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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은 ‘노예전쟁’
임진왜란은 우리 민족에게 큰 상처를 남긴 처참하기 짝이 없는 전쟁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 침략 야욕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어느 의미에선 가장 전투력이 왕성한 국가와
가장 준비되지 않은 국가 사이의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은 150여년에 이르는 전국시대를 거치며
어떤 군대보다 전투력이 높은 상태였다.
특히 1543년 ‘조총’이라 불리는 장총을 서양으로부터 전래 받은 이후,
대대적으로 생산하고 실전에 배치한 상태였다.
이런 무력을 갖춘 군대 15만8천명이 1592년 조선을 침략한 것이다.
당시 부산성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의 병력은 600명이었다.
7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에서
일본군은 조선인 18만5738명, 명나라인 2만9014명 등
모두 21만4752명의 수급(首級:적군의 머리)을 베었다고 집계된다.
일본은 이런 잔인한 만행을 저지르는 한편,
5만~10만명에 이르는 조선인을 무더기로 끌고 갔다.
이에 따라 임진왜란을 ‘노예전쟁’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당시 도공들이 얼마나 많이 잡혀갔는지
조선에선 거의 30여 년 동안 찻잔도 제대로 생산하지 못했다고 한다.
일본에 끌려간 도공들은 큐슈의 사쓰마 등지에서 세계적인 도자기를 생산해
유럽에 대거 수출하는 등 일본 도자기 산업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래서 ‘도자기전쟁’ ‘문화전쟁’이라고도 한다.
일본에 끌려간 사람 가운데 일부는 노예로 또 다시 포르투갈 등 유럽으로 팔려가기도 했다.
전쟁 뒤 조선은 일본군의 살육과 전염병, 질병 등으로 인구가 격감해
경지 면적이 170만결에서 54만결로 크게 축소됐다. 3분의 1 이하로 줄어든 것이다.
한마디로 국가의 존립마저 불투명할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한양의 경우 임진왜란 170년 전인 1428년(세종 10년) 11만명에 이르던 인구가
전쟁 뒤 3만8천명으로 줄어들었을 정도였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역사로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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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전쟁 '정유재란'<10>
10화: 조선인 노예사냥
[동아일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나고야성 일대를 묘사한 ‘히젠나고야성도병풍(肥前名護屋城圖屛風·나고야성박물관 소장)’ 그림(왼쪽)과 현재의 나고야성 일대(오른쪽). 왜군들의 조선 침략 사령부다. |
“일본에서 온갖 상인들이 (조선으로) 왔다.
그중에 사람을 사고파는 자도 있었다.
본진의 뒤를 따라다니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들였다.
새끼로 목을 묶은 후 여럿을 줄줄이 옭아매 몰고 가는데,
잘 걸어가지 못하면 뒤에서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지옥의 아방(阿房)이라는 사자가 죄인을 잡아들여 괴롭히는 것이 이와 같을 것이다.”
(‘朝鮮日日記’, 1597년 11월 19일)
왜군의 종군의승(從軍醫僧)인 게이넨(慶念)은 조선인들을 원숭이처럼 묶은 뒤
우마(牛馬)를 끌게 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게 하면서 볶아대는
일본 상인들의 행태를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다고 기록했다.
정유재란 발발 첫해 초겨울,
호남을 비롯한 대부분의 남부 지방이 왜군의 수중에 떨어진 때였다.
조선은 당시 일본 상인들에게는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의 시장이었다.
왜군을 따라 조선에 들어온 상인들은 군량과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한편으로 사람 매매에까지 손을 댔다. 특히 사람 장사는 최고의 이문이 남았다.
상인들에게 조선인을 파는 주체는 왜군이었다.
전쟁 이전 왜구들이 조선 해안지역을 침탈해 조선인을 잡아가
일본에서 강제 노역을 시키던 것과는 전혀 성격이 달랐다.
왜군은 조선인을 잡으면
현지에서 일본인 인신매매상에게 팔아넘기거나
일본으로 끌고 가 평생토록 노비로 부려먹었다.
이 때문에 전쟁 도시인 나고야성은 조선인 포로들로 넘쳐났다.
정유재란 때 칠산도에서 왜군에게 붙들려간 정희득은 “귀국 도중 들른
나고야성에서 마주치는 사람 중에 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月峯海上錄’)고 기록했다.
조선인 노예들의 고혈로 흥청거린 군사도시
130여 개의 다이묘 진영들이 들어서 있던 나고야 성터. 사가현=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
기자는 지난주 일본 규슈 서북단
사가(佐賀) 현 가라쓰(唐津) 시의
나고야성(아이치 현의 나고야성과 구별해 히젠나고야성이라고도 함)을 찾았다.
가라쓰는 일본인들이 중국을 가리키는 표현인 ‘당(唐)’으로 가는 ‘나루(津)’라는 뜻으로,
예전부터 대륙을 오가는 항구였다.
이곳에서 부산까지는 해로로 278km 남짓이다.
왜군의 출병 거점지이자 전선 사령부인 나고야성이 세워진 배경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불과 5개월 만에 이 성을 완성했다.
면적은 약 17만 m². 히데요시가 평생의 역작으로 지은 오사카성 다음 가는 크기였다.
그는 전쟁 초기에 나고야성 천수각에 머물면서 명령을 내렸다.
성 주변의 반경 3km 내는 일본 각지에서 차출된
다이묘(大名·영주)들의 진영으로 북적거렸다.
다이묘들은 이곳에서 휘하 부대원들을 이끌고 조선으로 치러 가고, 이곳으로 귀환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틀어 20만 병력이 나고야성에서 조선으로 출병했다.
지금도 당시의 진영 터에는 성벽과 토루 등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나고야성에서 나고야포(만)로 이어지는 바다까지의 들판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인구 10만을 넘어서는 군사도시가 형성됐다.
조선에서 비참한 살육과 납치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히데요시는 황금다실(黃金茶室)에서 금으로 된 찻잔에 따른 차와 함께 유흥을 즐겼다.
성내에서는 일본 전통의 가면극
노(能)와 노래 렌가(連歌)가 공연되는 등 불야성을 이루었다.
나고야성으로 끌려온 조선인 포로들은 일본 내 각 다이묘들의 영지로 끌려가거나,
당시 국제무역항이던 나가사키로 옮겨져 노예로 팔려나갔다.
일부 다이묘들은 처음부터 조선인들을 노예로 팔 요량으로
나고야성 남쪽의 나가사키 항으로 곧장 입항하기도 했다.
포르투갈까지 개입한 국제 노예거래
16세기 일본 나가사키항에서 포르투갈 상인들과 예수회 선교사, 일본인들이 교류하는 장면을 담은 ‘남만병풍(南蠻屛風)’. |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노예로 파는 데는 포르투갈인들이 적극 개입돼 있었다.
당시 전 세계 노예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포르투갈 노예상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사냥으로 악명이 높았다.
포르투갈 노예상들의 사주를 받은 일본인들은
조선인 납치를 일확천금의 기회로 생각했다.
“전진(戰陣)의 (왜군) 제장(諸將) 가운데 약삭빠른 자는
처음부터 인신매매를 목적으로 조선인들을 대량 노략질해오기도 했다.
(노예시장으로 흥성했던 나가사키의) 일부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붙잡아오기 위해
조선으로 도항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조선 남부 등 각지를 찾아다니며 남녀를 막론하고
조선인을 직접 사들여 나가사키 등지로 끌고 가 포르투갈 상인에게 철포(조총)나 비단을 받고 팔아넘겼다.”(‘耶蘇會宣敎師の朝鮮俘擄救濟敎化’)
심지어는 포르투갈 상인이 조선에 들어와 직접 거래했다고 볼 수 있는 자료도 있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왜군이 조선 남부 지방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일부러 현지에 인매선(人買船·노예매매선)을 보내
조선 포로를 직접 수용했다는 기록(1598년 9월 4일, 日本耶蘇會 宣敎聖職者會 報告)과,
전쟁이 끝난 후 조선의 비변사가 심문한 포로들 중에
포르투갈 상인 조앙 멘드스, 남만계 흑인 1명 등도 있었다(
1604년 6월 22일, ‘등록유초’)는 공초 기록이다.
