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트레킹 마스터
북악산 백사실계곡에서
역사에 대해 설명하는 곽동운 작가
필자는 역사트레킹 마스터라는
거창한 직함을 가지고 있다.
즉 필자가 행하는 트레킹은
‘역사’라는 접두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역사트레킹이라는 말을
처음 듣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트레킹은
그리 낯설지 않은 아웃도어 활동이다.
유적탐방과 도보여행이 결합된 것이
바로 역사트레킹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10km 내외의 거리를 걷는 것이
바로 역사트레킹인 것이다.
주위 풍광이 수려한
트레일(trail, 오솔길)을 직접 걸으며
유적을 찾아가는 길은
수학여행의 버스 ‘뺑뺑이’와는
느낌부터가 다르다.
역사트레킹은 속도전을 치르듯
답사지를 찾아가는 기존의 답사여행과
이 부분에서 확연히 차이를 드러낸다.
느긋하게 트레킹을 하며
역사탐방을 할 수 있기에
자연스럽게 건강도 챙기고
역사지식도 쌓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꿩 먹고 알 먹고’가 되는 셈이다.
이때 리딩자는
마스터(master)가 되어야 한다.
길에서는 대장 역할을 하고,
문화재 앞에서는
문화해설사 역할을 해야 한다.
이 부분이 통상적인 트레킹,
즉 오리지널 트레킹과
역사트레킹의 차이점이다.
해설을 하지 않는다면
참가자들은 해당 유적을
그냥 눈으로만 스쳐 보낼 것이다.
마스터는 해당 유물에 대한
의미를 설명함으로써
참가자들에게 답사여행의
묘미를 심어주는 것이다.
이렇듯 역사트레킹은
교육적인 면이 강하다.
그래서 마스터는
공부도 많이 해야 한다.
또한 배낭도 무겁다.
옛날지도 같은 교보재들을
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왕산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
필자는 꼭 고산자 김정호 선생이 작성한
‘수선전도’라는 옛 지도를
교보재로 사용한다.
수선전도는
19세기 한양의 모습을 담은 지도이다.
그렇게 인왕산에 올라
조선 후기 한양의 모습을 담은
옛 지도를 펼쳐놓고
현재의 서울을 살펴본다.
나름대로의 재미인 것이다.
물론 한자투성이라 머리가 좀 아프지만.
두 바퀴에서 내려 두 발로
트레킹을 하기 전에
필자는 자전거로 전국일주를 다녔었다.
고물자전거에 잔뜩 짐을 싣고
땀나도록 페달을 굴렸었다.
그렇게 페달을 굴리다보니
국토종단 4회,
국토횡단 2회를 행하게 됐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의 기록들이다.
본격적으로 트레킹에 나섰을 때가
2010년이었으니
자전거여행과 그 시기가 좀 겹쳐진다.
자전거여행을 했을 때
내 자신에게 주문을 걸 듯
약속한 것이 있었다.
‘행복속도 11km’를 지키자는 것이다.
너무 빨리 페달을 밟으면
자동차 여행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느림보 주행을 해서 그런지,
다른 라이더들은
서울에서 제주까지
넉넉히 열흘 정도를 잡고 가는데
필자는 무려 40일 정도를 소요했다.
하지만 그만큼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느꼈었다.
두 바퀴에서 내려
두 발로 걷기 시작했을 때도
‘행복속도’는 지켰다.
11km에서 2.5km로
속력 변화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이어져온 행복속도 때문일까?
역사트레킹은 느림보 트레킹이라고
놀림을 받고 있다.
하지만 느림보면 어떤가.
재밌으면 그만이지!
필자는 오늘도 재미와 유익함을 얻으려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선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연재에서
필자의 발걸음들을
글로써 담아낼 생각이다.
한걸음한걸음 힘차게 발을 내딛듯
힘차게 글을 써내려 갈 생각이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1편
선바위에서 ‘로또대박’을 기원하다
인왕산역사트레킹
“서울은 어떤 도시일까?
내가 살고 있는 이 서울에 대해서
난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필자가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을
시작했을 때
품었던 근원적인 물음이었다.
‘서울천도 600년’,
‘한성백제 2000년’ 등과 같은
역사교과서적인 수식어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삶의 공간으로서의
서울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필자는 지금도
‘서울공화국’,
‘수도권과밀화’ 같은
서울에 붙여진 비판적인 꼬리표에
‘좋아요’ 버튼을 누르고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다 빨아들이고 있는
이 블랙홀 도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거둘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 비판적인 시각과
근원적인 물음이
꼭 상충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서울이 블랙홀이 되기까지의
과정들에 대한 탐구를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서울의 확대발전에 대한
개념을 짚고 넘어가게 된다.
