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개
김선화
푸른 하늘 위로 솟구쳐 두 날개 활짝 펴고 비행하는 몸짓을 일찍이 흠모했다. 마당에 닭을 풀어 기를 때조차 창공에서 커다랗게 원을 그리는 그 위용을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병아리 떼를 감추고 씨암탉을 가두는 것으로 솔개와 사람 사이 경계의 날은 분명했지만, 한 번도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없었던 그 야생의 눈빛이 궁금했다. 둥지는 어떻게 생겼을까. 새끼들은 여느 새들처럼 보송보송 귀여울까. 호기심은 내 의식을 붙들고 마구 숲 속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어른들은 들에 나가며 누누이 닭을 잘 보라고 일렀다. 바꿔 들으면 솔개 잘 막으라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발가벗고 뛰노는 남동생들 잘 지켜보라는 뜻도 담겨 있었다. 사실인지 거짓인지 쑥덕거리기를 잘 하는 이웃 아주머니는 지나다가 우리 집 사립문을 기웃대며 “저 너머 누구네는 솔개란 놈이 글쎄, 마당에 기어 노는 사내아이를 냅다 물고 채갔디야.” 했다. 그럴 때면 내 눈길은 절로 철부지 동생들에게로 향했고 그 솔개놈의 날개를 가늠해보느라 머릿속이 분주해졌다. 열이면 열, 모두가 놈의 날개 한 쪽이 키짝만하다고 했다. 탑새기와 알곡을 분류해낼 때 사용하는 키는 그때부터 내 안의 솔개 날개가 되었다. 어른들처럼 멋지게 키질 흉내를 내볼 때면 내가 곧 솔개가 되어 거리낌 없이 하늘 위를 너울거리는 것 같았다. 매섭다고 알려진 눈초리도 어린 내 맘을 쥐고 흔들었다.
솔개는 시시하게 마당에 널어놓은 곡식이나 수수 모가지 따위를 탐하며 종종거리지 않았다. 날갯죽지를 위엄 있게 펼쳐 유유히 탐색하며 굵직굵직한 먹잇감을 노렸다. 솔개가 뜨면 나는 마당 싸리비를 들고 공중에 선을 그으며 훠이훠이 호령을 해댔다. 그러면서 동생들과 닭의 무리를 지켜냈다. 솔개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오래도록 보이지 않으면 괜히 보고 싶어지기도 했다. 날카롭다는 부리에 쪼일까 걱정은 되면서도, 어느샌가 산을 넘어와 우리들 머리꼭지 위에서 염탐하는 늠름한 기상에 길들여져 갔다. 밀잠자리 맴돌듯 마당이나 터 삼은 우리들에게 솔개의 등장은 그야말로 ‘떴다!’였다. 육하원칙에 의해, 솔개가 날아왔다고 말을 늘일 새가 없이 거의 단음절로 그 된소리 한마디면 다 알아차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기는 방에 데려다 뉘이고, 뛸 줄 아는 동생들은 일사불란하게 몸을 피하며 울타리 사이에서 한가로이 병아리까지 몰아 가뒀다. 솔개가 뜨는 날은 차령산맥의 국사봉에 먹구름 몰려와 비설거지하는 것보다도 화급했다.
헌데 나는 애 하필 아이들에게 위협적인 솔개를 좋아했을까. 새 중에도 힘이 세서 그랬을까. 아마도 어른들까지 절절매는 그 날개가 부러웠지 싶다. 산마을에 살며 새들의 일상은 사람의 일상처럼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나는 은연중에 솔개가 되어 날아오르는 꿈을 꿨던가 보다. 적정선에서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추구하는 이상향의 세계를 향해 기운껏 비상하고 싶은 야망이 싹터 올랐다. 멈춘 듯 나는 듯 공중에 떠 있기만 해도 존재감이 확고하던 그 몸짓을 은연중에 내 것으로 만들기로 했던가보다. 솔개가 날아간 산 너머 저편엔 내가 꿈꾸는 신기루 갗은 세상이 펼쳐질 듯하였다. 그러한 성정은 나를 더 이상 안온한 보금자리에 머물지 못하게 하여, 열일곱에 계룡산 줄기의 둥지를 박차고 나와 밤기차를 타기에 이른다. 여러 가지 면에서 당위성을 내세워 큰 새가 되기 위한 첫 발걸음이었다. 자칫 수렁일까 조심하고 돌다리 앞에서도 머뭇거리며, 파닥파닥 연약한 날갯짓도 해보았다. 그러다가 고꾸라지기를 수차례, 어머니는 딸의 유년기부터 예사롭지 않은 근성을 알아보아 황새와 뱁새의 이론으로 기를 눌러댔지만, 정작 이 딸은 솔개의 적극성을 추구했다.
