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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城隍) : 최초의 공인 교육기관(?)
단지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좀 큰 나무는 보았으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돌이 쌓여있지도 않았고 천이 감겨있지도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마저 새마을운동의 여파로 잘려나가고 마을 공터가 되었던 것 같은 기억입니다.
성황당을 혼자서 본 것은 마흔이 넘어서 집 뒤산길을 산책하다 골프장 경계철망 옆에 있던 문이 잠긴 성황당이었습니다. 햇볕은 따스하게 내리쬐는데도 불구하고, 성황당 옆을 홀로 지나가자니 괜히 움찔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움찔하는 기분은 성황당을 본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였을까요? 아니면 딱히 의식하지는 않았으나 어릴적 들었던 당집 혹은 서낭당에 대한 미신이라는 부정적 평가에 대한 반응이었을까요?
어릴 적
서낭당 옆에만 지나가도
오금이 저리고
왜 그리 무서운지
하늘에 닿도록
하늘 향해 금줄처럼 매단
오색 천 조각들
무슨 답변이라도 내리는 듯
알록달록 흔들어 댄다[1]
<성황당나무>라는 시인데, 시작이 성황당나무에 대한 어릴 때의 두려움으로 시작됩니다. 시인이 어렸을 때의 가졌던 두려움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요?
내가 마흔넘어서 산속에서 홀로 처음 성황당을 보았을 때의 움찔했던 것처럼,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요? 시인이 매일 매일 왕래하면서 보았을 서낭당 나무가 낯설어서 두려울 것이다라는 것은 전제가 틀린 것으로 보여집니다.
낯설어서 공포가 생겼다는 그것이 아니라면 시인의 공포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서낭당에 깃들어져 있다고 믿어지는 신격 장소이기 때문이었을까요?
등산을 하다보면 사람들이 오가는 길에 하나씩 돌무더기를 쌓아 이루어진 돌탑을 봅니다. 그런 것들을 보았을 때 두려움이란 감정은 눈꼽만큼도 없었습니다. 이미 성인이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미 성인이기에 신격인 장소에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라는 것도 옳은 말은 아닌 듯 합니다.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유명한 사찰이나 교회나 관광지나 하다못해 서울지하철 2호선 잠실역 만남의 광장 분수대에서 본, 염원을 위한 동전들을 보았을 때, 아동이므로 신격장소에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라는 것은 썩 바른 견해는 아닌 듯 합니다.
그렇담 종교가 달라서 서낭당이 두려웠을까요? 딱히 그것도 답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이스라엘에 있다는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기독교나 유대교외의 다른 종교인들이 ‘통곡의 벽’을 보면서 두려움을 느낄까요?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성황[2] 편에 보면, 우리 민족이 성황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념 혹은 개념이 보여집니다.
“신수(神樹)에 잡석을 쌓아 놓은 돌무더기나 신수에 당집이 복합된 형태의 서낭당에 깃들어져 있다고 믿어지는 신격으로 성황(城隍)· 선왕 등으로도 불린다. 마을 수호신적 성격이 강하지만 경계신적 성격도 지니며, 성황제에 대한 문헌기록을 보면 전쟁수호신으로도 믿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서낭당은 요즘말로 치면 ‘기도나무’로 마을수호신의 성격을 가지는데, 그 마을 안에 있는 사람이 그 옆을 지나치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가진 간절한 염원을 위탁받는 존재인 서낭당나무인데, 두려움보다는 도리어 고마운 마음이 있지 않을까요?
그렇담 서낭당 나무 옆을 지나치는 것을 두려워하게 한 것이 무속(巫俗)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요? 위의 책 성황(城隍) 편에
“이능화(李能和)가 ≪조선무속고 朝鮮巫俗考≫에서 주장한 것으로, 성황은 성지(城池) 곧 성을 보호할 목적으로 성 주위에 도랑을 파서 물을 채우는 것으로 천자(天子)가 8가지 대제(大祭) 중 하나로 올리는 수용(水庸)이 북제(北齊)시대에 성읍의 수호신으로 신앙되었으며 송대(宋代)에는 천하에 두루 퍼졌는데, 이러한 성황신앙이 전래되어 우리 나라 곳곳의 서낭신앙을 있게 했다는 것이다.”
