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래저래 자료를 뒤적이다 너무나 감동적이고
시사하는 바가 큰 여성에 관한 글 세편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가슴이 몽클해 지드군요
요사이 같이 어렵고 각박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가
용기를 복돋우고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글을 접하면
자연스레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아 이 글들을 올립니다
모두 세편입니다
다소 지루하드래도 끝까지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2009.1.17 유 강-
상처입은 조개가 진주를 만든다
전세계 여성들의 선망의 표적 코코 샤넬의 슬픈 기억를아십니까?
소녀의 첫 사랑을 바쳐 사랑했던 한 남자는 가을 아침의 안개처럼 떠나버리고 홀로 딸아이를 키우던 그녀에게 찾아온 첫번 째 시련은 아이의 병이었습니다.
몽빠르나스 뒷 거리 어느 이름없는 양재점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던 그녀에게 아이의 치료비가 없었습니다.
곧 죽을것만 같은 아이를 바라보던 그녀는 일생에 단 한번 몸을 팔았습니다. 인적이 드문 파리의 밤거리로 나와 지나가는 사내에게 "나를 사세요" 라고 구걸했고 그 돈으로 아기를 살렸습니다
그 수치와 세상에 대한 분노를 가슴에 안고 "나 기어이 성공하리라." 고 하늘에 맹세를 하였습니다.
그녀는 그 노여움 위에 자신의 꿈을 쌓아 패션과 향장에서 전세계 톱클래스의 사업을 일굽니다.
"전설의 향수 샤넬 넘버5"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클래식 패션룩을 창시함으로써 그녀는 죽어서도 살아 있는 신화를 일구었습니다.
고통스런 상황, 힘에 겨워 울고 싶은 상황이 없다면 성취욕이 생길수 없을 겁니다.
두구든 힘든 고비를
성공한 사람은 없습니다 .고난과 역경은 성공의 필수조건일 것입니다.
미 백악관 정책차관보 강영우 박사의 아내 석은옥씨의 고백
한국 최초 시각장애인 박사이자, 미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 강영우 박사.
그의 뒤에는 한평생 그의 지팡이가 되어준 아내 석은옥씨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있었다.
석은옥씨가 직접 말하는 감동 인생.
최고 엘리트였던 내가 앞 못보는 남자와 결혼,
성공을 위해 헌신해온 감동 인생 사연”
이제 우리 부부는 인생 육십을 넘겼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나의 인생을 뒤바꾼 한 맹인 소년과의 만남!
그 후 자원봉사자로 1년, 누나로 6년, 약혼녀로 3년, 그리고 아내로 34년을 그의 그림자가 되어 살아왔다.
처음엔 고개를 젓던 사람들도 이젠 이구동성으로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그 찬사 뒤에는 우리 부부의 눈물과 고통 그리고 처절한 노력이 있었다.
강영우 박사와의 운명적 만남 우리의 만남은 어쩌면 숙명적이었다
그가 평생 단 한 번 걸스카우트를 방문한 그때, 나는 걸스카우트 신입회원으로 그를 돕는 프로그램에 동참하게 되었다. 아마 그때 하느님께서 내게, 저 불쌍하고 초라해 보이는 맹인 중학생이 10년 후 나의 신랑이
사실을 미리 알려주셨다면 나는 그데로 도망쳤을 것이다.
그때 그는 맹학교 중등부 1학년생이었고, 나는 여대생이었다. 가난과 실명의 고통에 찌든 모습을 상상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학생은 외모만 봐서는 전혀 맹인 같지 않았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그 학생만 힐금힐금 쳐다보았다. 누군가 그를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오라고 했을 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내가 다녀오겠다”며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 학생의 손을 덥석 잡고 광화문 사거리로 나섰다.
그때 처음으로 “숙대 영문과 1학년 석은옥이에요”라며 나를 소개했다.
그 순간부터 나는 그의 지팡이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는 열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중학교 1학년 때인 열다섯 살 때 축구를 하다가 공에 눈이 맞아 실명했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실명 때문에 충격을 받아 뇌일혈로 세상을 뜨자 고아가 된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장애인 재활원! 으로, 여동생은 고아원으로, 남동생은 철물점으로.
재활원을 전전하며 남편은 수년간 방황했다. 자살도 여러 차례 기도했다.
