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박거래에는 거액융자가 필수적인데 보통 10년 내외의 장기 융자다.
그 동안 배는 여러 차례 매매되기도 하고 소유주가 파산하기도 한다.
은행은 불안하기 마련이다.
이런 위험부담을 분산시키는 장치가 은행연합인 컨소시엄이다.
그래서 은행들 간에는 컨소시엄 전문 인력끼리의 왕래가 잦았다.
동수도 다른 은행의 해운 담당자들과 안면을 익히며 발이 넓어져 갔다.
이 업무 담당자들 중에는 해당업계에서 평생을 보낸 베테랑들이 많았다.
쏘련의 BAM(바이칼 아무르 철도) 컨소시엄에 참여한 모건 뱅크의 브라운도
그들 중 하나였다. 정년퇴직 후 촉탁으로 일하는 그는 해운과 철도 양쪽에
정통한 전문가였다.
그는 동수가 시베리아 철도에 관심을 보이자 반가워했다.
동수가 운전하는 차가 말죽거리 농장에 들어섰다.
대로에서 곁길로 접어들자 이내 전원풍경이 펼쳐진다.
“한국의 단풍은 참 예쁘군요.
한국이 처음이라는 브라운.
단풍 길을 한참 달리자 나타난 연구소 주변 역시 은행잎으로 노랗다.
총무부장 김 청자가 동수와 브라운을 맞이했다.
40대 여장부가 영접하자 브라운은 약간 의외라는 표정이다.
"정년퇴직 후 세계각지를 여행했습니다만,
이만큼 아담하고 정취있는 장소는 드물었어요. 아름다운 단풍입니다.
그는 한국의 가을을 처음 본다고 했다.
연구소 주변을 둘러싼 백양나무 숲,
배경을 이루는 은행나무 사이에 섞인 단풍나무의 타는 듯한
붉은 색을 마음에 들어한다.
"원하신다면 이곳에서 하루쯤 지내실 수도 있습니다.
연구소에 숙박시설이 있고 또 담 너머가 제 집이거든요.
아름다운 경관을 떠나기 아쉬운 브라운의 마음을 헤아린 동수가
말해주었다.
"그래주신다면야...
희색이 만면해지는 브라운.
"괜찮으시겠습니까? 누님, 불편하시면 저희 집도 좋은데요.
"뭐가 어렵겠어? 있는 방에 재우면 되는 건데. 오라 그래.
"고맙습니다. 덕분에 한국의 가을 정취를 만끽할 수 있게 되었군요.
요란하게 감사하는 브라운.
41살이 된 김 청자는 이제 관록이 붙어 노회한 국제신사 브라운을
위압할 정도로 당당해 보인다.
동수가 은행에 취직하자 서운해 했던 그녀다.
개인적으로 친하기도 했지만 시베리아 탐사 때 보여준 추진력에 반해
진즉부터 극동 연구소에서 함께 일하자고 해왔었다.
그러던 터에 어느 날 외국은행에 간다고 인사하러 오자
서운한 김에 야단쳐 보냈고 그게 마음에 걸려 늘 찜찜했었다.
"얼굴도 안 비치더니 웬 바람이 불었어? 그런데 너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꼬나본다.
"바른 대로 말해. 너 요새 바람피우고 다니지?
뜨끔해진 동수는 사람잡는 소리 말라는 표정으로 인상을 썼다.
"베링 프로젝트 서포터를 모셔온 사람한테 왜 이래요? 게슈타포처럼..
"흐음, 너 알아 둬.
배에 갇혀 살다 처음 세상구경하니까 온갖 데 다 돌아다니는 모양인데
엉뚱한 짓 하고 다니면 연희보다 나한테 혼날 줄 알라구.
식은땀이 흐른다.
여자 코는 사냥개보다 예민하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점만 빼면 그녀와의 대화는 편했다. 대충 얘기해도 감을 잡고
격식을 갖추거나 조리 세워 말해야 하는 부담이 없다.
다급해진 동수는 얼른 브라운을 소개했다.
"금융가에서 인정받는 상담역이시죠. BAM 철도에 관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일부러 찾아야 하는 사람 아냐?
은행가서 베링 프로젝트는 잊어버린 줄 알았더니...
대견한 듯 주억거린다.
조금 전과는 달리 부드러워진 표정.
"연구소 소개를 드렸으면 하는데 1시간 정도 걸립니다. 들어보시겠습니까?
"물론이지요. 미스터 하는 좋은 관광을 시켜준다는 말 외에는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어요. 미리 알면 재미가 줄어든다면서...
베링 프로젝트 개요와 연구소 취지를 설명한 그녀는
UN 회의에서 호평을 받았던 VTR도 보여 주었다.
"이런 방대한 규모의 사업을 개인이 추진한다는 말씀입니까?
브라운은 의아한 기색이다.
