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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어머니의 만남
누가복음 1:39-45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성탄이 다가왔다. 오늘은 기다림 초 네 번째를 켜는 대림절 마지막 주일이다. 기다림 초의 주인공은 천사들이다. 이제 기다림이 꽉 찼다. 모레 저녁은 고요한 밤이고, 수요일은 성탄일이다.
성탄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복음서를 보면 마태복음은 요셉을, 누가복음은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 탄생의 의미를 조명하고 있다. 그런데 성탄을 그린 성화들을 보면 아버지 요셉은 들러리처럼 보이고, 어머니 마리아가 단연 돋보인다. 물론 아기 예수님은 말이 없다.
성탄의 스포트 라이트는 늘 마리아를 따라다닌다. 오늘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다. 그 어머니는 아기 예수를 잉태한 처녀 마리아이며, 또 믿는 사람들의 모범이 된 어머니 마리아이다.
예나 지금이나 마리아는 가장 흔한 이름이다.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 중에서 주님의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여성 제자 중에서 가장 많은 이름이 마리아였다. 마리아의 히브리식 이름이 미리암인데 구약 시대에도 가장 흔한 이름이었다. 내 이름이 평범하다고 해서 결코 실망할 일은 아니다.
1)
성경은 성탄에 관한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전한다. 누가복음은 특별한 두 여성의 만남을 전하는데, 주인공은 세례 요한을 임신한 엘리사벳과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이다. 두 어머니의 만남이었다.
교회 전통에서 두 여자의 만남을 ‘성모방문축일’(the Visitation)로 기념하고 있다. 마리아는 천사의 수태고지를 들은 직후 친척 엘리사벳이 사는 곳을 찾아 갔다. 사가랴 부부가 살던 곳은 유대 땅 아인카렘이었다.
마리아가 찾아간 길은 나사렛에서 무려 9일 정도 걸리는 먼 거리였다. 왜 찾아갔을까? 천사가 마리아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친척인 늙은 엘리사벳이 임신한 사실을 알려 주었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눅 1:36).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나타난 놀라운 사건을 나누고 싶었고, 또 천사에게 들은 바 같은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한 엘리사벳과 함께 있고 싶었을 것이다. 마리아가 그곳에 석 달을 머문 것으로 보아 벌써 임신 여섯 달이나 되어 곧 아이를 낳게 될 엘리사벳의 출산을 도우려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어린 처녀에게나, 나이든 여성에게나 얼마나 두려운 일이었을까? 드디어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났다.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39-40).
여기에서 ‘문안하니’(에스파사토)의 뜻은 좋아하다, 환영하다, 경의를 표하다는 의미이다. 두 여성이 만나자마자 서로 포옹을 하고, 크게 반가워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성경이 전하는 수많은 만남의 사건들이 있지만 마리아의 방문과 두 여성의 만남은 극적이다. 두 여자는 하늘의 신비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동병상련을 느꼈을 것이다.
본문을 보라. 두 예비 어머니, 즉 늙은 엘리세벳과 젊은 마리아의 만남은 각각 태중에 있는 두 아기의 첫 번째 만남이 된다. 두 여자의 경우, 한 사람은 임신이 불가능한 할머니 엘리사벳이고, 또 한 사람은 임신해서는 안 될 처녀 마리아이다.
늙은 엘리사벳의 태중의 아들 세례 요한은 과거의 시대를 끝낼 인물이고, 처녀 마리아가 잉태한 하나님의 아들은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열 구원자이다.
엘리사벳은 임신 사실을 6개월 동안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마리아의 수태 사실은 이제 막 시작된 일이다. 두 여자는 서로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누구와도 나눌 처지가 못되었다. 그만큼 상상하기 어려운 놀라운 일이고,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두 여성은 서로 알아보았다. 두 사람은 자기에게 일어난 불가능한 사건 속에서 각각 두려움, 환희, 희망을 공감할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기를 임신하게 됨으로써 일어날 장래가 무엇인지 그 둘만이 서로에게 증언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공의와 자비의 시대를 여시려고 힘없고 소박한 두 사람을 택하셨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비슷한 처지의 두 여성 사이에 강한 연대감을 느끼게 한다. 감동의 연대, 고난의 연대, 희망의 연대였다. 마리아가 석 달 동안 엘리사벳의 집에 머무는 동안 얼마나 서로에게 의지가 되었을까?
