속에서 힘들어하는 분이 많습니다. 병으로, 경제적으로, 가정 문제로, 직장의 일로, 사람과의 관계 등등의 이유로…. 힘든 이유는 우리 주변에 참 많습니다. 이 이유를 하나하나 살피다 보면 한두 가지로 힘든 것은 오히려 다행이 아니겠냐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변을 보면 아무 문제도 없이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많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고통과 시련이 다가오면 갖게 되는 감정이 억울함이라고 합니다.
“왜 내게만 이런 일이 닥칠까요?”라는 말을 하면서 눈물짓습니다. 이 억울함과 함께 다가오는 감정이 바로 후회입니다. “내가 이러려고 열심히 살았나?”, “저 사람을 내가 왜 만났을까?”, “돈이 뭐길래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나?” 등의 후회를 반복하게 됩니다.
자기 삶의 불행을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자기 상황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기 삶을 온전히 자기 것을 바라보면서 문제를 뒤섞지 말아야 합니다. “너 때문이야.”라면서 괜한 분노만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 온전히 바라봐야 문제의 해결점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남들은 행복해 보인다는데 정말로 그 ‘남’이 행복한 것일까요? 행복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방에서 뒹굴며 사는 사람이 행복해 보입니까? 그 방에서는 특별히 하는 것도 없으니 걱정도 없고 어려움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사람을 그 누구도 행복해 보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열심한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 문제 없음보다 더 주님께 간절하게 원해야 할 것은 열심할 수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불행 선언을 하십니다. 위선자들이고, 눈먼 인도자이며, 어리석고 눈먼 자라면서 혹독하다 싶을 정도로 말씀하십니다. 사실 그들은 열심히 살았습니다. 율법의 세부 조항도 열심히 지켰고, 단식과 자선과 기도도 전혀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그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 ‘열심’으로 인해 사람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심’은 단순히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열심’, 예수님께서 하시는 구원의 길에 동참하면서 그 길에 많은 이가 함께할 수 있도록 하는 ‘열심’이었습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없을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의 일에 열심하지 않는 그 모든 것이 위선자이고, 어리석고 눈먼 자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나의 ‘열심’을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그런 ‘열심’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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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람된 일은 그것 자체가 기쁨이며, 사람이 거기에서 얻는 이익에 대한 기쁨이 아니다(알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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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8.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배움의 여정
-"우리는 주님의 평생 학인이다"-
공부해야 합니다. 배워야합니다. 참으로 참삶을 추구하는 자라면 공부는, 배움은 필수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 배움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궁극의 희망은 하느님께 두고 결코 절망하지 말고 힘차게 하루하루 주님의 평생 학인이 되어 공부해야 삽니다. 배워야 삽니다. 너나할 것 없이 삶의 배움터에서 초보자의 정신으로, 경청과 겸손, 용기와 실행의 정신으로 배움의 여정에 충실해야 합니다.
죽어야 졸업인, 살아 있는 한 한결같이, 끊임없이 주님의 학인이 되어 배우는 것입니다. 요즘은 시국에, 나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동요부르기 보다는 침묵중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흐르는 강이되어 시냇물 소리 들으며 시냇가를 걷습니다.
“꼭 하늘 비 내려야
흐르는 맑은 물인가?
하늘 비 없어도
늘 깨어 끊임없이, 한결같이
찬미 노래 부르며
맑게 흐르는 시냇물이고 싶다
찬미는 저렇게 하는 거다."
참으로 좌절이나 실망이나 절망함이 없이 한결같이, 끊임없이 주님의 학인으로 배움의 여정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믿는 이들 누구나의 진정한 소망일 것입니다. 참으로 배우는 겸손의 자세로 마음을 열면 배울 것은 무궁무진합니다. 매일 강론 쓰는 이 거룩하고 은혜로운 밤시간은 저에게는 참 좋은 배움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어제 주일 바티칸에서 삼종기도후 복음을 바탕한 교황님의 강론도 참 좋았습니다.
