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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멍구 신석기 토기에 한민족 고유의 상투가?
동아일보 2012-09-24
요하문명 유물 연구 5개大 연합팀 “홍산문화가 中문명이라는 건 허구”
5월 중국 네이멍구 자치구에서 발굴된 토기 인물상.
상투를 틀고 관모를 쓴 채 수행하는 모습은 한민족 고유의 특징이라고 연구팀은 설명했다. 연구팀 제공3반가부좌를 틀고 앉아 입을 동글게 벌리고 호흡하며 수행하는 모습의 남자 인물상. 올해 5월 중국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에서 발굴된 이 토기 인물상으로 홍산(紅山)문화가 한민족의 문화임이 입증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에 따르면 요하(遼河)문명을 대표하는 신석기문화인 홍산문화가 중국 문명의 일부라는 중국의 주장은 허구가 된다.
'환단고기 [삼성기 상하]' 편에 보면 환인과 환웅께서 주문 수행을 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 환인께서 바깥 일을 꺼리고 삼가 문을 닫고 수도하셨다. 주문을 읽고 공덕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다. [삼성기 상]
* 환웅께서 신령한 주문의 도술로써 환골케하여 정신을 개조시키셨다. [삼성기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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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대 대학원 융합고고학과를 비롯한 5개 대학 연합연구팀은 26일 인천 남구 인하대에서 ‘동북아 고대 국제관계와 한민족의 선진 문화 역량’을 주제로 동북아역사재단 학술용역 연구결과 발표회를 연다. 동북공정의 허구성을 밝히는 이 발표회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부분은 네이멍구 츠펑(赤峰) 시 아오한치(敖漢旗)의 싱룽거우(興隆溝)에서 발굴된 토기 인물상에 대한 분석이다.
연구팀에 따르면 높이 55cm인 이 인물상은 상투를 틀고 관모(冠帽)를 쓰고 있다. 상투는 한민족 고유의 특징이다. 상투를 틀 땐 정수리 부분의 머리를 밀었는데(필자주: 이걸 배코라 부른다. 학창시절 일부학생들이 선생님들의 두발검사에 반항한다고 머리를 빡빡 밀고 오면 배코로 밀었다고 말했던 그것이다. 상투를 튼 사람들-한민족-끼리의 싸움이 남북상씨름이다), 이 인물상도 정수리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려 있다. 지금까지 홍산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인물상들은 모두 모자를 쓰고 있는데 중국 한족의 문화유적에선 모자 쓴 인물상이 나온 적이 없다.
인물상이 수행 중인 종교 지도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데 대해 김연성 연구팀장(인하대 경영학부 교수)은 “이 인물이 세속적 권력자와 제사장의 역할을 겸한, 훗날 고조선의 단군왕검과 같은 지도자급 존재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이는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곰 토템족 수행의 문화적 뿌리로 볼 수 있으며, 같은 시기에 중원지역에서는 지도자급 인물의 수행 모습을 묘사한 유물이 발견된 적이 없다는 것.
홍산문화(기원전 4700년∼기원전 3000년 추정)는 1980년대부터 유적과 유물이 꾸준히 발굴되고 있다. 홍산문화를 포함한 요하문명은 만주에 흐르는 요하 주변에서 발원한 신석기·청동기 문명으로, 중국 문명의 기원인 황하(黃河)문명보다 1000년을 앞서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은 요하문명을 중화문명의 발상지로 만들려는 ‘중화문명탐원공정’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 인물상은 그 과정에서 발굴됐다.