"예, 우리 재단은 소요자금의 10%정도는 자체부담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관련국 투자도 있지만 70% 정도는 차관이나 융자로 메꾸어야지요.
아직 10년 가까이 시간여유는 있지만
지금부터 서서히 자금조달 체계를 준비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브라운은 25억 불이나 동원할 능력이 있다는 대목에 감동한 눈치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규모가 커 미국은행들에게 군침을 삼키게 하는 야심적 프로젝트니까요.
또한 신천지 개척은 미국인들 구미에 맞는 주제이기도 하구요.
노회한 금융인의 입에서 자금조달 전망이 밝다는 말이 나오자
김 청자나 동수의 표정이 밝아진다.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뿐, 아직 본격적으로 의논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우선 극동 연구소라는 조직을 이해하고 사람들 얼굴부터 익히도록 하지요.
"그래야지요. 거래의 마지막에는 결국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가장 중요시 한다는 것이 우리 모건 뱅크의 철학이지요.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동수는 숙소와 지리 자료실을 안내했다.
그날 연구소 측과 만찬을 가진 브라운은 이 소장의 박식함에 압도되어
극동연구소나 동수를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리만큼 신중해졌다.
이 프로젝트가 후진국의 돈푼 있는 자들이 벌이는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실감한 모양이었다.
다음 날 동수는 약속한대로 브라운을 위해 치워둔 방으로
숙소를 옮겨주었고 저녁에 몇몇 연구원을 초대해 바베큐 파티도 열어 주었다.
하 정수도 잠시 참석했는데 화제가 우연히 UN사무국의 토마스에 미치자
브라운은 비상한 관심을 나타냈다.
"토마스 프랭클린 씨를 잘 아십니까?
"예. 우리 연구소의 후원자 중 한 사람이고 김 청자 씨의 친구이기도 합니다.
"혹시 그의 집안 내력도 아십니까?
"..... ?"
"모건 뱅크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미국 은행들도 토마스씨가
이 프로젝트를 후원한다는 사실을 알면 협조적인 태도로 나올 겁니다.
그는 건국 유공자 벤쟈민 프랭크린의 직계 후손이거던요.
미국의 각계각층에 그 일족이 미치는 영향력은 막강합니다.
극동 연구소는 막강한 친구를 두셨군요.
누구도 몰랐던 새로운 사실이었다. 가끔 토마스의 소개로
미 정부 인사들을 만난 적은 있지만 대학 동창 관계려니 정도로 생각해왔을 뿐이었다.
브라운은 며칠 후 한국을 떠난다며 조찬을 하자고 연락해 왔다.
동수는 베링 프로젝트 소개자료와 VTR 사본 등의 자료를
이태원에서 구입한 양가죽 케이스에 넣어갔다.
아침의 호텔 식당
구수한 커피 향 속에서 활기있게 움직이는 웨이트리스들.
들어서는 동수에게 손을 흔드는 브라운.
"한국에서 지내기가 불편하지는 않았습니까?
펄쩍 뛰며 부인하는 브라운.
"특히 말죽거리 농장의 하루는 너무 좋았어요.
관광차 들렀던 한국에서 세계적 프로젝트와 인연을 맺게 되어 기쁩니다.
"한번 주선해 보시겠습니까?
"물론. 이정도 규모의 딜은 평생 한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입니다.
어쩌면 이 프로젝트 덕분에 직원으로 복귀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관련 자료를 자주 요청하게 될 텐데 도와주십시오.
"그럼요. 벌써 준비해 온걸요.
양가죽 케이스를 내밀었다. 브라운은 기뻐 어쩔 줄 모른다.
자료나 정보에 대한 개념이 한국인과 다른 브라운은 같은 부피의 돈을 받아도
이 정도는 아니리라 싶을 만큼 감사를 연발하며 아침 식사를 마쳤다.
훗날 모건 은행을 발기인으로 구성되는 차관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경전
지형의 소원은 부친의 배를 타고 항해해보는 것이었다.
그 꿈은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여름에 이루어졌다.
파이잘이 방학을 이용해 소년단 동기들을 초청한 것이다.
소녀는 풍경과 생소한 배안 모습들을 그리며 항해기간을 보냈다.
날아오르는 날치 떼를 습격하는 갈매기 떼 그림이
지켜보던 선원들의 찬사를 받았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르는 날치 떼를
직각 방향에서 날쌔게 덮치는 갈매기 무리를 빠른 필치로 그려낸
크로키는 생동감이 넘쳤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두바이 항은 이국적인 아라비안 나이트의 모습 대신
현대적 항구 풍경이라 소녀는 크게 실망했다.
왕실 숙소에서는 이미 도착한 단원들이 파이잘 형제와 어울려
시끌벅적 떠들어대는 중이었다.
다음 날 오전에 소년소녀들은 왕궁 구경에 나섰다.
