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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경 산책
~천수경 산책 전체분 ~
을 모셔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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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경 산책 전체분
천수경 산책 1
천수 + 1
천수경은 경전의 이름입니다. 천수 + 경 = 천수경입니다. 먼저 천수는 손이 천개라는 말입니다. 千手라는 말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손이 둘입니다. 그런데 손이 천 개인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손이 두 개밖에 없는 우리들과는 능력이 다를 것임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누가 그런 분일까요? 바로 관세음보살입니다. 그런데 손이 천 개인 관세음보살이므로, 천수관음이라 합니다. 그 뿐일까요? 손이 천 개이니, 당연히 발도 천개이고, 눈도 천개 일 것입니다. 천안(千眼) 관세음보살이라고도 합니다. 눈이 둘이 우리 중생들과는 또 다른 능력을 갖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천수천안의 관세음보살을 줄여서, 이 경전의 제목에서는 '천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천수천안경, 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손이 하는 일은 행동이고, 자비의 실천이겠지요. 그에 반하여 한편으로 눈이 하는 일은 지혜이겠지요. 무엇인가를 꿰뚫어 보는 지혜 말입니다.
자비와 지혜를 함께 갖춘 분이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입니다.
이 천수경은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의 경전, 즉 그 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경전, 그분이 말씀하시는 경전, 그분의 경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다음으로 경(經)이라는 글자에 대해서입니다. 옛날 베틀 같은 것을 이용해서 실을 짤 때는 세로로 먼저 몇 가닥의 줄을 늘어놓고, 그런 뒤에 가로로 실을 짜내려 옵니다. 가로 줄이 아니라 세로줄이 기준이 되는 것이지요. 세로를 경이라 하고, 가로를 위라 합니다. 경위(經緯)라는 말이 그것인데요.
위보다는 경이 우선적이고, 더욱 기준이 됩니다. 모든 말씀 중에서, 우리 삶의 기준이 되는 말씀이므로 '경'이라는 말을 씁니다. 나라말은 달라도, 어떤 나라의 말에서고 간에 '경'이라는 말에는 실짜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실짜기에서 비유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천수경 산책 2
보살
우리나라에서는 여성 불자를 '보살'이라 말합니다. 물론 그렇게 보살이 되라, 고 격려를 하는 의미에서 그렇게 높여서부르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말은 줄임말이고, 원래 본디 말은 '보리살타'입니다. 인도말로서 '보리'는 깨달음이라 할 수 있고, '살타'는 중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과 중생 사이, 그곳에 보살은 존재합니다. 깨달음과 중생 사이에 보살은 존재한다는 말을 흔히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고 합니다. 상구보리는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하화중생은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말이 됩니다.
위로 깨달음을 구한다면서 깨달음을 구하는 말을 '위'의 방향과 연결짓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한다고 하면서 중생의 제도를 '아래'의 방향과 연결짓고 있습니다.
이 위와 아래, 라는 방향은 우리가 깨달음을 얻으려면 현재 우리보다는 훨씬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중생을 제도하려면 현재 우리가 서있는 곳에서 훨씬 더 낮게 몸을 낮추어서, 아래로 내려와야 한다는 말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말을, 상하 개념으로 말하지 말고 자타(自他) 개념으로 말하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즉 "스스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남에게 대해서는 교화를 베푼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깨달음과 중생 사이에 존재하는 보살은 아직 깨달음을 못 얻었지요.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생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여성불자를 '보살'이라 말할 때에도 이런 뜻입니다.
지금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생이므로, 아직은 부처가 아니지만 장차 부처님이 될 존재입니다.
부처님이 과거 전생에 보살이었다 할 때에도 이런 뜻의 보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런 보살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부처가 되신 뒤에 일부러 중생제도를 위해서 스스로의 몸을 낮추어서 '아래로' 임하신 분들도 보살이라 말합니다. 관세음보살은 바로 그런 보살입니다. 이미 부처님이 되셨지만 중생제도를 위하여 보살로 나투신 분입니다.
천수경 산책 3
천수천안
보살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는 말씀을 앞에서 드렸습니다. 부처님 되기 전의 보살, 그리고 부처님이 되신 뒤의 보살, 이렇게 말입니다.
여기 "천수경"의 주인공 천수천안 관세음보살님은 후자, 즉 부처님이 되신 뒤의 보살입니다. 원래는 부처님이신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다시 보살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내려오는 것을 화현, 혹은 화신이라 하지요.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아봐타(avartar)'입니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님은 이미 부처님이 되셨는데, 그 부처님의 이름으로는 정법명여래(正法明如來)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부처님이 되셨다면, 스스로 부처로서의 즐거움을 누리고 사실 수도 있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운명입니다. 스스로의 편안한 락(樂)을 버리고서, 다시 고생하는 중생들을 위하여 뭔가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중생의 고생살이를 보시면서 안타까워하는 것은 부처님의 눈이고,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중생들을 다독여주고, 머리도 쓰다듬어 주시려면 손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쓰다듬어 주실 손을 필요로 하는 중생들이 워낙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법명여래께서는 본래의 두 손만으로는 부족하심을 느끼시고, 많은 손을 필요로 하였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천수천안 관세음보살님이 탄생되십니다.
이 탄생에는 다시 또 한분의 부처님께서 증명을 해주십니다. 바로 "천수경"의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설해주신 분, 천광왕정주여래(千光王靜住如來)이십니다. 이 부처님께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설해주시자, 환희심에 복받친 정법명여래께서는 이렇게 서원을 세우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제가 장차 미래에 일체중생에게 이익과 안락을 줄 수 있다고 한다면, 저로 하여금 즉시에 몸에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이 생기게 하소서."
이 자비로움으로 인하여, 우리의 천수천안관세음보살님께서는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갖추시게 된 것입니다.
천수경 산책 4
우리 스승님 아미타불
천수천안 관세음보살님은 보살인데도, 그 천수천안 관세음보살님을 설하는 경전인 이 "천수경"에서는 부처님이 여럿 등장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얻고자 서원하였을 때 그 서원을 들어주신 부처님이 계셨습니다. 천광왕정주여래가 바로 그 분이시지요. 또 천수천안 관세음보살 그 분 자체가 사실상 부처님이었는데, 중생들을 위하여 스스로 몸을 낮추셨다고 하였습니다. 원래 부처님이셨을 때의 이름이 정법명왕여래이셨습니다.
그런데 "천수경"에는 또 한분의 매우 중요한 부처님이 등장하십니다. 바로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이 그분을 "우리 스승님(본사, 本師)"라고 부르는 아미타불입니다. "천수경"을 외우시고 계신 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나무본사아미타불"
이렇게 아미타불께 귀의하고, 아미타불의 이름(명호, 名號)을 부르게 한 뒤에야 신묘장구대다라니라는 이름의 다라니를 외우게 하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지요. "원아속견아미타"라는 귀절도 있지 않습니까? "어서 빨리 아미타불을 뵙고자 원합니다"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천수경"에서는 아미타불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아미타불과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의 관계입니다. 아미타불은 스승이고,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은 제자입니다. 실제로 법당에 모셔진 관세음보살님을 뵙게 되면, 보배관을 쓰고 계십니다. 그 관에 한 분의 부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머리에 아미타불을 이고 있는 모습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은 극락세계에 계신 아미타불의 비서역할을 하는 분입니다.
대세지보살과 함께, 두 분이 함께 아미타불의 비서 역할을 하십니다. 특히 관세음보살은 우리가 사는 이 땅으로 오셔서, 고난에 빠진 우리를 건져주시는 분입니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 아버지라면 아미타불은 할아버지입니다. 아버지께 효도를 다 하는 사람은 그 아버지가 효도를 다 하는 할아버지에게도 효도를 다 하는 것처럼,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사람은 아미타불 역시 마음속으로 모시게 됩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이 주인공인 "천수경"을 읽을 때, 우리도 관세음보살님을 따라서 "나무본사아미타불"을 외게 되는 것입니다.
천수경 산책 5
모습이 있는 천수천안
우리는 지금 "천수경"의 주인공,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을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만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 수 있게 된 것은, 말이 보살이지 실제로는 부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다시 새삼스럽게 몸을 낮추어서, 보살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같은 중생들을 구제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모르는 척 외면하려도, 우리 중생들이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고생스럽고, 고난이 많아서입니다.
물론 우리들의 고생살이야 우리 스스로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다.
우리 문제는 우리가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면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팁(tip, 방편) 하나는 알려주십니다. "천수경"에서는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읽고 외우라는 것입니다.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관음경)에서는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불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보다 못한 관세음보살님, 스스로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갖추시고 나타납니다.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고뇌하는 중생들이라면 그가 어디에 있든지, "아니 나투실 곳이 없다(無刹不現身)" 말합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나타나셔서 우리를 고난에서 벗어나게 도와주실 분, 관세음보살님.
특히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갖춘 관세음보살님,
생각만 해도 고맙기 그지 없습니다. 그런 님이 보고 싶습니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의 모습을 조성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천수천안 관세음보살님 상(像)을 모시거나 그림을 모시는 경우가 흔치 않았습니다.
요즘에 와서 모시는 경우가 늘고 있지만, 옛날에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에는 참으로 흔하게 많이 조성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교토에 가면 산쥬산겐도(三十三間堂) 라는 이름의 절이 있습니다.
혹시 교토에 가시는 걸음이 있으시면 곡 한번 참배하시길 권해드립니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님이 천 분이 계십니다.
천 분의 천수천안 관세음보살님을 모시고서, 일본의 중생들은 기도해 왔습니다.
지진도 없고, 화재도 없고, 태풍도 없고, 흉년도 없고, 역병도 없기를 기도해 왔습니다.
나무천수천안관세음보살
천수경 산책 6
하나를 내어 하나를 덜기를
천수천안 관세음보살님의 형상을 그리거나 조각을 해서 모시는 일이 일본불교에서는 아주 성행했습니다만, 우리나라 불교에는 매우 드물다는 이야기를 앞에서 했습니다. 요 근래는 더러 모시는 경우가 늘어나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옛날에는 아주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해방 이전의 자료에서 천수천안관세음보살님을 모셨다고 하는 이야기를 저는 다만 하나 알고 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제가 과문한 탓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그만큼 천수천안관세음보살님을 모시는 일이 널리 행해졌던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아닌가 합니다. 저 같은 사람, 즉 명색 불교학자라는 사람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말입니다.
그 단 하나의 사례는 바로 일연스님께서 지으신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한때 원효스님께서 머무셨다는 분황사의 좌전(左殿) 북쪽 벽에 벽화로 천수천안관세음보살님이 그려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천수천안관세음보살님과 관련해서, "삼국유사"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서라벌(오늘의 경주)의 한기리라는 마을에, 희명(希明)이라는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린 딸이 하나 있었는데요, 안타깝게도 이 어린 여아는 어릴 적부터 어떤 질병에 의해서인지 알 수 없지만, 앞을 못 보는 고통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가 듣자 하니, "관세음보살님은 손이 천 개이고 눈도 천 개라" 말하지 않습니까. 한 줄기 빛이 비쳐온 것입니다.
"그래, 그렇다. 길이 있었구나. 관세음보살님께 가서 당신이 갖고 있는 천 개의 눈 중에서 하나만이라도 달라 하자"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린 딸아이의 손을 잡고 분화상 좌전 북벽에 그려진 관세음보살님 앞에 찾아갔습니다. 두 모녀는 함께 엎드려서, 기도를 했습니다. 간절한 소원을 사뢰었습니다. 그 내용이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세우고 두 손바닥을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비옵나이다
일천 손과 일 천 눈
하나를 내어 하나를 덜기를
둘 다 없는 이 몸이오니
하나만이라도 주시옵소서
아아! 나에게 주시오면
그 자비 얼마나 크실 것인가
"도천수대비가(禱千手大悲歌)"라는 제목의 향가라고 하는 노래입니다. 하지만 이 노래는 그대로 기도문이라 해서 좋을 것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것, 그 역시 믿음 아니겠습니까.
천수경 산책 7
천수천안과 이수이안
천수천안 관세음보살님은 글자 그대로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갖춘 보살님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현대인들은
그저 "그런 분이 어디 있어?"라고 말하고 말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님을 말하고 믿고, 그 분의 이름을 부르면 기복이라고 폄하하고 마는 경우도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일단 그런 분이 존재한다고 믿고서, 이야기를 진행해 보기로 하지요. 만약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한 몸에 갖춘 분이, 경전 말씀 그대로 지금 우리 앞에, 여러분 앞에 나타난다면 어떨까요? 이렇게 불보살님과 같은 성스러운 존재가, 혹은 우리 보통사람과는 다른 존재가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는 일을 '성현(聖顯)'이라고 말합니다.
성현을 우리가 원하여 직접 그 체험을 하게 된다면, 아마도 매우 두려워하고 떨게 될지도 모릅니다. 보르헤스라고 하는 아르헨티나 출신 소설가의 한 소설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하실에 한 작은 구슬이 있습니다. 이 구슬 속을 들여다보면, 온 우주의 모습이 그 속에서 다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공간적으로 작은 구슬과 무한한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우주를 서로 뒤섞여 놓은 것입니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한 티끌 속에 온 우주 시방세계가 다 들어있다"는 말을 소설적으로 꾸민 것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존재는 두 개의 손과 두 개의 눈을 갖고 있지요. 이런 존재와 다른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갖고 있는 존재가 우리 앞에 드러난다는 것은 매우 놀랄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와 다른 능력을 갖고 계신 존재의 형상으로서는 적절한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경전의 말씀과 같이,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갖춘 관세음보살님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 중앙에 눈을 그린 천수천안 관세음보살님을 모시기도 하였습니다만, 하나의 방법은 실제로는 손을 40개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놓고 손 하나를 사실상 25개로 본다는 것입니다. 이는 천수경 안에 40수진언 이라고 해서, 진언이 40개 등장하는 것에서 유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천수천안의 존재를 좀 더 다르게 해석합니다. 예를 들어서 천수천안 관세음보살님께서 어떤 중생의 어려움을 도와달라는 요구를 접수하였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한 사람의 어려움을 도와주시는 데 몇 개의 손과 몇 개의 눈이 있으면 될까요?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다 동원해야 할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변함없이 두 개의 손과 두 개의 눈이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같이 손이 둘이고 눈이 둘인 존재가 사실은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의 변화신(變化身, 아봐타)가 될 수 있는 이유이지요.
이렇게 생각해 보면, 결국 우리는 끝없이 이어지는 '두 손 두 눈'의 존재를 통해서 천수천안 관세음보살님을 만나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생각을 저는 이러한 시구로 읊어보았습니다.
연습하노라 아파봤더니
하,
빚도 많을사
여지껏 버짐 앉았던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 사람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
사람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 사람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
쓰다듬어 주신
손,
손,
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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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는 턱없이 넘어버린
섬섬옥수 그리며
나는 왼입을 찌부시 웃음짓네
눈물 흘리며
(김호성, "연습삼아 아프면서"의 부분)
천수경 산책 8
관세음보살과 관자재보살
앞에서 일곱번에 걸쳐서, 천수천안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결국은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에 대해서
말씀드린 것입니다만, 저로서는 그래도 '천수천안'을 설명 드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제는 '관세음보살'입니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천수경(=독송용 천수경)에서는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라고 말하지요? 이것이 "천수경"의 본래 제목입니다. 이 긴 제목을 줄여서 "천수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장경 안에 보면 "천수천안 관세음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경"이라는 제목의 경이 있습니다. 이 역시 '천수경(=원본 천수경)입니다. 이 두 종류의 천수경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서는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여기서 여러분께서 주의해 주셔야 할 것은 "관자재보살"과 "관세음보살"로 서로 다르게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 그리고 관자재보살은 같은 보살입니다. 관세음보살을 관자재보살이라고도 말하고, 또 관자재보살을 관세음보살이라고도 말합니다. "반야심경" 같은 데에서는 관자재보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경전이 번역될 때, 이렇게 두 용례로만 번역된 것은 아닙니다. 다양합니다. 광세음(光世音)보살이라고도 하였고,
관세음자재보살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관세음자재보살이라는 표현은 '원본 천수경'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럼 인도에서는 무엇이라 하였을까요? Avalokiteshvara(아발로끼떼쉬와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어떤 분은 관세음보살이라고 옮기고, 또 어떤 분은 관자재보살로도 옮긴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번역한 것은 Avalokiteshvara라는 말을 서로 다르게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반야심경"을 번역한 현장스님 같은 분은 관자재보살이라고 번역하기를 좋아했습니다만, 이 분이 이해한 것은 Avalokita + Ishvara로 보았습니다. 앞의 Avalokita는 '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Ishvara는, 음, 이 말은
인도에서는 신을 가리킵니다. 흔히 자재신이라고, 지금의 학자들도 그렇게 번역합니다. 그러니 현장스님께서는 관자재보살이라고 옮긴 것이겠지요.(산스크리트에서 모음 a와 모음 i가 만나면 e가 됩니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이라고 번역한 것은 어째서일까요? Avalokitesvara는 원래는 Avalokitasvara에서 왔다고 봅니다. 그래놓고 보면, Avalokita는 "본다"는 말에서 왔으니까 '관'(觀은 볼 관, 입니다.)이라 옮기고, svara는 소리라는 말입니다. 정확히 '音'이라 할 수 있지요.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 보면, 관세음보살은 고통받는 중생들이 "관세음보살"이라고 이름을 부르게 된다면 즉시 나타나셔서
해탈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 경전의 맥락은 관세음보살님께서는 중생들의 소리를 관찰하시는 분이라는 이미지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 점을 생각할 때, 관세음보살이라는 번역이 관자재보살이라는 번역보다 더 널리 유통되게 된 이유를 알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천수경(+독송용 천수경)에서 이미 "관자재보살"과 "관세음보살"이 함께 쓰이는 것을 보면, 우리는 관세음보살과 관자재보살이 같은 보살이고 어느 쪽으로 쓰더라도 좋다는 점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은 산스크리트까지 나와서 좀 어려웠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잘 생각해 보시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천수경 산책 9
말이 나온 김에 짚고 넘어갑니다
쭉 읽어 오신 분들께서는 "왠 뜬금없는 소리인가?" 라고 의혹을 느낄 수도 있었을 부분이 지난 번 이야기 속에 등장하였습니다.
어려울 것 같아서, 지금까지 그 이야기를 안하고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안 하고 지나가기도 좀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주제는 "관세음보살"입니다. 그래서 약간 사잇길로 가는 것 같지만, 여기서 한번 언급해 두고자 합니다.
다름 아니라, "원본 천수경"과 "독송용 천수경"이라는 용어에 대해서입니다. "아니, 무슨 천수경에 두 가지 종류가 다 있어?"
하실 수 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크게 보아서 천수경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절에서 읽고 외우는 천수경, 즉 우리가 늘상 천수경이라 할 때에는 "독송용 천수경"을 가리킵니다. 굳이 독송용 천수경이라 말할 것도 없이, 그냥 천수경이라 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천수경이 두 종류라 생각한다면 뭔가 양자를 구별해줄 말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는 "독송용 천수경"이라 하고, 다른 하나는 "원본 천수경"이라 말합니다. 이 중에 "독송용 천수경"은 우리가 읽고 외우고, 절에서 법회 때마다 늘 함께 독송하는 그 천수경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다른 하나의 천수경, 즉 '원본 천수경"은 무엇일까요? 바로 대장경 속에 나오는 천수경을 말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읽고 외우는 천수경과 구분하기 위하여 제가 임의로 "원본 천수경"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물론 "독송용 천수경'이라는 표현 역시 제가 만들어낸 표현입니다.
여기서 질문하실 수도 있을 것 같군요.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읽고 외우는 "독송용 천수경"은 대장경 속에 안 나오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안 나옵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속에 아무리 찾아봐도 안 나옵니다. "안 나온다", 는 말은
정구업진언으로부터 시작해서 "나무상주시방불"로
끝나는 그런 천수경은 없다는 말입니다.
일단 여기까지만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합시다. 여기서 여러분께서는 그 두 가지 천수경, 즉 양자의 천수경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렇게 멀리가면 너무 '삼천포'로 빠지는 것이 되므로 삼가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지금 여러분과 함께 하는 산책길은 주로 "원본 천수경"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독송용 천수경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더 다가올 터인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미 제가 20년전에 "천수경의 비밀"이라는 책을 쓰면서, 다 해두었기 때문에 삼가합니다.
제가 다시 말하는 것이 저로서도 좀 지겹기도 하지만, 제 못난 글을 책으로 만들어주신 출판사가 있기 때문에 조금은 달리 해서 중복을 피해 주는 것이 필자로서도 일종의 '상도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점을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다만 원본 천수경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독송용 천수경을 부단히 생각하면서 하는 것이니까 전혀 딴 이야기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천수경 산책 10
관세음과 관자재
다시 '관세음보살'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관세음보살은 관자재보살로 번역되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원어 아바로기테슈바라(avaloktesvara)라고 하는 말을 보다 정확하게 옮긴 것은, 오히려 '관세음' 쪽이라는 학설을 소개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관음경)에서는 관세음보살이라 하고 있으며,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로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혼용 내지 통용되고 있는 가장 현저한 사례가 바로 천수경입니다.
"원본 천수경"에서는 "천수천안 관세음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대다라니경"이라고 해서 '관세음'을 쓰고 있습니다만, 지금 우리가 외우는 "독송용 천수경"에서는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관세음보살과 관자재보살이 혼용되고 있는 데에 어떤 숨어있는 의미는 없는 것일까? 저는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만, 그 전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불교에서는 관세음보살 한분을 이야기하기에 하나의 경전만으로는 부족하였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전들 속에서 관세음보살은 다양하게 설해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반야심경"이 있습니다. 이 경전에는 "관자재보살"이 등장하고 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사실 오fot동안 이 "반야심경"을 관세음보살 신앙과 연관 지어서 이해되지는 못해 왔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 있을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관세음보살 신앙, 즉 관음신앙이 너무나 협소했기 때문입니다. 종래 우리가 생각하는 관세음보살 신앙은 그저 "관세음보살 이름 외우면 관세음보살님께서 고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신다"는 생각만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관자재보살은 이해되지 않습니다.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우처 보시고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셨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지요?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쉽게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관자재보살님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해서 모든 괴로움으로 벗어나신 분이다. 이런 말입니다. 그러면 반야바라밀이라는 것이 도무지 무엇일까? 이런 의문이 생기겠지요. 그 대답이 "오온이 다 공함을 비추어 보는 것", 그것이 곧 반야바라밀이라는 것입니다. "오온"이니, "공"이니, 하는 말이 나오는데 어렵게 생각되지요?
그렇습니다. 어렵게 보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는 말이, 공(空)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런 말입니다. 인간, 이라는 말을 오온(五蘊)이라는 말로 해본 것일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인간이 아닙니까? 그러니 이 말을 이렇게 한번 해보지요.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그러면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하, 그렇구나! 지금까지 우리가 괴로웠던 이유는 우리가 다 뭔가 되는 줄 알고 있어서였구나. 이렇게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관(觀)'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찰(=조견/照見)의 결과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재(自在)'입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는 바로 그렇게 해서 관세음보살님 되셨다는 소식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반야심경"에서는 우리가 관세음보살 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관세음보살 되기'라는 또 하나의 관음신앙을 만나게 됩니다.
관세음은 다른 이의 고통하는 소리를 관찰하시고 도와는 관음신앙을 상징하는 말이고, 관자재는 스스로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보살이 되는 길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관자재가 되어야 관세음할 수 있으며, 관세음하려면 관자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관자재와 관세음은 동전의 앞뒷면입니다. 항상 붙어있습니다. 그러니 혼용되고 통용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야기는 좀 어려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거듭 읽어주시고 생각해주시길 빕니다. 나무아미타불
천수경 산책 11
해결사 관세음보살
어쩌면 이 글을 처음 읽으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자주 말씀드리는 맥락을 반복해서 밝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지금 우리는 "천수경"의 원래 제목, 즉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대다라니경"이라는 제목을 하나하나 살펴보았습니다.
경전의 뜻은 제목 속에 다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제목 중에서 우리는 '천수천안'을 공부했고, 이제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일이 있지만, 관세음보살님을 말씀하는 경전이 여럿 있습니다. 이 중에서 지난번에 우리는 "반야심경"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조금 어려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의 대책으로는, 어려운 그 부분이 있으면 안 읽고 건너뛰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 나오는 관세음보살에 대해서입니다. "법화경"이라는 큰 경전을 보면, 25번째 품(品, 장이라는 뜻)이 '관세음보살보문품'입니다. 이 보문품은 "법화경"이라는 큰 경전에서, 따로이 뛰쳐나와서 저 혼자 다니기도 합니다.
흔히 절에서 만드는 "법요집"이나, "불자독송경" 류의 책에 보면 홀로 들어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관음경"이라 부릅니다.
이 관음경에서 제시하는 관세음보살은 해결사 관음입니다. 제가 지금 '해결사'라고 하는, 쉬운 표현을 했습니다만
좀더 직역을 해보면, "불안이나 해소시켜 주시는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역시 현대적인 풀이입니다만, 원래 한문식으로 표현하면 '시무외자(施無畏者)'라고 합니다.
시는 보시한다는 말입니다. 베풀어 주시는 것을 말하지요. 무엇을 베풀어 주시느냐 하면, '두려움이 없음'입니다.
두려움, 걱정, 근심, 불안, 공포와 같은 곳에서 해소시켜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무외자 관세음보살이라 하는 것이고, 제가 좀 쉽게 '해결사'라고 하여 본 것입니다.
"관음경" 안에서는 주로 그 불안과 공포의 대상을 자연의 천재지변 같은 것, 또 정신적인 고통, 그리고 현실적인 고통을
두루 다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해해서 좋을 것입니다.
이러한 어려움에 처한 우리들의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십니다.
다만 "독송용 천수경"에서 "원하는 바는 다 원만히 이루어진다(소원종심실원만)"고 한 것처럼,
그 '마음'이 좋은 마음, 진리와 부합하는 마음이어야 하겠지요.
그렇지 않고 진리에 반하는 마음이라면 안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면,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면서
궁중에서 인현왕후 그림을 그려놓고 화살을 쏘면서 비는 것은 안 이루어 집니다.
오히려 장희빈이 죽고 말았지요.
