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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제5차 공판중계] <해군작전상황도> 안에 천안함은 없어
오늘 오후 2시 천안함 제5차 공판이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렸었습니다. 오늘 재판의 쟁점은 <'제3의부표'와 '함미의 이동'과의 상관관계>를 따져보는 것이며, 증인으로 채택되었던 분들은 다음의 세 분이었습니다.
·황현택 KBS 기자 - 2010. 4. 7 KBS 9시 뉴스를 통하여 UDT동지회 회원의 인터뷰 내용을 포함 제3의 부표에 대한 의혹과 그를 둘러싼 이해할 수 없는 정황에 대하여 집중 취재를 하였던 기자분. 그로 인해 방통위에까지 제소되어 힘든 일을 당하셨던 분.
·이헌규 씨 - UDT동지회 회원. KBS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제3의 부표지점 아래에 잠수를 했는데 커다란 구조물을 보았다.… 해치가 있고 5m쯤 들어가니 소방호스들이 있었고, 해치 옆 2m 위치에 국기게양대 같은 긴 봉이 있더라”라고 증언을 하셨던 분.
·권만식 씨 - 88수중개발 천안함 함미 인양 현장작업 책임자. 함미 인양과 관련하여 총괄책임자인 정성철 대표의 지시에 따라 현장작업에 대한 준비, 설치, 해체 등의 업무 전반을 책임졌던 분. 특히 체인케이블 설치 업무를 직접적으로 책임졌던 분.
그러나 금일 황현택 기자는 회사 내 사정으로 인하여 이번 기일에는 곤란하다는 의사를 전달해 옴에 따라 다음 기일에 출석할 것을 기약하게 되었고, 이헌규 씨는 연락이 닿지 않아 불참하여 재판부에서 다시 연락, 다음 기일에 나올 수 있도록 조치키로 하였습니다. 따라서 금일의 재판은 88수중개발의 권만식 씨만 증인으로 참석하였으며 세 시간여 동안 변호인단과 검찰의 질문에 증언을 하였습니다.
사실 처음 예정된 세 분이 모두 참석하고 세 분께서 증언하실 내용들을 모두 연결지어서 판단을 해야 <제3의부표> 및 <함미의 이동>과 관련된 진실의 고리가 완성될 수 있는 것인데, 앞 두 분의 증언이 빠진 상태에서 세 번째 분만의 증언으로 전체를 판단하기에는 다소 미흡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금일 출석하지 않으신 두 분이 최초에 보도를 하였거나 인터뷰를 한 내용들을 전면 부인하거나 뒤집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1,2항의 내용), 오늘 나오신 권만식 씨의 증언(3항)까지 포함하여 진실의 퍼즐을 순서대로 연결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모두를 근거로 판단할 수 있는 새로운 사실은 4항으로 정리하였습니다.
1.KBS“한주호 준위 다른 곳에서 숨졌다”보도 - 제3의 부표
2010년 4월 7일, KBS 9시 뉴스는 경천동지할 내용을 보도합니다. 한주호 준위가 사고를 당하자 국방부는 한 준위가 함수 위치에서 연결색 작업을 하던 중 의식을 잃고 사망했다는 발표를 하였었습니다. 그러나 KBS에 의하여 한 준위가 “함수도 아니고 함미도 아닌 제3의 위치에서 사망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 2010. 4. 7 방송된 KBS <뉴스9>
KBS에 따르면 백령도 용트림 바위 앞 가까운 위치에 ‘제3의 부표’가 존재하며 그 부표의 위치는 함미가 가라앉은 곳에서 6km 떨어져 있고 함수가 가라앉은 지점으로부터는 1.8km나 떨어져 있으며 한 주호 준위와 함께 수중작업에 참여하였던 UDT동지회 회원의 증언을 통해 한 준위가 제3의 부표 아래에서 작업을 하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2.UDT 대원의 증언“제3의 부표 아래 천안함 함수가 아니어서 놀랐다”
UDT동지회 회원과 함께 제3의 부표 위치까지 배를 타고 나간 KBS 취재기자는 한 준위와 함께 수색작업에 참여한 UDT동지회 회원에게 묻습니다. “(한 준위가 사망한 지점의)부표가 용트림 바위 바로 앞에 그 부표 말씀하시는 거예요?”라고 질문하자 UDT동지회 회원은 “그렇죠”라고 분명한 어조로 답변을 하는 내용이 고스란히 영상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KBS는 한 준위 사망 후 나흘 뒤 용트림 바위 위에서 열렸던 UDT동지회 회원들의 추모제를 영상으로 보도하였는데 UDT동지회 회장은 “부표가 있는 곳 앞에서 추도사를 읽겠습니다”라는 ‘의미가 담긴 말’로 추도사를 시작합니다.
