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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 <제 193 회>
씬 송도 황궁 외경 (낮)
씬 대전 복도
웃음소리들이 들려온다.
씬 동 대전
왕건이 생각이 많다. 유금필, 오씨, 유씨, 정윤 무도 함께 해 있다. 이들은 차를 마시고 있다.
왕건 술희 아우가 떠난 지 사흘이 되어가네. 지금쯤 철원으로 들어섰겠네 그려.
유금필 그럴 것이옵니다.
오씨 아자개 노인이 아직도 정정하게 살아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옵니다.
왕건 그래요, 사실 워낙에 국정이 바빠서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유씨 호호호...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었사옵니까? 백제국의 황제인 자식을 버리고 고려로 온 노인이옵니다.
왕건 허나 그만큼 개성이 강한 분이라고 할 수 있었지요. 그 성미가 아주 대단했어요.
유금필 하온데 폐하, 술희 아우가 과연 철원에 가서 그 어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겠사옵니까?
왕건 글쎄... 그거야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무 그리고 또 있사옵니다. 견훤왕이 누구이옵니까? 그 스스로 백제를 세운 호걸이옵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을 과연 쉽게 끌어낼 수 있겠사옵니까?
왕건 그건 그렇다.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거의 불가능할 것이야. 허나 백제국에 변란이 일어난 것이 분명하고 견훤왕이 쫓겨나 금산사에 갇혀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는 그저 최대한 할 수 있는 일을 시도해 보자는 것뿐이다. 견훤왕을 위로하고 그의 마음을 움직이고 결국은 우리 고려에 도움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야. 그러자면 아자개 노인의 힘 또한 필요한 것이고...
무 물론 아옵니다마는...
유금필 정말 지금도 백제의 사정이 잘 믿기지가 않사옵니다.
왕건 나도 그러하이... (긴 한숨) 견훤왕이 누구인가...? 이 후삼국 시대에 있어서 우리 고려보다도 한참이나 앞서서 제국을 이룬 사람일세. 그리고 그가 이룬 땅이 얼마나 큰가..? 삼한의 절반이 되었네.
유금필 가히 영웅이라 할 만 하옵니다. 하오나 그 결말이 너무도 안타깝게 되었사옵니다.
왕건 사실일세. 성품 또한 활달하여 가히 장부다운 기운이 넘치는 대장부였어. 그의 말년이 참으로 아니 되었구먼. 오랜 적이지만 훌륭한 사람이었어.
오씨 호호호... 생사를 다투며 평생을 원수로 살아온 사이이옵니다. 하온데도 동정이 가시옵니까?
왕건 그렇다마다.. 우리 입지가 서로 다른 것이지 어디 사람이야 미운 것인가? 아니 되었어..
유씨 어찌되었든 아무 것도 모르는 신첩이 보기에도 폐하의 세월이 온 것 같사옵니다. 이미 신라는 폐하께 나라를 바칠 터이니 받아달라 사정을 해왔사옵니다. 그리고 백제 또한 자중지란이 일어나 골육상쟁을 벌리고 있사옵니다. 삼한의 통일은 결국 폐하께서 이루실 것이 분명해졌사옵니다.
유금필 허허허... 마마, 이미 신들도 그리 보옵니다.
오씨 그렇사옵니다, 폐하. 이제 삼한의 모든 기운이 폐하께 몰려들고 있음이 보이옵니다.
왕건 아니오. 통일에 관한 한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소이다. 우리는 수십 년을 싸워왔소이다. 결말이 난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한 걸음 한 걸음, 조심 또 조심.. 지금은 그렇게 살펴보면서 모든 것을 다져야 할 때입니다. 술희 아우가 철원에 간 것도 그와 같은 이치예요. 아자개 노인이라...? 허허, 참....
왕건은 그렇게 도리질을 한다.
씬 철원 저자거리 (낮)
박술희가 집사와 노비들을 이끌고 가고 있다.
집사 나으리, 예전에 황도가 철원에 있을 때 아자개 상부어른 댁을 가보아서 잘 아옵니다. 저쪽이 아니옵니까?
박술희 그렇구먼... 어쩌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구나. 집사가 먼저 가서 알려라. 내가 왔다고 가서 전하여라.
집사 예, 나으리.
집사와 노비 둘이 앞서 달려간다. 박술희는 천천히 뒤에 쳐져서 감회가 깊은 듯 주변을 보며 간다.
박술희 허허... 참으로 낯설지 않은 곳이다. 나의 젊음이 이곳에서 많이 지나갔지... 허허허.... 어느새 나도 중늙은이가 되었구먼... 쯧쯧쯧...
그들 그렇게 가면...
씬 아자개의 집 외경
대문이 활짝 열려있고 안의 소리가 들려온다. 밖에는 집사들이 타고 온 말들이 매어져 있고 노비가 서 있다.
집사 (소리) 대광 박술희 장군께오서 오셨사옵니다.
아자개 (소리) 뭐..... ? 누구.........? 누가와......?