그러니 여러분의 원이 진실하다면, 관세음보살님께 그 성취를 기원해 보십시오. 다 이루어지실 것입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천수경 산책 12
선생님 관세음보살
지금 우리는 관세음보살님은 어떤 분인가, 라는 화두를 가지고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스스로 지혜의 길을 걸어가는 수행자, 내지는 구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그 같은 보살의 모습은 우리 모두 닮아야 할 모습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살의 전범이라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관세음보살님이 해결사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우리는 관세음보살을 '수퍼맨'으로 보는 것입니다.
'원더 우먼'으로 보는 것입니다.
미국 영화에서 '배트맨', '스파이더맨' 등의 초능력자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는 그러한 해결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삶의 무게가 만만치 않은 것이겠지요.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이미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관세음보살, 이라고 하면 우리는 "선생님"이라는
이미지를 갖게도 됩니다.
예를 들어서 말씀드리지요. "화엄경"이라는 경전에는, 선재라는 어린이가 53명의 스승을 찾아가는 구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선재라는 어린이가 찾아뵈온 그 '선생님'들 중에는
관세음보살님 역시 계셨습니다.
28번째 찾아뵈온 선지식이 관세음보살님입니다.
선재는 관세음보살님께 물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인생을 재출발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관세음보살님 역시 다른 분들처럼, 자기의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뭐 이런 것이겠지요.
"나는 말이야, 늘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으로 내 일을 삼고 있고 내 수행을 삼고 있는 데 ---"
이렇게 말끝을 흐렸을지 모릅니다.
명시적으로 어찌하라는 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스스로에 대해서 말씀드렸을 뿐이지요.
그런데 스승은 어떤 사람입니까? 바로 물음을 받는 사람이지요. 학생은요? 묻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중생들과 관세음보살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선재 어린이는
중생의 대표자로서 관세음보살님께 물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관세음보살님은 스승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에게 가르침을 베풀어주시는 분으로서 말입니다.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다시 스승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하겠지요.
그것이 우리 제자들의 숙제입니다.
의상스님께서 지으신 "백화도량발원문"이라는 발원문에 보면,
이렇게 관세음보살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저희 스승 관세음보살님"
천수경 산책 13
세 가지 유형의 관음신앙
지난 3회에 걸쳐서 우리는 관세음보살이 어떤 존재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와 관세음보살은 어떤 관계 속에 놓여 있는가에 따라서 서로 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여기서는 그 세 가지 유형을 한번 정리하고 진도를 나가기로 하겠습니다.
첫째는 "관세음보살님, 도와 주소서"라고 하는 유형의 관세음보살 신앙이 있습니다. 이때 관세음보살은
구제자이고, 우리는 피구제자입니다. 관세음보살과 우리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관세음보살이 될 수 없고, 다만 관세음보살로 부터 도움을 받을 뿐입니다.
이러한 유형의 관음신앙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관음신앙, 혹은 관세음보살님이라고 하면 이러한 첫째 유형의
관음신앙, 관세음보살을 상기하게 됩니다.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 즉 관음경 같은 데에서 설해지는 관세음보살의 이미지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둘째는 "관세음보살님처럼 되겠습니다"라는 관세음보살 신앙이 있습니다. 이는 "반야심경"에서 설한 대로,
관세음보살은 "오온(우리 인간존재)가 모두 공한 존재(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관찰함으로써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길을 걸어가는 보살의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때 관세음보살은 우리의 모범이고 전범입니다. 우리도 그러한 "관세음보살님처럼 되겠다"는 의지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도 관세음보살님처럼 수행하여, 오온이 모두 공한 줄 알게 되면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셋째는 "관세음보살님, 도와 드리겠습니다"라는 신앙이 있습니다. 이는 화엄경 입법계품에 나오는 선재동자와 관세음보살
의 관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선재동자에게 관세음보살님께서 제시한 가르침은 "자비의 실천"입니다.
그런데 그 자비의 실천이라는 일이야말로
다른 누구의 일이 아닌, 바로 그 분, 관세음보살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선재동자가, 아니 우리가 행하는 모든 자비의 실천행은 사실은 선재의 일도 아니고 우리의 일도 아닙니다.
누구의 일일까요?
관세음보살의 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행하는 작은 자비행하나라도, 사실은
그것이 다 관세음보살의 일을 "도와드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종래에 관세음보살을 말하고, 관음신앙을 말하는 맥락에서는 이 세 가지 중에서 첫째만이 말해졌습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둘째와 셋째 역시 존재합니다. 그것이 불교입니다.
다시 뒤바꾸어서 말하면, 이렇게 관음신앙을 세 가지 유형으로 폭넓게 생각하게 되면, 이 세가지 유형의
관음신앙 외에 불교는 없게 됩니다.
정토, 지장 신앙과 같은 신앙은 첫째 유형에 속하고, 선이나 반야불교는 둘째 유형에 속하며, 화엄이나 법화경에서 말하는 보살행의 불교는 모두 셋째 유형에 속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관음신앙 외에 불교는 없다!"
천수경산책 14
관세음과 아미타
어제 인터넷 불교 "미디어 붓다"의 이학종 대표님을 뵈었습니다. 불교언론의 베테랑 답게 여러 가지로 예리한 분석을 많이 들려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불교가 현재처럼 갈 때는 2040년에는 군소종교로 전락하리라는 섬뜩한 이야기도 들려주었습니다. 그때는 일 년에 스님되는 숫자가 22명이라고 합니다. 한국불교 미래사회연구소의 예측이랍니다.
그러다가 "조계사는 간화선풍(看話禪風)의 총본산이 아니라 정토종의 총본산이다. 조계사에 가봐라. 하루 종일 염불소리만 들리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그 직전에 제가 드린 말씀에 대한 일종의 반론(?)같은 것이었습니다만, 제가 드린 말씀은 이렇습니다.
"정토신앙을 말하는 스님도, 정토신앙을 말하는 학자도, 정토신앙을 말하는 책도 너무 없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이학종 대표님의 말씀처럼,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는 조계사를 비롯해서 전국적으로 많은 절에서 많은 신도님들이 나무아미타불이든, 관세음보살이든 염불을 하고 있습니다. 염불을 기도로 삼고, 염불을 수행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는 저 역시 이학종 대표님과 관점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신앙현장은 그런데, 왜 염불을 하고, 염불이라는 것이 참선과는 어떻게 같은지 다른지, 또는 염불을 통해서 성불을 할 수 있는지 ---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말하는 스님이 너무 적고, 그런 것을 연구하여 말해주는 학자도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현장과 학문이나 교학의 관념이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제 이야기는 그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천수경 산책"을 쓰는 것도, 저는 바로 그러한 간극, 틈새를 메꾸어 보자고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신앙과 관련한 불법의 세계도 얼마나 깊은 데 말입니다. 오늘 드릴 말씀은 그런 말씀입니다.
저는 지난 20년 동안 천수경과 관세음보살님을 말해왔습니다. 그렇게 천수경과 관세음보살님을 말해 주신 분으로서, 우리 역사의 가장 앞선 자리에 계신 분이 의상(義相, 625-702)스님입니다. 그 스님은 ,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낙산사 홍련암 자리에서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여 낙산사를 창건하신 분이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동시에 부석사를 지으셨지요. 부석사에 가보면 아시겠지만, 그 도량은 정토신앙에 따라서 지어졌습니다.
의상스님은 관음신앙과 미타신앙을 동시에 하시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저는 관음신앙만을 열심히 했습니다.
아미타부처님에 대해서는 별로 신심이 없었습니다. 10년 전까지 그랬습니다. 그런데 제가 10년 전에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이런 글귀를 하나 만납니다.
"관세음보살을 서방정토 극락세계에서는 아미타불이라 부른다."
이 말은 엔친(圓珍)이라는 천태종 스님이 "천수경술비기(千手經述秘記, 천수경의 비밀을 서술하여 기록한 책)"라는 책에서 남겨놓으신 것입니다. 엔친스님은 당나라에 유학하신 분인데, 이 말씀은 사실 자기 말이 아니라 불공(不空)스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불공스님은 인도스님으로서 중국에 오셔서 경전번역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 중에 "천수경" 번역도 있고요. 지금 우리가 외우는 "독송용 천수경"에 나오는 "계수관음대비주 원력홍심상호신 --- 소원종심실원만"까지 부분은, 바로 불공스님 번역의 "천수경"으로부터 가지고 온 것입니다.
앞(천수경 산책 4)에서 저는 "관세음보살의 스승이 아마타불"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차원이 또 열립니다. 관세음보살님과 아미타불이 둘이 아니라는 점을 말입니다. 그래서 의상스님이 이해되기 시작하였고, 저 역시도 관세음보살신앙과 아미타불 신앙을 동시에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즘, 외람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저도 쉰이 넘은 지 몇 해 지났으니 점점 더 내세워 부처님이신 아미타불과 친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달에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를 다녀왔습니다. 거기에서 관세음보살들이 모여서 무슨 회의라도 하는 것같은, 입체관음만다라를 보았습니다. 거기서 들은 이야기인데, "이 관세음보살은 로케쉬바라(lokeshvara)라다."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아, 로케쉬바라는 한자로 번역하면 "세자재(世自在)"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의 스승이 됩니다. 아미타불이 되신 법장(法藏)비구의 스승이 세자재왕여래가 아닙니까.
무량수경이라는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자 , 이렇게 생각해 보면 첫째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의 제자이고 비서이다. 둘째, 관세음보살과 아미타불은 같은 분이다. 셋째,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의 스승이다. 족보가 어떻게 되지? 왜 이리 복잡하게 이야기를 하는가?
그렇습니다. 복잡합니다. 그렇지만 그 듯은 간단합니다. 정리해 보면, 관세음보살과 아미타불은 법에 있어서는 한 분입니다. 다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역할이나 기능은 경우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고, 그때마다 족보의 촌수가 설정된다고 생각하면 될 것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천수경산책 15
거울 속의 관음, 거울 속의 나
좀 지겨우실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당연합니다.
지금 우리가 어디쯤 와 있느냐 하면, "천수경"의 정식 이름인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경"이라는 이름을 해설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천수천안에 대해서 6번을 말씀드렸고,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에 대해서 7번을 말씀드렸습니다.
좀 징하다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제목을 가지고 그러느냐? 이렇게 말씀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목만 다 알면 됩니다. 본문은 제목에 대해서 해설한 것이라 말해도 좋습니다. 그만큼 제목 속에는 모든 것이 다 담겨 있습니다.
오늘은 제목 중에서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에 대한 설명 중에서는 마지막입니다.
지난번에 의상스님의 관음신앙에 대해서 말씀드렸지요. 관세음보살님께 드리는 그분의 신앙의 깊이는
한 발원문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백화도량발원문"이라는 짧은 글입니다.
여기서 백화도량은 쉽게 말씀드리면, 관세음보살님이 머무시는 극락세계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내용 중에 이런 비유의 표현이 나옵니다.
"관세음보살님의 거울 속 제자의 몸으로
제자의 거울 속에 계신 관세음보살님께 귀명정례(歸命頂禮)하여", 라는 말씀입니다.
어떻습니까? 절창(絶唱)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구절이 갖는 뜻은 무엇일까요?
작년에 이 구절을 생각하면서, 저는 시 한 수를 지었습니다.
오늘은 의상스님 말씀에 대해서, 제가 다시 구구절절 어려운 이야기를 풀어놓는 대신에 이 시를 한번 읊어드리고자 합니다.
거울 2
--- 의상스님의 비유를 따라서 ---
멍- 하니, 어젯밤 필름이 끊어졌다
너무 많이 마셔댄 탓이다
2차로, 3차로
쓰린 속을 달래며
가로 늦게 일어나서
화장실 거울 앞에 선다
부석 부석, 빚지도 않은 머리로
거울 속을 들여다 본다
저쪽에도 내가 나타나야 할 것이다
비록 오른 손 내밀면서,
"어이, 자네, 잘 있었는가"
할 때, 그는 왼손을 내밀더라도
어젯 저녁 숙취에 덜 풀린 속을 한
내 얼굴이 나와야 할 터이다
어찌된 연고인지
거울 속에는 내가 없다
나 대신, 나를 보고 있는 것은
바로 내 님이었다
보배영락 치렁치렁
나를 보고 있었다
정신 차리자, 세수를 해봐도
언제나처럼 내 님이 나를 보고 있다
쯔 쯧, 연민에 찬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보고 있다
필름이 끊어졌던 나
거울 속에 없었다
내 님만이 나를 보고 있었다
이상한 거울이었다
* 의상스님 비유 : 『백화도량발원문』에 나오는 비유
(2011. 3. 12)
천수경산책 16
나는 원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천수경에는 많은 원들이 나옵니다. 우선 우리가 읽고 외우는 "독송용 천수경"부터 헤아려볼까요.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지일체법" 운운하여, 원(願)자가 열 번 나오는 부분이 있고요. 이를 십원이라 합니다.
또 "아약향도산, 도산자최절" 운운하면서, 향(向)자가 여섯 번 나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를 육향이라 합니다.
이 십원육향은 관세음보살님께서 세우신 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십원육향은 다라니(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기 전에, 발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는 것은 그야말로 "신묘한" 공덕을 쌓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신묘한 공덕을 쌓게 되면
그 공덕을 우리는 어딘가로 써야 합니다.
나누어 가져야 하고, 돌려야 합니다. 이를 회향(廻向)이라 하지요.
예를 들면 돈을 실컷 저금해 놓고, 많이 모이니까 그때 가서 우리는
그 돈을 어디에 쓸 것인가를 고민할까요? 대개는 그렇지 않지요.
먼저 저축하기 전에 목적부터 정합니다.
이 통장은 해외여행, 이 통장은 아이들 교육비 등등으로 용도를 정합니다.
그래야 더 저축이 잘됩니다. 추진력도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먼저 공덕을 쌓기 전에 먼저 수행하기 전에 원부터 세워야 합니다.
원이 없는 사람은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이야 말로, 척추입니다.
만약 우리 몸에 척추가 없다면, 그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라 할 수 없는 것일 터입니다.
이렇게 원을 세울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이 없는 것은 동물입니다. 우리 인간 역시 동물이지만 원이 있기에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몇 번에 걸쳐서
관세음보살님의 경우에는 어떤 원을 세웠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독송용 천수경"에는 보편적으로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에게 다 통용되는 "여래십대발원문"과
"발사홍서원"도 나오지만,
그에 대해서는 이미 "천수경의 비밀"과 같은 책에서 말씀드렸으므로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다만 "원본 천수경"에 나오는 관세음보살의 발원문을 하나하나 헤아려 보기로 하겠습니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님은 두 번에 걸쳐서 발원을 세우고 있습니다.
먼저 십원육향을 세우고, 그 다음에는 열 두가지 원(十二大願)입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을 관세음보살님께서 세우신 원력의 세계로 안내해 드릴 것입니다.
저 찬란한 발원의 말씀이여, 저 아름다운 발원의 세계여
저희들에게도 그 문을 활짝
열어주소서.
천수경산책 17
관음은 관음에게 원하고, 나는 나에게 원한다
이 "천수경 산책"을 읽으시는 분들께서 아마도 어렵다고 느끼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 이유는 제가 "독송용 천수경", 즉 우리가 지금
절에서 읽고 외우는 천수경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을 것 같습니다. 대장경 속에 존재하면서, 우리의 "독송용 천수경"에 모본(母本)이 되어준 천수경, 즉 "원본 천수경" 이야기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이 좀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말씀드리는 십원육향은 "원본 천수경"만이 아니라, "독송용 천수경"에서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좀더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봅니다.
먼저 다시한번 '십원'과 '육향'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지요.
천수경에서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지일체법,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득지혜안 ---" 등으로 말해지는데요.
거기에 '원(願)'자가 몇 번 나오는지 헤아려 보세요. 몇 번 나옵니까? 정확히 열 번 나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십원(十願)"이라 합니다.
또 육향은 십원이 끝나면 바로 이어지지요. "아약향도산 도산자최절, 아약향화탕, 화탕자소멸 ---",
이렇게 해서 '향(向)'자가 몇 번 나옵니까? 그렇습니다. 여섯번 나오지요. 그래서 그 부분을 '육향(六向)"이라 말합니다.
이렇게 "원본 천수경"에서부터 나오는 이 십원육향 부분을, 그렇게 '십원 육향'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신라 시대의 의상스님이 처음입니다.
이후 우리는 이 부분들을 십원육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니 재미 이상으로 놀랍게 생각되는 것은 바로 십원이 말해질 때에 등장하는
"나무대비관세음"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여기에 불교의 궁극적인 뜻이 다 드러나 있다고 봅니다.
"나무대비관세음"이라는 말을 뜻으로 풀이하면, "크게 자비로우신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합니다"라는 말이 됩니다.
나무, 라는 말은 원래 인도말 입니다만 그 의미가 '귀의하다'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 내 마음을 들여놓고서, 그분께 의지한다. 이런 의미겠지요.
그리하여 "나무대비관세음"은 "크게 자비로우신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합니다"라는 말이 되는데, 여기서 제가 퀴즈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이 말은 누구가 한 말일까요?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합니다"라고 하니까, 당연히 중생들이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같지요?
그러나 놀랍게도, 참으로 멋들어지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관세음보살님 자신이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 것이 나타나 있는 것은 "독송용 천수경"이 아니라 "원본 천수경"입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울 사람은 먼저 나를 따라서 이와같이 원을 세워야 한다"고 해놓고, 십원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십원이 먼저 관세음보살님의 원임을 알겠습니다. 그 원을 스스로 세우면서, 스스로 먼저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관음이 관음에게, 내가 나에게 귀의를 한 것입니다.
얼마나 멋들어집니까.
제가 옛날 이 구절을 염두에 두면서 이렇게 노래를 지었습니다. "백화도량발원가'라는 노래 24수 중에 한 수입니다.
"관음보살 이름외며 백팔배를 거듭하나
중생들이 보살님께 예배함이 아니옵고
관음보살 스스로가 관세음께 예배하니
불교의멋 여기있네 스스로를 의지하라"
천수경산책 18
열가지 원, 혹은 다섯가지 원
여러분은 어떠셨습니까? 지난 번 글을 읽으시고, 몸에 어떤 반응이 없으셨는지요?
관세음보살님이 스스로에게 귀의합니다, 라고 말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말입니다. 바꾸어 말씀드리면, 그 이야기는 바로 제가 저 자신에게 귀의하며,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게 귀의한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부처님을 찾는 것이고, 그 속에서 부처님을 보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야말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춤이라도 추고, 눈물을 흘리기도 해야 합니다.
그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우리가 부처님의 법을 진실로 기뻐하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저 옛날 보조지눌스님께서는 화엄경을 읽으시다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경전을 머리에 이고서 눈물을 흘리고 방을 돌았다고 합니다.
저는 지난 번 글을 쓰는데 몸에서 전율이 일었습니다.
이런 큰 진리를 만난 인연에 새삼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자, 오늘 이야기를 들어가도록 하지요. 십원육향 중에서, 먼저 십원에 대해서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원인 이 십원을 앞에 나오는 "나무대비관세음"을 생략하고서, 한번 줄지어서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원아속지일체법
원아조득지혜안
원아속도일체중
원아조득선방편
원아속승반야선
원아조득월고해
원속속득계정도
원아조등원적산
원아속회무위사
원아조동법성신
이러한 열 가지 원을 한자어로 우리는 지금 외우고 있습니다만, 재미있는 것은 "원아"로 시작하여 두 구절마다 짝을 이루면서 "속 - "과 "조 - "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원아, 는 "원하옵건대 제가(저는) ---" 이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속 - ", "조 - "는 모두 "어서 빨리 --- 을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원의 내용이겠지요.
이를 다시 정리하자면, 두 구절마다 짝을 이루는 구조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해 보겠습니다.
모든 법을 아는 것
지혜의 눈을 얻는 것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것
모든 방편을 얻는 것
지혜의 배를 타는 것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는 것
계정도를 얻는 것
원적의 산에 오르는 것
무위의 집에서 만나는 것
법성의 몸과 하나되는 것
이렇게 됩니다. 이러한 열 가지를 "어서 빨리 이루고자 합니다."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두 구절씩이 짝이 이루어져 있는데, 그 사이에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법을 아는 것 --- 결과
지혜의 눈을 얻는 것 --- 원인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것 --- 결과
모든 방편을 얻는 것 --- 원인
지혜의 배를 타는 것 --- 원인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는 것 --- 결과
계정도를 얻는 것 --- 원인
원적의 산에 오르는 것 --- 결과
무위의 집에서 만나는 것 --- 원인
법성의 몸과 하나되는 것 --- 결과
첫째 원에서 넷째 원까지는 결과가 먼저이고 원인이 나중에 나오는데, 다섯째 원에서부터 열째 원까지는 원인이 먼저이고 결과가 나중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두 구절씩, 결과와 원인 혹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본다면 이 십원은 사실상 오원(五願)으로 봐도 좋을 것입니다.
천수경산책 19
모든 원의 출발은 공부로부터
천수경의 십원은 관세음보살님의 원이라는 점을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또 그 열가지 원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우연인지, 아니면 참으로 정교한 계획에 의해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십원에서 원인과 결과의 짝이 바뀌는 것을 보면 절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의 네 가지 원은 "결과"가 앞에 오고, "원인"이 뒤에 오지요. 그리고 뒤의 여섯가지 원은 "원인"이 앞에 오고, "결과"는 뒤에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원을 앞의 네 가지 원과 뒤의 여섯가지 원으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게 됩니다.
우선 앞의 네 가지 원을 살펴보지요. "지혜의 눈을 얻어서 모든 진리를 알고, 훌륭한 방편을 얻어서 모든 중생을 건지겠다"는 원입니다.
지혜의 눈이 없으면 진리를 알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마찬가지로 중생을 제도하는 데는 좋은 방편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방편'이라는 어려운 말을 쉽게 한번 설명해 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공부를 하라고 말하지요. 그런데 "공부해서 남 주나?" 이런 식으로 공부를 닥달한다고 해서, 공부에 아이들이 흥미를 갖고 성적이 잘 오를까요?
그렇지 않겠지요. 그런 경우는 의도는 좋지만 선방편(善方便)을 얻지 못했기에 역효과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방편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이지요.
자, 앞의 네가지 원은 결국 지혜로 진리를 얻고, 또한 방편짜기 잘 갖추어서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것입니다. 남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원이 앞섭니다. 즉 네가지 원은 이타(利他)의 원입니다.
다음으로 뒤의 여섯가지 원을 살펴보기로 하지요. 반야(지혜라는 말입니다. 앞에서 '지혜의 눈"이라 해서 나왔기에, 여기서는 '반야'라 했습니다. 같은 말을 피한 것입니다.)를 얻지 못했다면, 고통바다를 건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원인이 있어야 결과를 얻는다는 논리입니다만, 그 결과는 "고해를 건너기 = 열반의 산 오르기 = 진리의 몸과 하나되기"입니다. 그것들, 즉 세가지는 모두 같은 말입니다.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 스스로 해탈하고 성불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리(自利)의 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원에서는 먼저 이타를 말하고, 나중에 자리를 말합니다. 이게 불교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확인할 것은 자리행의 출발점도, 앞의 이타행의 출발점에서 지혜가 놓여 있었던 것처럼 지혜(=반야)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입니다.
중생을 제도하는 이타행도, 자기를 완성시키는 자리행도 모두 그 출발점은 "지혜"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불교가 "지혜를 닦는 종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공부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문을 듣는 것, 부처님의 법문을 읽는 것입니다.
듣는 것은 법회에 참석하여 스님으로부터 법문을 듣거나, 방송이나 인터넷으로 법문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읽는 것은 혼자서 책을 통해서나 인터넷을 통해서 부처님의 법문을 읽는 것입니다. 책을 읽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면, 남을 이롭게 할 수도 없고 스스로를 완성시킬 수도 없다는 점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천수경산책 20
새롭게 발견된 부분을 보완한, 완본 “백화도량발원문”의 우리말 옮김
우리 산책에서 몇 번인가 의상스님의 "백화도량발원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종래에는 두 부분에서 원문을 알 수 없었습니다. 불완전한 것을 읽고 외웠던 것이지요.
하지만 최근 반갑게도 그 부분이 찾아졌습니다.
이에 그 되찾은 부분까지 넣어서, 완벽한 발원문을 새롭게 우리말로 옮겼습니다.
우선 이 발원문을 오늘은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백화도량발원문(白華道場發願文)
의상(義相, 625-702) 지음
김호성 옮김
머리 숙여 귀의하옵고
저희 스승 관세음보살님의 대원경지(大圓鏡智)를 우러르며
제자의 성정본각(性靜本覺)을 관찰하옵니다.
한가지로 근본이 같으므로 청정하며 밝아서
시방세계에 두루하오나 확연히 텅 비었으니
중생이라 부처라 할 모습이 따로 없고,
귀의의 주체니 대상이니 부를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이미 밝고 깨끗하지만 비춤에 어긋남이 없으니,
삼라만상 가운데 몰록 나타나십니다.
저희 스승의 수월장엄(水月莊嚴) 및 다함없는 상호와
제자의 헛된 몸과 유루(有漏)의 형체 사이에는
의보와 정보, 정토와 예토, 즐거움과 괴로움이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두 같은 대원경지를 떠나지 않습니다.
관세음보살님 거울 속 제자의 몸으로
제자의 거울 속에 계신 관세음보살님께 귀명정례(歸命頂禮)하여
진실한 발원의 말씀을 사뢰오니 가피를 바랍니다.
오직 원하옵나니
제자는 세세생생 관세음보살님을 염하며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관세음보살이 아미타부처님을 정대(頂戴)함과 같이
제자 역시 관세음보살님을 정대하여
십원육향(十願六向), 천수천안과 대자대비는 관세음보살님과 같아지며
몸을 버리는 이 세상과 새 몸 얻는 저 세상에서
머무는 곳곳마다 그림자가 물체를 따르듯이
언제나 설법하심을 듣고 교화를 돕겠습니다.
널리 온 누리 모든 이웃들에게
대비주(大悲呪)를 외게 하고
관세음보살님을 염송케 하여
다함께 원통삼매(圓通三昧)에 들게 하소서.
또한 관세음보살님께 원하옵나니
이 목숨 다할 때에는 밝은 빛을 놓아 맞아 주시오며
모든 두려움을 떠나서 몸과 마음이 쾌활하고
찰나에 백화도량(白華道場)에 왕생하여
여러 보살과 정법을 함께 듣고 진리의 흐름에 들어
생각 생각 더욱 밝아져 부처님의 무생법인(無生法忍)을 발하게 하소서.
모든 원을 발하며
관자재보살마하살께 귀명정례하옵니다.