무속에서는 중국 전래설을 이야기하면서 성 주위에 해자를 파서 성을 보호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성안에 있는 이들에게 해자는 적을 방어하는 기능을 가졌으므로 고마운 것이 되는 것이지, 두려움의 것은 아닙니다. 서낭당 나무옆을 지날 때의 두려움도 무속 그 자체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그렇담 도대체 무엇이 어린 시인이 서낭당 나무를 지나칠 때 오금 저리게 했을까요? 마흔 넘은 나도 문 잠긴 성황당을 보았을 때 움찔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 두려움의 원인에 대해서 여러 차례 생각해보았습니다.
서낭당이 나보다 윗대의 문화였으니, 윗대의 어른께 성황당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마음먹으면서 성황당 문화에 익숙한 어머니와 이런 저런 세시풍속에 관한 대화 중에, 서낭당을 지나치는 어린 시인의 두려움에 대한 답을 나름 찾았습니다.
(나와 어머니와 30년의 차이, 어머니는 1938년생, 한국전쟁시 가족 중 손위오빠 2인이 사망 행불되면서 13세 무렵 기독교에 입문한 배경을 가지고 있음)
나 : 엄마, 외할머니가 새벽마다 정안수 떠놓고 빌었지요? 어머니 : 응, 새벽별이 비춘 물로 해야한다고 해서 새벽마다 샘에 가서 물을 길어서 그 물을 떠놓고 빌었지.
나 : 나중에 할머니도 교회다닌 이후부터는 정안수 떠놓고 비는 것 멈추었죠?
어머니 : 그랬지. 근데 정안수 떠놓고 빌던 시간에 교회다닌 이후로 새벽기도로 바뀌었지.
나 : 할머니가 빌 때 어땠었는지 아는 대로 말해주세요.
어머니 : 먼저 참빗으로 머리를 빗고 (할머니는 80년대 후반까지 쪽머리를 하였었다),
소금으로 양치하고, 샘에 가서 새벽별 비춘 물을 떠와서, 장독대에서 샘물 한그릇 떠 놓고 빌었지.
나 : 엄마는 정안수 떠놓고 빈 적 있어요? 어머니 : 한번도 없었지.
나 : 왜요?
어머니 : 교회다니기 전에는 어렸고, 교회다닌 이후에는 미신으로 생각되어서.
나 : 그럼, 할머니의 정안수 기도에 대해서 그 당시 어떻게 생각했어요? 어머니 : 직접 할머니에게 말은 안했어도 미신을 믿는 그 행위에 대해 싫어했어. 어리석은 일로 생각했지.
정안수 떠놓고 비는 그것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무시했어.
나 : 내가 십대 때 할머니집에 가서 자다가 보면 새벽 4시쯤 할머니가 일어나서 자손들을 위해서
하나님한테 기도하는 것을 자다가 들은 적이 있어. 어머니 : 그게 정안수 떠놓고 빌던 그 시간이야.
나 : 그럼 할머니 입장에서는 정안수기도가 (기독교계에서 말하는) 새벽기도로 바뀌었네.
(당시 할머니가 기독교를 받아들이던 시절, 그 교회가 목사가 없던 교회라서 교회당에서 모여서 하는 새벽기도는 없었음)
할머니는 새벽기도가 더 쉬웠겠네. 추운 겨울 같은 때에 새벽별 비친 우물물 안 떠와도 되었을 테니까!
어머니 : 그러네.
나 : 할머니는 정안수 떠놓고 누구에게 빌었어요?