그러나 어느 목사님의 도움을 받은 뒤 “갖지 못한 한 가지를 불평하기보다 가진 열 가지를 감사하자”며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처음 만날 때는 완전히 시력을 잃은 게 아니어서 남편은 어렴풋이나마 내 젊은 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불빛조차도 구별할 수 없는 완전 맹인이다. 그때부터 주말이면 맹학교 기숙사에 찾아가 책도 읽어주고 안내도 해주는 일을 1년 정도 봉사하다 보니 정이 들어, 그를 동생으로 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남독녀 외동딸로 동생이 하나 있었으면 했는데, 잘됐다 싶어 그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당시 나는 그가 투병과 방황으로 여러 해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는 것을 몰랐다. 그저 대학생과 중학생이라는 것만 생각해 부담 없이 그의 누나가 되겠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2년 정도 지나 그의 성적표에 있는 생년월일을 보고 한 살 반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양친이 안 계신 동생이 생기니 누나로서 할 일이 정말 많았다. 학교에서 소풍을 갈 때면 도시락을 싸들고 따라가야 했고 빨래, 장보기부터 대학 진학 준비에 이르기까지 온갖 뒷바라지를 해야 했지만, 동생을 도와준다는 것 자체가 내게 기쁨이었다
누나 동생으로 6년, 우리는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을 했다. 물론 아가페사랑이다.
당시엔 맹인에 대한 편견이 심했다. 맹인이 버스를 타려고 하면 차장이 밀어내기 일쑤고, 가게에서는 재수가 없다며 오후에 오라 하고, 식당에서는 구석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주위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 그와 만난 지 5 년째 되던 해, 그동안 혼자만 생각해온 유학 계획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나와 헤어지는 것이 싫었는지, 그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며 반대했다. 나는 좀 당혹스러웠지만, 차분히 그를 설득했다. 결혼을 해서도 시각장애인 교육과 재활을 천직으로 알고 계속할 텐데 더 늦기 전에 유학을 다녀와야겠다는 말에 결국 그도 동의했다.
나는 1967년 9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동안 정이 든 그와의 이별은 큰 아픔이었다. 게다가 처음으로 가보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겹쳤다. 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누나를 보내고 혼자 힘으로 다가오는 대입을 준비해야 하는 부담과 불안이 겹쳐 이별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내가 떠난 뒤 동생 영우는 마음을 독하게 고쳐먹고 대학 입시에 전념했다. 그리고 1968년 연세대 문과대 교육학과에 입학 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맹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원서 자체를 접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입학원서조차 낼 수 없다니,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미국 땅에서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런데 4주 정도 지나 또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영문과 교수 한 분이 대필 해 주어
입학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교육과에 10등으로 합격했다는 것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감격과 감사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1968년 3월, 서울맹학교 고등부에서 연세대에 입학해 그동안 박박 깎은 머리를 기른 채 교복 대신 신사복을 입고 찍은 사진도
보내주었다.
정상인들과 같이 공부하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는데 첫 학기부터 장학생이 되었다는 편지가 날아왔다. 나는 15개월 만에 귀국했다.
그동안의 이별은 우리 두 사람의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더 이상 누나 동생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1968년 12월 22일, 학기말 시험을 마치고 함께 연세대 백양로를 걷던 중 영우가 내게 사랑을 고백했다. 나도 그를 무척 좋아한 데다 남은 생을 시각장애인 교육에 헌신하려고
준비해왔는데 그를 반려자로 맞으면 남편에게 맹인 동생을 이해해달라고
할 필요도 없으니 잘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영우의 사랑을 받아주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장래를 약속한 우리 두 사람은 너무나 행복했다. 우리 두 사람은 비밀리에 약혼식을 올렸다. 무남독녀 외동딸을 둔 홀어머니가 애지중지 기른 딸을 맹인에게 준다는 것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절대로 안 된다!”며 반대하셨지만 결국 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친구들은 더 심했다. 어떤 친구는 다시 한 번 내 얼굴을 쳐다보며 “관상을 보면 팔자가 그렇게 센 것 같지는 않은데 하느님이 해도 너무하셨다.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학벌이 좋으면 뭐하니? 너는 좋아서 결혼한다 해도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식들을 생각해봐. 아버지가 장님인데” 하고 말렸다.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2년 2월 26일, 대학생이던 약혼자를 졸업하기까지 만 3년이나 기다린 끝에 드디어 나이 서른이 다 되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난 다른 친구들에 비해 결혼이 늦은 편이었고, 모두 판사, 의사, 약사, 대기업 간부의 부인이 되어 있을 때 연하인 맹인 학사를 신랑으로 맞은 것이다. 그래도 어찌나 행복하고 감격스러웠는지,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아 하객들의 놀림을 받을 정도였다.
