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말디니에 비해 스팟라이트를 덜 받았던 홍명보가 드디어 그의 진가를 세계에 발휘하고 있습니다..
펠레를 비롯한 유력인사들도 홍명보선수를 극찬 하더군요..
홍명보가 4살정도만 젊었어도... 유럽으로 가는건데...
하여간, 말디니-홍명보 아쉽네요.. 좋은 라이벌이 될수도 있었는데..
--------------------- [원본 메세지] ---------------------
"사커라인"에서 ahm님의 글을 퍼왔습니다.
2002년 6월 18일.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며 로비[Roberto Baggio]를 떠올렸다.
불교에 심취해 있는 그는 이 나라를 몇 차례 방문했었고
무척 아름다운 나라라고 얘기했었다.
그러나 처음 방문한 이곳의 자연과 문화를 즐길 시간은 아마도 없을 것 같다.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경기와 경기, 그 사이의 훈련이 이어질 것이며
한시도 긴장은 늦추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결승에 오르게 되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도중에 탈락한다면.. 곧장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오르게 될 것이다.
어제 훈련이 끝난 후 94년 월드컵 결승 테잎을 봤다.
이미 여러번 돌려 봐서 외우다시피 한 경기지만 어제의 내게는
그 경기 속의 한 사람이 꼭 필요했다. - Franco Baresi.
골이 하나도 나지 않은 경기였고 지루하다는 비난이 많았던 경기지만
그날의 프랑코가 - 비록 승부차기에서 실축했다고 해도 - 최고였다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었다.
그때의 나는 아직 젊었었고 최초로 서는 월드컵 결승 무대에 흥분해서
주위 사람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노쇄한 데다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던 그에게 보내지는 우려의 시선들 속에서,
경고누적으로 결장하는 빌리[Alessandro Costacurta]를 대신해 그 대회 처음으로,
그의 생애 마지막이 될 월드컵 경기에서 나서는 프랑코의 기분은 어땠을까?
나는 이제 그의 나이가 되었고, 마지막 월드컵 무대에 나섰다.
이번 대회 예선에서 나는 부진했다.
심판 판정에 많은 문제가 있기도 했지만, 우리 팀 역시 그리 좋은 경기를
하지는 못했고 좋지 않은 성적으로 겨우 예선을 통과할 수 있었다.
젊은 날에도 항상 좋은 경기만 했던 것은 아니지만
내 나이가 서른을 넘으면서부터는 잘 하지 못한 경기 하나하나를 향해
이제 노쇄한 것이 아니냐는 시선이 보내졌고
나 자신 역시 그런 의문과 불안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사람들은 나를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말하지만
가끔은 '살아있는'보다 더 크게 귓전을 울리는 '전설'이라는 단어가
나를 갑갑하게 옭죄어 온다.
지금 나는 살아서 뛰어다니는 선수 - 전설이 되거나 마는 것은 나중 일이다.
물론 이것은 배부른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지극히 운이 좋은 선수인 것이다.
밀라노 집에 장식되어 있는 그 많은 트로피들보다도
지금 이순간 내가 나의 네번째 월드컵 대회에서 경기에 뛰기 위해
경기장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거한다.
드미[Demetrio Albertini]와 맥스[Massimo Ambrosini]만 해도
부상이 직간접적인 이유가 되어 각각 마지막과 첫번째가 될
이 월드컵을 놓쳐버리지 않았는가.
지난해 12월에 입은 부상이 늦지 않게 회복된 것을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무려, 네번째 월드컵인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모든 시합과 승리가 소중하고
특히나 푸른색 국가대표팀의 유니폼을 입고 한번도 안아본 적이 없는
우승컵을 갈망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이다.
이젠 내 곁에 로비도, 프랑코도, 빌리도 없다.
그리고 오늘은 산드로[Alessandro Nesta]도, 파비오[Fabio Cannavaro]도 없을 것이다.
그들이 둘다 빠진 대표팀 경기를 뛰어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멀리 있는 선수들을 그리워할 감상도,
벤치에 앉아있어야만 하는 선수들을 아쉬워할 여유도 없다.
경기에 나서는 11명이 바로 베스트이며
역시 베스트인 상대팀과 싸워야 한다.
오늘의 상대인 한국은 처음 맞서 보는 팀이다.
선수 개개인을 잘 알지도 못한다.
그들의 감독인 히딩크와 페루지아에서 뛰는 안[안정환]과 홍[홍명보]만이 익숙한 이름이다.
홍을 주목한 건 아버지였다. 98년에 아버지는 홍을 보며
외모나 플레이 방식, 동료들을 대하는 태도 모든 것이 나와 닮았다고 했다.
