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징과 이적을 찾을 것인가, 말씀을 찾을 것인가?
-김귀웅 신부-
그러지 말라고 해도 어디 성모상에서 피눈물이 흐른다는 이야기에 많은 사람이 찾아 나섭니다. 표징과 이적에 눈이 번쩍 귀가 번쩍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적 나약함의 표지인 것 같습니다. 몇 년 전에 외국에 있는 성모 발현지를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기도하더군요. 하지만 그런 중에도 해가 하늘 한가운데에서 빙글빙글 돈다느니, 마른하늘에 무지개가 보인다느니, 살랑거리는 바람결에 성모님 옷자락이 만져진다느니 하는 또 다른 표징들에 무척 관심이 많은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 이상한 일들을 경험하는 것도 신앙에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거기에 매달리는 신자들의 모습은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표징과 이적이 본질이 아님을 지적하는 것이겠지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바로 그 순간 병들었던 아들은 치유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행동했던 것, 거기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3)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결국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서려고 한다면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음”(요한 6,68)을 알기에 그분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바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미 용실에 갈 때, 저는 아주 편안한 복장을 하고 갑니다. 왜냐하면 워낙 머리카락이 뻣뻣해서 잘린 머리카락이 옷 속에 들어가면 너무나 불편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편하게 갈아입을 수 있는 옷을 차려 입고 미용실에 갑니다. 그런데 우리 동네의 미용실 자매님은 이발을 하면서 너무 많은 것을 물어 봅니다. 하긴 이발을 하는 동안 아무 얘기도 하지 않으면 서로 서먹서먹할 수도 있겠지요. 한 번은 제게 이런 질문을 던지더군요.
“결혼하셨죠?”
저 는 당연히 “안 했는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쏟아지는 말들. “아니, 아저씨! 진짜로 안 하셨어요? 설마... 거짓말이죠? 왜 결혼 안하셨어요?” 제 신상에 대해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안 했어요.”라고 간단히 답했습니다. 이에 “혹시 어디 문제가 있어요?”라고 말하면서, 아주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더군요.
“저 가톨릭 신부에요.”라고 말하면 아주 간단하게 해결 되었을 것을, 이야기하지 않아서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사람 취급을 받게 되었지요.
사 실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면 복잡한 문제의 반은 줄어듭니다. 그런데 귀찮다는 이유, 나를 어떻게 볼까 라는 생각, 자신을 더욱 더 좋은 모습으로 드러내려는 욕심을 가지고 자신을 거짓으로 드러내면 그만큼 힘들어지는 것은 내 자신일 뿐입니다.
주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앞에 굳은 믿음을 가지고 솔직한 모습으로 나아가면 언제나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속이고 의심하면서 나아갔을 때에는 항상 침묵하셨지요. 이는 오늘 복음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한 왕실 관리가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고 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표징과 이적을 믿지 않을 것이라면서 거절하십니다. 하지만 이 왕실 관리는 포기하지 않지요. 이제는 단지 같이만 내려가 달라는 청을 함으로써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으로부터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직접 아들을 보고 어떤 치유의 어떤 행동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왕실 관리는 굳게 믿고 집으로 돌아갔지요.
왕실 관리라는 지위를 이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권력을 이용하기보다는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이 사랑하는 아들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어떻게 나아가고 있었을까요? 혹시 자신을 합리화 시키면서 협박과 공갈의 말로 주님께 나아갔던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온갖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말만 했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 앞에서는 가장 겸손한 모습을 갖춰야 합니다. 즉, 자신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겸손한 믿음만이 주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신념은 많은 의혹을 낳는다. 의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건 믿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헨리 데이비드 소로).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요한4,50)
-김대열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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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라는 말에 대해 잠시 묵상해 본다.
믿는다는 말은 우선 그 대상이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그 대상을 믿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먼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신뢰라는 말을 생각해본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조차 쉽게 깨지는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이다.
이는 불완전한 인격체들 간의 만남이 가져다 주는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보이고 만져진다고 해서 그리고 시간을 함께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결국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 누군가가 보여준 구체적인 삶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보이는 것도 없다.
들리는 것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그것은 느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세계는 논리를 뛰어넘는다.
이론적으로 설명을 다할 수 없는 세계이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어느 날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우리의 기쁨과 고통, 불안과 평화와 같은 삶의 체험들을 통해서 그분의 내미신 손을 느끼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우리의 곁에 계시며 손을 내밀고 계시다.
다만 그 내미신 손을 느끼느냐 마느냐는 각자의 삶이 만든 마음의 상태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삶 안에서 그분의 내민 손을 잡기까지 서로가 다른 시간을 가지게 된다.
그러기에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이 하느님을 빨리 만날 수 있는 지도 모르겠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예수님을 찾았다 해서는 안 된다.
그분께서 부르셨기에, 그것도 애타는 마음으로 부르셨기에 그분 앞에 서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뜻한다.
모자랄 수 밖에 없는 우리는 완전한 응답으로 그분 앞에서 살 수 없다.
수없이 넘어지고 의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걱정만 할 일은 아니다.
그분께 의탁하는 마음이 있는 한, 하느님께서 모든 길을 이끌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그 상대가 완전하신 하느님이라는 것에 희망을 가져야 한다.
< 원하려면 진정으로 원하라 >
-전삼용신부-
김창옥 교수는 요즘에 강사로서 우리나라에서 매우 유명합니다. 김창옥 교수가 이렇게 훌륭한 강사가 되었지만, 그에게도 아픔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가 사춘기가 되었을 때, 자신의 집이 가난하고 자신의 부모님이 사이가 좋지 않고, 또 자신의 아버지가 놀음에 빠져 있었고, 몸도 성치 않아 귀가 안 들린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창피함을 느끼고 집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공부를 잘하지는 못하였는지 인문계가 아닌 공고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친구들은 가방에 책이 들어있었지만, 자신의 책가방에는 드라이버와 인두가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스스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강한 척 하고 항상 밝은 척 하며 남을 많이 웃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공부는 정말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학에 가고 싶어서 전문대에라도 시험을 쳤지만 떨어졌고 어머니가 자신을 창피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도 시험이 떨어져서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냥 장난처럼 “그냥 하던 대로 해~”라는 말뿐이었고, 그래서 정말로 죽기 위해 바닷가로 갔습니다.
그 바닷가에 자기보다 먼저 와 있는 흰 옷을 입은 여자가 있더랍니다. 말을 건넬 틈도 없이 그 여자는 치마를 뒤집어쓰고 뛰어내렸는데, 거짓말처럼 중간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귀신을 본 것이었습니다. 죽더라도 덜 무서운 곳에서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다시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삼수해서 전문대에 합격을 하게 되었고 노력을 거듭한 끝에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강의를 못할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가 차에서 일본에서 안타제조기라 불리었던 장훈 선수의 이야기를 듣고는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장훈 선수가 워낙 잘하자 일본인들은 장훈 선수가 일본인으로 귀화하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장훈 선수는 자신은 한국인이라며 귀화를 거부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타석에 들어섰을 때 일본인들은 장훈 선수를 향하여 욕설을 퍼부으며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야유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장훈 선수는 굴하지 않고 장외 홈런을 쳐버렸고 그 야유를 퍼붓던 일본관객들은 조용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거기에서 주저앉을 거면 아예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시작했다면 끝장을 보아야합니다. 그리고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막상 넘고 나면 내가 만들어 놓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 (Michael Jordan)은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해 열두 살에 MVP로 선정 되었으나 고등학교 때는 학교 대표팀에도 뽑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루드비히 반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은 어린 시절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재능이 없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실제로 그 선생님은 베토벤에 대해 “작곡가로서 그는 전혀 희망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월트 디즈니 (Walt Disney)도 젊은 시절 만화를 그리고 싶었으나 캔사스 시에서 신문 편집자로 일하라는 충고를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창의적이거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도 열 살 때 뮌헨 교장으로부터 “너는 절대로 제대로 자라지 못할 거다”라는 가혹한 말을 들었습니다.