일본의 국제무역항인 나가사키(長崎)와 히라도(平戶) 등지에서
매매된 조선인들은 홍콩, 마카오, 마닐라를 비롯해 인도, 유럽에까지 팔려나갔다.
“놀라울 만큼 많은 조선 포로가 일본으로 송치돼 주로 나가사키 방면에서 팔렸다.
포르투갈 상인은 이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耶蘇會宣敎師の朝鮮俘擄救濟敎化’)
돈이 되는 인신매매에는 기리시단(가톨릭) 다이묘들도 적극 개입돼 있었다.
당시 유럽 선교사들이 인신매매에 개입한 가톨릭 다이묘들의 파문을 결정할 정도로
대규모로 행해지고 있었다.
다이묘와 병사들 할 것 없이 조선인 노예 획득과 매매에 열을 올렸으니
정유재란은 노예전쟁이기도 했다.(‘壬辰·丁酉倭亂時 朝鮮俘虜奴隸問題’)
넘쳐나는 조선인 노예들로 인해 전 세계 노예시장의 가격이 하락할 정도였다.
조선인 부녀자와 아이의 경우 한 명 가격이 당시 일본의 화폐 단위로 약 2∼3문 정도였다. 조총 1정 값은 120문이었다.
1598년 3월경 당시 나가사키에 머물렀던
이탈리아 상인 프란치스코 카를레티는
“조선에서 남자와 여자, 소년과 소녀 등 나이를 가리지 않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왔다.
이들은 모두 극히 헐값에 노예로 팔려나갔다”(‘나의 세계 일주기’)고 기록했다.
카를레티는 12스쿠도(scudo·포르투갈 옛 화폐단위·일본 화폐로는 약 30엔)를 지불하고
조선인 5명을 사들였다.
카를레티는 이들을 나가사키의 예수회 교회에서 세례를 받도록 한 뒤
인도로 데려가 4명을 풀어주고, 나머지 한 명은 이탈리아 플로렌스(피렌체)까지
데려가 자유인으로 방면했다.
카를레티는 그 한 명이 로마에 있을 것이며, 이름이 ‘안토니오’로 알려져 있다고 기록했다. 이후 안토니오는 로마에 정주하면서 교회 일에 종사하다가 화가 루벤스의 눈에 띄어
‘한복 입은 남자(Man in Korean Costume)’의 그림 모델이 됐다고 한다
(그림 속 모델이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이라는 등 여러 이설도 있다).
동포를 상대로 총칼을 들어야했던 조선 청년들
조선에서는 왜군에게 끌려간 민간인들을 피로인(被虜人)이라고 불렀다.
‘사로잡힘을 당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왜군은 피로인을 병력 보충용으로도 이용했다.
주로 남자아이나 젊은 청년이 그 대상이었다.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이들은 모국의 군사들과 싸울 정예병으로 길러졌다.
“임진·계사(壬辰·癸巳·1592-1593년)에 우리나라의 어린아이들이 많이 잡혀가서 이제 장성한 나이가 돼 정용(情勇)하고 강한(强悍)하기가 본시 일본군보다 나은데,
정유(丁酉·1597년) 재침 때 이들 중에 적을 따라 온 자가 무척 많았다.
그런데 본국(조선)으로 도망해 오는 자는 적고 적국(일본)으로 도로 도망간 사람이 많았다. 또한 조선 남자로서 전후에 잡아온 자가 포 쏘기도 익히고, 칼 쓰기도 익히며,
배 부리는 것도 익히고,
달리기도 익혀서, 강장(强壯)하고 용맹하기가 진짜 왜놈보다 낫다.”(‘月峯海上錄’)
1597년 왜장인 가토 기요마사 진영을 탐정(探偵)한 사명대사는
“가토의 진영에 15∼16세 되는 나이 젊고 정예한 자는
조선 사람으로 군세가 종전에 온 적과는 다르다”고 하며
“일본 대군이 들어오기 직전에 결전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선조실록’)
정유재란 시기에도 어린아이들이 많이 잡혀갔다.
그중에는 1597년 8월 남원성 전투에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장군의 아들도 있었다.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의 셋째아들 이성현(李聖賢·우계이씨 족보에는 慶寶로 표기)의
경우다.
이성현은 당시 7세의 나이에 왜군에게 붙잡혀 끌려갔다.
이후 그는 ‘리노이에 모토히로(李家元宥)’로 개명하고
일본 여자와 결혼해 3남 4녀를 두었다고 한다.
리노이에 가문은 에도시대 이후 조선이씨(朝鮮李氏)로 불리면서
이복남의 혈통을 이어갔다.(‘羽溪李氏 族譜’)
일본 아사히신문 출판국장과 아사히학생신문사 사장 등을 역임한
리노이에 마사후미(李家正文·1998년 작고) 씨가 바로 리노이에 가문의 후손이다.
오랫동안 자신의 뿌리를 찾던 그는
1982년 한국을 찾아 선조들의 사적지와 묘소를 참배하고 돌아갔다.
여성들은 노동력 착취에 이용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고야 만에 떠 있던 조선 침략 전선들을 내려다보던 터임을 알려주는 기념비(오른쪽). 왜군들은 조선인을 납치해 히젠나고야성, 나가사키 등지로 끌고 와 노예로 팔거나 노비로 부렸다(왼쪽). |
여성 피로인들은 주로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노동 인력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됐다.
조선에서는 곡물 운송을 하거나 면화나 화곡을 거두어들이는
단순 노동에 주로 투입되었다.
일본으로 끌려가서는 다이묘의 집안 노비나 하녀가 돼 죽을 때까지 비참한 생활을 했다.
미모와 재능이 출중하거나 신분이 높은 여성의 경우,
지배층의 부인(夫人)이나 첩(妾)이 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에 납치된 조선인의 일본 생활’)
정유재란 시기 조선인 납치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한국 학계에서는 10만 명 규모로 보는 반면,
일본 측은 처음에는 5만∼6만 명으로 추정하다가 현재는 2만∼3만 명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 측 주장은 역사적 기록에 비춰 터무니없이 축소된 것으로 여겨진다.
1617년 경상도겸사복(慶尙道兼司僕) 정신도가 피로인 전이생(全以生)의 서한을 소개하는 상소문에서는 “전이생과 같은 처지로 사쓰마(薩摩)에 잡혀 있는 피로인이 3만700여 명이나 되는데, 별도로 한 구역에 모여 산 지 장차 24년이 되어간다”(‘광해군일기(정초본)’)고 기록되어 있다. 전이생이 밝힌 숫자가 다소 과장일 수 있으나, 한 지역에만도 3만 명이 넘는 피로인이 있다는 기록은 당시 피랍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조선 조정은 피로인을 고국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그러나 실제로 돌아온 수는 공식적으로 5000∼700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돌아온 이가 적은 이유는 일본 측의 비협조, 조선 조정의 어정쩡한 피로인 대우 정책 등을 꼽을 수 있다.
피로인들은 고국으로 돌아와서도 죄인처럼 차별과 멸시를 받았다.
천민 출신은 돌아온 뒤에도 천민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귀환한 양반들도 대부분 관직에 임용되지 못한 채 재야에서 살아가야 했다.
조선은 일본으로 끌려간 자체를 절의(節義)를 잃은 것으로 곱지 않게 보았던 것이다.