“우리는 삶의 행로에서 혼자가 아니다. 살아서 우리와 동행하는 그리스도는 현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우리 곁에 예수님이 계시니 불가능한 것은 없다.”
위 요지와 같은 강론 내용이었습니다. 이어 8.31-9.4일 까지 몽골 사목 방문에 즈음하여 “나는 모두에게 한 형제로서 몽골을 방문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는 소감을 피력했습니다. “더불어 희망하기(Hoping Together)”란 여정의 모토도 멋졌습니다. 오늘 복음과 제1독서의 교회공동체로 부터도 많은 것을 배웁니다. 제1독서 테살로니카 교회는 예수님 사후 20년후 바오로의 열심한 선교로 시작한 50년대 교회의 순수한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이보다 훨씬 뒤인 80년대에 세워진 유대개종자들을 주로 대상으로 한 마태복음의 마태교회는 많은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눈먼 자들아!”
저주라기 보다는 예수님 삶과 너무나 동떨어진 위선적 행태에 대한 탄식입니다. "행복하여라", 그 좋은 행복선언이 아니라 불행선언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참으로 무지에 눈먼, 어리석은 자들에 대한 당대는 물론 작금의 교회지도자들, 신자들의 회개와 각성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사랑과 분별력의 지혜를 상실한, 주객전도, 본말전도의 어리석은 지도자들은 물론 신자들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에 앞서 테살로니카 초대 교회의 모습은 참 순수하고 아름답고 이상적입니다. 바오로 사도와 그 일행의 증언이 이를 입증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모두 기억하며 늘 하느님께 감사들 드립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의 인내를 기억합니다.”
신망애와 인내의 참 복음적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마지막 대목도 우리에겐 귀한 가르침이 됩니다. 바로 우리는 바오로와 그 일행으로부터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 계신 참하느님을 섬기는 신도들의 환대와 또 이들이 부활하시어 곧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순수한 갈망에 감동된 모습을 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순수한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의 테살로니카 교회 공동체인지요! 마태복음의 교회 공동체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아마도 위선자들 같은 지도자도 꽤 많았던 마태복음의 교회같습니다.
오늘은 어제 성녀 모니카에 이어 그 아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참 배울것이 무궁무진합니다. 참 길다싶지만 배우는 마음으로 나눕니다. 성인은 암브로시오, 예로니모, 대 그레고리오 1세 교황과 더불어 서방의 4대 교부에 속합니다. 약1600년전 분으로 향년 75세로 선종하셨지만 성인의 가르침은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현재 진행형입니다.
“은총의 박사(Doctor Gratiae)”로 일컫는 교회학자이며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창설자인 성인은 플라톤, 칸트와 더불어 근원에서 사유하는 철학자로 진리의 연인이라 불립니다. 현재까지 성인의 영향을 받지 않는 철학자나 신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성인의 생애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불타는 사랑”이었습니다. 쾌락이든, 여성이든, 학문이든 진리든 그야말로 불꽃처럼 사랑한 성인으로 그의 생애는 “진리를 향한 구원(久遠)의 불꽃”이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자신도 성인을 자신의 첫 스승으로 인정했습니다. 토마스 성인이 집필한 내용은 위대하고 온전한 교과서나 어딘가 비인격적입니다. 그러나 성인은 자기 자신과 싸웠으며, 회심한 후에도 싸웠습니다. 이래서 성인의 작품은 극적이고 아름답고 살아있습니다. 성인의 획기적 전환점은 성 암브로시오 주교와의 만남이요 이어진 회심입니다. “집어서 읽어라(Tolle,lege)!”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펴 읽은 로마서 23장13-14절 말씀에 회심한 성인은 나이 32세,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세례를 받습니다.
