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7일(월)
* 시작 기도
주님...
성소 안의 물두멍에서 제사장들이 몸을 씻고 성소에 들어간 것처럼 오늘 이 죄인도 물두멍인 주의 보혈에 죄악된 내 몸과 마음을 씻습니다.
이로 나의 영이 정결하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나의 유익을 위한 샤먼이 아니라 주를 위한 종으로 서게 하시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주일 이후 월요일입니다.
오늘 신대원 동기목사들 몇 명이 이곳 베트남을 방문합니다.
은혜를 더하여 주사 이 하루도 거룩한 불구자요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삼상 28:15-25
제목 : 사울이 찾아간 신접한 여인, 사람들의 유익을 채우기 위한 샤먼이다.
15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하니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기로 내가 행할 일을 알아보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하더라.
16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17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18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19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
20 사울이 갑자기 땅에 완전히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로 말미암아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의 기력이 다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루 밤낮을 음식을 먹지 못하였음이니라.
21 그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가 심히 고통당함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여종이 왕의 말씀을 듣고 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왕이 내게 이르신 말씀을 순종하였사오니
22 그런즉 청하건대 이제 당신도 여종의 말을 들으사 내가 왕 앞에 한 조각 떡을 드리게 하시고 왕은 잡수시고 길 가실 때에 기력을 얻으소서 하니
23 사울이 거절하여 이르되 내가 먹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그의 신하들과 여인이 강권하매 그들의 말을 듣고 땅에서 일어나 침상에 앉으니라.
24 여인의 집에 살진 송아지가 있으므로 그것을 급히 잡고 가루를 가져다가 뭉쳐 무교병을 만들고 구워서
25 사울 앞에와 그의 신하들 앞에 내놓으니 그들이 먹고 일어나서 그 밤에 가니라.
* 나의 묵상
사울은 블레셋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하여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래서 여호와께 물었으나 침묵하신다.
급기야 그는 자기가 금한 신접한 자를 찾아 죽은 사무엘을 불러올린다.
신접한 여인은 지하세계에서 한 영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사무엘의 혼이다.
사울은 사무엘을 알아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예를 갖춘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어찌하여 자기를 불러내어 귀찮게 하느냐고 한다.
사울은 자기가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데, 이는 블레셋이 전쟁을 일으켰고 자기가 하님께 물었으나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대답하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기가 어떻게 행할 것을 알기 위하여 사무엘을 불러냈다고 하는 것이다.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그의 원수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자기를 통해 하신 말씀, 곧 나라를 그에게서 옮겨 다윗에게 주실 것이라는 말씀을 상기시킨다.
그 이유는 그가 여호와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않은 탓이며 그것은 곧 여호와의 ‘소리’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사무엘 생전에 이미 사울에게 고지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삼상 15:28)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블레셋 군대에게 넘기실 것이다.
내일 그와 그의 아들들이 죽어서 사무엘과 함께 있을 것이다.
사울은 사무엘의 이 말을 듣고 심히 두려워하여 갑자기 땅에 엎드러진다.
물론 그가 엎드러진 것은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자 신접한 여인이 한 조각 떡을 그에게 주어 기력을 회복시키려 하였다.
사울이 거절하자, 그의 신하들과 여인이 강권하였고, 사울은 이를 받아들인다.
신접한 여인은 특별한 축제 때 잡는 살진 송아지를 급히 잡고 무교병을 만들어 내놓는다.
사울과 그의 신하들은 그것을 먹고 일어나서 그 밤에 떠난다.
자기 인생을 얻고자 하는 사울에게 두려움이 가시지 않는다.
그는 왕의 자리 곧 권좌를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무고한 다윗을 죽이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내어주지 않음으로 사울의 뜻은 좌절되고 자신의 악함만 드러날 뿐이다.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오자 두려워하여 그 마음이 심히 떨렸다.
사울은 역시 자기를 위하여 여호와께 물었고 여호와께서 침묵하시자 신접한 여인을 통해 사무엘에게 묻는다.
혼으로 올라온 사무엘이 심판의 말씀을 재차 선포하자, 그 말로 인해서 그는 심히 두려워하여 완전히 기진맥진 쓰러지고 만 것이다.
그렇게 기진한 사울에게 제공된 여인의 만찬은 풍성했지만 그것은 죽음의 만찬이었다.
하나님을 떠난 자 곧 사울의 인생은 하나님을 떠난 아담 군상의 모습 그대로이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을 떠난 후 벌거벗은 것이 두려워 나무 사이에 숨었다.
하지만 실상 그 두려움의 본질은 ‘하나님을 떠난 것’에 있었다.
하나님을 떠난 자는 벌거벗은 두려움을 없애기 위하여 숱한 존재물들을 무화과 잎으로 삼아 가리는 것이다.
