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어가 제철> 중 [달밤] 문장들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서서 집 안을 가득 채운 갓 지은 밥 냄새를 맡았던 늦은 저녁, 사람 사는 집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동안 내가 사람처럼 살지 못했다는 자각에 코끝이 뻐근해졌어요.(10쪽)
가파른 내리막길로 점점 사라지는 소애의 뒷모습을 한참 지켜봤던 기억이 나요. 그 밤에 떴던 달 모양도요. 방구석 어딘가에 점자코 떨어져 있을 것 같은, 잘린 손톱 모양의 가는 그믐달이었어요. (11쪽).
물건은 쌓여 있는데 내 가난은 외려 더 불어나 있는 기분이랄까요.(12쪽)
버는 건 변기 같고 쓰는 건 숨 쉬는 것 같다고요.(13쪽)
그러고 보니 우리 일관되게 가난하네.(14쪽)
재료를 씻고 썰고, 볶거나 삶는 일이 인생 마지막 과제인 것처럼 정성을 다해서 요리를 해요. 만든 음식은 수행하듯 정성을 다해서 먹어요. (16쪽)
불 앞에 서서 국자로 거품을 꼼꼼하게 걷어내며 육수가 우러나는 걸 지켜봤는데 어느 새 한 시간이 후딱 지나 있더라고요. 퇴사하고 나서는 시간이 그렇게 흘러요. 수세미로 부엌 후드를 청소했더니 한 시간, 물에 락스를 풀어 욕실을 청소했더니 두 시간, 옷 장에서 안 입는 옷을 골라냈더니 세 시간, 그런 식으로 시간이 뭉텅뭉텅 잘려 나가요. 이따금 엄마가 전화해서 물어요. 뭐 하고 있냐고. 그럼 매번 같은 대답을 해요. 있어. 그냥 있어. (17쪽)
시도 잠도 미래도 오지 않을 거라고, 다만 늙어갈 거라고 내게 말하는 것 같았거든요. 시를 생각하지 않아도 쓰지 않아도, 읽는 것조차 하지 않아도 하루가 가요. 실은 너무나 잘 가요. 기어코 가고 만다는 건, 가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는 건 불안한 안심 같은 거더라고요. 불행한 행복 같은 거요. 언니, 내가 다시 쓸 수 있을까요. P내 시와 화해할 수 있을까요. (18쪽)
딸기 하니까 생각나요. (23쪽)
내가 돈이라도 많으면 급한 데 쓰라고 얼마쯤 쥐여 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있어야죠. 대신 만날 때마다 연금복권을 세 장씩 사줬어요. 무력하더라고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 애 안색을 살피거나 괜찮냐고 묻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뿐이라는 게요. 말이, 언어가, 시가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죠. (24쪽)
축하해, 전소애. 태어난 거, 살아온 거, 살아 있는 거, 다. (26쪽)
내가 사는 익숙한 동네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채로 완전히 달라져 있었어요. 이제 다시는 돌이켜지지 않을 세상, 언니가 남기고 간 나머지의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30쪽)
살아 있는 나는, 살아 있으니 살아. 살아서 기억해. 네 몫의 삶이 실은 다른 삶의 여분이라는 걸 똑똑히 기억해. 그렇다고 너무 아끼지도 말고 너무 아까워도 말고, 살아 있는 나를 아끼지 말고 살아.(30쪽)
은주 언니. 거기 있어요? 오늘 언니는 내 얼굴 볼텐데 나는 또 못 보겠네요. 왔으면 서 있지만 말고 앉아서 한술 뜨고 가요. 늘 하던 것처럼 곁에서 천천히 담배도 한 대 태워요. 여기 하늘도 좀 올려다보고요.
달이 떴네(32쪽)
안윤의 <방어가 제철>은 죽음에 대한 애도하는 방식을 서술하고 있다. [달밤]의 문장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번, 그리고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후의 두 편인 [방어가 제철], [만화경]에서도 음식이 애도의 주요 소재 역할을 한다. 여기에서는 [달밤]의 문장을 중심으로 글을 써본다.
[달밤]은 소애의 생일과 은주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화자는 소애의 생일에 그를 위해 육개장을 위한 재료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고, 미역국, 시금치와 콩나물, 무나물, 두부, 애호박전…, 그리고 딸기까지…
화자는 소애의 생일을 위해 “인생 마지막 과제인 것처럼 정성을 다해서 요리를” 했다(16쪽). 그리고 스스로 세상을 떠난 - “언니가 스스로 없기를 원했는데”(30쪽) - 은주의 기일을 위해 “상을 창가로 옮기고 … 육개장, 미역국, 밥, 시금치무침, 콩나물무침, 무나물, 애호박전, 두부부침, 찹쌀떡, 절편, 딸기, 그리고 언니가 좋아하는 냉동실에서 막 꺼낸 차가운 소주, 늘 태우던 담배 한 갑”(32쪽)을 준비한다.
작가 안윤은 생일과 기일, 탄생과 죽음을 다루면서, 화자를 포함한 우리네 인생이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사랑하는 이를 위해 생일상을 차려주고, 사랑했던, 지금도 그리워하고 있는 사람의 기일에, 그와 나눴던 행복했던 추억을 소환하기 위해 음식을 올리는 일이 살아있는 자의 삶의 몫이라고 말한다. “살아 있으니 살아. 살아서 기억해.” 그러나 그 삶을 너무 아끼지도, 너무 아까워하지도 말고 살라고 말한다.
예수께서 유월절이 다가오자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 즉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셨다. 그 때 하신 말씀과 퍼포먼스가 기독교의 성찬식의 기원이 되었다.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가 너희에게 주는 내 몸이다.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내가 너희를 위해 흘리는 바, 언약의 피니, 이것을 마시고 나를 기억하라.’
성찬은 애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는 예식. 교회는 매주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서 한번도 본적은 없지만 그를 기억하고 사랑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벧전1:8).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절망에 빠진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절망 중에 있을 때 예수께서 그들을 찾아오셨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다 예수께서 빵을 떼어 주실 때 그제서야 비로소 그를 알아보았다.
“딸기 하니까 생각나요.”(23쪽)
빵을 떼는 일은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늘 반복되는 일상이다. 그러나 그 빵을, 예수와 함께 나눴던 사람들, 광야의 오병이어 기적 현장에 있던 사람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그 빵과 포도주를 받아 먹고 마셨던 사람들은 빵을 떼는 일, 포도주를 마시는 일이 평범한 일상이 아니라 특별한 사건이 되었다. 빵을 떼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 그 전에도 셀 수 없이 많이 봤는데 -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초라하고 우연적이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 도대체 이 강렬한 기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87쪽)
‘좋은 커피향을 맡으면 당신 생각이 나요.’ 소금빵, 샌드위치, 떡볶이, 소머리국밥, 순대, 황태국 …을 먹다가 불현듯 그 사람이 생각나 현실을 떠나 추억에 잠기듯, 제자들은 빵을 떼는 그 순간 - 그 순간이다. 다른 순간이 아닌 - 예수와 함께 했던 광야, 다락방에서의 장면을 떠올리게 되었을 것이다, 저절로, 자기의 의도가 아닌 초월적인 힘에 의해…
죽음을 애도하는 자는 자기의 삶을 너무 아끼지도, 아까워하지도 않고, 슬픔 속에서도 기쁘게, 불행 중에서도 행복하게, 기일에 생일상을 차릴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