몇 갠지조차 모를 많은 방들, 긴 복도에는 대대로 전해 내려온
진기한 물건들이 곳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눈길을 끈 것은 마지막 코스로 들린
왕실 서재의 벽걸이에 걸린 화려한 장검이었다.
사라센 검의 전형인 초생달 모양이 아닌 직선형 장검.
손잡이에 황금색 꽂 무늬가 상감된 장검은 칼집에까지
넝쿨과 잎사귀가 푸른색과 황금색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척 보기에도 굉장한 보검이다.
벤 유수프의 차 마시는 습관은 영국 유학시절 이래의 규칙적 일과다.
오늘은 어린 손님들과 함께 하려고 마지막 관람 코스인 서재에 있었다.
장검을 유심히 살피는 소녀를 지켜보던 유수프가
벽에서 장검을 내렸다.
“위험한 물건이야. 아주 날카롭거든.
몇 걸음 물러서 거리를 둔 유수프가 뽑아들자 대번에 써늘한 한기가 서린다.
예리해 보이는데도 거무튀튀한 칼날은 전혀 번쩍이지 않는다.
벤은 손잡이 쪽을 내 밀었다.
“잠깐 들고 있거라.
얇은 미농지를 검날에 떨어뜨린다.
날에 닿는 부분부터 쪼개진 종이는 이내 두 조각으로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어떤 면도날도 이보다 날카로울 수는 없을 것이었다.
“아마도 중세?
문자를 눈으로 잠시 더듬던 지형이가 중얼거리자 파이잘이 활짝 웃었다.
“맞아, 슐레이만 황제 시대의 걸작이지.
장식 문자라 읽기가 힘든 건데--, 역시 대단해.
함박웃음을 지으며 좋아하고 있다.
“칼집에 새겨진 것과는 내용이 다르지.
벤 유수프는 검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득 새겨진 문자들 얘기였다.
“이 장식용 필체는 정말 아름다워.
그래서 전부터 베껴보려고 했는데 내 재주로는 어렵더군.
피처에 담긴 찬 과일 쥬스를 손수 따라주며 벤이 은근하게 말했다.
“지난 번 그림은 고마웠네. 마드무아젤은 장식문자에 조예가 깊더군.
느닷없는 칭찬에 어색해진 지형은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그래서 말인데 마드무아젤, 부탁을 한 가지 하고 싶군.
이 장검에 새겨진 명문을 좀 필사해 줄 수 있겠는가?
“.... ?
느닷없는 말에 지형은 벤을 잠시 쳐다보았다.
이슬람 서예를 익힌 지형은 고문자 필사가 만만한 일이 아님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문자로서의 용도 외에 삽화, 카펫 무늬 그리고 건축물 장식으로까지 쓰일 만큼 아름답고 복잡한 문양이 아랍문자였다.
그러나 벤 유수프는 경솔하게 이런 말을 꺼낼 사람이 아니었다.
의아한 표정을 본 파이잘이 나섰다.
“지형아, 이번에 바다 그림 있지. 우리 미술관장님이 높이 평가하셨다.
그리고 전에 준 문자그림. 작가가 온다니까 기다리셨어.
그러니 즉흥적인 제안은 아냐.
네가 마침 그 장검에 관심을 보일 줄은 몰랐지. 그것만은 우연이고.
바다 풍경화의 인기는 솜씨보다도 주제에 대한 관심이었다.
인물이나 동물을 그리지 않는 이슬람의 전통 때문에 왕궁에는
바다를 소재로 삼은 작품이 없다.
또한 화선지에 펼쳐진 동양화 기법과 붓글씨가도이색적이었다.
유수프의 제안은 며칠 만에 해치울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방학은 이제 3주도 채 안 남았다.
그러나 왕실 어른의 요청을 거절하기도 부담스럽다.
우물쭈물 난처한 표정의 소녀에게 벤 유수프가 미소를 보냈다.
“이거 엉뚱한 부탁으로 곤란하게 만들었나 보군.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해요.
두바이 항에서 하역 중이던 동수는 지형의 전화를 받고 의아했다.
벤 유수프 왕자는 ‘신중한 벤’ 으로 불리는 신사다.
그런 사람이 학생의 방학기간까지 무시하며 강요한다?
원하는 게 작업인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지....
1항사에게 하역 지휘를 맡긴 동수는 두바이 왕궁을 찾았다.
왕실은 베링 사업단의 후계자인 그를 귀빈으로 맞이했다.
소년단도 함께 한 오찬에서 유수프는 동수와 소년단이
두바이와 베링 자치주 사이의 가교가 되어주기 바란다는 환영사를 했다.
오찬을 마친 동수와 벤은 커피 테이블을 사이에 놓고 앉았다.
“제 딸의 보잘 것 없는 재주를 높이 평가하신다는 말에 기뻤습니다.