한편 서울이 최상위 포식자가 되어
모든 것을 다 집어삼키기 시작한 것은
불과 한 두 세기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공룡 도시 서울에 대한
냉정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
맞는 만큼
역사 도시 서울을 탐구하는 진지한 자세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다.
왜? 이곳은 우리가 발을 딛고
구체적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공간이니까.
자신이 속해 있는 이 도시가
잘 났는지 혹은 못 났는지
그것을 알아보자는 것이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의
취지인 것이다.서울의 우백호 인왕산한양도성의 겨울 - 인왕산이제부터 필자는 서울 곳곳을 독자들과 함께 탐방할 것이다.
로드프레스 지면을 통해서
함께 거닐 것이다.
이번에 함께 트레킹을 할 곳은
서울의 우백호 인왕산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서울에도 좌청룡, 우백호가 있다.
조선의 도읍지였던 한양이
풍수지리에 의거해
기획된 도시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좌청룡, 우백호가 있고,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현무가
자리 잡고 있다.
인왕산이 우백호라면
좌청룡은 어디일까?
낙산이다.
혜화동 뒤편에 나지막하게 서 있는
낙산이 바로 서울의 좌청룡인 것이다.
인왕산과 낙산,
거기에 남산과 북악산을 더해
내사산(內四山)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안쪽의 4개의 산이라는 뜻이다.
이 내사산을 기반으로
18.6km의 성벽을 쌓았으니
그것이 바로 한양도성이다.
외사산(外四山)도 있다.
남쪽에서 주작 역할을 하는 관악산,
북쪽에서 현무 역할을 하고 있는 북한산,
여기에 동쪽의 아차산과
서쪽의 덕양산(행주산성) 등
4개의 산을 일컬어
외사산이라고 칭한다.
이를 두고 필자는
역사트레킹 참가자들에게
이렇게 설명을 하곤 했다.
“내사산이니 외사산이니 하는 말들이
감이 잘 안 오시죠.
이렇게 생각하세요.
내사산은 작은 서울,
외사산은 큰 서울.
지도 놓고 보시면 더 감이 잘 올 거예요.”
1편이라 그런지
서설이 길어진다.
다시 인왕산이야기다.
민낯을 드러낸 것처럼
거대한 암반이 노출된 인왕산은
그 자체가 절경이다.
그래서 옛 선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인왕산에 대한 애정 공세는
오늘날에도 그 열기가 식지 않고 있다.
성곽길을 탐방하는
도보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왕산을 향하는 발걸음이
모두 성곽길로 향하는 것은 아니다.
성곽길 트레킹이 아닌
기도를 드리기 위해
인왕산에 오르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속인일 수도 있고,
그냥 평범한 일반 시민일 수도 있다.
필자와 같이 트레킹을 즐겨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럼 그들은 어디를 가서
기원을 드릴까.
대충 아무 곳이나 가서
돗자리 펴고 절을 올리는 것일까.승복을 입은 선바위?인왕산의 선바위그들이 기원을 드리는 곳은 인왕산 서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선바위라는 곳이다.
선바위는 높이 7미터,
가로 10미터 정도가 되는 바위로
산 중턱에 불쑥 솟아 있다.
그렇게 바위의 규모가 크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그 존재를 알아볼 수 있다.
선바위를 한자로 쓰면
'선암(禪岩)'으로
'스님바위'라는 뜻이 된다.
승복을 입은 선승이
참선을 하는 모습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선바위를 자세히 보면
단일 암석이 아닌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붙어 있는데
이것을 두고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영혼이
나란히 깃들어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렇게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서 있다 보니
선바위는 예로부터
아이를 갖기 원하는 이들의
좋은 기도처였다고 한다.
쌍둥이 바위는 다산을 뜻하니까.
거대한 암석에서
치성을 드리는 것을 두고
거석숭배문화라고 한다.
이 거석숭배문화는
우리 민간신앙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선바위는 이런 거석숭배문화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된다.
바로 산악신앙이다.
우리 옛 선인들은
산을 경이로운 존재이자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였다.