맹인 아내로서 내가 겪은 고통 1972년 8월, 우리 부부는 가슴에 큰 뜻을 품고 la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에는 장애가 해외유학의 결격사유에 속했다.
그 항목을 삭제하고 한국 장애인 최초 정규 유학생이 될 때까지 수년 동안
겪은 마음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결국 피츠버그대학교 9월 학기 개강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한미재단총재와 연세대 총장이 공동으로 제안한 청원서에 문교부장관이
서명함으로써 미국 유학의 가장 큰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la에 도착해 여러 해 동안 그의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신
양부모님을 만나 일주일을 보내고 피츠버그에는 개강 전날 도착했다
당시 나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다. 서울을 떠나기 직전까지 맹인재활센터에서 일했고, 입덧도 심했다. 그러나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돕지 않으면 강의실에도 갈 수 없어
편하게 쉴 수도 없었다.
하루는 남편을 강의실에 들여보낸 뒤 도서관에서 책을 녹음하다
깜빡 잠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강의가 끝난 지 30분 이상
온 힘을 다해 강의실로 뛰어가 보니 그는 불안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보!” 하고 부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디 갔다가 이제 왔느냐며 화를 버럭 냈다. 나는 미안하기도 했지만, 항상 잘하다가 한 번 실수했는데 그것도 이해하지 못하나 싶어 섭섭한 마음에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미국에 와서 처음 한 부부싸움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남편은 보행훈련을 받았다. 아기가 태어나면 혼자 강의를 받으러 다녀야 하는데 엄두를 못 내고 미루던
차에 결단의 기회가 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보행훈련을 받아도 자주 다니지 않은 곳이나 생소한 지역을
갈 때는 여전히 정안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보행훈련을 받아 나에 대한 의존도가 다소 줄어들 기는 했지만, 여전히 나는 그를 안내해주어야 했다.
어린 두 아들을 남에게 맡긴 채 남편의 대학원 강의실을 향해 떠날 때, 아이들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남편의 강의가 먼저였다.
맹인 아빠에게 젖먹이 아기를 맡기고 도서관에 자료 심부름을 갈 때면 혹시 불이라도 날까 불안했지만 그의 눈이 되고 지팡이가 되는것이 먼저였다.
몸이 아플 겨를도 없이 매일 동분서주하는 고달프고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 후 새로운 위기가 찾아왔다. 수업료는 문제가 없었는데, 생활비로 나오던 장학금이 만료된 것이다.
닥치는 대로 막일이라도 해서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에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병원 청소원으로 겨우 취업이 되었는데 이민국에서 노동 허가가 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고민하던 어느 날, 캠퍼스 근처 공원에서 그네를 타는 한 맹인
여성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남편과 함께 다가가 한국에서 유학 온 맹인 학생이라고 소개하면서
말을 걸었다. 그랬더니 그네를 밀어주던 남자가 자신이 남편이라고 했다. 과부가 과부사정을 안다고, 우리 사정을 이해할 것 같아서 초면에 우리 형편을 털어놓았다.
그 부부는 우리에게 자기 집 3층을 내줄 테니 와서 함께 지내자고 했다. 대신 식사 후 설거지를 해주고, 두 내외가 외출할 때 어린 두 자녀를
돌봐달라고 했다.
남편이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가족의 생계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아, 생각할 것도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집에 살면서 매일 설거지하고 아이들을 돌봐주는 일을 하면서
행복하기만 했다.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머지않아 박사가 될
남편을 내조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했기 때문이다.