벤 유수프의 우아하게 만류하는 제스처.
“자식을 가장 모르는 것은 아버지라는 말도 있지요.
따님의 재주는 결코 보잘 것 없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 미술관장이 섭섭해 할 겁니다.
“하지만 그 아인 학생입니다. 말씀하신 일은 제법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라
개학 전까지 끝내기 어려울 수도 있다던데.
“ 그 부분에 대해 설명드릴 것이 있었는데 부친께서 오셨으니
말씀드리기 편하군요.
의외의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벤
지긋이 응시하는 동수.
“제 큰 아이를 미국의 보딩 스쿨로 보낼 계획입니다.
초우트 하이스쿨에 입학 예정인데
혹시 따님을 그쪽으로 유학시킬 의향은 없으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전혀 뜻밖의 제안.
초우트라면 미국의 명문 사립학교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든다.
신청한다고 누구나 입학할 수 있는 학교가 아니다.
여간 마음에 들지 않고서는 꺼내기 어려운 말이었다.
“자식을 그렇게까지 생각해주시니 기쁩니다.
하지만 그 녀석 어미와도 의논해 봐야 하고, 게다가...
동수는 잠시 말을 끊었다.
미국 유학은 생각해본 적도 없다.
어린 시절을 외국에서 보내는 건 생각할 여지가 많은 문제였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물론 삼촌, 이모를 자처하는 연구원들도 있다.
이 문제는 그들의 청문회(?)를 거쳐야 하는 사안이다.
이 자리에서 결정할 만큼 가벼운 문제가 결코 아니었다.
“제가 아버지이기는 합니다만...”
예멘산 커피를 음미하며 잠시 침묵하던 동수가 뚜벅 말했다.
“다른 식구들 말도 들어보아야 합니다. 극동 연구소에는 녀석을
조카로 여기는 사람이 수십 명쯤 되지요. 아버지랍시고 저 혼자
결정했다가는 베링 Project에서 쫓겨날지도 모를 형편이라고나 할까요.
난처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벤 유수프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피어난다.
그 미소는 이내 유쾌한 웃음소리로 폭발했다.
마음에 든 소녀가 고국에서도 역시
아낌 받는 존재임을 확인한 흐뭇한 웃음이었다.
동수도 이내 따라 웃기 시작했다.
한참을 웃고 나서야 두 남자는 진정했다.
“알랄라일 알라 (알라는 위대하시다)
문득 유수프가 읊조린다. 표현하기 어려운 친애의 감정이 솟구칠 때
무슬림들은 자기도 모르게 아랍어로 말한다.
유수프의 읊조림에는 그러한 친애의 울림이 담겨 있었다.
“알랄라일 알라”
그 진솔한 마음이 와 닿은 동수는 순 아랍식으로
이마와 가슴에 손을 대며 고개를 숙여 화답했다.
“우리 무슬림들은 아들의 친구 또한 자식으로 여깁니다.
주변 사람들 역시 따님을 그토록 아낀다니 기쁘군요.
사실 따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캡틴 하가 부럽습니다.
동수는 벤 유수프가 따듯한 부성애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사려 깊은
남자임을 깨달았다. 자녀 교육에 이 정도로 정성을 쏟는 사람이
나쁜 사람일 리가 없었다.
인간적 신뢰가 솟아난 동수는 친근한 어조로 제안했다.
“ 왕자님의 호의는 돌아가 의논해보겠습니다.
일단 지형이한테는 일을 시작하라 일러두지요.
단, 작업이 끝나지 않더라도 개학 전까지는 보내주셔야 합니다.
유수프도 흔쾌히 동의했다. 어차피 곁에 두고 지켜 볼 핑계거리로 제안한 일이었기에 작업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왕궁에서의 사흘째 아침.
일찍 일어난 지형은 간단한 체조 후 숙소주변 산책에 나섰다
왕궁에서 지내며 시작한 일과였다.
소년단원들은 어제 돌아가 지형이만 남았다.
두바이 시내에 있는 왕궁은 사막 한 복판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비교적 개방적인 두바이에는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도 자주 보인다.
산책을 마치고 간 식당에는 일찍 출근한 직원 몇 명이 식사 중이다.
트레이에 담아먹는 간단한 뷔페.
극동 연구소 식당과 다른 점은 남녀를 구분하는 칸막이 정도.
계란과 샐러드, 수프, 토스트를 담은 식판을 들고
안면이 생긴 직원들과 눈 인사를 나누며 여성 칸으로 갔다.
오늘은 장검의 명문 필사작업 첫 날.
장검이 걸려 있던 서재가 작업장으로 제공되었고
커피 등 음료수는 식당에서 갖다 먹을 수 있다.
파이잘은 시종을 붙여주려 했지만 질색하는 바람에
상세히 내하는 것으로 끝냈다.