2025년 여선교회 월례공과를 집필 하였다. 1년 치 열두 과인데, 열두 가지 열쇠말(키워드)를 주제로 삼았다. 그 첫 번째가 ‘연대’이다. 연대란 ‘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함께 책임을 짐’이란 뜻이다.
젊은 마리아와 늙은 엘리사벳은 사랑으로 연결함으로써 하나님의 역사를 자신의 온몸으로 받아들인 믿음의 모범을 보여준 아름다운 여성들이다. 두 여성은 둘이지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길에서 하나로 연결되었다. 하나님은 사람과 사람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이끄신다.
2)
본문을 유심히 살펴 보자. 지혜로운 엘리사벳은 자신을 방문한 친척 처녀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을 한눈에 알아본다. 복음서는 그 순간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엘리사벳에게서 마치 선지자의 눈빛과 말씨를 느낄 수 있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42-43).
나이 든 친척 어른인 엘리사벳은 앳띤 처녀 마리아에게 “내 주의 어머니”라고 공경하는 태도를 보인다. 얼마나 겸손한 모습인가? 진실한 사람이 진실한 사람을 알아보게 마련이다. 아 그렇구나! 성령께서 엘리사벳에게 충만하게 임재하셔서, 장차 마리아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하여 엘리사벳은 메시야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 태중의 아기에게 찬양을 드린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또 세례 요한과 아기 예수의 첫 만남을 이렇게 소개한다.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44).
엘리사벳은 어떤 사람인가? 그의 남편 제사장 사가랴는 하나님의 초월적 역사를 부인하고, 믿지 못하였다. 그는 천사 가브리엘이 성소에서 전한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눅 1:13)는 말을 믿지 못하였다. 그 결과 지금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엘리사벳은 자기 몸에 나타난 하나님의 표징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그의 몸에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마리아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45).
자기 남편은 겁 없는 남자여도, 거룩한 제사장이어도, 세상 경험이 많은 노인이어도, 주의 사자의 말을 믿지 못하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마리아는 어려도, 여자여도, 시골 처녀여도, 하나님의 뜻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마리아는 하나님이 주님의 일을 성취하시려고 준비한 때를 위해 예비된 사람이다. 마리아는 마치 아브라함처럼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믿음의 원형과 모범이었다. 믿는 자로서, 또 순종하는 자로서 마리아는 그 자격을 인정받았다.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45).
하나님은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는 그 사람을 통해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가신다.
사실 사람을 알아보는 일이 쉽지 않다. 항상 제 이익 여부에 따라 알아보게 마련이다. 그래서 제 눈에 안경이란 말이 생겼다.
늘 한복을 입고, 흰 고무신을 신고, 수염 기르고 다니는 어느 선배 목사가 들려준 이야기다. 그가 부산 고신대에서 학생들의 초청을 받아 강연을 마친 후 학생들이 마련해 준 여관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씻고 막 자리에 들려는 참에 누가 밖에서 방문을 두드린다. 급히 옷을 걸치고, 문을 여니 오십 대의 중년 부인이 찻주전자를 들고 서 있다가, 들어가도 되냐고 하더니 성큼 들어와 물었다. “허고 많은 여관 놔두고 하필 우리 집에 오는 것도 인연인데, 한번 봐주세요.”
그제서야 선배는 자신이 한복을 입고, 수염을 기르고 다녀서 괜한 오해를 샀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어스름 잠자리에서 깬 탓에 짜증도 났지만 워낙 그 여자가 간절한 눈빛으로 부탁을 해서 아뭏든 도사 흉내를 내기로 했다. “그럼 어디 봅시다”하며 자리를 고쳐 앉으니, 여관집 주인이 얼굴을 코 앞에 들이댔다. 중년 여성이 혈색이 고르지 못하고, 안색이 어둡고 불안해 보이더란다. 속으로 생각하니 자기 신세를 봐 달라는 말은 지금 자기 신세가 몹시 어렵다는 말이 아닌가?