행복은 주관 적인 느낌이라고 생각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남의 식모살이나 하는 처지가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가 오히려 아파트에 살 때보다 더 행복했다. 우리와 처지도 같고 동년배라 아주 좋은 친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 문화를 배우는 계기도 되었다. 또 두 살 된 진석이도 네 살, 다섯 살이던 그 집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때 둘째 아이 진영이가 생겨 더욱 감사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고통 속에서도 절대 좌절하거나 울지 않았다”
나는 남편이 맹인이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우리 내외는 출세지향적이 아닌, 성취지향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 맹인이기 때문에 넘어야 할 물리적, 심리적, 법적, 제도적 장벽을 넘을
때마다 오히려 성취감을 느꼈다
또 쾌락보다는 보람을 추구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극복할 때마다 승리감과 보람을 느끼며 감사할 수 있었다.
1976년 4월 25일, 남편이 드디어 피츠버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 당국의 배려로 박사복을 입은 남편을 총장 앞으로 안내하면서 느낀 보람과 행복이란….
“마음껏 사랑하고 즐긴 것은 결코 잊히지 않으며, 자신의 일부분으로 남게 된다”는 헬렌 켈러의 말이 생각났다.
물론 아무나 맹인의 아내가 되어 어려운 내조를 하면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지팡이가 되어, 때로는 희생을 요하는 힘겨운 내조를
할 때도 그 일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성취를 나의 성취로, 그의 성공을 나의 성공으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비록 학사복을 입었지만, 남편이 받은 박사학위가 나 자신의 성취인 것처럼 느껴져 더 행복했다.
어려움이 닥치고 고난이 겹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도 고대하던 박사학위를 받고도 남편은 고국에 돌아가 대학 강단에 설 기회를 얻지 못해 무직자로 8개월을 보내기도 했다.
맹인이 어떻게 눈뜬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을 가르치고 논문지도를 할 수 있겠느냐며, 어디에서도 남편을 채용하지 않았다.
무직자인 박사 남편, 아직 어린 진석이, 갓 태어난 진영이,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식구가 당장 길거리에 나앉을 형편이었다.
장학금으로 지급되던 생활비가 졸업과 동시에 끊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졸업과 동시에 만료된 유학생비자를 다시 살리기 위해 남편이 포스트 닥터럴 프로그램에 들어갈 때의 일이다. 오도가도 못하고 막다른 골목에 배수진을 친 남편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알기에 나는 오히려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현재의 고난을 성공의 조건으로
바꿔주실 테니 인내하며 좀더 기다려봐요.
부디 아무 걱정 말고 연구에 몰두하고 직장 찾는 노력이나 계속하세요.” 지금도 남편은 당시 자신의 고통을 함께하면서 그러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줄 때가 가장 고마웠다고 말한다.
하루는 나의 격려가 통했는지 남편이 면접을 다녀오더니 취직이 되었다고
했다. 기적이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면접을 보았지만 번번이 영주권이 없어 채용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일단 학생비자로 취직이 된 것이다.
남편은 인디애나 주정부 교육부에 근무하게 되었다. 1월 3일 첫 출근을 하게 되어 서둘러 인디애나로 이사를 가야 했다. 인디애나에 도착해 남편의 첫 출근과 함께 나는 운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벌써 30년이 흘렀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그동안 무사고 운전으로 남편을 도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남편은 인디애나 주정부 교육청에 근무하면서, 저녁에는 노스이스턴 일리노이대 대학원에 출강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로터리 클럽 회원으로 매주 주회에 참석하는 것을 비롯해 왕성한 사회활동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운전사 역할을 해야만 했다.
어쩌다 병이라도 나서 내가 누워버리면 일상생활의 리듬이 깨질 텐데, 다행히도 그런 기억은 없다. 아마도 내조하는 기쁨과 학생들을 가르치며
느끼는 보람이 엔도르핀을 나오게 하지 않았나 싶다.
나는 그대의 지팡이, 그대는 나의 등대
남편이 인디애나에서 직장생활을 한 지 2년 가까이 되던 1987년 9월, 유학을 떠난 지 6년 만에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때 한국 언론은 ‘우리나라 최초 장님 박사 탄생’, ‘한국 최초 맹인 박사
금의환향’ 등의 제목으로 남편의 귀국을 대서특필했다.
그때 그 기사를 본 연세대 윤형섭 교수가 <조선일보>에 평균점수’라는
제하의 칼럼을 썼다.