토마스 에디슨 (Thomas Edison)도 어린 시절 교사로부터 “너무 바보 같아서 가르칠 수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마 이런 위대한 인물들을 나열하라면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 위대한 사람치고 한계에 부딪히지 않거나 고비가 없었던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왜 작은 어려움이 발생하면 하려던 것을 포기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인물들은 남들이 그렇게 안 된다는 것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 큰 업적을 이루어냈을까요? 포기하는 사람은 그 벽을 넘을 만큼 절실히 원하고 있지는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좋은 것을 주시기 전에 항상 우리가 그만큼 원하고 있는지를 시험하십니다. 오늘도 두 번째 기적을 해 주시기 전에 당신을 찾아온 왕실 관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는다.”
사실 집에 돌아가다가 종이 관리의 아들이 낳았다는 전갈을 주었고 그 시간이 예수님이 아들이 나을 시간이라고 했을 때와 일치하기 때문에, 그와 온 가족이 믿었다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완전히 믿지는 못했다는 말입니다. 사실 믿음은 믿으려고 할 때 그 믿음의 확정적 증거를 주셔서 더 커지게 되어있습니다. 다만 왕실 관리는 그런 부정적인 대답에도 실망하지 않고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시고 가려고 했기 때문에 그 벽을 넘어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벽을 넘으면 그것이 벽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마라톤을 하다보면 포기하고 싶은 벽에 반드시 부딪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벽을 넘는 유일한 방법은 그냥 처음 한 발을 내디딜 때처럼 또 한 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 발 한 발이 결국 마라톤을 완주하게 만듭니다. 다 뛰고 나서야 애초부터 벽은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려움과 벽은 내가 실망하고 낙심해서 내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원한다면 나를 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삶의 어려움이 닥치고 포기하고 싶어진다면 내가 진정으로 끝까지 달리기를 원하고 있는지부터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희망적인 믿음과 체험적인 믿음
-김찬선신부-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오늘 복음은 왕실 관리의 아들이 치유되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백인대장의 종이 치유되는 얘기와 같은 얘기입니다.
그런데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 있습니다.
우선 마태오, 루카 복음의 백인대장은 이방인이고
오늘 요한복음의 왕실 관리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아들이 치유되고 종이 치유되는 것도 차이라면 차이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차이는 치유를 청하는 사람과 치유해주시는 주님,
이 두 당사자의 서로에 대한 태도의 차이입니다.
둘 다 아들 또는 종의 치유를 청하지만
백인대장이 감히 자기 집까지 와달라고 하지 못하는데 비해
왕실 관리는 자기 집까지 와서 직접 치유해달라고 청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대단한 믿음의 백인대장은 칭찬하지만
왕실 관리에 대해서는 불신적인 태도를 꼬집으시며
와 달라는 청도 거절하고 믿고 가면 치유될 거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고
주님께서 왕실 관리의 불신을 꼬집으시기는 하지만
우리가 볼 때 왕실 관리의 믿음이 없는 것만은 아닙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라고 청함에
주님께서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고 답하시니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고
복음은 기록하고 있고 치유가 이뤄진 것을 보고는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다만 믿음이 부족한 것일 겁니다.
이는 우리와 비슷하지요.
우리도 주님을 믿지만 그 믿음이 많이 부족합니다.
어떤 면에서?
오늘 왕실 관리처럼 표징과 이적 체험을 바라는 면에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들이 살아날 거라는 말씀을 믿고 떠났을 때의 믿음과
아들이 살아난 뒤에 그와 그의 가족이 믿게 된 그 믿음 사이에는
분명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둘 다 믿었지만 체험 전의 믿음은 그럴 수밖에 없는 믿음이라면
체험 후의 믿음은 우러나오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는 희망적인 믿음과 체험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요.
우리 인간은 너무 절박한 상황에 처하면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믿게 되지요.
절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우리 이성적으로 지푸라기를 믿고 붙잡겠습니까?
이것이 믿을 수밖에 없어서 믿는 것이고,
그러기에 아직 완전한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면 절박한 상황만 아니면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상황이 믿게 한 것이지
내가 하느님을 진정 믿어서 믿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진정한 믿음은 그러므로
희망적인 믿음대로 실제로 이루어지는 체험을 한 뒤에야 생기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믿음이 아직 희망적인 믿음이고
불완전하고 나약할 지라도 너무 실망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실망한다는 것은 아직도 교만한 표시이니
실망하기보다는 믿음이 부족함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확고하고 완전한 믿음을 주십사 청하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표징에 대하여
-신대원 신부-
과학만능시대인 현대사회에는 표징이니 기적이니 하는 말이 잘 통하지 않을
것 같은데, 오히려 사람들에게 잘 먹혀들어가는 것을 보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과학이나 수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합니다. 과학이나 수학 공식에 대입하여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콩으로 메주를 쓴다.” 해도 믿지 않으려는 것이 요즘의 세태입니다.
신앙마저도 과학이라는 잣대를 들이댑니다. 그러나 신앙은 과학의 대상이
아닙니다. 신앙이 과학의 대상이라면, 신앙의 대상인 하느님도 과학에 의해
실증이 되어야 합니다. 과학이나 수학은 그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삶의 수단’일 따름입니다. 공기와 물과 바람과 자연의 온갖 현상들,
우리가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일들은 결코 과학으로 풀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셔서 인간에게 주셨다는
그 믿음을 고백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기적’이라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그저 “네 아들은 살아 날 것이다.”라고만
하십니다. 기적은 주님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서만 일어납니다. 오늘 하루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기적을 바라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주신
오늘 하루를 기쁘고 떳떳하게 사십시오. 그것이 곧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적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었다
- 김상태신부-
어느 날 신자 한 분이 수도원으로 영적 상담을 하러 오셨다. 상담을 마치고 나는 그분한테 좀 더 자주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성경을 읽고 묵상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그분은 이런저런 일로 바쁘고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이를 등한히 했다. 그분이 얼마 전 병원에서 정기검진을 받았다. 검사 결과 고혈압과 당뇨 증상이 발견되어 의사는 식이요법과 운동을 권유했다. 그분은 그날 저녁부터 당장 음식을 절제하고 운동을 시작했다. 그분은 의사가 육체의 병에 대해 의학적 수치와 눈에 보이는 결과를 가지고 이야기한 것은 믿었지만, 사제가 영적 병의 치유를 위해 권유한 말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라는 말씀만 믿고 카파르나움으로 돌아갔다. 그 관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결과를 보지 않고도 믿었다. 그는 믿음을 통해 아들의 병을 치유받았을 뿐 아니라 온 집안이 믿고 구원을 얻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다. 우리는 육체의 병을 고치는 의사의 말은 믿고 따르면서 우리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아야겠다.
회개, 새로운 창조
-김찬선신부-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왕실 관리의 아들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얼핏 보기에 주님의 치유에 사랑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마뜩치 않지만 그래도 고쳐주지 않을 수 없으니
무성의하게 고쳐주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어제 태생소경의 경우는 청하지도 않는데도 다가가서
묻지도 않고 눈을 뜨게 하십니다.
좀 더러운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눈에 발라주기까지 정성껏 치료하십니다.
이에 비해 오늘은 그냥 “알았으니 가봐!”하는 식입니다.
왕실 관리라 뭔가 시건방졌을까요?
기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라고 나무라시는 것으로 보아
청하면서도 완전한 믿음을 보이지 않았을까요?