씬 동 집 마당
툇마루에 귀신처럼 늙어버린 바로 그 아자개와 계모가 앉아 있다. 귀를 자꾸 집사 가까이 가져가며 턱을 떨며 묻는다.
아자개 지금 뭐라고 했어... 누가왔다고...?
집사 대광 박술희 장군이시옵니다, 어르신...
아자개 누구....?
계모 세상에..... 이게 무슨 소리랴...? 어이구 나으리.. 박술희가 왔데요. 술희 말이에요, 술희요....
아자개 (그제서야 정신이 든다) 술희라고....? 박술희라고....? 지금 술희라고 그랬어...?
계모 그렇데요...
집사 사실이옵니다. 앞서가 전하라 하셔서 먼저 온 것이옵니다. 지금 다 오셨사옵니다.
하인들이 나오고 구경하듯 본다. 아자개는 몸을 떨며 믿기지 않는 듯 계모를 보다가 집사를 본다.
아자개 박술희가 왔다고...? 술희가..? 술희가.... 그래.. 한번은 올 줄 알았어. 암, 올 줄 알았지.
그런데 그때 막 대문 쪽에서 박술희들이 들어선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모인다. 아자개는 입을 벌리고 그저 섰고 계모도 그렇다.
박술희 (다가오며) 상부어른, 대부인 마님... 그 동안 별고 없으셨사옵니까? 소생 술희 문안이옵니다. 두 분 절받으시오소서.
아자개 술희구나... 박술희가 맞구나... 술희가 왔다...
계모 어이구...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이렇게 와 주었네..
박술희 절 받으시오소서.
박술희가 절을 올린다. 두 노인은 절을 받고 있다. 가솔들이 신기한 듯 보고 있다.
아자개 믿기지가 않는구먼. 이보게 술희, 믿기지가 않아. 이것이 얼마만인가...? 자네는 머리를 깎아놔서 도통 늙은 것 같지가 않아.
박술희 예, 상부어른. 소생은 어른 앞에서는 늘 아이가 아니옵니까? 이렇게 정정한 모습을 뵈오니 참으로 기쁘옵니다.
계모 오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에이그 쯧쯧쯧....
박술희 왜 그러시옵니까?
계모 (큰 소리로) 스님.... 무상스님.... 손님이 오셨다오... 무상스님...
박술희가 방 쪽을 본다. 사랑 쪽 방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거기 비구니 승려가 하나 마당을 본다. 그 옛날의 대주도금이다. 박술희의 피가 거꾸로 솟는다. 충격인 것이다. 모두들 말이 없다. 정적이다.
박술희 대주낭자...........? (하다가) 대주스님.......
계모 아니야.. 아니야... 대주스님이 아니고... 무상스님일세. 법명이 무상이야...
박술희 아, 예....
계모 여기 도피안사에 주석하고 계신다네. 불제자가 되어서 우리도 말을 높여 부른다네... 어서 안으로 가세.
아자개 아직도... 꿈만 같네 그려... 자네들이 이 철원을 떠난 이후 나는 여기에서 그저 매일처럼 머루주만 담구어 먹었네. 저 상주에서 늘 자네가 가져다주던 그 머루주 말이야. 히히히.... 가세... 들어가서 머루주 한잔하세...
박술희 예, 상부어른.
그러면서도 박술희의 눈은 여전히 대주에게 가 있다. 대주가 합장을 하며 미소를 짓는다.
대주 시주님... 안으로 드시오소서.
박술희 아, 예.. 스님....
그들은 그렇게 사랑 쪽으로 들어간다. 디졸브되면...
씬 동 사랑 안
늙은 아자개는 계속해 몸을 떨며 박술희의 술잔을 채워준다. 대주는 옆에 앉아 있다. 박술희는 계속 대주를 보다가 한숨을 쉰다.
아자개 아, 들어, 이 사람아.... 나는 자네가 살려주었어. 그때 천년 산삼을 가지고 나를 살려준 것을 잊었는가..?
박술희 잊을 리가 있사옵니까?
계모 그럼요... 어찌 그걸 잊겠습니까?
박술희 (예물을 전한다) 비록 천년이 된 것은 아니지만 황제 폐하께오서 장수를 축원하신다며 전하라 하셨사옵니다. 이 또한 수백 년은 묵은 산삼이옵니다.
아자개 (안 들린다) 뭐가 어떻다고...?
계모 (크게) 폐하께서 다시 또 수백 년 된 산삼을 보내오셨어요.
아자개 산삼....? (계속 킥킥 웃는다) 그러면 또 백년을 더 살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 사람들아... 지금 내 나이가 백살이 가까워.. 구십하고도 아홉이야.... 히히히히..... 아무튼 고맙네... 아, 들어.. 머루주야.
박술희 예, 어르신. (마신다, 대주를 본다) 출가를 하신 것은 알았소이다마는 이곳 철원에 있는 지는 몰랐소이다.