▲ 2010. 4. 7 방송된 KBS <뉴스9>
모두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주한 미 대사와 한미연합군 사령관이 급히 백령도로 날아와 한주호 준위 빈소를 찾아 위로하며 봉투를 건네는 사진은 ‘천안함이 아닌 다른 곳에서 미국과 관련된 임무를 수행하다가 변을 당했을 것’이라는 저를 비롯 네티즌들의 분석에 힘을 실어주는 정황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황현택 KBS 기자와 이헌규 씨로부터 다시 한번 법정에서 증언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던 내용입니다. 앞으로 두 분이 불출석하시거나, 법정에 나오셔서 이러한 내용에 대하여 번복하거나 새로운 내용을 증언하지 않는 한, 이러한 정황은 ‘가장 믿을만한 근거를 가진 FACT’로서 자리 매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오늘 재판에서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3.88수중개발 권만식님의 증언-“4월 13일,14일 우리는 현장에 없었다”
우선, 이미 KBS의 보도와 UDT 대원의 인터뷰 내용으로 널리 알려진 ‘제3의 부표’ 그리고 그 아래에 가라앉아 있다는 ‘거대한 구조물’을 염두에 두시고(그것이 FACT인지 아닌지 여부는 잠시만 접어 두시고) 지금부터 서술하는 오늘의 재판 내용을 대비해 보시기 바랍니다.
2010년 4월 12일, 88수중개발은 천안함 함미에 굵은 케이블(90mm Wire) 두 가닥을 걸고 수면 가까이 끌어올립니다. 케이블 한 가닥이 감당하는 중량은 650톤, 두 가닥이면 1,300 톤까지 인양 가능한데, 천안함 함미는 500톤, 물을 가득 담고 있다고 해도 900여 톤이라 두 가닥만으로 인양과 바지선 탑재가 충분히 가능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함미가 인양되어 수면 위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부력에 의해 중량이 적게 나오고, 수면 위로 올라오는 순간부터는 자연배수를 통해 해수가 빠져나갈 뿐만 아니라 시신 수습을 위해서라도 펌프를 이용 인공배수시키므로 함미의 중량은 900톤보다는 점점 줄어들게 되므로 케이블 두 가닥으로 충분하며 인양전문업체인 88수중개발도 그렇게 작업을 한 것이지요.
그러나, 함미를 케이블 두 가닥으로 수면까지 끌어올린 상태에서 갑자기 군은 작업을 중지시킵니다. 그리고 케이블 두 가닥이 약하다며 한 가닥 더 걸 것을 요구하면서, 그 작업을 위해 수심이 얕은 지역인 <동쪽>으로 함미를 매단 채로 이동을 하자고 주장을 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주장이지요.
얼마나 황당했으면 당시 88수중개발의 부사장은 <매일경제>와 ‘부산말로 같잖은 일’, ‘인양업계의 상식’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다음과 같이 인터뷰를 합니다.