아무튼 못마땅해 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저도 종종 그런 때가 있습니다.
뭔가를 청하는데 그의 태도나 짓거리를 보면 들어주고 싶지 않지만
저의 고상한 품위(?)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청을 들어주는 경웁니다.
저의 고상한 품위가 누구에 의해 좌우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누가 잘 하면 들어주고 잘못하면 안 들어주거나,
누가 사랑스러우면 들어주고 미우면 안 들어주거나,
겸손하게 청하면 들어주고 건방지게 청하면 안 들어준다면,
그것은 진실한 사랑, 높은 사랑이 못 되지요.
모세도 이런 뜻에서 하느님께 약을 올리고 도전했지요.
당신의 사랑에 배반을 하고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께서 벌을 내리시려 할 때 모세는 어찌 당신답지 않게
그러시려고 하느냐고 여쭙고 주님은 벌을 거두십니다.
실상 하느님께서 우리의 짓거리를 봐서 사랑을 베푸신다면
사랑 받을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시편 기도처럼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감당할 자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것을 보아 사랑도 주시고
청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당신 사랑의 원리에 의해 사랑하시고,
당신 사랑의 원리에 따라 꾸짖고 벌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는 하느님의 이런 마음을 대변합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매번 새로운 창조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전의 우리의 행위들은 기억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쩨쩨하게 우리 과거의 잘못을 들먹이며
그것을 약점 잡아 꼼짝 못하게 하시지 않으시겠답니다.
과거의 우리에서 우리를 풀어주고 새로운 우리가 되게 하시겠답니다.
그래서 이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리라.”
새 창조로 우리가 당신의 즐거움과 기쁨이 되게 하시겠답니다.
하는 짓마다 밉상스럽고 못마땅한 우리가
하느님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존재로 바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사순시기,
주님의 이 새로운 창조의지에 우리도 사랑으로 부응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회개일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 황인수 신부-
제 고향 마을에 자식을 앞세운 어머니가 한 분 계십니다. 스무 살 무렵에 세상을 떠난 아들을 늘 잊지 못하는 그분은 산속에 있는 아들 무덤에 가 앉아 계시는 일이 많습니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다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옛말도 있지만 가슴에 묻는다는 것은 자식의 생명이 곧 나의 생명과 같기 때문일 겁니다.
오늘 병으로 죽게 된 아들 때문에 예수님께 와서 함께 가 주십사 간청하는 카나의 고관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모님을 통해서 이 세상에 왔습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면 누구나 부모님을 생각하게 되지요. 가끔 또래 친구들을 만나면 여자 친구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간을 두고 그 친구들을 만나다 보면 ‘엄마가 아이에게 생명을 준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지요. 친구들의 얼굴에는 조금씩 주름살이 늘어가고 점점 더 나이 드는 티가 나는 데 비해 아이들은 점점 더 예뻐지고 생기 있게 자랍니다. 자식이 생명을 피워갈수록 부모는 기쁩니다. 그의 생명과 나의 생명이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식이 생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부모는 하느님께 달려갑니다. 우리 생명의 참 주인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카나의 고관을 예수님께 달려오게 만든 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었고 예수님이 그 고관의 아들을 살려주신 것도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내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나를 구해 주셨고 지금도 돌보아 주시는 그분께 의탁합니다. 아멘.
믿음의 길
-김성웅신부-
오늘 복음에서 갈릴래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는데, 그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죽어가는 아들을 고쳐달라고 찾아온 왕실 관리에게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고 이르십니다. 무릇 인간의 본성은 감각적
체험에 지배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에서 나오는
말처럼 우리 삶에는 눈에 보이지 않고 감각으로 확인되지 않는 정말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왕실 관리는 자기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길을 떠납니다. 보지 않고도 믿고 길을 떠나는 왕실 관리의 여정처럼
사순 시기는 우리에게 감각적 체험을 넘어선 삶의 가치들을 따라가는 여정의
시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행은 맹목적으로 자기를 포기하는 과정이기보다
자기에게 길들여진 감각 체계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지는 과정입니다. 또한
이웃에 대한 자선과 사랑의 쇄신은 가능한 보상을 체험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감각적 체험을 넘어서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하느님 나라를
신앙 안에서 체험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체험은 눈에 쉽게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구하였더니 구해 주셨네.
-김찬선신부-
“내 구(求)하였더니 주님 구(救)하셨네.”
이것은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고 제가 지은 시편입니다.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
하늘 땅 만드신 그 님한테서”
이것은 구약의 시편입니다.
오늘 복음은 왕실 관리의 아들의 치유 얘기입니다.
왕실 관리의 아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왕실 관리이니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관리는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의사가 고칠 수 있었다면 절대로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求하지 않고 의사에게 고쳐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을 것이고
심지어 고치라고 명령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고쳤다면
救援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부탁하고 명령해도 고칠 수 없음에
주님께 求하였고 그래서 주님께서 救하여 주셨습니다.
기적은 긴 여정의 출발일수도
-전삼용신부-
시대의 살인마 유영철씨에게 어머님과 아내와 아들을 처참하게 살해당했던 고정원씨가 있습니다.
그가 우연치 않게 찾아간 곳이 바로 성당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신자 분을 알아 그의 권유로 세례를 받고 결국 유영철을 용서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한강에서 몇 번이나 떨어져 자살을 하려고 하기도 하고 아파트에서도 끊임없이 떨어지고 싶었는데 그 사람을 용서하고 나니까 다시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합니다. 미워할 때는 그리 죽고 싶더니 용서하니까 자신도 모르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를 하였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그의 마음이 편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같은 일을 당한 사람들로부터의 따가운 시선이 있었고 더 그 분을 괴롭혔던 것은 먼저 시집을 갔던 두 딸이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해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나머지 남은 가족에게서까지 멀어져야 하는 아픔이 있었던 것입니다.
용서를 하고서도 술을 한 잔 하면 다시 슬픔이 북받쳤고 아무도 그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가족을 살해당한 사람들의 모임에 일주일 동안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간추려보면 이렇습니다.
“저도 저의 외동딸을 잃었습니다. 처음엔 사형에 찬성하였지만 그 사람이 죽어도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국엔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15년 이상 지났지만 지금도 분노가 튀어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에 1분 정도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제 3년 정도가 되었으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입니다. 용서는 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나긴 여정의 시작입니다. 용서로 기적처럼 마음에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기까지 그 길을 걸어야 하고 언젠가는 그 용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즉, 너무 서두르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눈에 보이는, 또 곧바로 이루어지는 기적을 원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빨리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쉽사리 바뀔 수 있는 사람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용서가 다시 살 수 있는 마음을 준 것은 이미 큰 기적이지만 그 효과는 시간을 두고 나의 노력과 함께 천천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종착지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믿는 믿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다시 갈릴래아 지방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다녀오시면서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오셨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몰려들었습니다.
오늘 기적을 청하는 한 왕실 관리도 그 기적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
그래도 그 사람은 막무가내로 청합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저는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는 것에 집중해 보았습니다. 당장 기적이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직접 함께 가셔서 고쳐주셨으면 좋았겠지만 그저 믿고 떠나라고 합니다. 돌아가는 중에 ‘정말 고쳐졌을까, 안 고쳐졌을까?’의 고민으로 많이 갈팡질팡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집까지 가는 시간은 그 어떤 시간보다 길었을 것이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내려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와서 말하는 것을 듣고 아이가 바로 예수님께서 나으리라고 하신 그 때 아이의 병이 나았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와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믿음의 승리인 것입니다.
고정원씨를 대상으로 유영철 피해자들의 모습을 취재한 SBS 다큐멘타리를 보았습니다. 고정원씨를 시작으로 결국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만이 용서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쉽지 않지만 그들은 가해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다른 피해자들은 미움으로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온전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병원 신세를 지는가하면 다른 가족들이 그 충격으로 자살까지 하였습니다. 그들이 용서하지 못하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입니다.