* 밑줄 그은 부분은 종례에는 결락(缺落)된 부분이었으나, 최근 박동춘 선생님 소장의 『백화도량발원문약해』(體元) 사본에는 이 부분이 누락되지 않고 있었다. 이를 정병삼 교수가 입수하여 학계에 공개하였다. 이 발원문을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해주신 체원스님, 박동춘 선생님, 그리고 정병삼 교수님에게 감사드린다.(김호성 합장)
천수경산책 21
관음, 중생들의 세계를 향해 가시다
지난 번, 천수경 산책 20은 사실 '삼천포로 빠진 것'입니다. 물론 그 내용인 "백화도량발원문" 자체는 우리의 산책에서도 여러번 마주친 풍경이고,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진행되는 진도에서는 벗어난 것입니다. 글을 쓸 시간이 없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의 너른 이해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우리의 진도로 돌아가기로 하지요. 십원육향에서 십원에 대해서 두번 설명해 보았습니다. 그 십원의 내용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려면 끝이 없습니다만, 그쯤해서 정리하기로 하고 오늘은 육향(六向)으로 넘어갑니다.
육향은 여섯번의 향(向)이 나온다고 해서, 육향이라 하는 것은 이미 우리가 공부한 바입니다. 거기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여섯번이나 "향해간다" 혹은 "향한다" 라고 할 때, 누가 그렇게 하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도산지옥을 향해서 가는 자
화탕지옥을 향해서 가는 자
지옥을 향해서 가는 자
아귀를 향해서 가는 자
아수라를 향해서 가는 자
축생을 향해서 가는 자
누군가 하는 점입니다. 우선은 "원본 천수경"에서 이 십원육향 전체를 말씀하시는 분이 관세음보살이기 때문에, 이렇게 중생들이 고통 받고 있는 악도를 향해서 나아가는 분 역시 관세음보살님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자비입니다. 중생을 향해서 나아가십니다. 중생들이 사는 고통세계로 들어가십니다. 내려가십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셔서 걸어가십니다.
"지옥이 텅 비지 않으면, 나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성불을 미루시고 중생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은 오직 지장보살님만은 아닙니다.
관세음보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중생으로서는 고맙기 짝이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이렇게 관세음보살님께서 악도를 향해서 나아가시고, 그 악도로 도착하시게 되면 어느덧 악도는 악도가 아니게 됩니다.
도산지옥은 칼들이 뭉턱뭉턱 잘리고, 평평한 평지가 되겠지요.
화탕지옥은 저절로 사라지게 되고
지옥은 저절로 다 말라버리고
아귀는 저절로 배가 부르게 되고
아수라는 싸움을 중단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돌아가고
축생들은 스스로 지혜로운 자가 되고 맙니다.
거기에 관세음보살님의 힘이 있습니다.
그렇게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가는 분이 관세음보살님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소식을 "이산연선사발원문"에서는 또 "내 이름을 듣는 자는 삼악도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내 모습을 보는 자는 해탈을 얻어지이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물론 "천수경"에서는 네가지 악도를 말하였습니다만, 그 취지는 같다 하겠습니다.
천수경산책 22
영화 “화차”와 관세음의 힘
어제 "화차"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보신 분 계시지요? 안 보신 분은 한번 보세요.
화차는 불차입니다. 달리는 기차에 불이 났습니다. 더욱이 문제인 것은
멈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차할 수 없는 폭주기관차입니다.
중간에 정착하는 역 이름이 지옥역, 아귀역, 축생역, 수라역입니다. 이들 네 역을 뱅글뱅글 순환하는 순환선입니다.
선다 한들 어차피 악도인데, 설 수도 없는 폭주기관차입니다. 그런 불차를 타게 된 한 여자의 이야기였습니다.
무서운 것은 한 사람을 이미 죽이고 난 뒤인데도, 다시 자신의 상황이 몰리게 되었을 때는 새삼 또 살인을 예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강선영을 죽인 뒤, 그 유기된 시체가 강에서 떠올라서 신원파악이 된 바로 그날, 강선영의 이름으로 살아온
여자는 또 새로운 살인을 예비하였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임정혜가 그 대상입니다.
처음에 강선영을 죽였을 때는 막상 혼비백산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 두번째입니다. 담담하게 준비하겠지요. 이것이 무섭습니다. 익숙해졌다, 한번 해봤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습관성, 이 말을 우리 불교에서는 업(業)이라 말합니다. 업, 그것은 그렇게 중독성이 있기에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공 차경선은 처음부터 살인자는 아니었습니다. 성당에 나가면서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문제는 아버지의 사채로부터 시작됩니다. 사채를 못 갚게 되자, 아버지는 행방불명입니다. 아버지 대신 사채업자에게 쫒기고 괴롭힘을 당합니다.
이때는 이미 차경선은 결혼을 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사채업자들 때문에 그 행복한 가정이 깨어지게 되고, 사채업자에게 끌려가서 몸을 망치게 되고, 몸과 마음이 모두 병들게 됩니다.
한 여인이 살인자가 되기까지, 그 배경에는 "사채"와 같은 사회경제적인 문제가 놓여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 --- 그리고 원작이 된 소설 "화차" --- 가 말하는 것은, 업에는 사회적인 업이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업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업이 있고,
한 개인이 그 사회적 업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선택에 대해서 우리가 면죄부를 줄 수는 없겠지요. 왜냐하면 차경선과 같은 환경에 놓여있는 모든 사람이 살인을 하고, 그 피해자의 이름으로 피해자가 되어서 세상을 속이고 살아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적 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서, 마음을 아파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책임 역시도 묻게 됩니다.
그렇게 개인의 선택이 물어질 때, 그 개인이 극한상황에서 다시 일어나올 수 있게 하는 데 어떤 힘이 필요하겠지요. 정부의 힘, 사회단체의 힘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차경선이 성당 성가대 활동을 했기에, 종교의 힘 역시 물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때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신앙의 힘이라는 것은 정녕 그대 발휘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만약에 차경선이 "천수경"을 알았다고 한다면, 관세음보살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살인을 생각할 때, 그녀는 이미 지옥에, 이미 아귀에, 이미 축생에, 이미 아수라의 세계에 떨어졌던 것입니다. 네가지 악도는 우리가 죽어서만 가는 세상이 아닙니다.
살아있더라도 우리가 마음속에서 악을 생각하고, 악을 행하게 된다면 이미 지옥, 아귀, 축생, 수라의 세계에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천수경"에서 관세음보살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이 바로 그러한 때에 있을 때, 만약 여러분들이 내 이름을 불러주어서)
내가 지옥을 향해서 가게 된다면
지옥은 스스로 다 고갈되어서 없어져 버리게 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아약향도산 도산자최절"부터 "아약향축생 자득대지혜"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차경선이 믿었던 가톨릭 교회의 하느님도, 우리 불교의 관세음보살님도 스스로 요청하지 않는데
도와주지는 않습니다.
"아, 자비라고 한다면,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 정도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까지 완벽한 타력은 없습니다.
아미타불의 이름을 염하지 않더라도, 아미타불의 본원력을 믿기라도 해야 극락에 간다 하였습니다.
마치 비유하면, 지금도 허공에는 방송국에서 보내주는 전파가 흐르지만
안테나라든가 TV라든가, 라디오라든가, 이쪽에서 그 전파를 받아들이는 장치가 없다면
전파를 잡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최종적으로는, 역시 "개인"의 자각이 중요하고, 노력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개인의 자각을 통한 개인의 구원을 지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Re: 시 “화차”
화차(火車)
김호성
알고 보니
그녀는 화차를 탔네
머리부터 꼬리까지
불 붙어 타고 있는 화차에
올라탔네
화탕(火湯)으로 확탕(鑊湯)으로 내달리는
무정차의 폭주기관차에
뛰어탔네
더 이상 그녀는
누구의 이름도 부르지 않고
누구도 그녀의 이름
부르지 않네
부를 수 없네
그녀는 누구인가?
그녀의 진짜 이름
약혼자 문호마저 확신할 수
없네
천천히 들어오는 열차 하나
그냥 보낸 뒤
용산역 철로 위로
몸을 날렸네
죽음의 길이었네
하지만, 그녀가 죽은 뒤에도
화차는 쉴 수가 없네
화탕으로 확탕으로 달리고 있네
그런 화차를 그녀가
탔네
(2012. 4. 7)
천수경산책 23
걸림이 없는 자비의 마음
십원과 육향은 관세음보살님의 원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저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천수경의 제목 중에 '광대원만'이라는 말이 나타내는 것은, 그렇게 큰 관세음보살님의 발원이라 생각됩니다.
이제 '무애대비심'에 대해서 살펴볼 시간이 되었습니다. 무애(無碍)라는 말은 거리낌이 없다는 뜻입니다. 거리낌이 없다는 말은 행동이 그만큼 자유롭고, 호탕하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쿨하다'라는 것도 이 거리낌이 없는 마음에 해당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려도, 사실 무애하다, 거리낌이 없다, 걸림이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예화를 듭니다. 언젠가 제가 인도에 갔습니다. 인도의 수도 델리에 가면, 마하트마 간디를 화장한 곳이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공원처럼 되어 있습니다. '라자 가트'라고 합니다. 거기를 가서 구경을 하고, 점심을 먹으려고 지나가는 '릭샤'(인력거)를 잡았습니다. 자전거를 앞에 달아서, 뒤에 사람이 타는 것이기에 '사이클 릭샤'라고 합니다.
요금 흥정을 하였습니다. "어디까지 가는 데 얼마냐?"
"10루피(루피는 인도 돈의 단위입니다.)다."
"좋다, 가자."
이렇게 해서 탓습니다. 여름인데, 이 사이클 릭샤를 모는 '왈라'(노동자, 릭샤를 모는 사람을 릭샤 왈라, 라고 합니다.)는 삐쩍 말랐고, 땀을 흘리면서, 애를 쓰는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어른 둘, 아이 하나)는 의논하기를, "팁으로 2루피를 더 주자"라고 약속합니다. 그러니까 총 12루피를 주기로 마음을 낸 것입니다.
잠시 뒤, 목적지로 삼은 식당 앞에 도착했습니다. 10루피를 내서 주니까, 왈라는 안 받습니다.
"30루피"라는 것입니다.
"10루피라고 해놓고, 그러면 되느냐?"
그랬더니, 아 이 친구 하는 말이 "한 사람에 10루피라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행가이드 북에는 이런 수법을 소개해 두고서, 그럴 경우에는 "릭샤 위에 돈을 올려놓고, 갈 길 가면 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10루피를 올려놓고, 밥 먹으러 식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릭샹 왈라는 한 번 해보고 잘되면 좋고, 안 되어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인지 더 이상 따라와서 돈을 더 달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자, 이 이야기를 다시한번 더 생각해 보지요.
제게 만약 걸림이 없는, 무애대비심이 있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10루피가 아니라, 12루피를 주고 왔어야 했겠지요. 2루피 팁을 더 주려고 한 것은 좋은 마음을 일으킨 것입니다.
자비심을 일으킨 것이지요. 그런데 릭샤 왈라가 저를 속이려고 한 것에 대해서, 그의 행위는 저의 마음을 분노케 했고, 그는 '괘씸죄'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2루피를 더 주려고 했던 마음을 포기하고 말았지요.
그가 나를 속이려 했든지 아니었든지 무관하게 제가 2루피 팁을 얹어서 12루피를 주고 왔더라면, 저는 그의 행동에도 '걸림이 없는' 자비를 베풀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금강경에서 말씀하시는 무주상보시바라밀 역시 이런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상(相)에 머물지 않는다, 는 말은 바로 이렇게 그가 나를 속이려 했다는 관념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상대가 나에게 해주는 대로, 나 역시 상대에게 하려는 방식 말입니다.
이렇게 릭샤왈라가 저에게 교훈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 이러한 교훈을 '왈라교훈'이라 할 수 있겠지요. ---
저의 경지는 아직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상에 머무는 일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와는 달리 관세음보살님께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걸림이 없는, 거리낌이 없는 자비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관세음보살님입니다.
천수경산책 24
우리는 정말 자비로울수 있을까
관세음보살님은 '무애대비심'을 갖고 계시다 합니다. 걸림이 없이 큰 자비로운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 같은 중생은 도저히 관세음보살님의 걸림이 없이 큰 자비심을 짐작으로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취할 수 있는 전략은 정반대로 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걸림이 없는 자비심'이 안 되는지를 성찰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우리의 마음에 정반대 되는 저편에 관세음보살님의 걸림이 없는 자비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저는 저 자신이 실패한 경험담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도 그에 뒤이어서 하나 더 상황을 말씀드려 보고자 합니다.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능히 경험할 수 있었을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스님들께서는 경험하시기가 쉽지 않으실 것입니다만, 우리처럼 머리 기르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사람들은 다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이를 낳아서 길러 본다면, 그런 경험을 쉽게 하게 됩니다.
아이를 기를 때 보면, 아이 밥을 먹일 때 흔히 아이가 입에 넣어서 씹다가 음식물을 다시 뱉어놓는 경우가 있게 됩니다.
이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셨나요?
대개 엄마들은 그것을 그냥 입으로 넣어서 드시는 것을 봅니다.
우리 집사람도 그렇게 하는 것을 제가 봤고, 또 저 자신 아이의 입 속에 들어갔던 음식물은 다시 집어서 먹었습니다.
아깝기도 하고, 아이가 사랑스러웠기에 능히 가능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전혀 특별한 생각이 없이 그렇게 했습니다. 어쩌면 이 때 아이와 저 사이에는 어떤 경계선도 없었을 것입니다.
걸림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 아이의 친구가 우리 집에 와서 우리 아이랑 같이 놀다가 함께 밥을 먹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 아이가 아니라, 우리 아이의 친구(내지는 옆집 아이)가 뭔지 마땅하지 않아서
밥을 먹다가 씹어서 내뱉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 어떻습니까? 우리 아이의 씹어먹던 음식물을 내 입에 넣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처럼,
우리 아이가 아닌 옆집 아이, 내 아이가 아닌 내 아이의 친구가 씹어 먹던 음식물을 다시 받아서 내 입에 넣을 수 있겠습니까?
혹시라도 여러분 중에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신 분이 계십니까?
만약, "나는 그렇게 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은, 제 생각으로는 부처님입니다.
그렇게 못합니다. 그렇게 못하는 사람이 중생입니다. 우리는 중생입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야, 걸림없는 자비, 무애대비심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옆집 아이에 대한 사랑이나 내 아이에 대한 사랑이나 추호도 다를 수 없습니다.
인연의 깊고 옅음에 무관하게 사랑하는 것, 자비로운 것, 이를 무연(無緣)의 대비라고 하고,
동체(同體)의 대비라고 합니다.
관세음보살의 자비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안 될까요?
'우리' 아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스님들께서는 아이 밥먹여 보는 경험은 없을지 몰라도,
'내' 아이가 없으니까, 모든 아이들은 다 '내' 아이일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스님들이 훨씬 관세음보살님의 무애대비심을 지니시기 쉽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 관세음보살님과 우리 사이에는 이렇게 큰 간극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관세음보살님 이름을 부르면서 참회를 합니다. 그리고 관세음보살님 이름을 부르면서
그분과 같은 무애대비심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
천수경산책 25
자비가 지나쳤던 스님 이야기
관세음보살님처럼 걸림없는 자비, 거리낌 없는 자비를 과연 우리는 실천할 수 있을까?
우리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치 인연이 있는 사람들에게 하듯이 할 수 있을까? 다른 존재를 마치 내몸처럼 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그렇다, 할 수 있다"라고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관세음보살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이 될 수 있다 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이 그런 경지에 이르렀다 할 수 있을까요? 오늘은 제가 아는 한, 그런 예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스님 이야기를 한분 하려고 합니다.
닌쇼스님입니다. 이 분은 일본 스님인데요. 우리말 음으로 읽으면 인성(忍性)스님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중세 가마쿠라 시대에 활약하신 스님입니다.
1217-1302년을 살았던 분입니다.
이 분은 나라(奈良)에서 공부하시고 활동하시던 분입니다. 나라라고 하면, 여러분 혹시 동대사(東大寺)라는 절을 가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대불로 유명한 절이지요. 그 동대사에서 북쪽으로, 교토로 향해 가는 큰 길이 있습니다. 약간 언덕받이 길입니다.
동대사에서 교토로 가는, 그 언덕받이길 왼쪽에 반야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꽃이 많은, 이쁜 절입니다.
그 반야사에서 닌쇼스님이 주지로 계셨는데요. 그 반야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쥬하치간도(十八間戶)"라는 집이 있습니다.
지금은 무슨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십팔간, 이라는 것은 한옥을 부를 때 몇 칸이라는 하는 그런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18칸 짜리 집입니다.
18칸 짜리 집이니까, 방이 17칸이 나옵니다. 그 방이 무엇에 쓰던 방이냐 하면 한센병 환자들의 병사(病舍)입니다.
한센병이라 하면, 우리가 흔히 나병이라 하던 그 병입니다.
그런 환자들을 구호하던 요양소 같은 집이 바로 "쥬하치간도"였습니다.
닌쇼스님이 반야사에 계시면서, 당시 한센병 환자들을 모아서 구호하시던 건물입니다. "원형석서"라는 책에 그런 이야기가
있다 합니다.
매일 아침이면 닌쇼 스님이 한센병 환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환자 한 사람을 업습니다. 그리고는 시내로 들어가서
동냥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먹여 살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목욕을 시키는데 등을 밀어주고 때를 벗겨주었다 합니다. 그 환자가 죽을 때 하는 말이
"나는 다음 생에는 꼭 스님의 시봉(제자)가 되어서, 스님을 모시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닌쇼스님의 말년에 들어온 제자 중에 얼굴이 얽은 제자가 있었다 합니다.
이 닌숀스님께서 나중에는 가마쿠라(鎌倉, 동경에서 서남쪽으로 1시간 거리)라는 곳으로 옮겨가서 교화를 펼치십니다.
가마쿠라에서는 극락사라는 절에서 머물면서, 나숙(癩宿)을 만들어서 역시나 한센병 환자들을 구호하였습니다.
지금도 그 극락사에는 당시 사용하던, 약제를 제조하던 돌절구와 죽을 끓이던 돌솥 등이 남아있습니다.
지금도 한센병 환자들을 우리랑 함께 살기가 힘들고, 우리들은 멀리 합니다. 그래서 소록도에 모여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시절에, 13세기에 닌쇼스님은 그렇게 업고 다니고 몸을 씻어주고 하였다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시고서 닌쇼스님의 은사스님이신 에이손(叡尊)스님이 하신 말씀이 그렇습니다. "자네는 자비가 지나치네"라고 말입니다. 얼마나 자비로우면 이렇게 자비로울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석가모니부처님 이래로 가장 자비로운 분을 찾으라면 바로 닌쇼스님이라고 말입니다. 스님으로부터
700년이 지나서 마더 테레사 수녀같은 분이 났습니다.
그래서 닌쇼스님을 "일본판 마더 테레사"라고도 합니다만 ---.
우리나라 역사에는 이런 스님이 안 계셨던 것같습니다. 이인성의 소설 "동의보감"에 삼적스님이라는 분이
그런 일을 합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설 안에서입니다.
그렇지만 위축될 것은 없습니다. 닌쇼스님을 우리 스님으로 모시면 됩니다. 원래 불교에는 국경이 없으니까요.
만약 국경이 있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을 "인도의 부처님"이라 부를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부르지는 않잖아요.
제가 일본불교사연구소를 하는 이유의 하나도 이런 스님을 소개하고 싶어서입니다.
혹시 나라나 가마쿠라를 가시는 걸음이 있으시면, 닌쇼스님의 자취를 한번 찾아가 보십시오.
천수경산책 26
자재공덕회의 증엄(證嚴)스님을 아십니까?
지난번에 말씀드린 닌쇼(忍性)스님과 같은 분을 우리가 이야기로나마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큰 스님을 우르러 생각하는 것을 염승(念僧)이라 합니다.
닌쇼스님 이야기를 통해서 무애대비심의 질적인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면, 오늘은 무애대비심의 양적인 너비를 느껴보고자 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많은 불교국이 있고, 많은 불교단체, 많은 스님이 계십니다. 그런 중에 관세음보살님을 대신해서, 원래 관세음보살님의 일이었던 무애대비를 실천하는 데 가장 거대하고도 활발한 단체나 조직을 들라고 한다면 단연 대만의 자제공덕회(慈濟功德會)일 것입니다.
우선 이 단체의 규모를 한번 말씀드려보지요. 우리나라에는 그 분회가 없지만, 세계 각국에 조직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재난을 당한 나라에서, 이 자제공덕회로부터 재난구호를 받아본 경험을 갖고서 자발적으로 생성되었다 합니다.
아이티라든가, 사천성이라든가, 동일본 대지진 등 각국의 재난 등에서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외국인 구호대가 자제공덕회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매달 일정한 회비를 내고서 각종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회원(=자제회원)은 어떤 자료에서는 400만이라 하고, 어떤 자료에서는 700만이라 합니다. 자제회원 40명을 관리하는 중간지도자가 있는데, 자제위원이라 합니다. 이들은 모두 4만명입니다.
이들 4만명이 자제공덕회의 중추입니다.
정확히 그 조직이나 사업의 전모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자제공덕회에서도 다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자율적으로 분권화되어서 운영되니까요.
2008년도에 이 자제공덕회에서 모금한 액수는 우리나라 돈으로 4,300억이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물론 그 1년 예산은 이보다 훨씬 많지요. 초공장이나 미숫가루 공장 등에서 나오는 생산불교의 수익금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만에서는 자제병원과 자제대학(의과대학) 등이 여럿 있고, 대애(大愛)라는 TV방송국이 있습니다. 분리수거 등의 환경보호활동을 하는 거점이 대만 전역에만 5000개 있고, 교육기관을 겸하는 곳은 그 중에 250개가 있다 합니다.
이 모든 일은 1966년 갓 서른이 된, 출가한 지 몇 년 되지 않는 키가 작은 한 비구니스님에 의해서 시작됩니다. 대만의 동부에 가면 화련(花蓮)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동부는 서부보다는 낙후된 지역이며, 원주민이 사는 고산지대가 많습니다.
증엄스님은 이 화련의 한 병원에서 어느날 원주민 임산부가 유산을 하고 피를 흘리는 장면을 목격하는데, 돈이 없다고 해서 병원으로부터 어떤 처치도 받지 못하는 것을 보고서 맹서합니다.(우리나라도 병원에 가면 항상 "수납부터" 해야 되지요)
이때 스님이 세운 원력은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받는 중생이 없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료 비구니 스님 5명, 신도님 30명을 규합하여 "불교극난(克難)자제공덕회"를 설립합니다. 동시에 미숫가루와 양초를 만들어서 팔고, 대나무통으로 만든 저금통을 배부합니다. 매일같이 5전을 저금하라고요. 이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마을로 가정방문을 다닙니다. 이것이 자제공덕회의 시작입니다.
어느 자제회원이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님의 한 팔이 움직이는 곳에서 자제회원들의 천 개의 팔이 같이 움직이고, 스님이 바라보는 곳을 자제회원들의 천 개의 눈이 같이 향하고 있다"라고 말입니다. 바로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의 이미지입니다.
바로 그렇게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의 자비로운 마음으로 가난한 이를 돕고, 병든 자를 구제하는 보살행을 지금까지 46년 동안 한결같이 행해오고 있습니다.
언제 한번 기회가 된다면, 자제공덕회는 꼭 한번 방문해 보시길 권합니다. 관세음보살님의 자비를 대신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작년에 이 자제공덕회의 증엄스님의 리더십에 대해선 논문을 발표하였고, 이번에 또 "불교평론"으로부터 청탁을 받아서
자제공덕회의 사회복지활동을 논하는 글을 썼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왜 자제공덕회와 같은 불교단체가 없는가? 생각해 볼 때, 가장 큰 차이점은 우리가 부처님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는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데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제자 60명이 생겼을 때, "전법선언"을 하십니다.
뒤로 돌아서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우리는 잘 이행하지 못합니다.
그저 부처님이 내게만 의미가 있을 뿐이지요. 그러면 훌륭한 불자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지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있는 사람이 되는가? 내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어떤 의미있는 행동을 하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님이나 공히 우리에게 그것을 원하고 요구하시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제공덕회를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 불교의 현실이 슬퍼지고, 우리 불자의 오늘의 신앙생활이 안타깝게 여겨집니다. 정말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나 있을까요? 관세음보살님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기나 하는 것일까요? 내가 관세음보살님의 이름을 부는 순간, 바로 그 이름 속에서 관세음보살님은 내 이름을 부르고 계신 데 말입니다.
천수경산책 27
다라니, 도대체 무엇일까
천수경의 원래 제목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경"이라는 제목 속에 들어있는 의미를 말씀드리고 있습니다만, 지금까지 우리는 '무애대비심'까지 공부했습니다.
대다라니, 라는 것은 '위대한 다라니'라는 말입니다. 대, 라는 것은 다라니를 더욱 돋보이기 위한 수식입니다.
그렇다면, '다라니'라는 것이 무엇일가요?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무슨 의미를 담고 있기에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나열되는 것일까요?
"나무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야 바로기제 새바라야 ---"
이렇게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해답을 찾아보는 여행을 떠나게 되겠습니다만, 오늘은 우선
'다라니'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우선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라니'라는 말은 한자로는 '多羅尼'라고 쓰지만 이것을 옥편을 찾아서 의미를 파악해 보려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인도말 '다라니(dharani)'라는 말을 소리 나는대로 옮겨적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라디오'라고 하면 우리말이 된 것입니다.(외래어라고 하지요)
하지만 영어로 Radio를 우리말로 그 소리만을 받아적은 것을 말하지요.
이 경우에는 사실 '번역'이라 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소리만을 베낀 것'이라는 의미에서 '음사(音寫)라고 합니다.
뜻의 번역이라는 '의역(意譯)'과는 다릅니다. 그러니까 사실상 우리가 번역이라고 할 때는 의역만을 번역이라 할 수 있지요.
음사는 번역을 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방책이었던 것입니다.
소리만을 베낀다는 것은 뜻으로 번역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다시 인도말, 다라니로 돌아가서 보겠습니다. dharani라는 말은 명사입니다. 그런데 인도말에서는 모든 명사는 동사로
부터 옵니다.
다라니라는 명사는 동사 dhri에서 옵니다. 이 말의 뜻은 "지니다"라는 말입니다.
