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61]‘추억박물관’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우리집 금송아지> 임실군 오수면편에서 시청한 ‘추억박물관’과 콜렉터가 궁금했다. 대체 어떤 인간이 ‘근대사자료 수집’이라는 이름으로 10만여점을 모았는지? 모아놓은 것들은 대체 무엇인지? 창고같은 집으로 들어서자 ‘악-’소리가 절로 날 정도로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온갖 잡동사니들로 그야말로 ‘뻬곡히’ ‘빈틈없이’ 문건들이 가득차 있었다. 아니, 차고 넘쳤다. 그런데, 이 많은 물건과 문건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의 추억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보고 있어도 궁금한 것투성이었다.
‘고물古物을 보물寶物로’ 만드는 재주를 가진 콜렉터라는 관장 역시 명물이었다. 90대 후반부터 취미인 부업副業을 넘어 직업職業이 되었다한다. 세상에 누구 눈치를 보고 살 필요가 있는가? 정년이 있는가? 얽매이지 않아 좋았고, ‘운수 좋은 날’은 하루에 1년 연봉만큼 벌 수도 있다는 것이 매력만점이었다. ‘추억박물관’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는가? 국민학교 시절 노란 벤또(도시락), 교과서, 우표, 네곽 성냥갑, 교련복, 교표, 앨범, 즐겨먹던 과자, 영화포스터, 50-60년대 시집 등 베스트셀러, 대충 뭐 이런 것들일 것이다. 추억거리야 무궁무진하겠지만, 대충 이런 것들이 모두 모여져 있다고 보면 된다. '처녀공알'과 없는 것 빼놓고 다 있다고 보면 된다. 수집하는데 얼마나 애를 먹었을까? 고물상이 주요 출입처라고 한다. 쓰레기더미를 뒤져 ‘보물이 될 만한 고물’을 찾으면 함빡웃음과 직업상 희열을 느낀다한다. 참 취미趣味도 별나다. 그 취미가 특기特技가 되더니, 내처 정년도 없는 생업生業인 전업專業이 됐다.
<TV진품명품>의 근현대사자료 감정을 하는 김영준 위원같은 사람이다. 이런 ‘별난 인간’들이 대한민국에 제법 있다한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버린 수많은 추억의 자료들을 어디에서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예를 들면 학창시절 앨범만 해도 그렇다. 이사를 하면서 잃어버리거나 버렸던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문득, 그때 그 친구와 나의 모습을 보고 싶을 때 앨범이 생각나지 않겠는가. 전국 지역별로 수집한 앨범이 2만권이 있다. ‘앨범박물관’을 들어서면 ‘그것 참’ 헛웃음부터 나온다. 의미없는 일이라고 말하지 마라. 용케 찾아낸 앨범 속 자신의 사진을 보며 킥킥거리는 중년의 여성들을 보면 행복하다는 박재호 관장. 당시의 교복도 무료로 빌려준단다.
살다보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지만, 왜 그런 추억 속에 ‘퐁당’ 빠져보고 싶을 때가 있지 않던가. 이심전심, 우리 고교동창들이 그랬다. 2012년 6월 6일, 서울에서 KTX를 타고 경주역에 내린 80여명의 선남선녀가 있었다. 이름하여 <전라고-전라여고 경주탐방> 수학여행. 전라여고는 가상假像의 여고, 남편이 전라고롤 졸업했으니 옆지기는 당연히 전라여고 졸업생인 것을. 모두 그때 그 시절, 교복으로 갈아입고, 국방색과 자주색 가방을 메고 들었다. 교표 달린 모자는 삐딱하게 썼다. 불국사와 첨성대를 종일 거닐며 왕릉 공원에서 벤또를 까먹었다. 소주를 몰래 가방에 넣어온 친구는 규율부장에 걸려 호된 벌을 받았다. 연출된 그때의 사진을 보니 지금도 웃음이 절로 난다.