물론 용서한다고 하시는 분들도 많은 눈물을 쏟아냅니다. 가족을 죽인 사람이 쉽게 용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용서가 안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적어도 ‘용서의 길’에 접어든 분들입니다. 출발을 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길에 접어든 사람들은 목적지에 가까워지겠고 언젠가는 “다 치유되었습니다.”하는 목소리를 듣게 되겠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제 자식이 죽기 전에 같이 좀 가 주십시오."
-양승국신부-
<차라리 내가 대신>
우리가 짧은 이 세상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가슴 아픈 일들 가운데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아무래도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일인 듯 합니다.
요즘 세월이 팍팍하다보니 요절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만 갑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요.
육신을 벗어버린 본인이야 생계에 대한 부담도 삶의 고뇌도 다 떨쳐버리고 한 마리 산새처럼 훨훨 날아가 버렸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남아있는 식구들, 특별히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들의 마음은 한 평생 죄인의 마음일 뿐입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분들, 모든 것이 가슴에 사무치겠지만 무엇보다도 밥숟가락 드는 일이 무엇보다도 가장 힘든 일이지요.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의 여생은 온통 회색빛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크게 마음 놓고 한번 웃을 수도 없습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님들, 이제 그만 죄책감 내려놓으시길 빕니다. "인명은 재천”"니다. 인간의 목숨은 하느님 손에 달려있습니다. 그분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하루 한 시각도 더 지탱할 수 없는 것이 사람 목숨입니다. 먼저 불러간 자식이 이 세상사는 동안 갖은 고통을 겪었으니, 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있음을 믿고 힘을 내시길 빕니다.
자식과의 사별 못지않게 가슴 아픈 일은 몹쓸 병에 걸려 죽어가는 자식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어야하는 일이겠지요. 그 순간 부모의 마음은 아마 이런 것이겠지요. "차라리 내가 대신..."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가파르나움의 고관 역시 상황이 다급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예수님이 갈릴래아로 오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옵니다. 애걸복걸합니다. "제 아들이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예수님은 즉시 응답하지 않으시고 한번 뜸을 들이십니다. "너희는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는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고관의 입장에서 볼 때 상당히 속상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당장 자신의 아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빈정대는 투로, 힐난조로 "인생 그런 식으로 살지 마라"고 나무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관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선생님, 제 자식이 죽기 전에 제발 좀 같이 가 주십시오" 하고 애원합니다.
예수님께서 같이 가셔서 고관이 보는 앞에서 직접 아들을 고쳐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집에 돌아가거라. 네 아들은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직접 집을 방문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살리고 싶은 고관의 간절한 마음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말씀에 대한 고관의 절대적인 믿음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치유행위가 무당이나 기적장이들의 치유행위와는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선 직접 환자가 있는 현장으로 가지요. 그리고 치유를 위한 준비작업을 벌입니다. 굿판을 준비하지요. 치유를 도와주는 잡신도 불러오지요. 별의별 주문도 다 외웁니다. 한 마디로 소란스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치유행위에는 그 모든 요식행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당신 말씀 한 마디면 끝입니다.
예수님의 치유행위는 시공을 초월한 말씀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치유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치유입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언젠가 사라지고 말 육체에 대한 치유보다는 영원히 하느님 앞에 머물게 될 영혼을 위한 치유입니다.
명예, 지위, 돈,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대단한 성공을 거둔 사람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대학생과 기자들은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지요. 그는 평소에 강의나 인터뷰를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등장하자마자 칠판에 무언가를 적었습니다.
“1,000억!”
그리고 말을 시작했습니다.
“전 재산이 아마 천 억은 훨씬 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지요.
“여러분, 이런 제가 부럽습니까?”
“네!”
여기저기서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그는 웃으며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지금부터 이런 성공을 거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1,000억 중에 첫 번째 0은 바로 명예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0은 지위입니다. 세 번째 0은 돈입니다. 이것들은 인생에서 필요한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럼 앞에 있는 1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1은 건강과 가족입니다. 여러분 만일 1을 지우면 1,000억이 어떻게 되나요? 바로 0원이 되어버립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에서 명예, 지위, 돈도 중요하지만 아무리 그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건강과 가족이 없다면 바로 실패한 인생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제야 진정한 성공의 의미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답니다.
지금 내가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려 보세요. 나를 있게끔 한 것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부차적인 것을 더욱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그 부차적인 것을 위해서 중요한 것을 포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오늘 복음에서 보면 한 왕실 관리가 예수님께 자기 아들을 살려 달라고 청합니다. 분명히 예수님 보다 세속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면서 아들을 고쳐 주는 것을 미루려고 하지요. 어떻게 보면 자신의 명예가 손상되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께 명예와 지위를 내세우기보다는 간절히 매달릴 뿐입니다. 바로 자신의 명예나 지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것을 위해 부차적인 것을 포기하는 그의 모습이 예수님의 기적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순간에 불과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이 아닌 자신을 있게끔 하는 중요한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항상 자신을 고려하는 사람은 곧 망할 것이다.(메리 페티본 풀)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양승국신부-
<하느님의 계획은 따로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왕실 관리는 꽤 고관이었던가 봅니다. 그러나 이 한세상 살아가다보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인생의 풍파를 만나게 되고 좌절도 겪게 되기 마련이죠.
그리 잘 나가던 인생이었는데, 단 한 번도 큰 어려움 겪지 않고 승승장구해온 날들이었는데, 이번에 큰 암초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하던 아들이 덜컥 중병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부자였기에 아들의 치유를 위해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해봤겠지요. 그러나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이런 그에게 누군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귀가 번쩍 뜨인 그는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납니다. 그가 살던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서 계시던 카나까지는 당시로서는 꽤 먼 거리였습니다. 30Km 이상 되는 거리였으니, 약 80리였습니다.
이윽고 왕실관리는 예수님 앞에 당도합니다. 어렵게, 정중하게 말문을 엽니다.
“선생님, 제 아들이 거의 다 죽게 되었습니다. 제발 저와 같이 가셔서 좀 도와주십시오.”
아들의 위중함 앞에 왕실관리는 더 이상 체면도 뭣도 없습니다. 아들만 낫게 된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의 반응은 의외입니다. “알았다. 지금 당장 가자. 모든 것이 잘 될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라는 대답을 기대했는데...
그보다는 책망 비슷한 말씀을 던지십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왕실관리, 예수님께 올 때는 나름대로의 개인적 계획을 지니고 왔었습니다. 일단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서, 아이를 치유시키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준비하게 한후, 아들이 치유되고 나면 큰 잔치를 벌여야지. 예수님께서 오랜만에 잘 드시도록 배려해야지. 그리고 제대로 사례도 해야지. 한 며칠 편히 쉬시게 해드려야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모든 인간적인 계획을 뒤집으십니다. 그까지 가시지도 않습니다. 번거롭게 민폐도 끼치지 않으십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십니다.
“가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예수님께서 왕실관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단 한 가지 ‘믿음’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이라는 진리, 그분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다는 것, 그분께서는 우리를 반드시 구원하시리라는 믿음, 그분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리라는 단 하나의 믿음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을 조금 점검해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그리 큰 것이 아닙니다. 그리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이 곧 메시아 하느님이시라는 것, 그분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를 위해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 바치신 분이라는 것, 그분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 모든 죄인들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
믿는다는 것
-정명숙 수녀-
눈으로 직접 확인하거나 검증되지 않으면 믿지 않는 세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들을 살리고자 하는 한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을
만납니다. 아들만 살릴 수 있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해보고 싶습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함께 내려가주십시오.” 왕실 관리를 하는
자리에 있지만 겸손되이 간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고만 하시며
그를 보내십니다. ‘함께 가자’ 청하는데 말씀만 하시고 ‘혼자 가라’
하십니다. 직접 가셔서 손을 얹으며 병을 고쳐주셔야 하는데
가시지도 않고 그저 한 말씀만 하십니다. 이 얼마나 큰 도전입니까?