자기 인생을 얻기 위한 치열한 전쟁은 실상 비참한 실존(失存)을 가리는 존재물의 획득에 다름 아니다.
그것이 바로 성공과 획득이라는 이름의 뜻인 가인 그 자체이다.
보란듯하고 성공하고 풍요로운 ‘3A’를 얻고자 분투하며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이것은 왕의 자리를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사울의 두려움이다.
또한 사울은 블레셋이 일으킨 전쟁으로 두려워하였다.
이는 아담 안의 모든 인생이 당하는 두려움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을 찾으며, 그 신과 좀 더 가까워 보이고 친해 보이는 중재자를 찾는데 그 중재자가 바로 ‘샤먼’ 곧 무당이다.
자신은 그 신에 비해 한없이 약해 보이므로 그 신과 친해 보이는 그 무엇을 중재자로 삼는 것이 오늘 우리 기독교 안에도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삼으시고 그와 더 가까워지는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신다.
그런데 개업예배나 장례식 그리고 추도식과 같은 일에 목사를 세운다.
이 목사가 곧 넥타이 멘 샤먼이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개업예배나 장례식 등에 목사를 초청해서 예배드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목사가 샤먼과 같은 자기의 인생이나 유익을 위하여 구하는 자로 서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목사는 성도들의 영혼을 바르게 세우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자들로 세워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의 많은 목사들은 이런 샤먼의 모습에서 자유하지 못한 이들이 너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바로 그런 자였음을 고백한다.
복음을 알지 못했을 때 나는 우리 교회에 모인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그들의 기도제목이 잘 이루어질 수 있을까를 노심초사하며 궁구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중보기도팀까지 만들어 위하여 기도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기도의 응답을 받고 그것으로 함께 기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전혀 거기에 있지 않았음을 나는 복음을 알기 전까지는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예배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저 열심을 다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런 열심을 추구하고 부추기는 것은 샤먼이 하는 일과 전혀 다르지 않다.
샤먼은 그저 신을 감동시키기 위하여 열심을 내서 기도하고 무언가를 바치라고 선동한다.
그러면 그런 소원을 비는 자들은 그것에 맞춰서 더 열심히 기도하고 힘에 지나도록 복채(헌금)도 내곤 한다.
그것은 샤머니즘에 먹혀버린 범신론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이 땅의 모든 종교가 다 샤머니즘에 잡아먹히고 말았다.
심지어 기독교조차 그렇다.
기독교는 이 땅에서 무언가 잘 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종교가 결코 아니다.
‘기독’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한자어 독음이다.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다.
하여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그 목적과 이유를 분명히 알고 그 뜻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도 결코 자신의 뜻을 위하여 행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일하셨다.
그 아버지의 뜻은 곧 영생이다.
(요 6:40)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사울이 두려움에 휩싸였을 때 그는 그가 금지한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다.
그의 두려움과 함께 그가 원하는 것을 알기 위함이었다.
그 여인이 바로 무당인 샤먼이다.
문제는 내가 이런 샤먼의 역할을 전혀 거리낌 없이 행했다는 것이다.
복음을 알지 못하였기에 행한 나의 불경스러움이다.
내가 감당하지 못할 고난을 통하여 예수께서 주신 복음을 깨닫게 되었고 이제 그 복음을 전하여 사울과 같은 우매한 성도들을 주님께로 바로 인도하기 원하며 또한 그 일에 매진하고 있다.
신접한 여인과 같은 샤먼으로 살아왔던 나의 인생은 죽었다.
그리고 이제 예수로 인하여 다시 태어난 자가 되었다.
위로부터 얻은 그 생명이 나의 진짜 생명임을 고백한다.
오늘도 그 생명을 주신 우리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린다.
형식적 샤먼이었던 나를 깨트리고 오직 내 안에 예수의 영 곧 성령으로 가득 채워지길 오늘도 기도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 안에 사울이 찾아간 신접한 여인 곧 샤먼이 있습니다.
내가 바로 이 종교의 탈을 쓰고 샤먼 노릇을 한 자였음을 고백합니다.
이 땅에서 무언가를 획득하여 성공하려는 그 아담의 본성에 갇혀 있었던 죄인 중에 괴수가 바로 나였음을 고백합니다.
이런 나는 죽어도 벌써 죽었어야 할 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나를 창세전에 택하여 주시고 그 언약 안에서 끝까지 붙드시고 우리 주님의 복음을 주셨으니 이제 그 복음으로 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셨기에 주님과 함께 사는 모든 이들은 필연적으로 고난이 닥치게 되어 있음을 믿습니다.
그 고난을 피하기 위하여 샤먼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고난을 깊이 수용하고 용납하여 주님과 함께 무덤에 들어가 그 안에서 생명으로 연합하는 자 되게 하소서.
이 복음 안에 생명이 있음을 믿습니다.
날 구원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