기자는 나고야 성터 높은 곳으로 올라가봤다.
멀리 만을 낀 바다가 펼쳐졌다.
7주갑(周甲·1갑은 60년으로 420년) 전 조선에서 침탈해온 노예들과 재물을 깔고 앉아 흥청거렸을 도시는 들판으로 변해 한가로워 보였고, 잔잔한 바다는 평화로워 보였다.
나고야 성터에 있는 나고야성박물관은 공식 안내문에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잘못된 침략 전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무고한 양민의 코를 베고, 짐승을 사냥하듯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로 포획해
노예로 팔아넘긴 세계 전쟁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극악한 전쟁범죄에 대한 설명으로는 너무도 미약한 표현이지만,
그나마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본 내 몇 안 되는 전시 기관 중 한 곳이다.
사가현(일본)=안영배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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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포로체험기 간양록, 선비 강항은 일본에 무엇을 남겼나?
2007.03.01. 22:30
149회 임란포로체험기 간양록, 선비 강항은 일본에 무엇을 남겼나?
1. 주요내용
이국 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서리고, 어버이 한숨쉬는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피눈물로 한 줄 한 줄 간양록을 적으니,
님 그린 뜻 바다되어 하늘에 달을 세라∼.
조용필 곡, <간양록> 中에서...
가수 조용필의 애절한 노래속에서나마 기억되고 있는 <간양록>.
간양록(看羊錄)은 조선중기 유학자 강항이 일본 포로로 끌려가 고향땅을 그리며 쓴
일기형식의 기록이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인물, 강항-.
그가 일본에서 추앙받고 있다.
일본 오츠시, 그곳에선 강항을 연구하는 모임이 생겨났고,
또 그를 기리는 현창비까지 세워져 있다.
뿐만 아니라 오츠시의 초등학교 부교재에는 강항이 소개돼있는데...
일본 오츠시에서 강항을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강항
일본 오츠시에선 그를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로 기리고 있었던 것!!
당시 포로의 몸이었던 강항은 어떻게 일본에 주자학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번주 역사스페셜, 강항이 포로로 끌려가 처음 유폐되었던 곳 오츠성을 비롯하여
일본 주자학의 비조 후지와라 세이카와의 운명적인 만남에 이르기까지
2년8개월의 포로생활동안 강항이 일본에 남긴 족적을 따라가본다.
2. 세부내용
1) 일본 오츠시에서 주목받고 있는 조선인, 강항
지난 2월22일, 일본 오츠시에서 특별한 만남이 있었다.
자매결연을 목적으로 오츠시에서 전남 영광군청 직원들을 초청한 것이다.
일본 오츠시에서는 왜 영광 전남지역과 자매결연을 맺으려 하는 걸까?
그것은 조선의 한 선비, 수은 강항 때문이다.
수은 강항은 전남 영광 출신의 학자로서 임진왜란 당시 일본 오츠시로 끌려 왔었
다. 전쟁포로에 불과했던 그를 현재 일본에서는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라 부르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름조차도 생소한 강항,
그는 어떻게 일본에서 추앙받는 인물로 남은 것일까?
일본 오츠시 현지취재를 통해 수은 강항의 흔적을 찾아본다.
2)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강항
수은 강항은 세종대 뛰어난 문장가였던 강희맹의 5대손으로,
형조좌랑의 자리까지 올랐던 조선의 유학자 였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일본에 가게 되었을까?
1597년 정유재란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던 강항은 그때 왜군에게
잡혀 일본으로 압송된다. 당시 일본은 도공이나 금속기술자, 인쇄기술자를 비롯해
농민들을 끌고 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수많은 지식인을 끌고 갔는데, 그 중 한 사
람이 수은 강항이었던 것이다.
당시 상황은 강항이 남긴 포로체험기인 간양록 (看羊錄)을 통 해 알 수 있다
간양록은 모두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그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이 있다.
강항 자신의 고심참담한 체험을 생생히 기록한 르포인 <섭난사적>이 바로 그것.
<섭난사적>의 기록을 바탕으로 당시 강항의 포로생활을 알아본다.
3) 임진왜란 당시 일본엔 주자학이 보급되지 않았다.
일본 오츠시의 초등학교 부교제엔, 일본에 포로로 끌려온 강항이
일본에 유학을 전해주었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강항이 일본으로 끌려간 것은 16세기 중반, 그렇다면 그때까지 일본엔 주자학이 전
해지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당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하던 전국시대로,
문(文)보다는 무(武)를 중시했기 때문에 글을 아는 이도 거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의 중심사상은 불교와 신도였기 때문에
자연히 주자학은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일본의 유일한 지식층이었던 승려들만이 불경과 함께 유교를 공부했다.
강항은 포로지에서 이러한 승려들과 단지 한시를 주고 받으며 교류를 했다는데...
그렇다면 강항은 어떻게 일본에 주자학을 전했다는 것일까?
4)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주자학을 전해주다
포로신세의 강항은 수없이 탈출을 시도하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그때 강항은 새로운 도시 후시미성, 즉 지금의 교토로 압송된다.
바로 이곳에서 강항과 일본 주자학의 시조격인
후지와라 세이카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당시 승려의 신분이였던 후지와라 세이카.
그는 일본을 찾아온 조선통신사들을 만나
한시와 유교경전을 접하게 되면서
주자학에 매료된다.
그러던 차에 후지와라는 교토에 이송된 강항의 소식을 듣게 되고 강항을 직접 찾아
간 것. 그렇게 두 사람의 학문교류가 시작되었다.
일본 교토의 천리대학에는 강항과 후지와라 세이카가 나눈 대화내용이 남아있다.
말이 통하지 않던 두 사람은 필담으로 대화를 나눴던 것이다.
강항의 학문적 깊이에 탐복한 후지와라는 그 길로 승복을 벗고,
강항의 제자가 되는데...
이렇게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전해진 주자학은
에도시대에 접어들면서 일본의 정치이념으로 자리잡게 된다.
강항과 후지와라는 일본인들이 보다 쉽게 사서오경에 접할 수 있도록 책을 만들고,
이것에 의해 일본인들은 주자학을 접하게 된다.
일본에 주자학이 보급되게된 데에는 후지와라라는 일본 승려가 있었고
그 뒤엔 강항이 있었다.
강항은 이렇게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것이다.
※=== History ===※=== History ===※=== History ===※=== History ===※=== History ===※
역사스페셜 149회 : 임란포로체험기 간양록, 선비 강항은 일본에 무엇을 남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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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역사스페셜은 노래 한곡으로 시작을 해보려고 합니다.
잠시 감상을 해보시죠.
아마 마흔이 넘은 분들은 "아! 저 노래"하고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가수 조용필이 불렀던 <간양록> 이란 노랜데..
.1980년도에 방영되었던 한 방송사의 드라마 주제곡이었지요...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서린데... 어버이 한숨쉬는 새벽달일세..."
가사가 참 애절하지요...그런데 이 노래엔 실제 주인공이 있습니다.
지난 80년도에 방영되었던 한 사극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인물!
바로 조선중기의 선비인 강항이란 인물인데요...
노래제목인 간양록은 조선선비 강항이 일본으로 끌려가...고향땅을 그리며 쓴
일기형식의 기록입니다.
그래서 이 노래 가사가 이렇게 애절한 것 같은데요...오늘 역사스페셜에서는 바로 이 강항이란 인물을 추적해보려고 합니다. 강항은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또 그곳에서 어떤 활동을 했을까요...? 최근 일본의 한 도시에서 조선선비 강항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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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오즈시에서 주목받고 있는 조선인,강항
일본 중부지역에 위치한 소도시,오오오즈시,지난 2월22일 오오오즈시청에서는
특별한 만남이 있었다.
일본 오오오즈시에서 전남 영광군청 사람들을 초청한 것이다.