그 이후 시편 7장을 읊으며 선종까지 참 가열찬 분투의 노력을 다한 삶이었고 성인의 업적은 불가사의입니다. 진리에 대한 열애의 성인이었습니다. 성인에게 진리는 학습하는 무엇이 아니라 날마다 먹는 음식이었으며 온 삶 전부를 바쳐 진리를 사랑했습니다. 진리의 관상가가 아니라 진리의 연인이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임이라 부르고 “임위해 우리를 내시었기에 임안에 쉬기까지는 안식이 없다.”고백하면서 고백록을 시작합니다.
“오, 영원한 진리여, 참스런 사랑이여, 사랑스런 영원이여! 그대 내 하느님이시니 그대로 향해 밤낮으로 한숨짓노라.”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그 진리를 만나자 “이제 당신만을 사랑하니, 저는 당신만을 섬길 각오가 되어 있나이다.” 고백했고 수도자로서 성직자로서 헌신의 여정을 살았습니다. 성인의 철학적 유언에 해당되는 고백도 감동자체입니다.
“오, 진리여, 늦게야 임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옥에 티도 있듯이 프랑스 신학계의 거두, 하느님의 종 한스 우리스 폰 발타사르의 성인에 대한 객관적인 비평입니다.
“위대하고 거룩한 아우구스티노의 결함이라면 구원역사의 형평성을 깨트렸다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에서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아담에 집중함으로 은총신학이 원죄신학에 짓눌려 버린 것이다. 성인의 심판개념이란 오롯이 원죄로 정향되어 있어서 장차 오실 구원자의 존재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성부께서 모든 심판 권한을 넘겨주신 바로 그 구원자 말이다.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아우구스티노가 지옥에 대해서 단언한 그 모든 지식이 어디에서 왔을까? 신국론은 상선벌악의 원칙에 따라 구원받을 이의 수보다 멸망할 이의 수가 훨씬 많다고 한말은 무책임한 하나의 신학적 타락이다.”
이런 부정적이 면도 참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의 위대함은 영원합니다. 서양철학을 플라톤의 각주라 한다면 가톨릭 신학은 아우구스티노의 각주라 하기도 합니다. 성인의 주옥같은 어록중 일부를 나눕니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
바로 이에 근거히여 제가 늘 강조해온 '좋은 선택-훈련-습관'이란 영적도식의 진리입니다.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다.”
“부정의한 법은 법이 아니다.”
“타인의 많은 것을 용서하라.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용서하지 마라.”
“참다운 행복이란, 당신으로부터 오는, 당신을 향한, 그리고 당신을 위한 기쁨이다.”
“희망에게는 아름다운 두 딸이 있다. 그들의 이름은 분노와 용기다. 현실이 지금 모습대로인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현실을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바꾸려는 용기.”
“정의가 없다면, 권력이란 강도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삶을 좋게 하라. 그러면 좋은 시대가 온다. 우리가 우리의 시대를 만든다. 우리의 형편이 달라지는데 따라 시대도 달라진다.”
여기서 연상되는 제가 참 좋아하는 영어 말마디입니다.
“As you are, so is the world(네 정도만큼 세상의 정도도 그러하다).”
삶은 배움의 여정입니다. 겸손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듣고 배워야 할 삶의 스승들을 만납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끊임없이 한결같이 듣고 배워 용기있게 실행하는데 지칠줄 모르는 열정의 은혜를 청합시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의 평생 학인으로 배움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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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8.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과 그대 사이의 나>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마태 23,13)
나
그대에게
하느님을 향한
불신이 아니라
믿음이기를
나
그대에게
하느님을 향한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기를
나
그대에게
하느님을 향한
미움이 아니라
사랑이기를
나
그대에게
하느님을 향한
거짓이 아니라
진리이기를
나
그대에게
하느님을 향한
어둠이 아니라
빛이기를
나
그대에게
하느님을 향한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기를
나
그대에게
하느님을 향한
울이 아니라
길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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