복기대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 국학과 교수는 “중국이 홍산문화에 관심을 갖기 전인 1980년대 초까지 홍산문화는 북방인들의 문화로 간주됐다”며 “이번에 발견된 인물상을 계기로 홍산문화가 다시 북방인들의 문화로 인식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날 발표자로 나서는 남창희 인하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중국 허난(河南) 성 하나라 이리두 유적과 고조선의 핵심 지역으로 추정되는 네이멍구 츠펑 시의 하가점(夏家店) 하층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조개화폐를 토대로, 당시 하나라보다 고조선이 선진적인 국가역량을 갖췄을 것으로 추정한다. 남 교수는 “하나라는 내륙 국가였기 때문에 바닷가에서 귀하게 채집되는 ‘카우리(개오지·조개의 일종) 화폐’는 해양세력이 유통시킨 화폐로 추정된다”며 “한민족은 신석기 시대부터 고래를 잡는 등 해양성이 강한 반면 하나라 유물에서는 해양활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국가 간 무역에 통용되는 기축통화를 공급하는 국가는 강대국인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설명했다.
이성규 단국대 몽골학과 교수는 발해문자와 거란문자의 유사성에 주목해, 거란이 고구려식 한자 표기법을 계승한 발해의 문자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신성미 기자
“우리와 동일한 뿌리지닌 민족”… 손성태 배재대 교수 논문 집필
멕시코 동쪽 베라크루스 주에 기원후 1세기 세워진 석상의 태극문양. 태극문양이 우리 조상이 이리로 이동해 정착한 뒤 전한 것이라고 손성태 교수는 주장했다. 배재대 제공
(필자주: 손성태 교수는 아즈텍의 후손들을 직접 찾아가 그들에게 남아 있는 언어와 현재 우리가 쓰는 언어의 유사성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나', '너', '우리' 등등 공통점이 굉장히 많다. 또한 몇 년전 알래스카에서 온돌 유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온돌은 오직 우리민족의 고유 문물이다. 즉 아메리카 인디언은 고대에 우리와 같은 혈통을 지닌 사람들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우리 민족의 ‘태극(太極)’의 기원은 중국 송나라 주돈이의 태극도설보다 1000년 이상 앞서고 멕시코의 조각상 등에 이를 보여주는 흔적들이 남아 있다는 이색 주장이 제기됐다.
멕시코에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아즈텍(Aztec) 족이 한민족이라고 주장해 온 배재대 손성태 교수(스페인중남미학과)는 10일 서울 KT 광화문빌딩에서 열리는 유라시안네트워크 특강에서 발표할 논문 ‘고대 우리 민족의 상징과 태극의 기원-멕시코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태극’을 통해 이 같은 주장을 펼칠 예정이다.
우리 태극기는 1882년 조선 고종 때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으로 가던 박영효가 배 안에서 태극팔괘기를 바탕으로 만들었고 그 태극팔괘기가 중국 3황의 하나인 태호복희의 8괘와 11세기 주돈이가 창안한 태극도설의 태극 모양을 본떴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손 교수는 “우리 선조들은 음양태극을 이미 기원전 독자적으로 만들어 민족의 상징으로 삼았다”며 “마치 고리를 닮은 태극문양이 삼국시대의 많은 유물과 고려 태조 왕건이 개성 수창궁 용머리 조각상 등에도 새겨져 있다”고 말했다. 이어 “멕시코의 기원전 돌 거울과 석상 등에도 태극문양이 남겨져 있는데 이는 이곳으로 이동한 우리 민족이 남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원전 10세기부터 우리 민족이 캄차카 반도와 알류산 열도, 알래스카를 거쳐 북미와 남미에 정착했고 이런 민족 이동은 3∼7세기 절정을 이뤘다는 것이다.
손 교수는 논문 ‘라틴아메리카로 건너간 우리 민족의 문화적 문헌적 증거-아즈테카인, 그들은 상투한 백의민족이었다’에서도 아즈테카인이 남긴 문헌이나 유물을 조사해본 결과 이들은 흰색을 숭상하고 흰옷을 즐겨 입었다. 우리의 전통놀이와 똑같은 윷놀이와 굴렁쇠놀이를 하고 금줄과 성황당, 창포로 머리 감기 등의 풍습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지명훈 기자
“한민족 백두산 숭배-문수보살 신앙… 여진족이 전승해 ‘만주’ 용어 나와”
동아일보 2009-12-24
조법종 교수 논문… 中 ‘장백산 문화론’ 반박 근거될 듯
‘만주(滿洲)’라는 용어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우리 민족 고유의 산악숭배신앙의 산물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는 최근 중국 학계가 만주족의 발상지를 장백산(백두산)으로 설정하고 백두산과 관련된 문화를 중국의 문화로 편입시키려는 ‘장백산 문화론’을 반박할 수 있는 주요 논거가 될 수 있어 주목된다.