물이 샘솟고,
과실과 약초들이 산재해 있으며,
연료인 나무들을 채취할 수 있으니
산은 인간에게
생명의 원천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산을 마냥 좋은 것만 주는 존재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사나운 맹수들이나
험준한 지형이
항상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했기 때문이다.국사당과 산악신앙선바위의 뒷모습그래서 그들은 경이로운 존재이자 두려운 존재인 산을
신격화하여 제사를 드렸다.
산에 사는 신령,
즉 산신령에게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이것을 두고 산악신앙이라고 부른다.
그런 산악신앙은
우리 무속신앙의 근원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바위 아래에는
국사당(國師堂)이라는 신당이 있다.
이 국사당은 원래 남산에 있던 신당이었다.
조선이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395년(태조4),
이성계는 목멱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호국의 신으로 삼았다.
그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사당이 세워졌는데
이것을 국사당,
또는 목멱신사(木覓神祠)라고 불렀다.
이 목멱신사에서는
봄과 가을에 국가의 공식행사로
제례를 올렸다.
유교중심주의를 표방하며
건국된 조선에서조차도
산신령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그렇게 목멱대왕을 모셨던 국사당은
192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된다.
일제가 남산 중턱에
신사를 세웠는데
자기들의 신사 위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던 것이다.
국사당이 선바위 부근으로
옮겨오게 된 건,
인왕산이 무학대사의
기도처였기 때문이었다.
국사당(國師堂)에서
'국사(國師)'는 무학대사를 뜻한다.
그렇게 아래쪽에
국사당이 자리 잡게 되니
선바위는
거석숭배문화에다
산악신앙까지 더해지게 된다.
선바위에서 기원을 드리는 사람들이
국사당 앞에서도
두 손을 모으게 됐다는 것이다.
무학대사와 정도전, 그리고 선바위
인왕산에서 바라보는 한양도성의 석벽
선바위는 한양도성에서
직선거리로 30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두냐 마냐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 간에
격론이 오갔다.
불교세력을 대변했던 무학대사는
당연히 선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교세력을 대변했던
정도전은 이 스님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오는 것을
크게 반대했다.
선바위가 들어오면
도성 안에
불교가 융성해질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첨예하게 오갔던 격론은
이성계에 의해 결론이 났다.
선바위가
도성 밖으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불심이 깊은 이성계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유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이에 무학대사는
200년 안에 큰 전란이 있을 것이고,
국운이 기울 것이라는
큰 저주(?)를 내뱉었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이 선바위를 두고 오갔다던
‘무학대사 VS 정도전’ 간의 갈등은
정사가 아닌 야사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선바위를 두고 오갔던
두 사람의 갈등은
조선왕조실록 같은
공식적인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왜 이런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일까?
선바위 논쟁이
입에서 입으로 흘러나왔던 건,
실제로 조선이 건국한 후
약 200년 뒤에 일어난
조일전쟁(임진왜란) 때문이었다.
당시의 민중들이
어떤 식으로든 전란에 대한
유학자들의 책임을 묻기 위해
선바위와 무학대사를
무대로 등판시켰다는 것이다.
도성을 버리고 떠난
왕과 사대부들에 대한 원망을
선바위와 무학대사에 기대어
풀고자 했던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선바위는 ‘기도빨’이 잘 받는
유명한 기도처다.
누구는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기원하고,
누구는 시험에 붙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필자도 항상 기도를 하며
삼배를 올린다.
주머니 속에 있는 로또 용지를
살짝 만지작거리며
‘로또대박’을 속삭인다.
선바위를 빠져나오면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을 걸을 수 있다.
최근 성곽 밖의 순성로도
잘 정비되어
성곽트레킹을 하기에 제격이다.
인왕산 성곽도 좌청룡인
낙산 성곽길처럼
성돌의 변천사를
관찰할 수 있는 좋은 장소이다.
더군다나 이 성곽길의 반대편은
자락길로 유명한
서대문 안산이기에
양 옆의 시선이 다 즐거운 곳이다.인왕산의 숨어 있는 보석, 수성동 계곡
인왕산의 수성동 계곡
다음 탐방지는 수성동 계곡이다.
수성동 계곡은
인왕산의 숨겨진 보물 같은 곳이다.
아랫동네 서촌의 번잡함은
싹 사라지고,
계곡이 주는 청량감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곳이
바로 수성동 계곡인 것이다.
수성동(水聲洞)의 명성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와
한경지략에는
수성동을 명승지로 소개하고 있고,
겸재 정선은 수성동을 그려
이곳의 아름다움을
수묵으로 옮겨놓았다.
