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들어 첫 날인 오늘 아침에 나는 대영 박물관에서 아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즈음은 관광 비수기라 그런지 시내에는 그다지 관광객이 많이 보이지 않았는데 역시 대영박물관은 달랐습니다.
궂은 날씨에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관람객들로 넘쳤습니다.
익숙한데로 박물관 정문 입구를 지나 왼쪽 계단을 통해 이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사람들을 따라 발길을 옮기다 보니 어느덧 그리이스관이었습니다. 박물관내에서도 인기가 있는 방이므로 매우 북적거렸습니다.
복잡한 가운데서도 어느 자그마한 할머니 한 분이 젊은 아주머니 대 여섯 명을 앞에 두고 무엇인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한눈에 봐도 일본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처럼 생긴-지금 생각해 보면 혹시 진짜 그 분인지도 모를 일입니다만- 강사가 일본어로 설명하면 열심히 받아 적고 하는 모양새가 모두들 너무나 진지하였습니다.
나는 행여 그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조심스레 다가갔습니다. 호기심에 가만히 들어보니 와인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부스안을 살펴보니 속에 있는 기다란 그릇들은 모두 그 당시 와인을 담아 놓았던 항아리Wine Jug들이었습니다. 넓적한 대야 모양의 그릇은 와인을 식히는 와인 쿨러였는데 부스안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주전자 모양의 그릇 하나는 작은 오리 주둥이 형태의 출구를 세 방향으로 엇갈리게 놓고 손잡이 부분을 제외한 한 방향으로만 나오게 만들어져 있었고 와인 쿨러라고 설명되어 있는 그릇은 와인저그 세개가 들어갈 수 있도록 삼각원 형태로 되어 있었습니다. 와인의 탄생지 답게 모두 지금으로부터 2500여년 전에 사용하던 와인에 관계되는 그릇들이었습니다.
가만히 그 곳을 빠져 나와 유럽관으로 향했습니다. 46번방으로 기억됩니다만 들어가자마자 좌우에 온갖 금은 장신구와 조각품들이 빼곡히 들어 차있어 숨을 막히게 하는 그런 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와 로마관을 제외한 다른 유럽 국가들의 유물을 전시하는 인기 없는 관이라 그런지 실내는 텅 비어 있다시피 했습니다.
방 중간 부위의 사각 기둥이 있는 부위에 한 자그마한 여직원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감색 제복을 맵시있게 빼어 입고 한 손에는 무전기를 거머지고는 조금은 무료한 듯 나를 쳐다 보았습니다. 첫 인상은 50대 중반의 여인으로 보았는데 살펴보니 40대 초반임을 확신하게 됐습니다.
이럴 때는 말을 걸어 주는 것이 예의입니다.
‘이 방에서만 근무하시나요?
’‘아니요, 매일 매일 근무지가 바뀝니다.
’‘그러면 일이 무척 재미있으시겠어요.
’‘예, 보람이 있죠. 근데 어느 나라서 오셨지요?
’‘한국입니다.’‘아, 그래요. "
"그럼 한국관에는 가 봤어요? 거기에 있는 가옥 모델이 참 인상적이던데…"
’‘네, 내가 어렸을 때 살던 집과 흡사해요. 지금은 많이 사라져 버렸지만..."
’‘혹시 이방에서 찾고 있는 것이 있나요?"
’‘네, 바로 전에 그리이스 관에서 와인 저그와 쿨러를 봤는데, 그런 종류의 것을……"
’‘소믈리에세요?"
’‘아니요, 하지만 요즘 런던 WSET에서 와인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대물리에라고 부른답니다. 소믈리에 보다는 한 수 위라는 뜻도 담겨 있구요"
“대믈리에?"
‘‘ 아, 한국에서 ’소‘라는 접두사는 작다는 뜻이고 ’대‘는 크다는 뜻이라 장난삼아 내 아이디를 그렇게 정했습니다. "
"그런데 왜 소믈리에인지 물어 보세요?."