대주 비록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 하나 연로하신 부모님을 어찌 잊겠사옵니까? 가끔씩 찾아뵈옵는데 오늘 이렇게 장군을 뵙게 되었사옵니다.
박술희 그러게 말입니다. 젊은 날 낭자.... (하다가) 아니, 스님 때문에 많은 세월 힘이 든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뵈오니 참으로 경건해 보이십니다. 공덕을 많이 쌓으십시오.
대주 고맙습니다. 허면...
박술희 벌써 가시려 하십니까?
대주 예, 장군. 부처님 집을 지키는 몸이옵니다. 한가하게 사가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지요. 부디 좋은 날들 보내시오소서.
박술희 아니 낭자... 아니 스님.....? 아니 벌써....?
대주가 합장을 하며 나간다. 박술희는 어쩔 줄 모르고 합장을 따라하다가 쫓아나가려 한다. 그러나 아자개가 잡는다.
아자개 이런, 쯧쯧쯧.... 세월이 그만큼 지났는데도 저 모양이구먼 그래. 앉아... 대주는 이제 스님일세.
박술희 아, 예...
계모 그래요... 제 오라비 때문에 출가를 했어요. 실은 박장군을 얼마나 좋아했는데... 허나 백제국 황제의 누이가 되니 어찌 하였겠는가...? 쯧쯧쯧... 그게 다 운명이라는 게야. 어서 들어요.
박술희 아, 예...
박술희는 답답하다. 한숨을 내쉬며 큰그릇에 술을 따라 마신다.
씬 길 (석양)
대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구나.. 나무관세음보살... 질기고도 질긴 업이로다.... 아직도 미련이 남았으니 이 무슨 까닭일고....? 세월 가면 다 잊혀진다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옵니다, 부처님...
대주가 그렇게 걸어가고 있다. 자신이 나온 집을 보며 쓸쓸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불호를 외며 염주를 굴린다. 그렇게 가고....
씬 다시 방안 (밤)
박술희는 그저 자꾸 한숨을 쉰다. 아자개가 묻는다.
아자개 그냥 문안만 온 것은 아닐 테고.... 어쩐... 일인가..?
박술희 예... 문안이.. 분명하옵니다. 하오나 곁들여서 한가지 부탁을 드릴 말씀도 있고 해서...
계모 부탁이라고 했는가...? (큰 소리로) 부탁할 게 있데요, 부탁이요...
아자개 부탁....? 내가 자네 부탁을 한번도 거절한 적이 없어. 말해 보게. 무슨 일이든지 다 들어줌세. 이 늙은 것이 할 일이 있는가?
박술희 예, 상부어른. 혹시 아시나 모르겠사옵니다마는 백제국의 견훤왕 말이옵니다.
아자개 누구...?
계모 견훤이요, 견훤이...
아자개 견훤이가 왜....? 말해 봐... (귀를 가까이 댄다)
박술희 지금 백제에 정변이 일어났사옵니다. 어르신의 손자가 되는 신검 태자가 반란을 일으켜 견훤왕을 김제 절간에 가두고 이복동생인 금강태자를 죽이는 일이 일어났사옵니다.
아자개 뭐라...? 우리 손주놈들이...?
박술희 예, 어르신...
계모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말인가..? 그런 일이...
박술희 아마도 왕권 다툼이 일어난 것 같사옵니다. 견훤왕은 스스로 백제에서 그 아들들에게 쫓겨났사옵니다. 우리 고려에서는 그 견훤왕과 선을 연결했으면 하옵니다.
아자개 견훤이가..... 그 견훤이 놈이... 손주놈들에게 쫓겨났다..? 손주놈들에게 말인가..? (고개를 외로 꼴며 떨다가 킥킥대고 웃는다) 미련한 놈... 결국 그렇게 되었단 말인가? 황제라는 놈이 (계속 웃으며) 그리 되었다는 말인가? 꼴 좋구먼.. 아주 꼴이 좋구먼. 한 때는 기세가 등등하더니만... 그리 되었어.
아자개는 어깨를 들썩이며 계속 웃어댄다. 박술희가 정말 아자개가 노망이 들었나 하여 보다가는 흠칫한다. 웃던 아자개가 돌연 웃음을 멈추면서 늙은 노안에 눈물이 그렁해 보이는 것이다.
계모 왜 그러시오..? 나으리, 왜 그러십니까...?
아자개 (울먹이며) 못난 놈 같으니라고... 내가 비록 고려에 와 있지마는 그래도 제 놈이 황제라고... 한쪽 마음은 그럴 듯 했었는데... 이 멍청한 놈.... 제 자식놈에게 쫓겨났다는 말인가? 자식놈에게..? 어허, 이런...성마저 견씨로 바꾸고 나간 제 놈이... 그래도 백제의 황제라 해서 그럴싸하다 했었는데... 결국 그리되었다는 말인가..?
계모 나으리...?
박술희 상부어른... 사람일이란 그런 것이 아니옵니까? 더군다나 국가를 운영하는 일이옵니다. 아마도 뜻밖의 변을 당한 것 같사옵니다.