또한 이곳은 중인들이 모여
시를 짓고 노닐던 곳이다. 조
선후기 중인들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본거지였던 셈이다.
그러니 문학사적인 측면에서도
무척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수성동 계곡은
2012년 7월에 복원한 것인데
복원 전에는 1971년에 지어진
시민아파트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후 안전문제로
아파트는 철거가 됐고,
그 위치를 옛 모습으로
돌려놨던 것이다.
복원 과정에서
겸재 정선의 수성동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
수성동에 나오는 것처럼
‘기린교’라는 통돌다리도
그대로 복원이 됐다.
어쩌면 겸재의 그림이 없었다면
지금의 수성동 계곡은
평범한 도시 공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재개발로 사라졌던지.창의문 밖에는 고소한 냄새가 풍긴다!인왕산 창의문인왕산에도 자락길이 있다. 걷기에 부담이 없는 길이다.
마천루가 즐비한 도심지와 가까운 곳에
이렇게 부드러운(?) 길이 있다는 게 참 좋다.
그렇게 부드럽게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인왕산 역사트레킹의
마지막 구간인 창의문을 만나게 된다.
창의문(彰義門)은 사소문중 하나로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많이 알려진 문이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있었음에도
실질적으로 북문(北門) 역할을 했던 건
바로 창의문이었다.
북악산의 험한 지형 위에 세워진
숙정문은 사람의 발길이 뜸했을 뿐더러
1413년부터는
그마저도 폐쇄를 시켰기 때문이다.
숙정문이 오른팔이 되어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풍수학적인 의미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그때 창의문도 폐쇄가 되는데
왼팔의 역할을 하여
경복궁의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죄명’ 때문이었다.
하지만 숙정문과 달리
교통의 요충지 위에 놓여 있던
창의문은 1506년(중종 1년)에
다시 통행이 재개된다.
그래서 소문(小門)인,
창의문이 ‘북문 역할’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했다는 것은
그 문 아래로 수많은
역사적 발걸음이 오갔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인조반정 때
능양군(인조)을 옹립하던 세력들은
이 문을 통해 도성을 점령했고,
광해군을 쫓아낸 후 권력을 잡게 된다.
현재의 문루는
조일전쟁 때 불 타 사라진 것을
영조 때(1740) 건립한 것이다.
현재 창의문은 일반인에게
개방이 되어 있어
문루까지 직접 올라갈 수 있다.
내부에는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인사들의 이름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이 판은 문루를 세울 때
같이 만들어진 것이다.
창의문의 천장에는
큰 새가 그려져 있다.
필자는 창의문을 지날 때마다
참가자들에게
그 새의 정체를
맞춰보라고 퀴즈를 낸다.
“봉황 아니에요?”
“주작이요. 주작!”
봉황에 주작까지 나왔다.
하지만 꽝! 정답은 닭이다.
이 일대가 풍수적으로
지네의 기운을 가졌다하여
천적인 닭을
창의문에 그려 넣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창의문 밖인
부암동 일대가 치킨으로 유명한 것이다.
창의문 밖을 나서면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그 냄새를 맡은 도보여행자들은
더 이상 길을 나설 수 없게 된다.
자연스럽게 트레킹도 종료되게 된다.
대신 입이 즐거워진다.
기도빨이 잘 받는 선바위부터
성곽길, 수성동계곡, 창의문까지...
거기에 이번 기사에 언급하지 않은
윤동주문학관과
이빨바위, 출렁다리까지...
이처럼 스토리텔링이 풍부한
인왕산을 소개할 수 있어서 필
자도 참 기쁘게 생각한다.
앞으로도 좋은 코스들을
소개할 생각이니
많은 사랑과 관심 부탁드린다.
인왕산 역사트레킹
코스 :
무악재하늘다리 ▶ 선바위 ▶
성곽길 ▶ 수성동계곡 ▶ 출렁다리 ▶
윤동주문학관 ▶ 창의문
이동거리 : 약 8km
예상시간 :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난이도 : 하
In : 지하철3호선 무악재역
Out : 창의문(부암동)
곽동운님은?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을 집필할
곽동운 작가는
서울을 뚜껑 없는 박물관이라고 칭한다.
그만큼 서울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이 엄청나다는 뜻이다.
역사트레킹 마스터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 곽 작가는
로드프레스 지면을 통해
서울의 곳곳을 안내할 예정이며
단순히 길이나
유적 소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트레킹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들을 적절하게 풀어낼 예정이다.
