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시대 (Cell)성도에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6월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께 충성하는 달☜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害)를 받지 아니하리라(계2:11)
계2:12-17절) 순결을 잃은 교회
옛날 우리나라 여성들은 순결(純潔)을 생명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딸이 시집을 가게 되면, 어머니는 딸에게 조그만 은장도(銀粧刀)를 하나 주십니다. 즉 이 칼은 혹시 누군가가 와서 겁탈하려고 하면,‘네 가슴을 찔러서 죽으라’는 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서양의 사고방식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는성적 순결(純潔)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십대들이 불륜(不倫)을 저지르고 임신하여 태어난 아기를 살해하여 버리는 살인죄까지 저지르고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십대가 성적인 순결(純潔)을 가지고 있으면, 게이(gay)라고 놀리기 때문에 원치 않아도 성적 순결(純潔)을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서구 사람들이 예상치 못했던 세력(勢力)이 곧 이슬람입니다. 이슬람사람들은 이런 서구의 타락(墮落)한 성 문화를 사탄(詐誕)의 사고방식이라고 해서 적대시하고 있습니다.
성적 순결(純潔)은 인간의 자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약속인 것입니다. 아마 이 세상에서 남자나 여자나 성적 순결(純潔)없이 자유분방하게 사는 사람들을 존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서구에서도 워낙 지금은 동성연애자들이 많기 때문에 드러내어 놓는 것이지, 자기 스스로도 존귀하다고 생각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적 순결(純潔)만이 아니라,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든지, 자신의 순결(純潔)을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예)학교 선생님은 선생님으로 지켜야 할 순결(純潔)이 있고, 목회자는 목회자로써 지켜야 할 순결(純潔)이 있고, 의사는 의사로서 지켜야 할 순결(純潔)이 있습니다.
옛날에 교인들이 가지고 있던 목사의 이미지는 너무나도 가난한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교인들이 전부 가난하니까 목사도 가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대신 교인들은 목사님을 너무나도 존경했고, 어려워하였으며, 목사님이 집에 한번 심방을 오시는 것을 교인들은 굉장히 기쁨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밭에서 따가지고 온 호박잎이나 고추를 가지고 대청마루에 앉아서 보리밥을 맛있게 드시는 목사님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전통적으로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목회자의 모습은 목자(牧者)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10:11절)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즉 목자(牧者)는 늑대나 도둑들이 양들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정신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양들을 지키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목회는 심방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고, 심방으로 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교인들의 지적(知的)수준이 아주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교인들이 옛날같이 농사나 짓는 양들이 아닙니다. 이제는 교인들의 수준이 아주 높아지게 되었고, 또 세상에서 아주 다양한 직업에서 매일매일 수많은 문제에 부딪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목회자에게도 많은 것을 기대하고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설교도 잘 해야 하고, 기도해서 병을 낫는 능력도 있어야 하고, 음악도 잘 해야 하고, 사회봉사도 잘 해야 하며, 세상적으로도 유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많은 목사들이 지성인들이나 부자들이 많이 모이는 지역에 멋진 교회를 맡아서 담임하면서 최고급 차를 타고 다니고, 사회의 아주 유명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성공한 목회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사실 요즘은 유명한 교회 목사님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 이상의 대접을 받고, 텔레비전 방송의 탤런트 이상으로 인기가 있고, 수입도 높으며, 외국도 뻔질나게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는 교인들이 자기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 보다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느냐?는 정체성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제는 목회자가 단지 교인들이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도록 붙들고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목사는 성경에 있는 지혜와 능력을 교인들에게 제공해 주어서 어두운 새상에서 죄를 이길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목사는 절대로 팔방미인이 될 순 없습니다. 목사는 오직 한권의 책(성경)에 헌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사는 오직 성경의 진리(眞理)로 교인들이 심령부흥이 일어나게 해야 하고, 세상의 죄와 유혹(誘惑)을 물리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목사가 세상(世上)의 성공을 탐하고 돈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보다는 인간의 방법으로 목회를 한다면, 그는‘순결(純潔)을 잃은 목회자’인 것입니다.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 중에서 목회자들이 세속화된 대표적인 교회가 버가모 교회였습니다. 소아시아의 지도를 보면, 밑에서부터 수직(垂直)으로 에베소→서머나→버가모 순으로 도시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역사가(歷史家)는 말하기를 버가모가 소아시아에서 가장 뛰어난 도시였다고 칭송을 했는데, 그 이유는 로마에 항복하기 전, 헬라 문화가 가장 꽃피웠던 곳이라고 합니다.(世上)
버가모에는 무려 20만권의 장서(藏書)를 갖춘 도서관이 있었는데, 이 버가모가 로마에 항복을 하면서 가장 열렬하게 로마를 추종(追從)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버가모가 얼마나 로마에 과잉충성을 했는가 하면, 황제가 아직 살아 있는데도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神殿)이 두 곳이나 세워질 정도였고, 황제숭배 운동이 가장 적극적으로 일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버가모를 정신적인 창녀(娼女)로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면 버가모는 로마에 항복하기 전에 헬라 문화를 꽃피웠고, 최고로 많은 장서(藏書)를 가진 도서관을 가진 도시였는데, 로마에 항복을 한 후는 전혀 자존심을 지키지 못하고, 로마에 무릎을 굵고 엎드려서 시키지도 않는 황제숭배로 로마에 아첨(阿諂)을 한 도시입니다.