한자로는 '持'이고, 영어로는 마찬가지로 hold입니다. 같은 말입니다. "지니다, 가지다"라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다라니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지니고 있다,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지니고 있는 것,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인도의 말을 중국에서 한자로 번역할 때, dharani를 다라니로 소리로만 베끼는 경우가 있고 동시에 뜻으로 의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라니라고만 할 때는 음사이지만, 이것을 번역하면 총지라고 합니다. '總持'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지니는 것이라고 해서, 지 앞에 총을 집어 넣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총지가 된 것입니다.
신라시대나 지금 우리나라에서나 밀교 종단의 이름 중에 '총지종'이 있습니다. 다라니 수행을 중심으로 한다는 뜻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일단 중국에서부터 다라니라는 것에 대한 이해 중에 하나로서 "모든 것을 다 지니는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했음을 알고 넘어가면 되겠습니다.
모든 것, 그것은 다시 무엇일까요? 모든 진리, 모든 가르침, 모든 공덕, 모든 표현 ---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라니라는 말을 쓰게 됩니다. 다라니는 총지라는 것, 잊지 맙시다. 잊지 않는 것, 그 역시 총지입니다. 다라니는 지니는 것이니까요. 지니는 것은 잊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천수경산책 28
"내 제자는 주법(呪法)을 해서는 안 된다”
다라니라는 말은 중국에서 번역할 때, 주문, 진언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물론 '다라니'라는 그 말의 뜻이 '총지'라는 점은 지난번에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다라니'라는 것이 우리 불교에서 등장하게 된 것도 인도에서 불교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인도에서는 불교 이전에
이미 바라문교라는 인도 고유의 종교(이 바라문교가 나중에는 '힌두교'로 정비됩니다.)에서 주문을 많이 외웠습니다.
바라문교의 문헌 중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을 "베다'라고 합니다. "베다"라는 말의 뜻은 "지식"이라는 뜻입니다.
지식을 다 모은 책이라는 의미입니다만, 이 베다문헌은 크게 넷으로 나눕니다.
신에 대한 찬가를 모은 "리그 베다", 제사를 지낼 때의 축문을 모은 "야주르 베다", 제사 지낼 때의 노래를 모은 "사마 베다"
그리고 주문을 모은 아타르바 베다, 이렇게 넷입니다.
이들 네 종류의 베다문헌 중에서 앞의 셋이 먼저 등장하고, 뒤의 아타르바 베다는 좀더 뒤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바라문교에서 많은 주문이 쓰였는데, 그것들을 모두 모아놓은 책이 "아타르바 베다"입니다.
그런데 우리 부처님께서는 이 "아타르바 베다"의 주문을 외우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숫타니파타"라고 하는,
가장 이른 시기에 성립된 경전 속에서입니다.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 제자는 '아타르바 베다'의 주법과 해몽과 관상과 점(占星)을 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새나 짐승의 소리를 듣고
점을 치거나, 임신술이나 의술을 행해서도 안 된다."(숫타니파타 4품 14경 132송)
해몽이나 관상, 점성술, 임신술, 의술 등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 부처님의 불교에서는
이러한 것들은 불교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문을 외우는 것은 해몽이나 관상, 점성, 임신술, 의술 등을 행하는 것과 같은 차원의 일로 금기시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 당시의 가르침(이를 흔히 '초기불교'라고 합니다만)이 지니는 특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첫째는 지혜이고, 둘째는 이성입니다. 지혜를 닦아서 우리 삶의 행복과 불행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는 것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이해되는 것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불교, 즉 오늘날 초기불교라고 하는 것은 합리적인 이성적인 불교임을 알 수 있고, 지혜를 찾고 닦는 가르침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외가 있습니다. 두 가지의 호주(護呪)만은 외워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치통이 왔을 때 외우는 치치주(治齒呪)와 뱀에 물렸을 때(혹은 물리지 말라고) 외우는 치독주(治毒呪)만은 예외입니다.
그 당시에는 치과를 갈 수도 없었고, 농촌사회인 인도에서는 뱀이 무서웠던 것입니다.(인도에서는 지금도 뱀이 많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인정했습니다. 그것이 효과가 있느냐, 이런 과학적인 접근의 의문제기와는 별도로
외워도 좋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기본입장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천수경의 신묘장구대다라니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오늘은 여기까지 문제제기만 해두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천수경산책 29
“불교는 붓다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지난 주에, "주법을 외우지 말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외우고 있는 "신묘장구대다라니"는 분명 주문이고, 주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순종하지 않는가?"
분명 그것은 잘못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나라 불교도들은 특히 이런 문제의식이 강렬한 것같습니다.
"과연 우리가 하는 일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부합하는가?"
이런 문제의식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숫타니파타"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 "주법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대승불교 시대에 들어와서 다시 주문을 수용하여, 외우게 된 것은 분명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 이런 사태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는 부처님으로부터 약 2500 내지 2600년이나 되는 긴 시간적 차이를 두고서 살고 있습니다.
이 시간적 간극은 우리가 메우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 시간적 간극을 건너뛰고서, 그 시간적 간극 사이에 생긴 많은 일들을 다 무(無)로 돌리고서 부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대승불교가 있고, 대승불교도들은 부처님의 입장이 주문을 하지 말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주문을 수용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고, 우선 여기서는 그 시간적 간극을 없앨 수 없다는 점만 말하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모습은 부처님 당시의 불교 내지는 부처님께서 생각하신 불교의 모습으로만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그 최초의 형태를, 수천년이 지나도록 그대로 지니고 변화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사의 일입니다.
제가 대학 학부시절에 읽은 책 중에 마스타니 후미오(增谷文雄)라는 일본의 학자가 쓴 "불교개론"(현암사 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분은 기본적으로 초기불교를 중심으로 불교를 생각하시는 분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붓다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붓다의 열반 이후에 불교는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야기하기를, 기독교의 역사는 이단의 역사이다.
그러나 불교의 역사는 이단 용납의 역사이다.
그렇기에 기독교에서는 이단의 퇴출을 위한 투쟁이 많고, 불교는 이단적 견해까지를 불교 안으로 포용하면서 불교가 풍부해 졌다고요.
그 증거의 하나는 기독교에는 성경이 정해진 뒤에, 다른 견해는 성경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불교에는 경전 이외에도 대장경으로 다 포섭될 수 있게 된다.
이런 이야기를 감동 깊게 읽은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문제는 고타마 붓다 이후의 불교를 우리 불교의 역사 속에서 온전히 자리매김하는 것이겠지요. 그러한 변화된 불교를 불교사 안에서 다 도려낼 수 없을 바에 말입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과 불교사에서 나타나는 여러가지 불교의 모습 사이의 관계를 끊임없이 살펴보고, 성찰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다라니"에 대해서 이해를 하자면, 참으로 복잡하게 성찰해야 할 많은 화두들이 제기됩니다.
차차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천수경산책 30
다라니 독송의 이익
부처님 오신 날, 핑계로 한 주 쉬었습니다.
이제 다시 공부를 시작합니다.
앞에서 우리는 부처님께서는 "아타르바 베다"의 주법을 하지 말라는 말씀을 남기고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아타르바 베다의 주법"이라는 것은, 임신술이나 점성술이나 관상술과 같은 차원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 이르면 여러가지 주문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아는 것이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입니다.
대승불교에 이르러서 다시 주문들이 활용된다고 한다면, 그 주문이 활용되는 차원이
저 바라문교의 "아타르바 베다의 주문"과 같은 차원인지 아닌지를 살펴보면 될 것같습니다.
이에 대한 증거는 "천수경"(=원본 천수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천수경에서는 천수다라니(=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면
얻게 되는 공덕을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라니 독송의 열가지 이익, 열 다섯가지로 나쁜 죽음을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열 다섯가지의 훌륭한 삶을 말합니다.
모두 마흔가지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중에, 가장 '기복적인' 성격이 높은 것이 열 다섯가지로 나쁜 죽음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번 옮겨보겠습니다.
1. 굶어 죽지 않는다.
2. 사형당하지 않는다.
3. 원수로부터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
4. 전쟁터에서 전사하지 않는다.
5. 짐승에게 물려서 죽지 않는다.
6. 독사 등에 물려서 죽지 않는다.
7. 물에 빠져서 죽거나 불에 타죽지 않는다.
8. 독극물에 의해서 죽지 않는다.
9. 독충에 물려서 죽지 않는다.
10. 정신착락으로 죽지 않는다.
11. 산이나 절벽에서 추락해 죽지 않는다.
12. 나쁜 사람이나 도깨비한테 홀려서 죽지 않는다.
13. 사악한 신이나 악귀에 의해서 죽지 않는다.
14. 나쁜 병에 걸려서 죽지 않는다.
15. 때 아닐 때 죽지 않고 자살하지 않는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시지요. 이 열 다섯가지 나쁜 죽음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저 "임신술, 점성술, 관상술"의 범주에 가까운 것인지? 아니면 부처님께서 허락하신 "독을 다스리기 위해서 외우는 호주(護呪)"나 "치통을 다스리기 위한 호주"를 인정한 것과 가까운 것인지를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허락하신 "치독주", "치치주"를 허락하신 이유와 가깝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 열거한 것과 같은, 열 다섯가지 악사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라니에는 어떤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말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는 믿음을 언령(言靈)신앙이라 합니다.
다라니 신앙에는 그러한 차원이 있습니다. 말에는 힘이 있다고 믿는 것이지요. 다라니에도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한 힘이고, 길한 힘입니다.
이 다라니를 독송하면 그러한 힘이 있다고 믿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가능한데요. 하나는 다라니 자체에, 즉 그 말에 그러한 힘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는 언령신앙의 입장입니다.
다른 하나는 다라니를 독송하는 사람의 마음이 맑아지고, 밝아져서 그러한 힘을 갖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언어나 문자가 아니라, 마음이라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중의 어떤 입장이든지, 그러한 "힘" 내지 "공덕"을 가져오는 데에는 다라니라고 하는 것이 매개가 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특정한 언어에 힘이 있다고 하는 믿음을 더욱 밀고 나가고, 그러한 신앙을 폭넓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대승불교에서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는 아직까지 그렇게 넓혀지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다른 수행방법으로,
예를 들어서 명상과 같은 것으로 중생들을 지도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석가모니 열반 이후 한참 지나서, 사람들의 근기나 세상 형편은 다라니와 같은 특정한 언어, 즉 주문에 의지하는 것이 더욱 늘어났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천수경산책 31
신불습합(神佛習合)의 문제
불교는 언제나 후발주자입니다. 인도에서는 불교 보다 바라문교(나중에는 힌두교로 됨)가 먼저이고, 중국에서는 불교보다도 도교가 그 기원이 오래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무교(巫敎)가 있었고, 일본에서도 불교가 전해지기 전에 신도가 있었습니다.
일본에 불교가 처음 전해졌을 때, 그들은 부처님을 '객신(客神)'이라 불렀습니다. 손님 신, 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불교는 언제나 어디서나 '신'들보다 늦게 등장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미 신들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해지게 됩니다.
이것은 역류(逆流)입니다. 흐름을 거슬러 오르는 것이지요. 인간이 신을 필요로 해서, 신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오래 살고 안 죽고 싶은데, 병들고, 늙고, 죽어야 하는 것, 여기서 인간은 한계를 느낍니다.
영원히 살고, 병도 들지 않고, 안 늙는 존재는 어디 없을까? 이러한 고뇌 끝에 인간은 "신"을 만들어 냅니다. 신이 필요해 지는 것입니다.
신을 요청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오셔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질문을 제시합니다. "그렇게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가 과연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 대신에 나고 죽는 근본이 깨닫는 것이 더 진리다운 것 아닌가?
이런 질문을 합니다. 부처님의 실험이자, 도전주의입니다. 과연 이러한 도전이 성공할 수 있을까요?
인간은 정녕 신이 필요없이 살 수 있을까요?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의 힘으로 사람들이 부처님 가르침대로 수행하고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 가시고 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다시 신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교 안에 신이 들어오게 됩니다.
예를 들면, 원래는 인도의 바라문교의 신이었던 존재들이 불교의 신으로 들어옵니다. 다만
신의 자리가 달라지긴 합니다. 예를 들면, 천룡팔부의 하나로서 신중단에 모셔지는 제석천은 바라문교에서는 최고의 신 인드라(Indra)입니다. 천둥 번개의 신이고, 전쟁의 신입니다.
거기서는 제일 높은 자리에 있었으나, 이제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수호합니다.
일본에서는 이렇게 신들과 부처님의 관계를 본지수적으로 정립합니다. 본지는 본래의 땅이라는 말입니다.
본래는 부처님이었으나, 일본의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신도의 신으로 그 자취를 내보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수적(垂迹)이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신도의 신에게 절하는 것이 부처님께 절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되고
신도의 신과 부처님을 함께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습합이라 합니다. 신불습합인 것이지요.
제가 지금 이러한 신불습합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우리의 천수경 안에서도 신불습합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는 인도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인도말을 우리말로 번역해 보면, 굳이 옮겨 본다면 그 내용 안에서는 힌두교의 신 이름이 등장합니다.
시바신이라든가, 시바신과 비쉬누신이 하나가 된 존재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천수경이 늦게 성립해서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인도불교에서는 후기에 성립되지요.
그러니 힌두교(=바라문교)의 신들도 불교의 부처님과 함께 뒤섞이게 됩니다.
자, 이를 우리는 어덯게 이해해야 좋을까요?
먼저 사람들이 믿는 신들만이 있었는데, 부처님이 등장하셔서 깨달음을 중요시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힌두교의 신들이 불교 안으로 들어와서, 힌두교의 신과 불교의 부처님(혹은 보살님)이 하나로 어우러지면서 그 당시 민중들의 신앙대상이 됩니다.
물론 이러한 변화에는 '깨달음의 종교'에서 '믿음의 종교'로의 변화라는 것이 눈에 띄게 됩니다.
자,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비판적으로 볼 수도 있고요. 그래서 초기불교의 부처님 입장으로 돌아가자라고 할 수도 있고요.
그 역시 의미가 있겠지요.
그러나 '믿음'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하자면, 또 불교의 전파나 불교의 토착화(불교가 후발주자라고 했습니다)를 생각하면 신불습합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차원에서는 매우 깊은 신심을 우리는 거기서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천수경 안에서는 우리가 굳이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번역하여 읽지 않는다고 한다면,
(대개의 경우는 지금 번역을 하지 않고 읽으니까 그런 것을 알 수 없습니다만), 그런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맙니다.
어쩌면, 차라리 몰라도 될 일인지도 모릅니다만, 그 내용에 대해서 궁금해 하실 것같아서 한번 짚고 넘어갑니다.
우리가 서점에서 구해볼 수 있는 천수경 강의 책에는 신묘장구대다라니가 번역되어 있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까지 깊이 있게 알아가는 것은 학문적으로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과연 신앙의 차원에서 볼 때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복잡한 이야기입니다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천수경산책 32
신들의 불교
지난 번에 '신'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한번 더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에게는, 알게 모르게, 신이라 하면 기독교의 신을 생각하기 쉽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문화적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서구적 교육의 영향 때문일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은 원래는 이스라엘 민족의 신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느 한 지역의, 어느 한 민족의 사람들이 믿고 받들던 한 '특수한 신'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신을 보편화시킨 것이지요. 아니, 보편적인 신으로
만들려고 하는 노력, 그것이 기독교의 전도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구 끝까지 전도를 노래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기독교의 신은 "유일신"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 하나의 '신'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옛날에 서양이 동양을 발견하기 전에는 그러한 관점이 그 서양인들 사이에서는 받아들여졌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서양이 동양으로 오면서, 동양 속에서 동양인들이 믿고 있는 신앙대상을 보니까, 놀랍게도 그들은 다양한 신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도교에서 많은 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도교에서는 민중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가진 분들을 다 신으로 편입하여 모십니다. 대표적으로 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이나 제갈량 등은 다 도교의 신입니다.
관운장을 모신 도교 사당이 서울에서는 동묘이고, 제갈량을 모신 사당이 무후묘 내지 와룡묘라고 불립니다.
보광동 보광사에 무후묘가 있고, 저희 학교 뒷산(남산)에 와룡묘가 있습니다.
일본에 오니까 신도가 있겠지요. 신도에서는 팔백만의 신을 말합니다. 그들 신은 원래는 부처님이었는데, 일본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일본이라는 풍토에서는 신도의 신으로 몸을 나투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에는 '화신'사상이 있습니다.
이 화신 사상을 갖고 있는 것은 기독교에서도 있습니다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힌두교일 것입니다. 힌두교에서는 3억 3천의 신이 있습니다. 그 많은 신들의 어떤 다른 신으로부터 화현되었다고 말해집니다.
이렇게 동양의 종교에서는 다 다신교를 말합니다. 유일신교를 말하는 기독교의 신들과는 다른 점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기독교은 인도에서 전도를 하는 데에도 만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19세기에 기독교를 포교하려고 했을 때, 부득이 힌두교 지도자들과 만나게 됩니다.
"당신네들 종교에서는 참 좋은 이야기도 많이 하는군요. 그렇지만 왜 그 '신'이 오직 하나이고, 그것도 당신네들 신만이 진실한 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힌두교도들이 하는 말입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서양의 선교사들이 동양에서 동양종교를 만나면서, 형성시킨 학문이 있습니다. "종교학"입니다. 신학과는 다른 학문이지요. 하지만 초창기의 종교학자들은 다신교를 열등한 것으로, 일신교를 우수한 것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하면 이것은 기독교적 편견이 낳은 소치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오히려 일신교야말로 소박한 생각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만물이 있다, 그 만물을 누군가는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물은 신이 아니며, 그 만물을 지었다고 생각되는 존재를 신이라 하자. 그런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지만, 저로서는 그 사고가 높은 수준의 사고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 반면 다신교의 사고는 무엇인가 하면, 그 만물에서 모두 신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 많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자연도 신이고, 우리 인간도 신이라는 것입니다.
시오노 나나미라는 분이 있습니다. "로마인 이야기"의 작자이지요. 일본분인데, 이태리에서 30년 넘게 살았습니다.
이태리는 가톨릭 국가입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가톨릭교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말을 합니다.
"다신교를 믿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신앙까지도 관용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녀가 일본인이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일본사람, 즉 신도와 불교가 함께 존재하는 나라에서 살아온 사람이기에 이런 말이 나온 것으로 저는 봅니다.
그러면 불교에서 말하는 신은 누구일까요? 부처님이 아닙니다. 신들이 사는 세상을 천상이라 합니다. 인간세상 보다는 좀 더 즐거움이 많다 하지만, 그 역시 윤회의 세계입니다.
부처님은 그러한 윤회의 세계를 벗어나는 존재입니다. 그런 부처님을 불교의 신들은 옹호하고 모십니다.
그 불교의 신들에는 힌두교의 신들이 들어옵니다. 도교의 신들이 들어옵니다. 우리의 경우에는 산신과 같은 우리의 신들을 맞이해 들입니다. 일본에서도 그렇습니다.
그 모두가 부처님을 옹호하고, 불자들을 지킵니다. 우리 "원본 천수경"에서도 이십팔부중, 이라고 해서 신들 28분이 나옵니다.
"대다라니를 독송하는 자를 지키는 것을" 사명으로 합니다. 우리가 대비주를 외우는 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염려 놓으십시오.
일본에서는 기독교가 별로 정착이 안 됩니다. 결혼할 때 교회에서 합니다. 물론 의미깊은 기독자가 적지 않습니다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로서는 불교만의 힘이 아니라, 신도와 불교의 연합된 힘이 기독교를 막았다고 봅니다.
"신이라고? 우리에게도 신이 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신"을 키우지 못했습니다. 그저 무당들의 신으로 넘겼고, 무당들의 신들은 상업화되고 말았지, 하나의 종교가 못 되었습니다. 이것이 일본과는 다른 점입니다. 일본에서는 신도라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 반면 우리는 근대화되면서, 끊임없이 산신각과 칠성각을 문제 삼았습니다. 우리 스스로 문제삼았고, 기독교와 그 영향권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미신타파"를 부르짖게 되었고, 우리 안에서는 또 "기복신앙"의 대상으로 문제되었습니다.
기복신앙은 대상의 문제로 보면 안 된다는 생각을 저는 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단계 내지 차원에서의 문제일 것입니다.
근래 짓는 절에서는 산신간과 칠성각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굳이 지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산신각과 칠성각을 지어서 함께 모셔왔던 우리 조상들의 신앙세계가 갖는 의미를 재인식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저는 아직 익은 생각은 아닙니다만, 어쩌면 일본과 같이, 신들에게도 절을 하고 부처님께도 절을 하는 신불습합에서야말로 신앙의 정수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천수경 역시 그러한 신불습합의 맥락을 갖고 있습니다. "독송용 천수경"에는 안 나타나 있지만, 원본 천수경에는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드린 말씀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곰곰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천수경산책 33
다라니는 말이 없는데
자, 여기서 한번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있는지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같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신 이야기를 하노라니,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가 졸가리를 잡지 못하는 분이 계실 듯 합니다.
천수경의 원래 제목인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를 해설하고 있는 중에서,
다라니를 이야기할 차례에 이르렀습니다.
그 이야기만 벌써 6번을 했고, 오늘은 7번째입니다.
다라니는 말이 없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말이 많을까요? 어쩌면 다라니가 말이 없기 때문에
그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접근하는 길이 여러 갈래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신들 이야기가 나왔느냐 하면, 다라니를 인도 말로 복원해서 살펴본 학자들이
하는 말에 따르면, 이 다라니 속에는 힌두교의 신들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과연 불교에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도대체 말하고 있기나 한가, 하는 등의 문제를 언급하다가 보니 좀 우회로를 걷고 있습니다.
물론 불교는 무신론입니다. 이럴 때 '신'은 기독교나 이슬람교와 같은 그런 의미에서의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힌두교의 신 역시 기독교의 신이나 이슬람교의 신과 같은 의미의 신입니다. 궁극적 존재인 것이지요.
불교는 그런 의미의 '신'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영원한 존재는 없다, 고 하는 것이 부처님께서 "무아"를 말씀하신 근본 뜻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많은 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신은 없지만, 그런 의미에서는 무신론이지만, 부처님보다 더 낮은 세계를 살고 있는 다양한 신들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위상은 다를 뿐이지요. 법당의 높은 곳에 부처님이 계시지만, 그러한 신들(힌두교의 신들, 중국 도교의 신들, 우리나라의 샤머니즘의 신들, 일본 신도의 신들)은 모두 부처님 보다 더 낮은 위치에서 부처님을 옹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절의 입구에 자리하는 사천왕도 그러한 존재입니다.
이렇게 신이 부처님보다 낮다는 것은, 우리의 윤회설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들의 세계가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신들의 세계는 다 육도윤회의 세계입니다.
천상(天上)이 그것입니다.
부처님의 세계는 그 천상 세계보다도 더 높은 곳에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이러한 신들의 이야기를 많이 하시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만 대승불교시대, 특히 밀교 시대에 오면 많이 하게 됩니다. 그들을 다시 불교 안으로 포섭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이러한 흐름이 "역사", 즉 인간 삶의 역사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쩔 수 없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불습합의 문제를 새롭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는 것이고요.
신들을, 힌두교의 신들을 다시 불교 안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이 밀교시대입니다.
이 밀교는 인도불교의 마지막 시대입니다. 그러나, 그 밀교에서도 다시 시대가 나뉘어 집니다.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만, 우리가 공부하는 천수경은 바로 초기밀교시대에 형성됩니다.
6세기의 일입니다. 그리고 인도에서 밀교, 즉 불교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것은 12세기입니다. 약 600년의 세월 동안
인도에서 밀교의 시대가 이어집니다.
그런데 종래 우리는 인도에서 불교의 소멸과 관련하여 그 이유를 찾아왔습니다. 그 이유의 하나로 들고 있는 것이 불교가 밀교에 이르러 힌두교의 신들도 받아들이고 하다보니까, 불교만의 정체성을 잃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 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싶기도 합니다. 이는 좀 더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신불습합이라고 해서, 반드시 불교의 소멸을 가져오는가 하는 점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일본의 경우에는 불교는 소멸되지 않았거든요.
불교 소멸의 이유는 다른 데에서 더 크게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번역한 "왜 인도에서 불교는 멸망하였던가"라는 책도 힌두교와의 습합을 불교소멸의 이유로 보는 종래의 학설에 반기를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더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인도에서의 다라니, 즉 신불습합을 보여주는 다라니가 중국에 들어오면 새롭게 이해된다는 것, 다라니의 새로운 차원이 열린다는 점입니다.
그 본격적인 전개, 중국을 비롯한 우리나라 일본까지의 동아시아적인 전개에 대해서 좀더 깊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다음 주를 기다려 주십시오.
천수경산책 34
다라니는 왜 번역하지 않는가
자, 이제 인도에서의 이야기는 그쯤으로 정리하고 중국으로 넘어오기로 하겠습니다.
중국, 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나라를 포함하는 동아시아불교의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공히 중국에서 번역한 한문으로 된 경전을 가지고 불교를 공부하고 신앙했으니까요.
중국의 불교사는 인도로부터 경전을 수입해서 번역하는 데 근 1000년의 세월을 들이게 됩니다.
수많은 스님들이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건너오고, 중국에서 인도로 가서 말을 배우고 다시 중국으로 와서 경전 번역에 종사하게 됩니다.
많은 경전들이 중구난방으로 번역되자, 이러한 경전들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경전들이 누구에 의해서 언제 번역되었는지 목록을 만드는 작업들을 하게 됩니다.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과 같은 책이 대표적인 업적입니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과연 번역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번역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요즘말로 하면 "번역학"의 주제들에 대해서 의논이 제기됩니다.
그런 중에 "번역할 수 있는 말은 번역을 하고, 번역할 수 없는 말은 번역을 하지 말자"라는 쪽으로 의견이 나오게 됩니다.
현장(玄장, 반야심경의 번역자, 서유기의 주인공 '삼장법사'의 실제 모델)스님이 "오종불번"(五種不飜)으로 정리합니다.
번역하지 않아야 할 다섯가지를 정리한 것입니다.
1. 그 의미가 미묘하고 깊어서 생각할 수 없는 비밀어(秘密語)
2. 그 의미가 다양한 말
3. 중국에 없는 사물의 이름
4. 예로부터 흔히 음사를 하여서 여러 사람이 익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
5. 번역하고 나면 그 뜻이 가벼워지는 말
이 중에, 다라니를 번역하지 않는 이유는 첫번째 '비밀어'와 연관됩니다. "다라니는 비밀스런 말이다. 그러므로 번역할 수 없다. 번역하지 말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라니는 인도말이고, 그래서 인도말이니까 인도사람들에게는 쉽게 다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런데 현장스님께서는(인도에서 17년 유학하신 분입니다.), 다라니에는 "비밀한 뜻이 있다"고 봅니다.