하지만 결국 88수중개발은 군의 요구대로 함미를 크레인에 건 채 <동쪽>으로 이동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동쪽>으로 이동한 곳이 ‘제3의 부표’ 위치와 비슷하게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도대체 그곳에 무엇이 가라앉아 있기에 크레인에 함미까지 걸고 이동을 하는 묘수까지 부리느냐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지요.
며 이후 이틀간 거의 아무런 작업을 하지 않습니다. 4월12일(이동), 13일, 14일(작업재개)이 그렇게 흘러갑니다. 천안함 46명의 시신이 함미 속에 그대로 있는데 수습도 하지 않고 휴식에 들어갑니다.
크레인은 함미를 달고 이동을 한 후, 함미를 다시 물속으로 넣습니다. 그렇게 담가 둔 채, 기상이 나쁘다
제가 주목하는 날짜는 4월 13일과 14일입니다. 그날이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오늘 증인으로 나온 권만식 씨는 4월 12일 함미를 이동시킨 다음 날인 4월 13일, “기상이 좋지 않아 작업을 할 수 없어 88수중개발팀 모두 육지(대청도)로 나와 그 다음 날까지 밖에 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나와서 쉬는 동안 처음으로 산에도 가보았다”고 하였습니다.
변호인단이 물었습니다. “그러면 13, 14일 양일간 현장에는 누가 있었느냐” 고 묻자 권만식 씨는 “현장에는 군인들과 크레인 기사만 있었다”고 답변을 하였습니다. 기상이 나빠 작업을 할 수 없어 88수중개발 팀이 육지로 나와야 하는 상황이면 현장에 있는 군인들과 크레인 기사 역시 작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고 하지 않았어야 옳겠지요.
현재로선 4월 13일, 14일 양일간, 88수중개발팀은 외부로 나와 있는 상황에서, 현장에 남아 있는 군인들과 크레인 기사는 작업을 하였는지, 하였다면 어떤 작업을 하였는지에 대해 밝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미7함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놀라운 사실은 <88수중개발팀이 기상악화로 아무 작업도 할 수 없어 피항했다는 바로 그날> 미 해군은 매우 바빴다는 사실입니다.
잠수요원이 Vital Sign 체크하고, 헬기가 뜨고, 단정이 운행되고… 모두 미7함대 홈페이지에 올려져 있는 2010년 4월 14일의 사진들입니다. 한국의 인양팀은 작업을 중단하고 현장을 벗어나 밖으로 나가 있는데, 미군들만 유독 바빴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미군들이 바빴다면 해군 역시 바빴지 않았을까요?
88수중개발팀을 밖으로 나가게 한 후, 현장에 남아 있던 군인들과 크레인은 도대체 무슨 작업을 하였던 것일까요? 이제 <정말 중요한 내용>을 공개하려고 합니다. 이 내용은 오늘 재판에서 거론된 내용이 아닙니다. 다만,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과 오늘의 재판에서 확인된 사항까지를 종합해서 판단한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최소한 <제3의 부표>와 관련된 내용들과 <함미의 이동>과 관련된 사실 관계가 어느 정도 밝혀지고 난 다음 공개하려고 그동안 담아 두고 있었는데, 지금이 밝혀야 할 시점이라는 생각에 공개합니다. 그래야 진도 나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4. <작전상황도>의 붉은점은 '사고를 당한 또 다른 물체'(승조원 38명)이다
해군이 작성한 작정상황도에 천안함이 없다는 사실. 우선 <해군작전상황도>를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문제의 <해군작전상황도>는 천안함 사고가 발생한 다음날인 3월 27일 희생자 가족에 의해 언론에 공개된 것입니다.