초청의 목적은 친선교류. 이미 10여년전부터 두 지역을 오고가며
이런 만남의 자리를 가져왔다.
두 지역이 인연을 맺은 건...영광에서 태어난 한 조선선비 때문이다.
전남 영광출신으로 일본 오오오즈시에도 잠시 머물렀던 인물,강항이다.
일본 오오즈시장 인터뷰 :
강항선생에 대해서는 주변의 여러 사람들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 후 시민회관앞에 기념비를 세우게되었고 강항 선생의 한시를 비의 뒷면에 새겼는데
그것은 내가 썼다.
그때부터 오오즈시와 영광군과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오오오즈시민들의 강항에 대한 관심은 오오오즈시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오오오즈시민회관 앞엔 강항을 기리기위한 현창비가 세워져있다.
현창비옆엔 강항을 소개하는 글을 새겨놓았는데
일본어와 함께 한글로도 글을 새겨놓았다.
그런데 안내문의 제목이 눈길을 끈다.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유학자 강항>...
이것이 일본 오오오즈시에서 강항을 기억하고 기리는 이유다.
강항은 오오오즈시의 초등학교 학생들이 배우는 교재에도 등장한다.
이 책은 현재 오오오즈시의 초등 학생들이 쓰는 부교재로 아이들에게
오오오즈시의 문화와 환경 그리고 역사를 가르치기위해 만든 것이다.
그런데 조선선비 강항이 이 책의 한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책에 소개된 내용은 강항이 31살에 포로로 오오즈에 압송되어왔으며.
그때 유교를 가르쳐 일본 유교의 근본이 되었 다는 것이다.
인터뷰 : 오즈의 생활을 아이들에게 알리기위해 이 부독본을 만들었다.이 책에는 오오즈시 발전을 위해 힘을 쓴 오오즈시의 선인이 여러분 계시지만 그 중 한사람으로 한국의 강항선생을 소개하였다.이 책에 강항선생을 넣은 것은 일본 유학의 기초를 구축해주신 훌륭한 학자여서 그 분의 가르침을 학생들에게 확실히 알리기 위해서다.
강항의 업적을 연구하고 알리는 일은 강항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여러 사람에 의해 이뤄져 왔다.그 중의 한사람인 무라카미 쓰네오씨.현재 50여명으로 구성되어있는 강항연구회의 회장 이다.무라카미씨는 10여년동안 강항이 남긴 문집을 비롯해.. 강항과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해 왔다.그리고 지난 99년엔 강항의 삶과 일본에서의 발자취를 정리해 한권의 책을 냈다. 10여년 연구의 성과였다.이렇듯 강항연구회에서는 강항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를 해오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강항이란 인물에 빠져든 이유는 무엇일까?
무라카미 인터뷰 : 강항선생이 이렇게 일본에 대단한 것을 전해주었다는 것을 알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 분을 알리지않으면 안된다. 일본인은 이분에게 감사하지않으면 안된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강항연구회원들의 강항연구는 다각도로 이뤄지고 있다. 그동안 연구회에서는 강항의 발길이 닿았던 곳을 직접 답사해 유적지로 발굴해내기도 했다. 이곳은 일본으로 끌려온 강항이 처음 도착했던 곳이다.
무라까미 인터뷰 : 이쪽 방향으로 해서 포로가 된 강항선생 가족일행은 배를 타고 이곳에 닿았다. 당시 이 해안에는 항구가 없었다. 이 하지천을 거슬러 올라가 약 2킬로미터 떨어진 현재의 나가하마시 시모스가이 주변이 당시의 포구였다. 아마 그곳에 상륙한 것으로 보인다.
포구에 도착한 강항은 지금의 히지천을 지나 오오즈성으로 향하게된다. 연구회에서는 이렇게 얕은 하천 하나도 빠뜨리지않고 발굴할정도로 강항에 대해 정성을 쏟고 있다.
무라카미 인터뷰 : 바로 이 하지천을 건넜다.하지천은 그다지 깊지는 않지만 강항선생 일행은 아이도 있고 노인도 있었는데 모두 지쳐있었다. 건너는 도중에 누군가 넘어져 모두 강 물에 떠내려가 죽을뻔한 위기를 맞았다.
강항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지났던 곳.하천 옆길엔 나무표지판을 세워 강항과 인연이 있는 땅 이라는 표시를 해두었다.그리고 나무 표지판 옆엔 강항의 한시를 새겨놓았다.오오즈 사람들은 이렇게 정성스레 400년전의 조선선비 강항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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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지금 일본 오오즈시의 초등학생들이 쓰는 부교잽니다.
여기에 보면 84페이지에 반쪽 분량으로 강항에 대한 소개가 되어 있는데요....
일본 한 도시의 초등학생들이 이렇게 우리의 선조에 대해 배우고 있다니
참....놀랍지않습니까..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강항은 그리 알려진 인물이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는 주자학 즉 성리학 분야에서 일본에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고 하면 퇴계 이황을 먼저 떠올립니다.그런데 강항이 일본에 주자학을 전했다...?
언뜻 이해가 되지않는데요 그렇다면 우선 강항이 어떤 인물인지부터 알아보겠습니다.이 그림은 오랜 세월 동안 후손들에게 전해내려오던 강항의 영정입니다. 우리가 흔히 보던 조선 관리의 옷차림을 하고 있는데요...강항은 1566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습니다.세조때 뛰어난 문장가였던 강희 맹의 5대손이었던 강항은 어려서부터 문장력이 뛰어났다.
이미 16살에 향시에 합격하고 21살에 진사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27살,젊은 나이에 과거시험에 합격해 바로 벼슬길에 올랐다.강항은 조선의 학자이자 관리로서 순탄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그런 강항이 어떻게 일본으로 끌려가게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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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강항!
강항이 일본으로 끌려가게된 과정은 강항이 남긴 기록인
<간양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현재 <간양록>은 강항의 후손들이 대대로 보존해오고 있다.
400년전 강항에 의해 쓰여진 책 간양록 책 표지엔 장구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강대직 인터뷰 : 강항선생이 1597년부터 1600년
그 사이에 4년간에 걸쳐서 일본에 포로 생활을 했는데 간양록 내용을 보면 잡혀간
그 당시부터 일본 4년간 포로생활을 한 모든 역사적 내용..상세한 내용이 적혀있다.
<간양록>엔 강항의 일본생활상만 기록되어있는 건 아니다.
<적중봉소>는 강항이 일본에 있으 면서 조선의 임금에게 보낸 편지로
일본의 정세를 적었고 그외에도 일본에 다녀온 뒤 일본에서
보고들은 것들을 여러차례 정리했다.
강항의 일본생활상은 간양록의 마지막 부분에 실려있는 <섭난사적>에 실려있다.
간양록에 의하면 강항이 일본으로 끌려간 건 1597년.강항의 나이 서른 살때였다.
당시 형조좌랑이었던 강항은 잠시 휴가를 얻어 고향에 내려와있었다.
그런데 그때 조선에 전쟁이 일어난다.
1592년 조선을 침략해왔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7년 다시 정유 재란을 일으켜 조선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당시 왜군은 부산에 상륙.경상도 통영 지나 전라도 지역으로 밀고 들어왔다.
전라도지역을 집중공략하는 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략이었다. 고향집에 있다가 왜군의 침략소식을 들은 강항은 남원으로 향했다.
당시 상황이 간양록에 자 세히 기록되어있는데
강항은 남원성에 군량미를 조달하기위해 영광지역의 양곡을 모아 남원 성으로 운반해
가던 중이었다.
그러나 남원성의 상황은 좋지못했다.조선군은 왜군에게 밀리고 있었다.
그리고 왜군이 남원성을 공격한지 불과 3일만에 남원성은 왜군에게 함락되고 만다.