하기는 다라니 속에 들어가 있는 인도말 중에서도 이미 비밀한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옴"이라든가, "사바하"라든가 하는 말은 비밀어입니다.
옴, 사바하, 이런 말들 속에는 어떤 하나의 의미로 특정(特定)할 수 없을만큼 다양한 , 혹은 거대한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다양한 의미를, 혹은 거대한 의미를 특정한 하나의 의미로만 번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게 되면 다양한 의미가 어느 하나의 의미로만 축소되어 버린다. 나머지는 잃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비밀, 이라는 것은 그렇게 다양한 의미, 거대한 의미는 우리가 다라니의 독송을 통해서 직접 어떤 경지를 체험하게 될 때 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경지를 체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뿐,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면 결코 알 수 없는 일이기에 "비밀"이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체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체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체험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 체험의 경지에서 얻은 진리를 어떤 하나의 말로 특정화해서 단순화시킬 수는 없다.
그러니 "비밀"이라 하는 것이고, 그러한 비밀을 담고 있기에 그것을 번역하는 것은 비밀을 죽이는 일이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번역하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다만 음사(音寫)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음사는 소리만을 그대로 베낀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영어로 "I am a boy"라는 것을 "나는 소년이다"로 하면 번역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그저 소리로만 "아이 엠 어 보이"라고 하는 것을 음사라고 하는 것이지요.
음사는 번역이 아닙니다. 다라니는 그저 음사한 것일 뿐입니다. 음사한 것을 그대로 외워서, 직접 그 비밀의 문을 열고 그 안에서 어떤 체험을 하고 경지를 터득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라니를 설한 취지이자, 의도이다.
이렇게 현장스님을 비롯하여, 오종불번을 내세워서 다라니를 번역하지 않고 우리에게 물려준 역경가들의 자세한 배려입니다.
천수경산책 35
일본 시코쿠(四國)의 천수관음신앙
지난 7월 5일부터 어제 8일까지 일본 시코쿠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시코쿠라는 섬에는, 그 섬 출신 코우보(弘法, 774-835)대사와 인연이 깊은 절 88개를 걸어서 순례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 거리는 1,436킬로미터나 됩니다.
내 후년이면, 즉 2014년이 되면 이러한 순례길이 개창된 것이 1,200년이나 됩니다.
거기를 다녀오느라 일요일에 올리는 이 "천수경 산책"이 하루 늦어졌습니다.
원래 지금 우리는 "다라니"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만, 오늘은 잠시 그 이야기는 한번 쉬고서 일본의 천수경 신앙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천수경은 인도에서부터 중국으로 우리나라로 일본으로 전해져 오면서, 넓게 신앙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 신앙되는 모습을 보면 조금씩 다릅니다.
일본과 중국의 경우에는 "원본 천수경"에 나오는 천수다라니만을 달랑 들어내어서 외우고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독송용 천수경"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절에서 외우는 천수경, 불교법요집에 실려있는 천수경은 모두 우리나라에만 있는 경전입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에만 있는 천수경에 대해서, 그 의미를 말씀드리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일본과 중국(대만도 포함해서)에서는 천수다라니만 달랑 외우고, 우리나라는 그 전후로 다양한 내용을 덧보태어서 하나의 또 다른 "천수경"을 만들었습니다.
한편 일본불교의 경우에는 하나의 특징으로서 "종파불교"가 말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종파가 많지만, 우리와는 많이 다릅니다.
우리는 일본에 비하면, 종파성이 훨씬 덜합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종파에서 다 천수경을 하지는 않습니다. 대승불교의 최대의 공통경전이라 할 수 있는 반야심경 역시 안 하는 종파가 있습니다. 정토진종 같은 데에서는 반야심경도 안 외웁니다.
그럼 천수경, 즉 천수다라니를 외우는 종파는 어디일까요? 바로 선종의 종파들에서만 외웁니다.
선종의 종파는 셋입니다. 임제종, 조동종, 그리고 황벽종입니다.
왜 선종의 종파들만 다라니를 외우느냐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만, 나중에 다라니 문제를 이야기할 때 다시 한번 기회가 있을 것으로 봅니다.
다만 여기서 이상한 것은 왜 천수다라니 역시 다라니인데, 다라니 독송을 중심으로 해서 형성된 밀교 종파에서는 안 외우느냐 하는 점입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앞서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만, 일본의 밀교가 인도밀교에서 말하는 시대 구분으로 말하자면 중기밀교를 받아들여서 중심으로 삼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천수경은 중기밀교가 아니라 초기밀교입니다. 그러니 중기밀교를 하는 일본의 밀교 종파에서는 중시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본 밀교의 종파, 즉 진언종을 연 분이 바로 시코쿠 88개소의 주인공 "코우보 대사"입니다. 88개 사찰에서는 반드시 "대사당"이라고 해서, 코우보 대사를 모시는 전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순례자들은 모두 법당(본당이라 합니다.)과 대사당에서 반야심경을 한편씩 독송합니다.
이것은 정해진 법식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천수다라니 독송이 중심이 되는 천수경신앙입니다. 그래서 다라니 독송을 보다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독송용 천수경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럼 일본에서는 천수경 신앙을 어떻게 했느냐 하면, 선종 3종파에서는 물론 다라니 신앙을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천수다라니 독송 신앙이 아리나 천수 관음 신앙을 하였습니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님께 의지하는 신앙, "도와주세요" 하는 입장의 관음신앙이었던 것입니다.
그 차이는 우리나라에서는 천수관음이 그려지거나, 아니면 천수관음이 조성되는 사례가 매우 드뭅니다.
전통시대에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절마다, 박물관마다 가면 천수관음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교토에 가면 "삼십삼간당"이라는 절이 있는데 거기에는 천수관음 입상이 1,000기정도 모셔져 있습니다.
그런 점을 저는 이번에 시코쿠 순례를 통해서 다시 한번 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88개 사찰 중에서 18개 절을 다녀왔습니다. 70개 사찰이 남았습니다만 ---.
그 중에서 천수관음을 본당의 본존으로 모신 절이 여럿 있었습니다.
84번 야시마지(屋島寺)
82번 네고로지(根香寺)
81번 시로미네지(白峰寺)
71번 이야다니지(彌谷寺)
58번 센유지(仙遊寺)
18개 중에 5곳 사찰의 주불이 천수관음입니다. 우리와는 확 다른 특징을 느낄 수 있는 것같습니다. 진언종에서도 천수다라니를 외우지는 않지만, 천수관음에 대한 신앙만은 가졌던 것이 확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일본에서 천수관음 신앙이 성행하는 것은 결국 자연재해가 많은 일본의 지리적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진, 태풍, 화산, 가뭄으로부터 생존해 가야 하는 사람들로서는
천수관음에 대한 신앙이 간절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천수관음보살님이 많이 모셔져서인지, 시코쿠 순례길은 남의 집을 찾아다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언제 기회 되신다면, 시코쿠 한번 순례하시길 권유드립니다.
천수경산책 36
다라니는 암호가 아니다
자, 다시 '다라니'에 대한 우리들의 사색으로 돌아갑니다. 다라니를 번역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만약 번역을 하는 것이 옳고, 다 번역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번역을 해야 하겠지요.
우선 다 번역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어떤 말은 번역이 가능하고, 어떤 말은 번역이 불가능합니다. 인도에서부터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옴, 사바하, 이런 말들은 정확히 그 의미가 번역되기 어렵습니다. 번역을 한다면, 여러가지 다양한 의미들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되겠지요. 100가지 의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나면, 99가지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마침 현장스님,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다라니를 번역하지 않는 다섯가지 이유(오종불번)를 번역상의 한 원칙으로 정리하신 분이지요. 그분이 번역하신 "유가사지론"이라는 논서가 있습니다. 거기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만트라(다라니를 인도에서는 다른 말로 만트라라고도 함 --- 인용자)의 구절들에는 어떠한 의미의 완성이 없다. 이러한 것들은 의미가 없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들은 실로 무의미성(無意味性)일 뿐이다. 또한 그러므로 다시 더욱더 높은 다른 의미가 구해지는 것은 아니다. ( ---- 중략 --- ) 그러한 보살에 의해서 (무의미성을) 얻고 나서, 그러한 다라니의 구절들에 머물고 나서 보살의 인(忍)이 말해져야 한다. 또한 그것을 얻음으로부터 그 보살은 곧바로 청정한 원망(願望)을 얻는다.
이 말씀이 실린 "유가사지론"이라는 책은 인도 대승불교의 아주 중요한 책입니다. 이 논서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도에서는, 인도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다라니(만트라)의 말들이 다 이해되었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인도에서부터 대승불교에서는 이렇게 "다라니는 의미의 완성이 없다." 즉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라니에서 의미를, 뜻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라니는 암호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암호, 군대에서 많이 쓰지요. 그 암호에는 하나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암호를 '고구마'라고 정합시다.
"누구냐?"
"소대장이다."
"암호는?"
뭐, 이런 대화 상황을 상정해 봅시다.
"고구마"
이렇게 제대로 암호, 사전에 미리 약속된 암호를 댄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 편이라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그러니까 "고구마"라는 말은 "우리 편"이라는 사실을 그 뒤에 숨기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고구마"와 "우리 편"이라는 것이 서로 1 대 1로 대응하는 것이지요. 고구마 뒤에는 반드시 우리 편, 이라는 뜻이 숨어져 있습니다. '고구마"라는 암호 뒷편에는 '우리 편'이라는 것이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라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암호와는 성격을 달리합니다. 만약에 그런 것이라고 한다면, 즉 암호와 마찬가지로 어떤 의미를, 뜻을 숨기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왜 그러는 것일까요? 어떤 전달해야 할 메시지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되지, 암호의 형식 속에 집어넣어야 하는 것일까요? 군대에서는 우리 편과 적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하기에 그렇게 암호라는 것을 활용하지만, 불교에서는 그럴 이유가 어디에도 없는 것이지요. 가장 쉬운 말씀을 통해서 중생을 제도하자. 이것이 부처님의 근본 뜻이고요. 그래서 가장 쉽게 중생이 알아드는 언어로 설법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 말이 "수기설법"이라는 말에 들어가 있지요. 근기에 따라서 법을 설하라고요. 근기는 듣는 사람을 말합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암호 보다는 그냥 쉬운 말이 듣기 좋겠지요.
그러니까 만약 어떤 가르침의 내용이나 메시지, 다시 말하자면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전하고 싶은 뜻이 있다고 한다면 암호와 같은 것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라니처럼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냥 알아듣기 쉽게 하면 됩니다.
독송용 천수경에서,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같은 주문, 다라니는 모두 밀교라고 합니다. 비밀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상심심미묘법"은 "위없이 높고 깊은 진리"라는 뜻이니까, 말이 통합니다. 뜻이 통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현교(顯敎)라고 합니다. 이렇게 불교는 크게 밀교와 현교, 의 둘로 나눕니다. 이 중에서 현교, 즉 겉으로 드러난 가르침보다는 밀고, 속으로 숨어 있는 가르침이 더욱 진실한, 깊은 가르침이라고 보는 것이 밀교의 입장입니다.
천수경, 즉 천수다라니는 그러한 밀교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우리가 다라니를 다 번역할 수 있고, 그렇게 번역된 의미만이 다라니의 의미라고 생각한다면, 불교에서는 어떻게 될까요? 불교에는 밀교가 없게 됩니다. 현교만 있게 됩니다. 저는 이러한 불교에는 반대입니다. 제가 배운 불교도 그런 불교가 아니고요.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겟씁니다만 ---.
그래서 이러한 밀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가 다라니를 앞에 두고서는 그 "뜻"을 물어서는 안 됩니다. 다만, 그러한 의미가 불통인 다라니를 읽고 외움으로써, 그것이 우리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어떤 기능을 하는지 즉 어떤 용법으로 쓰이는지는 물어볼 수 있습니다. 서양의 어떤 철학자가 말했습니다.
"의미가 아니라 용법을 물어라"
이 말은 우리의 다라니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말씀은, 본의 아니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거듭 읽으시고, 거듭 생각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그 기능이 무엇인지 그 용법이 무엇인지 말씀드리지요.
천수경산책 37
병을 알아야 약을 쓸 수 있다
지난 시간에는 다라니는 암호와 같은 것이 아니다. 암호와 같다면, 암호라는 겉껍질을 풀고 나면 그 속에 내용이, 알아들을 수 있는 그 무엇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요?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기능을 하는 것이라 말해야 할까요? 그 대답을 하기 전에, 그 대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병'을 알아야 합니다. 그 대답은 '약'의 정체를 밝히는 것입니다. 병을 정확히 이해해야만 약의 성격을 잘 이해하고, 잘 믿고, 잘 복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병의 정체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바로 인간입니다. 우리 사람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의 '병'입니다. 불교의 모든 법문은, 모든 수행법은 바로 이 인간, 사람을 대상으로 해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언제나 인간학입니다. 인간이야말로, 불교의 영원한 화두이고 영원한 숙제입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요? 인간은 동물입니다. 아니, 인간도 동물입니다.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또 동물과 가장 다릅니다. 동물이면서, 원래 동물이었는데 이제는 동물과 가장 거리가 먼 존재가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 인간이 동물이라면, 어땠을까요?
여러분은 아, 그런 소리를 하다니, 끔직하다, 이렇게 할 것입니까? 그렇지요. 끔직한 일입니다. 정말로 "축생은 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지요. 옳은 이야기입니다. 축생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악도입니다. 하지만 어떤 때 인간이 동물이라면, 동물처럼 되었다면, 이러한 죄업이나, 이러한 고통이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해볼 때도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동물은 정해진 궤도만 갑니다. 배고픈 먹고, 먹기 위해서는 다른 동물을 잡아먹기도 합니다. 발정기가 되면 짝짓기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다 정해진 길입니다. 그 길 밖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궤도를 벗어나는 일탈, 탈선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동물 세계에는 범죄가 없습니다.
범죄는 오직 인간세계에만 있습니다. 왜 인간은 정말로 못할 짓을 많이도 하게 됩니까? 동물들은 감히 상상도 못할 나쁜 짓을 오직 하는 존재는 다만 인간이라는 이름의 동물 뿐입니다. 동물이 살인을 합니까? 동물이 강간을 합니까? 동물이 사기를 칩니까? 동물이 전쟁을 일으키고, 대량 학살을 합니까? 동물이 테러를 합니까?
아닙니다. 오직 인간만이 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말"로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이 생각은 소리를 안 내지만, 결국 말을 가지고 합니다.)
이 말을, 이 생각을 통제하는 기술(도)를 인간이 터득하면 인간은 업을 적게 짓거나 아주 안 지을 수 있습니다. 어떤 죄업도, 그 인죄업을 짓는 사람이 그 죄업에 관한 생각에 붙잡혀서 짓게 됩니다.
그 한 생각이 문제입니다. 한 생각이 인간을 부처로도 만들고, 인간을 지옥중생으로도 만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그 한 생각에 붙잡히지 않고, 한 생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 이 글을 읽으시는 동안에도 다른 생각들의 연쇄가 이어질 것입니다. 여기에만 집중된다면, 그것은 "참선"입니다. "선정"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생각으로 연결됩니다. 왜냐? 생각이 생각을 낳고, 말이 말을 낳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생각의 연쇄들 속에서 우리는 놓여 있습니다. 불쌍하게도 ---
그런데 이 생각이라는 놈이 가진 또 하나의 속성(하나의 속성은 바로 다른 생각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연쇄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은 바로 "행동을 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때린다"는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은 실제로 우리 몸으로 하여금 누군가를 "때리도록 명령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명령에 붙잡혀서 악업을 저지르고, 어떤 사람은 이 명령에 붙잡히지 않습니다. 불교의 모든 수행법은 이 생각을 바라보고, 통제하여, 그 명령에 붙잡히지 않게 하는 수행법입니다. 다라니도 예외가 아닙니다.
천수경산책 38
지난 주 말씀이 어렵다고 해서, 다시 복습입니다
지난 주 말씀이 어렵다고 하셔서, 다시한번 더 복습을 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사실 쉬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무상심심미묘법, 이라고 하시니 우리가 좀더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는 것같습니다.
저로서도 쉽게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만 어려운 부분은 "어렵다"고 말씀해 주세요.
지난주에 드린 말씀에서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점입니다. 의식의 흐름이라고도 하는데
끊임없이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생각은 우리에게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라고 명령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한번 해보지요. 하얀 백지를 앞에 놓고서,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서 흘러가는 생각을 바라다 보고서
그때 그때 떠오르는 상념들을 적어보기로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손이 다 따라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만큼 많은 생각들이 쉽게 쉽게, 또 빠르게 빠르게 바뀌어 가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손이 느리니까 이렇게 한번 해봅시다. 아직 다행히도 그런 기계가 개발이 안 되었습니다만, 우리 마음속에서 흘러가는
모든 생각들을 다 찍을 수 있는 카메라가 있다고 한다면, 한번 찍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그것을 영화관의 스크린에다가 투사를 시킨다고 해봅시다.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우리는 다른 사람의 속생각이나 마음속에 흘러가는 마음들을 다 알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서
살아갈 수 있지, 만약 서로가 서로를 다 안다고 한다면 못 살지도 모릅니다.
남편이 아내의 속을 다 들여다보고, 아내가 남편의 속을 다 들여다보고 ---. 모르는 것이 약인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알아서 불편할 때도 많이 있으리라는 것은 우리가 인정할 수 잇겠지요.
이렇게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생각을 하고 삽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러한 생각들이 우리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시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가장 좋은 예는 연애하는 상황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고 할 때,
우리는 늘 사랑하는 사람 생각을 하게 됩니다.
궁금한 것이지요. 지금 뭐할까? 그리고 보고 싶어지는 것이지요.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게 되면,
(사랑이라는 말 자체가 생각하다라는 사량/思量에서 왔습니다.) 그 생각이 우리에게 어떤 행동을 하도록 명령합니다.
지금 같으면 "전화를 한번 해봐"라든지, 아니면 "문자라도 한번 해봐" 이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문자나 전화를 해보게 됩니다.
전화나 문자를 하기 전에 우리 마음 속에는 그녀 혹은 그에 대한 생각이 먼저 지나갑니다.
옛날 같으면, 그녀가 다니는 학교 앞에 가서 교문 밖에서 그녀의 하교를 기다리거나 집 앞에 가서 기다리거나 하겠지요. 그렇게 보고싶은 생각, 그녀에 대한 생각이 나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하도록 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정도의 예라면, 인간에게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이 무슨 문제를 일으키느냐 하는 점을 잘 생각하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백지에다가 일어나는 생각을 적어갑니다.
예를 들면 고향 --> 어머니 --> 해수욕장 --> 그녀 --> 그놈 --> 서울 ---> 집 --> 맞았다 --> 해수욕장의 그놈 ---> 죽여라, 이런 식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생각이 왔다 갔다가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말씀드렸지요? 이런 생각들은 다 우리에게 명령을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죽여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 자체는 탈을 할 수 없습니다. 마치 구름과 같아서 뜬금없이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그게 생각입니다. 다만 아, 내가 지금 "죽여라'는 말을 하면서,, 그런 생각이 내 속에 일어났구나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생각에 붙잡히지도 않고, 그 생각이 시키는대로 행동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업을 짓지 않는 것이고, 또한 그 업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을 필요가 없겠지요.
그런데 붙잡히게 되면, 그 업을 짓게 되고, 그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문제는 우리 속에서 하루에도 수십만가지가 될지 수만 가지가 될지 모르는 이 생각들 --- 극서을 번뇌라느니, 망상이라느니 하는 것입니다. --- 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답이 불교의 모든 수행법이고, 그 수행법에 따라서 불교종파도 갈라지고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천수경의 다라니 역시 바로 이렇게 끊임 없이 일어나는 번뇌망상을 다스리는 하나의 약방문입니다. 처방전입니다.
좀 이해가 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천수경산책 39
아름다운 발원의 말씀
어젯밤은 정말 잠을 잘 수 없는 열대야였습니다. 오늘은 서울의 경우 36도가 넘었다고 하네요. 낮에 잠깐 동네 앞에 나갔다 왔는데 피부가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휴가도 가시고 그럴 것 같습니다. 저는 그냥 집에서 좀 쉬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분의 "천수경 산책"을 말씀 드려야겠지요?
지난 주까지 우리 의식이나 생각 속에서 말들, 즉 망상들이 어떻게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에게 그의 말을 따라서 행동하도록 명령하는가, 하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대책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두 가지 방향에서 가능할 것입니다. 하나는 좋은 생각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쁜 생각이든 좋은 생각이든 생각을 하지 않고 비워놓는 방법일 것입니다.
오늘은 먼저 좋은 생각을 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지요. 어차피 우리의 의식 속에서는 말이 없을 수 없고, 어떤 생각이든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업(선업)이되는 말, 좋은 업이 되는 생각을 채우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절에 가면 법회 때마다, 마지막에는 발원을 반드시 합니다. 사홍서원이 그것이지요. 물론 그 "사홍서원"은 우리의 "독송용 천수경" 속에도 그대로 들어와 있습니다.
발원은 내가 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말을 나에게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증명법사로 모셔놓고 말이지요. 부처님
앞에서 나는 나 자신과 약속한 것입니다.
발원은 곧 약속의 언어라 할 수 있는데, 그 말에는 반드시 어떤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원을 세우면 우리는 그 원에서 힘이 나옴을 느낍니다. 그러한 것을 원력(願力)이라 합니다. 예를 들면, "독송용 천수경"을 지금까지 못 외웠는데 매일 한 번 씩 독송을 꼭 해서 100일 동안 하겠다. 그렇게 해서 그 안에 꼭 외우겠다 라는 원을 세운다고 합시다.
이러한 원을 간절히 세우게 되면, 그 원이 하나의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래서 좀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좀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잠자기 전이나 아침에 일어나서나 "독송용 천수경"을 한번 씩 읽게 됩니다. 그러한 실천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것이 원입니다. 원력입니다. 이렇게 원력의 언어, 발원의 언어를 우리의 의식 속에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번뇌나 망상들이 잔잔한 생각들이기 때문에 잘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또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쉽게 제어할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면, 매일 저녁에 잠자기 전에 "독송용 천수경"을 한번 씩 독송하기로, 스스로 약속을 했다 합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환경을 스스로 만들게 될 것입니다. 퇴근 이후에 누가 좀 만나자고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간략히 식사를 하고서, 곧 헤어져서 집에 돌아와야 합니다. 그런데 친구는 계속 2차를 가자고 할 상황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그 스스로 약속한 언어가 간절한 것이었다면 친구와 헤어져서, 다음에 또 만나자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행동을 통제하는 힘조차 생기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 불교에서는 발원문을 많이 외우게 합니다. "독송용 천수경" 안에서도 많은 발원문이 있습니다.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지일체법 ---" "아약향도산 도산자최절" 부분도 발원의 말씀들입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여래십대발원문과 사홍서원 모두 발원의 언어입니다.
이렇게 발원문을 많이 읽게 하는 것은, 그렇게 진실하고도 아름답고도 큰 발원의 말씀으로 우리의 의식을 생각을 마음을 가득 채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망상이 차지할 공간을 미리 원력의 언어로 채우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력이 없는 사람, 발원이 없는 사람은 진실로 불자라 하기 어렵고, 보살이라 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그런 언어가 없는 곳에서는, 소소하고도, 번뇌망상에서 나오는 언어들이 자라게 됩니다. 마치 잡초가 자라는 밭처럼 말입니다. 잡초가 자라지 못하도록, 미리 곡식을 심는 것, 그것이 발원입니다. 약속의 언어입니다.
천수경산책 40
아름다운 맹서의 말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수없는 생각의 행렬, 어딘가로 달려가는 그 망상의 행렬을 좀 정돈하고 제어하기 위한 방법은 그 자리에 좋은 생각, 좋은 말을 대신 채워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또 좋지 않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방법은 우리의 "천수경" 안에는, 다 들어와 있습니다.
이 두가지 방법 중에서, 첫째, 즉 좋은 말, 좋은 생각을 채워주는 것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역시 두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은, 아름다운 발원의 말씀입니다.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지일체법"으로 시작하는 열가지 원(十願), "아약향도산, 도산자최절"로 시작하는 육향(六向), 여래십대발원문, 그리고 사홍서원은 모두 그렇게 아름다운 발원의 말씀으로 우리의 생각을 채우자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나쁜 생각, 나쁜 말이 자리잡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밖에 또 다른 언어가 있습니다. 바로 '아름다운 맹서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계율의 언어입니다. 계율은 우리가 수계법회를 통해서 받는 오계, 십계, 보살계 등을 말합니다. 그러한 계율은 형식적으로 보면, " ----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명있는 조재를 죽이지 말라", 이런 식입니다. 그것은 문법적으로 보면, 명령법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부여하는 명령으로 우리는 계율을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그것이 "--- 하지 말라"는 식의, 명령법의 문장(명령문)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형식입니다. 형식일 뿐입니다. 명령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우리 스스로 "생명있는 것을 죽이지 않겠습니다"라는 맹서의 말씀이고, 맹서의 발원인데 그러한 우리의 맹서를 좀 더 튼튼히 하기 위해서 그러한 형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맹서하지 않는데 부처님께서 우리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제하거나 명령하지는 못하는 것 아닙니까. 수계법회에 동참하겠노라, 신청을 하는 사람들은 우리 아닙니까.
그래서 발원과 계율은 같이 갑니다. 한 자리에 앉습니다. 둘 다 발원이기도 하고, 둘 다 계율이기도 합니다. 발원이든 계율이든 다 윤리적인 영역에 자리합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선하게 착하게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 윤리가 있다는 데에서 우리 불교는 고등종교가 됩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도를 말하고, 깨달음을 말하고, 해탈을 말하고, --- 행복을 말하는 온갖 종류의 '종교'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윤리적인 고결함을 갖추지 못한 것도 많습니다. 그런 고도의 윤리가 없는 곳은 자칫 사이비가 되기 쉽습니다. 윤리가 없는 곳에서는 자칫 상업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주의해야 할 일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 --- 하지 말라"는 형식으로 주어진 계율은 소극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라"는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많이 말들합니다. 제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 --- 하지 말라"는 것은 겉이고, 그 속에는 " ---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자기맹서가 있고, 자기경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우리는 흔히 학교에서나 절에서나 높은 도덕을 배웁니다. 다 옳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현실에 들어가면 다르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다른 학생들이 다 컨닝을 한다고 합시다. 그래서 좋은 점수를 얻는다고 합시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컨닝을 하지 않겠다."라고 하는 것, 이 이상 더 적극적인 것이 어디 있습니까?