로드프레스 독자들과도
역사트레킹을 통한 만남을
고대하고 있다.
역사트레킹에 관심이 있다면
아래의 블로그나 카페를 통해
문의하여 참여하면 된다.
국토종단 4회, 국토횡단 2회
역사트레킹 모임 수 백회 진행함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역사트레킹 강사
렛츠런문화센터 역사트레킹 강사
역사트레킹 인왕산
인왕산 트래킹 만남의 장소는
3호선 경복궁역 4번 출구
인왕산(339.9m)은
북쪽의 북악산(342.5m),
동쪽의 낙산(124.4m),
남쪽의 남산(270.9m)과 함께
서울의 중심부를 둘러싸고 있는
사신사(四神砂-
左靑龍, 右白虎, 前朱雀, 後玄武) 중의 하나로
우백호에 해당됩니다.
오늘 그 유명한 인왕산 호랑이를 만나볼까요.
예전에 금천교 시장이었던
세종마을음식거리를 지나 사직단에 갔습니다.
잠깐 몸도 풀고 오늘의 트레킹을 준비합니다.
사극을 볼 때,
“종묘사직을 보전하소서.”와 같은
대사를 들은 적이 있으시지요.
이 말은 종묘사직에서
유래 되었습니다.
사직(社稷)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을 합하여
지칭하는 말로,
우리나라에서 사직에 제사를 지낸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며
조선왕조까지 이어졌습니다.
태조이성계는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면서
먼저 궁궐의 위치를 정하고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유교 예법에 따라
동쪽에는 종묘를 세우고,
서쪽에는 사직단을 세웠습니다.
종묘와 사직, 즉 종사(宗社)는
국가 그 자체를 상징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 통에 불타기도 했고,
공원으로 바뀌고
정문의 위치가 뒤로 밀려가는 등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1908년에는
일제의 강압으로 아예 폐지가 되었고
일본통치하에서 사직단 부지가
아예 총독부로 넘어갔지요.
일제는 사직단 주위에
도로를 내고
사직단 일원을 공원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직단 정문은
1967년 서울 최초의 터널인
사직터널이 개통되고
경복궁~사직터널 길이
새로 만들어지는 바람에
원래 위치보다 뒤로 20여m
밀려났답니다.
청명한 가을하늘 아래
코스모스 유난히 반짝입니다.
멋진 풍광을 눈에 가득 담고,
돌아가서 아쉬울까봐
서로 사진찍어주는 모습 .
그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언제나 도시락 먹는 시간은
즐겁기만 합니다.
서로 나눠 먹으니 더 맛있습니다.
인왕산 정상을 오르지 않고
호젓한 자락길과 오솔길을 걸어
창의문까지 걸어갑니다.
곳곳에서 그 유명한
인왕산 호랑이를 만났습니다.
아, 황금색 호랑이도 있네요,
우백호면 흰색이어야 하는데...
어찌해서 황금색을 칠했는지
생각해 봅니다.
본래 서쪽은 오행중에서
금(金)에 해당되어
금은 흙에서 나오니(土生金)
그런 이유로 황금색을
칠하지 않았는가 추측해봅니다.
수성동 계곡에 잠시 내려갔습니다.
청계천 발원지가
백운동하고 이곳 수성동입니다.
겸재 정선의 수성도에 나온
기린교가 그림과 함께
앞에 놓여져 있네요.
인왕산 수성동 계곡은
조선시대 안평대군이 살았고,
후에 그의 큰 아버지인
효령대군이 이어받은
옛 집 비해당이 있던 곳입니다.
이곳 계곡에는 기린교(麒麟橋)라는
오래되고 긴 통 돌다리가 놓여 있는데,
조선 영조 때인 1750년경
겸재 정선의 수성동(水聲洞)을 묘사한
그림에도 이 다리가 보입니다.
수성동은
계곡의 물소리가 유명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경관이 뛰어나
겸재 외에도 추사 김정희의 시구 등
많은 작품 속에도 등장했습니다.
최근까지 이곳에는 1971년에 지은
옥인시범아파트(9개동 308세대)가
있었습니다.
계곡을 복원을 하면서도
시범아파트 흔적을 남기고
안내표지판을 세웠습니다.
18세기 수성동 계곡을 중심으로
인왕산 일대는 위항문학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위항문학(委巷文學)이란
중인과 평민들의
한문학 활동에 따른 문학으로
중인문학이라고도 합니다.