아자개 내게 청할 것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박술희 지금 견훤왕의 마음이 매우 착잡하고 참담할 것이옵니다. 어차피 백제에서는 몸을 의탁할 곳이 없을 것이옵니다. 천하의 통인은 이제 고려의 몫이옵니다. 고려로 오게 하여 황제 폐하를 돕게 하여주오소서.
아자개는 귀를 바짝 대고 듣다가 대답이 없다. 계모는 눈치만 본다.
박술희 우리 고려는 다방면으로 견훤왕과의 접촉을 시도하고 있사옵니다. 상부어른께서도 견훤왕을 위로하고 고려의 황제폐하와 잘 돕고 지내시라는 서찰을 한장 주셨으면 하옵니다.
계모 이걸 어찌해야 하나...? 그런다고 견훤이가 들을까..?
박술희 어쨌든 시도해 볼 필요가 있사옵니다. 삼한의 평화를 위해서이옵니다, 나으리.
아자개 (울며) 못난 놈이로다... 성까지 견씨로 바꾸고 나간 놈치고는 그 끝이 너무 불쌍하구나.. 못난 놈이로다... (계속 울며) 못난 놈이로다... 허허허....
자조적인 웃음을 웃는 그 늙은 아자개의 모습에서...
씬 어느 시골길 (낮)
바람이 모질게 불고 있다. 금산사 가는 길이다. 경보가 그 시자와 함께 뚝 길을 걸어가고 있다.
시자 큰스님,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금산사이옵니다. 이틀 길을 내쳐 이렇게 오셨사옵니다. 힘들지 않으시옵니까?
경보 스승이신 도선대사께서는 삼한의 삼천리 방방곡곡을 손바닥 보듯이 보며 평생을 다니셨다. 이까짓 백여 리의 길이 무얼 그리 멀다 하느냐?
시자 헌데 과연 견훤왕과의 만남을 저들이 허락하겠사옵니까?
경보 가보는 것이다. 가보면 뭔가 길이 보이겠지. 어서 가자.
씬 금산사 견훤의 거소 외경
파달과 부장들이 경계를 서고 있는 군사들 사이를 지나고 있다. 그리고 흘깃 견훤의 처소 쪽을 본다.
파달 허허... 거 한번도 방밖을 나오지 않으셨단 말이지...?
부장 예, 장군. 그저 방안에서만 소리소리 지르고 계신다 하옵니다.
파달 허허허... 그 옛날에 저 폐하께서는 호랑이 젖을 드시고 크신 분이라 들었다. 그 용맹함과 호기가 대단하셨지. 하지만 지금은 이빨 빠진 호랑이가 아니냐? 세월이 좀 지나면 모든 게 다 잘 풀릴 게다. 다 포기하고 체념하는 것이 인간이거든... 어흠..
파달은 그렇게 간다.
씬 동 견훤의 거소 마당
바람이 마당을 휩쓸고 지나간다. 저만큼 마당 한 귀퉁이에서 고비가 하늘을 보고 있다. 최상궁과 나인들이 함께 해 있다. 방안에서는 마치 짐승 울음처럼 견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견훤 (소리) 그래... 짜 보거라... 네 마음껏 짜 보거라. (비명) 짜거라... 나는 마실 터이니 짜거라..
고비 (긴 한숨) 참으로 치욕같은 나날이구나. 얼마나 아프실꼬...? 술을 드시면서 등창을 보신다고...? 세상에... (한숨) 그래... 생떼 같은 자식을 죽이시고 평생 동무처럼 살아온 충신을 죽이셨다. 이제 등창은 그 뿌리가 뼈에 닿았다고 하는구나.... 저런 옥체로 이 외로운 절간에 갇히셨으니 심사가 오죽하실까...? 술이 모자라면 계속 갖다 드려라. 얼마든지 드려라.
최상궁 예, 마마.
고비 그래... 이 마당에 그것을 금하신 들 무엇하겠느냐..? 차라리 한껏 드시다가... 눈을 감으시는 것이 더 편하실 것이다.
고비는 그렇게 한숨을 쉰다. 견훤의 소리는 계속되고....
씬 동 집 방안
견훤이 웃통을 벗고 한쪽으로는 술을 마시면서 의원이 등창의 고름을 짤 때마다 비명을 지른다.
견훤 그래, 짜거라. 상처는 고통스러운데 마음 한쪽은 시원하구나. 나는 마실 것이니 너는 짜 보거라. 이놈의 등창이 이기는가, 술이 이기는가 보자꾸나.
전의 폐하, 신은 차마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이야말로 섶을 지고 불로 들어가시는 일이옵니다. 어주는 삼가하시오소서. 재삼 청하옵니다.
견훤 네가 할 일은 고름을 짜는 일이고 내가 할 일은 마시는 일이다. 우리는 서로의 소임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짜거라 이놈아...
전의 예, 폐하. 용서하시오소서.