내용인즉슨, 앞 못 보는 장님이 박사가 되었다기에 기사를 읽어보니 그 뒤에는 남편의 유학 뒷바라지를 하며 석사학위 교사까지 된 부인의
희생적인 사랑과 내조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으며,
이는 한국 여성의 평균 점수를 올려주었다는 것이다.
1983년 6월 5일은 남편이 최초로 국제무대에 등단한 날이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국제 로터리 세계대회에서 그가 연설을 한 것이다. 23년이 지난 오늘도 나는 그때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1만6000명의 세계 민간 지도자가 모인 단상으로 남편을 안내하는데, 연설자도 아닌 내가 극도로 긴장해 떨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는 수많은 군중의 시선을 볼 수 없어서인지, 그다지 긴장하지 않고
연설했다. 그리고 남편은 열광적인 기립박수를 받았다.
미국 연방정부 공무원은 450만 명에 달한다. 그중 2500명이 대통령의 임명을 받으며, 그중 500명은 상원 인준까지 받아 이름 앞에 ‘honorable’이 붙는다.
먼 이국땅에 유학 와서 이민자로 정착한 지 사반세기 만에 남편은
‘honorable’이라는 경칭이 붙는 연방정부 최고 공직자가 되었다.
대통령 직속 국가 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의 지팡이가 되어 부시 대통령 앞으로 그를 안내할 때 느낀 감회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불쌍한 맹인 중학생을 안내하기 시작한 지 40년, 이젠 명예로운 자리에 서게 되는 자랑스러운 남편을 안내하면서 느끼는 감회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렇게 우리 부부는 서로의 강점으로 약점을 보완하는 하나의 팀으로서
아메리칸드림을 이루게 되었다.
1972년 신혼부부로 미국 땅에 도착할 때 태중에 있던 진석이는 링컨 대통령의 장남 로버트 토드와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 하버드대
동문이 되었다. 그리고 안과의사의 꿈을 이루어 듀크대학병원에 근무 중이며, 산부인과
의사인 아내를 맞았다.
작은아들 진영이는 필립스 앤도버 아카데미 출신으로 부시 대통령 부자와
동문이다. 약관 27세의 나이로 연방 상원 법사위원회에서 리처드 더빈
상원의원 입법 활동을 보좌하는 고문변호사이며, 아내 역시 하버드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그리고 나는 이처럼 이민자로 미국 땅에 와서 교육자의 꿈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교육인명사전, 미국여성명사인명사전에 올라 역사 속에 작은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지난 2003년 5월 29일, 내 생일에 아들 며느리가 한자리에 모였다. 케이크를 앞에 두고 축하 노래를 부르려는 순간 남편이 말했다. “아들, 며느리 네 명의 박사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니 당신 정말 행복하겠소.”
진영이가 웃으며 덧붙였다. “네 명이 아니라 다섯 명이잖아요.” 그렇다. 한집에 다섯 명의 박사가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지팡이가 되어 헌신적인 아내로, 두 아들을 잘 키워
훌륭한 며느리들까지 본 어머니로 살아온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이처럼 선명한 비전으로 내 인생을 인도해 신앙 안에서 명문가를 만드는
동반자가 되어준 남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대애게 소중한 사람이고 싶습니다 -
안녕하세요 33살먹은 주부에요..
32살때 시집와서 남편이랑 분가해서 살았구요
남편이 어머님 돌아가시고 혼자계신 아버님 모시자고 이야기를 하더군요..
어느 누가 좋다고 할 수있겠어요..
그일로 남편이랑 많이 싸웠어요..
위에 형님도 있으신데 왜 우리가 모시냐고..
아주버님이 대기업 다니셔서 형편이 정말 좋아요...
그일로 남편과 싸우고 볶고 거의 매일을 싸웠어요..
하루는 남편이 술먹고 울면서 말을 하더군요...
뭐든 다른거는 하자는 데로 다할테니까 제발 이번만은 부탁좀 들어달라구..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남편이 어릴적 엄청 개구쟁이였데요..
매일 사고치고 다니고 해서 아버님께서 매번 뒷수습하러 다니셨다고 하더라구요..
