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천 성내에서
강릉에서 동해안 J벨트를 따라 포항과 경주를 지나 울산까지 많은 눈이 내린 즈음이다. 또 많은 눈이 올 예보라 피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 지역엔 약간의 비가 올 것이라고 한 이월 둘째 주 월요일이었다. 나는 진해 용원으로 가는 747번 직행버스를 타고 안민터널을 지나 동진해로 향했다. stx조선소를 지나 웅천 성내에 내렸다. 언젠가 그곳을 한 번 들리고 싶었다.
용원 신항만 가까운 안골포왜성은 두 차례 찾은 적 있지만 웅천 읍성은 그냥 스치기만 했지 직접 찾지 못했다. 웅천 읍성은 해안 평지 지역에 있는 읍성으로 우리나라가 일본에 시달린 수난의 현장이기도 했다. 웅천 읍성은 그간 세월에 많이 허물어져 성터만 남은 것을 근래 일부 구간을 복원했다. 예전 객사가 있던 자리엔 초등학교가 들어섰고 나머지 성내는 민가들이 차지했다.
나는 복원된 성문을 둘러보고 동문루에도 올라가 보았다. 웅천 읍성의 전체를 복원시키기엔 세월이 좀 흘러야 되지 싶었다. 웅천 읍성 가까운 곳엔 항일 독립운동가로 평양감옥에서 순국한 주기철 목사 기념관이 지어지고 있었다. 나는 사도마을로 나가는 길을 따라 걷다가 오른쪽으로 야트막한 고개로 올랐다. 효부 경주 이씨와 효자 달성 서씨 부부의 효행을 기리는 쌍효각을 지났다.
고개에 있는 두 모텔 사이로 난 계단을 따라 산언덕으로 올랐다. 그곳은 제포성지로 허물어진 성터였다. 해안가 진해가 조선시대엔 국토의 변방으로 왜구에 시달린 역사의 현장임을 실감하는 성터였다. 정상 언저리는 군부대 관사나 시설물로 짐작되는 하얀 건물이 있었다. 아까 올라왔던 계단을 내려가니 괴정마을이고 제덕마을이었다. 제덕만 앞까지 신항만 매립지가 다가왔다.
제덕 앞 바다엔 어선과 낚싯배들이 여러 척 묶여 있는 가운데 한 배에는 어부가 그물에 쓸 줄을 고르고 있었다. 해안가로 난 차도엔 인도가 확보되어 걷기에 편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기에도 좋을 듯했다. ‘삼포로 가는 길’ 노래비가 있는 길목에서 삼포마을로 내려섰다. 아주 조용한 포구엔 몇몇 횟집이 있었다. 평일이라 그런지 횟집을 찾은 외래 손님은 아무도 없어 한산했다.
포구마을을 지나 다시 차도로 올라 산모롱이를 돌아가니 명동마을이 나왔다. 명동마을 앞 음지도엔 창원해향공원이 솔라타워가 우뚝했다. 우도로 건너는 보도교는 특이한 모양이었다. 마침 명동마을 앞 선착장엔 웅도와 소쿠리섬으로 떠나는 정기 도선이 출항하고 있었다. 나는 해양공원으로 가는 음지교를 건넜다. 신분증을 지니지 않아 공원 입장료와 관람료를 할인받지 못했다.
해양생태전시관을 둘러보고 솔라타워로 올랐다. 엘리베이터를 나가니 27층 꼭대기는 지상 120미터에 해당했다. 나는 약간의 고소공포가 있어 오금이 저려와 바다와 섬을 조망하는데 어지러움을 느꼈다. 평일이라 전망대에 오른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전망대를 내려오니 흐린 하늘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니 우도로 건너는 보도교와 연결되었으나 건너가지 않았다.
음지교를 건너가 명동포구로 갔다. 명동포구는 stx조선소와 인접한 어항이었으나 예전의 명성은 아닌 듯했다. 포구엔 어선에 몇 척 정박해 있고 횟집이 세 곳 있었다. 아까 제덕과 삼포에 이어 세 번째 만나는 어촌 마을이었다. 마을을 돌아가는 길목에 허름한 분식집이 있어 들어가니 노부부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국수는 안 되고 라면은 된다고 해서 막걸리를 한 병과 같이 먹었다.
할머니는 속초가 친정인데 뱃사람인 바깥사람을 따라 진해로 시집와 키운 두 자녀가 교직에 있다고 했다. 바깥사람은 젊은 날 배를 몰아 여수와 목포까지도 다녀왔다고 했다. 분식집 곁에는 바깥주인의 집안 재실이 양옥으로 된 성주 이씨 문중 3층 회관이 있었다. 골목을 빠져나가자 조선소 협력업체 직원들이 이용하는 식당들이 더러 보였다. 공장에선 기계음이 쉼 없이 들려왔다. 14.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