그 후 사십여 년, 나는 알게 모르게 솔개의 비행을 흉내 내고 있었다. 힘 약한 누군가를 위협하는 그런 행위는 말고, 꿈꾸는 세계에서 나는 듯 멈춘 듯 나름의 날갯짓으로 유유자적하고 있었다. 그러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어느 결에 절로 그리 되어 있는 스스로가 보였다. 제법 예리한 눈으로 사물의 본질을 헤아리는 안목도 생겼고, 도도히 창공에 떠서 바람을 가르며 온몸으로 마주하는 공기의 맛도 적잖이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그간의 내공으로 살아가도 될 만하다는 목소리들이 심심찮게 들려왔다. 그러나 세상엔 순조로운 삶이란 없는가보다. 육십 고개를 앞두고 들이닥친 신체기능의 위기로 은둔생활에 들어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생의 리듬이 대폭 수정되어 심신 달래기에 열중하고 있다. 뭉텅뭉텅한 약쑥 뜸으로 전신을 달구며 피돌기를 원활히 하고, 한 줌의 약으로 장기臟器를 다스리며, 안타깝지만 글 쓰는 사람으로서 이곳저곳에 걸린 이름을 적절히 빼고, 수영장에 들어가 텀벙거리며 도 닦듯 가벼워지고자 궤적의 무게마저 줄여나간다.
문헌에 의하면 솔개는 일흔 살까지 수명을 누릴 수 있다고 하지만 장수하기 위해 중간에 과감히 용단을 내려야 한단다. 부리와 발톱이 노화한 마흔 살 쯤엔 깃털이 짙고 두껍게 자라 하늘로 날아오르기가 힘들어져 이즈음의 솔개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을 뿐이라고. 그대로 죽을 날을 기다리든가, 약 반 년에 걸친 매우 고통스런 갱생 과정을 수행하든가 하는 택일이 바로 그것이다. 갱생의 길을 택한 솔개는 산 정상 부근으로 높이 날아올라 그곳에 둥지를 틀고 머물며 수행을 시작한다. 바위를 쪼아 부리를 깨서 빠지게 한 다음, 새로운 부리가 돋아나면 그것으로 묵은 발톱을 뽑는다. 새 발톱이 돋아나면 이번에는 무거워진 날개의 깃털을 하나하나 뽑아낸다. 속살 찢기는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새 깃털이 돋아난 솔개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게 된단다. 그리고 다시 힘차게 날아올라 서른 해의 수명을 더 누리게 된다고. 우화寓話일 수도 있는, 장수하는 솔개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금 나는 솔개의 몸짓으로 바위틈 은준지에 들어 부리를 부딪고 발톱을 뽑으며 깃털마저 솎아내는 연습 중이다.. 진액이 묻어나더라도 원초적으로 보고 싶은 사람, 하고 싶은 일, 가 닿을 수 있는 명성을 밀쳐두고 갱생의 몸을 꾀하며 씽긋거린다. 일상 속에 늘여진 야심을 끊는 수행이 맹금류의 깃털 뽑히는 고통에야 어디 비하겠는가. 비록 솔개의 용단 시기보다는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터득한 이치나 좀 더뎌진들 어떠하리. 목표물을 향해 에돌며 딴청 피는 듯하나 저돌적이고, 공격성을 띠나 싶으면 여유로워 보이는 솔개와 이미 죽마지우가 되어 소통하는 데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