남편이 어릴 때 골목에서 놀고있는데 지나가던 트럭에( 큰거 말고 중간크기요)받힐뻔 한걸
아버님이 보시고 남편 대신 부딪히셨는데 그것 때문에 지금도 오른쪽 어깨를 잘못 쓰신데요..
그리고 아버님 하시던 일이 노가다 였는데
남편이 군제대하고도 26살때쯤 까지 놀고 먹었더랍니다..
아버님이 남편을 늦게 낳으셔서 지금 아버님 연세가 68세 되세요..남편은 33살이구요..
60세 넘으셨을 때도 노가다 (막노동) 하시면서 가족들 먹여 살리고 고생만 하셨다네요...
노가다를 오래하면 시멘트 독이라고 하나...하여튼 그거 때문에 손도 쩍쩍 갈라지셔서
겨울만 되면 많이 아파하신다고 하더라구요..
평생 모아오신 재산으로 마련하셨던 조그만한 집도 아주버님이랑 남편
결혼할 때 집 장만해주신다고 팔으시고 지금 전세사신다고 하구요...
그런데 어머님까지 돌아가시고 혼자 계신거 보니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자주 난다고 하더라구요...
저희요..전 살림하고 남편 혼자 버는데 한달에 150정도 벌어와요..
근데 그걸로 아버님 오시면 아무래도 반찬도 신경써야 하고 여러가지로 힘들거 같더라구요..
그때 임신도 해서 애가 3개월인데...
형님은 절대 못 모신다고 못박으셨고 아주버님도 그럴 생각이 없다라고
남편이 말을 하더라구요..
어떡합니까..저렇게 까지 남편이 말하는데...
그래서 넉달전 부터 모시기로 하고 아버님 모셔왔습니다..
첨에 아버님 오지않으시려고 자꾸 거절하시더라구요..
늙은이 가봐야 짐만 되고 눈치보인다면서요..
남편이 우겨서 모셔왔습니다..
모셔온 첫날부터 여러모로 정말 신경이 쓰이더라구요...
그런데 우리아버님...
매번 반찬 신경써서 정성껏 차려드리면...
그걸 드시면서도 엄청 미안해 하십니다...
가끔씩 고기반찬이나 맛있는거 해드리면 안먹고 두셨다가 남편오면 먹이더라구요...
그리고 저 먹으라고 일부러 드시지도 않구요..
거기다가 하루는 장보고 집에 왔는데 걸레질을 하고 있으신거 보고 놀라서
걸레 뺐으려고 했더니 괜찮다고 하시면서 끝까지 다 청소하시더라구요..
그리고 식사하시면 바로 들고 가셔서 설겆이도 하십니다...
아버님께 하지 말라고 몇번 말씀드리고 뺏어도 보지만 그게 편하시답니다..아버님은...
제가 왜 모르겠어요...이 못난 며느리 눈치보이시니 그렇게 행동하시는거 압니다..저도...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픕니다...
남편이 몰래 아버님 용돈을 드려도 그거 안쓰고 모아두었다가 제 용돈하라고 주십니다...
어제는 정말 슬퍼서 펑펑 울었어요...
아버님께 죄인이라도 된 듯해서 눈물이 왈칵 나오는데 참을 수가 없더라구요...
한달전쯤 부터 아버님께서 아침에 나가시면 저녁 때쯤 들어오시더라구요..
어디 놀러라도 가시는거 같아서 용돈을 드려도 받으시지도 않고
웃으면서 다녀올게 하시면서 매일 나가셨습니다..
어제 아래층 주인아주머니께서 말씀하시더라구요..
"오다가 이집 할아버지 봤는데 유모차에 박스 실어서 가던데~
이말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네..그래요..아버님 아들집에 살면서 돈한푼 못버시는게 마음에 걸리셨는지
불편한 몸 이끌고 하루하루 그렇게 박스 주우시면서 돈버셨더라구요..
그 이야기 듣고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아버님 찾으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녀도 안 보이시더라구요... 너무 죄송해서 엉엉 울었습니다...
남편한테 전화해서 상황 말하니 남편도 아무 말이 없더군요..
저녁 5시조금 넘어서 남편이 평소보다 일찍 들어왔어요..
남편도 마음이 정말 안 좋은지 아버님 찾으러 나간다고 하곤 바로 나갔어요...
제가 바보였어요..진작 알았어야 하는데..