그런데도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의 말씀만 ‘믿고 떠나갑니다.’
아직 예수님을 잘 알지도 못하는 이가 주님의 말씀을 ‘믿고
떠나갑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무엇이 이 아버지로
하여금 확인하고 싶은 애절한 마음을 접고 그 말씀만을 믿으며
떠나가게 할까요? 주님 말씀에 대한 참된 (용기 있는) 믿음은
선택과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더 이상 자신의 고정된 사고에
머물지 않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게 합니다.
사고와 마음과 몸을 움직이게 합니다. 실제적 행동이
함께 따릅니다.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루카 5,5). 베드로 사도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밤새 허탕친
곳에 그물을 내립니다. 참되고 용기 있는 믿음은 생명을
가져옵니다.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말과 사람과 믿음-전삼용신부-
제가 귀가 잘 안 들린다니까 저를 위하시는 신자분들이 많은 신경을 써 주십니다.
한 번은 한 자매님이 치유 은사를 받은 개신교 신자와 통화라도 해 보라고 전화를 주셨습니다. 저는 처음에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계속 그 자매가 고친 사람들의 예를 들면서 저를 설득했습니다. 저는 ‘해서 손해 볼 것은 없겠다.’, 또 그 분의 정성을 생각하여 한 번 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곧 이어 그 자매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그 분은 3-4일 간격으로 5번 정도만 치유를 받으면 귀가 다시 잘 들리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크게 믿지는 않았지만 기대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하기로 했으니 최대한 믿어보자고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 분은 안 들리는 쪽이 왼쪽인 것도 아셨습니다. 당신의 왼쪽 귀가 아파왔다고 하였습니다. 치유는 전화기를 오른쪽 귀에 대고 왼쪽은 전화기를 들고 있지 않은 손바닥으로 대라고 하였습니다. 그 분은 2-3분 치유기도를 하였습니다. 치유될 것을 믿는다는 것이 기도 내용의 거의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매번 할 때마다 저에게 좋아지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좋아지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차례가 거듭되면서 좋아지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것조차 미안해 졌습니다. 그렇지만 치료가 끝나는 날까지 전혀 좋아지는 것은 느끼지 못했습니다. 저는 저의 믿음이 약해서 그랬거니 생각하고 넘어가려했습니다.
그랬는데 며칠 뒤에 그 분을 연결시켜주신 분에게 다시 전화가 와서 그 분이 며칠만 지나면 반드시 낫는다고 하였다고 전해주었습니다. 그 분의 귀가 아프더니 딱지가 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었던 신경이 살아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분은 환자의 아픈 곳을 자기가 느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다시 믿음이 생기는 듯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달, 두 달이 흘러도 전혀 좋아지는 것이 없었고 그 분도 더 이상 저의 상태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얼굴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한국에 계시고 저는 로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을 알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그 분과 대화한 몇 마디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확신에 차서 하신 말들이 모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분이 일부러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그런 것을 하자고 하면 다시 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벌써 그 분께 대한 신뢰가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알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말을 통해서인데 그 말에 진실성이 없다면 그 사람도 그 말을 통해서 진실하지 못하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또 내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면 하느님도 믿기 힘듭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기 위해서라도 절대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실 된 사람만이 진실 된 하느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다시 갈릴래아 지방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다녀오시면서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오셨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몰려들었습니다.
오늘 기적을 청하는 한 왕실 관리도 그 기적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
그래도 그 사람은 막무가내로 청합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그리고 정말 내려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와서 말하는 것을 듣고 아이가 바로 예수님께서 나으리라고 하신 그 때 아이의 병이 나았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와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와 온 집안이 믿게 된 것은 더 이상 처음에 믿었던 그 분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믿으려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믿을 수 있는 분인가 아닌가를 측정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말씀뿐입니다. 그분의 말씀이란 바로 성경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우리가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더 증가하게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먼저 성경말씀을 믿고 실천해보는 것이 그분께 대한 믿음을 증가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저도 처음엔 의심이 가는 말씀들까지 그대로 믿고 해 보니 정말 성경말씀엔 오류가 없음을 깨닫게 되고 그렇게 그 말씀을 하신 분께 대한 믿음도 증가했습니다.
성경 말씀이 단 한자도 오류가 없다는 것을 먼저 믿고 우리도 실천하고 남들에게도 해 보게 함으로써 정말 그 분 말씀이 진리이고 그 말씀을 하신 분도 진리이심을 믿게 해야겠습니다.
나의 믿음은?
-김찬선신부-
로마 백인대장의 종을 고치신 얘기는 마태오, 루카 ,
그리고 오늘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그런데 얘기는 조금, 아니 어찌 보면 꽤 다릅니다.
무대가 가파르나움인 것은 같습니다.
그런데 치유를 청한 사람이 요한복음에서는 왕실관리이지만
다른 두 복음에서는 로마 백인대장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치유를 청한 사람이
요한복음에서는 유대인이고 다른 두 복음에서는 이방인입니다.
그래서인지 요한복음에서는 치유를 청한 왕실 관리를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봐야지만 믿는 불신자라고 나무라십니다.
그에 비해 다른 두 복음에서는 백인대장을
이방인임에도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칭찬하십니다.
왜 나무라실까?
제가 유심히 본 것은 치유를 청하면서 취한 태도입니다.
마태오와 요한복음은 상전들이 직접 예수께 와서 청원을 하지만
루카복음은 백인대장이 유대 원로들을 대신 보내어 청원을 합니다.
마태오복음은 애초에 예수님께서 오실 필요가 없다 하고
루카복음은 와달라고 처음에는 청하나 다시 사람을 보내
오실 필요가 없다고 하며 그 유명한 말을 합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그러니 루카복음의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직접 오지는 않았지만
더 겸손하고, 더 깊은 믿음의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이에 비해 오늘 요한복음의 왕실관리는 직접 찾아와
아들의 치유를 위해 직접 가주실 것을 청합니다.
종이 아니라 아들의 치유를 청하고
한 말씀만 하시면 제 종이 낳을 것이라는
그 중요한 말이 빠져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다른 복음, 적어도 루카복음의 백인대장보다 약한 것입니다.
자기가 찾아와야 예수님께서 아들에게 직접 오실 것이라고 믿은 것이고
예수님께서 직접 가셔야지만 치유하실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의 왕실관리는 주님을 믿은 것이기도 하지만
믿지 않은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들에게 친히 가시면 나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아니 가셔도 나을 것이라는 것은 믿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종종 이러합니다.
내가 뭔가 해야 하느님께서도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
내가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서운해서 성의를 보이지 않으실 것이라는 그런 믿음.
하느님께서 친히 손을 얹어주시면 나을 것이라는 믿음.
한 말씀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믿음.
한 푸닥거리를 하면 나을 것이라는 믿음.
조용히 짧게 기도하면 낫지 못하는 것 아닐까 불안한 믿음.