’‘이 방에 소믈리에라면 관심을 가질 만한 그릇이 있어요. 하지만 소물리에가 아니더라도 한국인이라면 더더욱 봐야할 거예요. 같이 가 보시지요."
그녀가 데리고 간 방 한구석에는 유럽 각지의 그릇들이 다른 화려한 보석이나 귀중품에 밀려 초라하게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거개가 단조로운 무늬와 한두 가지의 탁한 색을 사용하여 만든 그다지 눈길을 끌지 못하는 평범한 그릇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그릇 하나가 유독 눈에 띄는 것이었습니다. 무늬와 색상이 다른 것과는 확연히 구별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언가 많이 눈에 익었습니다.
좀 전에 그리스 관에서 보았던 것과 크기와 형태는 아주 비슷했습니다만 그리스 것은 토기로 제작되어 단순한 황토색의 그릇에 그려져 있고 그림도 검은색 일색이었지만 이것은 푸르스름한 색상이 무척 세련되고 그림의 내용도 풍부할 뿐 아니라 도기로 제작되어 윤기도 제법 나는 게 지금 당장 사용하여도 손색없어보였습니다.
상당한 실력의 도공陶工이 만든 것이라 생각되어 졌습니다.
그녀가 다시 말을 걸어왔습니다. “혹시 소믈리에Sommelier의 어원에 대하여 아세요?."
’‘네, 잘은 모르지만 프랑스 말이잖습니까?."
’‘네, 그렇게 알려져 왔지만 사실은 한국에서 건너 온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11세기 초에 프랑스의 북부 론 지방의 한 와인제조 업자가 자기 집에서 만든 와인이 제값을 못 받고 헐값에 팔릴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처하게 되자 자기 아들을 중국으로 보냈습니다. 중국의 훌륭한 도자기 기술을 빌어 와 유리로 된 포도주 병 대신 도자기를 사용하면 고가의 상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답니다.
그리하여 아들이 당시 중국 송나라 윈난성의 한 벽촌에 가서 와인을 담을 도자기에 대하여 연구에 들어갔습니다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였답니다. 그러던 중에 동쪽에 있는 ‘꼬레’ 라는 나라에서 술병을 만드는 기술이 뛰어나다는 소리를 듣고 다시 그리로 갔답니다.
그 나라의 동남쪽 산간 벽지라고 했다던데 이름이 ‘쉬라’라는 곳이었다는 군요.
혹시 그 지방을 아세요?"
’‘네, 아마도 내 생각에는 지방이름이라기 보다는 꼬레가 세 나라를 통일 시키기 이전의 하나의 나라 이름인 ’실라Silla(신라의 영어식 표기음)‘가 와전 된 것으로 보이네요."
“어째튼 그 청년은 그 곳에서 와인과 술병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였지만 그곳에서도 그다지 성과를 내지는 못하였나 봅니다. 그러나 프랑스인답게 끼는 있었는지 천하 미인에다 똑똑하기로 이름난, 게다가 그릇 빚는 솜씨까지 뛰어난 도자기 공장 집 딸과 사랑에 빠졌답니다.
그러나 당시 그 지방에서는 결혼을 하기 전에 총각과 처녀가 한동안 살아보고 난 후에 신부의 어머니가 가부를 결정하는 관습이 있었답니다. 지금도 일부 남아 있는 모계사회母系社會 풍습이 있는 지방이었던 가 보지요.
결혼시에는 특히 신랑될 사람의 생식 능력을 제일 우선시 하였답니다. 자손을 많이 낳기 위한 거겠죠.
하지만 프랑스 총각의 거시기 능력이 시원치 않았는지 몇 달 후 신부될 여자의 어머니가 결혼을 파기를 했답니다.
기술도 사랑도 얻지 못한 프랑스 총각은 빈 손으로 고향에 돌아 올 수 밖에 없었겠죠."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춘 사이 도자기에 대한 영문 설명서를 읽어 보니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었습니다.
'Wine cooler grotesques surrounding a scene of …….'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그 총각이 떠날 때 그 처녀(?)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렇게 떠나신다니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나는 당신을 무척 사랑하였고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어머니의 분부를 도저히 거역 할 수는 없습니다.’”