강항이 군량미를 가지고 남원성에 도착했을때는 이미 남원성은 왜군에게 넘어간 뒤였다.
조원래 인터뷰 : 1차전쟁에서 실패원인을 분석하고 난 뒤에 일본측에서는 전라도로 공략하지않고서는 어렵다 이렇게 판단한거다 그래서 정유재침 직전에 내려진 소위 풍신수길 의 작전 지침이 먼저 전라도부터 철저히 공략하라..
그 다음에 가능한대로 충청도 경기도도 공략하라 이렇게 된 것이다.
당시 왜군이 조선땅에서 저질렀던 만행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자세히 묘사되 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목을 베기도 하고 손발을 잘라내기도 했다.
그리고 노약자와 어린아이들도 가리지않고 잔인하게 죽였다.
조원래인터뷰 : 풍신수길의 명령이지요...그런 점에 있어서 정유재란때
1597년 8월이후 일본군이 철수했던 이듬해 1598년 11월까지
집중적으로 코를 베고 귀를 끊어내고해서 전라도 전역에 걸쳐서
살육 방화 약탈 이런 행위가 이뤄졌다고 봐지는거다.
당시 조선을 찾았던 종군승려 게이넨의 일기에 그 참혹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조선인을 죽이고 귀와 코를 자르니 길바닥은 온통 피바다가 되었고
마을에 들어가 불을 지르니 집들이 잿더미가 되고 연기가 고을마다 자욱하며
귀와 코를 잘린 어린애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우는 소리가 온 산천을 진동했다.
결국 강항도 왜군을 피해 피란길에 오른다.
배 두척을 구한 강항은 가족들을 이끌고 영광앞바다로 나갔다.
강항이 가족들과 함께 나갔던 논잠포구는 일제강점기 에 시행된 간척사업으로 인해
지금은 모두 논으로 변했다.현재 이곳엔 강항의 후손들에 의해 세워진 비석이 있다.
일본 오오즈시에 비해 늦은 감은 있지만
최근 후손들이 강항을 알리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논잠포 앞바다에서 강대직 인터뷰 :
여기서 가족들하고 같이 식량을 모두 싣고 이순신 장군 휘하로 가다가 ...저쪽이 칠산앞바다..안개가 그날 저녁 많이 끼어서 오도가도 못하고 날이 새서 보니 포위가 되어있다. 거기에서 포로가 되었다.
왜군의 배에 포위된 강항 일가족은 죽을 각오롤 하고 모두 바닷물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수심이 얕아 왜군이 던진 갈고리에 걸려 건져올려졌다.
그렇게 강항일가족은 왜군에게 잡히고 만다.
그리고 그 와중에 강항은 어린 자식들을 잃고만다.
그때 강항의 애통했던 심정이 간양록에 실려있다.
그렇게 왜군에게 잡힌 강항일가족은 왜군의 배에 실려 일본으로 끌려간다.
순천을 지날 즈음 탈출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이후 더욱 더 심해진 감시속에 강항 일가족은 힘겨운 여정을 계속했고 결국 10여일만에
일본 오오즈시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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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400년전의 전쟁이지만 당시 기록이나 그림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처참하게 목숨을 잃었는지...실감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당시 일본인은 부녀자와 어린아이들까지도 가리지않고 잔인하게 죽였다.
그런데 어째서 강항은 죽이지않고 애써 일본까지 끌고간걸까요?
임진왜란을 일으키던 당시 일본은 전투부대외에도 6개의 특수부대를 조선에 보냅니다.
도서부,공예부,포로부,금속부,보물부,축부가 바로 그것인데요...
.도서부에선 이름그대로 조선의 책들을 약탈해갔고
공예부에선 도자기를 금속부 보물부에선 목판 활자본을 비롯한 각종 보물을
그리고 축부에선 가축을 끌고갔습니다.
그리고 포로부에서 수많은 조선인 을 끌고갔는데요
현재 학계에서 추정하기로는 당시 조선인 포로가 10만명에 달했다.
그 중엔 도공이나 공예기술자들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조선의 선진기술을 약탈하기위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농민들은 노예로 삼기위해 끌고갔다.
그리고 강항과 같은 지식인들도 상당수 일본으로 끌려갔는데요,
그렇다면 도공이나 공예기술자처럼 특별한 기술이 없는 조선 의 선비들을
일본인들이 포로로 끌고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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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을 끌고간 이유는?
일본이 조선선비를 포로로 끌고간 이유는 강항의 일본생활상을 통해 추정해볼 수 있다.
오즈 성에서 차로 30여분 거리에 있는 킨잔 슛세키사.
이곳은 400년전 일본에 포로로 끌려왔던 강항 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절입구엔 조선종이 하나 걸려있는데
강항이 일본으로 끌려올 때 함께 약탈해온 것이라고 한다.
주지스님 인터뷰 : 이 종은 전국시대때 도우도 다카토라라는 무장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조선 침략시 포로가 된 강항선생과 함께 가지고 온 종이다.
어쩌면 강항은 이 종을 보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400년전 강항이 이곳을 즐겨 찾은 이유는 조선의 종 때문만은 아니다.
바로 이곳에서 불도를 닦던 한 승려 때문 이다.
주지스님 인터뷰 : 이쪽이 킨잔 제 5대 카이케이 스님이다.
강항선생이 오즈에 왔을 때 바로 이 분과 한시를 주고받으며 교류했다.
두사람의 만남은 카이케이가 강항을 찾아와 시를 한수 부탁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두 사람은 자주 만나 시를 주고받았는데 카이케이는
당시 국가기밀문서인 일본의 전국지도를 강항에게 보여주기도 하였다.
주지스님 인터뷰 :
당시 강항선생은 아주 쓸쓸한 마음으로 자신의 고향을 안타깝게 그리워하는 한시를 우리 스님에게 써주었다.
카이케이 스님은 거기에 답하는 한시를 쓰셨고 그러한 교류가 잦아지면서
그밖의 여러 가지 것들을 주고받고 했던 것같다.
일본인 승려가 이렇게 강항과 친분을 쌓기위해 애쓴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당시 일본의 상황 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간양록에 의하면 당시 일본사회는 무를 중시하는 분위기여서 칼로 싸운 흉터가 얼굴에
있으면 용기있는 사람으로 존경받았다고한다.뿐만아니라 간양록엔 이런 기록도 보인다.
분에 못이겨 서로 다투다가 원수를 죽이는 자는 장부답다고 불렀으며
칼을 잘 쓰는 자 의 자손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귀한 혼처를 얻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하던 16세기 중엽에 절정에 달한다.
대륙침략의 야욕을 가지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쟁터에 내보낼 무사들은 중요한 재원이었다.
따라서 이미 전국시대부터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무사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한 후에도 일본사회의 막강한 세력이 되었다.
미조구치 유우조 인터뷰 :
강항이 포로로 끌려갔던 무렵의 일본은 무력의 시대로 말하자면 야만의 시대였다.
당시 일본은 부모와 자식이 서로 적이되어 싸우기도 했고
형제간 에도 적으로 싸우던 상황이 계속되었다.
유학의 도덕적인 차원에서 보면 당시 일본은 서로를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간양록에 의하면 그 시대 일본사회의 권력자였던 장군들은
글을 몰라 병법서한권도 제대로 읽지못했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일본의 유일한 지식인은 승려였다.
일본 중세의 그림 들을 모아놓은 책인 <일본의 회>에는 일본승려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당시 일본의 사찰을 그려 놓은 그림엔 책읽기에 열중하고 있는 승려들의 모습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이렇게 일본사회의 지식층이었던 승려들은 불교경전이외에 다양한 학문을 연구했다.
그래서 당시 일본의 승려들은 의사...역술인...외교관의 기능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강재언인터뷰 : 당시 일본 최고의 지식인은 선승들이다.
