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의 목록 / 한재범
저수지에 개 하나 놓여 있다 트루먼이 연기하는 것이다
어두운 관객석 사람들 웅성거린다 너는 지루한 득 턱을 괸다 우리는 지정석에 앉았고 우리를 기다리는 개가 있고 이 모든 건 가까스로 완벽하다
흰 가루가 된 외할머니를 가로수 아래 묻었지 사대강 사업으로 거대하게 꾸면진 영산강 공원에서 공원인데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딱히 숨기려던 건 아니었어요 외삼촌이 맞담배를 피우자 했지 아직 미성년자인데 자꾸만 괜찮다고 다 그런 거라고 다 그런 게 뭘까 외삼촌의 불을 받으며 생각했다 가로수는 더 크게 자라겠지 한겨울의 바람이 불고 사라진 잎사귀 대신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외할머니가 죽을 힘을 다해 우리를 비웃는 거야, 형이 말하고 돌아가는 장례 버스에서 외가 사람들은 잠깐 슬퍼해줬다 돈을 세던 손가락으로 얼굴을 긁는다 왜 슬픈 얼굴들은 다 배가 고파 보이는 걸까 자꾸 침이 고여 괜히 바닥에 침을 뱉었다 내일 부턴 학교에 가야 하는데 형은 다시 군대에 가야 하고 친구들에게 뭐라고 말할까 벌써 기대가 됐다 버스의 창문에 나란히 강이 비친다 저건 강이 아니라 저수지다, 아버지가 말하자 외가 사람들이 화를 내며 반박하고
긴터널을 지나왔다
일년에 한번 극장에 갔었지 먼 친척의 부고가 해마다 한번은 들려오던 것처럼 정한 적 없는 약속
누군가의 생일이었고 형과 내 이름을 자주 헷갈려 하던 사람과 함께 연극이 끝나면 극장을 나와 옆에 있는 호수를 보며 걸었지
형은 강이라 했고 나는 호수라 했는데 둘 다 아니었지 깊고 어두웠지 지금 당신이 밟고 서 있는 그것처럼
그런다고 누가 알아 줄 것 같아요? 죽어봤자 다 까먹는다고요
트루먼이 연기를 하다 말고 우리를 본다 연기가 아니라 분명 우리를 보고 있다
사람들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저수지를 바라보는 연기라고 너는 생각할 수 있겠지만
관객석의 어둠은 지나치게 깊다 이것을 저수지라 말하기에는
개는 개를 무서워하지 않지만 나는 가끔 네가 무서워, 집에 돌아와 네가 아무말 없이 방문을 닫는 일을 나는 자주 앓는다
저 트루먼이라는 사람 어딘가에 익숙하다, 너는 말할 수도 있을 텐데
빛이 눈을 껌벅인다 무서운 빛이다
트루먼은 알고 있겠지 트루먼만이 우리를 볼 수 있으니까 저수지를 바라보는 트루먼이 점차 우리를 바라보게 될 때
암전 총소리 개의 신음
무대 위에 트루먼 트루먼을 관통한 트루먼 사라진 어둠을 끌어안은 채 쓰러지는 것
아직 박수가 끝나지 않았는데 너는 등 뒤에 구겨둔 외투를 꺼내 입는다
너를 이곳에 데려오고 싶었는데 너는 알았다고 다음엔 더 좋은 곳을 가자고 말한다
극장을 빠져나와 우린 밝은 무대 위를 걷는다
― 시집 『웃긴 게 뭔지 아세요』 (창비, 2024)
* 한재범 시인 2000년 광주에서 출생. 안양예술고 졸업.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2019년 창비신인시인상 등단 시집 『웃긴 게 뭔지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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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시의 출현은 새로운 의구심의 출현을 뜻한다. 그동안의 언어와 인식에 낯선 시선을 들여오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한재범 시인의 행보는 눈에 띈다. 그의 시에서 의구심이 두드러진 부분은 무엇보다 자아에 대한 진술이다. 그는 시인, 화자, 자아가 중첩되거나 일치되는 시들에서 엿볼 수 있는 이 세 항의 결합을 의심한다. 특히 화자와 자아가 정교하게 거리를 두게 한다. 이를 통해 화자는 자아를 숨기지 않고 노출시키며 자아의 절대적 위상을 끌어내린다. “나는 꽤 자연스럽다” “나는 꽤 깃발 같다”(「레디믹스트콘크리트」), “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를 보았다”(「코끼리 코에 달린 코끼리」), “밖에서 나는 나의 역할을 맡는다”(「직물과 작물」)와 같은 발화에서 화자는 자아와 무관한 어투로 자아를 드러내고 구경한다. 자아를 상대화하고 자아 주변에서 분출되던 그동안의 감정의 지배에서 벗어난다. 이를 ‘삼인칭 자아’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삼인칭 자아는 일인칭 자아의 위압에 대한 의구심이며 새로운 반응이다. 그것은 주체가 아니라 대상화된 존재일 뿐이다. 그리하여 이제 세계 내에서 삼인칭이 되어버린 “나는 흔한 풍경이다”(「너무 많은 나무」). 우리의 자아의 현주소가 여기 있다.
- 이수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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