“많이 어렵구만... 흠, 뭐가 많이 꼬여 있군...”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여자가 말을 대뜸 받았다. “어머나, 신통하시네. 맞아요, 도무지 일이 꼬여서 되는 일이 없어요. 이 여관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문을 닫게 생겼어요.” 이제 해법을 알려 줄 일이다. “내가 한 가지 방법을 일러줄 터이니 들 보겠소?” 여자가 반색을 한다. “듣다마다요. 그래, 어떻게 신세가 좀 펴질 방법이 있을까요?” 그는 조금 뜸을 들인 다음 여관 주인 얼굴을 응시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을 용서하시오.” 뭐가 꼬였다는 얘기는 결국 사람하고 관계가 틀어졌다는 얘기가 아닌가? 늘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는 법이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여자는 마치 감전된 사람처럼 무릎걸음으로 물러나더니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절대로 그놈은 용서 못해!” 그리고 서둘러 찻잔을 챙겨 들고 방을 나가 버렸다.
요즘 우리 시대의 위기는 믿음이 아닌 미신 때문이다. 정의와 평화,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은 없고, 오죽하면 국가대사에 건진법사니, 천공이니, 예지력이 있다는 미륵보살 명 씨니, 심지어 정보사령관 출신 버거도사까지 등장하였다. 그들은 늘 개 꿈같은 해법을 말한다. 그런 상투적인 미신으로 어떻게 국가의 꼬이고 꼬인 실타래를 풀 수 있을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한다. 우리에게 다시 믿음이 필요하다. 오늘 교회를 향한 말이다. 지금 예수 없는 예수교회가 넘친다. 국민에 대한 믿음, 역사에 대한 믿음, 사랑에 대한 믿음, 평화에 대한 믿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 지금 당장 성탄이 임할 자리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오늘의 교회이다.
3)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서로에게 좋은 상담자였다. 처녀로서 임신을 한 마리아는 얼마나 암담했을까? 천사가 전한 하나님의 말에 순종했지만 9일 동안 아인카렘으로 산길을 걸어오면서 수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어린 처녀 마리아가 홀로 감당하기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내게 일어난 이 놀라운 일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 자기 부모에게 말을 꺼내면 이해하실까? 어림없는 일일 것이다. 약혼자 요셉은 이해할까? 버림받지는 않을까?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만약 동네 사람들이 알기라도 한다면 어떨까? 율법에 따라 돌팔매질을 당할지도 모른다.
마리아에게 긴급한 상담자가 필요하였다. 따듯한 위로자가 필요하였다. 아직 마리아는 어린 처녀였고, 이제 시작일 뿐이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이라면 모두 이해해 줄 것 같았다. 자기가 임신한 후 맨 처음 엘리사벳을 찾아간 이유는 엘리사벳만큼은 자신의 입장을 알아주고 도움을 주리라는 기대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런 마리아에게 친척 엘리사벳은 얼마나 지혜로운 상담자인가? 그이는 가장 따듯하고, 이해심이 많은 가까운 의논자가 되었다. 나는 이런 사람이 내 주변에 있는가? 나 역시 그런 역할을 할만한 존재인가?
엘리사벳이 한 말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45)라는 고백은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까? 오늘 말씀은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가리켜 한 축복으로 절정을 이룬다. ‘믿은 그 여자 마리아’ 안에 모든 믿는 자의 모범인 아브라함의 믿음이 살아 역사한다.
마리아는 자신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인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마리아는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용기가 필요한 일에 기꺼이 동참하였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믿음 때문이다.
우리가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마리아처럼 예수를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새 세상을 잉태하는 일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우리가 성탄을 맞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에 화답하여 이 새로운 질서를 우리 마음에 맞아들이는 일이다. 이제까지의 내가 주인이었던 내 삶의 주인공 자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양보하라. 그래야 내 안에 새로운 창조가 있다.
우리는 성탄에 이렇게 기도할 일이다. 주님, 제가 마리아와 같이 순종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시대를 예비하는 일에 저를 사용하시옵소서.
하나님의 평화가 성탄을 맞는 우리와 함께 하시길, 임마누엘 아기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