선불교를 하고 있는 승려집단, 이것이 최고의 지식층이었다.
조선인이나 중국인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전부 선승들 즉 선불교를 공부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승려들은 일본에서 최고의 지식계층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승려들 중엔 주자학에 관심있는 승려들도 많았다.
그러나 당시 일본엔 주자학이 널리 보급되지않았다...
강재언인터뷰 :
주자학을 공부한 것은 스님만이 했다.
송에 유학간 일본의 스님만이 공부하고 있어서 유교로서 받아들이기보다는
불교철학을 보충하는 것으로 주자학을 공부했다.
그러니까 독립된 장르로서는 주자학이 아직 성립되지않고 있었다.
이에비해 유교를 국교로 삼은 조선에선 주자학이 생활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강항도 자신의 형에게서 주자학을 배웠는데
강항의 형 강준은 퇴계 이황의 학맥을 잇는 인물이다.
일본의 유일 한 지식인인 승려들이 강항과 친분을 쌓으려고 애쓴 건 이 때문이다.
이채연인터뷰 : 이런 것으로 봐서는 일본에서 필요한 고등지식은 성리학이라 할 수 있겟지 이런 쪽에 우리 문인학사들이 음으로 양으로 일조하지 않았나 이렇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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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그림은 조선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했을때의 모습을 그려놓은 것입니다.
수많은 인파가 조선통신사를 구경하기위해 거리로 나와있는데요...
화려한 조선통신사의 행렬은 일본인들에 게도 큰 구경거리였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번엔 이 그림을 한번 보십시오..
이 그림은 통신사 행렬중의 한 사람을 따로 그려놓은 것인데 말을 탄 조선통신사가
일본인에게 글을 써주고 있 습니다.
실제 1590년 그러니까 강항이 일본에 끌려가기 7년전이지요,
이때 조선통신사의 기록 을 보면 "일본의 현소라는 스님에게 글을 써줬더니
그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글을 구하는 자 들이 숙소앞에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이는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의 앞선 문화에 대해 갈증을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특히 주자학의 경우, 조선은 정치이념뿐아니라
백성들의 생활깊숙이 주자학 즉 성리학의 사상이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일부 승려들만이 접할 수 있는 학문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일본에서는 강항과 같은 선진 지식을 가지고있는 학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그리고 이런 지식인들에게는 다른 포로들에 비해 특별 한 대우를 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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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항의 오즈에서의 생활상
포로신세가 돼 일본으로 끌려온 강항은 오오즈시에 정착한다.
지금도 오오즈시엔 당시 흔적인 오즈성이 남아있다.
강항의 가족이 살던 집은 강변을 따라 높다랗게 쌓여있는 오즈성안에 마련 됐다.
그렇다면 강항은 이곳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간양록엔 당시의 생활상을 추정해볼 수 있는 글이 실려있다.
"십리쯤 걸어 닿은 곳이 오즈성이다.
그곳에 우리를 유치해두고 남녀종을 한명 씩 줘 시중들게 해주었다."
비록 포로였지만 강항에겐 시중 들 종까지 제공되었다.
그리고 오즈 성 인근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무라카미 인터뷰 : 킨잔 슛세키사의 노승과 교류가 있었고 또 성아랫마을의 승려와 한시를 주고받은 거으로 봐서 비교적 자유롭게 오오즈시내를 걸어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강항은 쉽게 일본사회에 동화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에 통신사로 갔던 여우길은
일본에서 들은 강항의 행적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강항은 늘 조선선비의 의관 을 갖춘채 글읽기와 글쓰기에만 몰두 했다.
지금 일본에 남아있는 이 글씨는 당시 강항이 직접 쓴 것으로
난방...즉 난꽃은 매우 향기롭다는 의미다.
예기치못했던 이국땅에서의 삶...어쩌면 이 글씨는 당시 강항의 심정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박종명인터뷰 :
만약 글로 표현한다면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저는 마음속에서 스스로의 절의 절도 이것만은 굽히지않겠다.
그것은 마치 난꽃이 인공적으로 무엇인가를 가하지않아도
스스로 좋은 향기를 발하듯이 내 마음도 그렇다.
이렇듯 조선선비로서의 절개를 지켰던 강항이지만
강항은 늘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젖어있 었다고 한다.
간양록에 의하면 강항은 자주 오즈성 정상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며 마음을 달랬 다고 한다.
무라카미 인터뷰 :
강항선생님은 황폐화된 오즈성에 올라가서 서쪽하늘을 바라보며 통곡 했다.
서쪽이라는 것은 조선을 가리킨다.그 하늘을 바라보며 통곡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오즈의 토미스산을 바라보며 아마 서울의 남산을 생각했을 것이다.
자막 : 오즈성은 높은 산꼭지에 있고 산밑으로는 긴 강히 휘휘 둘러있다. 시퍼렇게 맑은 물이 늘상 흐르고 있는 강이다.
간혹 성안에 사람 없는 틈을 타서 서쪽을 우러러 실컷 울고 어슬렁 어슬렁 내려온다
그러면 저윽이나 마음이 좀 풀리는 것도 같다. -간양록
결국 강항은 탈출을 시도한다.
교토에서 도망쳐온 조선포로를 만나 그와 함께 숲길을 타고 서쪽으로 향했다...
간양록엔 당시의 상황이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왜경 즉 교토에서 도망쳐온 사람이 있어..그와 함께 탈출을 의논했다..
5월25일 밤길을 타 서쪽으로 빠져나갔다.그러나 강항의 탈출은 실패로 돌아가고만다.
당시 강항의 탈출경로를 직접 찾아가봤다.강항은 지금의 야쿠시다니계곡에서 한 노승을 만나 도움을 청한다. 다행히 노승이 배편을 구해주기로 해... 노승과 함께 숲길을 걸어 내려오는데 갑자기 왜군이 나타난 것이다. 왜군에게 잡힌 강항은 곧바로 우와지마성에 있는 한 처형장으로 끌려온다.간양록에 의하면 당시 왜군은 금방이라도 강항의 목을 벨 듯이 칼을 휘둘렀다고 한다.그런데 처형되기 직전 강항은 극적으로 풀려난다.
무라카미 인터뷰 : 그때까지 강항선생은 도우도다카토라(당시 오즈성주)가 매우 존경 하고 있던 킨잔슛세키사의 승려 카이케이와 한시를 교류할 정도의 좋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그런 관계 때문에 도우도 다카토라는 강항선생을 죽이지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강항선생은 살아났고
그 후에는 빈객으로 다시 말해 손님자격으로 식사와 술을 대접받으면서
오즈로 다시 돌아왔다.
처형장까지 끌려갔던 강항은 이렇게 극적으로 살아난다.일본은 왜 이렇게 강항에게 관대했던 것일까?
이채연인터뷰 : 이면에는 강항선생이 가지고 있는 학문과 덕망 이런 것들이 음으로 양으로 일본인에게 감화를 준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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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에선 탈출하다가 잡히는 조선포로들을 극형에 처했습니다.
간양록에 소개되어있는 한가지 일화를 보면
조선 포로 이엽이 몇몇 조선 포로들과 함께 탈출을 시도하다가 일본인에게 잡히고 맙니다.그러자 이엽은 잡히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라고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고 바다에 뛰어듭니다.
그러자 일본인들은 이엽의 시체를 건져올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환괘의 형" ...
즉 수레바퀴에 팔다리를 매달아 사지를 찢는 형에 처합니다.
그리고 함께 탈출 하려했던 사람들도 목을 베...처형합니다.
이렇게 조선포로들에게 가혹했던 일본인이 강항에 대해서만은 관대했던 건
그만큼 강항의 지식을 높이 평가했고...그의 지식을 전수받기위해 애를 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 강항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본말도 배우지않았다고 하는데요
그런 강항이 어떻게 일본에 주자학을 전해주게된 것일까요?
