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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시기·질투심을 내려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겠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특별한 관계는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큰 것 같습니다. 가질 것 다 소유한 사울 왕에게 다윗은 가장 충직한 신하였습니다. 항상 자신에게 충성을 다했고, 전쟁에서는 승승장구했습니다. 왕으로서 박수를 쳐주고 상을 줘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에게는 큰 사람으로서의 넉넉함이 부족했습니다. 대신 그의 내면에는 뭐든 잘하는 다윗에 대한 시기 질투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저도 반성할 것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진정한 스승은 제자가 자신을 넘어 더 큰 바다로 나아가게 하는 사람임을 잘 알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선배로서, 책임자로서 형제들의 일취월장과 장점에 대해 내 일처럼 기뻐해 주고, 박수를 쳐주고 있는가? 더 큰 걸음을 걸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지지해주고 있는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사무엘기는 사울과 다윗 사이가 갈라지는데 단초가 된 사건을 소개합니다.
아직 볼이 빨갛던 양치기 소년 다윗이 어느 날 보기만 봐도 겁에 질리는 어마무시한 골리앗 장군과의 일대일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게임도 길지도 않았습니다. 단 한방의 돌팔매로 속전속결로 게임을 끝내버렸습니다. 그 싸움으로 인해 풍전등화 신세였던 이스라엘의 군사들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개선 길에 올랐습니다.
필리스티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사울왕이 다윗과 함께 돌아오자 성읍에서 여인들이 나와 손북을 치고 환성을 올리며, 악기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사울 임금을 맞았다. 거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흥겹게 부르는 노랫 가사 한 구절이 사울왕의 폐부 깊은 곳을 찔러버렸습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1 사무엘 18,7)
사울은 그 노랫 가사 한 구절에 몹시 화가 나고 속이 상했습니다. 순식간에 기분이 잡쳤으며 시기·질투의 화신이 되어버렸습니다. 갑자기 제대로 한번 빡친 것입니다. 태평양 바다보다 더 넓고 인자하던 사울의 마음은 송곳 하나 꽂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좁아지고 말았습니다.
수시로 솟아오르는 시기·질투심을 그때 그때, 틈나는 대로 강물에 흘려보내야겠습니다. 누가 잘되면 시기·질투하지 말고, 마치 내 일처럼 크게 기뻐해 줘야겠습니다. 특별히 후배들, 젊은 세대가 떠오르면,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큰마음으로 넘겨주고 내려서야겠습니다.
어떻게든 마음을 잘 다스려야겠습니다. 부단히 마음 정화(淨化)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마음속에 가득 찬 미워하는 감정,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시기·질투심을 내려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겠습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 같은 경우 수도 공동체 내 동료 자매들로부터 엄청난 시기·질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데레사는 시기·질투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상냥히 대했습니다. 더 기쁘게 냉대를 열심히 참아냈습니다.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보이는 동료 자매를 더 깊이 사랑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오락 시간이면 일부러 가장 자신을 싫어하고 괴롭히는 자매 곁으로 다가가 앉았습니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4년 나해 연중 제2주간 목요일
<휘둘리는 사람이 휘두른다>
복음: 마르코 3,7-12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나 악령에게 절대 휘둘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사람들이 기적을 얻으려고 그분 옷에 손을 대려 하자 예수님은 배에 타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악령들도 그분만 보면 달려들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악령 들린 칭찬은 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허락 없이는 칭찬도 하지 못하게 막으십니다.
자유는 인간 존엄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런 이유로 에덴 동산에 선악과도 있었고 뱀도 있었습니다. 저절로 생겨난 것들이 아니라 주님께서 마련하신 것들이었습니다. 뱀은 특별히 인간의 자유 의지를 상징합니다.
“뱀은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창세 3,1) 뱀은 타락한 천사라기보다는 주님께서 어떤 연유로 인간이 유혹 받음을 가능하게 하도록 창조하신 동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마치 뱀을 밟은 성모님처럼 뱀의 유혹을 하찮게 여겼어야 합니다.
어쨌건 하느님은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인간에게도 당신을 배신할 자유를 주셨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에게도 휘둘리지 않으셨기에 사람들을 마구 휘두르는 분이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자유를 소중하게 여기는 이야말로 타인의 자유를 존중해줍니다. 성경에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일 생각이 없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에 휘둘려 그 일을 합니다. 그런 헤로데와 같이 우유부단한 사람이 타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독재자가 됩니다.