어머니 : 그게 잘 모르겠는데…물어본 적이 없네. 새벽별비춘 물만 기억나네. 하늘에 빌었겠지 뭐.
나 : 할머니는 정안수 떠놓고 무엇을 빌었어요? 어머니 : 자식들 잘 되라고 빌었겠지..뭐.
나 : (속으로) 그럼 결국 엄마는 자식들 잘되라고 새벽마다 샘물 길러와 하늘에 빈 할머니를 미신이라고 무시하고 싫어했다는 결론이 되네.
나는 위의 대화에서 할머니가 가졌을 마음과 그 당시 어머니가 가졌을 마음을 생각해봅니다. 정안수 떠놓고 비는 그 행위와 마음에 대해서 60여년전 두분의 태도는 극명하게 달랐습니다. 무엇이 어머니와 딸을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그 시대라고요? 그 시대가 어땠는데요? 그 시대는 일제식민지를 거치면서 우리 민족의 풍속과 문화와 전통에 대해 자긍심 · 자부심 · 자존감이 이미 바닥에 떨어져있었을 것이고, 겉으로는 사상과 이념으로 인한 50년도 전쟁의 후유증으로 마음들이 공허했을 것이고, 기독교는 서구 문명으로 당시 가장 선진적인 문명으로 인식되었을 것이고, 기독교의 타종교와 신앙에 대한 배타성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모두가 위에 열거한 시대상이 개인들에게 적용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영향을 끼쳤다고는 생각됩니다.
당시에 어머니는 할머니의 정안수 기도에 대해서 미신 혹은 미개한 일, 기독교에 비해 저급한 신앙으로 여겼기 때문에 할머니의 행위나 신심이 불편하였다고 이야기합니다.
정안수에 대한 그런 불편한 어머니의 마음은 정안수기도를 대할 때 쭈빗거리게 만들고 낯설게 만들고 그런 마음들이 쌓이면 두려움을 가져온다고 생각됩니다.
거기에 더해 서낭당은 “새마을운동”이란 범정부 차원의, 민속을 미신으로 몰아 미개한 것으로 치부하여 타파해야 한다고 하는, 그 정신과 사회분위기가 어린 시인으로 하여금 서낭당을 지나칠 때마다 두렵게 했다고 추측합니다.
기독교의 모태인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통곡의 벽을 남겨 기도의 장소로 지금도 활용하고 있는데 반해, 드러난 식민과 드러나지 않은 식민의 생활에서 우리는 기도나무 - 서낭당을 시나브로 잃었습니다. 만년의 풍속이 100년이내에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왜곡된 것에 대한 회고는 이쯤하고, 이제는 맨 처음 성황이 무엇을 의미했는지에 대한 것을 찾아봅니다. 부도지의 몇 구절을 옮깁니다.
부도지 14장 전문 이에 황궁씨의 후예 6만이 (부도에) 이주하여 지키(게 하)고, 곧 나무를 베어 신부信符를 새긴 뗏목 8만을 만들어, 천지天池의 물에 흘려보내 사해의 여러 종족들을 초청하였다.
제족이 그 신부를 얻어 보고 차례로 모여들었다. 박달나무 숲에서 신시神市를 크게 열고, 계불로 마음을 깨끗이 하여 하늘의 모습을 살피고 마고의 계보를 정리하여 그 족속을 밝히고 천부天符의 음音에 준하여 그 말과 글을 정리하였다.
또 북극성北辰과 칠요七耀의 위치를 정하여 속죄의 희생물을 구워 넓고 평평한 돌 위에 올려놓고 제사를 드리고 모여서 노래하며 천웅天雄의 악樂을 울렸다. 종족들이 방장산 방호의 굴에서 칠보의 옥을 채굴하여 천부天符를 새겨 방장해인方丈海印이라 부르고, (그것으로) 칠란七難을 없애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매 십 년마다 반드시 신시를 여니, 이에 말과 글이 같아지고 천하가 하나로 통하니 세상에 큰 평화가 이루어졌다.