전의는 고름을 짜고 견훤은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다가 짐승처럼 소리지른다.
견훤 이놈들.... 이놈들......... 이놈들................ 아아.............
견훤은 땀투성이가 된다. 전의는 스스로도 참기 어려운 듯 눈을 감았다가 또 짠다. 견훤은 그럴 수록 증오를 품어낸다. 그리고 저주를 담는 것이다.
견훤 (비명) 아아.............. 이놈............ 신검이 이놈..................! 아아... 신검이 이놈..............!
씬 백제 황궁 외경
씬 동 대전
능애와 신검이 마주해 있다. 능환과 영순, 신덕들이 보인다. 두 형제도 보인다.
신검 (한숨) 숙부님께서 혼이 나셨습니다.
능애 허허허... 다 각오한 일이었사옵니다, 태자마마. 하오나 열 번 스무 번 계속 찾아가야 하옵니다. 때마다 철마다 찾아뵐수록 원한이나 증오는 조금씩 그 싹이 가라앉을 것이옵니다.
능환 모르시는 말씀이오. 대장군께서 폐하의 친 아우님이시지만 이 사람도 평생을 의제로서 모셔왔소이다. 폐하께서는 결코 돌아서시지 않을 분이십니다. 괜한 노력들입니다.
영순 하긴 그런 것 같사옵니다. 풀리실 분 같지가 않아 보이시옵니다.
양검 정도와 순리를 찾는다고 하시지만 사실 그것들이 무엇이옵니까? 힘있는 자가 새로운 길을 만들면 그것이 정도이고 순리가 되는 것이 아니옵니까? 형님께서는 너무도 많은 것을 재시는 것 같사옵니다.
용검 양검 형님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부질없는 노력을 그만 접으시오소서. 차라리 황제에 오르시오소서, 형님.
신검 도대체 몇 번이나 말해야 들 알아듣겠느냐? 참는 과정이 지루하고 힘이 들어서 포기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참으련다. 언젠가는 내 스스로 아버님을 뵈러 갈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나의 즉위식에 옆에 앉아 계시게 하실 것이다. 만 백성들이 보는 가운데 말이다.
씬 황후전
박씨가 한숨을 쉰다. 이상궁이 함께 해 있다.
박씨 저렇게 답답하신 분이 있나..? 혁명을 하고 대권을 손에 쥐었으면 의당 지존의 자리에 오르실 것이지... 무엇이 무서워서 그렇게 이것 저것 재고 있다는 말인가..? 쯧쯧쯧.... 도대체 신료들은 무얼 하고 있는 게야..?
이상궁 그렇지 않아도 지금 대전에서 몇몇 중신분들이 모여서 그 일을 논의중이라 들었사옵니다. 능애 대장군께서 금산사를 다녀오신 이후로 이야기들이 많으시다 하옵니다.
박씨 나도 소식은 들었네. 그 못된 승평부인을 옆에 두고 허구한날 소주만 드신다더구먼. 얼마나 편하시겠는가?
이상궁 ...............
박씨 세상에 무서운 것이 피 내림이라 하더니만... 어쩌면 그렇게 상주 아버님과 똑같은 말년을 맞는다는 말인가? 어쩌면 그렇게 똑같아...? 차라리 그곳에서 그냥 눈을 감으셨으면 좋겠구먼.
이상궁 황후마마.....?
박씨 왜.....? 내가 못할 말이라도 하였느냐...? 차라리 숨이라도 거두시면 모두가 편할 것이 아닌가..? 폐하께서도 더러운 꼴을 아니 보시게 되실 것이고... 우리 신검 태자도 다른 미련 없이 황제에 오를 것이고 말이다. 아니 그러한가...?
그런 박씨의 표정에서...
씬 동 황궁 마당
경계병들이 많은 전각들 사이를 오고 간다. 그 중 어느 전각에서 카메라가 멎으면
씬 그곳
신검과 그 형제들은 보이지 않고 능환과 능애, 영순, 신덕, 김총, 애술, 상귀, 상애들이 함께 해 있다. 능환은 계속해 입맛만 다신다.
능환 의외로 어려운 점들이 참 많소이다.
신덕 그러게 말이옵니다. 생각보다 모든 것이 빨리 안정되어 다 제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데 태자마마께서 저러하시니...
능환 물론 순리를 따르는 것은 좋지요. 하지만 혁명을 할 때부터 이미 순리는 없었소이다. 진실이니 정도니 하는 것도 없었소이다. 그때 이미 다 사라진 것이에요.
애술 하지만 천하에 인정을 받고자 하시는 것은 나쁠 것이 없다고 보옵니다.
능환 허나 이미 그 방법은 다 틀렸소이다. 지금은 그런 자질구레한 명분싸움에 발목이 잡혀서는 아니 될 때요. 국가의 운명을 건 한판이 기다리고 있소이다. 고려가 이길 것인가, 아니면 우리 백제가 통일대업을 완수할 것인가, 이 엄청난 일이 기다리고 있는데 언제까지 저렇게 폐하의 허락이니 백성들의 인정이니 하는 것들을 기다린다는 말이오.