세대가 바뀐다고 해서 세상이 좋아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젊은 이들을 기성세대를 욕합니다. 학생들은 선생을 욕합니다. 욕하는 것은 좋습니다. 욕할 줄 모르는 것은 문제입니다. 아무런 비판의식이 없다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저는 말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욕하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자기가 어른이 되었을 때 자기가 스승이 되었을 때 자기가 욕하던 그런 어른 그런 스승이 안 된다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지요. 그래서 세상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변명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 ---. 세상이, 현실이 그렇지 않거든 ---.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계율을 어기면서 삽니다. 다른 사람들은 원력이 없이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들은 내세가 있는 지, 업이 있는 지, 과보가 있는 지 알지 못하고 삽니다. 바로 이때 "나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하는 것, 거기에 아름다운 맹서의 말씀이 있고, 아름다운 계율이 있습니다. 그러한 실존적인 자각이 있는 사람을 일러서,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당신의 딸, 당신의 제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천수경산책 41
화두, 번뇌를 무찌르는 칼
자, 이제 우리 진도를 다시한번 확인하고 갑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인데, 그 생각이 업을 낳게 하고 고통을 받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생각'을 우리는 조절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두 가지 방향에서 찾아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긍정적인 방향에서, '좋은 생각'으로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부정적인 방향에서, '나쁜 생각'을 봉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긍정적인 방향에서 다시 두 가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는 아름다운 발원의 말씀, 발원의 언어로 우리 생각을 채워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름다운 맹서의 언어로 우리의 생각을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것 같은데 앞의 경우에는 " ---을 하겠다"는 형식이고, 뒤의 것은 " ---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부터 부정적인 방향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먼저 참선할 때 말하는 화두에 대해서이고, 다음으로는 바로 우리의 다라니 독송에 대해서입니다.
참선에도 화두를 하는 참선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다라니 독송과 대비될 수 있는 것은 화두참선입니다. 간화선이라 하지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행해지는 참선이기도 합니다.
이 화두 참선은 중국의 송나라 때 대혜종고라는 스님에 의해서 확립된 것으로 말해집니다. 물론 그 이전에는 화두 참선이 아니었지요. 그렇게 참선에도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여기서는 화두참선에 대해서만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화두라는 말을 합니다만,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공안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다 아시겠습니다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중국의 당나라 때에 조주라는 스님이 계셨습니다. 이 스님께 어떤 수행자가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스님,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개도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 조주스님의 대답은 "무(無)"입니다. 주의할 것은 이를 그냥 "무"라 해야지, "없다"고 대답하신 것으로 알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무자 화두"라는 것입니다. 화두 참선은 이 "무"를 들어라는 것입니다. 좌선 자세로 앉아서든, 다니면서든 이 "무"라는 것을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제시하라 말입니다. 또 어디 가버리고 없다면(자꾸 자꾸 사라집니다. 그 자리에 망상이라는 것이 들어오니까요. 망상이 들어오면 화두가 사라지고, 화두가 들어오면 망상이 사라집니다), 화두를 돌려서 세워라고 말합니다.
이를 거각(擧覺)이라고 합니다.
화두를 드는 것은, 비유하자면 강감찬 장군같은 용감한 무장이 뜰에서 칼을 빼들고 칼사움을 연습하고 있다면 좀도둑이 범접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화두가 칼입니다. 그래서 절에 가면 선방 이름을 "심검당(尋劍堂)"이라 한 절이 있습니다. 심, 은 찾는다는 말입니다.
화두선의 대성자라 말해지는 대혜종고스님은 그의 책 "서장(편지글이라는 뜻)"에서 이 화두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나쁜 알음알이/생각을 깨뜨리는 도구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화두는 하나의 도구로서, 번뇌를 깨뜨리는 기능을 할 뿐입니다. 화두를 풀면 답이 나온다는 식으로, 화두를 수학문제와 같이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저 들 뿐입니다. "무", 혹은 "이뭣고" 등을 들 수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화두를 드는 동안 일체 번뇌가 사라지고, 일체 망상이 사라지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본래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반야지혜겠지요. 그런데 이러한 화두가 하는 기능과 똑같이, 나쁜 생각이 들어올 수 없도록 미리 자리를 잡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다라니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천수경산책 42
망부석을 때려서 비단도둑을 잡는다
지난번에 화두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좀 어려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화두가 무엇인지,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 하나의 예화를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경봉스님의 법어집에서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우리 아이 기를 때 보니까, 우리나라 전래동화더라구요.
그래서 이미 아시고 계시는 분들도 계실 것으로 믿어집니다.
옛날에 한 비단장수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비단이라 하면, 최고의 사치품이라 할 수 있겠지요. 보통 백성들은 삼베옷이나 무명옷을 입었지, 비단을 감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비단장사는 요즘 말로 하면, 명품을 들고 다니면서 귀족이나 높은 분들을 상대하는 그런 장사였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비단은 현물이지만 화폐를 대신하기도 하였지요.
때는 지금처럼, 아마도 늦여름이었을지 모릅니다. 이 날도 비단장수는 비단을 짊어지고 장삿길에 나섰습니다.
산길을 넘다가, 주막에 들러서 국밥 한 그릇으로 요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산길을 가다가 쏟아지는 잠으로 고투가 계속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잠깐 쉬어가야겠다고 어느 나무 밑 바위 위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그만 식곤증을 이기지 못하고, 피곤을 자장가 삼아서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지만, 단잠을 깨고 보니
비단이 다 사라진 것입니다.
누가 가지고 간 것입니다.
가히 비단장수에게는 전재산이나 진배없겠지요. 할 수 없이, 산을 넘기를 포기하고서 비단장수는 마을로 내려와서 고을 원님에게 가서 신고를 했습니다.
"사또, 비단을 좀 찾아주십시오"
산중에서 사라진 비단을 어떻게 찾아줄 수 있을까요? 원님은 골똘히 생각하더니, 일단 마을 사람들을 다 불러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다 왔습니다.
그들을 둘러세워놓고서 사또는 물었습니다.
"그대가 비단을 잃어버리는 것을 본 자가 없느냐?"
잠에 빠져 있는 비단장수가 어찌 알겠습니까.
"없습니다."
"잘 생각해 보라. 목격자가 없다면 어떻게 비단을 찾겠는가"
곰곰히 생각해 보니, 잠을 자던 그 옆에 우두커니 서있었던 망부석이 생각났습니다. 집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같이 생긴 돌을 망부석이라 하는 것이겠지요.
"아, 예, 망부석이 있습니다."
"그래, 여봐라, 당장 가서, 그 망부석이라는 놈을 잡아오너라."
"예"
망부석은 돌인데, 돌이 어찌 목격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또 그래서 어덯게 도둑을 잡을 수 있을까요?
망부석을 파서 지고 오자, 사또는 망부석에게 심하게 매질을 하라 이릅니다.
"네 이놈 이실직고하렷다. 누가 비단을 훔쳐가더냐?"
뭐, 이렇게 했겠지요.
얼마나 우스운 상황입니까. 그래 백성들이 웃음을 참다가 웃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그러자 사또는 화를 내면서 웃는 백성들에게 벌금을 물렸습니다.
"내일까지 비단 1필을 벌금으로 바치지 않으면 옥에 가두겠다"는 것입니다.
자, 사람들이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비단을 내기로 합니다. 비단을 사러 가야지요.
어떻게 될까요? 갑자기 비단값이 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도둑이 가만히 숨어서 보니까, 비단값이 좋아진다는 말입니다.
도둑이 한 필 한 필 비단을 팔기 시작합니다.
그 다음날, 비단으로 벌금을 내는 백성들에게 그 비단을 어디서 샀는지 물었습니다. 그리고서는 그 도둑을 붙잡았습니다.
이것이 망부석을 패서, 때려서, 도둑을 잡은 이야기입니다. 망부석을 패는 것은 도둑을 잡는 일과 무관합니다.
하지만 망부석을 패서 도둑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경봉스님 법어에서는, 화두는 곧 깨달음이 아니지만 화두를 들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을 꼭 망부석을 패서 도둑을 잡는 일에 비유한 것입니다.
망부석이 도둑이 아니듯이, 화두도 깨달음이 아닙니다. 그저 화두를 들면서 화두를 들여다 본다면, 엉뚱하게도(?) 번뇌망상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천수경산책 43
짚새기불
아마도 독자 여러분께서는 깝-깝- 하실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라니에 대해서, 지금 벌써 14번째 글이 되기 때문입니다. 29번부터 현재까지 죽 다라니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라니에 뜻이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라니의 의미를 번역해서, 하나로 확정할 수 있다면 그에 대한 설명은 금방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번역을 하지 않고서 그냥 "나모라 다나다라 ---" 라는 식으로, 소리로만 읽게 되어 있기에, 그에 대해서 끝없이(?)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맥락을 다시 한번 잡아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라니가 하는 기능은 참선할 때의 화두가 하는 기능과 마찬가지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망부석을 패서 비단도둑을 잡는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화두, 라는 것이 바로 그 답을 숨기고 있거나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 화두를 들고 시시각각으로 의심해 간다면, 곧 비단도둑이 다른 데서 잡히는 것처럼 우리의 번뇌도둑들이 다 잡히게 됩니다. 도둑들이 다 잡히게 되면, 밝고 맑은 본래 성품이 드러나게 되겠지요.
오늘은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나 더 드리고자 합니다. 바로 짚새기불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역시 이미 아시고 계시는 분들이 적지 않으리라 봅니다. 하지만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으면 좋겠습니다.
옛날 어느 절 밑 마을에 한 할머니가 살았습니다. 평소에 그다지 절에 열심히 다니고 한 것은 아닙니다. 겨울 초파일 때나 한번 절에 가면 잘 갈까 하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가만히 생각하니, 이미 나이 많이 먹어서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음 세상에 좋은 데 태어날 수 있도록, 절에 가서 기도라도 좀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승 길 가는 노잣돈을 장만하자는 것이지요.
그래 산에 올라가서 스님을 찾았습니다. 마침 이 절에 주지 스님께서는 참선공부를 하시는 분이라서,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서는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즉심시불(卽心是佛)"
마음이 곧 부처라는 뜻의 이 말을 주지스님께서 설명해 주시고서는, "보살님, 이 즉심시불을 잊지 말고서, 항상 염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다음 세상에도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감사의 뜻을 표한 뒤,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는 이제 낮이나 밤이나 "즉심시불"을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밥을 하든지, 빨래를 하든지 언제 어느 때나 즉심시불을 염하였습니다. 즉심시불, ---
그런데 잃어버렸다가 생각났다가 하면서도 이 할머니는 끊임없이 즉심시불을 입에 달고서 살았습니다. "즉심시불" ---
이렇게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동안, 기억력이 나쁜 할머니는 그만 즉심시불을 '짚새기불'로 읆게 되었던 것입니다. 짚새기불, 짚새기불 ---
아들이 어느 때는 "어머니, 아이 그 짚새기불이 뭐요? 아무래도 이상한데, 절에 가서 스님에게 다시 물어봐요."
이렇게 해도, 그냥 아들 말도 듣지 않고 "짚새기불"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확, 마음이 열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즉심시불'을 정확히 하느냐, 아니면 '짚새기불'로 하느냐 하는 것은 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것을 염하는 마음, 간절함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라니를 외우는 것도 그렇다고 봅니다. 외우다가 글자가 틀리더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외우는 것이 중요하지요. 실제로 다라니의 구절 수는 조금씩 틀립니다. 나라마다 말입니다. 중국 우리 일본이 다 틀립니다. 인도에서도 적은 것이 있고, 많은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간절히 염송하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러한 간절함 속에서 우리의 번뇌는 사라지고, 자리를 잡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수경산책 44
선종의 스님들 대비주를 외우시다
선종의 화두와 밀교의 다라니가 하는 역할이나 기능이 같다고 할진대, 참선을 하는 분이 다라니를 외우는 것이 방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다라니를 외우는 분이 참선을 하는 것 역시 방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중국에서부터 선종에서는 대비주를 함께 독송하는 것이 하나의 규칙이 되었습니다. 선종의 스님들이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여러가지 규범이 있는데, 이를 청규(淸規)라고 합니다. 그 청규에 보면, 대비주나 능엄주(능엄경에 나오는 다라니)를 외워라고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도 중국의 사찰이나 타이완의 절(타이완의 불교는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면서 망명온 중국 본토의 스님들에 의해서 새롭게 시작됩니다. 그래서 중국적인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에서도 확인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중국에서는 우리의 아침예불에 해당하는 것을 '조과(朝課)'라고 하며, 저녁예불에 해당하는 것을 '만과(晩課)'라고 합니다. 아침에 하는 과제물, 저녁에 하는 과제물 이라는 의미겠지요. 그리고 그 의식에 참여해 보면, 독송이 위주가 됩니다. 경전을 읽는다든지, 다라니를 독송한다든지 말입니다.
그런데 조과에서 외우는 것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 다라니입니다. 대비주와 능엄주인데요. 제가 경험한 타이완의 법고사(法鼓寺)에서는, 그 대비주와 능엄주를 하루씩 교환해 가면서 읽고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도 그렇습니다. 제가 일본에서 공부할 때, 중국 유학생이 보여준 동영상에서는 대비주를 외우는 중국불교도들의 모습이 나와 있었습니다.
일본불교에서도 그렇습니다. 일본불교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종파불교라는 것이 하나의 큰 특색입니다. 그러니까 다라니는 밀교의 수행법이므로, 밀교 종파에서 외울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 점이 재미있는 것입니다. 그럼 어느 종파에서 외우느냐 하면, 바로 선종에서 외웁니다.
일본에는 선종에 3개 종파가 있습니다. 가장 오래 된 것이 임제종이고, 그 다음이 조동종입니다. 이는 중국에서부터 서로 대립적으로 발전해 온 것이지요. 이에 더하여, 일본에서는 황벽종이 있습니다. 황벽은 임제스님의 스승이지요. 중국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에서는 임제종 외에 황벽종이 있는 것이 아닌데, 일본에는 황벽종이 따로 있습니다. 물론 그 내용은 임제종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중국의 명나라에서 건너온 한 스님에 의해서 황벽종이 만들어 집니다. 이 세 종파에서만 우리의 대비주를 외웁니다. 다른 종파에서는 대비주 외우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떨까요? 이는 바로 우리의 '독송용 천수경'의 성립에 관한 역사와 관련합니만, 신라시대의 의상(625-702)스님으로부터 시작하여서 고려때 까지는 주로 화엄종 스님들이 이 천수경, 즉 대비주와 관련을 맺습니다. 그것은 의상스님의 영향으로 의상스님의 문손들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시대가 되면 청허대사(서산대사)나 백파선사와 같은 분들에 의해서, 즉 선사들에 의해서 천수경이 만져집니다. 이 분들이 관련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선사들이 대비주를 독송합니다.
근래에 들어오면, 경허스님 제자에 수월스님이라는 분이 계시지요. 이 스님은 학력이 없고 지식이 없습니다. 하지만 대비주를 독송하여 마음이 열렸으며, 평생 노동을 하면서 많은 교화를 펼쳤습니다. 간도에서 활동하셨습니다. 또한 용성스님 역시 그랬습니다. 용성스님은 먼저 업장을 참회하여야 깨칠 수 있다고 해서, 대비주를 독송하였습니다. 지금 경기도 파주에 가면 보광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그 위에 도솔암이라는 암자가 있는데, 거기서 대비주를 독송하다가 최초로 견성하였다 합니다.
그 외에도 많은 분들이 참선을 하면서 다라니 독송을 합니다. 다라니 독송을 통해서 업장을 소멸하여야 화두 역시 잘 들린다는 것입니다.
제가 참으로 기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관심있게 불교신문 같은 것을 보신 분들은 알겠습니다만, 아마도 근래 한 10년 정도 사이에 여기저기 사찰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가 많이 열린다는 점입니다. 예전에는 그런 주제의 기도를 하면서 철야를 한다든지 하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이라는 것이 하나의 수행 프로그램으로 독립되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저 도량석 때 하고, 불공드릴 때 외우고 --- 하는 식이었지요.
그러나 근래 그런 프로그램의 법회가 많고 기도회가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곡 20년 전에 "천수경 이야기"(현재는 "천수경의 비밀")이라는 책을 펴낸 저로서는 적지 않게 고맙게 생각하는 일입니다. 물론 그런 법회를 여는 스님들의 공덕이겠습니다만, 저로서도 따라서 기뻐하는 수희공덕을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 우리도 "대비주" 독송 열심히 합시다. "천수경" 아직 못 외우시는 분들, 외울 수 있도록 많이 읽어주시길 빕니다.
천수경산책 45
다라니의 본질은 무엇인가
자, 이제 우리는 다시 밀교로 건너옵시다. 지난주 까지는 선종에서 말하는 다라니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밀교에서는 다라니를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지요.
마침 그런 이야기는 우리의 천수경, 즉 "원본 천수경" 속에 나옵니다.
대범천왕이 관세음보살님께 요청을 합니다.
"이 다라니의 형모상상(形貌狀相)을 설해주십시오."
여기서 말하는 '형모상상'은 모습입니다. 다라니의 모습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겠지요.
다라니에 어떤 모습이 있을까요? 책상이나 학교나 나무라면 모습이 있지만, 다라니에 어떻게 모습이 있을까요?
다라니의 모습을 묻는 것은 곧 다라니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아닌가 합니다. 도대체 다라니는 무엇인가? 다라니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으로 이해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관세음보살님께서 대답하신 내용은 참으로 우리에게 생각할 바를 지시해 주십니다. 아마도, 여러분께서도 상상하시거나 기대하시는 대답과는 다른 대답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반전입니다.
한번 들어보세요. 제가 번역해 봅니다.
"크게 자비로운 마음이 이것이며, 평등한 마음이 이것이고, 함이 없는 마음이 이것이며, 염착(染着)함이 없는 마음이 이것이곳, 공(空)이라 관찰하는 마음이 이것이며, 공경하는 마음이 이것이고, 낮추는 마음이 이것이며, 어지럽지 않는 마음이 이것이고,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 이것이며, 위없는 보리의 마음이 이것이다.
마땅히 이와같은 마음들이 곧 다라니의 본질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 그대들은 마땅히 이에 의지하여 수행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열가지 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른바 10심입니다.
이러한 열가지 마음이 된다면, 그 자리에는 다라니가 있다는 이야기겠지요. 또 역으로 말해서,
우리가 다라니를 열심히 수지독송 한다면 어느덧 일체 번뇌는 다 사라지고, 우리 마음은 다 이러한 열가지 마음처럼 되리라는 말씀이겠지요.
이 열가지 마음은 넓혀서 말하는 것이고, 하나의 마음으로 좁힌다면 곧 하나의 마음
불심이 되겟지요. 부처님 마음 말입니다.
그 부처님 마음을 부정적으로 말하면 다라니가 됩니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팔만대장경이 됩니다. 현교(顯敎)가 되는 것이고, 부정적으로 말하면 밀교가 됩니다. 다라니는 밀교입니다.
그 비밀이 가르침을 다소라도 긍정적으로 말해보면, 바로 열가지 마음이 됩니다. 평등심, 무위심, 무염착심, 공관심, 무상보리심, 무잡란심, 무견취심, 공경심, 비하심, 대자비심입니다.
앞의 일곱가지 마음은 직심(直心)이고, 그 다음의 둘은 심심(深心)이며, 마지막 하나의 마음이 대비심입니다. 이 세가지 마음은 하나인 마음, 불심의 세가지 측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라니의 본질이 마음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즉심시불'이라는 말이 이해되시지요? 바로 그 마음이 곧 부처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바로 다라니입니다. 마음을 떠나서 다라니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라니가 말이라고 한다면, 마음을 떠난 말은 없는 것입니다.
천수경산책 46
다라니를 외우는 자의 공덕
지난주에 우리는 "원본 천수경"에서 말씀하시는 열가지 마음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라니의 본질입니다. 다라니를 읽고 외우면, 바로 우리는 그러한 열가지 마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열가지 마음을 말하는 "원본 천수경"에서 나오는 십이장(十二藏)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원본 천수경"에서는, 이 다라니를 수지독송하는 사람에게는 열 두가지 곳집(창고, 저장소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비장, 이라 하면 자비가 그만큼 많이 갖추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부분을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다라니를 지송하는 자는, 마땅히 그 사람이 곧 불신장(佛身藏)임을 알지니 99억 항하사의 모든 부처님이 사랑하고 아끼는 바가 되기 때문이다.
마땅히 그 사람이 광명신(光明身)임을 알지니, 모든 여래가 광명을 비추기 때문이다.
마땅히 그 사람이 자비장(慈悲藏)임을 알지니, 항상 다라니로써 중생을 구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그 사람이 묘법장(妙法藏)임을 알지니, 모든 다라니문(門)을 두루 거두어 들이기 때문이다.
마땅히 그 사람이 선정장(禪定藏)임을 알지니, 백천삼매가 언제나 현전(現前)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그 사람이 허공장(虛空藏)임을 알지니, 언제나 공혜(空慧)로써 중생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그 사람이 무외장(無畏藏)임을 알지니, 용, 천, 선신이 언제나 호지(護持)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그 사람이 묘어장(妙語藏)임을 알지니, 입 속의 다라니 소리가 단절됨이 없기 때문이다.
마땅히 그 사람이 상주장(常住藏)임을 알지니, 삼재의 악겁이 능히 무너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그 사람이 해탈장(解脫藏)임을 알지니, 천마와 외도가 능히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그 사람이 약왕장(藥王藏)임을 알지니, 언제나 다라니로써 중생의 병을 치료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그 사람이 신통장(神通藏)임을 알지니, 자재를 얻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의 공덕은 아무리 찬탄하더라도 다함이 없는 것이다."
광명신만 광명장이 아니라, 광명신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의 어떤 판본에서는, 광명장이라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원래 광명신으로 되어 있었는데, 필사하는 분이 생각하기에 다른 것은 다 '장'이라 되어 있으니 이 광명신 역시 '광명장'으로 고쳐서 쓴 것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광명신'이 있는 외에 나머지 11장은 모두 '장'이라 되어 있는 것은, 그것이 '광명장'이 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거꾸로 11장이 모두 11신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다라니를 외우는 자는 모두 부처님 몸이 된다는 것입니다. 혹은 부처님이 갖추고 있는 공덕을 다 갖춘 몸, 즉 그런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선정장이라 되어 잇는 것에서도, 우리는 다시 한번 다라니를 외우는 것이 곧 선정을 수행하는 것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다라니를 독송하는 것이 참선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는 소식입니다
천수경산책 47
이제 긴긴 터널을 다 빠져나왔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긴긴 터널을 다 빠져나왔습니다. 천수경의 제목을 해석하는 --- 그래서 이 '천수경 산책'은 '천수석제(千手釋題)'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중에, '다라니'에 대한 해석을 다 마쳤습니다.
딱 20회에 걸쳐서 우리는 죽으나 사나, 다라니에 대해서만 말씀드렸고 생각했습니다. 27회부터인데요. 그것이 지난 5월 6일의 일이었으니, 정확히 5개월 동안 '다라니'라는 한 주제에 매여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답답하고, 딱딱하고, 지겨웠던 것일까요? 그랬죠? 그랬을 것입니다. 저 역시도 이해합니다. 저도 징그러웠습니다.
말없는 다라니, 텅 비어 있는 다라니에 어찌 그렇게 말이 많다는 말인지 ---. 원, 알 수 없습니다. 하나 분명한 사실은
다라니를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해석해 놓고 말았다면, 더 이상 더 할말도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이미 하나의 뜻으로만 고정되어 버리고 말았을 터이니까 말입니다. 그것은 '총지(總指)'가 아니라, '일지(一持)'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이토록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 저로서도 더 이상 할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렇게 길게 다라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저로서는 처음이었습니다. 물론 "선종에서 대비주를 독송송하는 까닭"(천수경의 새로운 연구, 민족사, 2006)이라는 논문을 쓰기도 했지만, 어쩌면 거기서 하는 이야기보다도 더 많은, 더 다양한 이야기를 여기서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천수경에 대한 저의 강의서 "천수경의 비밀"(민족사)에서 한 것보다는 훨씬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거기서는 "비밀인 까닭에", "선밀일치(禪密一致)"라는 두 주제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고 말았습니다. 거기보다는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여러분들께서 읽어주시고, 또 격려를 해주신 덕분으로 생각합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가 얼마 전에, 저희 학교 화장실에 갔습니다. 소변을 보려고 갔는데, 소변기 앞에 서있는 제 눈에 하나의 스티커가 보였습니다. 총학생회 학생들이 붙여놓았놓은 것인데, 도서관에서의 예절에 대해서 계몽하는 내용입니다.
뭐, 자리 맡아놓고 돌아다니지 말라. 떠들지 말라. 뭐 그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제게 인상적으로 다가온 말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핸드폰은 무언(無言)으로 해놓아라"
그래, 무언! 그렇지, 무언이지. 무언이고 말고 ---. 그래서 제가 시를 한 편 썼습니다.
無言
(2012년 모월 모일)
저는 항상, 시를 쓰면 그 끝에 날짜를 적어둡니다. 왜냐하면 그 시가 나오게 된 배경이 그 날짜 속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제가 쓰는 시라는 것이 대개는 '일기'같은 성격의 것이라서 그렇기도 합니다. 이 시 "無言"에서는, 날짜를 적어두는 것이 하나의 울타리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날짜와 제목 사이에, 시의 내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일까요?
우리 학교 다닐 때, 흔히 경험하는 일입니다만, 아이들이 떠들면 누군가 일어나서 더 큰 소리로 외칩니다. "조용히 해!"
그런데 그 소리 역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이고, 조용히 공부하려는 학생들을 방해하는 소리가 된 것은 틀림이 없지요.
다라니는 무언입니다. 그래서 시 "무언" 처럼, 쓰고 말아야 할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20번이나 횡설수설하였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조용히 해!"라고 말하는 그 학생과 같습니다.
다라니는 침묵 속에서, 무어 속에서 그 모든 것을 다 지니고 있는데(총지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제, 그 침묵의 터널을 통과해 왔습니다. 고생하셨을 것입니다. 어두운 터널, 빛도 비추지 않는 터널을 이제 완전히 빠져나왔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이제 선(禪)의 세계가 아니라 교(敎)의 세계를, 무언의 세계가 아니라 유언의 세계를, 밀(密)의 세계가 아니라 현(顯)의 세계를 탐색하게 될 것입니다.