仍而(仍以)築城於海隅 奉奠天符 使駐留諸族 舘(館)而居之 爾來千年之間 城隍 遍滿於全域
잉이(잉이)축성어해우 봉전천부 사주류제족 관(관)이거지 이래천년지간 성황 편만어전역
인하여 바닷가에 성(황)城(隍)을 지어 천부 제사를 드리고 제족으로 하여금 머물러 집을 지어 살게 하니 그 뒤로 천 년 사이에 성황이 온 누리에 널리 퍼졌다.
부도지 12장 일부 천부의 이치를 밝히고(照證天符) 믿음을 새롭게(수신修信) 하여 해혹복본解惑復本을 맹세하고 부도符都의 건설을 약속하니, 이는 지역이 멀고 소식은 끊어져서 종족들의 언어와 풍속이 점차 변하여 서로 달라졌기 때문에, 함께 모여 서로 돕고 화합(會同協和)하는 자리에서 천부의 이치를 익혀 밝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부도지 13장 일부
임검씨가 돌아와 부도를 건설할 땅을 택하니 즉 동북의 자방磁方 (자석이 가르키는 방향)이었다. 밝은 산과 맑은 물이 만리에 뻗어 있고, 바다와 육지가 서로 통하여 십방十方으로 이어지니(갈리어 나가니), 즉 9, 1의 끝과 시작이 다함없는 곳이었다.
이것은 후일 모여 배우고 익히는 회강會講의 실마리가 되니, 사람들의 일이 번거롭고 바빠 익히지 않으면 (천부의 이치를) 잊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곧 태백산 밝은 땅 꼭대기에 천부단天符壇을 짓고 사방에 보단堡壇을 설치하였다. 보단의 사이는 각각 세 겹의 도랑으로 통하게 하였다. 도랑의 사이는 천리였으며, 도랑의 좌우에 각각 지키는 관문을 설치하여 지키게하였으니 이는 마고 본성에서 그 법을 취한 것이었다
성황城隍 은 일견 글자만 보면 성城, 해자隍 (성밖을 둘러싼 못)로 이루어진 단어입니다.
황 隍 = 堭, 墴 같이 사용됩니다.
강희자전은 堭에 대해 “《博雅》堂堭,合殿也。《左傳》《漢書》丛省作皇。又與隍通,城下池也。《子夏易傳》城復于堭。”
墴에 대해서는 ”古同 隍 《集韻》同堭。殿也,基也” 이라 합니다.
당황堂堭 은 ①신불(神佛)을 모시는 집. 전우(殿宇) ②크고 화려한 집. 당우(堂宇) ③어떤 분야에서 가장 권위있는 기관을 이르는 말[3] 이라고 정의합니다.
부도지 14장, 13장, 12장의 기록으로 미루어 성황은 천부제사도 드리고, 천부에 관한 교육도 행해지던 곳이라 사료됩니다. 당시의 사회가 제정일치 사회였으므로 천부에 관한 교육은 즉 그 당시 사회지도층의 양성을 겸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분야에서 가장 권위있는 기관을 이르는 말”이라는 당황堂堭 의 사전 정의가 의미있게 보여집니다.
제정일치사회가 무너지고 왕권강화를 위한 정치형태로의 변화는 성황의 기능에도 변화를 가져왔으리라 생각됩니다.

첫댓글 몰라서 묻습니다만
해자가 있는 성황은 사진으로도 보질 못했는데 한번 찾아 보겠습니다.
미신이라고 하는것에 대해 늘 반감을 지니고 있었는데..
제가 생각해도 치성을 드리는 곳은 신성한 곳인데..
왜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을까 하다가...
분명 외세의 영향이 있을 것이다..라고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어린시절 저는
상여를 보관하던 곳집과 혼동하고 때로는 동일시하여
무서워했던 기억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