그래서 이 버가모에는 교인들 사이에 극적인 대립(對立)의 양상이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즉 버가모에서 세상에 타협하는 목회자나 교인들은 사회에서 아주 우대를 받고, 귀족과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거기에 비하여 세상에 타협하기를 거부하는 목회자나 교인들은 가난했고, 핍박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순교를 당하는 일까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세상(世上) 사람들이 보기에는 신앙 때문에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핍박을 받고 심지어는 순교(殉敎)까치 당하는 사람들은 고집스러운 자들이었고, 융통성이 없는 미련한 자들도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변절(變節)한 자들을 칼로 치시는 여호와의 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눈에는 세상과 타협해서 호의호식하고 존경받는 목회자들이야말로 구약 시대 모압 왕에게 매수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咀呪)하려고 했던 발람과 같았던 것입니다.
버가모에는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예수님의 16절)...입의 검(劍)으로 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Ⅰ.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분(상)
우선 버가모 교회에 대하여 예수님은‘좌우에 날선 검(劍)을 가지신’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옛날 좌우에 날선 검(劍)을 가진 사람의 이미지라면, 검투사(劍鬪士)라든지, 아니면,장군(將軍)의 모습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에 대하여 적(원수)과 싸우는 검투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2:12절)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劍)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예수님께서 좌우에 날선 검(劍)을 가진 분으로 말씀하실 때, 우리는 구약 성경의 두 가지 사건을 기억하게 됩니다.
하나는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넌 후, 여호와의 군대 장관을 만났을 때의 모습입니다.
여호수아는 기적으로 요단강을 건넌 후, 여리고 평지에서 다른 어떤 일보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순종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행하게 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요단강을 뒤에 두고 할례를 행했다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의 무모(無謀)할 정도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순종을 했습니다. 이때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城)을 돌아보다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장수(將帥)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분이 곧‘여호와의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군대 장관은 칼을 빼어 들고 서 있었는데, 여호수아에게‘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발에서 신을 벗는 것은 종들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使者)는 여호수아에게 ‘너는 나의 종이니까 네 마음대로 행동하지 말고. 오직 나의 명령대로만 행하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가득한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을 여호수아가 할 일이라고 하시지 않고, 하나님 자신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世上)에서 공부하고, 장사하고, 직장 생활하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니라,모두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발에서 신을 벗어야’합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뒤만 따라가야 승리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칼에 먼저 맞을지도 모릅니다. 찬송가 449장 *예수 따라가며*
또 하나의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했을 때, 발람이라는 선지자의 경우입니다.
발람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咀呪)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모압 왕 발락의 돈을 받고 싶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咀呪)하기 위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발람이 길을 가는 중간에 나귀가 앞을 가지 못하고 멈추어 서 버렸습니다.
그래서 작대기를 가지고 나귀를 때렸더니, 나귀가 앞으로 가지 못하고, 옆으로 피하면서 발람의 다리에 상처가 나게 했습니다. 발람은 너무나 화가 나서 나귀에서 내려서 나귀를 때렸습니다. 그때 나귀가 갑자기 말을 했습니다. 즉 나귀는 발람에게‘왜 나를 때리느냐’면서‘앞을 보라’고 했습니다.
발람 선지자 앞에서는 여호와의 사자(使者)가 칼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자(使者)는 돈에 매수(買收)되어 죄를 지으러 가는 선지자를 치기 위해서 길을 막고 서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여호와의 사자(使者)를 나귀는 보았지만, 선지자는 보지 못했습니다. 즉 돈에 매수(買收)된 선지자는 나귀보다 더 눈이 어두웠던 것입니다.
여기서‘좌우에 날선 검(劍)’을 빼어 들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은 세상(世上)의 욕심(慾心)에 마음이 빼앗겨서 타락(墮落)된 길로 가는 주의 종들을 치시기 위한 칼이며, 또 한편으로는 교회 안에서 세상(世上)의 타락(墮落)한 풍조(風潮)를 끌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치시기 위한 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상숭배(偶像崇拜)와 음행(淫行)으로 더렵혀진 이 세상(世上)을 여호수아의 칼날로 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교회를 절대적으로 순결(純潔)하게 지키기 위하여 칼을 빼어 들고 지키시는 장수(將帥)의 모습을 하고 계십니다.아-멘
찬송가 420장 *너 성결키 위해*
※새벽(夏)4-5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집시다.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7)
6월 25일 거룩한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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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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