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야기구원외(秋夜寄丘員外)
편지
위응물(韋應物, 737~804)
때는 마침 가을밤, 그대가 그리워서
차가운 바람 속을 시 읊으며 걸었지요
인적 없는 산속에 솔방울 떨어지는데
임자도 응당 아직 잠 못 들었겠지요
懷君屬秋夜(회군속추야)
散步詠凉天(산보영량천)
空山松子落(공산송자락)
幽人應未眠(유인응미면)
위응물이 절친한 친구인 구단(丘丹)에게 보낸 시다. 가을밤에 문득 친구가 그리워
시를 써 편지로 전했다. 나도 그대가 그리워 함께 읊던 시를 떠올리며 산책하는
데 그대 역시 조용한 산속에서 잠 못 이루고 있을 것이라 말하며 담백한 우정을
나눈다. 구단은 벼슬을 버리고 린핑산(臨平山)에 들어가 도를 닦고 있다. 이 시를
본 구단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露滴梧葉鳴 秋風桂花發 中有學仙人 吹簫弄山月
(노적오엽명 추풍계화발 중유학선인 취소농산월)” ‘오동 잎에 이슬 맺히는 소리/ 가
을바람에 계수나무 꽃 피고/ 그 사운데 신선 공부하는 이 있어/ 피리 불며 산과 달
을 희롱하네’ 1300년 전 도사(道士)들이 주고받은 편지다.
[작가소개]
위응물[ 韋應物 , wéi yīng wù ]
<요약> 당나라 때 관리, 시인
시대 : 당나라 시기
출생 – 사망 : 737년 ~ 792년
<문학에 조예가 깊은 집안 태생>
경조(京兆) 만년(萬年, 지금의 산시(陝西)성 시안(西安)) 사람으로 한족(漢族)이다. 서한(西漢, 전한) 시기에 이미 관중(關中, 지금의 산시(陝西)성)으로 이주해 왔던 그의 집안은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많은 인물을 배출했고, 특히 문학 방면에 인물이 많았다.
『구당서』에서는 위(韋)씨 가문에 대해 “당나라 이래로 씨족이 왕성했는데, 위씨 가문에 비할 가문은 없을 것이다. 그들의 효와 우애, 사와 학문은 칭송받았고, 그들의 후손들도 음률에 밝았으며, 역사와 저술에도 남달랐다.”고 평하고 있다.
그는 15세에 삼위랑(三衛郎, 경호책임자)이 되어 현종을 가까이에서 섬겼고, 뒤에 경조부공조참군(京兆府功曹參軍)이 되었다.
궁궐에 들어간 이후 왕의 여행을 수행한 그는 호방하고 의협심과 정의감이 강하고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성품 때문에 간혹 마을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바람에 고향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도 했다.
안사의 난이 터져 현종이 촉 지방으로 피난을 떠나자 위응물도 실직하여 유랑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그는 이때부터 공부에 열중했다. 욕심을 줄이고 항상 “향을 피우고 바닥을 쓸어 놓은 뒤 앉아서” 공부했다고 한다.
<백성을 아끼는 정치를 하다>
위응물은 대종 광덕(廣德) 2년인 764년부터 덕종 정원 7년인 791년까지, 악(鄂, 후베이성 내)현령, 원외랑(員外郎), 저주(滁州, 지금의 안후이(安徽)성 추저우시) 자사, 강주(江州, 지금의 충칭(重慶)시) 자사, 좌사낭중(左司郎中), 소주(蘇州, 지금의 장쑤성 쑤저우시)자사 등 여러 벼슬을 역임했는데, 거의 30년간 대부분의 시간을 도성 장안(長安, 지금의 시안(西安))이 아닌 지방 관사에서 보냈다. 세간에서는 그를 ‘위소주(韋蘇州)’, ‘위좌사(韋左司)’라고 불렀다.
지방관으로 있는 동안 그는 직책에 충실했고, 정치를 간소화하여 백성을 아꼈다. 자신을 돌이켜 반성하며 자신이 열심히 일하지 않은 것을 뉘우치고 쓸데없이 녹봉을 소비한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그는 이런 심경을 시로 남겨 후세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덕종 정원(貞元) 7년인 791년에 소주자사의 임기가 끝나 퇴직한 그는 새로운 임무를 받지 못했고 생활에 쪼들렸는데, 장안으로 돌아갈 여비도 없어서 소주의 무정사(無定寺)에서 기거하다가 다음 해에 55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시풍>
위응물은 산수전원시파(山水田園詩派) 시인으로, 후세 사람들은 왕유, 맹호연, 유종원 등과 함께 ‘왕맹위류(王孟韋柳)’라 불렀다.
그의 시풍은 평안하고 고요하고 훌륭하고 심원했는데, 그의 산수시가 묘사한 풍경은 매우 아름다웠고 느낌은 아주 세밀했으며, 참신하고 자연스러움과 함께 생명력이 넘친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은거 생활을 묘사하는 것에도 뛰어났는데, <서새산(西塞山)> 같은 시는 영상미가 뛰어나고 광활하고 웅장하며 호방함을 보여준다.
그의 전원시는 민간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정치적 성향이 농후한데, 대표작은 <관전가(觀田家)>이다. 그리고 비분강개하는 작품도 썼는데, 어떤 시는 사상이 부정적이고 고독하고 적막하기도 하다.
위응물의 시는 모두 장편이고 7언가(言歌)의 음률에 어울린다. 이 밖에도 작은 사(詞) 작품을 즐겨 썼다. 현재 10권의 『위강주집(韋江州集)』, 2권의 『위소주시집(韋蘇州詩集)』, 10권의 『위소주집(韋蘇州集)』이 전해진다. 산문은 거의 한 편 정도만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위응물 [韋應物, wéi yīng wù] (중국인물사전)