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칼립투스가 그려진 침대
박은정
침대 위에 잠들어 있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유기견처럼
둥글게 몸을 만 채 작은 입을 내밀어
무언가 웅얼거리는
잠결에 뒤척이는 목소리가 고해처럼 들린다면
나는 살아 있는 헛것이 될까 무서워
기억 속에서도 돌이킬 수 없는
꿈속에서 너는 무엇을 쓰고 지우는 중일까
무의식의 몽타주 속에는 여러 개의 출입문이 보인다
문을 열려고 다가가면 사라지고 마는
하나를 쓰면 둘을 복기하면서
우리는 그곳에서 함께 살아간다
한 손에는 계피 향이 나는 검은 열매를 쥐고
사소한 걱정 따위도 없이 환하게
―이건 먹을 수 있는 거야?
―나도 처음 보는 열매인데······
―그럼 내가 먹어 보고 말해 줄게
―목숨을 걸고 싶을 만큼 먹고 싶은 건가?
―우연에 목숨을 맡기는 거지. 독이 든 열매면 다행이고, 독이 든 열매가 아니라면 목숨이 하나 더 생기는 거야.
누가 이런 꿈을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수학 공식처럼 딱 떨어지지만
매번 틀리고 마는 문제처럼
그러니까 이곳은 협소한데 너무 길지 않은가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
나는 너를 바라보고 있다 창밖에는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다 밤으로 달아나는
살쾡이들, 숨이 차오를수록 이곳은 과장된 현실만 같고
여분의 잎사귀가 침대를 채울수록
두 눈을 빛내는 우리라니
잠든 얼굴에는 너무 많은 진실이
흘러넘칠 것 같은 목소리가 살아 움직여서
소파에도 책상에도 침대에도
검은 열매들이 모서리마다 열리고
우리는 애벌레처럼 엎드려 목숨을 나눠 먹는다
이미 서로를 삼켜 버린 곳에서
어떻게 달아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수천 개의 목숨을 걸어도
남는 게 없는 인생이라면
날이 밝기 전에
너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맑게 갠 표정으로 두 눈을 뜨고
내 얼굴을 처음 본다는 듯
두 눈을 끔벅이다 옷을 챙겨 입는다
텅 빈 침대 시트에는 물기 어린 잎사귀
거실에는 네가 흘리고 간 사각거림이 있어
간밤의 이상한 서사에는 잎사귀 ― 돋아나는 유칼립투스
네 몸에서 나던 오랜 연못 냄새가
초록의 흔적만 남은 곳
이 시간이 실제인지 기억의 오류인지 가려보는 일
그것은 남은 사람에겐 손끝이 아려 오도록
자신의 강박을 반복하는 일일 테지만
―너의 목숨이 하나 더 생겨서 기뻐.
나는 둥글게 몸을 말고
지난한 일상처럼 문을 찾는다
차가운 발이 내가 닿는 곳마다
축축하게 젖어든다
유칼립투스가 피어나는 침대 위
너를 따라 검은 열매를 깨물다 잠이 깨면
혀끝에 배인 연못의 빛깔
그 연못에는 수많은 너의 전생들
밤마다 처음처럼 태어나고
- 시집 『아사코의 거짓말』 2024.2
박은정
부산 출생. 2011년 《시인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 『밤과 꿈의 뉘앙스』 『아사코의 거짓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