김총 이찬 어른의 말씀이 맞는 것도 같사옵니다마는....
상귀 그래도 태자마마께서는 그 마음이 우리와는 다를 것이옵니다. 보다 많은 눈치를 보실 수밖에 없사옵니다. 차라리 우리 신료들이 강제로라도 권하고 추진하면 어떻겠사옵니까?
영순 어떻게... 강제로 황제를 권해 드린다는 말씀이오..? 그래도 태자마마의 허락이 계셔야지요.
능환 아무튼 시간은 그리 많지 않소이다. 고려와 운명의 한판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주인 없이 싸울 수는 없소이다. 마땅히 황제에 오르셔야지요. 그리고 고려와의 싸움에서 앞을 서셔야지요. 금산사에 계시는 폐하께서는 지금의 백제국을 세우셨지만 통일은 우리가 이루어야 합니다. 이미 폐하께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신 분이고 이제 남은 것은 우리들 몫이올시다. 많이는 못 기다립니다. 조금 더 기다리다가 아니 되면 상귀 장군 말처럼 강제로라도 추진하십시다.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고려와 싸워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요.
씬 신검의 처소
신검이 혼자서 서성거리고 있다.
신검 (소리) 모두들 서두르고 있다. 황제에 오르라고... 허나 더 이상 막다른 길을 계속 간다면 희망은 없다. 아버님의 마음을 되돌려 모셔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리해야 한다. 황제의 자리는 천천히 올라도 된다. 어차피 나는 전권을 쥐었다. 이 제국은 나의 것이다. 아버님의 허락을 받을 것이다. 어떤 수를 쓰던 간에 반드시 받아낼 것이다.
씬 금산사 경내 견훤의 거소 앞
경보와 시자가 함께 서 있다. 파달과 부장들이 노려보고 있다. 나인들이 지나쳐가며 보고 있다.
파달 백계산에서 오시는 스님이라고 하셨습니까..?
시자 그렇소이다. 경보 큰스님이십니다.
파달 경보스님이시라...?
시자 백제국 황제 폐하의 왕사십니다. 모르시오이까..?
파달 이야기는 들었소이다마는.... 뵌 적이 없어놔서... 날이 다 저물었는데 어인 일이신지요..?
경보 허허허.... 제자를 만나러 왔소이다.
파달 제자라니요, 큰스님...?
경보 이곳에 계시는 폐하께서 나에게 스승을 청하였고 나는 그것을 허락하였소이다. 그러니 제자가 아니겠소이까?
파달 허, 그것도 그렇습니다마는.... 폐하를 뵙는 것은 아니 됩니다. 이미 새로운 백제국의 주인이 되신 신검 태자마마의 명이 없이는 그 누구도 폐하를 뵐 수는 없소이다. 돌아가시구려.
경보 허허.. 이미 새로운 주인이 따로 계신다..? (끄덕이다가) 허면 내 사제를 좀 보고 가야겠구려. 큰 법당으로 가 봐야겠소이다. 이곳의 주지는 나의 사제뻘이 되기도 하오.
그때, 허겁지겁 주지와 승려들 몇이 함께 달려와 크게 합장하며 허리를 숙인다.
주지 아니, 큰스님....? 이 어인 왕림이시옵니까?
경보 허허허.... 황제께서 계신다 하여 위로차 왔네 그려. 자네는 나중에 보려고 그랬지.
주지 이보시오, 장군. 이 나라의 왕사시오. 경보 대사님을 모르신다는 말씀이오..?
파달 이야기는 들었으나 처음 뵈었소이다.
주지 폐하의 왕사십니다. 마땅히 뵙게 하여 드리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소이까?
파달 이곳의 경계소임은 나의 책임이오. 어쩌겠소이까? 태자마마의 명이 그러하시니 말이오. 왕사분이시라... ? 어허, 이것 참...
주지 정 그렇다면 황실에 사람을 급히 보내서 허락을 구해보시구려. 어느 나라에도 왕사를 이리 대하는 법은 없소이다.
파달 허허, 이것 참.... (끄덕인다) 부장은 들으라.
부장 예, 장군.
파달 왕사라 하시니 어쩌겠느냐? 전령을 황도로 띄워라. 가서 본대로 이르고 어찌할 것인가를 물어오도록 하라.
부장 예, 장군.
주지 자, 큰스님 저 아래 소승의 방으로 가시오소서. 아무래도 대답을 받아오자면 한밤중은 되야 할 것이옵니다.
경보 허허허.. 그리하세나. 허면 차나 한잔 주시게.
주지 예, 이리로....
경보들은 그렇게 간다. 파달이 부장들과 함께 보다가 중얼거린다.
파달 왕사라...? 어쩐지 위용이 꽤 들어 보이는구먼 그래.