묵직한 장검을 흑단목 책상에 내려놓고 감상하던 지형은 우선 손잡이에
상감 처리된 문자부터 종이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욕에 넘쳐 시작한지 불과 30분도 안되어
찢어져라 하품을 해대고 있었다. 이게 뭐야...?!
“대단히 위대하며 정의롭고 존경스러운 제국의 군주, 투르크인과 아랍인과
비 아랍인 왕들의 우두머리, ---- 두 대륙에 드리워진 신의 그림자-- 운운
아라비안나이트 풍의 신비한 이야기쯤을 기대했던 소녀는 실망했다.
거창하지만 진부하고 상투적인 찬사의 나열이었다.
대부분 꾸란 구절, 하나 같이 지루했다.
참다못한 지형은 살짝 빠져나가 시내를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하지만 히잡도 쓰지 않은 이교도 처녀가 모스크를 기웃거린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온 파이잘에게 제깍 견인 당한 뒤부터는 관광에도 흥미를 잃었다.
필사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어진 소녀가 밤낮 가리지 않고 진행한 덕분에
일은 빠르게 진척되어 일주일 이상 걸릴 줄 알았던
초벌 필사가 불과 나흘 만에 끝났다.
초고를 유수프에게 가져간 것은 닷새째 되던 날이었다.
“오 대단하군, 벌써 다 되었나?”
유수프 왕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일차로 다 베꼈기에 편집을 의논드리려구요.
20여 쪽에 달하는 원고를 받아든 유수프가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내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나는 검신에 새겨진 것들만 조금 읽다 포기하고 말았다네.
줄도 안 맞는데 빽빽이 써 놓은 글자들이라 어지러워 못 읽겠더라구.
이렇게 옮겨 놓으니까 겨우 좀 알겠어.
그런데 분량이 이렇게나 많았던가?”
“예. 손잡이의 꽃 무늬까지 모두 문자거든요.”
“아하, 그랬구먼. 나는 그게 그냥 그림인 줄만 알았어."
그가 오해한 것도 당연했다.
아랍어에 능통하더라도 왕조 시대의 장식용 서체까지
통달한 사람은 드물다.
오늘 의논하려는 주제는 필사본 편집이었다.
필사본이니만큼 서체는 당연히 원본과 같아야 하지만
삽화나 여백 처리 등 미리 정해야 하는 문제들이 많다.
편집 방식에 따라 작업시간도 달라지지만 필사본의 가치 또한 달라진다.
여백에 삽화를 겸한 문자장식까지 곁들이면 책은 고급스러워지겠지만
상당한 시일이 필요한 작업이 된다.
그러나 지형은 장검의 우아한 문자들을
싸구려 Paper Back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는 데까지는 해본다는 기분으로
제대로 된 장식체를 써보자고 제안 했다.
유수프로서는 만족스러웠지만 조금 당혹스럽기도 했다.
사실 이 일은 소녀와 지낼 시간을 만들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소녀가 제시한 안은 필사본에 큰 가치를 부여할지도 몰랐다.
이라크 전 이후 페르시아와 오스만의 소장품들이 암시장에 흘러나오는 중이고
그런 상품들은 매니아 층이 형성될 만큼 인기를 끌고 있었다.
“슐레이만 대제의 장검명 필사본”
이 정도 제목으로 경매장에 나타나면 호사가들이 몰려들 것이고
어쩌면 상당한 가격이 형성될지도 몰랐다.
고서 필사란 까다로운 작업이다. 우선 펜부터 철필이 아닌 거위 깃과 대나무 펜
(원래는 갈대, 그 중에서도 파피루스로 만든 것이라야 한다.) 등
여러 가지가 필요하고 종이는 양피지라야 했다.
세월이 흐르면 변색되는 화학잉크 대신에 자연 염료도 필요하다.
소녀가 가져온 소요자재 리스트를 보고나서야
유수프는 자기가 이 일을 너무 만만히 여겼음을 깨달았다.
다행히도 이 분야에 발이 넓은 미술관의 도움으로 꽤 까다로운
품목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구할 수 있었다.
미술관 사무실에는 고본 제작이나 수선에 일가견이 있는
마이스터 급 기능공 들이 있었고 그들은 찾는 물건들을 구해 주었다.
개인이 구하려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이런 저런 준비로 늦어진 필사본 작업을 시작한 것은
일 주일이나 지난 뒤부터 였다.
오랜만의 서예 작업이라 첫 날은 보통 잉크로 종이에 연습했다.