위항이란 꼬불꼬불한 거리나 골목,
작은 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가난한 동네를 말하는데,
중인 이하 하급계층을
위항인이라 지칭한 예에 따라
편의상 위항문학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위항시인들의 본격적인 시사(詩社)는
1786년 7월 결성한
천수경 등 13인에 의한
옥계시사(玉溪詩社)로,
이들은 옥류동 부근에
집중적으로 모여 살면서
돌아가며 시회(詩會)를 열었습니다.
이들의 시회 장면은
그림으로도 기록되어
여러 장 남겨졌는데
풍속화의 대가 김홍도의 작품도
있습니다.
길을 돌고돌아 창의문으로 걸어갑니다.
이 길을 지나간 숱한 인물들을 생각합니다.
경복궁을 내려다 보는
눈물 가득한 단경왕후(端敬王后,
조선 중종의 비,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위된
조선 11대 왕인 중종의 비)
의 얼굴이
보이는가 싶습니다.
창의문 주변에서 거사를 앞둔
반정군의 거친 숨소리도 들립니다.
겸재 정선이 그림 구도 잡기 위해
지긋이 풍광을 바라보는 모습도 보입니다.
젊은 윤동주의 고뇌에 찬 모습도
떠올려 봅니다.
시인의 언덕에 올라
확 트인 전망 앞에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바위에 새겨진 서시를 읽어보며,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시인의 언덕 바로 아래가
창의문입니다.
한양도성 동서남북에
네 개의 대문
(동쪽의 흥인지문,
서쪽의 돈의문,
남쪽의 숭례문,
북쪽의 숙청문)과
네 개의 소문이 있었습니다.
북소문은 창의문으로 장의문,
자하문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창의문은 건설되고 얼마 되지 않아
‘창의문이 경복궁을 누르는 형국이라
사람의 자취를 통하게 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술사들의 주장에 따라 폐쇄됩니다.
창의문이 역사에 화려하게 등장한 것은
인조반정 때 1500명의 반정군들이
이 문을 통해 도성으로 진입하여
창덕궁을 점령하면서 부터입니다.
영조는 창의문을 개축하면서
인조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적은
현판을 걸었습니다.
창의문에도 한번 이야기하면
끝이 없는 숱한 사연들이 있지요.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산세가
흡사 지네를 닮아
지네의 독기가 성을 넘어 침범할까봐,
창의문 천장에 닭을 그려 넣었다는 이야기
(닭의 머리에 봉황 모양이란는
주장도 있음)부터,
숭례문이 불타서 다시 복원된 지금,
창의문이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문이 되었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도 있습니다.
다음 주 안산 트래킹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오늘도 힐링한 행복한 마음 안고
돌아갑니다.
다시 데워 먹으면 안 되는 음식 5가지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음식을 먹으려면
전자레인지 등에 다시 데워야 한다.
하지만 연구에 따르면
이렇게 다시 데웠다가는
건강에 해로운 물질을 쏟아내는
식품들이 있다.
미국 여성지 '우먼스 데이'가
다시 데워서 먹으면 안 되는
음식 5종류를 소개했다.
◆시금치, 셀러리, 비트=
열을 가하면 이런 채소들에 들어 있는
질산염이 독소로 바뀔 수 있으며
특히 두 번째 데울 때는
발암물질이 나올 수 있다.
이런 채소들은 다시 데워먹는
음식에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버섯=
일반적으로 버섯은 손질을 한 뒤
바로 다 먹는 게 좋다.
버섯은 자르는 순간부터
단백질의 질이 악화된다.
◆달걀=
삶거나 스크램블로 만든 달걀을
다시 데우면
독소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런 독소는
소화기 계통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
◆감자=
감자를 보관하는 곳의 온도가
너무 높으면
보툴리눔 식중독을 일으키는
희귀한 세균을 발생시킬 수 있다.
이 균은 전자레인지에
잠깐 돌려서는 죽지 않는다.
이런 문제를 피하려면
감자를 즉시 냉장고에
보관하는 게 좋다.
◆닭고기=
냉장고에 보관돼 있던 찬 닭고기를
다시 데우면 단백질 구성요소에
변화가 생긴다.
이렇게 되면
소화기 질환이 발생할 수 있다.
닭고기를 다시 데워먹으려면
철저하게 요리를 하고
안쪽까지 아주 뜨겁게 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