씬 견훤의 거소 마당 (밤)
고비 (소리) 무엇이라...? 왕사가 오시다니..?
씬 동 거소 안
견훤이 보고 있고 최상궁이 고비에게 아뢰고 있다.
고비 왕사라면.. 경보큰스님을 말씀하시는 것이냐?
견훤 .................?
최상궁 그러하옵니다, 마마. 폐하를 뵙겠다고 곧장 이쪽으로 오셨다가 파달 장군이 막아 다시 주지스님과 큰 법당 쪽으로 가셨다 하옵니다.
견훤 누가 와...? 경보대사가 왔다.....? 경보대사가 .....?
최상궁 예, 폐하.
고비 세상에.... 경보 큰스님이 오셨다고..? 헌데 저들이 막았다는 말이지...?
최상궁 예, 마마.. 일단 황도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며 급히 파발을 보냈다고는 하옵니다.
견훤 죽일 놈들.... 평생을 산에서 내려오지 않던 대사이다. 헌데 어렵게 이곳까지 온 그 분을 막았단 말이냐..? (사이) 허허허... 이런.....? 왕사가 왔다...? 부끄러운 일이로다. 이 처참한 모습을 보러 왔단 말인가 그래..?
씬 동 금산사 주지 방 외경
씬 동 방안
경보와 시자, 주지가 함께 해 있다.
경보 딱한 일이로고.... 등창은 이제 회복이 어렵고.. 게다가 의원이 그토록 하지 말라는 술만 마시고 계신다..?
주지 예, 큰스님.
경보 그래, 그분으로서는 그리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주지 우리 금산사는 오랫동안 참으로 좋은 도량이었사옵니다. 헌데 잘못하다가는 황제폐하의 시신을 치우는 절이 될 것 같사옵니다.
경보 허허허.. 사람하고는.... 그리 생각할 것 없네. 황제의 시신을 치우든 촌부의 시신을 치우든 그게 뭐 그리 대수겠는가? 황제라 하여 다를 것이 아무 것도 없네. 부처님 눈으로 보면 다 불쌍한 중생일 뿐이야. 예서 한 며칠 묶어가야 할 것 같네. 괜찮겠는가?
주지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마음대로 묵으시오소서. 하온데 큰스님..?
경보 왜 그러는가..?
주지 평생을 백계산 옥룡사에서 내려오시지 않으시던 스님이시옵니다. 이곳까지 오신 것을 보니 소승은 물론이고 많은 스님들이
참으로 궁금해하옵니다. 경보 궁금할 것 없네. 답답해서 나온 것이야..... 자리 좀 보아주겠는가?
주지 예, 큰스님. 편히 쉬시오소서. 얼마든지 쉬시오소서.
경보 허허허... 고맙네.
그렇게 경보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염주를 굴린다.
씬 고려 황궁 외경
씬 동 대전
왕건을 비롯하여 김행선, 왕충, 최지몽과 박술희가 함께 해 있다. 왕식렴, 유금필, 홍유, 배현경, 염상들도 보인다.
왕건 허허, 저런.. 아자개 상부가 눈물을 흘렸단 말인가..?
박술희 예, 폐하. 참으로 뜻밖이었사옵니다. 본래 견훤왕을 미워하고 있는 줄 알았사옵니다.
유금필 그것을 일러 애증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싫어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고 미워하면서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게 바로 부모자식간이 아니겠는가?
왕건 옳은 말일세. 그래도 서찰을 써주었단 말인가?
박술희 예, 폐하. 기왕에 일이 그리 되었다면 차라리 고려로 와서 폐하의 대업을 돕는 것이 장부의 마지막 할 일이고 아자개 상부도 그리 바란다고 써 주셨사옵니다.
왕건 고마운 일이로세. 그리고 왠지 미안하구먼 그래. 백살이 가까운 그 노인이 자식의 일로 눈물을 흘렸다...? 허허, 참... 그래서 피는 진한 것이라 한 것이야. 자, 시중은 좀 어떠셨소이까?
김행선 경보 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아직 흘릴 피는 더 흘려야 할 것이라고 하셨사옵니다.
염상 흘릴 피를 더 흘리다니...? 허면 전쟁이 계속된다는 뜻이 아니옵니까?
배현경 그런 이야기가 되겠지요. 하긴 뭐, 고려든 백제든 결국은 운명을 건 한판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이까?
홍유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 말씀을 하신 것일 겝니다.
왕건 뭐 다른 말씀은 없으셨소이까?
왕충 금산사로 가실 것이라 하셨사옵니다.
왕건 (놀라며) 뭐라...? 금산사로 가신다....? 직접 말씀이신가..?
최지몽 그리 말씀하셨사옵니다. 이미 그 분께서는 뭔가 확고한 결심이 있는 듯 보이셨사옵니다.
왕식렴 결심이라...?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오?
최지몽 이미 그분께서는 누누이 스스로 하실 일이 있다 하셨사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것을 보실 것이라 이르셨사옵니다. 금산사로 가신다는 것 자체가 폐하를 위하여 드디어 나서신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김행선 내의성령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러하옵니다.
