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이동 소고별서를 이웃해 걸으며
조장빈(인문산행위원회)
만화상회 자리에 근사한 커피점이 생겼다. 계류를 따라 오르니 맞은편 콘도로 작은 다리가 놓였고 강북구청에서 재간정이 있던 자리라고 팻말을 걸었다. 북한산 공단 구역 밖이라 구에서 걸었나. 재간정(在澗亭)은 우이구곡(牛耳九曲)의 9곡으로 달성 서씨 집안의 별서로 서명균(徐命均, 1680∼1745)주2)이 고쳐지은 “소고별서(嘯臯別墅)”의 누정이다.
정수영(鄭遂榮)의 《한임강유람도권》의 재간정(在澗亭)
옛 자취는 알 수 없으나 정수영(鄭遂榮)의 《한임강유람도권》의 재간정(在澗亭)이 이곳을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 한상윤은 “서영보의 시문과 이옥의 문장 속 재간정의 묘사가 비슷하여 두 곳 중 어디였는지 현재로서는 확정짓기 힘들다. 재간정이 비슷하게 묘사된 까닭은 두 곳 모두 북한산의 계곡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재간정>에는 앞서 그려진 한강변 선유 여행에서 강의 표현과 달리 계곡이 그려져있다. 북한산 산봉우리를 배경으로 재간정이 묘사되었으며, 그 앞에는 작은 연못과 주변의 다양한 종류의 나무도 함께 표현되었다.”고 하며 정릉 손가장과 우이동 두 곳의 재간정이 모두 북한산 자락의 계류에 임해 지은 정자로 구분이 어렵다고 하였으나, 이태호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정수영이 현장 사생 능력이 부족한 탓에 그림으로 실경 위치를 확정하기 힘들지만, <재간정> 그림에서 원경 먹 선묘의 간소한 산 모양이 우이동에서 보이는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의 삼각산을 닮은 듯하다. 실경을 담은 포인트에서 파노라마 사진으로 잡아보니 그 위치도 얼추 맞아떨어진다.”며 정수영이 그린 실경은 이곳 우이동 소고별서의 누정으로 추정하였다.
서영보가 별서를 고쳐 짓고 노래한 시를 보면, 우이동부(牛耳洞府, 소귀천 계곡)의 입구에 놓인 다리를 건너 사립문을 들어서면 언덕에 정자(亭臺)인 재간정이 있고 산자락에 기대어 집이 있었다. 시내의 물을 끌어들여 연지를 조성하였고 전원은 뽕나무와 대 그리고 단풍과 잣나무를 심었으며 집 뒤로 대밭을 둘렀고 재간정은 하얀 너럭바위와 짙은 숲을 이룬 물가의 바위(東臯石) 위에 있으며 난간을 두르고 격자창문을 달았다. 부엌이 있는 내실에는 묵향이 은은한 서재가 있었으며 삼경(三經)과 사서(四書)를 비롯한 고전이 빼곡하였다고 하여 그림의 상황과 어긋남이 없어 보인다.
소고(嘯臯)의 후손 서상수(徐常修, 1735~1793)는 ‘감상지학(鑑賞之學)의 절묘한 경지를 깨달은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감식(鑑識)이 뛰어났고, 문장에도 능하였으며, 음악과 고전 등의 교양도 깊었는데, 1768년 무렵 원각사지(圓覺寺址) 부근에 살면서 백탑청연(白塔淸緣)의 박지원(朴趾源)·이덕무(李德懋)·이서구(李書九)·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 등과 교류하였다. 당시 삼각산 유람에 나선 중인들이 우이동의 서씨 집안의 별서를 찾은 것은 이때문인 듯. 백탑 일행의 이덕무는 재간정에 올라 다음과 같이 시를 읊었겠다.