펜이 차츰 손에 익으며 영어 필기체의 매끄러움이 사라지고
벌레가 기어다니는 모양의 쐐기형 필체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다음 날부터 종일 서재에 틀어박혀 식사 때만
얼굴을 내미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밥 먹기보다 독서를 더 즐기는 딸이
집 지킴이가 될까 우려한 모친이 단전호흡 도장으로 끌고 다닐 정도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행한 열성 덕분에 작업은 빠르게 진척되어
필사본은 불과 닷새 만에 완료 되었다. 대충 작성했던 초고와는 달리
줄까지 맞추어 제대로 정서한 원고는 열 쪽 남짓한 분량으로 줄었다.
표지를 달고 삽화도 그려 넣어야 하는 미완성 작품이지만
생전 처음 만들어 본 책이라 흐뭇했다.
서재를 말끔히 치우고 방으로 돌아온 소녀는
지난 닷새 간의 피로때문에 죽은 듯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새벽, 지형은 산책을 나섰다.
아침 예배(쌀라뚤-파즈르)를 알리는 아잔 소리가
장엄하게 울려퍼지는 왕국의 아침은 경건하다.
조반을 마치고 서재로 온 지형은 느긋한 기분으로 필사본 원고를 펼쳤다.
채색을 넣어 양피지에 옮겨 쓴 장식 문자들은 자신이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감상하듯 흐뭇한 기분으로 읽어 갔다. 어릴 때부터 낭독하도록 배워온
소녀는 소리내 읽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다.
읽어가다 문득 이상함을 느낀 그녀는 방금 지난 부분을 다시 읽어보았다.
“선지자의 아내 카디자가 보낸 자이드 이븐 무함마드는 선지자의
사촌 동생 자이납 빈트 자흐쉬와 결혼하고,
어쩐지 기억과 달랐다. 갸웃대다 그 대목을 메모하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다른 부분은 또 나왔다.
“고아들의 복지를 도모함은 커다란 선을 행함이니라.
그리고 너희가 그들과 한데 섞인다면 그들은 너희의 형제이니라.
고아가 아니라 고아들로 되어 있고 다른 부분도
의미는 비슷했지만 단어의 배열순서가 달랐다.
그렇게 기억과 다른 부분을 메모한 것이 어느새 열 군데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꾸란과 대조해 보니 역시 달랐다.
꾸란은 출처가 불분명하고 기록과정도 복잡한 성경과는 다르다.
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알라의 사도께서 들은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게다가 예언자는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문맹이었다.
자의적 첨삭이나 여과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들은 그대로를 전할 수밖에 없었기에 꾸란은 알라의 말씀 그대로였다.
따라서 꾸란은 문장이나 단어는 물론 토씨 하나 고치거나 바뀔 수 없다.
그래서 꾸란은 아랍어 본에만 정통성이 인정되었다.
꾸란의 번역 작업이 지지부진한 것도 무슬림들의
이러한 전통적 사고방식 때문이다.
이것은 비록 슐레이만 시대라고 해도 절대로 다를 수 없는 원칙이었다.
더군다나 황제가 사용했을지도 모르는 보검에 새긴 구절이 다르다?
이건 예삿일이 아니다...!
생각에 잠긴 지형은 오전 내내 필사본을 반복해 읽었고 어느덧 외워버렸다.
꾸란에서 발췌된 익숙하던 구절인데다 책 벌레였기에 금방 외운 것이다.
작업에 몰입 해 있을 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말죽거리 농장이 좁다고 싸 돌아다니던 소녀에게는 서재가 갑갑했다.
서재를 벗어나 왕궁 주변을 거닐면서도 그녀는 이미 외워버린
필사본 내용을 시종에게 부탁해 구한 히잡 속에서 계속 웅얼거리고 있었다.
왕궁과 왕족들의 집은 주로 북쪽에 있고 일반인들이 사는
타운은 남쪽 해변에 몰려있는 것이 두바이 시가지 풍경이다.
왕실 건물들과 타운을 구분하는 울타리나 무슨 경계선이 있는 것은 아니고
일반 상가나 주택과 온통 뒤섞여 있다.
수백 년에 걸쳐 하나 둘씩 늘어난 왕실 건물과 편의 시설들이 함께 어울리며
형성된 시가지는 계획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조성된 시가지와 달리 혼란스럽다.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식당들 그리고 상점들은 대부분 타운에 있다.
오전 내내 돌아다닌 소녀는 파김치가 되어 숙소로 돌아왔다.
점심도 거른 채 웅얼대며 타운과 왕궁 근처를 내내 싸돌아다녔으니
지칠 만 도 했다.
‘장검과 꾸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소녀에게서 이 화두는 잠시도 떠나지 않았지만 알아낸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늦은 점심을 마친 지형은 탁자 위의 장검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필사에만 골똘해 미처 눈여겨보지 못했던 여기저기의 작은 흠집 들이
한낮의 햇살에 환히 드러나 보였다. 수백 년의 세월에 걸쳐 숱한 전장을
거쳐왔을 장검이다. 검집이나 손잡이에 흠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고 보니 생채기를 보수 한 흔적도 여러 곳 보인다.