추억박물관에서 발견한 모교의 배지badge가 신기했다. 우리때 이런 배지가 있었나? 희귀한 책자를 보여준다. 4.19혁명을 촉발한 마산상고 출신의 김주열 열사를 기억하시리라. 남원 금지중 3학년때 졸업을 하면서 친구 60여명이 덕담을 나눈 것을 누군가 용케 묶어놓은 책자에, 김주열 열사의 친필이 남아있었다. ‘은행사장’이 되고 싶다던 그는, 다음해 바다에 수장돼 숨진 채 발견됐다. 그가 친구에게 쓴 짧은 글, 이런 기록이 어찌 하찮은 것인가? 누가 그의 꿈을 빼앗고 짓밟았는가?
90년대 30대 후반 서울에서 직장인이었던 그가 콜렉터의 길로 접어든 것은 진실로 ‘우연한 만남’ 때문이었다. 신촌 주변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는데, 옆에서 혼자 술을 마시던 중년의 신사가 ‘좋은 일이 있다’며 술값을 대신 내주더니 ‘보여줄 것이 있으니 내일 만나자’고 했다. 집으로 데리고 가더니 보여준 것이 5000원 신권 한 장. 2500만원에 구입, 횡재했다는데, 이 신권은 한국은행이 처음 찍어내면서 세계 각 나라 중앙은행에 한 장씩 선물하는 관행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라는 얘기를 듣고 솔깃한 것이 ‘화폐 수집가’로 변신하게 된 것. 그 지폐가 현재 최소 1.5억은 될 거라는데, 솔직히 믿어지지 않는 ‘그런 세계’가 있는 모양이다. 그후 2006년엔가 어렵게 모았던 모든 화폐를 한순간 도둑을 당해 멘붕에 빠져 삼사년 헤매다 정신을 차리고 근현대사 자료 수집에 나서 오늘에 이르른 것.
고가古家를 철거한다는 소식만 들리면 한걸음에 달려가는 그는 쓰레기더미 뒤지는 데 달인이 되었다. 심지어 땅속에 묻힌 50년대 과자봉지를 발견해도 횡재했다며 좋아한다. 250만원어치를 사 며칠 후 5000만원에 파는 일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어찌 다른 것에 정신을 쏟겠는가. 오수면에는 낮 12시(정오)만 되면 높이 10m가 넘는 망루望樓에서 ‘오포’(사이렌)을 부는 60년대 농촌풍경이 있었다. ‘오-오-오-오-’ 제법 길게 울리던 오포소리는 4km가 떨어진 내 고향 들판에서도 학실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때 사용하던 그 ‘오포’라는 확성기<사진>를 보고 실제로 돌려보니, 확실하게 그때 그 오포소리가 나는 게 아니겠는가. 신기할 손. ‘추억追憶의 박물관’이 확실했다.
소문이 잘 나기만 하면, <추억박물관>은 ‘오수의 의견비’와 함께, 내 고향 오수獒樹의 '핫 플레이스hot place'가 될 것이 분명하다. 흑역사黑歷史, 즐거운 추억보다 괴롭고 힘든 추억이 많으신가? 그것 역시 추억인 것을 어찌 하리. 어릴 적 보고 접했던 수많은 물건이나 문건이나 자료들을 보면서 그때의 상처를 어루만지기도 하고, 씻김굿 뒤풀이처럼 마음의 응어리가 씻겨져 내리는 경험도 맛보게 되리라. 우리가 비행기를 타거나 국내의 명소를 돌아다니는 것도 ‘즐거운 추억’을 많이 쌓으려 함일 터. ‘추억의 (인생)사진’ 한 장이 어쩌면 우리 삶의 힘든 한 고비를 이겨낼 수 있는 힘도 되리라. 흐흐.
후기: '오수 추억박물관' 같은 성격의 박물관으로는 전남 강진의 <와보랑깨 박물관>과 담양의 <추억의 영화거리 박물관>(유료 7500원)이 있다고 한다. 오수 추억박물관이 궁금하시면, 오는 8월 12알(토) 오후 10시 30분 <우리집 금송아지>를 전국 재방영한다는군요. 참조하시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