갈릴래아 사람들- 김혜경-
믿고 의지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외면해도 그 사람만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리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렇게 믿고 있던 때는 제가 그에게 도움을 주던 때였기에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고 제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처지가 되자 가장 먼저 저를 외면한 사람은 그토록 믿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무교(巫敎)에서는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어긋남’을 한(恨)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그것을 풀어주는 것에 종교의 의미를 둡니다. 그에 따르면 한을 안겨주는 첫째 원인은 대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고 봅니다. 바로 가족이지요. 한풀이는 바로 거기서 출발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장 상처를 입는 것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 동네에서 3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자신들이 늘 보아왔던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완고한 사람들, 남의 동네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보고서야 믿는 사람들, 아들의 치유 시간까지 정확하게 확인하고서야 믿는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이미 카나에서 행한 기적이 있었지만 고향에서조차 존경을 받지 못하는 처지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했음에도(루카 4,16-30 참조), 여전히 완고한 그들의 태도와 거기에 대한 주님의 아픈 심정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같은 내용이 마태오와 루카복음에도 등장하지만 굳이 요한복음을 사순절에 묵상하게 하는 것은 여기에 등장하는 갈릴래아 사람들을 통해 나를 성찰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이 두 번째 표징이 나에게 일어나게 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기원전 5세기 때의 인물로, 위대한 역사가이자 수학자인 헤로도토스는 최초로 평균의 개념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그것은 엄청난 발견이었으며, 그는 이에 완전히 심취되어 있었지요.
어느 날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야외로 소풍을 나갔다가 작은 강과 마주치게 됩니다. 아내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 강 깊이를 알 수 없었고, 따라서 깊은 곳에 아이들이 빠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자 헤로도토스가 말합니다.
“걱정 말고 기다리시오. 내가 강의 평균 깊이와 아이들의 평균 키를 잴 테니, 5분이면 충분할 거요.”
줄자를 꺼내 든 헤로도토스는 아이들 키의 평균치를 낸 다음, 강으로 달려가 몇 군데의 지점을 돌면서 강의 깊이의 평균치를 계산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지요.
“걱정할 것 없소. 아이들의 평균 키가 강의 평균 깊이보다 크니 익사할 염려가 전혀 없소. 얘들아, 어서 강을 건너자!”
그러나 강의 어떤 지점은 얕은 반면에 어떤 지점은 매우 깊겠지요. 그리고 어떤 아이는 키가 컸지만 어떤 아이는 작았습니다. 따라서 ‘평균치’라는 것은 실제 상황에서는 맞지 않는 법입니다. 오직 수학적인 계산일뿐이지만 헤로도토스는 장담합니다. 수학적으로 전혀 오차가 없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아버지의 말을 듣고 강에 들어간 한 아이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립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헤로도토스는 아이를 구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자신이 계산했던 모래밭으로 달려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검산하고 있었다고 하네요.
헤로도토스는 자신의 학문을 굳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굳게 믿었던 학문이 자신의 사랑하는 아이를 죽음의 위험으로 이끌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역시 엉뚱한 것에 믿음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분명하다고 오류가 전혀 없다고 그래서 굳게 믿어야 한다고……. 그러나 이 세상의 물질적인 모든 것들 가운데에서 참된 진리란 과연 존재할까요?
참된 진리란, 그래서 우리가 굳게 믿어야 할 대상은 하느님 한 분 뿐이십니다. 그분께 대한 굳은 믿음만 있다면 인간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가능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한 왕실 관리가 예수님께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자기 집으로 내려가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왕실 관리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매달리며 말합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이에 예수님께서는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이 왕실관리는 이 말씀을 믿고 떠나갑니다.
사실 집에 함께 가주지 않는 예수님을 보면서 얼마나 야속했을까요? 아파하는 아들을 고쳐줄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 한분뿐인데 막연하게 ‘살아날 것’이라는 말 한마디만 하니, 과연 믿음이 갔을까요? 따라서 왕실관리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끌고 집으로 데려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우리들의 세속적인 예상과 달리 굳게 믿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자신의 아들을 살리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과연 어떠한지요?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도 굳게 믿을 수 있는 깊은 신앙을 간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 세상의 관점과 판단으로 보이는 것만을 믿으려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말씀 한 마디에도 굳은 믿음을 보여주는 왕실관리의 모습을 닮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읽읍시다.
예물보다는 정성을...
-오상선신부-
가족이나 친지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어떤 이들은 매달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정기적으로 미사를 봉헌하는 사람도 있고,
때론 100일 미사, 30일 미사 등을 특별히 요청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사제에게 미사예물을 맡겨 기도를 요청하기는 하는데
실상 본인은 미사에 참석도 하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는 경우도 볼 수 있다.
돈으로 미사를 떼웠으니
하느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겠지 하는 사고방식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봉헌자의 자세이다.
봉헌자가 매일 지향을 두고 기도와 미사를 봉헌할 때
사제에게 부탁한 기도와 미사 지향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적을 이루는 것은
물론 하느님의 능력이겠지만
의뢰자의 정성이 전제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왕실 관리의 아들을 고쳐주신다.
예수님께서 특별한 이적을 행하시기보다는
왕실 관리의 정성을 보시고
그 정도면 되었다고 한다.
내가 직접 가지 않아도
그대의 정성이 아들을 치유시키게 만들었노라고 하시는 듯하다.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켜주고 싶어도
우리에게 그 정성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의 정성이 갸륵하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그 정성을 어여삐 보시고
필요한 은혜와 축복을 풍성히 내려 주신다.
내가 어떤 지향을 두고 미사를 넣었다면
그날 가능한 미사에 참여하여
정성을 다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어려울 때는
적어도 그 시간에 사제와 더불어
그 지향으로 정성껏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정성이 바탕이 되지 않은 미사봉헌은
수백 대, 수천 대 봉헌한다 하더라도
별 효험(?)이 없을 지도 모른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100일 미사를 봉헌한들
내가 그 정성을 쏟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야말로 미사를 돈으로 산 것밖에...
그렇다면 그 미사는
점쟁이에게 갖다 바치는 복채가 되어버리고
복을 빌며 갖다 바치는 불전이 되고 만다.
내 기도와 지향이 진정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나는 사제나 다른 사람의 기도에 의존하기보다는
나의 정성과 기도에 촛점을 맞추어야 하리라.
하느님께서는 나의 정성을 보시고 기적을 이루어주시는 것이지
효험있는 사제나 스님, 점쟁이를 통해서
기적을 이루어주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
오늘 내가 바라는 바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 지향이 이루어지기 위해
나는 무엇을 봉헌할 것인지를 함께 생각해보자...
그리고
예수님이 왕실관리에게
<그래, 알겠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신
말씀을 다시 되뇌어 보자.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양승국신부-
<멀티 플레이어 예수님>
이 세상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일이 어떤 일일까요?
여러 사연들을 소개할 수 있겠지만, 가장 가슴 미어지는 일은 아무래도 자식을 앞세우는 일이겠지요. 특히 어린 자식이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 그것처럼 슬프고 끔찍한 일이 다시 또 있을까요?
‘차라리 내가 먼저 떠났으면...’ ‘차라리 날 먼저 데려가시지 않고...’ 이런 마음이 부모들의 공통된 심정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카파르나움의 왕실관리가 그랬습니다. 그는 지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기막힌 벽 앞에 서 있습니다.
갈 길이 구만리인 어린 아들, 어디 내놔도 꿇리지 않을 창창하던 아들, 그래서 늘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아들, 애지중지했던 아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던 그 아들이 지금 생사의 기로에서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다급해진 아버지에게 누군가가 예수님이란 분에 대해서 귀띔을 해주었습니다.
그는 그 말을 듣자마자 예수님이 계신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합니다.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서 머물고 계시던 카나까지는 거리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약 33km 정도였습니다. 마라톤 선수라면 두 세 시간 만에 도달할 수 있었겠지만, 보통사람들은 뛰어도 5-6시간은 족히 소요되는 장거리였습니다. 늑장부리고 걷다간 1박 2일을 걸어야 되는 그 먼 거리를 냅다 달려간 것입니다.