위의 작전상황도를 해설해 드리겠습니다. 이 작전상황도는 상단에 기재된 조석표가 3월 27일자인 것으로 보아 사고 다음날인 3월27일 자정 이후~아침 시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안에 기재된 내용은 당시 해군, 해경, 관공선과 헬기 등이며 이 작전상황도에서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단연코 <빨간점>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빨간점은 천안함이 아닙니다. 함미도 아니며, 함수도 아닙니다. 과연 한국 해군의 사고를 위해 작성된 것이라고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이 작전상황도에는 오로지 빨간점만 존재하며 그 주위로 해군, 해경, 관공선이 집결해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사고 당시 천안함에서 생존대원을 구조하던 함수의 위치는 어디일까요? 아래의 지도를 보시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천안함이 반파된 위치는 (A)지점입니다. 함미는 반파 후 불과 몇 분 만에 (A)지점에 가라앉았습니다. 사고 당일 밤 함수의 생존자들은 (B)지점에서 해경 501함의 구조를 받습니다. 이것은 생존자들의 증언, 초병의 증언, 해군의 발표 등을 종합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함수는 다음날 아침 (B')지점까지 떠내려갑니다.
애초 군에서는 생존자 구조 후 함수가 즉시 가라앉았다고 발표하였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작년 8월 이후의 공판을 통해 해경 501함장의 증언, 심승섭 해작사 작전처장의 증언, 최영순 소령의 증언, 김진황 중령의 증언을 통해 천안함 함수가 27일 오후까지 가라앉지 않고 모습을 드러낸 채 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더구나 함수가 16시간 22분이나 용트림 바위 앞에 떠 있었음에도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마치 ‘소 닭 쳐다보듯’ 내버려 두었다는 사실이 증언들을 통해 이미 적나라하게 드러나 버렸습니다. 작전상황도 속의 저 <붉은점>, 바로 그 물체의 사고를 수습(탐색, 구조, 시신수습)하기 위해 해군, 해경 등 모든 병력과 관심이 그곳에 집중된 반면, 천안함 함미와 함수는 작전상황도 속에 존재감(위치) 조차 표기되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위의 작전상황도가 천안함 사고 수습을 위한 작전상황도라면 모든 해군, 해경, 관공함은 장병 46명을 태운 채 가라앉은 (A)지점을 중심으로 집결되어 있어야 옳은 것입니다. 도대체 <붉은점>이 얼마나 중요한 물체이길래, 46명의 우리 해군 장병은 무시한 채 그곳에 집결하여 있는 것일까요? 작전상황도 속의 <붉은점>, 그 옆에 기록되어 있는 < 38 >이라는 숫자는 <사고가 난 또 다른 물체>에 타고 있다가 사고를 당한 승조원이 < 38명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두 구조되었을까요? 희생자는 몇 명일까요?
※덧글 : 1. <붉은점>이 천안함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충돌한 것인지, 각자 사고를 당한 것인지, 붉은점 물체 내부의 38명의 승조원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 물체는 어떻게 처리가 되었는지… 현재로서는 밝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진실을 드러내고 말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돌이킬 수 없고 변명할 수 없는 정황들이 곳곳에서 실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2. 함미를 이동한 그곳에서 어떤 비밀스런 작업이 있었는지 여부는 앞으로 분명히 밝혀질 것입니다. 덧붙여 오늘 권만식 씨의 증언을 통해 입증된 것은 <88수중개발> 작업팀은 4월 13, 14 양일간 현장을 떠나 대청도로 나와 있었으므로 혹시나 존재할지도 모르는 현장에서의 비밀스런 작업과는 관련이 없다는 점, 따라서 88수중개발은 최소한 군과 공범적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3. 또한, 88수중개발이 군의 요청에 따라 특정 해역으로 이동을 하고, 케이블을 하나 더 걸었던 것 역시 <갑>의 입장인 군에서 강력하게 요구하면 따를 수밖에 없는 <을>의 입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정황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군에서 요구하는 <비밀유지각서>의 위력 앞에 무력해지는 민간기업의 한계도 있을 터입니다. 아무튼, 가장 핵심적인 날짜에 그곳에 없었다는 것은 <88수중개발>로서는 천만다행 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지요.
* 참조 : 서프라이즈 신상철님(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