닮은 건 잘 모르겠지만, 그는 무척 호감가는 선수였다.
나이도 비슷하고 그에게도 이번이 네번째 월드컵이라고 한다.
빅리그에서 뛸 만한 선수라고 생각했지만 왠일인지 그는 유럽에서 뛰지 않았고
상대팀으로라도 함께 뛸 일은 전혀 없었다.
기회가 닿는다면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었지만
이번 만남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다.
경기가 끝난 후 유니폼을 교환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겨우 몇 시간 후라고 해도 그건 정말로 먼 일이다.
경기가 끝난 후에는.. 모든 것이 달라진다.
예선전 테잎을 분석했지만 한국은 알 수 없는 팀이었다.
그들은 빠르고 지칠 줄 모르며 굉장한 투지를 갖고 있었다.
00/01 시즌에 챔피언스리그에서 만났던 잉글랜드 클럽 리즈가 생각나기도 했다.
그런 팀을 다루는 건 힘든 일이다. 게다가 그들의 홈.
홈팀을 상대하는 건 언제나 힘들지만 한국 홈관중의 응원은 상상을 초월했다.
쉽지 않은 경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쭈리의 푸른 유니폼은 그것을 입은 누구에게나 긍지를 심어 준다.
우리는 이기러 가는 것이다.
경기 시작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지만
경기장은 이미 거대한 인파와 환호로 뒤덮여 있는 듯하다.
언제나처럼 나를 흥분시키는 저 광경.
축구가 부르고 있다.
2002년 6월 20일.
시합 당일 밤에도, 어제도 잠을 설쳤다.
파누치가 페널티 박스 안에서 중심을 잃던 광경,
비어있는 골문을 향해 달리는 토마시 뒤에서 울리던 휘슬 소리,
그리고... 내 눈 앞에서 솟아오른 안의 머리를 맞고 골문으로 빨려들어가던 볼.
126번의 대표팀 경기를 뛰면서 나는 몇번의 잊지 못할 패배를 경험했다.
지난 세번의 월드컵 마지막 경기들이 모두 그렇고
유로2000에서의 마지막 1분 역시 수백번 머리 속에서 리플레이 되었다.
지금껏 나는 가장 가슴 아팠던 패배를 꼽으라면
조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패배했던 90년의 준결승을 말해 왔다.
나는 결국 그 아픔을 극복하지 못한 채 월드컵 무대를 영영 떠나게 되었다.
그때와 지금 중 어느 쪽이 더 슬픈가.
더이상 다음이라는 것이 없는 지금, 이 상처는 감히 직면하기도 어렵지만
축구는 그런 것이다. 상처 없이 피치를 떠날 수 있었던 선수는 아무도 없다.
지금 이곳 공항의 기자들이나 국민들의 태도는 꽤 적대적이다.
우리쪽 기자들이나 감독, 동료 선수들의 경기 후의 반응들이
그 경기의 승자이면서 이 대회의 개최국인 저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을 것이다.
경기가 끝난 후 승자에게 축하만이, 패자에게 위로만이 건네진다면 좋겠지만
현대의 축구는 너무나 거대한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
클럽대항전에서도 국가대항전에서도 중요한 경기가 끝나면 무수한 말들이 오간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26번째의, 마지막 경기를 끝낸 지금 나는 쉬고 싶다.
밀라노를 경유해서 로마로 가는 선수단과는 달리
나는 동행한 아내, 아들과 함께 싱가폴로 가기로 했다.
그들은 이탈리아로 가고, 나는 싱가폴로 가고.
앞으로도 나는 더이상 아쭈리와 일정을 함께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88년부터 이틀 전의 경기까지 15년간 나는 아쭈리였지만 이제는 아니다.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엔
푸른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달리던 일이 아득하게 느껴질 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아직은, 15년간의 대표 생활보다도 이틀 전의 패배를 정리하는 일이 벅차다.
축구는 내 인생의 정말 크고도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지금은 나의 소중한 가족들 속에서 잠시 축구를 잊고 싶다.
카메라와 캠코더를 통해 나를 찍고 있는 팬들이 보인다.
세계 어느 곳에든, 내가 적으로서 그곳을 방문했을 때조차
나를 반기고 응원해주는 팬이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축구가 무엇이길래 이 많은 사람들을 움직이는지 새삼 궁금해질 때가 있다.
우리 팀은 한국을 떠나지만 월드컵 경기는 계속 될 것이며
나는 아쭈리를 떠나지만 아쭈리는 영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