서씨(徐氏)의 동장(東莊)에 놀면서
짝짝이 손을 잡고 발걸음 가지런히 하여
儔侶聯翩步屧齊
도봉산 서편에 있는 서씨의 정자 찾아가네
徐家亭子道峯西
그윽한 꽃은 중을 만나 이리저리 떨어지고
幽花漠漠逢僧落
밝은 달은 부산히 손을 맞느라 낮게 뜨네
白月紛紛向客低
전처럼 얽힌 마름은 그림자 많은 나무인 듯
依樣亂萍多影樹
칠분쯤 차가운 비는 잘 울리는 시내인 듯
七分寒雨善鳴溪
두 번째 유람 때맞추어 제비 따라와서
重遊政逐新來燕
함께 잠자니 도리어 대대의 깃듦과 같네
幷宿還同對待栖
시냇가에 말없이 우뚝 섰으니
溪頭無語立亭亭
고운 아지랑이 끝없이 푸르구나
嵐靄娟鮮透底靑
봄 만난 기수 이제 막 싹이 트고
祇樹逢春初蘊秀
비 내린 구암 더욱더 신비롭다
癯巖歷雨最鍾靈
술값은 사시사철 빚만 질 것인가
酒錢未必尋常負
꽃 소식 이제부터 이십번풍(二十番風) 지났구나
花信從它二十零
나무와 돌뿐인 곳에 담박하게 살았지만
木石之濱棲澹泊
도리어 예스러운 모습 개운한 기상 다시금 보겠네
却看貌古又神醒
올해는 봄꽃이 한꺼번에 요란을 떨며 구곡을 꾸몄다. 천변의 무성한 목련도 잎을 진작 떨구었고 녹음이 푸르다. 늦은 밤 짧은 구곡을 올라 송음강(松陰矼)을 건너 초가집 못미처 홍씨 집안의 수재정(水哉亭)터를 돌아내리며 막걸리 한 잔 하는 게, 반복되는 요즈음 일상이다. 다행인가, 아직 술값을 빚지지는 않았다.
관암 위로 샛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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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윤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선유(船遊)와 유산(遊山)으로 본 정수영(鄭遂榮)의 《한임강유람도권》 고찰〉, Received : 2019.03.20 Accepted : 2019.11.22 Published : 2019.12.20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16 – 우이9곡 재간정(在澗亭) : 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여섯 번째, 한국이미지연구소 http://visualanguage.org/archives/59074
*이덕무, 〈서씨(徐氏)의 동장(東莊)에 놀면서〉, 청장관전서 제9권 아정유고 1(雅亭遺稿一) 시, 한국고전종합DB
첫댓글 좋은 자료입니다. 그림의 화제 글씨가 작아 볼 수 없습니다. 그 부위만 따로 확대해 올려주면 고맙겠습니다.
이사님 예리하십니다.^^;;고전에도 해박하시니, 짚으신 부분이 이 그림의 장소를 북한산의 두 재간정으로 비정하는 중요 단서가 된 부분입니다.
내일 논문에서 언급한 부분을 올리겠습니다. 건강하십시요.
@조장빈 현재까지 정확한 장소가 밝혀지지 않은 곳으로 15번째 장면 <在澗亭>이 있다(도 23). 앞선 연구에서는 여주에 있는 在澗 任希聖 (1712~1783)의 정자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화면 상단에 쓰여진 강관의 제발문을 통해 임희성의 정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강관의 제발문은 "재간 임공은 우리 무리가 가장 존앙하는 분인데 일찍이 이런 정자가 없으셨으니 어찌 개탄치 않으리오. 강 관이 씀(在澗任公 吾儕中最尊仰 而曾無此亭寧不慨歎 (寬書)"의 내용이다. 강관이 말하고 있는 재간 임공은 임회성을 말한다. 임희성은 강세황과 절친한 사이이자 같은 소북계 인물이다. 강관은 아버지와 벗이었던 임희성에 대한 존경하는 마음을 제발문을 통해 드러내었다. 이처럼 강관의 제발은 정수영이 그린 재간정이 임희성과 관련 없는 곳임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단서라 할 수 있다.
@조장빈 네! 이제 알았습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고맙습니다.
* 나도 우이동으로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