어쩌면 얼룩이나 해묵은 때로 덮여 잘못 읽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아니, 틀림없이 그럴 것 같았다.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장검을 욕실로 가져갔다. 적신 타올로 검 집을 살짝 닦아보았다.
조금 깨끗해진 것 같기는 했지만 차이를 알기 어렵다.
검집을 쓰윽하니 길게 닦아보았다. 때가 새까맣게 묻어난다.
그리고 닦지 않았을 때는 못 보던 문자들이 희미한 조명 아래 나타나 있었다.
새로운 문자라니?
색다른 것을 발견할 기대는 있었지만
다른 문자가 나타나는 것은 예상 밖의 사태였다.
장검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서재로 돌아온 소녀는
환한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에 놓고 다시 보았다.
그런데--- !
아까 보이던 문양들이 없다. 너무 집착하는 바람에 헛것을 보았단 말인가?
멍해 있던 지형은 검 집을 젖은 타올로 다시 문질러 보았다.
그러자 아까 보았던 문자들이 서서히 드러났다. 상황은 명백했다.
젖었을 때만 보이는 또 다른 명문이 있는 것이다.
검집은 물론 손잡이와 날카로운 검신까지 통째 샴푸 목욕을 시킨
지형은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깨끗해진 검 집과 손잡이, 그리고 검신에서 모두 새로운 문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물기가 말라가면서 새로운 문자 역시 희미해졌기에
이따금씩 젖은 타올로 문질러가며 오후와 그날 밤을 하얗게 새워 베꼈다.
원래의 명문과 내용은 달랐지만 꾸란에서 발췌된 구절과 슐레이만
황제의 행장기가 섞여있는 점은 비슷했다.
날 밤을 새운 지형은 다음 날 늦은 조반을 먹으며 새로 얻은 구절들을
되새겨 보았다. 아무리 생각 해봐도 숨길 이유가 없는 내용이었다.
꾸란을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구절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숨은 문자는 왜 평소에는 안 보 였을까? 신비스러웠다.
그렇다면 숨겨진 문자는 과연 이것뿐일까?
물에 반응했다면 불에는---?
기회를 엿보던 지형은 장검을 들고 왕궁 옥상으로 숨어 들어갔 다.
오전 8시만 넘으면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는 사막이다.
금속을 직사광선에 내놓으면 이내 만지지도 못할 만큼 뜨거워진다.
‘엇 뜨거’
그늘에서 잠시 기다리다 검집을 집으려던 소녀는 질겁하고 손을 움츠렸다.
이미 뜨거워진 검집에는 기대했던 대로
새로운 문양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 날부터 사흘간 지형은 옥상에서 장검을 일광욕 시키며 필사를 진행했다.
왕실의 보물이 샴푸 목욕에 일광욕까지 하는 현장을 들킨다면 ---!
난처한 사태가 벌어질 것이 뻔했다.
눈치작전 끝에 세번째 필사본을 만드는데 성공한 지형은
완전히 지쳐 떨어지고 말았다. 필사보다 몇 배 힘든 눈치 작전 때문이었다.
새로운 필사본이 두 개 더 생겼지만 장검 명문의 의미는 여전히
오리무중 이었다. 그러나 물이나 불과 접촉해야만 드러나도록 숨긴 데는 함부로 드러나면 안될 만한 사연이 반드시 있을 것이란 생각에
3개의 필사본 초고를 잘 간수했다.
원래의 작업 대상인 첫 필사본의 표지와 삽화 작업에 들어간 지형은
나흘 만에 모든 작업을 마치고 미술관으로 원고를 넘겼다.
장정 까지 산뜻하게 마친 필사본을 대형 봉투에 담아 서재에 모셔놓고
유수프 왕자와 파이잘 형제에게 연락했다.
늦어도 모레는 출발해야 개학날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으므로
오늘 저녁과 내일 밖에는 시간이 남지 않았다.
이제 지형에게는 명문의 사연 못지않게 궁금한 것이 장검 자체의 유래였다.
그만큼 깊은 안 배가 숨겨진 보검이라면 사연이 평범할 리 없기 때문이었다.
왕실에서 장검을 소장하게 된 사연을 묻는 지형에게 유수프가 말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알려진 영국인이 있었지.
영화도 만들어졌으니 본 적 있을지 모르겠군.
장검은 그 사람이 소장하던 물건이었어.
파이잘 형제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어떻게 오스만 황제의 보검이 영국인 소장품이 되었어요?
아이들에게 옛날 얘기를 들려주는 것이 즐거운 듯
유수프는 느긋한 표정으로 대추야자를 집어먹으며 이어 나갔다.
“아랍 독립을 추진하던 조직과 영국은 1차 대전 초기만 해도 밀월 관계였지.