차르 니콜라스 2세는 러시아 마지막 황제입니다. 그는 일반 시민들에게는 폭군이었습니다. 그의 제관식 때 3천 명 가까운 사람들이 압사 당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1905년의 피의 일요일 사건도 유명합니다. 노동자와 그 가족을 포함한 평화로운 시위자들은 니콜라스 2세에게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으로 행진 했습니다. 시위자들은 더 나은 근무 조건, 더 많은 개인의 자유, 선출된 국회의원을 요구했습니다. 이때 황실 근위대가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해 천 여 명이 사망하였습니다. 러일 전쟁이나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는데 많은 군인이 죽는 것 외에는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폭군은 정말 누구에게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을까요? 그 반대입니다. 그는 아내 알렉산드라와 라스푸틴이라는 정교회 수사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알렉산드라가 낳은 유일한 아들이 혈루병을 앓자 신비주의에 빠진 아내가 폭력적이고 음란한 라스푸틴을 소개합니다. 니콜라스는 알렉산드라와 라스푸틴이 은밀한 관계라는 소문이 이는 데도 불구하고 아들을 살리자는 희망으로 그들의 모든 뜻에 복종합니다. 그렇게 러시아 왕국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라스푸틴은 물론이요 니콜라스 2세와 일가족은 모두 총에 맞아 사망합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무언가 잃을 것이 있으니 휘둘립니다. 잃을 게 없는 이만 자유롭고 자유로운 이만 자유를 보장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 있는 이는 자기 자유도 잃고 타인의 자유도 빼앗습니다. 니콜라스 2세는 아내와 아들 때문에 모든 것을 빼앗고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이 세상에서 잃을 게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는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한 인물을 그렸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가 가진 것은 목숨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성의 자유를 위해 싸웠습니다. 이런 사람이 오히려 타인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자유의 귀중함을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타인이 자신을 휘두르려 할 때도 ‘노’(No!) 하며 모든 결정을 자기 자유 의지로 하는 사람입니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7-12: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조용한 곳에 가서 지내려 하시지만 그러실 수가 없는 모습이다. 예수님의 명성이 사방으로 전파되어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8절).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10절) 많은 군중이 그분을 만지려 했고 또 만졌지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그분을 붙잡을 때도 만졌고, 결박할 때도 만졌고 매달 때도 만졌다. 만지기는 했지만 악하게 만짐으로써, 자신들이 만진 분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을 만져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람이라고만 여긴다면, 우리는 그분을 땅에서 만진 셈이다. 그러나 그분을 주님이시라고 여기면 그분이 아버지께 올라가는 바로 그때 그분을 만지는 것이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11절) 악마도, 하느님의 자녀도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베드로도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말했고, 악마도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줄 압니다.”(참조: 마르 3,11; 루카 4,41)라고 말했다. 같은 고백이지만, 같은 사랑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베드로에게서는 사랑을 보지만, 악마에게서는 두려움을 본다. 그분께 사랑을 느끼면 자녀이지만, 그분이 무서우면 자녀가 아니다.
이것이 악마와는 다른 우리 신앙인의 믿음이다(참조: 갈라 5,6). 그들이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루카 4,34)라거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 3,11; 루카 4,41)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한다면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 마르 5,7; 루카 8,28)라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으로 그분을 고백하고 생활해 나가는 것을 소명으로 삼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 사랑을 실현하시기 위하여 조용히 쉬실 시간이 없으셨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의 삶에는 휴가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항상 예수님 안에 산다고 하면 그분을 언제나 잘 알아볼 수 있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둔한 영적 감각과 교만에 싸여있기 때문이다.
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깊어지는 믿음이길 기도드립니다.
몰려왔다 몰려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직도 제대로 믿지 못하는 우리의 신앙입니다.
예수님께로 가는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의 길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결코 서로를 속이지 않습니다.
작은 일에 충실하고 작은 것에 감사하는 일입니다.
큰 것만을 가지려 하는 욕심에서 벗어날 때 마음을 건네는 믿음이 될 것입니다.
깊어져야 배를 띄울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상에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예수라는 이름 앞에서 깊어져야 할 우리의 신앙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나이다."
5)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라는 책을 보면, 20세기 초 황금기를 달리고 있던 미국으로 아메리칸드림을 가슴에 품고 성공을 바라는 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미국행 배 승선권을 구입하려고 열심히 노동했습니다. 드디어 승선권을 사고서 배에 오른 그는 돈을 아껴야 했습니다. 더는 쓸 돈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돈을 아끼려고 식사 때마다 식당에서 사람들이 남긴 우유와 빵 그리고 치즈 조각을 모아서 끼니를 때우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지켜본 식당 지배인이 그가 식사비를 아끼기 위해 그렇게 식사한다는 이야기를 알고는 직접 말해주었습니다.
“손님, 승선권에 식당 이용권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셨어요?”
이 청년은 배에서 굶주림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알기만 했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겠지요. 사서 고생한다는 말도 있지만, 굳이 당연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알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함께함 그 자체로 주님의 축복은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그러나 이를 알지 못하면서 주님과 온전하게 함께하지 못합니다. 당연히 주님의 축복도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의 자녀가 됨은 큰 은총과 주님의 큰 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주님과 함께하는 길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를 주님께서는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고 또 보여주셨던 사랑은 ‘악’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사랑에 집중하면서, 사랑의 삶을 살 때 우리는 주님의 축복 안에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로 많은 사람이 몰려왔습니다. 특히 병자들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들이 몰려왔지요. 그들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외면받을 수밖에 없었지요. 죄의 결과로 병에 걸린 것이고,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 역시 공동체에서 함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에서 제외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쳐 주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주셨던 것입니다. 사랑의 삶을 다시 살 수 있도록 이런 은총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 다가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가 주님과 함께 살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더 알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주님의 은총 안에서 우리 모두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하는 친구들의 기억이 마음속에 있는 한 나는 인생이 좋다고 말할 것이다(헬렌켈러).
6)이병우 루카 신부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3,11)
'함구령!'
오늘 복음(마르3,7-12)은 '군중이 호숫가로 모여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을 때, 여러 지방에서 큰 무리가 예수님께로 모여듭니다. 그들은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십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아보지 못하는데, 놀랍게도 악령들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하게 알아봅니다.
더러운 영이 고백한 예수님의 신원이 널리 알려져야만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원을 세상에 알리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왜, 함구령을 내리셨을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희생 제물, 속죄 제물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는 아직 이때,
곧 십자가 죽음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고통과 기쁨이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입니다.
'참부활'은 죽음 그 너머에 있고, '참기쁨'은 고통 그 너머에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믿는 이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죽음 없는 부활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지?
고통 없는 기쁨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8,34)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첫댓글 복음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마르 3, 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