그건 일본 교토에 있던 한 승려와의 운명적인 만남에서 비롯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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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항과 후지와라 세이카의 만남...
강항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는 승려는 누구일까? 그를 찾기위해 교토로 향했다.
수소문 끝 에 400년전 이곳 교토에서 강항과 인연을 맺었다는
승려의 후손을 만날 수 있었다.
올해 60의 레이제이 타메히로씨..
그의 집안에서는 대대로 선조들의 모습을 초상화로 그려 보관하고 있다.
선조들이 살던 그 시대에 그려졌다는 초상화는 너무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 중 강항과 인연 이 있었던 인물은 레이제이 타메히로씨의 11대할아버지인 후지와라 세이카다.그럼 후지와라 세이카는 어떤 사람일까? 레이제이 타메히로씨는 후지와라 세이카의 유물 한가지를 더 보여 줬다.나무로 만든 둥근 공... 독특한 모양의 유물이었다.
후손인터뷰 : 이건 선조인 후지와라 세이카가 공부하고 있을 때 사용한 느티나무로 만든 베개이다.어떤때 사용했느냐하면 이것을 이런 형태로 베서 졸면 뒹굴어져 잠이 깨는데 공부할때는 항상 이 베개를 사용했다고 한다.그것이 지금까지 이런 형태로 남아있는 것이다.
이렇듯 학문에 뜻이 깊었던 후지와라 세이카는 승려가 되어 쇼오코쿠사에 들어간다.당시 일본 에선 귀족의 자제들 중 학식이 높은 사람들은 대부분 승려가 되었다.
스님 인터뷰 : 일본의 승려는 헤이안시대 그이전인 나라시대부터 대부분 귀족의 아들 이었다.정말 부유층의 아들이 승려가 된 것이다. 결국 그 사람들만이 경전을 접할 수 있었고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쇼우코쿠사에 들어온 후지와라 세이카는 불경공부에 빠져들었다.그러나 불경공부에 빠져들 수록...후지와라 세이카는 또다른 학문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야마자키 인터뷰 : 후지와라는 10대에서 20대 무렵에 불교에 대해 강한 의문을 가진다. 당시 조선에서 국사가 찾아와 다이토쿠지에 묵는다.그때 그는 일부러 조선의 통신사에게 글을 배우러 가서 일본의 불교와는 차원이 다른 유교에 눈을 뜨게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일본을 찾았던 조선사신들을 통해 후지와라 세이카는 주자학을 접한 다.그러나 당시 일본엔 주자학이 제대로 보급되어있지않아.후지와라 세이카는 주자학을 공부 할 기회를 갖지못한다.
야마자키 인터뷰 : 주자학에 대해 자세히 배우고 싶었는데 그때 마침 강항선생이 도우도번 (도우도 다카토라)에 잡혀왔다는 말을 듣게된다.
오오즈성에 있던 강항이 교토 후시미성으로 옮겨온 건...1598년 6월.. 당시 임진왜란이 끝나자 ...조선의 전쟁터에서 돌아온 오오즈성의 성주 도우도 다카토라가 강항을 교토로 불러들인 것 이다.당시 도우도 다카토라가 살았던 집터...지금은 유치원이 들어서있는 이곳에서 강항은 그와 함께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야마자키 인터뷰 : 이곳이 모모야마조 이즈미라고 하는데 도우도번의 저택이 있던 자리다.강항은 아마 이곳에 끌려왔을 것이다.동시에 아카마쓰번이 이 근처에 있었는데 이 아 카마쓰번은 후지와라 세이카의 출신지였기 때문에 아카마쓰 번주에게 도우도번주와 강항의 얘기를 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아마 처음 만난곳은 바로 이 모모야마조 이즈미 부근이었을 것이다.
강항과 후지와라 세이카는 이곳에서 처음 만났다.주자학을 공부하고자했던 후지와라 세이카는 강항의 소식을 듣고 직접 강항을 찾아왔다.그리고 강항을 스승으로 모시고 본격적으로 주자학 을 공부한다.현재 텐리대학에 소장되어있는 필담서는 강항과 후지와라 세이카 두사람의 필담 을 정리해놓은 것이다.말이 통하지않던 두 사람은 이렇게 필담으로 주자학을 논했다.
기타지마 만지 인터뷰 : 후지와라 세이카는 강항으로부터 실제로 조선의 정치에 응용된 주자학을 배우고 싶어했다.그는 가르침을 받을때는 먼저 머리에서 발끝까지 정장을 했다고 한다.그렇게 강항에게서 조선의 성리학을 배웠다고 한다.
국보급의 중요한 사료들을 보관하고 있다는 일본의 국립공문서관 내각문고 - 이곳엔 강항이 쓴 책 21권이 보관되어 있다...모두 사서오경등 주자학의 기본서적들로 강항이 암기하고 있던 주자학이론들을 하나씩 되살려....책으로 엮어놓은 것이다. 후지와라 세이카의 부탁으로 쓴 주자학 이론서들..책의 마지막에 써놓은 발문에 강항이란 이름이 선명하게 보인다.그리고 강항 은 발문에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남겼다. 주자학이론서가 귀했던 시절. 이 책은 후지와라 세이 카라는 대유학자를 탄생시키는 초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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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해서 강항은 후지와라 세이카라는 일본의 한 승려에게 주자학을 전합니다.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길겁니다.강항은 조선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일본사회에 전혀 동화하지 않으려했습니다.그런데 그런 그가 어떻게 그렇게 쉽게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조선의 주자학을 전해줄 수 있었을까요? 간양록에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구절이 있는데요 "왜놈 땅에 온 후로 여태껏 한시도 돌아가고픈 마음을 버릴 수가 없었다.왜놈들의 풍습이란 돈이면 귀신도 부릴 수 있는 고장이다.왜승 순수좌.....즉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글씨를 팔아 은전을 좀 벌어 배를 마련 하려한다..." 즉 처음 강항은 탈출자금을 마련하기위해 후지와라에게 글을 써준 것입니다. 그러나 주자학을 배우기위해 승복까지 벗은 후지와라에게 강항은 감화를 받았고 주자학을 가르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일본에 주자학이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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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주자학을 전해주다.
일본 오오즈시에는 에도시대 학교건물이 남아있다.테라코야라 불리는 이 건물엔 공자 목상이 안치돼있다..우리나라의 서당이나 서원처럼 이곳에선 주자학을 가르쳤던 것이다.그런데 이런 학교가 처음 생겨난 건 에도시대이후다. 오오즈시립도서관에는 테라코야에서 썼던 교재들이 남아있다.수백년전 어린 학생들의 손때가 묻은 고서들이다.
무라카미 인터뷰 : 지금부터 100년에서 400년전까지 약 이백수십여년동안 테라코야라는 사설학운에서 사용한 교과서입니다.
당시 테라코야의 학생들이 배웠던 책은 시경집주와 서경집주를 비롯한 주자학 관련 서적들이 다. 에도시대가 되어서야 일본엔 학교가 생겨나고....젊은이들에게 주자학을 가르쳤다.
이마나카 칸지 인터뷰 : 에도시대 이후 일본 학문의 주류는 전부 유교가 되어버린 것이다.
에도시대이후 주자학이 일본사회에 보급될 수 있었던 건 당시 시대상황과 관련이 깊다.1598년 조선을 침략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숨을 거둔다. 그리고 뒤이어 등극한 인물이 도쿠가와 이에야쓰..그가 등극하자마자 한 일은 오랜 전쟁으로 인해 혼란해진 사회를 안정시키는 것이 었다.도쿠가와 이에야쓰는 전쟁의 시대를 마감하고 평화의 시대를 열고자했다.