그는 카나에 도착하자마다 즉시 체면불구하고 예수님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예수님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달려오느라 기진맥진한 아버지를 눈여겨보십니다. 아들을 향한 각별한 사랑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그러나 아직 초보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그의 믿음을 안타까워하십니다. 아직 예수님 당신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는 물끄러미 바라보십니다.
왕실관리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도는 아직 한참 낮았습니다. 예수님을 그저 한 사람의 기적가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든지 다 현존하시는 멀티 플레이어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굳이 33km나 되는 장거리를 죽어라고 뛰어가지 않으셔도 원격치유가 가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였기에 예수님을 향해 집요하게 같이 가달라고 졸라대었습니다.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졸라대지 않을 수 없었던 아버지였습니다. 늑장부리다간 아들과는 영영 이별하게 될 지 모른다는 생각에 부탁이 아니라 거의 협박수준입니다.
아직 믿음이 부족한 왕실 관리였지만, 그의 간절한 눈망울과 그의 찢어지는 가슴을 예수님께서는 차마 외면하실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큰 자비를 베푸십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아들이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을 확인한 가족들과 종들은 얼마나 기뻤던지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왕실관리에게 알리기 위해 동네어귀까지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비탄으로 가득 찼던 집안은 순식간에 축제분위기로 돌아섰습니다. 한바탕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머지않아 우리 눈앞에서도 똑같이 벌어질 풍경입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이렇게 힘겹게 견뎌나가고 있지만, 오늘 비록 우리가 이렇게 큰 슬픔에 잠겨있지만, 오늘 비록 우리가 이렇게 큰 십자가에 허덕이고 있지만, 머지않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큰 은총을 베푸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눈물은 웃음으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춤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 뒤에 어떻게 살았을까?
-김영수 신부-
모든 지식과 앎은 행동을 지향합니다.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가?’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더 본질적인 것입니다. 예전에는 특정 분야의 지식에 한정된 소수만이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의학·법학·신학 등에 대한 지식을 누릴 수 있는 이는 소수였고, 그러한 학문적 독점은 곧 사회·경제적 특권이나 전문적 권위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정보화 사회가 되고 지식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단순히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 특별한 지위나 존경을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남달라야 하는 점은 알고 있는 것을 얼마나 실천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알고 있는 대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소수의 사람만이 알고 말하는 대로 행동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왕실 관리는 아들이 살아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이루어졌는지 확인하지 않습니다. 그저 믿고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렵거나 힘든 일이 생겼을 때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한 지식을 늘어놓을 수 있지만 하느님을 온전히 믿고 살기란 어렵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노력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무언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는 것보다 더 큰일은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은총을 받은 그 아이, 왕실 관리인의 아들은 과연 그 뒤에 어떻게 살았는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 곽용승 신부 -
오늘 복음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래아 카나로 가셨는데 거기에서 왕실의 관리자 한 사람을 만납니다. 이 왕실의 관리자는 예수님을 찾아와 뵙고 그의 아들을 살려달라고 청합니다. 이 청하는 것이 간곡합니다.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 나아가 예수라는 이 분이 자신의 아들을 살릴 수도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보여주셨던 표징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부족한 믿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습니까? 우리 역시 예수님의 삶과 말씀에 우리의 신앙을 맞추기보다 오히려 부수적 표징과 이적에 온 정신을 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하튼 예수님의 이 말씀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는 이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여유가 없는 이 왕실 관리는 다시 청합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이 왕실 관리자는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실현을 확인하게 됩니다. 곧 그의 종으로부터 자신의 아들이 살아났다는 사실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아들이 나은 시간이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때임을 확인합니다. 이처럼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실현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아들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청하는 이 관리자에게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말씀’을 건네주십니다. 그러면서 말씀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곧 예수님의 표징과 이적은 예수님의 말씀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만일 예수님의 말씀에 신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될 때 그 말씀의 기적을 확인하게 될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마치 왕실 관리가 예수님의 말씀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는 말씀을 마음에 담고 “내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는 희망과 함께하며 온 걸음을 내딛었던 그의 삶을 우리 역시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 역시 예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우리에게 울려 퍼지고 이 말씀에 희망과 확신을 두며 힘겨운 여정을 굳건히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왕의 관리자가 체험했던 말씀의 기적을 우리 역시 우리의 삶 안에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생명이며 빛이심을 우리는 고백하게 되고 이 왕의 관리자가 했듯이 온 가족과 함께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고통과 어려움으로 헤맬 때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고통과 어려움 속에 빛으로 다가올 것이며 이 빛이 우리를 강인하게 함으로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게 할 것입니다. 곧 이 예수님의 말씀은 계속되는 기도가 될 것이며 밝은 빛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며 깊은 받아들임과 찬미에로 우리를 살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33장 4절에서 9절의 노래는 우리에게도 울려 퍼질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바르고 그분의 행적은 모두 진실하다. 그분은 정의와 공정을 사랑하시는 분. 주님의 자애가 땅에 가득하네. 주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만들어졌네..., 온 땅이 주님을 경외하고 세상에 사는 이들이 모두 그분을 두려워하리니 그분께서 말씀하시자 이루어졌고 그분께서 명령하시자 생겨났기 때문이네”(시편 33, 4-9)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박순웅 목사-
콩·들깨·감자·옥수수·호박·배추 등 먹을거리를 들여다보면 신비롭다. 보이는 것보다도 보이지 않는 무수한 것들의 믿음이 서로에게 연결되었기 때문에 열매가 맺혀진 것이다.
벌써 10년 전쯤 일이다. 중풍으로 고생하시는 할머님 한 분이 교회를 찾아왔다. 예배 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할머님이 “목사 양반, 누군가가 교회에 가면 이 몹쓸 병을 고쳐준다 해서 왔는데 얼마만큼 다니면 나을 수가 있는 거유?” 하시는 것이었다.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난 잠시 후 이렇게 말씀드렸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할머님의 믿음으로 나을 수 있어요.” “그럼 내 잘 믿어봐야겠구먼!” 하시고는 가셨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별 차도가 없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성경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이고 교우들과의 교류 정도였다. 그렇게 지내시면서 3년째 되는 어느 해 몸이 급격히 쇠하여졌고 급기야는 운명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목사를 찾기에 급히 갔더니 숨을 쉬면서 예배를 인도해 달라신다. 교우들과 예배를 드리고 나니 조금 차분해지셨다. 그리고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교회에 처음 나가서 내 병 고쳐 달라고 막무가내로 떼를 썼던 것 기억하세요? 이제 세월이 가고 교회의 생활과 성경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아주 조금 알 것 같아요. 이제 나는 다 나아서 돌아갑니다. 더 이상 아프지 않으니까요. 그동안 저 때문에 고생이 많았죠? 이제 다 나아서 가니 목사님께도 고맙습니다.” 할머님의 말을 들은 나는 한동안 마음이 먹먹했다. 돌아가시는 마당에 다 나았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고백하는 신앙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신비로움,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그분을 고백하고 그분 때문에 새 삶을 살아가는 것은 기적과 이적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런 낮은 곳으로 오심과 소외되고 외진 구석의 보이지 않는 골고타 사건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런 경험을 어떻게 머리로 이해하랴!
차가운 예수님...
--정호신부--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까운 곳으로 돌아오십니다. 그러나 고향에 가까운 예수님의 마음은 그리 좋으시질 못하신 것 같습니다. 전에 예수님께서 고향에 돌아가셨을 때 사람들이 선입견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예수님의 마음과는 달리 고향에서 가까운 갈릴래아 지방에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달랐습니다. 그들은 고향이 아닌 예루살렘, 곧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도시에서 벌이신 기적을 보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도 그런 기적을 하실까 궁금해 합니다.