말없는 세계를 말로서 드러내려고 했던 그 무모한 노력, 그것이 지금까지의 20회였습니다. 쓸데없이 '무언'이라 제목을 붙여놓고서, 그 무언의 세계를 맛보라고 유혹한 것입니다. 쓰잘데 없지만, 할 수 없이 하게 되는 몸짓, 거기에 말의 운명이 있고, 시의 운명이 있고 ---.
천수경산책 48
‘경’은 모든 진리의 기준이다
자, 이제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경"이라는 제목에서 마지막 부분, '경'에 대해서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경(經)은 경전이라는 의미임은 다 아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 말에 해당하는 인도 말(범어)은, "수트라(sutra)"입니다. 수트라는 한자로는 수다라(修多羅)로 번역됩니다. 소리로 옮겨서 '수다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인사 가면 장경각에 '수다라장'이라는 현액이 걸려져 있습니다만, 그때 수다라가 바로 경전이라는 뜻입니다.
이 수다라, 즉 수트라는 '실'이라는 뜻입니다. 실은 옷감 같은 것을 짜는 재료, 가장 기본적인 요소일 것입니다. 옛날에 삼베 같은 것을 짜는 틀을 보면, 지금도 실로 손으로 옷감을 짜는 장면을 티비 같은 데서 볼 수 있습니다.
직사각형의 틀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로로 몇 갈래의 실을 늘어뜨려 놓았습니다. 먼저 기준이 되는 것은 세로입니다. 세로로 실을 몇 갈래 늘어놓은 뒤에, 가로로 실을 걸어서 세로 실과 가로 실이 서로 교차하면서 옷감이 짜집니다. 양탄자 같은 것을 짤 때도 보면, 그렇습니다.
그렇게 내려오는 것을 '경'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옆으로 가로로 걸게 되는 실을 무엇이라 할까요? 위(緯)입니다. 우리가 지금도 지리적으로 말하면, 경도라거나 위도라는 말을 하잖아요? 경과 위, 중에서 어디까지나 근본이 되고 기준이 되는 것은 경입니다.
중국에서는 경서가 있고, 위서가 있습니다. 경서는 경전으로서의 권위를 온전히 누립니다. 하지만 위서는 뭔가 비정통적인 주장을 담은 책을 말합니다.
우리의 일상 언어에서도 "경위"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건의 경위를 알아보자, 이런 말을 하기도 하지요.
이처럼 경은 근본, 기준선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경은 하나의 법령과 같은 것입니다. 법에 비추어 보아서 우리의 행동이 범죄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행동이나 마음을 비추어 보는 데에는 경전이 필요합니다. 마치 외모를 비추어 보는데 거울이 필요한 것같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경전을 이루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부처님 말씀 중에서도 특히 교리적인 내용을 경이라 하고, 제자들의 생활규범을 말한 것은 율이라 합니다. 경을 모아놓은 것을 경장(經藏)이라 하고, 계율을 모아놓은 것을 율장(律藏)이라 합니다.
다음으로 이 경장과 율장에 대해서 어떤 해설을 한 글을 논장(論藏)이라 합니다. 이렇게 경장, 율장, 그리고 논장을 합해서 삼장(三藏)이라고 합니다. 삼장법사라는 스님은 이 삼장에 해박하여, 인도말로 쓰여진 삼장을 중국어로 번역하시는 스님을 '삼장법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경'이라는 말씀은, 그 내용에 대한 매우 높은 존칭입니다.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중국 선종의 육조 혜능스님의 어록을 모아놓고서 "육조단경"이라고 합니다. 경이라는 존칭을 붙인 것입니다. 그만큼 그 어록의 말씀에 대해서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는 경은 '경법(經法)'이라는 말이고, 법문(法門)이라는 뜻입니다.
법문이라고 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글월 문(文)'이 아닙니다. 문 문(門)을 씁니다. 진리의 말씀이라는 뜻이 아니라, 진리에 이르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에 대해서는 이 경전에서 설하는 말씀이, 다른 어떤 곳에서의 어떤 말씀보다도 더 높은 권위를 갖는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경'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수많은 말씀을 설한 팔만대장경(=경) 중에서, 이 경전은 '천수천안관자재보살의 광대원만과 무애대비심의 대다라니를 설하는 경전'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제목에 '다라니경'이라 함으로써 이 천수경이 '다라니를 설하는 경전'이라고 하는 뜻이 되고, 그만큼 다라니가 이 천수경의 중심이 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천수경산책 49
“천수경”은 과연 경전인가?
인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서 중국으로 경전이 들어옵니다. 인도에서부터 오신 스님들, 중앙아시아에서 들어오신 스님들, 그리고 나중에는 중국에서 인도로 유학을 다녀오신 스님들이 경전을 갖고 와서는 중국어(한문)로 번역을 합니다.
차차 번역된 경전이 많이 쌓이게 되자, 목록이 만들어집니다. 이른바 경록(經錄)입니다. 그 그러한 경록들에서 하는 말 중에 "인도에서 들어와서 번역한 경전은 진경(眞經)이고, 중국에서 만들어진 경전은 위경(僞經)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진자 경전과 가짜 경전을 구분한 것입니다.
위경은 의경(疑經)이라고도 합니다만, 중국에서는 어떤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위경이라고 해서 반드시
나쁜 경전이다, 혹은 없애야 한다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위경이 많이 만들어졌고, 그러한 위경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는 우리가 잘 아는 "부모은중경"이 있습니다. 중국은 유교문화권의 나라니까, 출가의 종교인 불교에 대해서 "효"라는 문제를 제기하자 불교측에서는 이에 대응하면서 만들어진 경전이 "부모은중경"입니다. 우리 불교에도 효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지요.
그럼 우리가 지금 읽고 외우는 "천수경"은 과연 진경일까요? 위경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기위해서 알아야 할 것은, "천수경"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다시 상기하고자 합니다.
"독송용 천수경"과 "원본 천수경"입니다. 우리가 읽고 외우는 지금의 "천수경"을 우리는 "독송용 천수경"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은 제가 그렇게 부르는 것일 뿐인데요. 정각스님 같은 분은 "현행 천수경"이라 합니다. 한편으로 대장경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천수경"을 우리는 "원본 천수경"이라 합니다. 이 역시 제가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이제, 위에서 제기한 질문에 대해서 대답해 봅시다. 우선 "원본 천수경"은 진경입니다. 위경이 아닙니다. 인도로부터 들여온 경전이고, 번역된 경전이 맞습니다. 대표적으로 다라니는 중국에서 만들 수 없지요. 물론 나중에는 도교같은 데에서 불교의 다라니를 흉내내서, 주문을 만듭니다만 ---. 그러나 그런 것은 한 눈에 중국에서 제조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읽고 외우는 "독송용 천수경"은 어떻게 될까요? 진경일까요? 아니면 위경일까요? 대답은 진경이라 하기도 어렵고, 위경이라 하기도 어렵습니다. 진경이라 하기 어려운 까닭은, "정구업진언"으로부터 시작해서 "나무상주시방승"으로 끝나는 그대로는 대장경 속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장경에 존재하는 "원본 천수경"은 "독송용 천수경" 그대로의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왜 위경이라 하기는 어려운 것일까요? "독송용 천수경"의 어떤 내용들, 매우 핵심적인 내용들이 "원본 천수경"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위경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무엇으로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의궤(儀軌)입니다. 이 말은 좀 어렵게 느껴집니다만, 실제로 우리 역사에서도 쓰이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정조 임금이 수원에 화성을 만들고서 그 공사 내역같은 것을 다 기록하고 그림으로 남깁니다. 그 책 이름에 보면, 의궤라는 말이 들어갑니다.
불교에서는 "의식"에서 쓰이는 "궤칙(=규칙)"이라는 뜻입니다. 경전의 어떤 중요한 부분을, 보다 일상적으로 독송하면서 불보살님께 참회하고 발원하는 등 수행을 할 때 그 순서라든가, 그렇게 독송하게 되는 문안들을 순서대로 편집한 것을 "의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원본 천수경"은 그 안에 나오는 다라니를 독송하기 위하여, 경전 그대로를 다 읽는 대신에 (좀 길어서 오래 걸립니다.),
중요 부분을 따로 뽑아서 새롭게 그 순서를 편집합니다. 그래서 성립한 것이 "독송용 천수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의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궤라는 점을 저는 "독송용"이라는 말을 붙임으로써 나타내 보고자 한 것입니다.
천수경산책 50
원본 천수경에서 독송용 천수경으로
지난 시간에 "원본 천수경"에서 "독송용 천수경"으로 전개되는 것은, 경전이라기 보다는 의궤라는 성격이라 하였습니다.
"원본 천수경"을 다 읽자면, 아마도 한 시간은 넘게 걸립니다. 그 중에 핵심인 다라니를 읽으라는 말씀인데요, 아무래도 불편하지요.
그냥 다라니만 읽으면 될 것을 ---.
그리하여 지금도 중국과 타이완의 절들에서는 아침 예불 때 다라니만을 읽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선종 3종파(임제종, 조동종, 황벽종)에서도 다라니만을 읽고 외웁니다.
그런데 우리는 좀 달랐습니다.
다라니 독송을 중심으로 하여서, 하나의 의궤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저는 참으로 이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불교의 힘이라고 말입니다.
그럼, "원본 천수경"으로부터 어떤 것들이 의궤인 "독송용 천수경"으로 흘러들어왔는가? 이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다라니를 들여옵니다. 그리고 "원본 천수경"에서는 "이 다라니를 외우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나를 따라서" 십원육향을 외우라고 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십원은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지일체법"부터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동법성신"까지의 열번에 걸친 발원문이고, 육향은 "아약향도산 도산자최절"부터 "아약향축생 자득대지혜"라는 여섯번에 걸친 발원을 말합니다. 모두 관세음보살의 발원문인데요. 다라니 독송 전에 먼저 발해야 할 원력으로, 관세음보살님은 이렇게 10원 육향을 말씀해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경전의 가르침대로 "다라니" 앞에, "십원육향"을 자리하도록 합니다.
여기까지가 "원본 천수경"으로부터 가지고 온 것입니다. 이때 이 "원본 천수경"은 가범달마 삼장이 번역하신 "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제목도 당연히 가지고 옵니다. 다만 우리 "독송용 천수경"에서는 "관세음보살"을 "관자재보살"로 했군요.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경"이라고 해서, '관세음보살'을 '관자재보살'로 바꾸었고, 다라니경을 '대다라니경'으로 '대'를 집어넣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의미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원본 천수경"이라 할 수 있는 경전들이 대장경 안에 몇 종류가 있습니다만, 그 중에 하나는 불공(不空) 삼장 역본이 있습니다. 이 불공삼장은 가범달마 삼장 보다는 후대의 스님입니다. 우리 혜초스님이 이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니(인도에 다녀오신 뒤 중국 오대산에서),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불공 역본 "원본 천수경"으로부터 우리 "독송용 천수경"으로 가져온 것은 바로 "십원육향"이 시작되기 전에 그 앞에 자리하는 "계수관음대비주"부터 해서 "소원종심실원만"까지입니다. 이 부분은 "계청"이라 했는ㄷ데, 말하자면 "사뢰옵니다"라고 하는 일종의 기도문입니다.
그러니까 "독송용 천수경"에서 제목, 계청, 십원육향의 발원, 그리고 다라니가 원래의 "원본 천수경"으로부터 뽑아낸 의궤입니다. 외우기 쉽도록 한 것이지요.
그런데 애당초 불공 삼장 역본과 가범달마 삼장 역본을 대조해 보면, 불공 삼장 역본에는 "계천" 부분만이, 가범달마 삼장에 없는 것이 더 있을 뿐, 가범달마 역본과 다른 점이 없습니다. 다만 길이가 짧은데, 가범달마 삼장 역본에는 다라니 이후에 많은 설명(부가부분)이 있지만 불공 삼장에 역본에서는 다라니가 설해지면 바로 경전을 끝마치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불공 역본 자체가 이미 "독송용"으로 만들어진 의궤임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천수경산책 51
'독송용 천수경'의 역사는 언제부터
지난 시간에 우리는 '원본 천수경'에서 '독송용 천수경'으로 전개되는 부분이 10원 육향과 계청, 그리고 다라니 부분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 중에 계청 부분은 불공삼장 번역본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십원육향과 다라니가 포함된 가범달마 삼장 번역본, 즉 원본 천수경이라 부르는 그 경전은 중국에 번역된 것이 언제일까요?
650-655년 사이라고 합니다.
이 기간은 정확히 의상스님께서 중국에 유학을 하러 가시기 10년에서 5년 전이 됩니다. 의상스님은 중국의 종남산에서 근 10년을 유학하십니다. 종남산은 지금의 서안, 즉 옛날 당나라 때의 수도인 장안에서 남쪽으로 20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산이라 합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꿈은 꾸었으나, 아직 이 산을 가보지 못했습니다. 곧 인연이 있으리라 봅니다. 장안으로부터 20킬로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는 말은, 그 당시 국제불교의 중심지였던 장안의 문물을 바로 바로 바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스님이 도착하기 전 5년 내지 10년 전에 번역된 천수경은 의상스님에게는 충분히 알려질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남아있는 문헌을 통해서 볼 때, 천수경을 알았던 흔적을 의상스님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럼 의상스님에게는 있는가? 있습니다. 바로 앞서 말씀드린 바 있는, "백화도량발원문"에서입니다.
"천수천안, 십원육향과 대자대비는 관세음보살님과 같아지며"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는 정히 원본 천수경으로부터의 인용임을 알 수 있게 합니다.
또 "널리 온누리의 중생들에게 대비주를 외우게 하며"라는 구절이 있는데, 대비주는 바로 원본 천수경에서 설하는 다라니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이 "백화도량발원문"이 의상스님의 친저가 아니라는 주장을 합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독송용 천수경의 기원을 의상스님에게서만 찾는 것은 확정적인 것이 아니게 됩니다. 하지만 가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상스님의 또 다른 글에 천수경으로부터의 인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투사례(投師禮)"라고 하는 글입니다. 이는 일종의 예불문입니다. 이 중에 "대비주"라는 말도 나오고, "원아속승반야선"이라는 말도 인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나라 천수경 신앙의 역사는 의상스님으로부터 비롯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의상스님으로부터 우리까지는 약 1400년도 더 넘는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서, 독송용 천수경은 천천히 천천히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어 왔습니다.
가장 이른 시기의 모습은 "원본 천수경"으로부터 가지고 온 십원육향과 다라니 정도를 읽었겠습니다만 차차 무언가가 덧보태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언제일까? 어떤 분은 1959년에 통도사에서 나온 어떤 책에서 처음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만, 저로서는 그렇게 신뢰가 안 갑니다.
확실한 것은 1882년에 나오는 어떤 책에 실린 독송용 천수경은 지금 우리가 읽는 "독송용 천수경"의 가장 마지막에 있는 부분, 즉 발사홍서원과 발원이 귀명례삼보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판본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확정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1882년 이후에 들어와서, 어느 땐가 현재와 같이 완성된 것으로 생각된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도 좀더 연구를 기다려야 할 것같습니다.
의상스님 이후 1882년 사이에는 다양한 형식으로 천수경에 들어갈 요소들이 만들어지고, 편집되어 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때에는 다양한 의궤들 속에서 대비주의 독송이 중심이 되면서, 다른 요소들과의 융합이 확인됩니다. 예를 들면, 영산재라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도 "다라니 --> 사방찬 --> 도량찬 ---> 참회게"라는 부분이 외워졌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여기저기에서 천수경으로 완성되어 들어갈 각 요소들이 만들어져 오는, 긴 과정을 거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불교 전통은 독송용 천수경이라는 하나의 의궤를 만들어내는 긴 역사를 갖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자랑할만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은 대비주만 독송했는데 비하면, 우리가 훨씬 더 창조성이 있었던 것이니까요.
천수경산책 52
'원본 천수경' 플러스 알파, 준제주
자, 이제 우리는 '원본 천수경'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대로 하자면, 끝이 없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 글의 제목이 '천수경 산책'입니다. 그렇게까지 깊이 들어가면 '산택'이 아니라 '등산'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앞으로 또 다른 인연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원본 천수경에서 우리는 중요한 핵심들이 우리의 '독송용 천수경'으로 들어온 것을 공부했습니다. 다라니, 그리고 다라니 앞에 들어가는 십원육향은 가범달마 스님 역본으로부터, 그리고 십원육향 앞에 들어가는 계청 부분은 불공스님 역본으로부터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독송용 천수경'에는, 이 대비주를 중심으로 한 부분과 함게 또 다른 부분이 덧보태어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플러스 알파'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알파'는 바로 준제주라고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정법계진언
호신진언
관세음보살본심미묘육자대명왕진언
준제진언
이러한 부분입니다. 정법계진언 바로 앞에, "나무칠구지불모대준제보살"이라는 부분이 들어갑니다. 그 부분이, 거기서부터는 준제보살과 관련되는 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준제진언 뒤에는 "아금지송대준제"부터 해서 "원공중생성불도"까지는 준제진언이 끝난 뒤에 행하는 발원문이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궁금해지는 것은 호신진언이나 육자진언 등과 함께 준제진언이 구성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앞뒤로, 준제보살에 대한 귀의와 발원이 자리함으로써
이 부분들이 전체적으로 다 준제진언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을 전체적으로 다 "준제주" 부분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준제주 부분은 그러한 순서대로 나오는
문헌이 있습니다.
거란족이 세운 나라인 요(遼)나라 때 나온 책입니다만, "현밀원통성불심요(顯密圓通成佛心要)"라는 책입니다. 저자는 오대산 금하사의 스님 도신(道신)이라는 스님입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현교, 즉 화엄과 밀교, 즉 준제주를 서로 함께 닦아야 할 것임을
말하는 책입니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에 들어온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우리의 "독송용 천수경"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대비주 부분에 덧보태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현밀원통성불심요"에 보면, 이 네가지 진언을 '준제사대주'라고 합니다. 거기에서는 육자진언도 준제진언이라는 큰 틀에서 수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여름 중국 오대산 성지순례를 갔을 때, 가이드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이 도신스님의 "현밀원통성불심요"를 알고 있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우리의 천수경 역사에서 그 제일 앞자리에 의상스님이 계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의상스님은 화엄종을 일으킨 스님입니다. 그러면서도 관음신앙, 정토신앙을 하신 분이고, 동시에 밀교 다라니를 수용하여 읽고 외운 분이기도 합니다. 즉 화엄과 밀교를 함께 닦았던 분으로, 즉 회통(會通)불교를 하신 분입니다. 이러한 스님의 입장과 이 도신스님의 "현밀원통성불심요"의 입장이 같다는 것에서, 준제주가 우리의 독송용 천수경 속에 들어올 인연이 심어졌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재미있는 일이 또 있습니다. 일본 교토의 서북부에 가면, 고산사(高山寺)라는 절이 있습니다. 가마쿠라 시대때 묘에(明惠)라는 스님이 계셨습니다. 그 스님은 화엄종 스님인데, 우리의 원효나 의상스님을 좋아했습니다. 그림으로 이 두 스님의 전기를 그리고 모셨습니다. "화엄연기"라는 책인데, 일본의 국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고산사에서, 옛날에 "현밀원통성불심요"가 읽혀졌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묘에스님이 지었다는 책(사실은 다른 사람이 썼고, 그 이름을 가탁한 책) 중에 "천수경술비초"라는 천수경 주석서가 있습니다.
한국과 중국(遼), 그리고 일본 사이에 무언가 통하는 사상의 흐름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흐름을 우리는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쁘고 행복합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천수경산책 53
'독송용 천수경'의 구성 1, 천수십문(千手十門)
지난 번에는 '독송용 천수경'에서 천수다라니 부분, 즉 '원본 천수경'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 새로운 부분으로서 준제주 부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 시점에서 비로소 '독송용 천수경'의 구성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보통 같으면, 이 순서는 '천수경'의 강좌 시에는 초기에 하게 됩니다. 저 역시 "천수경의 비밀"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먼저 전체적인 구성을 보여드리고서, 하나하나 구절구절을 설명해 드리는 것이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천수경의 제목을 해석하면서, 그 안에서 천수경의 이곳 저곳을 그야말로 '산책'하는 입장에 놓여 있기에 그렇게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경'을 해설하는 곳은 실제로 이 제목 해석에서는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 마지막 부분에서
'독송용 천수경'을 전체적으로 한번 보려는 것입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독송용 천수경'을 전체적으로 10부분으로 나누어서 봅니다. 이는 제가 "천수경의 비밀"이라는 책에 들어간 내용을 법보신문에 연재할 때, 즉 1991년에 처음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수경"은 부처님의 것이고, 온 중생의 것이지만, 이렇게 "독송용 천수경"을 열 가지 범주로 나누어 보는 것은 '김호성'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저작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어떤 교수님께서는 당신의 천수경 강좌 책에서 이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면서도, 김호성의 것을 인용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명백히 표절입니다. 도둑질이라 이 말입니다. 또 금년 봄에 제게 천수경 강좌를 들은 어떤 보살님 이야기로는 인터넷에 가보면, 아무런 말도 없이 제가 나누는 , 다음과 같은 "천수경"의 구성이 많이 돌아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럼 뭐 어떻겠습니까? 그렇게라도 해서 부처님을 널리 알리고,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이해할 수 있다면 좋겠지요. 그러나 그 근본에는 정직함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했으면 자기가 했다 하고, 인용은 인용이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감사표시이고, 예의입니다.
자, 이제 본론을 말씀드립니다. '독송용 천수경'의 구성을 열가지로 나누기 때문에, 저는 이를 '천수십문(千手十門)'이라 합니다.
1. 개경(開經) : 정구업진언 --- 개법장진언
2. 계청(啓請) :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계청 --- 소원종심실원만
3. 발원(發願) 1 : 십원육향
4. 귀의(歸依) 1 :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 --- 나무본사아미타불
5. 다라니(陀羅尼) : 신묘장구대다라니
6. 찬탄(讚歎) : 사방찬과 도량찬
7. 참회(懺悔) : 참회게 --- 참회진언
8. 준제주(準提呪) : 준제공덕취 --- 원공중생성불도
9. 발원 2 : 여래십대발원문과 발사홍서원
10. 귀의 2 : 발원이귀명례삼보
이 중에 아마도 눈이 가는 것은, 발원에 발원1과 발원2가 있으며 귀의에도 귀의 1과 귀의 2가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양자를 비교해 보면, 앞의 경우가 좀더 구체적이고 개별적이며 뒤의 것이 좀더 전체적이고 총체적입니다.
이런 말을 우리는 한자로 말할 때, '별(別)'과 '총(總)'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발원1은 별발원, 발원2는 총발원이라 할 수 있으며, 귀의 1은 별귀의로 귀의 2는 총귀의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자는 다 아시는 것처럼, 뜻글자입니다. 그래서 별발원은 별원으로, 총발원은 총원으로 말하면 됩니다. 다만 별귀의는 그냥 별귀의로 총귀의는 그냥 총귀의로 두기로 합시다. 왜냐하면 '귀의'를 어느 한 글자로 나타내기는 어려움이 있어서입니다.
자, 그리고 하나만 더 살펴보기로 하지요. 별귀의에 대해서입니다. 이 별귀의는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이라고 하고, '나무'라는 말이 '귀의'의 뜻이니까 '별귀의'라고 해도 맞습니다. 그러나 그 맥락을 보면, 그 다음에 오는 다라니를 독송하기 전에 불보살님께 귀의하는 것인데 그 귀의의 이유는 '초청'하는 데 있습니다. 오셔서 제가 지금부터 외는 다라니 독송의 공덕을 지켜보시고 증명해 주세요. 이런 의미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별귀의 혹은 소청(召請)'이라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보소청진언"이라고 할 때의 '소청'입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고 반영해서, 다시 위의 천수십문을 새로 써보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1. 개경(開經) : 정구업진언 --- 개법장진언
2. 계청(啓請) :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계청 --- 소원종심실원만
3. 별원(發願) : 십원육향
4. 별귀의(歸依) 혹은 소청(召請) :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 --- 나무본사아미타불
5. 다라니(陀羅尼) : 신묘장구대다라니
6. 찬탄(讚歎) : 사방찬과 도량찬
7. 참회(懺悔) : 참회게 --- 참회진언
8. 준제주(準提呪) : 준제공덕취 --- 원공중생성불도
9. 총원 : 여래십대발원문과 발사홍서원
10. 총귀의 : 발원이귀명례삼보
천수경산책 54
'독송용 천수경'의 구성 2, 삼분오단(三分五段) 1
지난 주에는 '독송용 천수경'의 구성을 전체적으로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10가지 범주로 나누었기 때문에 좀 평면적인 감이 있고, 나열한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독송용 천수경' 안에는 어떠한 내용들이 들어가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합니다만, 좀 더 조직적인 느낌은 들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의 경전 내용을 전체적으로 고려하면서, 각 부분들을 나누어서 이해하는 방식을 '과목(科目)'이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과목 나누기'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 불교의 전통에서는 아주 오래된 방법입니다.
경전을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런 과목 같은 것을 나누어 가면서, 하나의 경전을 살피는 방법을 보면 우리 불교가 참으로 논리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참으로 오래된 방법입니다. 지금도 스님들이 공부하는 강원같은 데에서는 이러한 과목 나누기를 통해서 경전의 이해를 도모하는 것으로 압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는 "금강경"입니다. "금강경"에 보면, 32분(分)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원래 경전에서는 없습니다. 하지만 "금강경" 전체를 중국 양(梁)나라 때, 소명(昭明)태자라는 분이 나누어 본 것입니다.
이 분은 바로 달마대사와 대화를 나누었던, 저 유명한 양 무제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얼마든지, 다른 사람이 본다면 다른 방식으로 "금강경"의 구성을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의 경전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금강경"의 경우에는 32분으로 나누었는데, 이 역시 전통적인 방식으로 보면 좀 예외입니다. 그보다 더 많이 나타나는 방식이 하나의 경전 전체를 크게 셋으로 나누어 보는 것입니다.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그리고 유통분(流通分)입니다.
서분은 우리가 흔히 하는 서문, 서론이라 할 때의 느낌 그대로입니다. '분'이라는 말을 썼을 뿐이지요.