로렌스가 활동한 것도 그 시기였고,
그런데 로렌스는 다마스커스 진격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의 요르단 왕실이 된 메디나의 파이잘 왕자와 헤어졌지.
사이크스-피코 조약을 로렌스가 알았기 때문이었어.
베두인들을 기만하고 자국 정보장교인 자신마저 속인 조국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더 이상 파이잘 왕자를 대하기 힘들다는 이유였어.
“사이크스-피코 조약이 뭐죠?
잘랄이 물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태인과 아랍에게 각각 한번씩,
이중으로 팔아 먹은 영국의 조약이지. 일종의 국제사기 사건이야.
그 때문에 팔레스타인 관할권이 복잡해져
결국 지금의 이스라엘 문제로까지 이어진 거지.
“로렌스도 그 일에 관계했어요?
“아니, 전혀. 런던의 정치가들 작품이었다고 해.
일개 장교에 불과했던 로렌스는 그 사건에 하등의 책임도 없었어.
이 점은 누구보다도 파이잘 왕자가 잘 알고 있었지.
하지만 결벽증이 있던 사람이라 파이잘의 그러한 관용조차도
받아 들이지 못할 만큼 스스로와 조국에게 화가 났었다고 해.
만류하는 전우들을 뿌리치고 떠나는 그에게 파이잘은
차고 있던 고색창연한 장검을 선뜻 풀어 전별 선물로 주었어.
하심가, 즉 예언자의 가문인 왕가로만 대대로 전해오던
조상 전래의 보검을 말이야. 바로 이 검이지.
유수프는 장검을 어루만졌다.
“대령으로 제대한 로렌스는 신분을 속이고 사병으로 공군에
재 입대해 어딘가에서 전사했다는데 알려지지 않았어. 가명을 쓴 탓이지.
그는 친척이 없었어.
먼 친척 할머니 한 분이 유품을 보관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 장검을 구입해온 것까지가 내가 아는 전부라네.
그것이 최근 100년간의 사연이었다. 그러나 지형이 궁금한 것은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 장검이 제작되던 시대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더 이상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가는
장검에 저지른 만행이 드러날까 조심스럽다.
어쩌면 거기까지는 유수프 역시 알지 못하는 부분일지도 모른다.
“몇 주 동안 가까이 하던 물건이라 애착이 가요.
앞으로라도 장검 얘기가 더 나오면 알려주실 거죠.”
유수프가 대답하기 전에 파이잘이 먼저 나섰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나 오늘 감동했어.
네가 만들어 준 필사본은 아마 우리 왕실이 대대로 간직할 보물이 될 거야. 그렇죠 아버지?
유수프와 잘랄도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시했다.
“두바이에는 우리 문자를 마드무와젤 만큼 다룰 능력을 갖춘 인재가 없다네.
외국인이 우리의 문화유산에 더 익숙한 것을 보니 부끄러웠네.
유수프는 다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답례로서는 부족하지만 몇 가지를 준비했네.
하 선장님과 연구소의 삼촌, 이모들께 전해 주면 고맙겠네.
유수프가 연구소의 삼촌 이모를 들먹이자 파이잘과 잘랄이 킥 웃었다.
말죽거리 농장에서 걸핏하면 소녀를 집적대던 연구원들이 생각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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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예멘 커피를 맛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모카 커피와는 어떤 차이?
커피의 원산지는 이디오피아라고 하며 이게 홍해를 건너 예멘으로 넘어와서 이슬람권에 전파된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 때는 이슬람에서 커피무역을 독점하였는데 이때 예멘의 모카항을 통해서 유럽으로 퍼져나갔기 땀시
보통 커피하면 모카로도 통할정도 였다고 합니다. 저도 예멘산 커피는 아직 맛을 못봤습니다만
보통 예멘 마타리, 이스마일리, 히라지,사나니등이 유명하다고 합니다.
제가 생두를 구하는대로 예멘커피 한잔 대접하겄습니다.
보통 커피전문점에서 마실수 있는 '카페모카'라는 것은 에스프레소에 쵸코렛시럽과 우유를 섞어 쵸코렛향이 나게 한 걸 말합니다.
@오현재 카페모카의 모카는 예멘 모카항과는 관련이 없고 그냥 에스프레소에 변화를 준 커피명칭으로 쓰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모카는 커피의 대명사가 될 정도입니다. 또 아는 체 해 봣네요.ㅎ
@오현재 마타리, 이스마일리, 히라지등은 커피산지아니면 농장이름입니다. 우리나라 성주참외, 고창참외라 부르듯이 ㅎㅎ
@오현재 탱큐! 예멘 커피의 스토리가 흥미롭습니다.^^
오르한 파묵이 노벨상을 받았던 "내 이름은 빨강"이 생각납니다.
정작가님의 금회 내용은 그 소설의 이슬람 세밀화가들 얘기를 상기시킬 정도로 분위기가 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