조법종 우석대 교수(고대사·사진)는 이 같은 내용의 논문 ‘한국 고중세 백두산신앙과 만주명칭의 기원’을 다음 주 발간되는 ‘한국사연구’에 발표한다.
조 교수 연구의 핵심은 고구려와 고려의 백두산 산악숭배와 불교의 문수(범어로는 ‘만주슈리’)보살 신앙의 결합으로 이뤄진 문화전통이 여진족에게도 전승돼 청 건국 이후 청 태종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용어로 ‘만주’를 선택하게 됐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고려와 통일신라, 고구려로 거슬러 올라가며 문헌 속에 숨어 있던 문수보살과 시기별 산악숭배 신앙을 추적했다.
화엄경에는 ‘문수보살이 동쪽의 다섯 봉우리가 있는 산(오대산)에 살았다’는 이른바 오대산 신앙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문수보살과 관련된 이 오대산 신앙이 고구려와 통일신라, 고려 등에서 산악숭배 정신과 결합하면서 자국의 동쪽에 있던 백두산(고구려와 고려), 태백산(신라)을 오대산으로 여기며 숭배해 온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했다.
조 교수는 “고려시대 묘청이 난을 일으키기 전인 1131년 평양에 대화궁을 짓고 그 안에 팔성당이라는 신전을 지으면서 8명의 신을 모셨는데, 그 첫 번째 신 이름이 ‘호국 백두악 태백선인 문수사리보살’로 백두산과 문수보살 숭배 신앙의 결합을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준다”고 소개했다.
이런 전통이 여진에게도 그대로 전승됐기 때문에 1635년 청 태종이 자기 종족의 이름을 여진에서 만주로 바꿀 수 있었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한족과 차별화하고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자신들이 숭배해 왔던 문수(만주)를 종족의 이름으로 선택한 것”이라며 “중국의 어떤 종족이나 국가도 백두산과 문수보살을 결합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현재 중국에서는 만주족 대신 ‘만족(滿族)’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장백산문화론을 부각시키고 있다. 중국이 만주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 것은 청 제국과 연관된 역사적 배경과 일본 괴뢰정권인 만주국에 대한 나쁜 기억 때문이다.
조 교수는 “만주라는 용어의 연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결국 백두산에서 기원한 여진족의 모태가 고려, 통일신라, 발해, 고구려로 소급된다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허진석 기자
[윤명철 교수의 고구려 이야기]<12>바다를 제패한 아시아의 바이킹, 발해인들
동아일보 2014-06-03
윤명철 동국대 교수중국은 동북공정을 추진하면서 ‘발해는 당 왕조가 관할한 소수민족 지방정권(渤海是我國唐王朝轄屬的少數民族地方政權)’이라고 했다. 심지어 초기 국호를 ‘말갈국’이라고 했다. 역사를 뒤엎는 궤변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의 역사서 속일본기(續日本紀)의 기록을 보자. ‘고제덕 등 8명 고려의 사절들이 출우국(出羽國·현재 일본 혼슈의 아키타 지방)에 도착했다. 성무천황이 영접사를 보내 모셔다가 극진히 대접하고, 국서를 주었으며 이후 정중히 돌려보냈다.’
때는 서기 727년, 발해 2대 임금인 무왕(武王)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본문 첫머리에 나온 고려는 발해를 가리킨다. 무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를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고 칭했다. 국서에는 ‘발해가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復高麗之舊居 有夫餘之遺俗)’는 선언이 기록되어 있었다. 일본국도 발해에 파견하는 사신을 ‘견고려사(遣高麗使)’라 불렀다. 이런 사실들을 보면 발해의 첫 국호는 진(振, 震)국이면서 동시에 ‘고려국’이었을 것이다.
