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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카페 게시글
시 해석 및 시 맛있게 읽기 스크랩 피아노/ 전봉건
은하수 추천 0 조회 19 15.07.04 22: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피아노/ 전봉건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 시집 『꿈속의 뼈』(근역서제, 1980)

........................................................................

 

 생기발랄한 피아노 선율이 주는 감동을 생생하게 전하는 이 시는 음악 그 본연에서 길어 올린 청각적 심상보다는 건반 위의 현란한 손놀림에서 느끼는 공감각을 시각적으로 더 잘 표현한 시라는 느낌이 든다. 건반 위 손가락 율동에서 싱싱한 물고기의 퍼덕거림이 연상되고, 그 물고기는 곧장 바다를 떠올리게 하여 힘찬 파도의 모습으로 이미지가 전개되었다가 이윽고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 연상의 궤적은 대강 이러했을 것이다. 그랜드피아노 앞에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고, 건반을 두드리는 희고 긴 손가락이 퍼뜩 신선한 물고기로 보였던 것이다. 피아노 건반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은 강열한 햇살에 지느러미를 빛내며 펄펄 뛰는 수십 마리 물고기의 약동인양 현란하다. 피아노 선율의 청각적 이미지가 시각적 이미지인 물고기로 전이되었다. 그리고 물고기는 바다의 이미지로 확장되어 칼날 같은 시퍼런 파도로 출렁인다.

 

 형식미의 재간놀음이고 이미지의 공중잡이 같다는 느낌도 없지 않지만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거리가 그리 멀게 느껴지진 않는다. 모르긴 해도 전봉건 시인 자신도 그다지 음악에 조예가 깊은 처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선율에의 몰입 보다는 시각적 형상이 눈에 더 들어왔을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피아노를 통해 파도의 칼날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물아일체의 경지에 들지 않고는 불가능한 노릇이다.

 

 평소 돈 내고 클래식 음악공연장을 찾는 일은 좀처럼 드문 내가 적어도 1년에 한번은 객석에서 피아노 연주를 감상할 호사를 누린다. 리쳐드 용재오닐이 이끄는 실내악 앙상블 ‘디토’에서 피아노를 치는 조카 지용이 한국에 올 때마다 소속사 '크레디아'에서 제공하는 가족 티켓 덕분이다. 지난 6월 19일에도  LG아트센터에서 공연이 있었는데 다른 일도 있고해서 이번에는 서울까지 올라가진 못했다. 

 

 이번 공연은 이례적으로 무대에서 일렉트릭기타를 연주하는 멀티뮤지션 정재일, 더블베이스의 성민재 등과 함께 하는 슈베르트를 위한 콜라보레이션이라고 들었다. 지용은 몇 년 전에도 발레리나 강수진과 협업한 바 있고, 명동 등에서 게릴라 콘서트를 즐기기도 했으며, 줄리아드 선배이기도 한 레이디 가가와의 콜라보 무대도 계획하고 있을 정도로 다른 클래식 연주자들과는 다른 노선을 걸으며 이같은 파격을 즐기는 편이라 그리 어색한 일은 아니다.

 

 조카라서가 아니라 무대에서 가장 큰 악기인 피아노를 통해 매번 뿜어내는 에너자이저한 선율의 아름다움과 감동의 힘은 하나같이 시의 이미지 이상으로 강렬했다. 바람이 불고 풀잎이 가늘게 떠는가 하면, 소나기가 꽂히며 세찬 파도가 치기도 했으며, 날선 시퍼런 칼날이 번뜩이기도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리고 말은 이렇게 해도 실제로 그들 음악의 우물에 빠져들기엔 내 청음 능력이 턱없이 부족함을 안다. 오는 30일 예술의 전당에서 있을 '디토'의 마지막 공연도 깜냥이 미치치 못해 공짜초대권은 포기할 생각이다.    

 

 

권순진

 


The Flight Of The Bumble-Bee  (왕벌의 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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