기타지마 만지 인터뷰 :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에도막부를 열고 사회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신분계급을 확실히 정하고 주자학에 의한 인간관계를 확립시키는 것이 중요했다.특히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쓰에겐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새로운 정치이념과 가치관이 필요했다.도쿠 가와 이에야쓰는 당시 주자학의 최고권위자였던 후지와라 세이카를 니조성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자신의 측근이었던 승려 세이쇼 죠타이와 후지와라 세이카간의 유불논쟁을 벌이게 한다.
다카하시 쓰스무 인터뷰 : 유불논쟁을 통해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구체적으로 유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다른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도 그 중요성이 인식되어 유교를 가르치는 학교가 막부에 의해 본격적으로 세워지게 된다.
에도시대 이후 테라코야라는 학교가 세워지고...그곳에서 주자학을 가르치게 된 건 바로 유불 논쟁의 성과였다. 후지와라 세이카로 인해 비로서 일본사회에 주자학이 보급되게된 것이다. 그리고 이때 일본인들이 좀 더 쉽게 주자학에 접할 수 있게 도와준 것이 바로 사서오경훈점본 이다.강항이 원본을 쓰고...후지와라가 일본어로 훈을 단 이 책을 통해 비로서 일본사람들은 사서오경을 일본어로 읽게된 것이다.
다카하시 쓰스무 인터뷰 : 그건 결국 강항선생으로 인해 일본인이 유학을 배울 수가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일본유학의 최초 주자가 후지와라 세이카였다면 그를 최초 주자로 만든 사람은 바로 강항이었다고 말해도 결코 틀리지않을 것이다.
후지와라로 인해 일본사회에 주자학이 뿌리내렸다면 주자학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씨를 뿌려 준 사람이 바로 강항이다.400년이 흐른 지금 오오즈시 사람들이 강항을 주자학의 아버지로 기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라카미 인터뷰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무기를 들고 이웃나라 조선을 침략했다. 그러나 강항선생은 학문으로 일본에 위대한 교육문화를 전해주었다.
임진왜란을 맞아 예기치못했던 운명속에 놓여져야했던 강항.그러나 그가 일본땅에 남긴 족적 은 이제 우리에게도 기억되고 기려져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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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항이 조선으로 돌아온 건 일본으로 끌려간지 2년 8개월만인 1600년입니다. 당시 후시미성... 즉 지금의 교토 성주에게 강항은 조선으로 돌려보내달라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여러 지식인들이 강항을 돌려보내줄 것을 성주에게 권했고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집니다...2년8개월만의 힘겨운 포로생활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인물이었던 강항..그러나 그는 400여년전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 그곳에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그리고 지금 일본 오오즈시에서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로 기려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선조임에도 우리보다 일본에서 더 많이 연구되어진 인물...그리고 일본인들에게 더 많이 알려진 인물...이제 더 이상 우리의 역사속에 묻힌 인물로 머물러있어서는 안될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강항을 만나는 이윱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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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항: 일본에 주자학을 전했다고 함.
1597년 강항 나이 30살에 정유재란때 일본에 끌려감
정유재란 1697~1698
사람의 귀와 코를 자르는 악행이 절정.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음
강항을 죽이지 않고 일본에 끌고 간 이유
특수부대(맡은 역활에 따라)
도서부
공예부
포로부 : 기술자, 농민, 지식인 등등.
금속부
보물부
축부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남원성으로 군량을 운반하려하나, 남원에 도착했을땐 이미 왜놈에게 뺏긴
상태였다. 이에 강항은 배로 탈출하려 하다가 왜놈에게 잡힌다. 이때 자식들을 잃게 된다.
동국신속 삼강행실도에는 왜놈의 악행이 기록되어 있다.
종군 승려 게이넨의 '조선일 일기'中, 특히 정유재란시기 왜놈의 악행이 심했다고 한다.
남원성이 빼기자, 배로 탈출을 시도하다 잡힘
어린놈 용이와 첩의 딸 애생의 죽음은 너무 애닮다.
모래사장에 밀려 물결따라 까막까막 하다가 그대로 바다 깊숙이 떠내려 가버리고 말았다.
엄마야! 엄마야! 부르던 소리 아직도 귓결에 암암하다
칼로 싸운 흉터가 얼굴에 있으면 씩씩한 사내라 하여 극진한 대우를 받지만 귀 뒤에 있으면
도망 잘하는 자라하여 배척당한다.
- 간양록, 일본에 체류중일때
분에 못이겨 서로 다투다가 원수를 찍어 죽이고 다시 쫓아가 목을 베고 배를 잘라내면 모두
혀를 내두르며 참으로 장부답다고 떠들어댄다. 그 자손을 보고는
"저 애가 죽음을 무릅쓰고 덤빈 그 사람의 후예다" 라고 하여 바로 귀한 혼처를 얻게 된다.
- 간양록, 일본에 체류중일때
일본의 전국시대, 토요토미 히데요시 집권시
강항이 포로로 끌려갔던 무렵의 일본은 무력의 시대로 말하자면 '야만의 시대'였다.
당시 일본은 부모와 자식이 서로 적이 되어 싸우기도 했고, 형제간에도 적으로 싸우던 상황이
계속되었다. 유학의 도덕적인 차원에서 보면 당시 일본은 서로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소위 장군이란 자들도 문자를 아는 놈은 한 놈도 없고...
'무경칠서'같은 병법서들이 있기는 하나 그대로 간직해둘 뿐 반줄도 내려 읽는 놈이 없다.
- 간양록, 일본에 체류중일때
이러한 시기 일본의 유일한 지식층은 승려
불교경전외에도 다양한 학문을 연구 - 의사, 역술인, 외교관 역활을 함
당시 일본에서 주자학은 유교로서가 아니라 불교를 보충하는 정도로 공부되고 있는 상황
따라서, 일본에서는 선진 지식을 갖춘 지식인들이 필요로 했음.
끌려간 지식인들은 대우가 좋았음
십리쯤 걸어서 닿은 곳이 이예주의 오즈성이다. 거기다 유치해둔다.
남녀노비 한 명씩을 두어서 시중을 들게 해주는데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 생선 한 마리씩이다.
- 간양록, 일본에 끌려간 당시
회답사 여우길 등이 일본에 갔을 때 왜인들이 그의 절의를 몹시 칭찬하였는데...
있는 동안 모습이나 의관을 바꾸지 않은 채 지내었다.
- 현종개수실록, 강항의 절의를 칭찬하는 부분. 강항은 쉽게 일본에 동화되지 않았음
서울 대전거리에 살다가 임진년에 잡혀온 사람이 있었다.
왜경에서 도망쳐 이예주로 와서는 날마다 놀러 오는 것이었다.
그와 탈출을 의논했다. 5월 25일 밤길을 타서 서쪽으로 빠져나왔다.
- 간양록, 일본에 체류중 탈출을 시도 -> 실패
일본말도 배우지 않았던 강항이 어떻게 주자학을 전해줬을까?
탈출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후지와라 세이카와라는 승려를 제자로 삼았는데, 주자학을
배우기 위해 승려의 직책까지 버린 후지와라에게 감화
일본 주자학의 시조(?)인 세이카는 강항의 제자가 되어 주자학을 배웠다.
강항은 암기하고 있던 사서오경을 서적으로 만들어 전해준다.
일본의 주자학 보급
에도시대 : 도쿠카와 이예야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정치 철학이 필요해짐
세이쇼 죠타이 vs 후지와라 세이카 간 유불논쟁을 벌이게 하여 유교의 필요성을 인식
일본에서 '사서오경'이 이때부터 읽히게 됨.
강항은 성주에게 귀국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낸댜. 일본 지식인들도 이에 동조한다.
결국 2년 8개월만(1600년)에 강항은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