○ 日에 공식사절만 34회 파견
발해는 698년부터 926년까지 228년 동안 존속했으며 해동성국(海東盛國·바다 동쪽의 전성기를 맞이한 나라라는 뜻)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들은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를 계승하면서 부활했다. 자의식이 강해서 ‘하늘의 자손’임을 표방했고, 임금은 신라와 달리 철저하게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발해는 강대국이 되기 위해 해양력을 강화시켰다. 732년 9월에 발해의 해륙군이 당나라를 침공한 기록이 있다. 이때 장문휴(張文休)는 수백 척의 배를 거느리고 압록강 하구의 박작성(단둥 시)을 떠났다. 요동반도 해안에 이르러 은밀하게 항해하다 산동반도의 등주항에 상륙했는데 전광석화 같은 상륙작전으로 자사(刺史)인 위준(韋俊)을 살해하고, 최대의 해군기지였던 등주성을 점령했다. 그 후 발해는 황해 북부 항로를 이용하면서 제나라(고구려 유민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산동반도를 장악한 후 세운 나라)와 말 무역을 벌였다.
발해인들은 고구려인들처럼 돛단배를 타고 동해를 건너 일본을 다녔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220여 년 동안에 공식적인 사절만 무려 34회 파견했고, 기적 같은 일이지만 746년에는 1100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건너가기도 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8세기, 동아시아는 21세기처럼 갈등과 충돌의 냉전 시기였다. 발해는 신라와 국경 분쟁을 일으켰고, 일본은 신라의 일본열도 상륙을 두려워하면서 ‘신라정토론’을 선언하고 본격적으로 전쟁 준비를 했다. 신라 또한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통일신라를 남북에서 압박하던 두 나라는 자연스럽게 ‘발일(渤日)동맹’을 발동시켰다. 이 과정에서 동해를 건너 사신들이 오고 갔다. 특히 일본은 발해의 도움을 절실히 원했다.
그러다 냉전이 끝나면서 무역과 문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100명이 넘는 인원이 승선한 2∼4척의 선단들이 쉴 새 없이 동해를 건넜다. 일부는 현지에 남아 곳곳에 세워진 객관이나 객원에 몇 달씩 머무르면서 장사를 하기도 했다. 일종의 보세구역이었던 셈이다.
발해인들은 담비가죽, 호랑이가죽, 표범가죽, 말곰가죽, 명주나 철, 동 같은 고도의 기술 상품과 꿀, 인삼, 다시마 같은 토산품을 수출했다. 해표피(바다표범가죽), 해상어 등으로 만든 수공업 제품은 물론이고, 대모배(玳瑁杯·동남아산 붉은 바다거북 껍데기로 만든 술잔) 등 남방 물품까지도 중계무역을 했다. 물론 귀국할 때는 수은, 면 등을 사갖고 와서 팔았다. 871년에 양성규가 사신으로 왔을 때에는 일본 왕정에서 지불한 돈만 40만 냥이었으니 귀족이나 관리, 일반인들이 지불한 금액까지 합하면 엄청났다.
무역 역조 현상은 일본 국가 재정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래서 발해산 모피 착용에 대한 규제를 발동시키기도 했고 사신들은 12년마다 한 번씩 오도록 제한했으며 1회 인원수도 105명으로 묶었다.
○ 동아시아 최초 동해무역권 성립
발해인들은 동아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본격적인 동해무역권을 성립시켰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초기에는 소규모 인원이었지만 점차 100명이 넘고, 359명(779년)이 온 적도 있었다. 739년에는 전원이 죽는 참사가 발생하기도 했고 776년에는 187명 가운데에서 46명만 살아 돌아왔으며 786년에는 표류하다가 65명 가운데 12명은 원주민에게 죽고 나머지 53명만 생존한 일도 있었다. 그 후로도 이런 비극은 되풀이됐다.