정종분은 "금강경"에서도 제3 대승정종분이라고 하였지요? 정종은 산이 있다면, 그 가장 높은 정상, 산마루를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본론이라 할 수 있고요. 일종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 경전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때, 그것은 모두 이 정종분 속에 나타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명태자가 나눈 과목으로 볼 때, "금강경"의 주제, "금강경"에서 하고자 하는 바는 제3분에 있다고, 그분이 판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이렇게 안 볼 수 있습니다. "금강경"의 제3 대승정종분과 제4 묘행무주분을 둘로 나누어야 할 이유를 사실 발견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이것은 결국 "과목 나누기"는 그 나누는 사람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어느 정도 일리는 있어야 하겠지요?
마지막으로 유통분은 결론이라 말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결분'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결'은 맺는다. 막힌다는 뜻이 있습니다. 유통분은 '흐를 류', '통할 통' 그리고 '나눌 분'입니다.
흐르고 다른 곳으로 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 여러분께서 제게 "천수경"이야기를 들으시고 계십니다만,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도록,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도 통할 수 있도록 전해야 한다는 부처님의 부탁을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크게 셋으로 나누는데, 그런 과목 나누기의 방법에서 볼 때 앞에서 제가 "천수경"을 크게 열가지 범주로 나눈 것은 이 삼분(三分)의 방법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처음에 보았을 때, 삼분설로 나눌 수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천수경"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일까? 다라니 아닌가. 그렇다면 다라니를 정종분으로 놓고 보면, 그 앞 부분은 모두 서분이 되고 그 뒤는 전부 유통분이 되는가?
무슨 서분이 그렇게 길고, 유통분은 또 왜 그렇게 긴가?
여기서 막힌 것입니다. 아, 아무래도 천수경에는 삼분설이 적용될 수 없나 보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그 대신으로 "천수십문"이라고 하는, 앞서 본 것과 같은 열가지로 나누어 보는 방식을 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삼분설"로 나누는 방식이 생각된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드리려고 하는데, 그것은 본격적으로 다음 주에 말씀드리기로 하지요.
오늘 그 이야기까지 드리게 되면, 머리가 아파지실 것같습니다.
천수경산책 55
'독송용 천수경'의 구성, 삼분오단(三分五段)
독송용 천수경을 전체적으로 보면서도, 하나하나의 부분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밝혀주는 것이 과목나누기입니다.
그 하나의 예로써, 앞서 10가지 범주로 나누어 본 '천수십문'입니다.
그런데 종래 우리는 전통적인 불교학에서는 언제나 경전을 해석할 때, 서분, 정종분, 그리고 유통분이라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왔음을 공부했습니다.
이른바 삼분설입니다.
처음에 삼분설을 가지고서 '독송용 천수경'을 분석하지 않고서, 천수십문이라는 방식으로 평면적인 과목을 나누어 본 것은
'독송용 천수경'의 경우에는 서분과 정종분, 그리고 유통분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듯 싶어서였습니다.
그 이유는 다라니 부분을 정종분으로 본다면, 그 앞 뒤로 배치되어 있는 서분과 유통분이 너무나 길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천수십문으로 나누어 보았던 것입니다.
1992년 "천수경이야기"를 펴내고 나서, 저는 많은 법회나 교양대학을 다니면서 "천수경" 강의를 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공부가 지속되었습니다. 가르치는 것 이상 더 좋은 공부가 없다는 말이야말로 진리입니다.
어느 순간, 저는 번갯불이 지나는 것처럼, 독송용 천수경을 삼분으로 나누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서분과 유통분이라는 것을 좀 다르게 설정함으로써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서분은 쉽습니다.
정구업진언부터 개법장진언까지는 어떤 경전을 읽든지 먼저 독송하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볼 때, 쉽게 그 부분을 서분으로 판정할 수 있게 합니다.
다음 유통분입니다. 유통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흘러가기를 바라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중생들에게 통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 가르침과 중생이 서로 교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유통되기를 바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스스로의 수행을 완성하여 중생제도에 나서는
내용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바로 발원 부분입니다. 발사홍서원과 여래십대발원문이라는 발원 부분, 즉 앞서 천수십문에서 말한 총원 부분과 그 뒤에 나오는 총귀의(발원이 귀명례삼보) 부분을 함께 묶어서, 유통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분과 유통분을 경계짓게 되면, 그 사이에 있는 부분이 모두 정종분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놓고 보면, 그 정종분 안에는, 이미 우리가 앞서 다 공부하였지만, 천수다라니(대비주)와 준제주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 이러한 내용을 이제 도표로 나타내보지요.
서분 : 개경(정구업진언 - 개법장진언)
정종분 - 대비주(계청 - 참회) - 준제주(준제공덕취 --- 원공중생성불도)
유통분 - 총원 - 총귀의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앞의 세 부분을 '삼분'이라 하고, 뒤에 나오는 다섯 단락을 '오단'으로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삼분오단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독송용 천수경'의 정종분은 대비주와 준제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독송용 천수경'은 대비주와 준제주가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서 우리는 '독송용 천수경'은 의궤라고 했습니다. 의식용 독본(讀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삼분오단으로 나누어 봄으로써, 우리는 독송용 천수경이 곧 바로 대비주와 준제주를 읽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앞서 공부하기를, 이 중에서 '대비주' 부분이 '원본 천수경'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며, 준제주 부분은 후대에 조선시대에 부가된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준제주를 부가한 점에서, 우리의 '독송용 천수경'은 '원본 천수경'과 차이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부분을 빼고 일자, 그래도 되지 않겠느냐는 주장 역시 가능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좀더 시간도 덜 들고 하겠지만,
전통이라는 것이 쉽게 변화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물론 준제주라는 것도 좋은 주문이므로, 그렇다고 해서 굳이 빼고 할 것은 무엇이냐 라는 주장도 가능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어느 한 개인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봅니다.
천수경산책 56
‘대비주’의 구성
'독송용 천수경'은 결국 대비주와 준제주를 외우기 쉽도록 편찬된 의식용, 혹은 독송용 경전 --- 이를 의궤(儀軌)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렸지요? --- 이라는 점을 지난 번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대비주와 준제주라는 두 부분으로 '독송용 천수경'을 이해하게 될 때, 다시 좀더 분명히 살펴보아야 할 것은 '대비주'와 '준제주'는 어떻게 해서, 그러한 부분들을 하나의 '대비주'와 '준제주'로 묶을 수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준제주'는 다음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대비주'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기로 합니다. 이 역시 이미 여러번 말씀드린 내용을 종합해서 정리하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잘 따라오시면서, 이 글을 읽어오시는 분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대비주'라고 했던 부분을 다시 좀더 세분해 보기로 하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이러한 것을 '과목 나눈다' 혹은 '과목을 친다'고 합니다. 각 세부의 부분에 대한 명칭은 이미 우리가 앞서 살펴본 '천수십문' 속에서 다 나오는 용어입니다.
대비주 --- 계청(啓請,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 계청 --- 소원종심실원만)
--- 별원(別願, 나무대비관세음 --- 원아조동법성십)
--- 별귀의 혹은 소청(召請, 나무관세음보살 --- 나무본사아미타불)
--- 신묘장구대다라니
--- 찬탄(사방찬, 도량찬)
--- 참회(참회게 --- 참회진언)
그러니까, '계청'부터 '참회'까지를 하나로 묶어서, 그것들이 모두 신묘장구대다라니와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만으로 하더라도, 전부가 다 신묘장구대다라니라는 다라니를 수지독송하는 데 필요한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게 그 모든 부분들이 '신묘장구대다라니'와 관련된다고 볼 수 있을까요? '계청, 별원, 그리고 신묘장구대다라니'는 바로 그러한 순서로 '원본 천수경'에서부터 함께 있었던 것임은 이미 우리가 앞에서 공부한 바 있습니다. 계청과 별원은 모두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읽고 외우기 위하여, 반드시 그 전에 읽고 외워야 할 것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다음에 또한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조선시대에 어떤 불교의식집에서는 '대비주 -> 사방찬 --> 도량찬 --> 그리고 참회'로 이어지는 사례가 나옵니다.
이러한 두 흐름이 하나로 합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찬탄과 참회가 다라니와 관계를 맺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찬탄, 즉 사방찬과 도량찬은 모두 의례행위 자체와 연결됩니다. 실제로 사방찬의 경우에는 그 자체가 하나의 의례행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봅니다. 실제로 물을 뿌리면서 했겠지요? 지금은 그저 읽을 뿐이지만 ---. 그리고 도량찬은 의례의 순서를 지시해주면서, 의례행위에 참여하여 다라니를 독송하면 가피를 받을 수 있다는 공덕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다라니 독송을 권유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참회의 경우에는 그 기능상 다라니의 기능과 겹치는 측면이 있습니다. 다라니 자체에 참회의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신묘장구대다라니'의 경우에는 그 이름 자체가 '파악업(破惡業)다라니'라는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원본 천수경'에서 그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라니를 외우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참회의 과정, 즉 참회문을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한번 더, 그만큼 업이 끈덕져서 그렇겠지요? 또 다시 '참회게'부터 시작해서 '참회진언'까지 읽으면서 한번 더 참회의 마음을 간절히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참회' 부분 역시 그 기능적 측면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와 같은 기능을 하기에, '대비주'라고 하는 범주 속으로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계청 부분에서부터 여기 참회 부분까지를 한 덩어리로 묶어서 '대비주'라고 했던 것입니다.
다음에는 '준제주' 부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조금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은 사실 거의 앞에서 이미 말씀드린 것을 다시 말씀드린 것입니다. 일종의 복습이 80%이고, 새로운 내용이 20%입니다.
잘 음미해 주시길 빕니다.
천수경산책 57
‘준제주’의 구성
지난 시간에 '대비주'의 구성에 대해서는 말씀드렸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대비주'와 함께, '독송용 천수경'의 정종분을
구성하고 있는 '준제주'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앞에서 '독송용 천수경'을 열가지 큰 범주로 나누어서 살펴보는 것 중에서는 '준제주'는 여덟번째 '준제'라고 하였습니다. '준제주' 안에서, 어떠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밝힐 수 없습니다. 그러한 한계가 있는 것이 '천수십문'이라는 과목나누기였습니다.
이는 지난 시간에 본 것같은 '대비주'를 구성하는 것이 계청, 별원, 별귀의 혹은 소청, 다라니, 찬탄, 참회라고 하는 것이 모두 천수십문 중에서 둘째부터 여섯째까지 그대로 다 들어가는 것과 대조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이 '삼분오단'이라는 과목 나누기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우선 전체적인 구성을 그려보겠습니다.
계청 : 준제공덕취 --- 정획무등등
별귀의 혹은 소청 : 나무칠구지불모대준제보살
개경 : 정법계진언, 호신진언
육자진언 : 관세음보살본심미묘육자대명왕진언
준제주 : 나무 사다남 --- 부림
별원 : 즉발보리광대원 --- 원공중생성불도
자, 이제 하나하나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준제공덕취"라는 말은 "준제주의 공덕의 무더기"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분에서부터 '준제주'라는 것을 형성하는 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획무등등'이라는 부분까지 이어집니다. 이는 곧 준제주를 찬탄함으로써 그 독송하는 공덕을 이야기함에서, 그러한 공덕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은 마치 '대비주' 안에서 계청이 하는 역할과 유사한다고 보았습니다.
"나무칠구지불모대준제보살"은 준제보살, 즉 준제관음보살에게 귀의를 하는 내용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준제관음을 불러서 모시고서, 다음과 같이 외우는 준제주의 독송공덕을 증명해 주십시오, 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는 마치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독송하기 전에 아미타불, 관음, 그리고 세지보살 등에게 귀의하고 초청해 모시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별귀의 혹은 소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정법계진언과 호신진언을 합해서 '개경', 즉 경전을 여는 부분이라 보았습니다. 실제로 '정법계진언'은 저 앞의 '정구업진언'의 위상에 상응하고, '호신진언'은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의 위상과 상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 부분이 '개경'이라 말한 것, 즉 경전을 열기라는 뜻으로 부른 것처럼 이 부분 역시 '준제주' 안에서 '개경'이라고 평가합니다.
다음으로 육자주와 준제주는 사실상 별개의 독립적인 진언인데, 준제주의 맥락 속에 육자진언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 앞에서 말씀드린 일이 있습니다만, 요(遼)나라 오대산의 도신(道신)스님이라는 분이 지은 책 "현밀원통성불심요(顯密圓通成佛心要)"에 나오는 그대로입니다. 이 책의 영향을 조선시대의 여러 스님들이 받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나오는 네가지 진언(정법게진언, 호신진언, 육자진언, 준제진언)을 그대로 수용해서, '독송용 천수경' 안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다만 "현밀원통성불심요"라는 책에 보면, 준제주는 실제로 "옴 자례 주례 준제 사바하"로 끝이 나고, "부림"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또 다른 진언, 즉 '대륜일자주(大輪一字呪)'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금지송대준제"부터 "원공중생성불도"까지는 준제주를 외우고 나서 행하는 발원문입니다. '대비주'에서는 '다라니' 독송 이전에 행하는 '별원'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희 이제 위대한 준제진언을 외우노니"라고 시작하여 "원하옵건대 모든 중생들이 다 불도를 이루게 하소서"라고 하는 것은 발원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천수십문에서 여덟째 부분인 '준제주'에는 게청, 별귀의 혹은 소청, 개경, 육자진언, 준제진언, 별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 '준제주' 부분은 구체적으로 준제진언을 독송하기 위하여 준비된 하나의 의례절차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 부분만으로도 하나의 독립적인 '의궤'라 할 수 있습니다.
아, 머리 아프시지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부터 여러 번 말씀드린 내용을 잘 이해하시면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천수경산책 58
'독송용 천수경', 회통(會通)불교의 증거
이제 우리는 '독송용 천수경'이 어떤 경전이며,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다 배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대비주와 준제주를 독송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의궤라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밀교만이 발견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물론 대비주와 준제주가 기본이 된다는 점에서, 그것들이 밀교 다라니라는 점에서 '독송용 천수경' 안에서 밀교가 기본이 된다는 점은 두말 할 나위없습니다. 하지만 밀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밀교라는 말은, 사실상 '밀교'의 말입니다. 밀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크게 둘로 나눌 때 '밀교'와 '현교(顯敎)'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현교보다는 밀교가 더욱 우월한 가르침이라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때 현교는 밀교, 즉 다라니를 설하는 불교 이외의 모든 것을 말합니다.
다라니는 얼른 이해할 수 없는 말, 즉 말 아닌 말이지만 현교는 얼른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된 가르침을 현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독송용 천수경' 안에서 다라니 이외의 부분들을 우리는 현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이해할 수 있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을 다 현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교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는 다양한 불교가 들어있습니다. 다양한 불교로 다시 나누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다라니 안에 선적(禪的)인 차원이 있으니까, '독송용 천수경' 안에는 선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선적 차원은 우리 인간을 겉으로 보지 않고 속으로 살펴볼 때, 인간은 곧 부처라고 하는 관점 역시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본래 그 뿌리가 없는 것인데, 죄지을 때 그마음이 사라지기만 한다면, 그래서 죄도 없고 죄지을 때 마음도 사라지게 된다면, 그때 진짜 참회라 이름한다"라는 게송이나 "내 마음 속 중생을 다 제도하길 바라며, 내 마음 속 번뇌를 다 끊기를 바라고, 내 마음 속 법문을 다 배우길 바라며, 내 마음 속 깨침을 다 이루고자 하나이다."라는 데에서도 그러한 돈오적인 차원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선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성중생 서원도" 운운하는 게송은 중국 선종의 육조 혜능스님의 게송입니다.
다음으로 화엄사상도 있습니다. 화엄사상은 어려운 것 같은데 실제로는 어렵지 않습니다. 간단합니다. 우리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1과 무한대는 매우 다릅니다. 1은 무한대가 아니고, 무한대는 1이 아닙니다. 그런데 화엄사상에서는 1이 곧 무한대이고, 무한대가 곧 1이라 말합니다. 이것이 화엄사상입니다.
이를 시간적으로 적용해 보면, 찰나라는 1과 영겁이라는 무한대가 곧바로 하나가 됩니다. 그것을 다시 공간에 적용해 볼까요?
이 사바세계의 더러운 땅(예토)라고 하는 것과 깨끗한 부처님의 세계(정토)가 사실은 따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예토가 곧 정토라는 것입니다. 이 공간론이 '독송용 천수경' 안에 등장합니다. '사방찬'에서입니다.
"첫번째로 동쪽에 물을 뿌리니 도량이 깨끗해집니다." 운운하는 게송이 있지요? 여기서 도량, 청량, 정토, 그리고 안강이라는 네 가지 명사가 나옵니다. 이는 다 정토의 다른 이름입니다. '물을 뿌리다'는 것은 하나의 상징적 의례입니다. 정화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정화한다면, 우리는 그 정화의 대상이 더러운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도량, 청량, 정토, 안간은 모두 다 원래 깨끗한 정토세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다가 물을 부린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원래 비단이지만 그 비단 위에 꽃을 수놓는 것과 같습니다. 말하자면 금상첨화입니다.
화엄사상을 특징짓는 다른 한 가지는 보살행입니다. 끝없이 수행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지어온 모든 악업들, 그 모든 것은 다 탐진치로 말미암아서, 몸으로 입으로 뜻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제 하나하나 다 참회합니다."라고 하는 것도 화엄사상입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 게송은 바로 "화엄경"의 보현행원품에서 나오는 게송입니다.
여기서 하나더, 우리의 '독송용 천수경'은 신라 화엄종의 창시자 의상스님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도 앞에서 말씀드렸지요? 함께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또한 계율도 있습니다. 열가지 악업을 참회하는 것이 곧 계율입니다. 참회는, 옛날에 지은 악업을 뉘우침과 동시에 앞으로 그런 악업을 짓지 않겠다는 맹서입니다. 이렇게 다시 악업을 짓지 않겠다는 맹서를 우리는 계율이라 합니다. 또 있습니다. 발원은 다 계율입니다. 계와 원은 동의어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계학의 범위 안에 들어갑니다.
마지막으로 정토사상도 있습니다. 별귀의 혹은 소청에서 "나무본사아미타불"이라고 하였지요. 그 부분은 곧 극락의 삼존(아미타, 관세음, 대세지)에 귀의하면서 그 분들을 청해 모시는 부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뒤의 "여래십대발원문"에서는
"원하옵건대 어서 빨리 아미타불 친견하고" 운운하는 구절이 아나오지요? 거기서 우리는 정토신앙을 다시한번 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상 정리하면, 우리의 '독송용 천수경' 안에서, 우리는 "밀교 + 선 + 화엄 + 계율 + 정토"라는 대승불교의 주요한 가르침이 다 함께 모여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우러져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을 우리는 회통(會通)적 성격이라 말합니다. 우리나라 불교전통을 흔히 회통불교 내지 통불교라고 말하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하나의 증거가 여기서도 발견됩니다.
천수경산책 59
우리말 천수경의 문제
독송용 천수경은 우리의 불교신앙 의례에서 매우 중요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다양한 국면에서 쓰이고 있음은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만큼 이 '독송용 천수경'을 한문 천수경이 아니라, 우리말로 번역해서 읽고 외운다면 더 좋지 않겠는가? 이런 문제가 제기된 것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이 시대는 한문교육을 전문적으로 받지 않은 한글세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 형편이므로, 절에서 읽고 외우는 한문 천수경은 뭔가 시대착오적인 느낌을 갖게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렇게 한문 천수경이 아니라 우리말 천수경을 읽고 외우자는 필요성이나 주장에는 저 역시 공감합니다. 하지만 우리말 천수경을 마련하고 준비하는 데, 또 실천하는 데에는 반성할 점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문제는 그 번역본이 중구난방(衆口難防)으로 제기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거기에는 통일된 번역본의 제정이 늦어지고 있거나,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는 데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우리말 천수경의 마련은 불교진흥원에서 "통일법요집"이라는 이름으로 먼저 시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법요집은 그 야망과는 달리, 통일할 수는 없었습니다. 통일되지는 않았습니다. 불교진흥원은 그 통일안에 대한 하나의 시안을 제시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지, 그 안을 불교계 안에서 퍼뜨릴 수 있는 조직력은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대한불교조계종에서도 우리말 천수경을 마련한 적이 있지만, 다시 포교원을 중심으로 해서 개정안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압니다. 작년인가, 그 천수경 우리말 번역 사업을 위한 공청회도 열렸고 저 역시 그 시안을 보고서 토론자로 공청회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금년에 들어서 다시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말 천수경을 마련한다는 문제를 생각하면 가장 크게 봉착하는 문제가 운율의 문제입니다. 박자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한문 천수경에는 다라니 부분을 제외한 현교(顯敎) 부분에서는 한자로 5언(다섯 글자)이 아니면 7언(일곱 글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박자로 생각해 보면, 두 박자와 세 박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약향도산"은 "아약 / 향도산"이렇게 두 박자로 읽힙니다. 하지만 "나무대비관세음"은 "나무/대비/관세음"이렇게 세 박자로 읽히게 됩니다.
저는 이것이 기본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우리말 천수경에서도, 한문의 5언은 두 박자로 옮겨야 하고
한문의 7언은 세 박자로 옮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5언의 경우를 보지요. 저는 이렇게 옮겼습니다.
백겁 / 적집죄 --- >백겁토록 / 쌓인죄도
일념 / 돈탕제 --- >한 생각에 / 사라지니
안 됩니까? 뭔가 뜻이 훼손되는 것이 있는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만 해도 됩니다. 다음으로 7언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지요.
아금 / 지송 / 대준제 --- >제가이제 / 준제주를 / 지송하오니
즉발 / 보리 / 광대원 ---> 보리심과 / 크나큰원 / 발하게되며
저는 이렇게 옮겼습니다. 즉 2박자와 3박자를 기본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년에 포교원에서는 다시 우리말 천수경을 새롭게 재정비한다고 하면서, 다시 4박자를 기본으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신문을 통해서 알게 된 일입니다만 ---.
만약 신문 보도와 같이, 4박자로 되돌아간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시조나 불교가사의 박자처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시조 : 태산이 / 높다하되 / 하늘아래 / 뫼이로다
불교가사 : 홀연히 / 생각하니 / 도시몽중 / 이로다(경허, "참선곡")
이런 것이 4박자입니다. 그럼 우리말 천수경을 4박자로 번역하는 예를 들어보기로 하지요.
한문 : 살생 / 중죄 / 금일참회(2박자)
어떤 번역 : 살생하여 / 지은죄를 / 지금모두 /참회하고
만약 4박자로 하게 되면 한문으로 8글자가 우리말로는 16글자로 되면서, 꼭 2배가 늘어납니다. 저의 번역은 "생명해친 / 무거운 죄 / 참회하옵고"로 3박자로 마감합니다.
더욱이 문제인 것은 이렇게 4박자를 일괄적으로 적용하게 되는 경우이입니다. 한문으로 5언을 우리말로 16글자로 늘어나게 한다는 것이지요. 이는 큰 문제라 생각됩니다.
저는 아직까지 알 수 없습니다. 왜 4박자를 채택해야 하는지 ---. 2박자나 3박자를 혼용하면서도 뜻을 잃어버림이 없이 번역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번역용례가 없지 않은데 말입니다. 그 사례는 광덕스님 번역본과 저의 번역본이 그러한 예입니다. 4박자를 굳이 채택한다면, 왜 4박자여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공적으로 밝혀주신다면, 그래서 그러한 입장이 타당성을 인정받는다면 더 이상 혼란이 없이 다 4박자를 채택할 수 있겠지요.
사실 우리말 천수경의 문제가 이렇게 혼돈을 거듭하는 데에는 포교현장에서 그 필요성의 절박함으로 말미암아서 저마다 우리말 번역을 새롭게 마련해온 많은 분들에게도 있으리라 봅니다. 정말로 그 절박한 필요성을 느낀 바로 그 시점에서, 기존에 이미 선행하여 존재하고 있는 번역본들을 채택하여 따라 할 수는 없는지 충분히 검토해 보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큰 문제가 없다면, 점점 하나 하나 힘을 모아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불교계에는 그러한 마음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저마다 결정적인 틀림이나, 결정적인 차이도 없는데 중구난방으로, 굳이 나의 번역을 새롭게 제시하는 데 서로 앞다투어 달려간 것은 아닌가 합니다.
물론 선행하는 번역에서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면, 그 점을 지적하는 글이 번역문 외에 제시되어서 토론의 자료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종래에는 그러한 성찰이 축적되어 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혼돈이 이어지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제라도 운율의 문제에 있어서 큰 원칙을 세우고, 하나하나 의미의 문제를 풀어가면서 누구나가 다 따라서 채택할 수 있는 우리말 천수경이 마련되길 기대합니다.
오늘부로 '경'이 끝나서, 사실상 "천수경 산책"의 진도가 다 나갔습니다.
2011년 11원 23일 출발한 "천수경 산책"이 오늘로 '경'까지 다 끝났습니다.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경"이라는 천수경의 제목을 하나하나 해석하자는 기획이었습니다.
경전의 본문은 모두 경전의 제목에 대한 주석이며, 경전의 제목은 경전의 본문을 요점만 뽑아서 제시한 것으로 생각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이 글들은
"천수경 석제(釋題)", 즉 천수경 제목 해석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독송용 천수경'의 구절구절 하나에 대한 풀이는 이미 20년 전에, 1992년에 "천수경이야기"로 나와 있고, 현재는 수정 보완하여 "천수경의 비밀"(민족사)이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기에
구절구절 해설하는 것은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점을 양해해 주시고요. 꼭 그 구절구절 풀이를 아시고 싶다면, 부족하더라도 저의 책 "천수경의 비밀"을 살펴봐주시길 빕니다.
이렇게 귀한 기회를 주셔서, 저로 하여금 천수경에 대한 또 하나의 작업을 이룰 수 있도록 해주신 승원스님께 깊이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1년이 넘는 세월 동안 꾸준히 읽어주신 독자여러분들께도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곧 시간을 내서, 합본하여 원고를 정리하고 출판사를 모색해서 정식으로 책이 나와서 널리 읽힐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새해 모두 건강하시고, 소원성취하소서.
나무아미타불
김호성 합장
성불하십시요!
참 회 송
첫댓글 조용한 시간이 주어질때 마다 산책은 계속 이여가볼랍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_()_
천수경 매일 입으로는 하지만 모르는 뜻이 더 많았는데~
이번 기회에 조금이나마 공부 할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_()_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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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공부할 시간을 주셨네요 지금부터 천천히 음미를 하면서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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