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에도, 서어나무에도, 팽나무에도 푸른 잎들 위로
보랏빛 등꽃이 주렁주렁 구름처럼 피었다.
5월은 연보랏빛 등꽃이 피는 때다. 등꽃의 기억은 학창시절 교정에 해가림 틀로 만들어진 등나무시렁 아래서 사소한 고민들을 털어놓던
해맑은 친구의 모습과 함께 떠오른다. 연보랏빛 등꽃이 주렁주렁 피어나면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의 머리 위로도 꽃잎이 한 장씩
떨어지곤 하던 그 등나무시렁.
학교나 관공서나 쉼터 같은 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등나무의 형태는 지주목을 세우고
등나무를 심어 자라게 한 일정한 틀 안의 모습이다. 그런데 범어사 등나무군락을 찾아가보면 한껏 자유로이 제 모습으로 자라는,
동물처럼 움직이는 듯한 등나무들을 볼 수 있다.
부산 금정산 기슭에 자리잡은 범어사를 향해 오르는 길. 울창한 노송
숲을 지나 일주문 닿기 전, 왼쪽으로 보면 '등나무군생지'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범어사로 곧장 오르는 사람들은 늘 많은데
이곳으로 향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일주문 닿기 전 왼쪽 군생지 표지판
주말께
절정… 바닥에도 보랏빛 수
다른 나무 오르는 모습 '사랑' 전설
산죽이 자라고
있는 입구에는 안내하는 아가씨처럼 층층나무 한 그루가 하얀 꽃을 한창 피우고 서있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 키를 넘는 바위들이
뒹구는 계곡이 나오고 그 위로 잘 만들어진 나무다리를 따라 들어가면 생각지 못했던 원시림 풍경이 펼쳐진다. 등나무, 서어나무,
곰솔, 비목나무, 참나무, 팽나무, 때죽나무들이 거목으로 자라 하늘까지 닿은 아래로 잇달아 어린 나무들도 키를 세우며, 또 그
아래는 조릿대와 이끼와 야생화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1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야 이루어진다는 극상림의 숲이다.
등
나무는 이 숲의 거의 모든 나무들을 감고 오르며 자란다. 봄이 시작될 무렵 이 곳의 나무들은 각각 다른 모양의 잎들을 틔웠는데
5월에 이르면 등줄기로 뒤덮여 모두 보랏빛 등꽃을 피운다.
지금 계곡에는 가득 등꽃이 피어 밝은 보랏빛 구름송이를
만들었다. 등운곡(藤雲谷)이라는 이름 그대로다. 등꽃이 피지 않았을 때의 자연림 모습도 웅장하고 신선한 감동을 주지만 지금 등꽃이
핀 계곡은 아주 다른 모습이다. 500여 그루의 등나무가 모두 꽃을 피우고 가지에는 갖가지 새들이 앉아 노래하니 1년 중 가장
화창하고 순하고 곱다. 길을 따라 걸으며 맡게 되는 등꽃의 향긋한 냄새는 어릴 적 학교에서 예쁜 여선생님이 지나가고 나면 주위에
남던 그 좋은 냄새 같다. 아카시아의 짙은 향과는 다르다.
아직 다 피지 않은 꽃송이들도 많아 아마 이번 주말쯤이면
더 아름다운 장관을 이룰 것 같다. 꽃잎이 한 잎씩 바람에 떨어지기도 하여 주말이면 바닥에 보랏빛 수를 놓을 거다. 그 길에서
만난 한 등산객은 해마다 등꽃이 필 때 찾아온다며 올해 등꽃이 지난해보다 훨씬 예쁘다고 말해준다. 그는 이 길을 따라 원효암으로
간다고 한다.
다른 나무의 줄기를 휘감아 올라가며 사는 등(藤)나무는 칡 갈(葛)자와 함께 일이 얽히어 풀리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갈등(葛藤)'이란 말을 만들게 했다. 숲에서 공생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 옛선비들은 저 혼자 살겠다는
소인배에 비유하여 등나무를 싫어하기도 했다. 이 곳 범어사 등나무군락도 천연기념물로 보호해주었더니 주위 다른 나무들을 모두
뒤덮어버렸다. 그래서 몇 년 전, 너무 심하게 뒤덮고 있는 등나무 줄기를 잘라주어 같이 살도록 조치를 해주기도 했다.
그
런데 보기에 따라서 다른 나무를 감고 오르는 등나무의 모습에서 애정을 본 사람들은 사랑의 전설을 만들기도 하였다. 등나무 잎을
달여 먹으면 사이가 안 좋은 부부라도 금슬이 좋게 된다 하고, 등꽃을 따서 말려 신혼부부의 베개 속에 넣고 자면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 하여 이 꽃을 따가기도 한다는 얘기가 있다.
등꽃이 지고 나면 봄도 진다. 여름날이 시작된다. 등나무군락을
지나 빽빽한 삼나무 숲길은 머릿속이 시원해지는 길이다. 범어사 안에는 청련암 가는 길목에 서있는 수령 580년 된 은행나무와
대웅전 앞의 금송, 일주문 뒤편의 보호수 소나무, 관음전 앞의 웅장한 향나무, 성보박물관 앞마당의 반송과 청정한 대숲 등 찾아볼 큰
나무들이 보물처럼 많다.
범어사에서 내려오는 길을 차를 타지 않고 설렁설렁 걸어서 내려온다. 길가 아득하게 키가 큰
오동나무에도 지금 연보라색 꽃들이 핀다. 사하촌인 상마 마을과 하마 마을 사람들과 아주 옛날부터 정답게 살았을 큰나무들.
나무들은 말없이 있지 않다. 제각각 생긴 모습과 꽃으로 제 이야기와 몸 부비고 살았던 사람들 이야기를 건넨다. 걷고 있는 동안
눈은 환해지고 마음은 다정해져 혼자 걸어도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