직원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와인쿨러를 가만히 들여 보면서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그 한국인 아가씨가 '앞으로 신랑없이 어떻게 살아갈지 모르겠다'고 어머니께 투정을 하니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프랑스청년이 그리울 때면 ‘소물리애’라는 단어를 떠올려라‘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헤어짐의 정표로 처녀는 자신이 손수 정성들여 구운 도자기 와인쿨러와 실라 지방 포도 씨앗을 청년에게 건네주었답니다.”’
" ‘소물리애 소물리애,…. 청년은 이 단어를 되뇌이면서 프랑스로 돌아왔고 고향 사람들에게 자신은 한국에서 소물리애로 불리웠다고 말하였답니다.
이 청년은 돌아오자마자 실라에서 가져온 씨앗을 자기 농장에 심었습니다. 햇볕이 뜨겁고 산비탈이 많아 배수가 잘 되는 프랑스 북부 론 지방의 기후나 토양이 한국의 쉴라 지방과 비슷한 조건을 갖추었는지 포도나무는 아주 잘 자라 주었답니다.
물론 그 후 주위 농장에도 묘목을 나누어 주어 요즈음 프랑스 론 지방의 지배적인 포도 품종인 ’시라Syrha'가 되었다는 군요.
그 후에도 청년은 결혼을 하지 않고 가톨릭 교회의 수사가 되어 포도 나무의 재배, 와인의 제조뿐만 아니라 와인과 음식과의 관계 등을 연구 발전 시켜 프랑스 와인 업계에서 내노라하는 유명한 인물이 되었답니다.
그리하여 프랑스에서는 그 때부터 와인 전문가를 소믈리에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고요.“
’그때 가져온 도자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한동안 할말을 잊고 멍한 채로 서있었습니다.
소믈리에와 시라의 어원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듣게 되어 무척 흥분되었습니다.
또 한 그 와인 쿨러에 대한 숨겨진 일화를 알고 나니 더더욱 그 도자기가 사랑스럽고 예뻐보였습니다.
직원은 잠시 머뭇하더니 물어 보았습니다.
"저어, 혹시 한국 옛날 문자를 읽으실 수 있나요?"
’‘네, 어느 정도는요."
’‘그럼 그릇 안에 써 있는 글자를 읽어 보세요. 무슨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하더군요. 나는 잘 모르지만."
나는 찬찬히 그릇을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릇의 안쪽 한 가운데에 서툰 솜씨로 쓴 프랑스어로 된 한 줄의 문장과 함께 청년의 이름인 듯 “Frances Paazit 1012”라고 써있었고 더불어 놀랍게도 달필의 한문으로 된 4개의 글자가 보였습니다.
'小物離愛'.
‘헉!’
나는 갑자기 가슴이 꽉 막혔습니다.
‘무슨 뜻이지요?
’‘네 자세히 설명 드리기는 어렵지만 그 청년이 결혼을 할 수 없었던 이유가 써져 있네요."
그 후에도 한참동안 멍한 채 서있던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 방을 빠져 나오려는데 그 직원이 불러 세웠다.
"가시기 전에 여기 방명록에 몇 자 적어 주셨으면 고맙겠어요"
나는 그 방을 나오면서 방명록에 아래와 같이 소감을 적었습니다.
'아, 아깝다! 그 때 내가 필요했었는데…….
대영박물관에서 2007년 4월 1일 大物利愛 씀.'
첫댓글 '세상에 이런 일이'와 'VJ특공대' 방송에 나올 법한 사건입니다
확인할 길 은 없으나 ...大物 로 理解 되오며... 저 또한 대물리애 님의 아깝고 애석한 마음을 깊이 통감하는 바입니다 (근데, 왜 영화배우 이대근이 생각나는걸까 ㅋ!!)
소물은 사랑을 떠나게 하고, 대물은 사랑을 도운다니.. 그렇담 중물이라믄 워찌 되는 거니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