그러던 중 가나에서 온 한 고관이 자신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주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왠일인지 예수님의 태도는 냉담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너희는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는다."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사람들 사이에 뿌리깊이 박혀있는 선입견이 가슴 아프셨나 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눈요기 꺼리가 되는 것이 싫으셨는지 그런 기적을 위해 내가 온 것이 아니라는 의사 표현을 하십니다.
그러나 자식이 죽어가는 아버지는 주변 사람들과 태도가 다릅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믿을 수 있는 예수님의 재주가 아니라 아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힘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생명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예수님의 이 차디찬 칼날 같은 말씀을 넘어섭니다.
"선생님, 제 자식이 죽기 전에 같이 좀 가 주십시오."
그가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건, 어떻게 그분 앞에 달려왔건 이 사람은 시급을 다투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필사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던지시는 말씀을 새기기도 전에 다급하게 아들을 살려주실 것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의 이런 생명을 향한 사랑은 주님의 즉각적인 응답을 이끌어 냅니다. 주님은 "집에 돌아가거라. 네 아들은 살 것이다."라는 너무나 단순한 말마디로 그 아들을 낳게 하시고 아버지를 아들 곁으로 돌려보내십니다. 아버지는 애타게 왔으나 이렇게 허무한 한 마디에 모든 것을 걸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복음은 아버지가 믿고 돌아갔다고 말해줍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아버지는 아들이 낳게 됨을 알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났으나 그분이 직접 베푸시는 기적을 분명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이루시는 기적에 열광했고 그 이유로 예수님께 기적을 기대하며 환영했지만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청을 직접 이루어주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는 그 집에서 주님도 아버지도 없는 상태에서 회복됩니다.
그래서 아들이 다시 살아난 이유를 아버지만이 유일하게 압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이 아들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힘이었음을 아버지는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진실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와 그 집안은 예수님을 모두 믿게 되었다고 복음은 전해 줍니다.
복음 속에 예수님은 시종일관 냉담하시고 차디찬 말투로 등장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그런 단호한 모습은 당신이 주시려는 사랑을 지키고자 하심입니다. 사람들의 두 가지 편견, 곧 평범한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사랑이 퍼져 나오는 것을 거절하는 것과 기적을 일으키는 특별한 사람에게만 열광하며 마치 그것이 하느님의 모든 것인 양 생각하는 이들 편견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사랑을 지켜내고자 이렇게 소리 없이 살아있는 사랑에만 응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환영한 갈릴래아 사람들은 사실 예수님을 환영한 것이 아니라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시했듯, 평범한 예수님을 기대하지 않음으로써 여전히 우리와 같은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그들 속에 예수님은 이미 특별한 분이 되셨기에 하느님의 사랑은 그들의 진심을 꿰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자렛과 갈릴래아 이 다른 두 지역에서 똑같은 경험을 하신 것이 됩니다.
주님이 전하시려 하신 것, 그리고 주신 모든 것은 사랑입니다. 오직 그 사랑이 시간과 공간을 꿰뚫는 기적도 일으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변하게 하는 유일한 힘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자신들의 것으로 이용하려는 시도에 주님은 입과 맘을 닫아 버리심을 기억합시다. 차디찬 예수님. 그분을 그렇게 만든 것은 그분의 성품이 아니라, 그분을 사람으로도 하느님으로도 인정하지 못한 우리의 어리석음이었음을 새기며 살아갑시다.
† 시간과 공간에 매이지 않은 예수님의 기적 †
-박상대 신부-
사순시기에 들어 처음으로 요한복음이 등장했다. 오늘 사순 제4주간 월요일부터 성주간 화요일까지 남은 사순시기 동안에는 줄곧 요한복음을 평일미사의 복음으로 듣게 될 것이다.
늘 그렇듯이 요한복음에 대한 이해는 각별한 주의를 요구한다. 요한복음의 서술상 구조가 공관복음의 그것과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공관복음이 예수의 전사(前史), 세례자 요한의 활동, 예수의 갈릴래아 활동기, 예루살렘 상경기, 그리고 예루살렘 활동기의 순서로 대략 짜여있는데 비하여, 요한복음은 크게 1부와 2부로 짜여있다. 제1부는 프롤로그(머리말), 세례자 요한의 활동과 예수의 갈릴래아 활동기를 담고 있고, 제2부는 예수의 예루살렘 활동기와 에필로그(맺음말)를 담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공관복음이 약 1년에 해당하는 예수님 공생활의 기간을 다루고 있는 반면, 요한복음은 꼬박 3년의 공생활 기간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요한복음이 예수께서 3번이나 예루살렘에서 과월절 축제를 지낸 것(2,13; 6,4; 12,12)에 대한 보도로 추정된다.
요한복음의 제2부(13-21장), 즉 예루살렘의 활동기 중에서 반 이상이 십자가 죽음 직전의 고별사(13-17장)에 치중하고 나머지는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보도로 일관하는 관계로 제1부(1-12장)에 예수님의 실제적인 공생활이 집약되어 있다. 따라서 공생활의 주제를 정리하는 것이 곧 요한복음의 핵심과 목적을 파악하는 길이다.
요한복음의 저술목적은 저자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20,31)이며, 이 목적을 향한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활동이 곧 복음서의 주제인 셈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요한복음의 기록 하나 하나가 연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기적사화도 그렇다. 공관복음에 비하여 기적사화도 대폭 줄여 보도하고 있는 요한복음은 '표징'이라는 개념으로 모두 일곱 개의 기적사화를 전하고 있다. 일곱 개의 표징사화는 ①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2,1-11), ② 고관 아들의 치유(4,46-54), ③ 베짜타 못가의 병자치유(5,2-9), ④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6,1-15), ⑤ 물위를 걸으신 기적(6,16-21), ⑥ 태생 소경의 치유(9,1-12), ⑦ 죽은 라자로의 소생기적(11,1-44)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서 약 26Km 떨어진 가파르나움을 향하여 행하신 원격(遠隔) 치유기적사화로서, 요한복음이 보도하는 혼인잔치에서의 포도주 기적(2,1-11)에 이은 두 번째 기적이다. 첫 번째 기적을 통하여 제자들의 믿음을 얻으신(2,10) 예수께서는 두 번째 기적을 통하여 고관(원문: 왕궁의 관리)과 그의 온 가족의 믿음을 얻는다(4,53). 여기서 고관은 마태오와 루가복음이 보도하는 앓는 하인의 치유를 청하는 백인대장과 같은 인물로 추정된다.(마태 8,5-13; 루가 7,1-10 참조) 백인대장의 믿음과 같이 고관의 믿음은 어떤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고야 믿음을 가지는 예수의 고향 사람들의 그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정말 어떤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 하고 백인대장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셨다.
고관에게 있어서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었다. 그는 이미 예수를 믿고 찾아와 아들의 치유를 간청하였으며, "집에 돌아가거라, 네 아들은 살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믿음을 더욱 확신하였다. 이 말씀은 비단 고관을 향한 말씀일 뿐 아니라 주위의 모든 청자(聽者)를 향한 말씀이며, 나아가 이 복음을 읽게될 우리를 위한 말씀일 것이다.
오늘 고관의 믿음은 누구에게나 참으로 좋은 귀감이 된다. 기적을 요구하는 것은 믿음의 표현이 아니라 불신의 표현이다. 많은 유다인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오히려 믿음이 기적을 불러온다. 예수님의 단지 말씀에 대한 고관의 믿음은 서로 다른 장소에 있던 아들의 치유를 불러온 것이다. 이렇듯 고관의 굳센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치유능력이 어떤 장소와 시간에 매여있지 않음을 보았다. 이제는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이 기적사건이 시공을 초월한 사건으로 오늘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라 믿어도 좋겠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