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사회에 민주주의가 성숙하게 자리 잡을 수 있게 바탕이 되었던 합의문을 소개한 책이다. 독일도 제1,2차 세계대전 후 극심한 이념대립으로 국민들이 두 쪽으로 갈라져 서로를 헐뜯고 비방하던 때가 있었으며 냉전시대에는 동서독으로 분단되어 사상적 대립 또한 극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조차도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진영들이 함께 모여 자신들의 의견을 서로 나누며 격렬한 토론과 논쟁을 멈추지 않았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보이텔스바흐'에서 진행된 서로 다른 진영의 대표자 5명이 함께 모여 '최소합의'라는 원칙을 두고 대화를 나눈 결과 다음과 같은 합의에 이르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정치교육(민주시민교육)의 기본근거로 삼고 있다고 한다.
보이텔스바흐 합의 원칙(64)
1. 강압금지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올바른 견해라는 이름으로 학생과 학습자들을 제압한다거나 그들의 자립적인 판단 능력을 방해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2. 논쟁성 원칙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학문과 정치에서 다투는 쟁점들은 학교의 수업에서도 논쟁적으로 재현되어야 한다.
3. 학습자 이익 상관성 원칙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학습자(학생) 중심 원칙이라고도 한다. 학생들은 정치 상황과 자신의 이익 상태를 분석할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안내되어야 한다.
보이텔스바흐 합의가 진정으로 지향하는 정치교육의 목적은 '정치적 판단교육'이다. 무엇보다 교사들은 정치적으로 사고하고, 참여하고, 투쟁하는 성인으로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147) 논쟁적 토론으로 문제 해결에 이를 수 있을 때까지 최소합의를 깨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가능하다. 기본적으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사안에 대한 완전한 합의가 아니라 불합의를 전제해야 한다. 따라서 교실을 민주적 공론장으로 전환시켜야 한다.(149)
학생들은 가르침의 대상이 아니라 배움의 주체다. 존엄성을 가진 존재다. 학생을 단순히 시민이 되기 위해 공부하는 이가 아니라 스스로 성장하는 한 사람의 민주시민으로 생각해야 한다. 보이텔스바흐 합의의 제3원칙인 학생중심 교육 원칙이다. 학생을 민주시민으로 길러 내기 위해서는 수업 시간에 사회 현안에 대한 토론논쟁교육을 권장해야 한다고 장은주 교수는 강조한다. 다만 정치적 의견이 강한 교사들에게 아이들이 일방적으로 세뇌당하고 휘둘릴 가능성을 경계하고 우려한다. 보이텔스바흐 합의에 따른 교육은 이런 경계와 우려를 불식할 수 있다고 본다. 각성된 시민의 감시와 견제, 참여만이 민주적 시민성이다. 조정래의 장편소설 『천년의 질문』에서 줄기차게 강조하는 것도 권력기관에 대한 시민들의 감시감독이다. 시민은 형성되고 교육이 되어야 한다. 『시민교육이 희망이다』장은주 교수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한국적 맥락에서 '교육의 중립성'이라는 말이 교육의 탈정치화로 오해되거나 악용되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교육 현장은 가능한 모든 종류의 정치적 사안들을 회피하려 했다. 헌법에 보장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원칙을 '정치적 진공 상태'로 여겼다. 어떤 방법을 선택한다는 것은 중립적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교사가 모든 사안들에서 언제나 일관되게 중립적일 수는 없다. 교사가 마치 아무런 의견이 없는 사람인 듯 보이는 것도 학생들에게 잘못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무견해나 무관심이 바람직하다는 식으로 여겨 질 수 있다.(133) 교사는 다양한 입장들 사이에서 '균형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학생들이 오랜 배움의 과정에서 가능한 한 다양한 정치적 관점을 가진 여러 교사들을 만나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134)
민주주의 사회에 살기 위해서는 누구나 민주주의를 배워야 한다. 인성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착하게 살기식 계몽운동으로는 성숙을 기대할 수 없다. 민주주의 학습 과정은 비판과 논쟁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주장과 반박, 논증과 설득, 경쟁과 쟁투, 대안과 타협, 조정과 합의, 유보와 미결은 민주주의 정치 과정의 구성요소다. 민주주의를 존속하기 위해서는 타협하고 합의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필수다.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갈등 조정과 합의 모델이다. 일종의 교육을 위한 가이드라인이며 최소합의일 뿐이다.
이제 교육 현장에서도 갈등이나 이견을 백안시하지 않고 오히려 정상적일 뿐만 아니라 혁신을 위한 발판으로 이해하는 '관용'과 '포용'의 문화가 확립되어야 한다. 학생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문화가 필요하고, 학생들이 차이와 갈등을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132)
교사는 학생들이 다른 사람의 처지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역지사지의 자세를 자극해야 한다. 의견이 다른 상대를 악마화하거나 적대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른 의견들도 그 나름의 합리적인 토대를 가질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충분한 숙고를 통해 때로는 합리적인 근거 위에서 자신의 관점을 바꿀 수도 있음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135) 학생들이 정치적 문맹자가 되기 원하는가?
독일의 정치교육의 근간이 된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통해 우리 학교 현장에서 어떻게 민주시민교육을 실천해 가야 할 지 많은 이들이 연구하고 있다. '최소합의'라는 큰 틀안에서 극단적인 대립을 지양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토론을 통해 숙의 민주주의를 실현해 가도록 하는 것이 이 시대 우리 앞에 놓인 당면 과제임에는 틀림이 없다. 정치 폭력과 국가 범죄, 역사 부인과 독재를 변호하는 세력 앞에는 단호한 의견 제시가 필요하되 다양한 해석이 필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논쟁의 과정이 필수적이다. 민주시민교육이 필요한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