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한 애도
<방어가 제철>에서 [방어가 제철] 문장들
엄마라는 세상이 무너졌다.(38쪽)
십수 년이 지났는데도 사진 속 오빠는 한결같다. 햇빛 아래에서 왼쪽 눈을 조금 찡그리며 미소 짓고 있다. 시간은 오빠의 뒷덜미를 잡지도, 손톱을 세워 할퀴지도 않는다. 시간은 오빠 앞에서 무력하다. 그건 다행이었고 그래서 참담한 일이었다. (39-40쪽)
회에 곁들일 기름장, 생와사비, 무순, 백김치, 파래김이 차례대로 상 위에 놓이는 동안 정오와 나는 말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다시 미닫이문이 조용히 닫혔다.(43쪽)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와 있는 정오가 불편할 때도 많았지만, 나는 그가 식빵에 딸기잼을 바르고 슬라이스 치즈 한 장을 얹어 반으로 접으준 샌드위치를, 달걀과 김치를 넣고 끓여준 라면을 셀 수 없이 먹었다. 집에서 뭘 먹을 때면 우리는 늘 셋이 모여 같이 먹었다.(46쪽)
무엇이 그토록 그 두 사람을, 그리고 우리 셋을 서로 끌어당기게 했는지 지금도 정확히는 모른다. 우리가 아버지 없는 아이들이었다는 것, 일찍부터 엄마 없는 집에서 남아도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익히 알았다는 것, 뭐 하나 특출난 것은 없지만 특별하기를 원하는 평범한 아이들이었다는 것,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볼 뿐이다. 우리 세 사람은 안전한 집에 모여 앉아서 멀리 떠나 있기를 바랐던 것인지도 모른다.(47쪽)
엄마가 떠나야만 했던 어떤 세계. 언젠가 엄마도 술잔을 기울이면서, 나날이 커가는 오빠와 나를 보면서 인생이란 참 알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 이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누구나, 그 속을 다 알 수 없는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 알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 끝내 알 수 없을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다는 것, 그것만을 알아갈 뿐이다. 어렴풋하게, 아주 더디게.(60쪽)
가끔 생각한다. 내가 왜 오래전 연락이 끊어진 정오의 연락처를 사방팔방으로 수소문해 엄마의 장례식 소식을 그에게 전했는지, 그가 왜 다시 내게 연락을 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제철 음식을 사주었는지, 우리가 왜 3년 동안 만남을 이어갔는지. 생각의 끝에는 언제나, 그 일들의 이유가 모두 같으며 그러므로 단 하나의 이유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곧 방어가 제철인 계절이 온다.(70-71쪽)
나는 오래전 나 홀로 은밀하게 간직했던 장면 하나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제야 내가 그 순간을 오롯이 그리워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72쪽)
‘나’는 오빠를 먼저 떠나 보냈고, 아들을 잃은 슬픔을 술로 달래며 살았던 엄마를 떠나보냈다. 사춘기에는 오빠와 ‘정오’가 ‘나’의 세계였다.
정오는 친구의 장례식, 친구 엄마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차마 참석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 그렇게 20여 년이 흘렀다. 그 사이 ‘나’는 엄마가 운영했던 반찬가게에서 이모들과 일을 하면서 지냈다. 예중을 거쳐 미대를 가고 싶었던 꿈많은 ‘나’는 오빠와 엄마, 그리고 ‘정오’와의 헤어짐으로, 그리고 그리움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문자가 왔다. ‘잘 지내?’
정오로부터 온 문자였다. 두 사람은 그 후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만났다. 그리고 제철음식을 함께 먹었다. 봄에는 각종 봄나물과 냉이된장국, 쑥튀김, 두릅을 먹었고, 여름에는 삼계탕과 콩국수, 평양냉면, 가을에는 삼치구이, 대하찜, 겨울이 되면 방어를 먹었다. 그렇게 3년을 반복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않았다.
제철에 먹어야 할 음식들이 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3:1). 만약 제철을 놓치면 일년을 기다려야 한다. 애도도 마찬가지다.
안윤 작가는 애도의 제철, 충분한 애도 기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와 ‘정오’는 3년을 계절별로 만나 제철 음식을 먹으며 ‘나’의 오빠이자 ‘정오’의 친구, ‘나’의 엄마를 기억하고, 그들이 공유했던 과거를 추억하였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을 반복하였다, 마치 예전(liturgy)처럼.
교회는 매주일 성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애도한다. 공동체 일원이 함께 같은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같은 신앙고백을 한다. 늘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반복되는 성찬 예식 속에 불현듯 가슴이 뜨거워지거나, “깜짝 놀라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 87쪽)는 경험을 할 것이다.
‘나’와 ‘정오’가 3년 동안 계절마다 만나 제철 음식을 먹으며 지난 일을 추억하는 일은 추모였고 성찬이었다.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지 벌써 1년 하고도 3개월이 훌쩍 지났다. 윤석열 정부는 국가 애도기간을 일주일로 정했지만, 영정 사진도, 고인의 이름도 없는, 실체 없는 애도였다. 누가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도 밝히지 않은 채, 심지어 유가족도 없이 애도 기간을 보냈다. 그 일은 유가족은 물론이고 온 국민의 울분을 자아냈다.
‘나’는 오빠의 죽음의 원인이었다. 오빠의 죽음은 엄마의 죽음의 원인이었다. ‘정오’는 친구의 죽음을 직면할 수 없었고, 친구 엄마의 장례식장에 나타날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늦었지만 두 사람은 3년 간 계절마다 만나 제철 음식을 먹었고, 마지막 방어회를 먹으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그들의 애도 기간은 끝이 났다.
첫댓글 깊은 슬픔과 먹먹한 아픔이 느껴집니다..ㅜ
너무 아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