왕건 금산사로 가신다...? 경보대사께서 금산사로....? 허면 누군가 이 서찰을 더불어 전해주면 어떻겠는가? 이 아자개 상부의 서찰 말일세.
김행선 좋은 말씀이시옵니다. 경보 대사께서 그곳에 가시고 또한 아자개 노인의 서찰마저 더해진다면 보다 효과가 크지 않겠사옵니까?
왕건 그럴 것입니다. 훨씬 낫겠지요. 그럴 거예요. 사람을 보내도록 하십시다. 그리고 곧 조회를 열도록 하십시다. 백제에 관해서 본격적으로 논의를 해봐야겠소이다.
김행선 예, 폐하.
씬 금산사 견훤의 거소 (낮)
문을 열고 마당을 보는 견훤의 모습이 보인다. 고비가 만류한다.
고비 바람이 차옵니다. 문을 닫으시오소서, 폐하.
견훤 아니오... 왕사가 오셨다고 하지를 않소...?
고비 파달이란 자가 막고 있다 하옵니다. 곧 기별이 있지 않겠사옵니까? 문을 닫으시오소서.
견훤 이놈들이 이거 왕사까지 막다니... 참으로 쳐죽일 놈들이오. 이놈들아... 왕사를 뫼셔들여라, 이놈들아... 이놈들아....
그러나 군사들은 들은 채도 안 한다.
견훤 이놈들아.... 파달이 놈을 오라고 하여라. 파달이 놈을 오라고 해.
고비 폐하........
씬 그 담 밖
파달이 부장들의 보고를 듣고 있다.
파달 폐하께서 나를 보자 하신다고...? 왕사의 일 때문에 말인가?
부장 예, 장군. 문을 여시고 고래고래 소리치고 계시옵니다.
파달 허허허... 아직도 기운이 많이 남으신 모양일세. 그나저나 어젯밤에 파발이 갔는데 왜 아직 아니 오는 게야..?
씬 백제 황도 외경
씬 동 대전
신검과 능환, 능애, 신덕이 마주해 있다. 두 아우도 보인다.
신검 옥룡사에서 경보대사가 내려오셨다...? 금산사로 와 계신다는 말인가?
신덕 예, 태자마마. 지금 밖에 파달 장군이 보낸 전령이 와 있사옵니다. 어찌할까를 묻고 있사옵니다.
능환 이상한 일이 아니옵니까? 평생 산문 밖을 나가지 않던 그 대사가 왜 갑자기 금산사로 왔다는 말이옵니까? 막으시오소서. 두 분이 만나서 좋을 것이 없사옵니다.
능애 그렇지가 않소이다. 어차피 태자마마께서는 폐하의 성심을 돌리려 하고 계시오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좋은 기회일 수도 있소이다.
능환 기회라니요...?
능애 폐하와 태자마마는 쉽게 옛 정을 회복하기 어렵게 되셨소이다. 이럴 때 마침 왕사가 그곳에 오셨다면 도움을 청해볼 만도 한 일이 아니겠소이까? 나라를 위해서 도와달라고 말이올시다.
양검 그도 일리가 있사옵니다, 형님.
신검 (눈을 반짝인다) 듣고 보니 그럴 법도 하오이다.
용검 아닙니다, 형님. 그렇게 흔들리실 아버님이 아니시옵니다. 왕사를 내치시오소서.
신검 허나 그래도 왕사가 아니시냐? 만나는 것조차 막았다면 사람들이 뭐라 할 것이냐? 이미 세상이 다 알게 되어서 왕사가 거기까지 가신 것이 아니겠느냐? 허허, 이것 참....
능애 이 사람의 말대로 하시오소서, 태자마마. 차라리 솔직히 말씀을 드리고 도움을 청하시오소서. 아니 되면 그 뿐이고 혹여 잘 된다면 태자마마의 뜻을 쉽게 이룰 수 있사옵니다.
능환 허어... 아니 된다니까 그러하오이다. 이런....
신검 아니오. 숙부님의 말씀이 옳소이다. 무조건 막을 일만은 아닙니다. 잘 된다면.... 잘만 된다면 모든 일이 다 풀릴 수가 있어요. 신덕 장군...?
신덕 예, 태자마마.
신검 그 전령에게 내 친서를 한 통 써줄 것이오. 왕사에게 보이고 제발 좀 도와달라고 하시구려. 아버님 마음을 좀 움직여보라고 하시구려.
신덕 알겠사옵니다.
신검 이런 것이 바로 기회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소이까? 평생을 두문불출하던 왕사가 하산을 하셨소이다. 그 누구도 아버님을 어찌할 수 없지만 왕사라면 할 수 있소이다. 간곡히 부탁을 해보십시다. 아주 간곡히...
모두들 ..................... (숙연하다)
신검 아주 간곡히 말이오..... 제발....
그런 신검의 간절한 표정에서....
<193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