일본 학자들은 우리 역사와 문화를 축소하기 위해 그동안 발해의 배가 작고 난파 사례가 많은 점을 들며 발해의 조선술과 항해술이 뒤떨어졌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도 발해의 역사와 과학기술을 깊이 연구함이 없이 그들의 주장을 추종해 왔다는 점이다.
발해인들은 2, 3번의 예외를 두고는 대부분 음력 10월에서 음력 1월 사이에 동해를 건넜다. 뒷바람인 북서풍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겨울의 동해는 수온이 낮고, 폭풍이 몰아칠 땐 풍속이 초속 20m 이상이며, 파도는 5m가 넘어 항해가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107만 km²에 달하는 망망대해라서 고도의 천문항법(태양, 달, 별 등과 같은 천체의 고도와 방위를 관측하여 선박의 위치 및 항로를 측정하는 항법)이 필수적이다.
그래서 일본은 동해를 건널 엄두조차 못 냈다. 200여 년 동안에 겨우 9회, 그것도 답례사라는 명목으로 함께 갔다. 심지어 당나라에 파견한 사신들도 때로는 발해 배를 얻어 타고 다녔다. 물론 사신단에는 고려씨(高麗氏)를 비롯해 항해사 등 고구려 유민들이 다수 타고 있었다.
○ 모험심-도전정신 뛰어난 고구려의 후예
발해는 우리 역사에서 잊혀진 나라, 실체가 불분명한 안갯속에 싸인 나라로 취급되어 왔다. 하지만 총 228년을 존속한 그들은 무역과 경영 능력이 뛰어났으며, 모험심과 도전정신, 비극적인 상황에 굴복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을 갖춘, 명실상부한 고구려의 후속 국가였다. 또 목숨을 내걸고 험한 바닷길을 건너다니던 아시아의 바이킹이었다.
그들은 함경도 해안, 연해주의 크라스키노, 블라디보스토크, 나홋카 등의 해안을 출항하여 일본 열도 북쪽의 아키타 현에서 남쪽 규슈 지방에 이르기까지 모든 항구에 도착했고 아무르 강(흑룡강) 하구나 주변의 항구들을 출항하여 타타르 해협을 넘어 사할린과 홋카이도(北海道)에도 도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호츠크 해 어느 마을에서 발해인들의 자취가 발견될 날을 고대해본다.
정치 군사적으로 중요한 동해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경제 중심 지대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옛날 발해 영토인 연해주를 놓고 갈등을 벌이고, 쿠릴 열도에서는 러시아와 일본이 영토 분쟁 중이다. 그리고 중국은 두만강 하구인 나진선봉을 통해서 동해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미래를 향한 국가 전략의 재설계가 절실한 시대다. 그 무엇보다도 동해를 누비고 일본 열도로 세력을 확장했던 발해의 웅장한 스케일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윤명철 교수
강인욱 경희대 교수 “한민족 기원은 시베리아 유목민이 아닌 고조선 농경민”
김상운 기자 2015-06-11
아르잔 1호 고분-랴오둥 강상묘, 강인욱 경희대 교수 비교 분석
시베리아 남부의 아르잔 1호 고분(위 사진)과 랴오둥 반도의 강상묘 전경.
두 곳 모두 족장급 무덤을 중심으로 주변 무덤이 방사형으로 배치된 집단묘 형태를 띠고 있다.