며칠전부터 아버님께서 저 먹으라고 봉지에 들려주시던 과일과 과자들이
아버님께서 어떻게 일해서 사오신 것인지를...
못난 며느리 눈치 안보셔도 되는데 그게 불편하셨던지 아들집 오셔서도 편하게 못 지내시고
눈치만 보시다가 불편하신 몸 이끌고 그렇게 일하고 있으셨다니...
친정에 우리 아빠도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신 아빠 생각도 나고 해서 한참을 펑펑 울었습니다...
우리 아빠도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그날따라 아버님 웃으실 때 얼굴에 많은 주름과 손목에서 갈라진 피부가 자꾸 생각나면서
너무 죄송해서 남편이 아버님이랑 들어올 때까지 엉엉 울고있었습니다..
남편 나가고 한시간 좀 넘어서 남편이 아버님이랑 들어오더라구요...
아버님 오시면서도 제 눈치 보시면서 뒤에 끌고오던 유모차를 숨기시는 모습이
왜 그리 마음이 아플까요...오히려 죄송해야 할 건 저인데요...
왜 그렇게 아버님의 그런 모습이 가슴에 남아서 지금도 이렇게 마음이 아플까요...
달려가서 아버님께 죄송하다며 손꼭잡고 또 엉엉 울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매일 나때문에 내가 미안하다면서
제 얼굴을 보면서 말씀하시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
아버님 손 첨 만져봤지만요...
심하게 갈라지신 손등과 굳은살 배인 손에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방안에 모시고 가서도 죄송하다며 그렇게 펑펑 울었습니다...
아버님 식사 챙겨드리려고 부엌에 와서도 눈물이 왜그리 그치지 않던지...
남편이 아버님께 그런 일 하지 말라고..
제가 더 열심히 일해서 벌면 되니까
그런 일 하지 말라고 아버님께 확답을 받아낸 후 세명 모여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밥 먹는데도 아버님 손을 보면서 자꾸 가슴이 아프더라구요...
오늘 남편이 노는 날이라 아버님 모시고 시내 나가서
날이 좀 쌀쌀해져서 아버님 잠바 하나랑 신발을 샀습니다..
한사코 괜찮다고 하시던 아버님께 제가 말씀드렸어요..
"자꾸 그러시면 제가 아버님 눈치보여서 힘들어요!!"
이렇게 말씀드렸더니 고맙다고 하시며서 받으시더라구요..
그리고 집에 아버님 심심하실까봐 케이블TV도 신청했구요...
아버님께서 스포츠를 좋아하시는데
오늘 야구방송이랑 낚시 방송보시면서 너무 즐거워 하시더라구요...
조용히 다가가서 아버님 어깨를 만져드리는데...
보기보다 정말 왜소하시더라구요...
제가 꽉잡아도 부서질것 만 같은 그런 아버님의 어깨...
지금까지 고생만 하시고..
자식들 뒷바라지 하시느라 평생 헌신하시며서 살아오셨던 아버님의 그런 자취들이
느껴지면서 마음이 또 아팠네요..
남편한테 말했어요.. 저 평생 아버님 정말 친아버지처럼 생각하고 모신다구요...
비록 지금은 아버님께서 불편해 하시지만..
언젠가는 친딸처럼 생각하시면서 대해 주실 때까지 정말 잘할거라구요..
마지막으로 아버님...
저 눈치 안보셔도 되요...제가 그렇게 나쁜 며느리 아니잖아요 ㅠㅠ
아버님의 힘드신 희생이 없으셨다면 지금의 남편도 없잖아요..
그랬다면 지금의 저와 뱃속의 사랑스러운 손자도 없을거에요..
저 아버님 싫어하지 않고 정말 사랑해요 아버님...
그러니 항상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셔야되요..
그리고 두번다시 그렇게 일 안하셔도되요.. .저 허리띠 쫄라매고 알뜰하게 살께요...
사랑해요 아버님~~^^
-모두애게 소중한 사람이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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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가슴이 뭉클해지네요...그렇게 하시면 우리네 자식들도 부모에게 잘할겁니다...복받으실 거에요...
너무나 잘 읽었습니다. 가슴이 넘 아프네요. 눈물이 저절로 나오고,.부모님을 다시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