강인욱 교수 제공
《 우리 민족의 조상이 시베리아 유목민이라는 북방기원설은 사실이 아니며, 기원전 8∼9세기 고조선이 동시대의 스키타이 문화와 대등한 수준에서 교류했다는 주장을 담은 논문이 나왔다. 강인욱 경희대 교수는 최근 발표한 ‘스키토-시베리아 문화의 발생과 동북아시아의 청동기시대’ 논문에서 러시아 시베리아 남부의 아르잔(Arzhan) 1호 고분과 중국 랴오둥(遼東) 반도 남쪽 끝에 있는 강상묘(崗上墓)를 비교 분석했다. 》
그에 따르면 아르잔 1호 고분은 기원전 9세기경 조성돼 흑해 연안보다 발생시기가 앞서는 스키타이 문명의 기원지. 그런데 비슷한 시기(기원전 8세기)에 만들어진 고조선 문화의 강상묘가 아르잔 1호 고분과 일부 유사한 특성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유사점은 두 고분 모두 한가운데 족장급의 무덤을 먼저 만든 뒤 이를 중심으로 친족이나 측근의 무덤을 방사형으로 배치한 ‘집단묘’ 형태라는 것이다. 예컨대 아르잔 1호 고분은 지름 120m, 높이 3∼4m의 대형 봉분 안에 통나무로 사방을 두른 목곽이 70여 개나 들어 있다. 이들은 중앙 목곽을 중심으로 마치 거미줄처럼 뻗어 있다. 강상묘 역시 동서 19m, 남북 20m의 직사각형 무덤 안에 중앙 석곽묘를 중심으로 23개의 석곽이 들어서 있다. 강상묘에서는 총 144개체의 인골이 출토됐다.
중심부를 둘러싼 주변 묘역이 서로 다른 집단에 의해 점진적으로 채워진 점도 비슷하다. 특정 구역은 빈 공간이 많은 데 비해 다른 구역은 무덤을 조성할 공간이 부족해 목곽이나 석축을 덧댄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개별 구역에서 나온 청동기 등 부장품의 종류가 조금씩 다른 것도 여러 집단이 함께 무덤을 만든 사실을 뒷받침한다. 강 교수는 “두 문화권에서 느슨한 형태의 부족 간 통합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며 “두 고분의 유사성은 고조선 문화권이 시베리아 주변 초원지대와 교류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유목민이 만든 아르잔 고분과 농경민이 조성한 강상묘는 2000km 넘게 떨어진 두 곳의 거리만큼이나 본질적으로 다른 구조를 지닌다. 아르잔 고분이 통나무로 주변을 두르고 측신굴신장(側身屈身葬·마치 말을 타는 형상처럼 피장자를 옆으로 비스듬히 뉘어 매장하는 것)의 매장법을 취한 반면, 강상묘는 돌로 석축을 쌓고 시신을 화장했다. 이는 두 문명이 비슷한 시기에 독립적으로 존재한 별개의 문화권이라는 점을 시사한다는 것. 시베리아 유목민이 한민족의 뿌리라는 북방기원설이 성립될 수 없는 셈이다.
기원전 8∼9세기 무렵 두 지역에서 비슷한 유형의 사회적 변환기를 맞았다는 정황을 보여주는 흔적도 나왔다. 아르잔 고분과 강상묘에서 비파형동검처럼 발달된 청동기가 등장했고, 이후 조성된 무덤에서 권력집중이 심화되는 경향이 공통적으로 발견된 것이다. 예컨대 아르잔 1호에 뒤이은 아르잔 2호 고분과 강상묘 다음의 누상묘(樓上墓)는 무덤의 전체 규모가 거대해졌지만, 내부의 무덤 수는 오히려 줄고 부장품은 더 풍부해졌다. 느슨한 부족연합체에서 특정 집단의 지배층으로 ‘권력 쏠림’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강 교수는 “기원전 8∼9세기 시베리아와 랴오둥 지역이 비슷한 사회발전 단계를 겪었다는 사실은 시베리아 유목민이 한민족의 기원이 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실증한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첫댓글 오 자료 감사합니다.,
좋은글 잘봤습니다.
상투 형식은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도 합니다. 진시황릉에 나오는 흙으로 빚은 큰 토우 의 머리 모양을 보세요...
진시황릉에서 남동쪽으로 1.5km 떨어진 지하 4~5m에서 병마용갱이 발굴되었는데 전차전의 전투대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실물크기의 진흙상과 말이 6000개가 있었는데 최근 진씨왕과는 무관한 초나라것이고 초나라는 동이계열의 영향을 받았다고하는 논문이 발표된적이 있다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